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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시작한지가 햇수로 4년을 넘어간다. -.-;
이젠 그 때의 기억을 떠 올리거나 꺼낼 기회가 있으면 호쾌한 웃음이 나온다.
그 웃음은 잘 했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일 것이리라.

이제 케언즈이야기도 마무리지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항상 새로운 길을 걸어왔고 도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케언즈를 모처럼 떠올리니 생각이 난다. 이름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강남어디에서 까페를 운영하다가 아버님의 성화에 못이겨 호주로 왔다는 그 아인 돈은 많았다. 나보다 세 네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디쉬워셔로 일할때 피얼스 뒷편에서 낛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때의 만남이었다. 그 아이가 말하는 것은 의아심을 넘어 또는 부러움까지 때론 갈 때가 있다. 자신이 운영하던 까페가 강남에서 꽤 이름난 곳이이서 연예인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그런 류의 시시껄렁한 애기였지만 귓가를 자극하는 강남이란 동네의 풍속도를 얼핏 들을 수 있었다. 그 때까지 강남이란 곳에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여유를 즐길만한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다. 가끔 매스컴에서나 들었을까? 그 아인 친구와 둘이 케언즈로 와서 쉐어를 구하고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케언즈를 택한 이유가 순전히 꺼리가 많다는 이유란다. 볼꺼리, 놀꺼리, 애깃꺼리 말이다. 이제 케언즈 생활도 익숙해져서 피얼스의 부두에 앉아 저 바다 건너 어드메쯤 우리 집이 있겠지 하며 잡담을 나누기도 하며, 외모에서 부티가 나는 그는 한동안 종종 만나면 영어도 안되고 그래서 어학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가끔 피얼스에 나와 나와 이런 저런 잡담을 했는데 어느때부턴가 안 보이길래 친구에게 물어보니 일본인들과 친해져서 놀러다니기 바쁘단다. 하하 그냥 웃고 말았다. 이 후 그 아이완 대화 한 번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도 머하나? 까페 하나?

나와 같이 자취하던 그 아일 빼 먹으면 안 되지. 두 달정도 되는군. C대 경제학과를 다니던 그 아인 내가 쉐리단 스트리트의 쉐어룸을 구하고 이태리인과 일본인이 자기친구한테로, 여행으로 떠나면서 그 집을 나 혼자 사용하게 되면서 구한 아이다. 전형적인 대학생의 외형으로 CPA를 따고 싶다며 열심히 공부하던 아이. IMF사태로 일찍 귀국하며 이런 저런 일상에 치이다 보니 연락도 못하고 결국 무얼하나 가장 궁금해하는 동생이다. 내가 잘해주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던 지금 생각해도 많이 미안한 동생이다. 그 때 동생이 보던 책이 "오성식의 SOS 7200" 맞나? 그 책을 무던히도 열심히 공부하더라. 아마 지금쯤 좋은 곳에 취직 하였으리라. ㅋㅋ 그 곳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좋아하고 오해하고 애정 싸움도 한 다는 것을 보여준 동생이다.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적어가다 보니 무슨 사람애기가 이렇게 많나 싶기도 하다. 내 생에 사람이 부족해서일까? 하~ 생각해 보면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웃고 떠들던 기억이 참 행복하기도 하다. 그래 난 사람이 부족한가 보다. 앞으로의 생은 사람농사 잘 지어야 겠다. 이제 틈틈이 호주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려면 나도 이 곳을 찾아봐야 할 거 같다. 몇 년 전에 쓴 글들을 보다 보면 아~ 그 때 그랬었지. 하며 씨익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나는 오늘도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고 또 과거의 사실을 잊어 간다. 머 이 것을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인 애긴 할 순 없겠지만 아쉬울 때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어쩜 공연한 글쓰기에 시간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일상에서 그 때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애기할 일도 없고 또 말한 다는 것 조차 겸연쩍기 짝이 없었는데 그 동안 이렇게 써왔고 뒤 돌아보니 그 건 기억뿐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렇게 난 살아있고 앞으로도 내가 있는 이 땅을 밝고 있는 동안은 그 것들도 이 땅을 밟고 있지 않을까.

