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난한 어린 시절: 학교에 가지 않는 소년 노동자의 산업 생활
이재명은 196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고,
이는 그의 평생의 약자에 대한 태도에 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소년공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장에서 청소부로, 어머니는 화장실 손님들에게
10원, 20원씩을 받는 수금원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첫 직장은 염산과 황동을 취급하는
목걸이 공장이었고, 두 번째 직장은 붕산으로 납땜을 하는 공장이었지만 사장이 밤에 도망치자 월급을 떼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공장에서는 고무 조각이 손가락에 끼였다고 합니다.
여러 공장을 돌아다니던 중 장갑 공장의 프레스 기계에 걸려 왼쪽 손목 바깥쪽 부분에 골절상을 입었지만
당시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고로 인해 나중에 6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며 2차 병역 판정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습니다.
당시 작업반장이 고졸이었는데 그를 보고 본인도 고등학교를 나오면 작업반장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검정고시를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1982년 학력고사를 통해 4년 장학금을 받고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2. 어려운 가족사: 빈곤과 갈등 속에서의 성장
이재명의 가족력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가난과 갈등 속에서
자녀를 키워야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가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어머니는 이를 견디고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재명은 어릴 때부터 가족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는 공부보다 생계를 우선시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가족의 소중함'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공장 월급은 8만 원 정도였지만 대학교에서 생활비로 월 20만 원은 물론 입학금과
수업료 면제 혜택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사준 교복을 입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학 교복은 이재명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대학생들이 교복을 입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중고등학교에 갈 수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교복을 사주실 때는 가만히 있었어요.
알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고만 있었어요. 어쨌든 입학 당일에 교복을 입은 사람은 그뿐이었어요.
당시 공장에서 일하던 셋째 형 이재선에게 대학 입시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가족들을 설득해 대학교에서 월 수당을 나눠주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이재명에게 매달 5만 원씩을 받아 공부를 한 이후, 4년간 학비와 생활보조금을 약속받고
건국대학교 경영학과로 진학해 공인회계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재선은
결국 이재명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재명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이재명은 자신의 용돈을 쪼개면서 도와준 형에게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3. 정치에 입문한 방법: 변호사로서의 사회적 책임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이재명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변호사로서 노동자, 빈곤층,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 상담을 제공하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004년 이재명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성남시병원 설립 운동 당시 성남시민들은 국내 최초로 주민들이 발행한 조례를 18,595명의 서명을 받아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했습니다[31]. #이재명 의원은 심의 자체가 부결됐다고 밝혔지만,
조례안 심의 당시 성남시의회 자치행정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2시간여 논의 끝에
지방자치법, 지방공기업법(타당성 검토 여부 등), 각종 의료 여건 등을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
다시 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심의 중단이 선언된 후 당시 주민 대표 중 한 명으로
성남 시민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해 시위를 벌이다 주민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공공재손괴죄로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이재명의 화가 난 듯 눈물을 흘리는 표정이 매우 강렬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남시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후 2006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단 한 번의 공천으로
성남시장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결과는 전 시장인 한나라당 후보 이대엽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대엽이 성남시장을 재선하면서 많이 해먹은 거 같습니다.
이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공천을 신청했으나
예비선거에서 조성준 후보에 밀려 탈락했고, 대신 성남시 분당구 갑 선거구에 전략공천으로 출마했으나
지역구 현역 재선 의원인 한나라당 고흥길 후보에게 패배했습니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해 51.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는 55.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4. 평범한 한국인들이 이재명을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재명의 삶은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소년공으로 일하며
검정고시와 대학을 거치며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가정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줬고,
변호사와 정치인으로서 이러한 가치관을 실천해 왔습니다.
이재명의 과거 경험이 그의 정치 철학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대한민국 서민들은 그를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희망'입니다.
이재명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입니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차기 대통령 후보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성남시장 시절의 어린 시절 경험과 가족사, 혁신 정책 등을 통해 그가 왜 평범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가 성남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시행한 정책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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