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6"을 기획하며 가장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던 번디를 마쳐보니 실상 보는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번디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제대로 마친 건지 하는 의문, 마치 이빠진 동그라미를 그린 것 같내요. 나의 26의 모든 글들을 쓰면서 항시 나를 붙잡았던 것은 1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과연 그 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지 자칫 혼자만의 과거에 사로잡혀 그 것들을 미화시키는 것은 아닌 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지난 과거의 흔적들은 애틋해서 아름답게 포장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있기 마련 아닌가요. 특히 어떤 것들은 기억의 골짜기에 아직까지 뚜렷하게 남아서 그 아쉬움을 아름답게 다시 재생시켜 보려는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그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과 실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실명을 넣어도 당사자가 개인적인 친분으로 무사할 것 같은 이는 실명을 기입했고 그렇지 않은 이는 가명을, 그리고 기억이 허락하지 않는 이는 부득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현재까지 제 기억에 맑은 가을 하늘 색깔로 남아있는 manami와 지애(天愛)와 관련된 내용은 문맥상 필요하다 싶은 부분에만 간헐적으로 넣었기에 글의 구성에 허점이 될 지도 모릅니다. 빠져서는 안되겠다 싶은 경우에 이 곳 저 곳에 자리를 하다 보니 마치 완성한 그림에 덕지 덕지 덧칠한 것 같게 되더군요. 처음에는 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그래서 마나미와의 내용도 상당량?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번디를 마칠 때쯤 기억의 여기저기에서 부딪치는 지애의 기억을 용게 피해다니다가 문득 번디이후의 생활이 약 2개월이 우려되더라구요. 어떤 오해도 걱정이지만 그 기간동안 같이 여행을 했거든요. 우선은 어떻게든 메꿔 보렵니다. 그러니까, 이 후 독일인 농장의 우핑(Woofing)과 에어리 비치(Airie beach), 그리고 보웬(Bowen)의 어느 정도까지는 내용상 헛점이 보이더라도 양해를 구합니다. 그 때의 기억들 언젠가 "나의 26"을 마치고 하릴없이 일상에서 허우적 댈 때 저의 기억들을 다시 채색해 볼 생각입니다. 고운 빛깔루다가 말이죠. 느낌이 말해주던 그 날들을 말입니다. 혼자만의 애틋함을 그리면서, 어쩜 모르죠. 혼자서 간직하며 잠이 안 오는 까만 밤에 떠 올리며 키득댈지도,
 

낙 서 후휴~ 힘들다. 가끔 실망스럽기도 해요.도대체 무슨 글들을 쓰는 건지 말이죠. 이런 글들을 써야 하나? 어디까지 써야 하며 어디까지 넣어야 하는 건지, 이러다가 손님 떨어지는 건 아닌지, 쩝! 휴~ 며칠간 낮과 밤이 뒤 바뀐 생활을 했더니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군요. 헤구, 전생에 올빼미였는 지 부엉이었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나의 26을 쓰는데 정성?을 쏟다보니 다른 메뉴를 업데이트 하기가 조금 힘드내요. 변명일 수도 있지만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도 중요한지라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하니 말이죠.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그래도 오시는 분들이 방명록에 글들을 남겨주시면 힘이 되더군요. 아마 홈페쥐 갖고 있는 분들은 그 기분 아실 겁니다.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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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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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다버그에서의 생활도 어느 덧 끝이 나간다. 스쿠바 기간중 롤러 블레이드를 타다가 다친 무릎의 생채기로 때때로 일을 하면서도 계속 나오는 고름으로 이렇게 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몇 일 쉬게 되었다. 지쳤나 보다. 따분함에 지친 것 같다. 스쿠바 자격증도 땄고 비록 갖고 있는 돈은 700여$에 불과하지만 5000km pass가 있고 해 보겠다는 의지가 나에겐 밑천이었다. 어딜가야 죽겠냐 라는 자신감. 그렇게 살아왔으니 머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풋! 번디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사실 번디의 주변 경관은 시드니나 케언즈 또는 골드코스트같은 호주의 여느 도시처럼 뚜렷하게 구분되는 매력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곳에서 지낸 3개월 가까운 기간이 나에겐 충분한 기억의 도시가 되기엔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번디의 생활도 끝이 나간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금 뭐 할까?

