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자유는 내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데서 기인합니다.

어쩜 어느 선사의 말씀처럼 떠남은 다시 돌아오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며

안에 있으되 밖에 있기도 하며 밖에 있지만 안에 있기도 한 것. 그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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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이면 순위가 생기나 봅니다. 인터넷에서도 수 많은 서열이 있으며

그 서열에 따라 각종 재화가치가 매겨지고 이동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이면 대화를 합니다.

모임에서 기회를 찾는 기업의 활동은 단순한 게시판에서 글과 답글, 댓글들, 추천수들..

그러면서 이를 비즈모델로 한 전세계의 게시판을 모아놓겠다고 한 사이트도 있었지만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다음의 까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들은 프리챌의 실패이유를 무리한 유료화의 집행으로 꼽습니다.

프리챌이 유료화의 총대를 메면서 결과적으로 네오위즈의 아바타 유료화가

성공하고 지금의 사이월드가 도토리를 팔 수 있었지요.

이제 포스트 싸이는 어디일까요.

그에 앞서 전 프리챌의 실패이유를 너무나도 강력한 운영자의 독점적인

권한에서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당장일 수도 있지만 패착의 귀로라고 말이죠.

최고결정권자의 잘못된 독단이 전도유망한 인터넷 기업을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다음까페에서 그런 경우를 보고 있습니다.

비록 유사서비스중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위치를 활용해

다음이 성공한 수익활동은 최근의 까페 광고나 보다 강화된 스토어까페 정도입니다.

지금의 다음을 만든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일서비스와 까페,

다음의 메일우표제라는 이름의 유료화가 절반의 성공을 거뒀지만 회원입장에선 부정적입니다.

오히려 다른 회사의 메일보다 스팸이 더 들어옵니다.

까페를 운영자입장에선 다음까페가 네이버나 기타 까페보단 훨씬 운영하기 좋습니다.

통제가 가능하니 말이죠. 하지만 인터넷은 통제를 거부합니다.

이제 권한은 유저로 이동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그리워합니다. 보다 나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이죠.

다음까페 이상의 것은 그런 모습으로 구현이 유추하는 정도이지만 그 것을

위키에서 그리고 블로그에서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테터툴즈가 범상치 않은 건

그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지만 혼자 있지 않고 함께 있으되 나의 자유가 있습니다.


merchant형 쇼핑몰에서 1위를 하고 있는 인터파크는 불과 2,3년전만 해도 5위권내외였습니다.

하지만 1위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발빠르고 유효적절한 기획력도 있었지만

판매자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업체보다 작은 수수료를

무기로 MD와 판매자의 수월한 의사소통은 MD의 기획을 판매자의 상품으로 구매자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보여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것은 MD의 권한이 판매자에게

어느정도 이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월부터 시장진입하는 CJ의 앰플처럼 아직까지 시장은 판매자입니다.

수수료를 낮추고 광고에서 상품기획까지 모든 권한을 판매자에게 주고 있습니다.

인터파크에게 고객은 판매자와 구매자입니다. 가장 중요한 고객은 구매자입니다.

지금까지 권력이동이 MD에서 판매자로와 있습니다. 이젠 구매자로 가야합니다.

그 것이 마지막이며 엔드유저가 되겠지요.

누군가는 시작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터넷환경에선 항상 ON입니다.

몇 년전인가 빌게이츠가 지금까지 인터넷이 사회를 변혁시킨 것 보다 앞으로의 변화가

더욱 크다고 했던 것처럼 IT환경은 기업을 바꾸고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나의 꿈에 나비가 있는 것일까요. 나비의 꿈에 내가 있는 것일까요.


혹시 저를 찾으시는 분이 있다면 더 넓은곳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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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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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으로 가는 7:50분 비행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10시 20분에 출발을 했다.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심천항공 스튜어디스에게 혹시 심천항공에서 시내 들어가는
버스 있냐고 물어보았다. 물론 혹시나 해서였지.
전에 서울 들어가는 비행기가 연착을 했더니 심천항공에서 버스를 대절해준 적이 있다.
잠깐 기다려보라더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 나한테 자기 짐가방좀 봐달라고 한 다음에
훌쩍 가버린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떻게 가방을 맡기지???
5분쯤 뒤에 오더니 기장이 시내에 산다고 기장의 차타고 가잔다. 럴수 럴수 이럴수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중국에서 이런 경우도 있군. 내가 놀란 것은 작지만 그런 믿음, 또는
고객에 대한 마음이란 것이다. 자기 항공사를 이용한 고객이기에 이용후에도 고객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여전한 것이다. 잠시 뒤 그녀는 아직 시내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면서
시내가는 버스표를 끊어서 주는 것이 아닌가. 아직 차가 있는 줄 알았다면 내가 끊었을텐데
그 친절함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참, 그 스튜어디스는 한국인인데 마음씨뿐 아니라
외모도 참 이쁘다. *^^* 에그그. 그럼 모해~!!! 쩝.
버스에 내리니 꺼진 네온사인도 보이는 것이 새벽 2시는 지났다. 심천역 뒤편에서 내렸는데
그 곳에서 고향민박을 찾아가는 길이 헷갈린다. 가다 가다 못찾아서 결국 택시를 탔는데
쩝. 바로 옆이다. 후덕지근한 심천 날씨. 18층에 올라갔더니 아저씨가 나온다.
하~~ 죄송합니다. 비행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쩝.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시계를 보니
3시를 넘어가고 있다. 고향민박은 흑룡강성이 고향인 분이 운영하신다.
아저씨는 조선족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으셔서
조선족입장에서의 한국역사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같은 역사의 시계바늘도
시각에 따라서는 다를 수도 있다. 어짜피 승자의 기록이고 또 현재의 역사가 서구중심의
역사가 아니던가. 한국에서 배우는 역사와 중국에서 배우는 역사가 다를 수 밖에 없겠지.
3일동안 머무르면서 마음 편하게 있었다. 역시 민박은 마음이 편해야 있을만하다.
고맙기도 하고 해서 컴퓨터를 알려드렸는데 지금쯤 좀 느셨는지 궁금하다.
인터넷으로 민박광고를 하셔야 하는데 인터넷을 다룰줄 모르셔서 하나 하나 알려드리느라
애는 먹었지만 한편으론 머언 타지까지 오셔서 아무쪼록 별 탈없이 잘 사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 아줌마 냉면 맛있었드래요~ ㅎㅎ
 
 
큰방. 침대 하나에 100원. 이거 싼거다. 심천에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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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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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작은 독방 역시 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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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은 방 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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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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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아줌마 ^^


♧~비상(飛上)을 꿈꾸는 30대 직장인들을 위한 조언
 
 

꿈꾸는 30 없이 성공하는 40대가 있을수 없다.

