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 출소한 차지혁. 미다스칸 평화비자카드를 발행하기 위헌 주식공모에서 사업내용을
과장해서 투자자들의 올바른 판단을 방해했다며 금융감독원에게 고발이 된 상황에서
지나온 회한을 처절하게 곱씹는 내용의 글이다. 어디에서 이 글을 남겼는 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저 인터넷에 떠 도는 그에 대한 짧은 이야기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 차지혁, 오늘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살아오는 동안 모든 神도 내겐 경쟁자였다.

누군들, 황금 잔에 물 마시고 산해진미가 일상인 금테자궁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인가? 

 

어느 누가, 부모로부터 외면 받은 생명을 소망했을 것인가? 부모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가 부정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 천리를 날아가는 사랑의 화살을 우박처럼 쏘아대도 정작 맞춰야 할 과녁이 없다는 사실이 주는 절망감만큼 사람을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부정과 모정을 거세 당한 아가페의 이방인. 고아(孤兒)!  나라고 그쓸쓸한 이름을 염원했을 리는 없다. 

 

버려지고 싶다고 앙탈 울음을 우는 아이가 있던가?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을 밀어내는 아이가 있던가? 축복을 면제 받은 탄생은 울음 터트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만 있었다면 나는 탯줄을 향한 가위의 궤적에 목 울대를 내던져 질곡이 예정된 나의 생을 반납했을 것이다. 육순 외할머니의 쪼글쪼글한 가슴에 매달려 젖을 갈망해야 했던 유아기는 차라리 참을 만 했다. 그 당시는 미스코리아의 풍만한 젖무덤도 할머니의 체온 만큼 절실하지 않았으니까. 

 

칠칠치 못한 친구의 고급 옷이 골목대장인 나의 힘보다 강하고, 그의 손에 쥐어진 장난감이 나의 총명함보다 월등한 역량이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내 친구가 그의 젊디 젊은 아줌마를 부르는 호칭이 "엄마"이고 내가 나의 주름진 얼굴의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 "할머니"라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절망의 끝자락 을 보았다. 내가 버려진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부모 없는 놈은 할 수 없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치료약이 없는 고통, 현기증. 그것은 아무리 억지 울음을 울어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었다. 나는 절망과 친숙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은 소년을 조숙하게 하고, 말수 없게 하고, 홀로 있게 했다. 혼자서 노는 가난한 아이의 유일한 위안은 공상. 오직 꿈꾸는 것만이 가난과 슬픔이 가득한 현실에서 사랑과 포옹이 가득한 이상 세계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내가 꿈 꾼 곳은 환경 때문에 꿈의 크기가 결정되 지 않는 낙원이었다. 부모가 있든 없든 모든 아이들은 행복할 수 있고, 그가 꾸는 꿈에 커트라인이 없는 세상이다. 나는 그 낙원을 만나고 싶었다. 동구 밖 장승만큼 키가 커지면 이 세상의 슬픔과 불행을 몰아내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철 모르는 시절의 열병 같은 꿈 때문이다. 

 

그러나 울타리가 부실한 아이가 마주쳐야 하는 현실은 얼마나 냉정했던가. 9살 때부터 시작 된 남의 집 머슴살이, 돌아서면 허기지는 눈치 밥을 먹고 자라야 했던 천덕꾸러기. 그가 개척해야 하는 삶은 바닷물 보다 짜고 겨자보다 매운 우울한 풍경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미 새의 보살핌 속에 자라지 못한 어린 새가 거의 살아 남지 못하는 것은 그의 입에 들어 가는 벌레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늘 유영이 본능인 그에게 날개 짓을 가르쳐줄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살아 남지 못하는 것이다. 활로는 오직 야생의 근성 뿐. 천길 벼랑으로 떨어 졌을 때나 세찬 비바람이 몰아 칠때나 본능이 이끄는 야생의 날개짓이 유일한 대안일 뿐이 다. 허기진 배는 고통스러운 만큼 야생의 본능을 자극하는 힘. 나는 그 힘에 의지하여 살았다. 