난 새로운 길을 간다. 그 간의 낯부끄러울지 모를 경험담을 보고 발길을 돌렸을 지도 모를 분들에게 책임못질 사과를 같이 하며 호주의 경험담은 행여라도 어느날 이유없을 뒤척임으로 잠못이루다가 아직 일상에서조차 끈적거리는 지난 호주에서의 내가 떠오른다면 컴퓨터를 부팅할 것이다. 이 글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더니 연재를 시작하면서 계획했던 끝은 Do it again 이다. 하하. 또 기약없는 글을 올려야 겠군. -.-;

* 근데 말이야. 마지막을 좀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낙서가 되어 버렷다. 마음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아서 일꺼야. 아마도 말이야. 지애도 생각나고 마나미도 생각이 난다. 지애. 마나미. ^^; 참, 이빨 빠진 부분은 음..담에 담에... 정말 담에... 담에 하자. 담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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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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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town duty free shop.


시간당 15$이 넘는 pay. 시원한 근무환경. 여기서 근무하게 될 줄 몰랐는데 결국 나에게 온 거야.
유치할 지 모르지만 행복하다. 쉐리단 스트리트에서 이 곳까지 오는데 자전거로 약 이십분이
걸린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 곳에 자전거를 채워두고 공항으로 들어간다.
이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탑승객들이 통과하는 문을 지나 내부직원용 도어에
카드를 넣고 들어간다. 그러면 공항내부보다 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의 땀을 식혀주며
더욱 시원하게 해 준다. 면세점안으로 들어가서 끝에 있는 직원용 휴계실에서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넥타이를 매고 나오면 9시. 근무시간은 하루에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하지만 페이가 커서 생활하는데 지장은 없다. 매니저가 주류를 맡으라고 했지. 즐비하게 놓인
각종 주류와 함께 기념품,초코렛등을 맡는다. 이 매장엔 한국인이 두 명이 있다.
두 분 다 일본에서 적지 않은 기간을 살다 오신 분들이다. 한 분은 결혼해서 일본에서 살다가
호주로 이민온 분이고 또 한 분은 나이가 나보다는 어린 아가씨다. 일본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일본에서 삼 년 살다 왔다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아가씨와 함께 주류를 팔았다.
주로 일본 손님은 그 아가씨가 했고 그 외 영어권의 손님이 오면 내가 판매를 하곤 했다.
매니저가 말하기를 일주일에 만명의 고객이 온다면 그 중에 일본인이 팔천명이고 한국인이
일천명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꼬냑을 좋아한다. 그러니 고가의 꼬냑을 팔 수 있도록 푸쉬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틈틈이 주류 박스에 기재된 내용을 읽으며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떠듬거리며 유치하면서도 과장된 제스춰로 설명을 하곤 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일본인은 아주 좋아했고 그 것들을 구매하곤 했다. 일본인들은 여행을 갔다가 귀국할 무렵 아는 이들에게 선물을 해 줄 요량으로 많은 것들을 사 갔지만 그 건 아주 작은
기념품에서부터 쵸코렛등 사소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담배같은 것도 말이다.
마나미의 말로는 일본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들을 선물해주기 좋아한다고 한다.
그 것이 예의상일 지는 몰라도 말이야. 10시30분에 쉬는 시간 10분은 공항내의 탑승객 흡연실에
가서 담배를 피는 것이 좋았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짧은 대화지만 이야길 나누다 보면
나도 탑승객으로 이 자리에서 담배를 필날이 있겠지 하며 귀국하는 날을 기다려 보기도 한다.
면세점 내의 동료들은 무척 친절하고 근무 조건도 무척 좋았다. 농장에서 과일따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었으니 비교가 되지. 후훗, 요즘도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코엑스 같은 곳에서
푸드 코트들을 볼 수 있고 또 쇼핑몰들에선 일반화 되는 것이 푸드코트인 것 같다.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그 푸드코트에서도 한 쪾에선 열심히 접시를 닦고
있는 이들이 있다. 한 번 유심히 본다면 말이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자전거 페달을 가볍게 밟으며 케언즈의 바람을 즐긴다.
조금 여유가 생기고 부터는 pears 뒷 편에서 낚싯대를 드리운다. 경제적인 구속에서 해방되고
느끼는 그 편안함은지난 호주에서의 7개월의 고단함에서 오는 것일 꺼다. 그럴꺼야. 이 모습을
재이닐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말야. 호주에 처음 와서부터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
난 호주에서의 7개월들을 생각하며 내가 스쳐간 사람들을떠 올리며 궁금증을 케언즈 바다로
날린다. 어떤 이들은 진심으로 날 위해줬고 안타까워 했으며 잘 되기를 바래주었다.
모두가 그렇진 않았다. 그 것이 나로부터 인한 것일지라도 무시하거나 피하는 이들을 볼 때는
호주라는 곳에서의 외로움, 그리고 고독은 곱절로 다가오고 있었다.