10 , 20 후의 나의 모습은 결국, 내가 어떤 미래상을 갖고 오늘을 가꿔나가는 지에 대한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일에 치여 오늘을 간신히 넘기는 직장인과 10 앞을 보며 오늘을 사는 직장인은 마음가짐부터 다를 것이다.

과연 오늘 나는 어떻게 것인가?

경력관리(Career Management)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경력관리 7단계 전략'으 정리하고자 한다.

1. Know where you are   자가진단부터 시작하라.

전략적인 경력관리 객관적인 자가진단 평가에서부터 출발한다.

평가항목은 자신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항들로, 10 정도가 적당하다.

물론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라고 권하고 싶다.

가족과의 관계, 일과 직장의 의미, 사회적 위치와 역할, 육체적/정신적 건강, 재정상태, 지속적인 학업, 성장을 자극하는

주변 환경, 지역사회 참여, 여가 활용, 종교적/정신적 안정추구 등이 그것이다. 항목이 정해지면, 1부터 10까지 냉철하게

점수를 매겨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있어 필요한 마음을 준비하고 현실을 파악할 있게 것이다.

2. Imagine what you hope to be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라.

시간을 내어 현재로부터 5, 10, 15 후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자.

해당연도를 쓰고 미래의 모습을 가능한 아주 구체적으로 (외모, 직장환경, 가족관계, 사회적 지위 ) 기술한다.

1시간 정도 시간을 A4 용지 내지 장에 신문기사형식도 좋고, 자서전, 편지 심지어 장례식의 조사형식도 좋다.

깊은 자기성찰의 시간이 뿐더러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확인할 있을 것이다.

3. Decide who you will run after   모델을 설정하고 벤치마킹하라.

2번에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모델로 삼아 벤치마킹하라.

40대에 외국계 회사의 한국지사장이 되고 싶은 사람(A)이라면, 현재 외국회사 지사장 지명도가 있는 사람을 고른다.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조사하여 사람의 약력을 재구성하고 성공비결을 찾아야 한다.

사람의 성품과 능력을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

벤치마킹 대상과 비교하여 자신을 평가하고, 보완할 부분을 확인한다.

A씨는 자신이 선정한 모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100 만점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 학업 (70) : 경영관련 학업 부족 (보완점)
- 판매 경험 (80) : 풍부한 현장 경험 보유 (장점)
- 대규모 고객관리 (0) : 경험 필요 (보완점)
- 인사관리 (40) : 관리직급 경험 미흡 (보완점)
- 예산집행 (30) : 원가개념을 바탕으로 업무경험 부족 (보완점)
- 전문가 인맥 형성 (60) : 동종업계 직원모임 참여 (장점)
- 풍부한 네트워크 (20) :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의 네트워크 형성 필요

4. Identify check points on the way   단기 목표를 설정하라

3번에서 확인된 보완부분 중에서 긴급성, 실현가능성, 비용대비 효율성을 고려하여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보완할 단기 목표를 설정한다.

A씨의 경우, 예산관리 경험부족, 경영관련 학업 필요, 인사관리/리더쉽 형성 등의 단기 목표를 세울 있다.

- 예산관리 경험을 얻기 위해 마케팅업무 예산관리업무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 경영관련 학업이 필요하므로 1 동안 야간 경영학 수업 또는 전문교육기관의 경영학 수업을 분기별로 수강한다.
- 인사관리 경험부족의 경우, 앞으로 6개월 이내에 관리직급으로 사내 이동 또는 전직도 고려한다.

5. Draw your path, Run and Measure yourself   실천계획 수립/평가기준을 설정하라

단기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와 만나 어떤 도움을 받고, 어떤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을 것인가와

같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결과를 측정한다.

측정할 있는 지표를 만들고 지점에 도달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비록 작더라도 보상하고, 그로 인해 격려받으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도움이 된다.

A씨의 경우, 기한 내에 경영학 수업을 신청하고 수강성적이 B 이상이면 자축파티를 열어 자신을 격려할 있다.

6. Listen what your coach says   조언을 경청하라

1번부터 5번까지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전문적인 경력관리 컨설턴트나 직장에서의 선배로부터 도움을 구한다.

전문적인 컨설턴트들은 경력관리 카운셀링에서부터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수립하여 실천할 때까지 개인적 필요에

적합한 구직전략과 방법을 함께 구상해내며 단계에서 구조적이고 실질적인 도구들을 제시한다.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해줄 있는 조언자를 확보하는 것은 경력관리에서 매우 중요하다.

간단한 철칙을 하나 기억하라. '모르는 것을 묻고 바보가 되는 것이 묻지않고 바보로 사는 것보다 낫다.'

7. Recycle the procedure regularly   일정 기간마다 전과정을 반복하라

일정기간, 예를 들어, 분기마다 번씩 1번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 계획을 수정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안일한 관리자는 '부서지기 전에는 손대지 말라' 하며, 통찰력이 있는 리더는 '부서지지 않았을 때가 고칠 있는 유일한 시점'

이라고 말한다.