 

시장바닥 냉차장수의 박리다매 원칙을 배워가며, 반드시 살아 남는다는 것(生殘)은 위지를 곧추 세우는 원동력이 됐다. 구두닦이도 굶지 않으려면 시커먼 한 밤중에도 부지런을 떨어야 하고, 빌어먹는 거지도 '어떻게 하면 더 잘 얻어먹을 수 있는가'하는 마키아벨리적 술수의 마케팅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체득해 나갔다. 울타리 튼튼한 사람이 미래를 보고 있을 때, 소년은 하루하루 이어지는 생존 전쟁을 치룬것이다. 아귀같이 살았고 잡초처럼 살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빵을 얻을 수 없는 정글의 법칙은 그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던, 받지 않고 자랐던 추호도 예외가 없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다. 남들이 인맥과 학맥을 쌓기 위한 투자를 할 때 내가 뜻모를 포춘지를 끼고 번역소를 들락거린 것은 나 역시 무엇인가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학력은 짧아도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에 나는 손에 잡히는건 무엇이든 읽어댔다. 책이든 신문이든 닥치는 대로 끼고 살았던 것이다. 저수지에서 고기를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막고 품는 것이다. 두 팔 걷어 붙이고 물통 하나로 저수지 가득한 물을 끊임없이 밖으로 퍼내는 것이다. 육체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붇는 무지막지한 작업. 누구나 인생의 한 순간은 막고 품는 방법만 이 유일 대안인 순간이 온다지만, 나는 그 순간을 철모르는 어린 시절에 만난 것이다. 

 

막고 품자! 생각한 것은 곧바로 실천해 옮기고 막히면 머리통을 들이 밀어서라도 뚫자! 그 신조 덕분에 나는 무모하리만큼 많은 일에 도전 했고 무수히 부서지고 깨졌다. 시행착오 없는 원숙함이 어디 있던가. 치기어렸던 나의 발상은 현실의 벽에 깎이고 다듬어 지면서 윤이 나기 시작했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안목을 키워내고 구체적인 방법을 도출해내는 데는 현장 체험만한 스승이 없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욕구가 어느 곳으로 이동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이 책상머리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을 때 나는 머리 터지는 실전의 경제를 익혔던 것이다. 나도 성장하고 있었다. 2+3=? 이라고 물어보는 획일화된 교육에서 열외 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나에겐 축복이었다. 역으로 5라는 숫자를 놓고 그에 이르는 온갖 경로를 찾는 역발상을 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발상은 고정관념을 넘 어서는 컨셉. 고정관념, 그것은 다른 경로의 탐색을 포기하는 버릇을 길러주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남들이 가는 길로만, 발견된 정답으로만 가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에 도전이 없고 발전이 없는 것이다. 이미 발견된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후발주자를 자청하는 것. 그런대도 사람들은 매번 사고의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승전가를 임신할 줄 모르는 낡은 깃발이 되고 싶지않다. 

 

남들이 이미 장악한 시장에 뛰어드느니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시장을 장악하는 것의 부가가치가 천만배는 크다. 게다가 시장은 또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공기 캔이며 별 분양 등과 같은 감성 상품에서부터 광고는 곧 돈이라는 개념에 부합되는 시스템적인 것까지 손만 대면 열리는 시장이 지천이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소비자와 그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생산자의 이해를 조율하는 다양한 방법과 경로 하나하나가 곧 별개의 시장인 것이다. 발견된 정답 이외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태도야 말로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차단하는 바리케이트인 것이다.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미래도 앗아가는 것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나를 그 고정관념과 맞서 싸우라고 주문한 것은 바로 운명의 신이었다. 신이 내게 허락한 유일 무기는 창의력. 자유사고의 방패가 될 실천력은 나 스스로 조달할 몫이었다. 부딪히고 깨지고 현실에서 만나는 숱한 고비들은 나의 자유사고에 균형을 잡아주었고, 어떤 시장도 가공해 내는 힘을 붙게 했다. 비로소 나는 창의적 사고의 날개를 가진 것이다. 

 

내 나이 마흔 하고 둘. 버려진 어린 새가 이제 중년의 맹금(猛禽)이 되었다. 5%에 불과하다 는 벤처기업 생존율 보다 더 가는 바늘 귀를 통과해 확실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풍부한 경험을 통해 나는 눈을 감고도 공기가 흐르는 길목을 감지해 내는 강인한 생존력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오욕의 이름이거나 '천재 기획가'라는 영광의 이름이거나 상관없이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추진력이다. 

 