귀국하고 나서 처음에는 연락을 했는데 일상에 파묻혀 기억속에만 남은 사람들. 번다버그. 이름마저 가물 가물한 국민대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자주 놀러가던 시티 백팩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무척 외국인과 잘 어울리던 활발한 놈이었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마음이 통한다 싶어 더욱 그 놈과 많은 애기를 나누었는데 언젠가 가 보니 자리에 없어 동생들에게 물어보니
칠더스(Childers)로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 칠더스로 향한 것은 순전히 여자 때문이었다. 혹시 그 놈이 보더라도 오해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글을 이어나가겠다.  처음 그 놈을 보았을 때부터 그 곳에는 한국여자가 드물게 한 명이 있었는데 매우 활달한 성격의 아가씨였다.그런데 그 아가씨가 번디에 일이 없자 칠더스로 향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번디에서 한 2~3시간 내륙쪽에 있는 그 곳은 번디가 일이 없을 때에도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눈치가 있어 보이는 경희대 다니던 동생이 아마 그 아가씨 찾아 갔을 거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일뒤 다시 찾아 갔을 때 그 놈 풀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길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것이었다. 번디에서 키워왔던 그의 연정?이 칠더스에서 꽃을 피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얼마 뒤 그는 예전의 모습을 되 찾았지만 친하게 지내던 놈이 잘 안 풀리니 안 되 보였다. 하물려 그 것이 여자와 결부된 일임에야, 한국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데 이국에서야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흡사 광수 일기의 광수씨처럼 생긴 그의 모습이 참 정이 많게 생긴 놈. 훗 날 그 놈은 또 한 번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이 놈이 마리화나에 빠져서 한 참을 헤맨 사건이다. 힘들게 벌어 온 돈을 몽땅 그 것에 써 버린 것이다. 외국 친구들과 잘 어울리다 보니 마리화나가 합법적인 일부 유럽국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버린 것이다.(야, 너 혹시 이거 보더라도 화는 내지 마라 우리의 동생들을 위한 거라 생각하고 웃어 넘겨라. 연락하고 임마!) 하지만 호주는 불법이다. 힘들게 돈 몇 푼 벌어서 그 걸 그대로 연기로 날려 버렸다는 소리에 황당하기도 하고 또 화도 나기도 하고 착잡하던 기분. 내가 찾아 갔을 때 이 놈은 침대에 누워 맥이 풀려 초췌한 모습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야 대화를 나누어 주는 정도여서 아쉬움만 더 했지만 말이다. 번다버그를 떠나서 훗날 보웬(Bowen)에서 그 곳에서 경희대 동생을 만나게 되어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어딘가로 내려갔다고만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시 연락을 했을 때 물었더니 허허 하고 웃더니 대마초 재배하러 내려갔다고 웃는 것이다. 후훗! 다행히 학업에 열중하는 듯해 이런 저런대화를 나누고 후일을 약속하며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하지만 다음에 한 번 만나자는약속만큼 애매한 것도 없는 것처럼 그 걸로, 쩝! 이 글 보거든 화내지 말고 연락이나 해라. 졸업했겠구나. 시절이 하수상한데 좋은 곳에 취업이나 했으면 좋겠다.

사실은 나도 마리화나에 대한 썩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순전한 호기심에 말이다. 호기심 때문에 인생 쫑한 작자가 많다는데, 언젠가 영국친구가 권해서 몇 모금을 해 봤는데 으~~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저 몸이 붕붕 뜬 것 같은 기분. 지애가 놀라서 무슨 일이냐구 물어보는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지애. 그 건 마치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것을 또 케언즈에서 경험하게 됬으니, 아직 범죄시효가 지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행여나 높으신 분들이 볼 까 무섭다. (에그 무서버-이런 글 썼다고 또 괘씸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쩝!) 번디를 떠나기로 하면서 가지고 있는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애물단지이던 노트북과 옷,책을 보내며 65$이라는 피같은 거금이 들었다. 짐을 정말 줄여가기 바란다. 호주에서 많은 것을 하겠다고 애초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말을 해 본다.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한다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과연 그 목적에 걸맞게 호주를 갖다 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 또한 그러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부럽기는 하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지만 다음에 신혼여행을 간다면 내가 걷지 못한 호주 서부 지방을 그 녀와 함께 걷고 싶은 계획으로 미루고 나니 아쉬움은 덜하다. 그 동안 일하던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스쿠바 라이센스도 딴 후 나는 다음 목적지인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가기 위한 관문인 하비 베이(Harvey bay)를 예약했다. 5000Km 패스를 터미널에서 사 놓았기에 차비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패스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호주를 전국일주 하는 것부터 거리별로,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 구간별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 자신의 경로에 맞추어서 구입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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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는 그 전날밤 나와 함께 가고 싶어하던 눈치가 역력하던
지애는 내가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간다고 하자 자기도 그 곳에 갔었다며 나의 여행경로를 물었다. 나는 프레이저로 가서 사파리 투어를 마친 후
Surfers Paradise로 갈 것이다. 그 곳에는 한국인이 많다고 하니 일자리를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애기했다.