'이정도면 나도 잘하고 있는 거야'라는 식의 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전과정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구조적인 경력관리 과정을 이용하여 직장생활의 의미와 방향성을 회복한다면 30대의 직장인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직장생활을 설계하고 추구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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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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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김씨 (淸道金氏)  청도김씨 홈으로 이동

 

 1> 시조 :  김지대[金之岱]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청도(淸道)는 경북 남쪽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이서소국의 땅이었으나
     고려초에
오악현, 형산현(荊山縣), 소산현(蘇山縣) 3개현을 합하여 청도군(淸道郡)이 되었다.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8세 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과 원종때의 명신으로 비서소감, 지공거, 추밀원부사를 거쳐 첨서추밀원사에
     승진하였다. 1258년 몽고군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다스린 공훈으로 오산(청도)군에 봉해졌다.
     원종이 즉위한 후  이부상서를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도를 관향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세계를 이어왔다.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지대의 아들 선장(善莊)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증손 한귀(漢貴)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최영과 함께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때 형조와 호조판서를 역임한 점(漸 :한귀의손자)과 세조때 단종복위를
     도모한
차산(次山)이 유명했으며, 난상(鸞祥)은 을사사화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조때 직제학을 거쳐 대사성에 올랐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때 임란공신에  책록된 몽룡(夢龍)과 희방(希邦)이 이름났고,
     순조때 성리학자로 유명한
응하(應夏)는 문하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한말에 와서 청도김씨를 빛낸  인물인 정호(正浩)는 정밀한 지도 작성에 뜻을 두고 36여년간
     전국을 돌며
[청구도(靑丘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여 우리나라 문화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청도김씨(淸道金氏)는 남한에 총 15,596가구,
     64,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영주시 가흥동

경남 밀양군 청도읍 두곡리, 인산리

     경북 달성군 옥포면 교항동

경남 거창군 마리면 일원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동



자신의 본관과 유래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www.burimhong.pe.kr/name1/000korean%20name.htm

 

청도에는 소싸움도 있는데 ^^ 언제 보러 가야쥐. 언제가지?


KBS 역사 스페셜

  김정호의 꿈,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방송일: 2003208                                                      동영상 :

방송(동영상)을 시청하시기 위해서는 KBS 홈페이지(http://www.kbs.co.kr)에서 회원가입(무료)을 하시면 됩니다.

■ 방송일시 : 2003년 2월 8일 (토) 20:00-21:00 KBS 1TV

■ 담당 P D : 박현민 [781-3557] / 작가 : 정윤정

■ 더빙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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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140여년전. 국토의 깊고 얕은 곳까지 속속들이 알고자 했던 한 사내의 꿈!
그것은 한 장의 지도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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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는 모두 10여본.
그 중에서도 성신여대 소장본이 보물 850호로 지정돼 있다.
상태가 가장 양호할 뿐 아니라,
지도 일부에 색을 칠한 것이 조화를 이뤄서,
예술적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철종 12년인 1861년.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우리가 흔히 봐오던
한 장짜리 지도들과는 달리 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의 종이를 옆으로 길게 이어 붙여 놓았는데,
이같은 책이 스물 두권이 모여서 하나의 지도를 이루게 된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려놓은 전국지도인데,
만약 이것을 한 장으로 만들었다면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때문에 떼어 놓으면 분리도가 되지만 합하면 전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어느 정돌까?
진본과 똑같이 만든 영인본을 가지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바닥에 펼쳐진 지도책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한반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스물 두권의 지도책을 모두 붙이자
엄청난 크기의 전국 지도가 완성되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이 거대한 지도속에는 과연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맥이다.
산봉우리를 각각 떼어서 그리지 않고 줄기와 줄기를 이어서
마치 하나의 구조물처럼 표현하고 있다.
땅을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동일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국토관이 반영된 결과다.
산맥은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이며,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혈맥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백둑대간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인데,
백두산에서 시작된 국토의 큰 흐름이 남북을 관통해
마치 척추처럼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동여지도 속에 나타난 산봉우리는 모두 삼천여개.
전체를 하나로 표현하면서도 각가의 산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백두산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렸다.
'백두'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려는 듯 흰 봉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함경북도 명주군에 위치한 칠보산-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듯이 보인다.
금강산은 무수한 봉우리를 표현해, 일만이천봉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의도적으로 과장한 오대산.
서울의 삼각산 역시 세 개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 계룡산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것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속에 살아있는 산의 이미지를 지도속에 옮겨놓은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도로에 대한 표현이다.
모든 도로가 마치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듯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사실과 달리 도로를 왜곡해서 표현한 까닭은 물길과의 구별을 위해서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나타냄으로써
한가지 색깔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판지도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 것이다.
이전의 지도들과 대동여지도를 구별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은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두 스물 두 개가 기호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은 모든 지도에서 당연하게 사용되는 것들이지만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최초였다.
구체적인 활용의 예를 살펴보면,
영아를 표시하는 이 기호는 병영 등의 군영,
읍치는 오늘날의 시청이나 군청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군사기지를 나타내는 진보다 역참, 봉수 등 다양한 기호가 사용됐는데,
이전과 달리 글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지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140여년전에 만들어졌음에도 현대 지도 못지 않은 아이디어가 활용된 지도-
대동여지도는 크기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당대 최고의 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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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예나 지금이나 지도를 가장 많이 활용하게 되는 경우는 길을 찾을 때다.
고지도를 연구하는 이상태 선생과 함께 대동여지도의 도로망을 확인해보았다.
직선으로 표현된 도로들은 지도상에서는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길이거나 구불구불하게 돌아가는 길이라 훨씬 더 멀 수도 있다.
도로의 길이만 가지고는 실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이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다.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하나씩 찍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방점들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산악지역의 경우엔 주로 조밀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좁은 곳은 1.5센티미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넓은 곳은 얼마나 될까?
2.5센티미터- 주로 평야지대에서 확인된 수치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방점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두 지점간의 거리를 파악하는데만 머물지 않는다.
전국 어느 지점에서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일정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 네트워크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모든 도로망이 서울만을 중심으로 표기되던
이전 지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획기적인 변화다.