환경이 강요하는 운명에 길들여 지지 않기 위해 치른 대가도 컸지만 그에 따른 반대급부도 얼마든지 컸던 것이다. 남들에게는 강요되지 않는 무수한 통과의례를 거쳐 난 내 힘으로 살아 남았다. 그 눈물 마르지 않는 시련의 길목을 무단으로 횡단해 오면서 나는 억지도 부려야 했고 반칙도 해야 했다. 누군가 나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면 정식으로 사과 올리고 싶다. 명문대학 출신들이 전화 한 통화면 해결될 일을 수년 동안 몸부림을 쳐야 겨우 한 과정의 능선을 넘을 수 있었던 나에게 절대적 도덕률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목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 다만 그 잘못이 나의 타고난 천성에 연유된 것이라는 오해만은 사양하고 싶다. 남들이 말하는 억지와 반칙이 나의 정론이요, 정공법일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겐 "선배 나 이것 좀 도와줘!"라고 전화할 인간 병풍이 없었다. 나의 발상과 기획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교 수료 출신의 논리에 설득되는 것이 마치 십 수년 대학공부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 가득했던 것이다. 공들려 배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더욱 보완해줄 수 있고 더 가공해 줄 수도 있으련만 그네들은 한사코 안 되는 이유만 열거하기에 바빴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그 증명의 책임은 제안자의 몫. 나는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또 하나의 능선을 넘어야 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내가 그에게 새로운 컨셉을 제안했던 이유는 그의 조력을 얻기 위함이었거늘 종국 에는 그 조력자의 동의를 얻기 위한 또 다른 조력자를 구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늘 그런 식이었다. 나의 빈약한 배경과 일천한 학벌이 그들의 자세를 진지하게 만드는 데 장애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단 한번만이라도 마음을 열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그래서 그 사안에 대한 가능성을 좀 더 따뜻한 눈으로 보아 주었다면 우리는 온 세상이 놀랄만한 대박을 터트릴 수 있 었으련만 나는 늘 외사랑에 함몰되고야 만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가. 새시대를 열고자하는 본능을 거스를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한사코 조력자를 설득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조력자를 찾아 나서곤 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그 또 다른 조력자마저 온전히 나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 나는 참으로 좌절했다. 첫 단추가 꿰지지 않으므로 인한 악순환. 나보다 월등한 환경에 있는 경쟁자들은 속속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일어나자! 동아줄 튼튼한 저들의 꿈만큼 나의 꿈도 소중하지 않은가. 그래 다시 일어서자. 눈물이 사치스러울 때는 주저앉아 우는 때다. 다 포기해버린 듯한 편한 자세로 우는 눈물이다. 나는 그럴 수 없다. 눈물도 달리면서 흘릴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험한 줄 처음 알았던가. 뛰자. 걷기라도 하면서 울자. 몸이 꽁꽁 묶여 옴짝할 수 없다 할지라도 의식만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야 한다! 눈물의 붓기가 빠지면 피식 웃음도 나온다. 내가 누군가. 나는 자유사고인이다. 아예 나는 일상의 관념을 뛰어넘는 컨셉을 준비해서 들고 다녔다. 배포가 없는 놈은 들기에도 힘겨운 컨셉, 부탁이 아니라 당당함으로 다가갈 수 있는 컨셉을 가공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편법이나 반칙도 새로운 시장을 여는 또 다른 출발점임을 납득시킨 것이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성과는 있었다. 가뭄에 콩나듯 죽이 맞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90년 단돈 2만3천원으로 창업, 원년 매출 1천5백억원 대를 달성한 자동차 종합관리 대행사 트리피아는 그렇게 이뤄진 신화였다. 모든 것을 소비자에게 돌려 줘 버린 후에도 이윤을 남기는 컨셉의 힘이었다. 나는 증명해 냈고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나 이내 좌절을 해야했다. 내가 열고자 하는 시장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에 천하를 경작할 파트너가 되어 줄 사람들이 슬슬 꼬리를 감춘 것이다. 수년간 한길로만 다가 온 그들로선 존립 기반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경계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나의 천성이 남의 것을 빼앗지 못해 안 달하는 것도 아닌데. 천하를 훔치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시장에 연연하지 않음을 알았을텐 데. 한사코 손 내밀어 주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내게 있어 시절인연 맺기 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가가고 다가가도 한사코 외면하는 편견의 시도(視刀)에 나는 매일 매일 지쳐간 것이다. 

 

사이비 청년이 아니기에 허공처럼 깊고 시신처럼 마비된 불량한 꿈을 꿀 수 없다. 

 

솔직히 눈물 나도록 힘겨웠다. 수없이 쓰러지면 일어나고, 무너지면 다시 재기하는 20전 21기. 완전히 끝났다고 행각했는데 다시 일어나고. 정말 이제는 끝장났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에 다시 일어나는 나를 사람들은 "도저히 상식적으론 이해가 안 되는 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더구나 실패한 전력을 가진 사람이 또 다시 재기한 다는 것이 과연 말처럼 쉬운 일인가? 

