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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하염없이 호주의 도시를 떠 간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어디로 갈까. 어둠이 창가를 스치기 시작한다. 창밖을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창밖만 내다 본다. 가끔 뜬금없이 바보같은 짓을 할 때가 있다.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말이다. 그럴 때 혼자말을 한다. 너 바보 아냐? 그리곤, 씨~익 하고 웃어 버린다. 어릴 때 염세관에 빠진 적이 있다. 글쎄, 그 것이 정말 염세주의라 말할 수 있는 건지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염세관이었고 허무주의였다. 오랜 만에 펴든 일기장에 이런 글이 보인다.

"비관론자는 낙관론에 비관하는 게 아닌 비관론에 낙관하는 자이다"

다시 써퍼스에서 버스를 타고 간 곳은  Milliam vale. 지애의 말로는 독일인 가정이라고 했다. 내가 우프회원이 아니라고 하자 별일 없을 거라고 일단 오라고 했는데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지금쯤 그 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지애 야마다. 처음 만났을 때 한국이름과 비슷하다고 했더니 무엇이 좋은지 활짝 웃던
동그랗던 눈이 생각난다. 번디에서 첫 날. 여자가 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을 하고서는 마치 전투에서 돌아온 군인처럼 자랑스럽게 애기하던, 그 때까지도 일본인은 돈이 많아서 그런 곳에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더군다나 여자는 더욱 말이다. 그래서 더욱 연약할 것 같던 일본 아가씨. 마나미로 인해 일본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면 지애는 일본도 한국의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갖게 되었다. 친구가 말이야. 얼마를 갔을까? 차 타기전에 물었던 밀리엄 베일에 왔는지 운전기사분이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는다. 다 왔냐고 묻자 다 왔단다. 외국 관광객을 많이 태워서 그런지 몰라도 처음 올라타고 차가 출발할 무렵, 불안한 마음에 이 차 밀리엄 베일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안 간다고 차 잘못 잡았다고 너스레를 떨던 넉살좋은 그의 미소를 뒤로 하고 차를 내렸다. 저 만치 전화 부스가 보인다. 수화기를 들면서 뿌듯한 마음은 무언지, 내 이름은 쟈니... 우핑...지애... 잠시 후 지애가 받는다. 이제 30분뒤면 만나겠군.

하늘아래 이 곳만 있는 걸까. 셀프 주유기가 몇 대있는 작은 주유소. 한 편에 덩그러니 놓여진 전화 부스. 그리고 편의점에서 졸고 있는 아가씨. 언제 봐도 모래알 처럼 수없이 반짝이던 별들. 저 중 하나가 이 곳으로 떨어지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너털 웃음 짓던 남반구의 밤하늘. 이런 곳에서 담배 한 개비를 핀다면 좀 멋있게 보일테지. 영화의 한 장면같이 말이야. 관객은 없더라도 말이야. 베낭 한 켠에 짱박아 둔 Malboro를 말아본다. 40센트에 50개비의 담배를 말 수 있는 담배 종이와 1달러가 조금 넘는 새하얀 필터들. 그리고 14$가량하는 말보로 빨간 딱지. 영어 단어 연습할 때 혀 굴린답시고 Marlboro 와 Clean을 지껄이곤 했다. 말보로는 이후 케언즈 공항의 면세점에서 근무하며 마일드 세븐(88이 없다)에 자리를 내어주기전 까진 나의 허전함과 외로움을 늘 옆에서 불살라 준 충실한 동행이었다. 어느새 익숙해져 손가락 끝에서 몇 번 비틀리고 마무리로 입술을 대면 한 까치의 말보로가 수줍은 듯 손가락사이에서 맴돈다. 그렇게 몇 까치를 더 말았을 때 저 쪽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친다. 베낭과 작은 가방, 그리고 롤러 블레이드를 챙긴다. 이 놈의 롤러 블레이드를 팔아 버리는 건데 중얼 거린다. 지애가 뛰어 나온다.


그의 집은 Grocery다. 우리가 하는 일 또한 Watering이라고 하는 화초에 물뿌리기. 그리고 Weeding. 오전만 일을 하고 숙식을 제공받는 우핑이었다. 그의 집은 우프에 가입되어 있는 농가였기에 우퍼들을 위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었다. 그 날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나를 위해 그 들은 음식을 준비해 줬고 그들의 따듯한 배려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우핑회원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말을 했고 그들의 잠깐 멈칫하는 표정. 이내 왜 우핑회원을 받는 지에 대한 이유. 그 것은 만약의 사고시 우핑회원 가입시 자동으로 가입되는 의료 보험 때문이라고 말 한다. 어떤 우핑 경험자들의 말을 들으면 매일 아침 말의 분뇨를 치고 건물 짓고 고생만 하다가 돌아온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편한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 부분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말이다. 다행이 나는 농장주를 잘 만났다고 해야 할까? 그 곳에서 일 주일간 호주의 전원을 만끽하고 떠난다. 그 곳에는 이미 알젠티나의 19살 된 아가씨가 우핑을 먼저 하고 있었다. 그 녀는 몇 개월전에 이 곳에서 우핑을 하다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왔단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란다. 그 녀는 집 본채 바깥에 있는 캐러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도 다른 국민성을 갖고 있지만 어딘가 비슷한 점은 존재하지만 알젠티나와 이 쪽은 틀린 점이 너무 많은 건 같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식사 시간후 약 30여분간 여러 가지의 주제를 놓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뤄지곤 했다. 각 국가간의 생활상이라든가 국민성을 약간이나마 엿 볼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의 부족한 어휘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였지만 귀기울여 주었기에 나의 어학실력도 많이 늘었다. 난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든 베낭여행객이든 우핑을 권하고 싶다. 비록 일 주일이었지만 3주 이상 한 곳에서 있는다면 어학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 곳의 민영방송중 하나인 sbs에서는 호주에 온 여러 민족들을 위해서 각 국의 영화를 틀어주기도 했는데 한국영화를 할 때면 한국영화한다고 다 같이 모여 보기도 하며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기도 하는 좋은 친구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반전 주의자였고 평화주의자였다. 마치 존 레넌의 Imagine 처럼 말이다.