아래층 티브이 룸에선 심슨이 시작됐는지 왁자지껄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선 간간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정말 번디 아니 호주의 밤 하늘은 지겹도록 별이 많다. 저 별들이 다 떨어진다면 난 어디에 숨을까? 지애는 나와 같이 가고 싶다며 전에 갔을 때에도 하비베이 까지만 갔고 사파리 투어를 하지 못했다며 이번에 꼭 가고 싶다고 한다. 나는 서퍼스로 가야 하지만 너는 북쪽으로 올라 갈 거잖아.난 혼 자 가겠다. 그 녀가 눈물을 보인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크다. 그 눈에 맺힌 눈물. 왜 나에게 눈물을 보이는 걸까. 여자가 눈물이 흔해도 안 되지만 남자도 여자의 눈물에 약하면 안 된다. 말이 쉽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이쁘다. 눈만을 봤을 땐 말이다. 남자들도 하나같이 눈썹이 짙고 풍성하다. 물론 다야 안 그렇겠지만, 내가 표를 물었을 때 자기도 패스가 있다며 당일 가면 표가 있을 거라며 미소를 짓는다.
나도 웃고 만다. 닐에게 내일 check out한다고 말하겠다며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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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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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앙 너기(Julian Nergi)는 수더분한 인상의 소탈한 다이빙 마스터였다. 그가 주고 간 책자를 너른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번디의 햇살을 맞으며 공부하기를 일 주일, 난 줄리앙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강의에 합류하게 되었다. 터미널 앞에 있는 Aqua scuba. 번디에 도착할 때 무심코 지나쳤던 이 곳에서 스쿠바를 배우게 될 줄이야, 정말 사람일은 모를 일 같다. 나와는 전연 상관이 없을 듯한 무언가와 관계를 맺게 됐을 때 갖는 감정은 미묘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과의 관계는 어떨까. 줄리앙은 나와 또 다른 일본인에 대해 배려를 해 주었고 전문용어에 대해서는 쉬운 말로 풀어주며 확인을 거듭했고 그 덕에 무사히 이 틀째 마지막 강의후 이론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까운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다음 날 부터 풀장에서 수영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기초체력 테스트가 맞을 듯하다. 수영 100m 왕복과 물 속에서 고개만 내 놓은 채 10분간  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풀장이 극히 협소한 관계로 100여m를 헤엄 치는 것이었지만
나에게 그 것은 42,195km의 마라톤 풀코스에 비견 되는 거리였다. 마라톤 선수가 들으면 화낼 일이니 10km 단축 만라톤이라고 하자. 어쨌든 나는 번번이 실패해서 이 후 1주일간을 수영장에서 살게 되었고 번디의 서늘해지는 날씨덕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것 같아 조바심만 더욱 앞섰다. 다음 목표는 프레이저 아일랜드다(Fraiser island). 베낭자들끼리 흘러다니는 대화중에는 어디 어디가 참 좋더라며 여행지를 추천해주기도 했는데 프레이저 아일랜드의 2박 3일간의 사파리 투어를 추천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번디를 뜬 이후 그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풀장에서 악전고투하기를 여러 날 째, 줄리앙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 지 자유형만을 고집 할 필요는 없다고 해서 나는 자유형과 배영을 병행하며 때론 잠수도 불사하며 100m를 완주(완영?)하게 되었다. 한 주전자의 물을 마시고 완주 했지만 그 기쁨을 어찌 말루 하리. 인간 승리
다음은 물 속에서 10분간 떠 있기. 주위의 외국인은 농담도 하며 여유있게 떠 있었지만 내겐 수영보다 더 힘들 줄이야. 결국 이 것도 줄리앙이 떠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배영자세로 누워 있었지만 여기서는 두 주전자의 물을 마셨다. 이 후 스쿠바 장비의 이용법과 풀장안에서 스쿠바 시연을 했다. 비록 풀장안이었지만 물속에서 숨을 쉰다는 게 이렇게 신기할 줄은 몰랐다. 바다는 어떨까. 이제 바다다. 백팩으로 돌아오면서 몸은 춥고 콧물을 흘러내리며 뱃 속은 풀장에서 마신 물로 연신 요동을 쳤지만 헛 트림을 하면서도 내일 바다에 들어갈 생각을 하며 웃고 말았다. 헤~~! 끅!