 

횟수가 거듭될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등골이 휘어 오장이 짓뭉개지는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허기진 위장을 거슬러 오르는 쓴 물까지 바닥이 나도록 자신을 몰아세우는 일이요, 충혈된 두 눈을 파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꺼칠한 입안에 밥알을 우겨넣는 비애감을 삼켜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런 고통을 수없이 반복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도 사람이다. 막 굴려온 육체일 망정 쥐어짜면 선홍색 피가 배어 나오는 인간이다. 일그러진 얼굴만 아픔을 느낀다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는가? 남들이 보지 못한 눈물의 역사도 있고 애초에 반납했어야 할 삶을 한사코 부둥켜 안고 가는 이유도 있는 법이다. 왜 나라고 고통을 모르며, 왜 나라고 눈물이 없겠는가! 내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결코 자해의 흔적 이 아니다. 숱한 불신의 칼날이 왔다간 흔적이고, 무수한 편견의 창이 뚫고 지나간 궤적이다. 눈을 감고 던져도 꽂히는 표적. 그것이 바로 가진 것 없는 주제에 너무 큰 꿈을 꾼 죄목을 가진 나 차지혁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누가 무슨 명목의 편견의 칼과 불신의 창을 던졌느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아냥이고 그것이 곧 편견이건만 나는 그 대답을 한다. 사람들은 내가 시대를 열어가곤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나와 함께 천하를 도모하고자 모인 동지들을 보고는 "차지혁, 그 놈이 교주는 교주인 모양일세"라고 말한다. 그것이 편견의 출발이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우리의 에너지를 알리고자 언론을 만나고자 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언론을 이용해 무슨 짓을 할려고?"라고 입을 모은다. 임직원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서로서로에게 의지하고 북돋는 모습이 신흥 종교고, 개개인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내가 교주라면 전세계 모든 기업은 나와 미다스칸을 벤치마킹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대인들의 가슴에 달려가는데 가정방문을 할 수 없다면 널리 알리는 사람을 찾을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 미운 놈은 무엇을 해도 밉고, 고운 놈은 무슨 잘못을 해도 곱다는 법칙이 왜 영원불멸의 법칙이 되어야 하는지 피눈물로 되묻고 싶다. 

 

돌이켜 보자. 십 수년 전 나에게 희대의 사기꾼이란 오명을 굴레 씌운 공기 캔, 아마존과 같은 인터넷 서점, 별 분양 프로젝트, 제휴카드, 광고는 돈이란 개념의 비즈니스 모델 등등이 현실로 이뤄졌을 때, 어느 누가 "그 시장의 원안자는 차지혁이다"고 말해주었는가! 벤처 캐피탈이든 뭐든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려는 도둑놈은 이 사회에서 격리 시켜야 한다고 떠들던 사람들에게 오늘의 벤처 시대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다. 

 

"나 아이템 있습니다. 투자 좀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모든 벤처의 앞길을 막아서라! 그들은 지금 희대의 사기꾼이 걸어온 전철을 밟고 있지 않는가! 

 