케언즈에서도 만난 사람들은 많았다. 인생은 어쩜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아닐까.
그 것이 꼭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 들은 나의 일자리를 부러워 하기도 했고 지난 7개월의 호주 생활을 술자리에서든 이야기 하면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들 중에는 집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고 어학원을 다니면서 쉐어를 구해서 여유있게 사는 이들도 있었고
나처럼 농장에서 일하다가 돈을 모아 올라온 이들도 있곤 했다. 그들과 대화를 하며
내가 자신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어색하지만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영어 실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체계적인 공부를 하면서 어학실력을 키우고
있었지만 난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호주의 적지 않은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이 나와 같이
또는 더 어렵게 노력을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 그 것 이었을 것이다. 젊음이라는 것을 믿고 호주 이 낯선 땅에 내려
누군 어학원을 찾을 때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한 끼의 식사와 잠자리가 절실하기도
했던 많은 사람들. 나 또한 이러한 모습들을 훗 날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도록
오늘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하려 한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현실에서도 말이야.
그래야지 그런 이야기들이 결코 묻히지 않겠지. 그러려면 난 더욱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말이야. 아마 너희들도 그럴거야. 지금의 어려움은 과거가 되는 거야.

그리고 우린 미래에 있는 거야. 그 건 꿈이고 희망이야. 절대 희망을 놓치진 말아.
지금의 과거가 빛나는 빛깔로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을거야.
그런 날들을 위해 우린 열심히 사는 거지. ^^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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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일하는 면세점은 시내에서 꽤나 큰 편이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2층으로 된 건물안에는 신과 같은 일본인 아르바이트생이 1층에 대 여섯명의 아가씨가 있었고 신은 위층에서 담배와 초코릿등의 식료품을 판매한다.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 신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일본인 답지 않게 순진하게 생긴 신. 어쩜 내가 호주에서 본 일본인의 70%는 내가 생각하는 일본인의 외모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금은 간사하게, 조금은 멋있게도 생긴 거 같은 외모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난 한국인이나 일본인 구별을 90%이상 할 수 있었다. 어떤 특색이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일본인은 나를 일본인인 줄 알고 한국인은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을 했다. 내가 머리를 길고 묶고 있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전에도 종종 시내에 들르면 이 곳에 들러 신에게 내 처지를 애기하고 신은 위로하고 난jerkey며 초콜릿을 주섬주섬 먹고는 했는데... 후훗~ 신에게 내일에 있을 인터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은 진심으로 내가 취업이 되길 바라며 같이 기대에 들떠 있었다. 마침 손님이 들어오자 "이랏사이 마쎄" 하며 신이 고개를 숙였다. 신에게 간단한 일본어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신이 일하는 곳을 나오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쩜 현실로 돌아올 지 모를 희망에 모든 것을 채색되고 있었나 보다.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얼마전 서울에서 내려온 유학생에게 100불 주고 산 자전거를 타고 물어 물어 케언즈 공항으로 향한다. 시의 외곽지대라서 거리는 한산하다. 그리 많지 않은차량들을 지나다 보면 헬스 클럽도 보이고 작은 서점들, 그리고 가게들, 10분쯤 달리다 케언즈 국제 공항이라고 쓰여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돈다.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비행기 한 대가 머리위로 날아간다. 공항이구나. 공항버스도 지나가고 택시 몇 대도 지나간다. 페달을 밟으면서도 머리속에선 공항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대기만 하다. 어쩜 여기에서 근무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은 들지 않는다. 혹시 나의 긴 머리가 인터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개성인데... 존중해 주겠지 하면서 가볍게 생각한다. 보인다. 서울 공항이나 싱가폴의 창리공항과는 다르다. 좀 작은 거 같다. 공항내를 잘 꾸며진 꽃밭을 지나 어느 건물로 들어가서 근무자인듯한 사람에게 국제선을 물었다. 그가 가르켜준 방향으로 다시 폐달을 밟아서 도착한 케언즈 공항 국제선. down town 이라고 했지. 내가 본 국제 공항은 서울과 창리 밖에 없으니-아 마닐라도 있군- 기억이 번화하고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는데 그 건 아니었다. 중소도시의 어떤 무역 박물관 찾아 가는 기분이랄까?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게 조성된 꽃밭과 잘 정비된 도로들 사이를 지나 국제선의 down town을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보니 다운타운은 탑승객이 안으로 들어가는 대기실에 내부에 있었다. 헐.. 난 어떻게 해야 할 까 하다가 유리창 쪽에서 다운타운에서 근무하는 사람인 듯한 금발머리 아가씨에게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마이클을 만나기 위해 왔다고 중얼거렸다. 입모양으로 알아 들었을가? 잠시 뒤에 난 공항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항내부는 에어컨으로 인해서 시원했다. 수많은 면세품들이 쌓인 곳을 지나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휴계실인 듯 했다. 잠시뒤 30대 중반쯤의 인상좋은 남자가 들어왔다. 난 쟈니이고 면접을 보러 왔다. 연락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는 다운타운엔 일본손님이 약 70%된다며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세일즈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며 일본사람이 들어오면 뭐라고 하는 줄 아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랏사이 마쎄". 나는 신이 말해줬던 대로 애기를 하자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바로 그거다. 여기 호주 사람들은 그 것을 할 줄 모른다. 쟈니가 그 것을 해줘야 한다며 말했다. 나는 대학시절때 일본어를 했고 이 곳 케언즈에 일본인 관광객이 많기에 일본어를 해야 겠다고 생각이 되어 지금 공부하는 중이다라고 했다. 물론 허풍이다. -.- 그는 다음주 월요일부터 나오라고 한다. 근무시간은 오전 시간으로 말이다. 페이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시간당 15불. 난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환한 미소를 짓고 다운 타운을 나왔다.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다시 국제공항편을 바라보며 나에게도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소리지르고 싶었다. 여전히 태양은 케언즈를 내리 쬐었고 바람은 뜨거웠지만 나의 가슴은 시원한 오아시스를 찾은 사막의 여행객마냥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이제 잡때문에 울고 싶고 곱씹던 누군가에게로 향한 원망도 없을테고 체념도 안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위의 것들을 유심히 지켜 본다. 자동차 고치는 garage, 수영장도 있었네. 아무리 봐도 케언즈는 너무 사랑스러운 거 같아.