참 그 곳에서의 당혹스런 기억 한 토막.

언젠가 식탁에서 각국의 음식에 대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음식애기가 나와서 나는 나대로, 지애는 지애대로 애기 하다가 지애가 내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며 부추기는 바람에 다음 날 저녁은 내가 준비하기로 되었다.나는 내가 만드는 것은 한국요리도 아니고 단지 흉내를 내는 것일 뿐이라며, 양념들이 없기에 별루라고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한국음식을 맛 보고 싶다고 극구 청하는 것이었다. 이런,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던 고추장을 이용해서 이 것 저 것 야채와 함께 만들었지만, 훗! 지애나 좋아할까. 만들면서 풍기는 고추장내에 눈살을 찌푸리던 그 알젠티나 아가씨는 다 만들어진 그 것을 한 숟갈 뜨고는 못먹을 것을 먹은 것 처럼 솓가락을 내려 놓을 때의 그 무안함. 나는 그렇다 쳐도 추천한 지애는 어떤 기분일까. 어쨌든 그 날은 그 알젠티나 걸에게 서운한 정도를 넘어서는 기분을 갖고 있었다. 독일인 부부는 성의를 생각해서 인지 끝까지 한 그릇을 비웠는데 그 것도 곤욕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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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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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날 8시경, 지애의 성화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준비를 하고 나니 밖에서 투어를 가는 다른 여행객들과 투어에 사용되는 짚차들로 웅성거렸다. 각 짚차별로 배정을 받고 여러 도구 -식기류나 기타 잡다한 것들-들과 연료까가지도 할당 받는다. 이런 모든 것들에는 bond라고 하는 보증금이 붙어 있어서 분실하게 되면 bond를 못받게 된다. 운전하는 호주인은 나이가 21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는지, 그 호주인은 무척 활달하고 농담을 잘 해서 투어 내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캐나다에서 뉴질랜드에서 세계 여기 저기에서 온 젊은이들이 Toyota 짚차속에 앉아 있다. 누가 머랄 것도 없이 각자 소개를 하고 보니 나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는 내 나이를 무지 어리게 본다. 정말 무지하게 말이다. 케언즈에서는 미성년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카드를 만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게 아마 18세 이상임을 증명하는 것일게다. 17센가? 큭! 어쨌든 2박 3일간의 프레이저 투어는 시작이 됐다. 거금 90$이 투자된 호주 최초의 투어였으니 그 만큼의 기대는 당연하지 않을까? 운전하는 호주인은 연신 Pasta!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까지도 나의 영어에 반신반의 하던 터라 으레 하는 애기들. 나는 한국에서 왔으며 현재 몇 개월 체류중이고 번다버그에서 올라왔다. 앞으로 어디로 갈 거다. 너 거기 가 봤냐? 어떻냐? 너는 어디서 왔냐? 호주는 얼마동안 있었냐?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등, 이런 애기가 끝나고 보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 때분터는 머리에 열나기 시작한다. 후훗! 지애는 나보다 영어를 잘 했는데 그 건 이미 나 보다 10개월 가까이를 더 호주에서 체류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호주를 돈 것 같았다. 퍼스, 멜버른 등, 멜버른은 참 좋았다고 한다. 그 곳에선 퍼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말이다.

Toyota는 하비베이의 외곽지역을 돌아 선착장에 도착했다. 영화속에서 보는 그런 길이다. 프레이저까지 가기까지의 길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착장에는 프레이저로 가는 정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승선이 시작되어 우리는 선내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 바람이 세차게 지애의 머리를 날린다. 바다가 좋다.
산을 오른뒤의 해방감을 들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다는 언제든지 가슴을 열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좋다.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바다가 좋을 뿐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프레이저로 가는 걸까. 선착장에 도열해 있던 수많은 차가 배 안으로 빨려들어갔고 배는 고동을 울리며 출발을 알렸다.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바다에 끌려가길 30여분. 저 만치 프레이저가 보인다. 울창한 수풀로 우거진 섬이 보인다.길게 쭉 뻗쳐 내린 섬이 곱게도 생겼다. 검푸른 바다위로 파도가 물줄기를 휘감는 곳. 우리는 2층과 아래층을 돌아다녔다. 2층에는 각종 기념품과 간단한 음식류를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갑판에 나와 끊임없이 주절 거리고 있었다. 순간 불어온 강풍이 내 모자를 날린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론가 떠 내려 가고 있을까.

