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방송통신고등학교는 사라졌다. 아름다운 학교들.

처음 나이트 클럽을 수학여행을 강원도 경포대로 갔을 때 방문했다.

내 인생 처음의 나이트클럽이다. 해수욕장의 나이트클럽이 뭐 시설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지금 상상해 봐도 참... 수더분 했다. 당시 나는 용산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 때다.

중학교 졸업이후 이태원의 개러지샵(지금의 카센타)에서 일하다가 정수직업훈련원에 들어갔고

훈련원을 다니는 와중에 고등학교를 가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것이 방송통신고등학교다.

아마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자율형 사립고도 있고 과학고니 기술고니 있지만 방송통신고등학교도 있다.

그리고 방송통신대학교도 있다. 어쩌면 방송통신대학교를 아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이 곳에 가는 사람들은 100프로 정말 학교를 가고 싶어 가는 사람들이다.

다만 거의 모두가 경제적인 이유로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기에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학비가 엄청 쌌다. 2주에 두 번 출석을 하고 매일 라디오를 통해 학습을 듣는 형태이다 보니 당연히 저렴하다.

더구나 방송통신고등학교의 취지가 어떻게 보면 지금의 온라인 학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이 제한이 없었다.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는 어른들을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분같다.

적지 않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한 참 어린 동생, 혹은 조카뻘과 함께 학교를 다닌다는게 말이다.

 
 

 

ㅎㅎ

그렇게 살았다.

삼겹살을 고등학교때 처음 먹어봤다.

고기를 먹으면 배가 아파오는 통증. 이거 아는 사람 있을래나?

ㅎㅎ 이런 말 하면 쑥쓰럽지만 그냥 늙다리의 라떼다 싶으면 된다.

 

 

내가 검정고시가 아닌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소풍, 수학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소풍을 간 곳이 서오릉이다.

지금에 돌아보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런 인연이. 신기하지?

방송통신 고등학교는 전국구다.

 

방송통신대학교 출신들을 볼 때마다 한 편으로 참...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대한민국의 대학중 유일하게 입학하긴 쉬워도 졸업하기 어려운 곳이다.

방송통신고등학교는 그렇지 않다. 그래도 입학하는게 어렵다. 정말 그 곳을 선택할 수 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지금은 더 그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방송통신고등학교출신들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 마음뿐이다. 대한민국 방송통신소등학교 출신들을 응원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아마도 2학년때 수학여행을 갔다. 1박2일로 경포대를 간 것으로 기억을 한다.

방송통신고등학교의 학생들 대부분이 직장인이다 보니다로드는 영계였다.

토요일에 가서 일요일에 돌아오는 그런 스케쥴이다. 지금 돌아봐도 가슴 설레인다.

당시는 토요일에도 일을 해야 했고 ... 아마 학교도 그러지 않았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박2일이었지만 다른 것은 기억이 없는데 나이트클럽은 기억이 난다.

딱 두 가지 장면이 생각이 난다.

 

 

 

하나는 클럽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같은 반, 하지만 40대쯤 되었던 분이다.

그 분이 소주를 따라 주시면서내 기억엔 소주다. 나이트클럽에서 소주.

술은 어른들에게 배워야 하는거다.

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그 말이 지금까지 이렇게 남아있고

나는 술버릇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름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다지 점잖치 않은 술버릇이 그 잊혀지지 않음으로 인해 이나마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같은 반이었던 누나와 춤을 췄는데 그 누나가

너 춤 잘 춘다, 나이트클럽 자주 다니는 거 아냐? 라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그 곳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냥 정신없이 흔들었는지 모른다.

그 누나는 잘 있는지 그냥 궁금하네.

당시 방송통신고등학교에 학생들이 없다보니 2학년에서 3학년도

같은 학생들이 학년만 올라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어느 날 하교길에 갑자기 팔짱을 끼는데 얼굴이 나도 모르게 빨개져서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을 했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한 동안 나이트클럽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보통 당시 어느 도시에서나 있던 줄리아나, 한국관, 월드컵 등...

그래, 그런 곳들이다.

다로드 한 때는 참 춤 잘 췄다. 비록 족보는 없는 막춤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 춤으로 중국의 칭다오, 단동,광저우, 심천, 종산, 하이먼까지 두루 두루 놀아다녔다.