사람은 희망에 사는 것일까. 머 어떤 책 제목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던데... 난 아마 희망으로 살아갈 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잃을 것이 없다는 어느 무엇처럼, 멍청하지 않은 내 머리와, 부실하지 않은 내 몸뚱아리. 하하. 이런 것들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 난 너무 많은 것에 나를 힘들어 했다. 스스로를 말이야. 별 것 아닌데...,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그 것이 이런 것 아닐까. 내가 내가 말이야. 정말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말이야. 난 헛되이 살 수는 없어. 그래 이 세상은 충분히 살아갈 만한 가치를 너에게 전해 줄꺼야. 너가 찾으려 노력하고 어두운 밤에서도 가로등 불빛을 거울 삼아 걸어 나간다면 어디에선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찾아봐, 어려울 거 없어. 그저 살아가면 돼. 힘들어 하지마. 그리고 다가가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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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이 많았던 생활에 익숙해서 인지는 몰라도 금방 안정을 찾고 케언즈에 적응해 지려던 쯤이었을 거다.job도 구했겠다. 저렴한 쉐어를 구했고 다국적 환경에서 영어를 익히기는 수월하다 할 수 있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바로 옆방의 일본여자와는 거의 그 여자가 나갈때까지 몇 마디 나눠본 기억이 없다. 각자간의 생활을 누구도 침범하지 않았고 또 근무시간이 달랐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거 같다. 금요일에 가끔 맥주와 함께 담소를 나누곤 했다. 류와는 특히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류는 여자친구가 가끔 집에 와 아래층 거실에서 함께 자곤 했다. 외국에서 연인끼리 함께 있다는 것은 나에겐 정말 부러움 그 자체였다. 혹시 여러분중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연인끼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취득해서 가 보는 것도 서로에게 정말 크나큰 경험과 서로를 더욱 믿을 수 있는 반석이 되어 주리라 생각을 해 본다. 중국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까지 걸어 돌아오면서 부딪치는 일상들에 익숙해 지면서 난 에스플러네이드에서 가까운 peers 뒷편 선착장에서 싸게 주고 산 낙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다고 했던가? 강태공이 말이다. 그런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그 때 우연히도 시드니에서 만났던 영숙씨를 만나게 되었다.케언즈로 간다고 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혼자서 며칠만에 질려버린 기름기가 유난이도 반짝이는 중국식사를 하고 있는데 저 만치서 걸어들어오는 일단의 일행들. 한국인이구나 하면서 보는데 그 중 영숙씨가 보이는 것 아닌가. 나는 영숙씨에게 다가가 나를 기억하냐고 물으며 반가워 했다. 그 녀 또한 반갑게 맞이 했고 일행이 있는지라 짧은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일행은 같은 여행사의 직원이었고 귀국하는 직원이 있어서 같이 식사중이었나 보다. 이제는 케언즈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하는 그녀는 곧 한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며 내가 귀국하거든 한국에 있을거라며 연락처를 적어주었다.그 녀를 통해서 지영이 영국인과 결혼해서 영국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연한 섭섭함이 드는 건 무언지 몰라도 말이다. 