프레이저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신호에 따라 차에 탑승을 하고 배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프레이저의 수풀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우리도 환호성을 질렀다. 열대림을 지나며 보이는 건 어느새 해변으로 나온 Toyota. 호주인은 나에게 운전을 해 보겠냐구 물었다. 닌 해변가를 달리며 소리를 지르며 어떤 열기에 휘감겨 차를 몰았다. 뒤 따르며 앞서가는 Toyota사이로 해변가의 바닷물이 솟구친다. 그렇게 한 참을 달려 우리는 잠시의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작은 공원과도 같이 조성된 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고 프레이저 기념품 가게에서 이 것 저 것을 구경하며 호주에서 처음 갖는 투어를 만끽했다. 다시 출발해서 다다른 어느 호숫가! 에메랄드 빛이 이런 걸 보고 말하는 지도 모른다. 한없이 빠져 들 것만 같은 호수의 맑은 물결이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 되어 우리는 야영지를 찾았고 그 곳에서 텐트를 치고 나무를 모아서 불을 부쳤다.

바비큐를 하고 한 쪽에선 각자 준비해 온 식사와 술을 꺼내 들었다. 말도 쉬이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렇게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이 주는 매력이 아닌가 싶다. 여행은 마술이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를 잊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를 떠난다는 것. 내 모습을 잊는 것. 어쩜 그 것이 자기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 밤늦게까지 떠들고 놀았다. 바닷가를 걸었고 하늘의 별을 셌으며 야영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 그런데 그 곳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릴 줄이야, 나는 지나온 휴게소에서 놓고 온 것을 알고 호주인에게 다시 가 보자고 했고 그는 흔쾌히 같이 가 주었지만 카메라를 찾진 못했다. 혹시나 여느 책에서 보았던 서양에서의 분실물 습득애기가 떠 올라 가게 곳곳에 물어봤지만 허사였다. 난 여행자 보험을 떠 올리며 아마 분실물 보험도 들지 않았나 싶어 다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프레이저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커다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말이다. 다른 베낭객들에게 들은 대로 하비베이에 돌아와서 경찰서에 가서 분실신고와  함께 신고증을 받는다.그 게 또 가관이었다. 푸~! 이 건 다음 편에 애기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다시 섬을 돌기 시작했다.이른 아침의 기운은 서늘한 바닷바람으로 몸을 움츠리게 했고 점심때는 뜨거운 햇살이 바다에  빠져 들게 했다. 우리는 교대로 차를 몰았고 Toyota에 몸을 맡기며 프레이저를 즐겼다. 섬전체가 거대한 모래섬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고운 모랫살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저만치에 언젠가 낮선 호주에 내려 절망을 간직한 체 사라져 갔을 이름 모를 선원들을 태웠던 난파선이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난파선. 난파선. 가야 할 목적지를 잃은체  낮선 곳에 결국 순응하고 마는 난파선.

우리는  또 다른 호수에 도착했다. 이미 친해진 다른 친구들과 호수에서 물장난을 치며 서로 물을 먹이기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나를 빠트리려 쫓아오는 그들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며 흥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프레이저에서 제일 큰 호수로 관능적인 모래  언덕위로 태양의 뜨거운 입김이 작렬한다. 가는 모래알들처럼 많은 우리의 기억들은 어디에서 반짝이고 있을까.
 
아쉬울 수밖에 없던 그 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우린 하비베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이제 록 햄프턴으로 가는 지애와 아쉬운 헤어짐의 시간. 말없이 얼굴만 본다. 때론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저 안타까움만 더 할 뿐이었다. 지애는 나에게도 북으로 가자고 했지만 난 서퍼스에 가야했다. 서퍼스에서 안 된다면 너에게 가겠다고 했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넓은 곳에서. 그리고 지애는 갔다. 차창너머로 지애의 눈물이 보인다.

프레이저는 유엔에서 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거대한 모래섬. 고운 모래알과 태양이 어울리며 바다를 향해 다가갈 수 없는 연민을 부르듯 한 없이 아름다운 섬.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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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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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다버그에서의 생활도 어느 덧 끝이 나간다. 스쿠바 기간중 롤러 블레이드를 타다가 다친 무릎의 생채기로 때때로 일을 하면서도 계속 나오는 고름으로 이렇게 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몇 일 쉬게 되었다. 지쳤나 보다. 따분함에 지친 것 같다. 스쿠바 자격증도 땄고 비록 갖고 있는 돈은 700여$에 불과하지만 5000km pass가 있고 해 보겠다는 의지가 나에겐 밑천이었다. 어딜가야 죽겠냐 라는 자신감. 그렇게 살아왔으니 머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풋! 번디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사실 번디의 주변 경관은 시드니나 케언즈 또는 골드코스트같은 호주의 여느 도시처럼 뚜렷하게 구분되는 매력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곳에서 지낸 3개월 가까운 기간이 나에겐 충분한 기억의 도시가 되기엔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번디의 생활도 끝이 나간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금 뭐 할까?