이제와서 누구의 잘못이었는가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이미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이유로 편견 받아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비록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내가 예견했던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서점에 문전성시를 이루고, 비록 남의 나라 사람일망정 밤 하늘의 별도 충분히 가공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것이 이미 입증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서간 자의 자존심을 보상받았다. 이젠 강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미래만 남은 것이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키우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나의 자유사고는 6년3개월의 수인생활 속에서도 결코 사그러들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벤처강국으로 성장해 가는 사회의 변화를 지켜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오욕의 이름을 벗을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려왔다. 너무 앞서갔다는 이유로 편견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맞을 준비를 해온 것이다. 사방이 가로막힌 먹방 안에서 나는 쇠사슬에 감겨 신음하던 희망이란 놈을 깨우기 시작했다. 뼈만 앙상한 그 놈을 부둥켜 안아 세우고 미음을 떠다 먹였다. 틈이 나면 교도소 운동장으로 데려가 운동도 시키고 '결코 여기서 주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며 머리를 흔들어댔다. 분초가 다르게 변화하는 바깥 세상에 더 이상 뒤쳐져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투여 가능한 모든 시간을 책과 신문에 쏟아 부었다. 특히 신문에 실린 광고는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댔다. 무릇 광고란 현재까지 가공된 마케팅의 정수요,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좌표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광고를 보고 바깥 세상과 호흡을 맞추었다. '이 시장은 이런 컨셉보다 이렇게 열면 더 파괴적이었을 텐데', '아, 여기까지 마케팅이 왔구나' 가상게임만으로도 나의 창의적 생산라인은 충분한 예열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1,300개도 넘는 많은 아이템을 가공했다. 벤처시대를 향한 조급함이 나를 잠 못들게 만든 것이다.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수인신분으로도 유래 없이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도 열었다. 그리고 출소 5일전, 빠른 우편 요금 340원과 인지대 60원을 지인에게 보내 단돈 400원짜리 회사를 차렸다. 그것이 미다스칸이다. 그리고 99년 1월5일, 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유예 되었던 제1호 벤처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 땅에도 힘없고 가난한 자의 꿈이 꽃 피울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6년 동안 나를 지원해 준 후원회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과 재기를 위한 세부 계획을 준비했다. 빈약한 자본과 열악한 환경. 맨주먹으로 출발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대두됐다. 그러나 가장 고민되었던 부분은 돌아온 탕아, 나 차지혁에 대한 거취문제였다. 벤처시대가 열렸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나는 여전히 위험한 발상을 하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전면에 설 것인지 아니면 어느 시점까지는 후방에서 지원사격을 할 것인가 망설였던 것이다. 나도 전면에 서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후원회의 중론은 나의 뜻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차피 편견의 관성이 붙은 사람들에게는 언제고 간에 "저 회사는 차지혁이 조종하는 회사"라는 불신의 발톱을 세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오해는 불신을 낳고 그 불신은 대세를 망치는 법. "차라리 정면승부를 해보라"는 주문이 결론이었다. 그렇게 전면에 선 나는 목숨을 건 재기전을 치르게 되었다. 한편으론 이제는 혁명적 사고가 편견의 구실이 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이 일기도 했다. 과감하게 포승줄에 묶인 수인복 사진을 내걸고 광고를 해서 함께 천하를 도모할 80여 명의 창업동지들을 모았다. 그리고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 터지도록 일에 매달렸다. 99년 6월 창업 이후 출원한 특허가 40여 개. 하나 하나가 새로운 시장을 경작할 무기가 되고, 세계시장을 장악할만한 위력을 가진 것들이다. 무엇을 들고 세상과 겨룰 것인지 준비를 끝낸 다음 수순은 실행할 자본을 모으는 일. 차지혁 이름 석자를 걸고 인터넷 주식공모를 했다. 문의 전화가 빗발쳤고 격려의 메시지가 쇄도했다. 4배수 청약에 2배수 입금. 망가진 자에게 보내주신 세상 사람들의 성원은 참으로 뜨거웠다. 내 눈시울도 뜨거웠다. 힘없고 못배운 사람들을 봐서라도 반드시 성공해 달라는 당부에 내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마침내 벤처시대. 그토록 열고자 했던 자유 사고의 신세계. 온갖 상처를 무릎 쓰고 고난의 능선을 달려온진 10년 만에 비로소 푸른 창공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던가. 코스닥 등록에 관한 요건이 바뀌는 길목에 실시된 미다스칸의 주식공모는 인터넷 공모 한계선인 10억원을 1천만원 초과해 버렸다. 공모를 통해 모은 금액 은 7억7천만원에 불과하지만 80명의 창업동지들이 출자한 2억원의 자금이 공모로 해석되는 통에 1천만원을 초과한 셈이 돼버린 것이다. 임직원 모두가 함께 창업한 동지인 만큼 한 주 씩이라도 나눠 갖자며 출발한 동참운동이 불특정다수(50인 이상)에 의한 공모로 해석될 줄 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단초가 된 빌미는 작았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희대의 사기꾼'이란 오명을 가진 이가 10억원이 넘는 주식공모를 했다는 것 자체가 두들길수록 맛이 나는 북어요리였던 것일까? 4대 방송사와 19개 일간신문의 십자포화가 이어졌다. 사기 인터넷 주식공모의 대표적인 기업, 미다스칸. 그들의 괴수 차지혁!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딱 그 짝이었다. 소명기회나 반론권의 기회는 원래부터 해당 사항이 없는 사안이었는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쓰는 기자가 없었다. 그저 손발 묶인 포로처럼 '희대의 사기꾼'에다 당대의 '인터넷 사기꾼'으로 몰려버린 것이다. 

 

금감위가 조금 더 자세하게 행정지도를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않다. 사후조치에 대한 부분도 대동소이하다. 비록 미다스칸의 실수가 사실이라 해도 고의성이 없다면 따끔한 행정 지도만으로도 충분했을터인데 검찰 고발 조치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과하다는 마음이 안 들 수 없다.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주주님들에게 죄송스럽다. 좀 더 준비되고, 좀 더 조심스럽게 사업을 진행했어야 하는 데 사소한 실수로 너무 많은 심려를 끼쳐드렸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다. 미다스칸 임직원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한창 추진 중이던 제휴사들과의 결별과 투자 규모를 결정하고 있던 캐피탈과의 협의 중지. 밤낮을 달려 땀 흘려 온 결과물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야 했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겠는가. 그들의 잘못이라면 오로지 한 가지. 흠결 많은 오너를 만났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까지 함께 망가져야 했으니 실로 참담한 마음이다. 

 

언론인들이여, 내 운명에 힘찬 입맞춤으로 뜨거운 시대정신의 자국을 파줄 수 없는가! 