잘 된 거겠지. 그리고 또 한 명의 한국여자는 결국 영어가 안되서 한국인의 베이비 시터를 하다가
귀국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소식을 접하며 나두 한국에서 아무것도
준비를 해 오지 못했는데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이 감사했다.공연한 뿌듯함마저도 들기도 했는데 말이다. 정말 호주가 좁기는 좁은가 보다. 쿠~ 그런데 나에겐 황당한 일이 다가올 줄이야. 5일째인 것 같다. 일을 하러 나왔는데 예전에 테이블을 부지런이 오가며 접시를 나르던 일본인이 보이지 않고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난 가게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날 돌아오는 접시는 내가 닦을 필요가 없었다. 다 기계로 닦이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 것 저 것을 나르고 썰고 자르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던 일을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할래니 공연히 보이는 눈치. 결국 다음날도 마찬가지. 일을 다 마치고 주급을 주면서 여사장 왈!

담주부터 나오지 마라.
우리가 또 사람이 필요하게 되면 연락을 주겠다.
으~~~이 황당함. 3주간 놀다가 구한 일자리인데 일주일만에
짤리다니 난 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

Peers로 자주 갔다. 십 몇불짜리 낛싯대를 들고 터벅 터벅 들고가서 낛싯대를 드리우고 저 멀리 바다를 쳐다보곤 했다. 어느쪽이 한국이 있는 곳인지도 모른체 저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쳐다보았다. 내 미래를 생각해 본다. 어딘가에 있겠지. 저기 어드메에 말이야. 가진 것도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재산이라던 자신감과 용기는 나의 경험으로 다 남아 있겠지.
아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낛싯대를 드리우고 있을까? 수염이 텁수룩하니 멋있게도 생겼군. 나두 저렇게 좀 멋있게 수염이 나면 좋겠다. 내가 나이 들어도 지긋하게 늙는다면 좋을텐데...션코네리 처럼 말야. 참 리차드 기어도 멋있던데. 이런 맛에 낛싯대를 드리우는 지 모르겠다. 일본청년이 여자친구와 함께 걸어와서 내 옆 저 만치에서 자리를 잡는다. 난 일본말로 아침인산지 점심인산지 모를 간단한 인사를 한다. 그들도 방긋 미소를 지며 내게 인사를 한다. 햇살이 따갑다. 피얼스에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고독을 날려 버리려 애썼다. 아무도 아는 이는 없었던 케언즈.
이 작은 도시에서도 고독감을 느끼는데 서울에선 어떻게 생활을 할까. 난 서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년의 그리 좋지 못했던 기억때문 일 것이다. 하지만 누굴 원망해. 제길.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 겨울바다를 많이도 찾았는데 말이다. 이젠 그럴 여유도 없다. 그리 깨끗한 바다는 아니었지만 투어에 이용되는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고즈넉함이 좋았고 가끔 귀항하는 배들에서 토해져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환한 미소가 좋았다. 대리 만족하는 걸까? 나를 편안하게 해 준 몇 군데중 한 곳 Peers.
또 돌아 다녀야 겠군. job을 구하려면 말이야. 정말 돌아다니기는 지겨운데 말이야. 쿠쿠. 머 할 수 없지. 그래도 모처럼 담배를 비록 제일 싼 것이지만 40개비짜리 박스담배를 피곤 했는데 다시 말로보 말이 담배를 펴야 되려나 보다. 피얼스에서 부터 바닷가를 따라 쭈욱 내려오다가 어떤 노년의 신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싱가포르에 자주 간다고 했다. 지금은 휴가중. 홍콩이라 했던가? 홍콩이군, 어렵게 해석해 본 걸로는 그는 중계무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호주에서 굴러다니는 한국산 차에 대해서 애기했다가 그 건 싸니까 사는 것이라며 다른 나라에서 더 싸게 팔면 그 걸 사람들은 찾을 것이라고 말해서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말이야. 어쩜 동남아에 굴러 다니는 우리차도 가격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그 분과 나는 나이차도 상당한 차이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먼저 말을 부쳐왔고 쉽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건 정말 좋은 거 같다. 