(현장음)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지도들에선 이전보다는 발전된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도는 옆에 따로 표를 만들어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자리에
두 지점간의 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이 표를 활용할 경우 거리는 알 수 있지만 여전히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동여지도의 도로 표기 방법이 왜 탁월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조선시대 물길은 도로 못지 않게 중요한 교통로였다.
때문에 대동여지도 상에도 물줄기들이 매우 상세히 표현돼 있는데,
한가지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물줄기가 어떤 지점에서는 두줄기로,
또 다른 곳에서는 한줄기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쌍선과 단선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마을 옆을 흐르고 있는 강은 낙동강의 본류다.
상류임에도 불구하고 배를 이용하지 않고선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강폭이 넓은 편이다.
그러나 이 지점을 기준으로 상류쪽은 강의 깊이가 급격히 얕아져서
돛단배는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공물을 실어나르던
조운선들의 종착지가 이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

결국 대동여지도에서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돛단배를 운행할 수 있는 구역인 동시에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하는 구간을 나타낸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양으로 가려면 육로를 이용해 문경새재를 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나루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유곡동.
도로로 변해버린 이곳은 조선시대 문경새재를 오가던 여행자들에게 말을 제공하거나
숙소를 알선하던 역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공덕비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유곡역의 위치도 정확하게 표시되어있다.
때문에 대동여지도만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물류 운반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공물을 싣고 동래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게된다.
물줄기가 단선으로 바뀌는 문경에 다다르면,
유곡역에서 교통편을 마련하고 육로를 따라 문경새재를 넘는다.
다시 충주에서 배를 갈아타면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곧장 한양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대동여지도에는 당시의 교통, 물류 정보가
완벽하게 담겨있어 매우 실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제작된 지도들과 비교할 때 대동여지도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일까?
대동여지도를 현대 지도와 동일한 크기로 축소해서 그 외곽선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남해안과 서해안 지방에서는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북부지역으로 가면서 오차가 발생했는데
주로 산악지형에서 실제보다 조금 더 넓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터뷰)

인공위성에서 찍은 서울의 모습이다.
하천 매립등으로 일부 지형이 벼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은 140여년전에 만들어진 고지도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정확하면서도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이같은 특징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당시 조선의 교통 물류네트워크를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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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오가는 차량들로 붐비는 중림동 로터리.
몇해전 이곳에 김정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에 비석을 세운 까닭은 현재까지 김정호에 대해 밝혀진 유일한 단서가
이 일대에서 거주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인터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김정호 개인에 대해서는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 외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이 때문에 그를 둘러싼 과장된 소문들이 오랜 시간동안 진실처럼 전해져오기도 했다.
당대에 김정호에 대해 적은 유일한 기록은 이향견문록이라는 책이다.
이책에는 김저호가 만든 지도가 매우 훌륭했다는 간단한 내용만 담고 있다.
다만, 중인 이하 사람들의 업적만을 싣고 있는 이 책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터뷰)

김정호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일제 때 간행된 조서어독본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는 김정호가 나라에 정확한 지도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혼자서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오르고 전국을 수없이 답사하며 조사한 결과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나라를 위해 쓰고자 대원군에게 가져갔지만
지도가 너무 상세해서 국가의 기밀이 다른 나라로 새나갈 것을 염려한
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혔고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호가 평생을 바쳐서 만든 대동여지도 목판은 모두 압수돼 불태워졌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90년대 초반까지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난 90년대 초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여러 매의 목판이 발견되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동여지도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목판을 두고 정밀조사가 실시되었다.
수장고에서 발견된 목판은 모두 열 한 매.
하나의 목판에는 앞과 뒤 각각 두 면씩 총 네 개의 면이 새겨져 있다.
확인 결과 이 목판은 대동여지도 인쇄본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오상학 학예연구사 인터뷰)

목판의 존재는 대동여지도가 압수, 소각된 적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김정호의 옥사설 또한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단서다.
이향견문록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책에서는 김정호의 죽음을 '몰'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약 옥사했다면 '물고'라고 적어야 옳다.
또한 대원군 집정기에 쓴 이 기록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대동여지도를 한 부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김정호가 처벌을 받았다면 결코 적지 않았을 내용이다.
결국 조선어독본의 내용은 대원군을 우매한 지배자로 묘사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했던 일본의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정호의 작품은 대동여지도 하나만이 아니다.
제작시기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선전도는
역시 목판으로 만들어진 서울지도인데,
현존하는 가장 큰 서울지도일 뿐 아니라 서울을 담은 목판지도들 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대동여지도 못지 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야할 업적이 지리지의 편찬이다.
지리지는 국토의 정보를 집대성해 놓은 일종의 지리 백과사전인데
김정호는 일생동안 여도비지, 동여도지, 대동지지 등 세 종류의 지리지를 만들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살아생전 김정호는 이름을 날리거나 명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지리학적 성과들은
국토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과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인물 김정호를 되살아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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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우리나라 전통 지리와 천문에 관한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회장-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들도 대거 선보였는데 대동여지도 이전의 지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여지전도- 대동여지도보다 40여년 앞섰을 뿐인데도
지도의 정확성은 매우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글씨는 지도라기 보다 지리지를 연상시킨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곤여전도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 지도 속에서도 한반도의 모습은 심하게 왜곡돼있다.
그렇다면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현대 지도 제작과정을 통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측량을 위해 먼저 GPS 장비를 설치했다.
인공위성을 통해서 이 지점의 경위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현재 전국에는 측량 기준점들이 정해져있는데.
이것은 측정할 때마다 생길 수 있는 오차를 막기 위한 조치다.

(인터뷰)

각 지점에서 산출된 데이터를 조합하면 지점과 지점간의 거리,
경위도상에서의 정확한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지도 제작의 상당부분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데,
지명이나 경계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지도 제작에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을 활용함으로써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인터뷰)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실측지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토지측량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
실측자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서를 찾던 중 김정호의 지리지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쓴 첫 번째 지리지인 여도비지는 도별로 지역을 나눠놓은
일종의 군현 지리지인데 친구였던 최정환과 함께 저술한 책이다.
이 여도비지 속에 매 지역마다 그 지방의 경위도를 기록한 표가 들어있다.
여기에 적혀있는 경위도는 북극고도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경위도 기준이 있었고,
실제 지도 제작에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김정호가 직접 측정했던 것일까?