 

나이트클럽에서 부킹도 참 열심히 했고 돈 떼먹고 도망간 적도 있고 그 웨이터에게 사과를 이 자리에서나마

그냥 젊은 날의 객기, 혹은 추억, 뭐 그런 것들이다.

 

지금은 나이트클럽하면 우리 동네에는 한국관이 그나마 있더라만,

이제는 나이가 나이니 만큼 잘 안 다닌다.

ㅎㅎ 한 창때만 해도 자리에 앉지를 않았는데 말이다.

단지 담배피기 위해서 앉을 뿐이었다.

다, 기억이다.

 

참, 열심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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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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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운 프로젝트에 돌입해야 한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 말이다.

소상공인 치고 이런 생각 안 해 본 사람 있을까?

나는 계속 일을 핼야 하나?

내가 없어도 직원들끼리 잘 하고 돌아가는 회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내가 이 동영상을 보고 그렇구나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행동을 보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1. 직원과 경쟁하지 마라.

2. 내가 원하는 결과를 직원이 할 수 있게 해라.

3. 작은 성공의 법칙을 따라라.

4. 모든 직원은 인재다.

5. 내가 잘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ps;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이런 고민이라도 하는 건 행복 할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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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를 호되게 겪었다.
내 세대는 모두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어느 세대든 동년배의 애환을 공유하는 것은 자연스럽겠지만
우리 세대도 그렇다. 대학만 졸업하면 직장이 잡히고 그 직장에서 
눈치껏 열심히 일하다가 나이들어 은퇴하고 뭐 그런 계획이 있는 없는 시절이었다.

 

1997년 12월, 당시 호주 케언즈에서 워킹홀리데이 막바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다운타운 듀티프리샵이라는 케언즈 공항내의 면세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가 11월인가, 12월인가...

식당에서 일하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중국인이 말을 건넨다.
"한국 부도났다며?"
잉? 무슨 소리야.
신문을 보니 Korea bankrupcy라는 글자가 들어온다?
뱅크럽시? 무슨 국가도 부도나나?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나한테는 그 시기가 고난의 행군이었던 것 같다.
뉴스에선 연일 대기업에서 중소기업까지 부도소식이 들려왔다.
구조조정은 일상이었고 노점상들도 참 많았던 시기다.

 

구미공단에 일이 있을까 여인숙에 머물면서 교차로나 벼룩시장을 뒤져가며 
일자리를 찾다가 결국 경북 칠곡의 어느 부직포 공장에 들어갔다.
6시 넘으면 주변이 쥐죽은 듯이 조용한 산등성이에 지어진 농공단지였다.

 

두 어달 일했는데 월급이 나오지를 않아 결국 다시 부모님이 계신 천안으로 올라와
취업하게 될 때까지 이런 저런 알바를 하며 당시 정부에서 지원하는 교육을 받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가 지금까지 알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었고 가 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렇게 직장을 들어가고 창업을 하기 까지의 몇 년은 어쩌면 그 때의 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나의 뇌리에 강한 트리거로 남아있는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말이었다.
내 인생은 미래형이기에 오늘의 나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내일을 위한 걸음이며 어제는 오늘의 내 모습이다.
비록 생채기가 있었을 그 때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어제의 나를 아름답게 채색하기 위해 오늘을 노력할 것이며 내일이 만들어 질 것이다.

지금까지 알던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접하고 있는 지금,
그 때의 기억들을 남겨보고자 한다.

 

DCT는 첫 회사이름이다.
DCT를 시작하면 다시 시작하는 지금을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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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 능력을 발휘했었던 것 처럼 이 곳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보자.

이제 30대 후반인데, 

충분히 혼자서도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

천천이, 차분하게, 믿고 가자.

 

모두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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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런, 뭐 이런 경우가 있다.

5인이 되지 않는 회사.

채용패키지프로그램에 지원한 당사자라 우리 회사는 적용이 되지 않는단다.

5인이상이 되지 않는 작은 회사는 지원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다닐 수가 없단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2020년 그래도 해 내야 한다.

 

소상공인의 비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해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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