쉬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여는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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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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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이 많았던 생활에 익숙해서 인지는 몰라도 금방 안정을 찾고 케언즈에 적응해 지려던 쯤이었을 거다. job도 구했겠다. 저렴한 쉐어를 구했고 다국적 환경에서 영어를 익히기는
수월하다 할 수 있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바로 옆방의 일본여자와는 거의 그 여자가 나갈때까지 몇 마디 나눠본 기억이 없다. 각자간의 생활을 누구도 침범하지 않았고 또 근무시간이 달랐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거 같다. 금요일에 가끔 맥주와 함께 담소를 나누곤 했다. 류와는 특히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류는 여자친구가 가끔 집에 와 아래층 거실에서 함께 자곤 했다. 외국에서 연인끼리 함께 있다는 것은 나에겐 정말 부러움 그 자체였다. 혹시 여러분중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연인끼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취득해서 가 보는 것도 서로에게 정말 크나큰 경험과 서로를 더욱 믿을 수 있는 반석이 되어 주리라 생각을 해 본다. 중국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까지 걸어 돌아오면서 부딪치는 일상들에 익숙해 지면서 난 에스플러네이드에서 가까운 peers 뒷편 선착장에서 싸게 주고 산 낙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다고 했던가? 강태공이 말이다. 그런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그 때 우연히도 시드니에서 만났던 영숙씨를 만나게 되었다.케언즈로 간다고 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혼자서 며칠만에 질려버린 기름기가 유난이도 반짝이는 중국식사를 하고 있는데 저 만치서 걸어들어오는 일단의 일행들. 한국인이구나 하면서 보는데 그 중 영숙씨가 보이는 것 아닌가. 나는 영숙씨에게 다가가 나를 기억하냐고 물으며 반가워 했다. 그 녀 또한 반갑게 맞이 했고 일행이 있는지라 짧은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일행은 같은 여행사의 직원이었고 귀국하는 직원이 있어서 같이 식사중이었나 보다. 이제는 케언즈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하는 그녀는 곧 한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며 내가 귀국하거든 한국에 있을거라며 연락처를 적어주었다.그 녀를 통해서 지영이 영국인과 결혼해서 영국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연한 섭섭함이 드는 건 무언지 몰라도 말이다. 잘 된 거겠지. 그리고 또 한 명의 한국여자는 결국 영어가 안되서 한국인의 베이비 시터를 하다가 귀국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소식을 접하며 나두 한국에서 아무것도 준비를 해 오지 못했는데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이 감사했다.공연한 뿌듯함마저도 들기도 했는데 말이다. 정말 호주가 좁기는 좁은가 보다. 쿠~ 그런데 나에겐 황당한 일이 다가올 줄이야. 5일째인 것 같다. 일을 하러 나왔는데 예전에 테이블을 부지런이 오가며 접시를 나르던 일본인이 보이지 않고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난 가게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날 돌아오는 접시는 내가 닦을 필요가 없었다. 다 기계로 닦이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 것 저 것을 나르고 썰고 자르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던 일을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할래니 공연히 보이는 눈치. 결국 다음날도 마찬가지.
일을 다 마치고 주급을 주면서 여사장 왈!