다음 날 우리는 아침부터 장비를 서로의 몸에 맞추고 부산했지만 모두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어딘 지 알 수 없는 언덕바지에서 우린 옷을 갈아입었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지애가 따라와 주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무척 고마웠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줄리앙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유를 물었을 때 파도가 세다는 것이다. 파도가 세다구? 잔잔하기만 한데, 이유는 바다 속에 들어가서 알 게 되었다. 바다속에서 스쿠바 장비를 매고 나아갈 때 물결을 타고 가는게 훨씬 수월하지만 물결을 역류한다고 할까?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체력이 많이 소모되면 비상시에 의연하게 대처하기가 힘들고 결국은 사고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깥에서 보는 파도와 바닷속에서 대하는 파도는 그 힘이 다른 것이다. 해보자는 의견에 우리는 스쿠바 장비를 매고 바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 바위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고 지애 또한 그 곳까지 따라와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드디어 줄리앙의 신호에 따라 우리는 하나 둘씩 들어가고, 흐린 날씨로 추위를 느낄 만한 날씨였지만 바닷속으로 들어왔다는 경이감과 신비로움에 도취되어 추위는 느끼지 못했다. 바다는 5m앞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수초들과 바위사이로 헤엄치는 이름모를 고기들. 나를 전혀 겁내지 않는 고기들이 마냥 신비스럽기만 했다. 바다는 지극히 평화롭고 우리는 바다 안에서 줄리앙의 신호에 따라 이 곳 저 곳을 움직이며 번디의 앞바다를 만끽했다. 30분쯤뒤 우리는 다시 뭍으로 올라왔다. 지애는 여전히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애에게 나는 바닷 속 세상을 애기 해 주며 마냥 기뻐했다. 지애 또한 일본에서 스쿠바를 해 봤다고 한다. 일본의 바다는 세계적인 스쿠바 명소중의 하나지만 값이 비싸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바다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뒤에 현상해 보았을 때 흐린 날씨 관계로 잘은 나오지 않아 아쉬움은 남지만 그 때의 감흥을 느끼기에 부족하지는 않다. 다음 날 우린 마지막으로 바다에 들어갔고 마지막 바다에서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치고 바다 안을 유영하며 마지막 강습을 마쳤다. 그 날 줄리앙과 우리일행은 어느 바에서 자축연을 했고 나는 같이 온 지애의 강요아닌 강요에 노래를 불러야 했다. 팝송 하나쯤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중학교때 본 뮤직비디오에 반하고 리듬에 반해 버린 "Wham의 last christmas" 우린 그 날 그렇게 자축연을 마쳤다. 번디의 밤거리는 여전이 외로웠다.


모든 테스트를 마치게 되면 줄리앙 너기는 스쿠버 협회에 명단을 통보하며 그 명단의 주소로 자격증은 우송이 된다. 훗 날 집으로 전화 했을 때 자격증이 왓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흥에 겨웠고 무언가를 해 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제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지. 떠나는 계획. 지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애는 나와 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무작정 그녀를 데리고 다닐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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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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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이면 들려오는 닐의 마이크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내가 속한 목장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다시 잠에 빠지고는 했다. 가끔 깊은 잠에 빠져 나오지 않으면 닐이 직접 와서 깨우고 나가는 데 그래도 안 나오면 다른 대기 인력으로 대체 하고는 했다. 한 번 대체되면 그 날부터 그 사람의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못 나간 사람은 다시 일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처음 일거리가 없을 무렵 혹시 그런 일이 있을까 해서 3일을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일이 없어 그냥 기다리다 들어오고 말았다. 그런 경우 외에 농장에서 직접 해고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 또한 두 번째 농장에서 그렇게 당했으니 말이다. Sam의 농장에서 토마토를 딸 무렵이었다. 토마토를 따는 기계에 앉아서 기계가 가는 대로 손놀림을 빨리 해서