귀국하고 나서 처음에는 연락을 했는데 일상에 파묻혀 기억속에만 남은 사람들. 번다버그. 이름마저 가물 가물한 국민대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자주 놀러가던 시티 백팩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무척 외국인과 잘 어울리던 활발한 놈이었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마음이 통한다 싶어 더욱 그 놈과 많은 애기를 나누었는데 언젠가 가 보니 자리에 없어 동생들에게 물어보니
칠더스(Childers)로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 칠더스로 향한 것은 순전히 여자 때문이었다. 혹시 그 놈이 보더라도 오해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글을 이어나가겠다.  처음 그 놈을 보았을 때부터 그 곳에는 한국여자가 드물게 한 명이 있었는데 매우 활달한 성격의 아가씨였다.그런데 그 아가씨가 번디에 일이 없자 칠더스로 향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번디에서 한 2~3시간 내륙쪽에 있는 그 곳은 번디가 일이 없을 때에도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눈치가 있어 보이는 경희대 다니던 동생이 아마 그 아가씨 찾아 갔을 거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일뒤 다시 찾아 갔을 때 그 놈 풀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길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것이었다. 번디에서 키워왔던 그의 연정?이 칠더스에서 꽃을 피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얼마 뒤 그는 예전의 모습을 되 찾았지만 친하게 지내던 놈이 잘 안 풀리니 안 되 보였다. 하물려 그 것이 여자와 결부된 일임에야, 한국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데 이국에서야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흡사 광수 일기의 광수씨처럼 생긴 그의 모습이 참 정이 많게 생긴 놈. 훗 날 그 놈은 또 한 번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이 놈이 마리화나에 빠져서 한 참을 헤맨 사건이다. 힘들게 벌어 온 돈을 몽땅 그 것에 써 버린 것이다. 외국 친구들과 잘 어울리다 보니 마리화나가 합법적인 일부 유럽국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버린 것이다.(야, 너 혹시 이거 보더라도 화는 내지 마라 우리의 동생들을 위한 거라 생각하고 웃어 넘겨라. 연락하고 임마!) 하지만 호주는 불법이다. 힘들게 돈 몇 푼 벌어서 그 걸 그대로 연기로 날려 버렸다는 소리에 황당하기도 하고 또 화도 나기도 하고 착잡하던 기분. 내가 찾아 갔을 때 이 놈은 침대에 누워 맥이 풀려 초췌한 모습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야 대화를 나누어 주는 정도여서 아쉬움만 더 했지만 말이다. 번다버그를 떠나서 훗날 보웬(Bowen)에서 그 곳에서 경희대 동생을 만나게 되어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어딘가로 내려갔다고만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시 연락을 했을 때 물었더니 허허 하고 웃더니 대마초 재배하러 내려갔다고 웃는 것이다. 후훗! 다행히 학업에 열중하는 듯해 이런 저런대화를 나누고 후일을 약속하며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하지만 다음에 한 번 만나자는약속만큼 애매한 것도 없는 것처럼 그 걸로, 쩝! 이 글 보거든 화내지 말고 연락이나 해라. 졸업했겠구나. 시절이 하수상한데 좋은 곳에 취업이나 했으면 좋겠다.

사실은 나도 마리화나에 대한 썩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순전한 호기심에 말이다. 호기심 때문에 인생 쫑한 작자가 많다는데, 언젠가 영국친구가 권해서 몇 모금을 해 봤는데 으~~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저 몸이 붕붕 뜬 것 같은 기분. 지애가 놀라서 무슨 일이냐구 물어보는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지애. 그 건 마치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것을 또 케언즈에서 경험하게 됬으니, 아직 범죄시효가 지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행여나 높으신 분들이 볼 까 무섭다. (에그 무서버-이런 글 썼다고 또 괘씸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쩝!) 번디를 떠나기로 하면서 가지고 있는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애물단지이던 노트북과 옷,책을 보내며 65$이라는 피같은 거금이 들었다. 짐을 정말 줄여가기 바란다. 호주에서 많은 것을 하겠다고 애초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말을 해 본다.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한다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과연 그 목적에 걸맞게 호주를 갖다 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 또한 그러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부럽기는 하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지만 다음에 신혼여행을 간다면 내가 걷지 못한 호주 서부 지방을 그 녀와 함께 걷고 싶은 계획으로 미루고 나니 아쉬움은 덜하다. 그 동안 일하던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스쿠바 라이센스도 딴 후 나는 다음 목적지인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가기 위한 관문인 하비 베이(Harvey bay)를 예약했다. 5000Km 패스를 터미널에서 사 놓았기에 차비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패스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호주를 전국일주 하는 것부터 거리별로,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 구간별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 자신의 경로에 맞추어서 구입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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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는 그 전날밤 나와 함께 가고 싶어하던 눈치가 역력하던
지애는 내가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간다고 하자 자기도 그 곳에 갔었다며 나의 여행경로를 물었다. 나는 프레이저로 가서 사파리 투어를 마친 후
Surfers Paradise로 갈 것이다. 그 곳에는 한국인이 많다고 하니 일자리를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애기했다.