 

원치않는 결과였지만 금감위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벤처 열풍에 편승한 많은 기업들에 대한 금감위의 우려는 당연한 것이다. 수익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주가가 수백만원이 되고, 회원만 많으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현실. 매출액이 100억 수준인 회사의 자산가치가 십 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제조회사의 자산가치에 비견되는 사회현상이 우려되고 염려되었을 것이리라. 언제고 거품이 빠지면 그 손실이 나중에 주식을 매입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라는 우려는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이런 금감위의 인식에 미다스칸의 시장진입이 부담스러운 이해 관계자들의 직간접적인 이야기들, 생경한 미다스칸의 광고 컨셉, 미다스칸을 위험한 기업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연유에서든 우리 측이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야 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가공한 비즈니스 모델이 어떻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왜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인지 피력할 기회쯤은 있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미다스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도덕한 기업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가장 확실한 벤처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어떤 전문가가 검증한다 해도 자신 있다. 수익구조면 수익구조 파괴력이면 파괴력, 오너의 위기돌파 능력이나 직원들의 맨파워 등 어느 항목을 따져봐도 자신 있다. 지금이라도 기회만 주면 나는 그를 입증해 보일 수 있다. 그런 연후라면 어떤 결과라도 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2월 26일자 중앙일보 보도를 접하면서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기 사에는 10억 공모 제한을 넘어서 26억을 공모하고 그나마도 개인이 유용한 기업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게 벌금 4천만원에 처해진 사실이 담겨져 있다. 

 

미다스칸은 비록 행정적 착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주주를 미혹시키려는 일체의 의도가 없는 경우다. 만약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공모금액 7억7천만원을 웃도는 15억원의 주식 청약금을 배수 계산으로 환원시켰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우리가 미비한 점에 대해 얼마 든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 공모의 전형적인 사기 모델로 규정되어지는 것은 단호히 거부한다. 언론의 입장 또한 이해는 간다. 금감위라는 정부기관의 보도자료니 만큼 그를 그래도 게재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란 판단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언론의 본분에 합당하게 반대쪽 입장에 대해서도 해명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하는 바람이 없을 수는 없다. 이번 사안만큼은 방대쪽 입장에 대한 해명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사실 이례적인 경우가 아닌가. 더욱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신생회사의 입장 에서는 그 소명의 기회가 너무도 절실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또한 차지혁이라는 이름 때문 에 생략된 것인가? 기자정신으로 검증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야 해명할 부분은 해명하고 인정할 부분은 인정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 기회 조차 갖지 못하고 십자포화를 맞아야 한다면 어찌 억울 하지 않을 것인가. 언론의 보도 한 줄이 사형선고와 같을 수 있음을 헤아려줬으면 한다. 흠결 많은 오너를 갖고 있는 임직원들과 주주들이 감수해야 할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큰 것이다. 다른 기업들의 아이템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으로 많은 스포트 라이트를 비춰주던 언론이 유독 미다스칸에게는 철저히 외면하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이 땅에 벤처시대는 언론이 이끌어 준 것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 많은 온라인 업체 가운데 몇 개의 아이템이 수익을 남기고 있고, 그것의 실질 가치가 얼마쯤 되는지는 언론인 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고 본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검증을 받고 싶은 것이다. 전문가의 시각으로 가망이 없다면 정말 투자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형선고를 내 려달라. 판단해 보고 가치가 있고 비전이 있다면 우리 비즈니스 모델도 널리 알려 주었으면 한다. 적어도 기획에 있어서만큼은 독보적이라는 차지혁이 숨가쁘게 주장하는 것이라면 한 번쯤 들여다 볼만하지 않은가! 

 

 

차지혁의 명예와 목숨을 건 사업설명회 

 

우리는 2월18일 인터콘티낸탈 호텔 전관에서 명예와 목숨을 건 사업설명회를 열면서 이 시대의 모든 양심들과 벤처 전문가 그리고 식견있는 언론인 여러분을 초청한 바 있다. 언론보도 7일만에 치른 행사를 놓고 금감위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원래 그 자리는 21세기 전자상거래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it's MK)에 대한 설명의 장으로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2월11일 보도에 대한 공개 검증의 장 성격을 가미한 것일 뿐이다. 언론에 십자포화를 맞은 기업이라 행사장이 매우 썰렁할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성원은 뜨거웠다. 1800명의 청중과 1천여명의 네티즌들이 공개 검증의 장에 입장했다. 여러 차례의 중간 박수. 몇몇 주주들은 자발적으로 이번 사안에 대해 '우리 주주들은 미다스칸에게 미혹되거나 속지 않았다'는 내용의 서명 운동을 벌여 400명이 넘는 주주님들의 명단을 가져 오기도 했다. 너무도 감사한 주주님들이다. 행사는 훌륭하게 치러졌으나 언론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당일 행사장에 참석한 몇몇 기자들은 기업 설명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도 정작 정정 보도에 가까운 기사를 내 보낸 곳은 YTN뿐이었다. 아직도 차지혁이란 이 름은 이 세상에 있어 뜨거운 얼음이고 한사코 외면하고 싶은 풍경인 것일까? 