익었다 싶은 것은 무조건 따는 것이었다. 너무 안 익은 것을 따도 너무 익은 것을 따도 안 되며 또 속도가 너무 늦어도 안 된다. 기계속도에 맞추어서 그리고 자기의 앞에 앉은 사람과 보조를 잘 맞추어 따야 한다.또 그 뒤에서는 기계에 앉아 따던 사람이 미처 못 딴 걸 따라다니며 따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처음 Sam의 농장에서 그 일을 했다. 3일 뒤부터 기계에 앉아 토마토를 따기 시작했는데 쉴 틈이 없고 허리를 계속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고 손은 토마토를 찾아서 움직이는데 편해 보일 듯하던 그 일이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 일 주일쯤 되던 언젠가였다. Sam은 기계에 앉아 정신없던 내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잠깐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어떤 말도 없이 그냥 집에 가라는 것이다. 그 것도 웃으면서,푸~ 나도 웃으면서 그 동안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느 농장을 가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샘의 농장에서 과일을 따면서도 앞에 앉은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면서 했는데 그 것이 눈에 걸린 것 같았다. 말하러 이 곳에 왔냐는 경고를 들었으니 말이다. 샘의 농장은 평판이 좋지 않은 곳이었고 다른 여행객들도 그 곳으로 일을 나가게 되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쌕을 당한 후 그 곳에서 다시 백팩으로 갈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 했다. 백팩에서 그 곳까지 벤으로 한 시간 이상을 달려온 거리이니 말이다. 결국 히치 하이크를 처음으로 하게 된다.

호주에선 히치 하이크가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다. 하지만 워낙 여행객이 많은지라 묵인하고 있지만(실제로 투어 에이전시에서 나누어주던 여러 책에선 히치하이크가 호주에선 금지되어 있다고 안내글을 볼 수 있다.), 쌕 당한 이후 히치를 한 이후 번디에서 시내를 나갈 때는 히치를 많이 이용했다.   신호등에 멈춰 서있는 차를 보면 그 옆으로 다가가 좀 태워달라고 때 쓰는? 내 모습이 지애는 재미있어 보였나보다 지애는 방 구조가 특이해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내 방으로 들어가면 그 곳에 또 문이 있는 작은 방에 다른 여자 여행객들과 방을 쓰고 있었다. 더블침대가 2개 있는 곳! 여자들이 쓰는 방이라 어느 정도는 깨끗하지만 칙칙함은 남아 있었다.번디에 온지 얼마 안 되었던 지애는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과거의 역사를 물었을 때 그 녀가 우리 한국의 초등학생 정도의 역사지식 (한,일관계에 있어서의)정도밖에 없음에 자못 놀랐다.. 하지만 그 건 다른 일본인에게도 물었을 때 그 건 마찬가지였다.
일본 위정자들이 그들의 과거를 밝히지 않으니 젊은 그들이 우리가 과거에, 그리고 현재의 일본에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신세대역시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하지는 않은 지 반성해 볼 일이다.지애는 일본의 현대 젊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젊은 여성 자기 주장이 있었고 그 만큼 개성도 뚜렷한 아가씨였다. 시내에 놀러가 무엇을 먹어도 그 녀는 더치페이를
고집했고 어디 보러가자고 하면 그 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다른 곳으로 혼자서 가곤 하는 아가씨였다. 요즘 일본의 아가씨들이 그런가? 그렇다고 들었다. 그 곳에서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참 잘 어울렸다. 무슨 음식을 하면 같이 나누어 먹었고 또 같이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그 곳에서 만난 일본인들이 좋아서 그런걸까? 아마 그 건 아닐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젊은 가슴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미래에 사는 젊은이들이 미래를 위해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겐 살아야 할 날이 더 많기에.