아래층 티브이 룸에선 심슨이 시작됐는지 왁자지껄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선 간간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정말 번디 아니 호주의 밤 하늘은 지겹도록 별이 많다. 저 별들이 다 떨어진다면 난 어디에 숨을까? 지애는 나와 같이 가고 싶다며 전에 갔을 때에도 하비베이 까지만 갔고 사파리 투어를 하지 못했다며 이번에 꼭 가고 싶다고 한다. 나는 서퍼스로 가야 하지만 너는 북쪽으로 올라 갈 거잖아.난 혼 자 가겠다. 그 녀가 눈물을 보인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크다. 그 눈에 맺힌 눈물. 왜 나에게 눈물을 보이는 걸까. 여자가 눈물이 흔해도 안 되지만 남자도 여자의 눈물에 약하면 안 된다. 말이 쉽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이쁘다. 눈만을 봤을 땐 말이다. 남자들도 하나같이 눈썹이 짙고 풍성하다. 물론 다야 안 그렇겠지만, 내가 표를 물었을 때 자기도 패스가 있다며 당일 가면 표가 있을 거라며 미소를 짓는다.
나도 웃고 만다. 닐에게 내일 check out한다고 말하겠다며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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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이면 들려오는 닐의 마이크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내가 속한 목장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다시 잠에 빠지고는 했다. 가끔 깊은 잠에 빠져 나오지 않으면 닐이 직접 와서 깨우고 나가는 데 그래도 안 나오면 다른 대기 인력으로 대체 하고는 했다. 한 번 대체되면 그 날부터 그 사람의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못 나간 사람은 다시 일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처음 일거리가 없을 무렵 혹시 그런 일이 있을까 해서 3일을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일이 없어 그냥 기다리다 들어오고 말았다. 그런 경우 외에 농장에서 직접 해고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 또한 두 번째 농장에서 그렇게 당했으니 말이다. Sam의 농장에서 토마토를 딸 무렵이었다. 토마토를 따는 기계에 앉아서 기계가 가는 대로 손놀림을 빨리 해서
익었다 싶은 것은 무조건 따는 것이었다. 너무 안 익은 것을 따도 너무 익은 것을 따도 안 되며 또 속도가 너무 늦어도 안 된다. 기계속도에 맞추어서 그리고 자기의 앞에 앉은 사람과 보조를 잘 맞추어 따야 한다.또 그 뒤에서는 기계에 앉아 따던 사람이 미처 못 딴 걸 따라다니며 따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처음 Sam의 농장에서 그 일을 했다. 3일 뒤부터 기계에 앉아 토마토를 따기 시작했는데 쉴 틈이 없고 허리를 계속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고 손은 토마토를 찾아서 움직이는데 편해 보일 듯하던 그 일이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 일 주일쯤 되던 언젠가였다. Sam은 기계에 앉아 정신없던 내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잠깐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어떤 말도 없이 그냥 집에 가라는 것이다. 그 것도 웃으면서,푸~ 나도 웃으면서 그 동안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느 농장을 가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샘의 농장에서 과일을 따면서도 앞에 앉은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면서 했는데 그 것이 눈에 걸린 것 같았다. 말하러 이 곳에 왔냐는 경고를 들었으니 말이다. 샘의 농장은 평판이 좋지 않은 곳이었고 다른 여행객들도 그 곳으로 일을 나가게 되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쌕을 당한 후 그 곳에서 다시 백팩으로 갈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 했다. 백팩에서 그 곳까지 벤으로 한 시간 이상을 달려온 거리이니 말이다. 결국 히치 하이크를 처음으로 하게 된다.

호주에선 히치 하이크가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다. 하지만 워낙 여행객이 많은지라 묵인하고 있지만(실제로 투어 에이전시에서 나누어주던 여러 책에선 히치하이크가 호주에선 금지되어 있다고 안내글을 볼 수 있다.), 쌕 당한 이후 히치를 한 이후 번디에서 시내를 나갈 때는 히치를 많이 이용했다.   신호등에 멈춰 서있는 차를 보면 그 옆으로 다가가 좀 태워달라고 때 쓰는? 내 모습이 지애는 재미있어 보였나보다 지애는 방 구조가 특이해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내 방으로 들어가면 그 곳에 또 문이 있는 작은 방에 다른 여자 여행객들과 방을 쓰고 있었다. 더블침대가 2개 있는 곳! 여자들이 쓰는 방이라 어느 정도는 깨끗하지만 칙칙함은 남아 있었다.번디에 온지 얼마 안 되었던 지애는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과거의 역사를 물었을 때 그 녀가 우리 한국의 초등학생 정도의 역사지식 (한,일관계에 있어서의)정도밖에 없음에 자못 놀랐다.. 하지만 그 건 다른 일본인에게도 물었을 때 그 건 마찬가지였다.
일본 위정자들이 그들의 과거를 밝히지 않으니 젊은 그들이 우리가 과거에, 그리고 현재의 일본에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신세대역시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하지는 않은 지 반성해 볼 일이다.지애는 일본의 현대 젊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젊은 여성 자기 주장이 있었고 그 만큼 개성도 뚜렷한 아가씨였다. 시내에 놀러가 무엇을 먹어도 그 녀는 더치페이를
고집했고 어디 보러가자고 하면 그 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다른 곳으로 혼자서 가곤 하는 아가씨였다. 요즘 일본의 아가씨들이 그런가? 그렇다고 들었다. 그 곳에서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참 잘 어울렸다. 무슨 음식을 하면 같이 나누어 먹었고 또 같이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그 곳에서 만난 일본인들이 좋아서 그런걸까? 아마 그 건 아닐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젊은 가슴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미래에 사는 젊은이들이 미래를 위해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겐 살아야 할 날이 더 많기에.