 

나, 여기까지 오기에도 참으로 힘겨웠다. 아무리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가공해 놔도 널리 알리는데 남보다 두 배 이상의 노력과 몇 매 이상의 비용이 들어갔다. 만드는 것도 알리는 것도 자력으로만 해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디어 수준의 아이템에게 부여되었던 수 십번의 조명 가운데 한 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에게 할애가 되었다면 미다스칸은 편견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국내외를 막론해서 최고로 꼽히는 어떤 비즈니스 모델과 한 번 만이라도 키재기를 시켜주었더라면 분명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이 땅의 국민들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아 주었을 것이다. 

 

 

세계 모든 금융인들을 경악케 할 연리 67% 물품구매적금 특허출원 

 

세계인의 성원을 받을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은 창의적 자유사고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어느 분야든간에 상상 가능한 모든 것들을 가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컨셉 하나로 전 세계에서 가장 이율 높은 금융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연리 67%의 금융상품, 이른바 물 품구매 적금이 바로 그것이다. 

 

보자, 사람들이 적금을 붓는 것은 목돈을 만들기 위해서다. 또 그 목돈을 만드는 목적은 노후보장이나 주택자금 아니면 혼수용품을 사기 위해서다. 노후보장도 소비요, 주택자금도 소비의 일부가 확실하다면 결국 일반인이 모으면 대부분의 돈은 소비생활을 하기 위한 자금으로 집행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금융상품은 9백 몇 십만원의 적금을 부어야 1천만원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물품 구매적금은 컨셉이 다르다. 아예 처음부터 소비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가공된 것이다. 

 

만약 소비자가 1년 뒤의 소비를 예약하고 미리 돈을 낸다면 이를 거절할 생산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생산자는 일반 총판을 통해 상품을 보급할 경우 치러야 30~40%의 유통마진 정도는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 개개인을 총판 대리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 이 양자를 은행을 매개로 해서 시스템화 해보자. 

 

먼저 생산자는 1년 후 구매를 조건으로 30~40%의 할인율을 보장한다. 은행은 위의 조건을 고객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적금 상품을 만든다. 소비자는 자신이 구매할 총금액에서 30~40%를 제외한 금액만을 매월 분할 납입한다. 1천만원 어치 혼수용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40%의 할인율이 적용된 '모모가구 물품구매 적금'에 가입하면, 총 600만원만 내고도 1년 뒤에는 1천만원어치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00만원은 이자와 같은 수익이다. 은행금리로 따지면 67% 정도, 30%의 할인률이 제공되는 브랜드를 선택한 경우라 면 700만원을 불입하고 1천만원의 상품을 상 수 있게 된다. 이자율 43% 선, 만약 1년 뒤에 해당 브랜드가 세일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추가 보장이다. 소비자는 무조건 이익이고, 은행은 수신고가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며 2% 정도의 상품 수수료만해도 상상을 초월한 액수가 된다. 왜냐하면 기존 은행은 고객에게 7~9% 이자를 보장하고 기업에게는 10~11% 에 대출을 해주므로 결국 영업이익은 2~3%인 것이다. 은행은 소비자의 효용을 촉진시켜주기 위해 고객이 일정기간 이상 적금을 부으면 자동으로 대출을 해주는 시스템을 제공할 수 도 있다. 대출이자만큼은 추가수입이 되는 것이다. 기업체 입장에서도 이 상품의 반응은 상당할 것이다. 이 적금 상품의 경우는 설계도 도면이 나오기 전에 미리 물건을 판매하는 컨셉이기 때문이며, 고객의 돈이 매월 실시간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자금의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수수료 2% 정도를 은행에 지급해야 할 이자라고 생각한다면 기존의 11% 짜리 은행자금을 담보도 없이 2%에 유치해온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 것이다. 또한 생산라 인의 효율적 관리와 재고부담의 감소, 원자재 대금의 현금 결재를 통한 추가 할인폭 등은 부수적이고도 짭짤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브랜드 업체가 이를 마다할 것인가. 각 업체마다 서로의 유통마진을 소비자에게 제시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은 보다 폭은 브랜드를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 상품은 소비문화의 새로운 툴로 자리잡기에 충 분한 것이다. 

 

예약구매의 할인률을 이자율로 치환하는 이 컨셉은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각광 받을 만한 컨셉이다. 자세한 것은 미다스칸 홈페이지에 올려 놓을 것이며, 이는 특허 출원한 사안임을 밝혀둔다. 