(인터뷰)

김정호의 또다른 지리지 속에서도 이와 동일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정조 15년. 8도에 명을 내려 북극고도와 편동서도를 측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때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측량이나 측정을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한 결과 세종 때 이미 측량을 시작했고
전국의 주요도로에 30리마다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거리 측정을 위해 기리고차라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는 스스로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반자동 거리측정기였다.
이 놀라운 거리 측정기에 대해서는
호대용이 쓴 담헌서 속에 그 작동원리를 짐작해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기록에 다라 복원해보면 기리고차의 겉모습은 마차와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상당히 복잡한 형태다.
수레가 반리를 가면 종이 한번 울리고, 1리를 갔을 대는 여러 번 울리도록 했다.
사람은 수레위에 앉아 소리를 듣고 기록하기만 하면 됐는데,
북소리는 5리에서 한번, 10리에서는 여러 번이 울렸다고 한다.

(인터뷰)

조선시대 궁궐의 모습을 그려놓은 동궐도.
당시 궁궐안 곳곳에 설치돼 있던 천문 관측기구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경위도 측정의 전통 또한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겨위도를 측정한 가장 큰 목적은
날씨를 연구해서 농사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측정된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지 활용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이미 측정해 놓은 정확한 데이터가 있다면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기 위해서
매번 새로이 측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김정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동지지 속에 자신이 참고한 도서명을 밝혀놓았는데,
모두 예순 다섯 종으로 고금의 지리학 서적들이 망라돼있다.
이것은 김정호가 전통 지리학의 성과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서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던 김정호.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과 64년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됐는데,
이 두 개의 판본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이 경우는 산맥을 새로 삽입했다
지명이 새로 추가된 경우도 있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도 십 여 군데가 넘는데
대동여지도의 수정이 목판작업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김정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김정호가 눈을 감은 그 순간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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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인천에 위치한 화도진 공원.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은 강화조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됐다
강화조약이라고는 하지만 무력을 앞세운 열강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 측 대표로 참석한 이는 전권대사 신헌
대원군 집정기의 대표적 무관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인물이다.
신헌은 자신의 문집에서,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로서는 국가 1급 기밀 서류에 해당하는
비변사나 규장각의 지도들도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호가 당대 최고의 군사 지도들을 볼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당시의 군사지도들은 어떤 특징을 자지고 있을까?
18세기에 만들어진 이 지도는
당시 청나라와 마주하고 있던 국경 지역의 지형을 그려놓은 관방지도다.
이 지역의 지형, 성곽, 도로 등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돼 있다.
정방 산성도.
이 역시 이 지역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군사지도다.
성벽과 진보 등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우물과 창고까지도 세밀하게 표현해 전쟁시에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특정 지역에 편중됨이 없이
전국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전국의 봉수 체계를 파악해야 한다면
지도상에 표시된 봉수 기호들을 모두 연결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한 장의 훌륭한 봉수도가 완성되는 셈인데,
역참이나 창고, 진보 등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 지도라도 개별 지역에 대한 정확성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
서울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는 강화도를 살펴보면,
먼저 성벽의 위치가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강화도 전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봉수나 창고 등 각종 군사 시설들에 대한 파악도 손쉽다.
이것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군사지도로서 활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의 군자시도로서의 활용가치는 이미 입증된 바 있다.
1925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정호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청일전쟁 당시 양국 군대가 모두 대동여지도를 작전 지도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지리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도
대동여지도를 사용해서 군사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일본군은 우리나라에 과한 상세한 지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지도도 그 중 하나인데 서해안과 한강 주변의 해로를 표시한 것이다.
서울까지, 배를 이용해 들어 올 경우 대비해
한강 전체의 수심까지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근대 측량기법으로 만든 정밀한 지도를 가졌음에도
대동여지도를 활용한 것은 이 지도가 현대 지도 못지 않게
정확하고 편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누가 보아도, 그 어디에서 보아도
똑같은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의도했던 김정호의 생각 속엔,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의 공유라는 현대적인 사고 방식이 녹아있는 것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만든 시기는
이양선과 외국함대들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활용 가능성을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저술이었던 대동지지 속에
유독 군사항목이 강조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전고라는 항목인데,
이전의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항목을 통해
국방을 중시했던 김정호의 지리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궁극적인 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대동여지도의 첫머리에 실린 지도유설이다.
그의 뜻은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F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사용하고자 함이었다.
대동여지도는 이전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무모하게까지 여겨지는 한 사내의 꿈에서 비롯됐다.
국토 정보를 지도상의 네트워크로 구축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희망했던 그 꿈은
지금 우리 앞에 6.6m 초대형 지도로 남겨졌다.

출처 http://www.kbs.co.kr/history/vod.shtml

 

보다 더 많은 청도 김씨에 대하여, http://my.dreamwiz.com/dbaseman/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의 출자지().



관적() ·본적() ·성관() ·본() ·관향() ·적관()이라고도 한다. 보통 성()과 병칭되어 개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본관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본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으나 995년(성종 14)경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시 초기의 본관제는 지역사회 내부의 자체적인 질서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다. 즉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민() 지배방식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 전기에 본관을 벗어나는 거주지 이동은 입사() ·입산() 등을 통한 신분이동이나, 방수() ·행상() 등 역()의 수행이나 직업상의 필요, 또는 사민() 유배 등 정책적인 경우를 비롯하여 기타 공식적으로 허용받은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유망민으로 간주되어 본관 지역으로 되돌려졌다. 본관은 양인() 이상에게만 주어졌으며, 노비양수척() 등의 천인()들은 본관제 질서에서 배제되어 국가에 대한 국역()의 부담도 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고려 정부는 지역사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성() 및 직역()을 분정()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부세() 징수 등의 행정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토성은 신라 말, 고려 초 변동기의 자위조직의 기초집단인 성()을 중심으로 분정되었는데, 이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읍()’과 같은 공동체 관계로 파악한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에서 각 성관의 시조들이 해당 지역에 식읍() 또는 채읍()을 사봉()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려 후기 이래 향촌사회에서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고, 유망이 극심하게 일어나면서 본관과 거주지의 분리현상이 확대되어갔다. 이제는 본관 지역을 이탈한 농민들을 원래의 본관으로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현재의 거주지에 적()을 붙여서 수취를 도모하는 방편이 보다 편리해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되고, 본관이 점차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성()은 처음에는 동본()이었다는 관념에서 성관()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즉 군소 성관들이 동성의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본관은 이제 성관으로서 ‘동성동본은 백대지친()’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었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특히 이러한 관념이 강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들은 반드시 원조()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식 아래에서 조선 후기에는 족보 편찬이 활발해졌다.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 본관의 사회적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지하는 등 법률적인 면에서 그 기능이 남아 있고, 특정 성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분관념의 상징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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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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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에게 빗팔기