담주부터 나오지 마라.
우리가 또 사람이 필요하게 되면 연락을 주겠다.
으~~~이 황당함. 3주간 놀다가 구한 일자리인데 일주일만에
짤리다니 난 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

Peers로 자주 갔다. 십 몇불짜리 낛싯대를 들고 터벅 터벅 들고가서 낛싯대를 드리우고 저 멀리 바다를 쳐다보곤 했다. 어느쪽이 한국이 있는 곳인지도 모른체 저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쳐다보았다. 내 미래를 생각해 본다. 어딘가에 있겠지. 저기 어드메에 말이야. 가진 것도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재산이라던 자신감과 용기는 나의 경험으로 다 남아 있겠지. 아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낛싯대를 드리우고 있을까? 수염이 텁수룩하니 멋있게도 생겼군. 나두 저렇게 좀 멋있게 수염이 나면 좋겠다. 내가 나이 들어도 지긋하게 늙는다면 좋을텐데...션코네리 처럼 말야. 참 리차드 기어도 멋있던데. 이런 맛에 낛싯대를 드리우는 지 모르겠다. 일본청년이 여자친구와 함께 걸어와서 내 옆 저 만치에서 자리를 잡는다. 난 일본말로 아침인산지 점심인산지 모를 간단한 인사를 한다. 그들도 방긋 미소를 지며 내게 인사를 한다. 햇살이 따갑다. 피얼스에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고독을 날려 버리려 애썼다. 아무도 아는 이는 없었던 케언즈. 이 작은 도시에서도 고독감을 느끼는데 서울에선 어떻게 생활을 할까. 난 서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년의 그리 좋지 못했던 기억때문 일 것이다. 하지만 누굴 원망해. 제길.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 겨울바다를 많이도 찾았는데 말이다. 이젠 그럴 여유도 없다. 그리 깨끗한 바다는 아니었지만 투어에 이용되는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고즈넉함이 좋았고 가끔 귀항하는 배들에서 토해져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환한 미소가 좋았다. 대리 만족하는 걸까? 나를 편안하게 해 준 몇 군데중 한 곳 Peers. 또 돌아 다녀야 겠군. job을 구하려면 말이야. 정말 돌아다니기는 지겨운데 말이야. 쿠쿠. 머 할 수 없지. 그래도 모처럼 담배를 비록 제일 싼 것이지만 40개비짜리 박스담배를 피곤 했는데 다시 말로보 말이 담배를 펴야 되려나 보다. 피얼스에서 부터 바닷가를 따라 쭈욱 내려오다가 어떤 노년의 신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싱가포르에 자주 간다고 했다. 지금은 휴가중. 홍콩이라 했던가? 홍콩이군, 어렵게 해석해 본 걸로는 그는 중계무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호주에서 굴러다니는 한국산 차에 대해서 애기했다가 그 건 싸니까 사는 것이라며 다른 나라에서 더 싸게 팔면 그 걸 사람들은 찾을 것이라고 말해서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말이야. 어쩜 동남아에 굴러 다니는 우리차도 가격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그 분과 나는 나이차도 상당한 차이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먼저 말을 부쳐왔고 쉽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건 정말 좋은 거 같다. 쉬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여는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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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hwasher

디위워셔로서서의 생활은 홀가분하기만한 날들이었다. 에스플러네에드의 짠내나는 바닷바람을 가르며 거리를 걸을땐 그지없는 평화로움이 가득 묻어나는 곳이었다. 난 그 평화를 사랑했고 여느 도시의 소음이나 복잡함과는 전혀 다른 안식과 함께 공존하는 곳이었다. 약간 과장될 지라도 그 곳은 도시로서의 생활조건은 모두 갖추어졌음에도 도시가 불러오는 소음과 매연, 그리고 분주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다. 도시의 한 가운데에 공원들이 있고 공연장이 자리를 한다. 그리고 차가 없는 거리가 있다. 케언즈,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는 곳이다.