sack당한 이 중에 smith라는 영국인이 있었다. 영어공부를 코치해주던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풀장을 가기도 하곤 했는데 스미스라는 친구는 나의 영어발음을 무시?또는 바꿔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던 친구였다. 나는 발음을 미국식으로 하려 애썼고 스미쓰는 미국식 영어는 미국밖에 안 쓴다. 유럽에선 전부 영국 영어를 쓰고 있고 이 곳 호주도 영국식 영어를 쓰는데 왜 미국영어를 고집하느냐는 투였다. 어쩔 때는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는데 난 우리나라는 미국영어를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을 해도 여전한 그의 고집.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지. 호주는 영국 영어에 가깝다. 물론 영영사전을 보면 호주 영어 특유의 구분이 있지만 최근에는 미국영어에 가까워지고 있는 편이다. 아니 미국 영어를 많이 쓰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호주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마치 유행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미국영어 특유의 음악같은 운율이 아마 고급스러워 보이는 지도 모른다. 어쩜 전 세계로 뻗어가는 미국의 힘이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지도 모른다.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보여지는 헐리우드의 영영화를 통해, NBA의 농구를 보며 또는 팝송을 들으며 미국의 문화에 익숙해 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스미스는 영어를 많이 도와줬고 그런 일로 티격대곤 했지만 재미있는 친구였다. 휘파람 불면 "삐삐"하고 소리나는 중국제 열쇠보조 장치를 사와 한 밤중 자는 모두를 깨우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느라 한 바탕 부산하게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그는 넉살 좋게 코를 골았고 또 무슨 냄새나라의 왕자같이 그의 몸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정말 그는 씻지를 않았다-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도 결국엔 닐이 하도 일을 주지 않아 다른 곳으로 백팩을 옮겼지만 가끔 놀러와서 닐을 원망하곤 했다. 사람들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이에게 잘 해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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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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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리가 없는 날엔 여행객들은 각자의 활동을 한다. 이미 많은 수의 여행객이 스킨 스쿠버 다이버 라이센스를 따고 나가기 시작했고 또 시내의 PUB(호주의 선술집)에서 경마를 하기도 했고 가까운 바다로 나가 일광욕을 즐기기도 했다. 한 번은 닐이 일거리가 없는 날 사람들을 바닷가로 나르기 시작했다. 밴으로 말이다. 우리 몇 몇은 도시락을 만들어 바닷가로 향했고 그 곳에서 점심을 같이 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뜨거운 태양아래 젊은이들은 잘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가. 우린 그 날 썬형의 제의로 거금을 걷어 엄청 큰 소 뼉다구와 양배추, 그리고 갖은 양념을 사서 저녁을 근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소 뼉다구는 호주에서 개먹이로 파는 것이라고 한다. 그 것도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처럼 정말 소 뼉다구가 아닌 살코기가 정말 많이
붙어 있어 뼉다구를 파는 건지 소고기를 파는 건지 모를 정도의 것이 개의 먹이. 하기야 인구는 적고 먹을 것은 풍부하니 그럴 지도 모른다. 우리는 웃으며 호주인들이 만약에 우리가 먹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웃고 말았다. 어쨌든 모처럼 우리는 영양보충을 했고 맥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한 번은 주급을 타서 맥주 한 박스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다음 날 저녁 없어졌다. 아마 번다버그를 떠난 누군가가 가져갔나 보다. 백팩에는 이런일이 가끔씩 일어나곤 했다. 또 스푼이나 볼(bowl)에는 돈이 걸려있는 상황이라(deposit) 잃고나서 부주의하게 놓여진 다른 이의 것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농장생활을 하다보면 서구인에 대한 어느정도의 인식은 깨지게 마련이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 서구인은 남을 잘 배려한다.? 글쎄 어쩌면 그 이유가 우리나라에서는 당시만 해도 대학생만 가능하다시피 한 비자였고, (지금은 정 반대지만 말이다) 중국같은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깨어있는 사람이지만 미국,프랑스,영국 등 소위 선진국에서는 어중이 떠중이가 모이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던 곳은 12명이 자는 데 9시면 소등. 그 넓지도 않은 곳에 작업복이며 작업화며 또 베낭이여 짐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잡지들과 음식꺼리들, 푸하~ 내가 이렇게 쓰고 보니 참 지저분할 것 같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대로 봐 줄만 한 것 같다. 앞으로도 여러 백팩을 거치지만 이 이 곳. 그 중에서도 내가 묵던 방이 깨끗치 못했으니 말이다. 그 건 어쩜 남자들만 쓰기에 그러한 지도 모른다. 다른 방은 남녀 공용 이었는데 또 남자들만
쓰더라도 인원수가 적은 데 우리방은 제일 큰 방이었다. 방의 배정이라든가, 일의 배정같은 것, 닐의 입김이 닿는 곳에는 인종차별이 아닌가 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고 내가 언젠가 홀랜드인에게 말을 했을 때 그도 수긍하는 면이 있어 보였다. 남녀 공용인 방에서는 생활하는 여자들도 거리낌없이 옷을 갈아 입고는 했다. 나야 보지 못했지만 일행에게 궁금해서 물어보니 그렇게 말하드라. 한 번은 누굴 찾으러 그 방을 들어갔는데  거들이라고 하나? 얇은 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내 물음에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하였다. 한국여자는 어떻게 했는 지 모르겠다. 내가 생활했던 당시는 한국여자들은 없었고 내가 번디(번다버그의 애칭)를 뜬 이후로 한국여자들도 많이 왔다고 한다. keitie's farm에서의 일도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고 1주일에 이틀 이나 사흘 정도의 휴일엔 -일요일과 아직 안 딴 도마토가 익지 않아 익기 기다리는 하루나 이틀, 또는 비가 내리면 다음 날 일은 하지 않는다. 땅이 그만큼 질척거리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시내 중고가계에서 35$주고 산 롤러 블레이드를 끌고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녔다.