心身FREE 2008. 6. 14. 23:13

항상 달리 생각해 본다는 것,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길을 찾아본다는 것,
엉뚱하게 생각해 보는 것, 뭐 이런 것에 한 때 익숙한 적이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괴짜라는 소리도 가끔은 들어보고 튄다는 소리도 들어봤는데

그 땐 이런 애기는 욕이나 다름이 없었던 거 같다. "모난돌이 정맞는다"라는
부연을 하면서 말이다. 어린 시절 공부하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 산으로 놀러다니고 언젠가 먹었던 반찬이 맛있어서 그 반찬과 비슷한 풀을 책가방에 한웅큼 캐온 적도 뭐 그런 것들도 기억의 창고에 저장이 되어 있어서 가끔은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참 없어 보이는 기억이지만 말이다. 동네 아이 꼬셔서 만화방에 데려가고 장난감을 손에 쥐고 혼자서 우주를 여행하기도 하면서 한적한 길을 가다보면 황금박쥐처럼 우주에서 지구를 구할 사람은 너다라는 메신저의 목소리를 기다리던 유치짬뽕의 기억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수건을 목에 매달면 수퍼맨이 되기도 하고 가면하나 쓰면 마징가로 변신하기도 했던 그 작은 시절엔 오히려 못할 것이 없던 거 같다. 그 시절 마음대로 안되는 것은 집안에서 뿐이니 지금과는 정 반대인가?

사람이 나이가 들면 여러가지 능력이 퇴화가 되는데 그 중에서도 창의력을 많이 잃는게 아닌가 한다. 워낙 세상의 질서에 편입을 하려고 온 몸의 세포가 긴장을 하며 또다른 주입식 교육을 받게 되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는 同和作用이겠지. 사회생활을 해 나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항상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왔던 것을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한다라는 방식으론 내가 경쟁하는 카테고리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 다른데도 그렇겠지? 밤과 낮이 없는 인터넷, 어쩜 수백만이 넘을 인터넷상인들과 인터넷비즈니스 관계자들, 이런 이들과 경쟁을 해서 그냥 저냥 살아봐야 IMF이전의 또 다른 소시민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때처럼 시간이 누적되면 승진과 정년이 보장되던 모습은 아니니 말이다.

역발상이라는 것, 달리 생각해 본다는 것, 어쩜 과대망상이라는 것까지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생존의 명제가 되어 버렸다. 어제와 달라야 하고 지금까지와 달라야 한다. 그 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달라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떠올릴때 난 어릴적 가난이나 어쩔수 없이 자주 해야 했던 이사등을  가끔은 감사하게 생각하게 할 때도 있다. 수퍼맨을 만들어 주었던 수건, 다행스럽게 뛰어내리진 않았지만

우산을 들고 뛰어내리면 낙하산처럼 안전할까말까를 고민했던 옥상, 비슷하게 생기면 로봇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차로도 변신하기도 하던 나무, 돌, 고무신... 쉽게 조립이 되지 않고 부러지기 쉽상이던 100원짜리 장난감로봇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그 시절이 나에게 준 것이 상상력이 아닐까. 세상이 힘들어지거나 내 갈길을 찾기가 어려워 질때면 이런 기억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가깝거나 조금은 먼, 또는 아주 먼 미래를 마음껏 그려내는 스케치북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난 나의 과거를 사랑한다.

중국 남방의 한 대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내걸고는 영업사원을 모집했다. 회사에서는 구름 떼처럼 모여든 지원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열흘 내에 가능한 한 많은 빗을 스님들에게 팔고 오라는 다소 엉뚱한 요구를 했다. 응시자들의 반응은 제 각각이었다. 일찌감치 포기하는 사람, 하는 수 없이 해보겠다는 사람, “스님들은 모두 머리가 없는데 무슨 수로 빗을 팔겠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갑, , 병 세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각각 나무 빗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고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업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갑은 산 속에 있는 절에 가서 빗을 팔려다 스님들에게 면박만 당한 채 쫓겨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산기슭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머리가 가려워 연신 긁어대고 있었는데 갑이 빗으로 긁어주자 아주 시원해 하며 빗을 한 개 사주었다.고 말을 했다. 한편 을은 꽤 큰 절을 찾아갔다. 참배를 하러 온 신자들의 머리가 바람에 날려 엉클어진 것을 보고 그는 절 주지스님에게 말했다. “저런 꼴로 부처님께 향을 올리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제단 앞에 빗을 놓아두어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후 참배를 하도록 하시죠.” 이렇게 해서 을은 그 절에 빗 10개를 팔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병은 빗 만개를 팔았다고 얘기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직접지시를 내렸던 사장조차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알고 보니 병은 이 평범한 나무 빗으로 공덕소(공덕을 쌓는 빗)’를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우선 유명한 절의 주지스님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주지스님이 나무 빗 위에 공덕소란 글자를 써서 시주자와 참배객에게 기념품으로 나누어 주라는 내용이었다. 참배객이 향을 올리고 나면 스님들이 직접 이 빗으로 머리를 한 번 빗겨 준 다음, 그 빗을 참배객에게 기념으로 증정하면 되었다. 병은 이렇게 하면 이 절에 참배객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며 우선 외상으로 빗 1천 개를 놓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자기 말이 틀리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을 덧붙였다. 주지스님은 반신반의 하며 그의 말을 따랐다. 그랬더니 과연 단 며칠내에 입소문을 타고 참배객들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주지는 아주 기뻐하면서 병에게 빗 만개를 주문했던 것이다. 