난 일하러 간다. 때론 일찍도 나가곤 했는데 신이 일하는 곳에 가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이런 저런 케언즈의 정경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에 많이 찾았었다. 정말 포근한 곳이다. 케언즈는 말이다. 벌써 6개월이 지나간다. 호주에 멋도 모르고 찾아 들어와 이 곳에 정을 들이려 애써한 지가 말이다. 푸드코트안은 아직 식사시간이 되지 않아서인지 몇 몇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야채를 다듬는 일.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시범을 보여주고, 내가 하는일이 탐탁치 않았던지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여준다. 그렇게 한참을 다듬고, 물건을 나르고, 쓰레기를 버리고 정신없는 시간들. 수희가 말한다. 곧 저녁 식사 하러 사람들이 올거라며 식사를 먼저 하라고 말이다. 난 먹음직 스럽게 보이는 8$짜리 식사를 하게 된다. 쟁반이 두개가 있는데 큰 쟁반은 8$, 작은 접시는 6$인데 그 쟁반에 담고 싶은 만큼 담아서 식사를 하는 일종의 뷔페 같은 스타일이다. 처음에는 맛있었는데 중국음식이라는게 기름기가 많다 보니 몇 일뒤에는 작은 접시에 먹게 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씩 들어오는게 보인다. 그 곳에는 쟁반을 치워주는 사람이 따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그 것을 그 자리에 두면 그는 그 쟁반들을 수거해다가 각 가게에 다시 갖다 주는 것이다. 그럼 나는 그 것을 깨끗이 설겆이 하고 말이다. 그와 간단한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몇 일뒤에는 그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기 여자친구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호주에서 살고 싶다는 그의 말. 호주는 많은 사람에게 평안을 주나보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는게 보인다. 식사를 마치고 들어와서 다시 일을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쟁반을 가져간다. 무언가 기대에 가득한 표정으로 줄을 서서 조심스런 손짓으로 음식을을 쟁반에 올려 놓는다. 흘깃 흘깃 그들의 표정을 본다. 손으로는 코트에서 가져오는 쟁반들을 닦으며 말이다. 이마에 땀이 베인다. 수희가 퇴근한다고 인사를 한다. 웃음을 짓는다. 힘들군. 수희는 곧 에어즈롹으로 간다고 했지. 나도 가고 싶다. 그런데 그 이태리 친구하고 같이 가려나? 땀을 훔친다. 이 정도는 별게 아닌데, 시계를 본다. 많이 흘렀다. 사람은 무언가에 빠지면 시간이 잘 가던데... 손으로는 계속 쟁반을 문지르고 머리속에선 무언가 상념의 고리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생각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농장생각들, 마나미 생각, 그리고 지애를 떠올린다. 케언즈의 바닷가를 떠올린다. 뜨거운 햇살이 바다의 표면에서 튕겨나간다. 어떤 것은 나의 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말이다. 그 빛들은 케언즈의 무언가에 빨려들어가겠지. 아~! 퇴근 시간이다.

푸드코트에서의 알바가 끝나면 거리를 걸었다. 멀 하기 위해 걸었을까? 이 곳에도 가보고 매일 작은 공연들이 펼쳐지는 음. 그래 대학로같은 거리를 걸으며 말이다. 이 곳은 shild st.근처에 있는 곳이다. 그 곳은 어학원도 많이 있어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Orchid 아케이드, Cominos등 상가들, 우체국등, 말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 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만나는 중간 지점인 Munroe Martin Park. 출근할 땐 조용하기만하고 썰렁하기까지 한 곳인데 저녁이 되면 케언즈에 있는 에버리진들이 이 곳으로 모이는 것 같은 기분. 그들은 이 곳에서 기거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이 곳에 밤에는 잘 찾지를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 하지 않았기에 그 곳을 가로 질러서 가곤 했다. 과연 그들은 해꼬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어쩌다 다가와 담배 한 까치를 원하고는 했을 뿐말이다. 그 곳을 지나면 Lee's Taekwondo라고 보이는 체육관. 케언즈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그 곳을 들어가 봤는데 한국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외국인들의 우리말 구령만 들렸다. Lee란 사람은 어떤 분일까? 태권도 하나만을 가지고 체육관을
열었을때 지역 텃세에 초기에 고생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접했는데 이 분도 그랬겠지. 잠시 가게에 들어가 잡지들을 뒤적 거리다가 집에 돌아온다. 풀장에서 잠시 몸을 담그고 샤워를 한다. 저녁식사를 하고 tv를 킨다. 간간이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고 하고 이런 것들이 짧은 어휘에서 기인 한 것이리라. 잠자기 전에 맨투맨을 펼치고 몇 가지 책자를 떠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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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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