프린세스에서 시내를 지나 철길을 건너면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곳에는 번다버그를 가로 지르는 강을 사이에 두고 공원쪽에는 작은 동물원이 있고 건너편에는 Botanic garden과 저 멀리 있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크로커다일 던디를 보았다. 일 주일에 한 번 feedig time이 있고 그 시간에 사람들이 악어의 움직임을 보려고 모여든다. 난 주위의 많은 새들가운데 닭이며 병아리며 많이 있길래 하등 다를 것도 없는 그 닭들이 내가 모르는 특별한 종류인 줄 알았었다. feeding time에 그 걸 알고 나서 얼마나 웃었든지,
보타닉 가든은 드 넓은 호수 주위로 작은 열차 선로를 놓고 그 위로 열차-열차는 아니고 아주 작은,-를 타고 폼 잡는 곳이었다. 내가 갔을 때는 공사중이어서 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 넓은 곳에 이름모를 수목들과 꽃들과  번디의 유적들이 모여 있고 박물관도 있어 참 아기자기 한 곳이다. 역사가 짭은 호주에서
유적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지만 번디 초기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번디는 Rum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호주를 떠나는 사람들이 면세점에서 Bundy rum을 사 갈 정도로 말이다. 그 곳 공장은 시내 외곽에 있어 프린스하곤 가까운 편이지만 가 보진 못했다. 입장료 얼마 내고 들어가면 생산 과정을 견학하고 번디 럼을 시음한다고 한다. 번디를 떠야 겠다고 생각할 무렵 스쿠바 라이센스라도 따갈 요량으로 등록을 하던 날. 처음 번다버그로 도착할 무렵 보았던 스쿠버 마크가 떠 올랐다. 터미널 바로 앞의 그렇게 세련되지 못했던 건물,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건물에 스쿠버 장비가 떠 올랐다. 이런 걸 감개무량이라고 하나? 등록비
호주에서 제일 싼 149$이었지만 medical test에 30$과 이 것 저 것해서 200$ 정도 들지만 여전히 호주에서 제일 싸다. 이유는 바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별로 볼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Great Barrer Reef라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바다가 이 곳 번디에서 시작한다지만 사실 번디는 바닷속에서 고기 구경도 드물게 한다. 참고로 G.B.R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당시 호주에는 약 10여개의 문화유산이 지정되어 있었다. 그런 연유로 결국은 가격으로 경쟁력을 갖는다고나 할 까. 3박 4일 코스인데 하루는 실내에서, 하루는 풀에서 그리고 이틀은 바다로 나간다. 처음 신청을 하면 한국어로 된 manual을 주는 데 생활영어도 고만 고만한데 전문용어를 써가는 강의를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결국 믿을 건 그 한국어로 된 manual뿐인데, 사실 스쿠바는 위험한 요소도 분명 갖고 있어서  처음 신청을 하면 Diving master인 강사는 그 책을 주며 공부를 하고 어느 정도 이해 하겠거든 연락을 다시 하라고 한다.

04,27 x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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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디는 번다버그의 애칭이다. 도시에 애칭을 부치는 자유.