 대부분 기업들은 소비자의 니즈를 찾고 이를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고객의 니즈를 쫒아만 가다보면 결국 금방 경쟁 기업에 따라 잡히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가장 좋은 방법은 틈새시장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틈새시장을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고객의 모호하거나 기존에 생각지 못한 새로운 니즈를 구체화시켜주고 새로운 니즈를 창출해주는 것이다. 결국, 스님에게 빗을 팔 수 있었던 것은 스님에게 새로운 니즈를 창출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고객에게 이러한 니즈가 있으니 사용해보라는 식의 가르침이나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고객의 숨겨진 니즈를 찾아 그것을 고객이 새로운 가치로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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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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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을 보다가 답답해서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다가 결국 마무리 발언
듣고만 말았다. 열혈청년에서 소시민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건지... 쩝.

왜 자꾸 법리문제로 빠지고 이념논쟁이 뛰쳐나오고 막무가내식으로
백만분의 1정도라면 먹겠다는 철없는 애기들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국민들은 재협상을 하라는데 보고나면 쫒는자와 쫒기는자의 드센
숨소리만 남고 한숨만 차오른다.

그래. 경제논리 앞에선 혈맹이고 베스트프렌드고 없다.
어려울때 도와주는게 친구라면서 어깨 두들기던 이명박만 낮간지러운 거다.
왜?
미국도 캐나다에서 수입하지 않고 일본도 수입하지 않는 30개월 소고기를
수입해야 하는가. 이건 위험성 문제를 떠나서 국민적인 자존심 문제다.
대한민국의 위치가 그렇게 별 볼일 없는가. 아직도 제할말 못하며
강대국 눈치를 보아야 하는 약소국인가 말이다.
100만분의 1이든 10만분의 1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안전하고 싸고 질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수입해야 하나?
그리고 영세민이 광우병 처리반인가. 왜 나는 백만분의 일이라면 먹겠다고
용감무식한 발언을 우리가 들어야 하는가.

통상국가론을 들먹인다. 재협상을 해서 대외 신인도로 위협하며
현실론을 들먹인다. 앞으로 중국, 러시아와는 FTA 체결 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이 이런 한미협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결국 미국에게 그렇게 양보를
하고 왜 자국에는 양보를 하지 않는가라는 볼멘 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미 한미 소고기 문제는 한미양국간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가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결국 차기 협상테이블에서 입지만 좁아질 뿐이다.
글로벌 호구가 되느냐 아니냐를 가름 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누가 일방적인 파기를 하라고 했는가.
한 나라의 운명도 협상으로 인해 역사를 바꾸는 경우를 우리는 보아왔다.
통상국가로서 통상비중이 큰 우리나라에서 협상 파기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협상의 묘를 발휘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건 협상단의 문제이지
국민을 설득시킬 일이 아니다. 미국을 설득시켜라.
이명박 정부가 결자해지 해야 한다.

재협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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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간다 36 : 필리핀 상세보기
랜덤하우스 편집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해외 여행 가이드 시리즈 '세계를 간다' 제 36권, 필리핀 편. 해외여행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관광, 교통, 식사 숙박 등 필수적인 여행 정보를 수록하고 해당 지역의 사회 역사 문화 풍속 등을 폭넓게 소개하였다.
기내는 빈 자리가 보인다. 내 옆자리는 빈자리.
바캉스가 시즌이 다 지나는 중이어서 그렇겠지.

3열중 창가에 앉은 내줄엔 중년의 필리피노 아주머님이 앉았다.
비행기 타기전까지의 설레임이 막상 이륙하고 난 이후엔 잠잠하다.
떨림이었는지도 모르지. 많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짧은 영어가
조금은 다시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얼마나 다행인지...ㅎㅎ

호주 갈때기분이 이랬나 싶기도 하지만 그 땐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바보같군.
기체가 떠오를땐 몇 번 안되는 경험이지만 매 번 신기하다.
어떻게 이 것이 하늘을 떠 오를까 하는 유치한 호기심. ^^;
쌩쌩한 에어컨 덕인지 한기에 모포를 덮고 잠깐 눈을 부쳤다.
마닐라에 도착할 무렵에 눈을 떴다. 김포공항과는 다른 모습. 국제공항이라고 하지만
필리핀의 관문은 지금의 필리핀을 대변할 정도로 낙후된 모습은 여전하다.
우루루 몰려나오는 사람들에 뒤섞여 가장 빠를 듯한 줄에 섰는데 웬걸.
입국심사를 까다롭게 하는 사람인지 다른 줄은 이미 다 나갔는데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첫 기분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예전에 올 때는 이러지 않은 거 같은데 말이다. 입국심사중에 일본인인듯 보이는
소녀가 입국심사에서 애를 먹는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솔직이 피곤해서...-.-;; 나도 줄 서 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은 영어에 미숙한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잘 도 다닌다.
외국으로 말이다. 무조건 부딪치고 보는 경험담. 부럽긴 하다.
공항바깥으로 나오니 뜨겁진 않지만 무언가 답답한 공기는 필리핀의 현재가
우기임을 알려주는 것인지모르겠다. 쿠폰택시를 타고 345peso 말라테펜숀으로 간다. 공항에서 말라테펜션은 레메디오스 공원근처에 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말라테파크로 착각했다. 그러니 현지인들이 찾지를 모했지. 쩝.