sack당한 이 중에 smith라는 영국인이 있었다. 영어공부를 코치해주던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풀장을 가기도 하곤 했는데 스미스라는 친구는 나의 영어발음을 무시?또는 바꿔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던 친구였다. 나는 발음을 미국식으로 하려 애썼고 스미쓰는 미국식 영어는 미국밖에 안 쓴다. 유럽에선 전부 영국 영어를 쓰고 있고 이 곳 호주도 영국식 영어를 쓰는데 왜 미국영어를 고집하느냐는 투였다. 어쩔 때는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는데 난 우리나라는 미국영어를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을 해도 여전한 그의 고집.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지. 호주는 영국 영어에 가깝다. 물론 영영사전을 보면 호주 영어 특유의 구분이 있지만 최근에는 미국영어에 가까워지고 있는 편이다. 아니 미국 영어를 많이 쓰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호주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마치 유행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미국영어 특유의 음악같은 운율이 아마 고급스러워 보이는 지도 모른다. 어쩜 전 세계로 뻗어가는 미국의 힘이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지도 모른다.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보여지는 헐리우드의 영영화를 통해, NBA의 농구를 보며 또는 팝송을 들으며 미국의 문화에 익숙해 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스미스는 영어를 많이 도와줬고 그런 일로 티격대곤 했지만 재미있는 친구였다. 휘파람 불면 "삐삐"하고 소리나는 중국제 열쇠보조 장치를 사와 한 밤중 자는 모두를 깨우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느라 한 바탕 부산하게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그는 넉살 좋게 코를 골았고 또 무슨 냄새나라의 왕자같이 그의 몸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정말 그는 씻지를 않았다-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도 결국엔 닐이 하도 일을 주지 않아 다른 곳으로 백팩을 옮겼지만 가끔 놀러와서 닐을 원망하곤 했다. 사람들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이에게 잘 해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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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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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리가 없는 날엔 여행객들은 각자의 활동을 한다. 이미 많은 수의 여행객이 스킨 스쿠버 다이버 라이센스를 따고 나가기 시작했고 또 시내의 PUB(호주의 선술집)에서 경마를 하기도 했고 가까운 바다로 나가 일광욕을 즐기기도 했다. 한 번은 닐이 일거리가 없는 날 사람들을 바닷가로 나르기 시작했다. 밴으로 말이다. 우리 몇 몇은 도시락을 만들어 바닷가로 향했고 그 곳에서 점심을 같이 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뜨거운 태양아래 젊은이들은 잘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가. 우린 그 날 썬형의 제의로 거금을 걷어 엄청 큰 소 뼉다구와 양배추, 그리고 갖은 양념을 사서 저녁을 근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소 뼉다구는 호주에서 개먹이로 파는 것이라고 한다. 그 것도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처럼 정말 소 뼉다구가 아닌 살코기가 정말 많이
붙어 있어 뼉다구를 파는 건지 소고기를 파는 건지 모를 정도의 것이 개의 먹이. 하기야 인구는 적고 먹을 것은 풍부하니 그럴 지도 모른다. 우리는 웃으며 호주인들이 만약에 우리가 먹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웃고 말았다. 어쨌든 모처럼 우리는 영양보충을 했고 맥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한 번은 주급을 타서 맥주 한 박스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다음 날 저녁 없어졌다. 아마 번다버그를 떠난 누군가가 가져갔나 보다. 백팩에는 이런일이 가끔씩 일어나곤 했다. 또 스푼이나 볼(bowl)에는 돈이 걸려있는 상황이라(deposit) 잃고나서 부주의하게 놓여진 다른 이의 것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농장생활을 하다보면 서구인에 대한 어느정도의 인식은 깨지게 마련이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 서구인은 남을 잘 배려한다.? 글쎄 어쩌면 그 이유가 우리나라에서는 당시만 해도 대학생만 가능하다시피 한 비자였고, (지금은 정 반대지만 말이다) 중국같은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깨어있는 사람이지만 미국,프랑스,영국 등 소위 선진국에서는 어중이 떠중이가 모이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던 곳은 12명이 자는 데 9시면 소등. 그 넓지도 않은 곳에 작업복이며 작업화며 또 베낭이여 짐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잡지들과 음식꺼리들, 푸하~ 내가 이렇게 쓰고 보니 참 지저분할 것 같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대로 봐 줄만 한 것 같다. 앞으로도 여러 백팩을 거치지만 이 이 곳. 그 중에서도 내가 묵던 방이 깨끗치 못했으니 말이다. 그 건 어쩜 남자들만 쓰기에 그러한 지도 모른다. 다른 방은 남녀 공용 이었는데 또 남자들만
쓰더라도 인원수가 적은 데 우리방은 제일 큰 방이었다. 방의 배정이라든가, 일의 배정같은 것, 닐의 입김이 닿는 곳에는 인종차별이 아닌가 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고 내가 언젠가 홀랜드인에게 말을 했을 때 그도 수긍하는 면이 있어 보였다. 남녀 공용인 방에서는 생활하는 여자들도 거리낌없이 옷을 갈아 입고는 했다. 나야 보지 못했지만 일행에게 궁금해서 물어보니 그렇게 말하드라. 한 번은 누굴 찾으러 그 방을 들어갔는데  거들이라고 하나? 얇은 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내 물음에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하였다. 한국여자는 어떻게 했는 지 모르겠다. 내가 생활했던 당시는 한국여자들은 없었고 내가 번디(번다버그의 애칭)를 뜬 이후로 한국여자들도 많이 왔다고 한다. keitie's farm에서의 일도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고 1주일에 이틀 이나 사흘 정도의 휴일엔 -일요일과 아직 안 딴 도마토가 익지 않아 익기 기다리는 하루나 이틀, 또는 비가 내리면 다음 날 일은 하지 않는다. 땅이 그만큼 질척거리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시내 중고가계에서 35$주고 산 롤러 블레이드를 끌고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녔다.