그 일 이후로 다시 1주일을 지내다가 나에게 돌아온 일은 `스쿼시'라는 야채를 따는 일이었다. 스쿼시.  농장주는 Dunn, 많은 과일을 따 보았지만 힘은 힘대로 들고 돈 안 되는 일이 바로 이 것을 따는 것이다. 농장에서 사실 힘 드는 것은 없다. 여자도 무난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허리가 무척 아프다는 것! 그래서 혹시 농장에 갈 작정이라면 차라리 신신파스 같은 조그만 걸루 왕창 사갔으면 한다. 물론 그 곳에도 맨소래담 비슷한게 있긴 하지만 조금 비싼 거 같고 무겁지도 않으니 말이다. 상비약이라고나 할 까? 머 한 참 뒤에는 아픈 게 정상인 것처럼 아픈대로 일하지만 처음 보름간은 정말 허리가 내 허리가 아니었다. 이 후 농장에 있는 동안 약 4개월은 신경통을 달고 다니는 것 같다. 글세 허리가 튼튼해 진다면 모를까. 이 건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호소하다시피 말하는 통증이다. Backpain을 연발하며 서로 웃다 보면 잠시 넘기기도 하지만 잠 잘 무렵 좋은 침대도 아닌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음. 청정원 마요네즈 TV CM에 보면 보이는 끝이 안 보이는 그 밭을 배경으로 두 꼬마들이 웃음을 짓는 데 그 뒷모습을 보고 호주의 농장을 상상하면 비슷할 듯하다. 전부 다야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컨트랙인 줄 알고 정말 허리를 피지 않고 따며 작업 후에 주어질 급료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어라! 그 건 시간급이었다. 쩝! 어쨌든 Dunn은 나보러 베스트 워커라며 입에 칩이 말라라 칭찬을 했지만 속쓰림은 어디에 하소연하노. 몇 일 뒤 다시 주어진 일은 번다버그의 하이라이트였던 keities농장의 egg tomato. 정말 달걀같이 생긴 토마토를 색깔 구분해서 갖고 다니는 바켓에 채울 때마다 매니저가 각자에게 나누어진 표식을 꽂아 놓고 일이 끝난 후 그 표식을 계산 하는 일이었다. 내 경험에선 이 게 가장 짭짤한 벌이었던 것 같아. 물론 내가 경함한 과일따기에서 만 말이다. 그 건 컨트랙이었고 그 만큼 뛰어다녀야 했다. 그 곳에서 한 태국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뛰어다니며 밥먹는 시간 마저도 아까운 듯 도마토를 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 는 영국 여자-애인이 아닌 가 싶다-와 함께 다녔는데 둘이 정말 일을 잘 했다. 마치 돈 벌러 호주에 온 사람들 처럼 말이다. 나도 그런 계획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학교 등록금을 호주에서 벌어 온다는 -오래 전에 지워 버렸고 그 저 남은 기간 별 탈없이 잘 있다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열심히 뛰면 100불 이상은 챙길 수 있었다. 다른 이는 나를 부러워 했지만 지금까지 일도 못하며 보내온 시간을 보상한다는 생각에 땀을 흘려야 했다.

 가끔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니며 근처의 호스텔에 있는 한국인들과 어울리며 지내기도 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 무슨 사연이든 들여다 보면 귀를 기울이면 가슴 저미는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친구들, 친구들이라 부르기엔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이 대부분 인지라 머 하지만 그 곳에서 그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호주까지 오게 된 경유야 필설로 다 하랴만 말이다. 지금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사연을 안고 그 곳에 갔겠지만 말이다. 호주에서 만난 이들은 대학생이 대 분분이었지만 삼성 반도체의 연구원에 다니다 경험을 쌓겠다는 이유로 퇴사하고 나온 사람, 학교 졸업하고 온 사람, 휴학계 내고, 백수 건달로 집에서
부모 돈으로 카페 사장하다가 재미 없다고 놀러 온?, 동생. 참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다. 번다버그에서는 많은 일본인들을 만났는데 이상한 것은 일본 여자들은 부침성이 좋은데 남자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글쎄...... 어느 서양의 인류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지 아마,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중국인 요리사를 두면 그 남자는 행복한 거다"라고, 하지만 프린세스에 있던 한국인들은 거의 다가 성격이 활발해서 같이 일하던 다나까와 쯔꾸미등 일본인 친구들은 우리와 잘 어울렸다. 다나까는 일본에서 우편을 배달하는 차의 운전기사를 하다가 호주로 온 28의 형이었고 쯔꾸미는 노가다며 이 것 저 것을 하다 이 곳으로 온 동생이었다. 그리고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인도에서 3개월 살다가 온 일본 남자 켄지. 대학교 다니다 온 ??등 번다버그에서도 보웬에서도 그리고 케언즈에서도 만난 일본인들은 정말 친절하고 성실했다. 처음 정이 들기 힘들지만 정들면 쉽게 친해 질 것 같은 사람들. 특히 "신"은 보웬에서 만나 케언즈까지 정말 끈끈한 정을 쌓은 일본 친구다. 그의 도움도 받았고, 그렇게 쉬는 날에는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뭘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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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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