기사가 잘 알듯한데 잘 모르는지 나한테 확인을 한다. 이래 저래 찾아서 갔는데
내릴때 그 우스꽝스런 미소로 팁을 요구? 요청하길래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주었다.
그리고 들어선 스타벅스옆의 말라테펜션. 예전에 묵었던 곳인가 했는데
그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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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룸을 600페소 지불에 2night. 가이드에서 제시한 것보다는 싸다.
보라카이 다녀온 뒤에는 다른 곳에 묵어야 겠다. 보다 많은 경험을 해야 겠지.
짐을 풀고 잠시나와 리메디오스며 마닐라베이며 돌아다니다 보니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맞아. 변하지 않은 것도 있구나. 한국식당하며 여전히 리메디오스를
침구삼아 자는 사람들하며 잠든 아이에 연신 부채질을 하는 엄마의 모습.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보며 안스러움 보다는 어떤 뭉클함 또는 다른 ?약간은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많은 않다.
한국사람들은 그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러니 이렇게 한국인 피시방도 생기는 거겠지.몇 시에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한국으로 치면 초여름의 날씨라 다행이다 생각하며
아쉬운 침구를 잊을 수 있었다. 비행기 안의 모포....으... 그 거 없어진다고
비매너 한국인 머..어쩌구 저쩌구 하는 기사를 엊그저께 읽었는데... 살 수 있었으면...잘 때는 천정위에서 돌아가는 팬으로 어떻게 잘 수 있을까 했는데 누워있다 보니 추워지기 시작해 가장 약하게 돌리고 잠들었다.

이틀째 눈을 떠보니 11시 40분쯤 되었나?
비누도 없다. 다행이 물비누가 있어서 그 걸로 버티겠다. 수건도 가져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며 샤워를 했다. 맞아. 아무것도 없었지. 호주에서 그랬잖아.
침구며 비누며 수건이며 말이다. 몇 가지를 챙겨서 마닐라에서 제일 크다는
바클라란 시장으로 LRT를 타고 갔다.

2시도 안된 거 같은데 왜 이리 복잡한지 마치 전철 초창기의 복잡함을 연상한다.
창밖으로 투사되는 오래된 건물의 모습과 지금 막 지어지고 있는 건물들을 본다.
필리핀에 왜 이리 정이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모습들이 예사롭지 않다.
바클라란에서 내려서 한 바퀴 돌았을까? 야자수 쥬스를 마셔보니... 맛이 떠오른다.
그때도 이렇게 갈증을 해소하는 맛이었지. ^^;; 필리핀인들의 예스럽지 않은 눈길이
아직은 부담스럽다. LRT를 타고 UN역에 내려서 리살파크를 찾아갔다.
리살파크내에 있는 DOT에 들러 팍상한과 보라카이 정보를 얻었다. 245$란다.
2박3일에 비행기 티켓, 아침식사, 숙소가 포함되어 있고 그 외의 것은옵션이다.
좀더 알아봐야 할 거 같다. 보라카이는 꼭 가봐야지.
리살파크를 돌아보니 못보던 거대한 라푸라푸상이 돗보인다.
여러 동상들을 보니 필리핀인들은 역사를 소중히 하는 거 같다. 역사를 소중히 하는
민족은 미래가 있지 않을까. 어떤 주체든지 지나온 길을 잊지 않는 다는 것을
다가오는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것으로 소화하기 위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어떤 가족을 만났다. 너무도 친절한 그들의 에스코트, 여러동상을 소개해주며 이력을애기해준다. 감사하기도 했지만 조금은 부담스럽다. 혼자다니고 싶기도 하고 다리도 아파서 난 좀 쉬었다 인트라무로스로 가겠다고 하고 헤어졌는데 30분쯤뒤에 또 만났다. 인트라무로스 가는 길에 말이다. 깔레사라고 부르는 마차의 마부가 여전히 나에게흥정을 거는 중에 나의 이름을 부르길래 돌아보니 저 만치에 있다.
그 가 몇 마디 해서 다시 마부는 돌아가고 자연스럽게 합류가 되어 인트라무로스를
 돌았다. 우기여서 한무더기의 비가 우르르 쏟아져서 잠시 피하다가 그가 오늘 니노이 아키노를 위한 페스티벌이 있다고 같이 보러 가자고 한다. 4시반이었는데 6시 반에 있다고 하길래 피곤해서 펜숀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더니 픽업을오겠단다. 흠.. 그럴 필요까지야 ... 사실 그렇게 가고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다.
조금은 극성스러운 이들의 호의를 무시하기도 그렇고 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빗속을 뚫고 마닐라 대성당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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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오르간은 보지 못했지만 적지 않은 필리피노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웬지 숭고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 공연히 나까지 숙연해 진다. 앉아 있으니 마음도 편해진다. 페스티벌을 위해 지프니를 타고 한시간 이상을 달렸다. 무작정 그들만 믿고 가는 거다. 산토토마스를 지나고 키아포에서 내렸다. 다시 트라이스클을 타고 10분쯤 갔는데 한적한 조금은 으슥한, 이미 시간은 7시를 넘어서 어둑어둑해졌다. 페스티발로 가느냐고 했더니 비 때문에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한다. 이상한 기분. 책에서 본 수면제 강도가 스쳐지나간다.
집으로 다 들어가더니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난 여기서 기다리겠다. 빨리 갈아입고 오라고 했더니 무언가 마뜩찮은 듯한 그들의 표정. 돌아가면서 들어오라고 이 곳은 위험하다고 재촉을 했지만 난 괜찮다고 했더니 한 시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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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 아니다!난 가봐야 겠다고 하고 다시 나왔다. 10분을 걸어나와 어느 가게의 소녀에게 물어봐 트라이스클을 타고 다시 나와 지프니를 두 번 갈아타고 오는 중에 어느 맘좋은 아주머니와 소녀가 내 말을 듣고 지프니를 물어 태워주었다. 그렇게 먼 길을 갔다니... Oh my God!!!!
결국 보라카이 예약도 못했네. 6시전까지 연락을 주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마지막 지프니에서 아이다와 제임스를 만나서 그들과 식사를 하고 보라카이 다녀온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틀만에 쩝. 이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경험하다니 다행인가.
그 아주머니의 말이 기억난다. 이제 앞으로 좋은 경험만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야.
그러겠지?  후훗, 조금 우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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