프린세스에서 시내를 지나 철길을 건너면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곳에는 번다버그를 가로 지르는 강을 사이에 두고 공원쪽에는 작은 동물원이 있고 건너편에는 Botanic garden과 저 멀리 있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크로커다일 던디를 보았다. 일 주일에 한 번 feedig time이 있고 그 시간에 사람들이 악어의 움직임을 보려고 모여든다. 난 주위의 많은 새들가운데 닭이며 병아리며 많이 있길래 하등 다를 것도 없는 그 닭들이 내가 모르는 특별한 종류인 줄 알았었다. feeding time에 그 걸 알고 나서 얼마나 웃었든지,
보타닉 가든은 드 넓은 호수 주위로 작은 열차 선로를 놓고 그 위로 열차-열차는 아니고 아주 작은,-를 타고 폼 잡는 곳이었다. 내가 갔을 때는 공사중이어서 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 넓은 곳에 이름모를 수목들과 꽃들과  번디의 유적들이 모여 있고 박물관도 있어 참 아기자기 한 곳이다. 역사가 짭은 호주에서
유적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지만 번디 초기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번디는 Rum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호주를 떠나는 사람들이 면세점에서 Bundy rum을 사 갈 정도로 말이다. 그 곳 공장은 시내 외곽에 있어 프린스하곤 가까운 편이지만 가 보진 못했다. 입장료 얼마 내고 들어가면 생산 과정을 견학하고 번디 럼을 시음한다고 한다. 번디를 떠야 겠다고 생각할 무렵 스쿠바 라이센스라도 따갈 요량으로 등록을 하던 날. 처음 번다버그로 도착할 무렵 보았던 스쿠버 마크가 떠 올랐다. 터미널 바로 앞의 그렇게 세련되지 못했던 건물,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건물에 스쿠버 장비가 떠 올랐다. 이런 걸 감개무량이라고 하나? 등록비
호주에서 제일 싼 149$이었지만 medical test에 30$과 이 것 저 것해서 200$ 정도 들지만 여전히 호주에서 제일 싸다. 이유는 바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별로 볼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Great Barrer Reef라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바다가 이 곳 번디에서 시작한다지만 사실 번디는 바닷속에서 고기 구경도 드물게 한다. 참고로 G.B.R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당시 호주에는 약 10여개의 문화유산이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 연유로 결국은 가격으로 경쟁력을 갖는다고나 할 까. 3박 4일 코스인데 하루는 실내에서, 하루는 풀에서 그리고 이틀은 바다로 나간다. 처음 신청을 하면 한국어로 된 manual을 주는 데 생활영어도 고만 고만한데 전문용어를 써가는 강의를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결국 믿을 건 그 한국어로 된 manual뿐인데, 사실 스쿠바는 위험한 요소도 분명 갖고 있어서  처음 신청을 하면 Diving master인 강사는 그 책을 주며 공부를 하고 어느 정도 이해 하겠거든 연락을 다시 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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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디는 번다버그의 애칭이다. 도시에 애칭을 부치는 자유.

그 일 이후로 다시 1주일을 지내다가 나에게 돌아온 일은 `스쿼시'라는 야채를 따는 일이었다. 스쿼시.  농장주는 Dunn, 많은 과일을 따 보았지만 힘은 힘대로 들고 돈 안 되는 일이 바로 이 것을 따는 것이다. 농장에서 사실 힘 드는 것은 없다. 여자도 무난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허리가 무척 아프다는 것! 그래서 혹시 농장에 갈 작정이라면 차라리 신신파스 같은 조그만 걸루 왕창 사갔으면 한다. 물론 그 곳에도 맨소래담 비슷한게 있긴 하지만 조금 비싼 거 같고 무겁지도 않으니 말이다. 상비약이라고나 할 까? 머 한 참 뒤에는 아픈 게 정상인 것처럼 아픈대로 일하지만 처음 보름간은 정말 허리가 내 허리가 아니었다. 이 후 농장에 있는 동안 약 4개월은 신경통을 달고 다니는 것 같다. 글세 허리가 튼튼해 진다면 모를까. 이 건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호소하다시피 말하는 통증이다. Backpain을 연발하며 서로 웃다 보면 잠시 넘기기도 하지만 잠 잘 무렵 좋은 침대도 아닌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음. 청정원 마요네즈 TV CM에 보면 보이는 끝이 안 보이는 그 밭을 배경으로 두 꼬마들이 웃음을 짓는 데 그 뒷모습을 보고 호주의 농장을 상상하면 비슷할 듯하다. 전부 다야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컨트랙인 줄 알고 정말 허리를 피지 않고 따며 작업 후에 주어질 급료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어라! 그 건 시간급이었다. 쩝! 어쨌든 Dunn은 나보러 베스트 워커라며 입에 칩이 말라라 칭찬을 했지만 속쓰림은 어디에 하소연하노. 몇 일 뒤 다시 주어진 일은 번다버그의 하이라이트였던 keities농장의 egg tomato. 정말 달걀같이 생긴 토마토를 색깔 구분해서 갖고 다니는 바켓에 채울 때마다 매니저가 각자에게 나누어진 표식을 꽂아 놓고 일이 끝난 후 그 표식을 계산 하는 일이었다. 내 경험에선 이 게 가장 짭짤한 벌이었던 것 같아. 물론 내가 경함한 과일따기에서 만 말이다. 그 건 컨트랙이었고 그 만큼 뛰어다녀야 했다. 그 곳에서 한 태국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뛰어다니며 밥먹는 시간 마저도 아까운 듯 도마토를 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 는 영국 여자-애인이 아닌 가 싶다-와 함께 다녔는데 둘이 정말 일을 잘 했다. 마치 돈 벌러 호주에 온 사람들 처럼 말이다. 나도 그런 계획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학교 등록금을 호주에서 벌어 온다는 -오래 전에 지워 버렸고 그 저 남은 기간 별 탈없이 잘 있다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열심히 뛰면 100불 이상은 챙길 수 있었다. 다른 이는 나를 부러워 했지만 지금까지 일도 못하며 보내온 시간을 보상한다는 생각에 땀을 흘려야 했다.

 가끔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니며 근처의 호스텔에 있는 한국인들과 어울리며 지내기도 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 무슨 사연이든 들여다 보면 귀를 기울이면 가슴 저미는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친구들, 친구들이라 부르기엔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이 대부분 인지라 머 하지만 그 곳에서 그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호주까지 오게 된 경유야 필설로 다 하랴만 말이다. 지금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사연을 안고 그 곳에 갔겠지만 말이다. 호주에서 만난 이들은 대학생이 대 분분이었지만 삼성 반도체의 연구원에 다니다 경험을 쌓겠다는 이유로 퇴사하고 나온 사람, 학교 졸업하고 온 사람, 휴학계 내고, 백수 건달로 집에서
부모 돈으로 카페 사장하다가 재미 없다고 놀러 온?, 동생. 참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다. 번다버그에서는 많은 일본인들을 만났는데 이상한 것은 일본 여자들은 부침성이 좋은데 남자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글쎄...... 어느 서양의 인류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지 아마,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중국인 요리사를 두면 그 남자는 행복한 거다"라고, 하지만 프린세스에 있던 한국인들은 거의 다가 성격이 활발해서 같이 일하던 다나까와 쯔꾸미등 일본인 친구들은 우리와 잘 어울렸다. 다나까는 일본에서 우편을 배달하는 차의 운전기사를 하다가 호주로 온 28의 형이었고 쯔꾸미는 노가다며 이 것 저 것을 하다 이 곳으로 온 동생이었다. 그리고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인도에서 3개월 살다가 온 일본 남자 켄지. 대학교 다니다 온 ??등 번다버그에서도 보웬에서도 그리고 케언즈에서도 만난 일본인들은 정말 친절하고 성실했다. 처음 정이 들기 힘들지만 정들면 쉽게 친해 질 것 같은 사람들. 특히 "신"은 보웬에서 만나 케언즈까지 정말 끈끈한 정을 쌓은 일본 친구다. 그의 도움도 받았고, 그렇게 쉬는 날에는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뭘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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