 

아이템이 파괴적일수록 소비자의 지지는 높다. 우리의 아이템은 처음부터 국내시장보다 세계시장 공략에 초점을 맞춰 기획된 것이다. 지금은 수 천만 톤의 컨테이너 비즈니스나 이메일 한 통의 비즈니스가 동등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다. 

 

20세기가 상품 수출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컨셉 수출의 시대다. 광고시장과 유통시장을 장악하는 힘, 21세기 전자상거래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컨셉. 나에게는 그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검증 받고 싶은 것이며, 평기자들의 뜨거운 지지 아래 국내기반을 닦고 곧바로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최소한 오는 8월15일에는 일본 열도의 공략을 선언하고 싶었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좀 더 정제되고 준비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주변 사람 들에게 기우받지 않는 경영자가 되기 위해 좀 더 노력하라는 질책의 계기로 삼고 있다. 언제까지나 편견 받고 언제까지나 도전만 시도하는 경영자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는가! 나는 따뜻한 시선이 눈물겹도록 그립다. 전과자가 사업을 하니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예단보다는 '저렇게 망가진 친구가 참 대견하다'고 생각해 주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적어도 7가지 부류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면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증명해줬고, 명문대학 출신이 아닌 상고출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으며, 장애인도 노력하기에 따라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재혼의 전력을 가진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으며, 출세할 꿈도 꾸지 말라던 전라도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 뿐인가 그는 전과자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증거해 줬다. 나에게도 그는 희망을 줬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는 것은 과거에 어떤 전력과 어떤 인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른 조건보다는 그 자신이 열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신념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음을 증거해 준 것이다. 

 

나는 김대통령이 아무런 치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자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꿈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정해지는 부산물이 아니라 그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는 자만이 구체화시킬 수 있는 지향점임을 심어준 것이다. 나 또한 시대인들의 희망의 증거로 자리하고 싶다. 어제 무너진 자의 깃발이고, 문자이고, 살아있는 희망의 동상이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이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성공의 정상에 이를 수 있음을 증거하는 시대의 지문이고 싶다. 문신처럼 각인된 나의 누추한 과거를 지울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내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건 좋은 사람의 조국에 대한 사랑도 나무랄 데 없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는 사람의 의기 또한 소중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내 순결의 막을 터뜨려줄 힘찬 애무를 나는 오늘도 꿈꾼다 

 

세상에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손가락질하는 사람만큼이나 나를 아끼고 성원해주는 사람들도 많다. 매순간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고, 미다스칸의 주식을 단지 부가가치 창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꿈과 희망의 증표로 삼는 1700여 주주들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미다스칸 카드의 확장을 위해 뛰는 지부와 지사 임직원들, 그 안타깝고 힘겨운 수고들이 있다. 그리고 나를 따라 불모지에 뛰어들어 땀으로 일구고 창의의 곡식을 심는 80여명의 임직원이 있다. 나와 시절인연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하선한 직원들도 나는 감사하고 고맙다. 그들이 나를 여기까지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었고, 용기였고, 자랑이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나는 결코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 어느 누가 망가진 자에게 기회를 주어 봤던가. 나의 비전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해 줬던가. 또 실제로 지원해 주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십자포화를 맞고 쓰러져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의 신뢰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내가 태어나서 이만큼 사랑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나를 낳은 부모도 나에게 이런 사랑은 주지 못했다. 흠결 많고 상처 많은 나에게 "다시 한번 일어나 달려보라"고 말해주기가 어디 쉬운가. 흠결 많고 부족한 인간을 아껴주는 많은 사람들. 부디 내 주주들을 보호하게 해줬으면 한다. 나를 믿고 의지한 내 가족을 보호하게 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그들은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을 때, 나에게 손 내밀어 주고 이끌어준 시절인연이요, 혈맹을 맺은 사람들이다. 한 집 한 집 초대 받고 싶을 만큼 내겐 소중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천애고아에게 그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준 그들을 결코 실망시킬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꿈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나는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먼 길인지를 안다. 얼마만큼 상처 받아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눈물 속에 밤을 지세워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편견의 칼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도사릴지도 모를 육체가 미덥지 못 하다. 나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나를 심약하 게 할까 두렵다. 그 두려움 때문에 실기하게 될까봐 또한 두렵다. 

 

지금까지 달려오는 동안 이미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고, 수 없는 고난의 계곡을 건너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요행 바라지 않는 성실함으로 충분히 노력하고 땀 흘려 왔다. 이제 내 주주들과 내 형제들을 보호하게 해 달라. 아웃사이더에게도 격려해주신 분들, 공생의 손으로 내밀어 주신 그 분들에게 한 번쯤 차지혁 문법으로 갚음하고 싶다. 

 

아무리 내가 주는 것 없이 미워도, 화가 나서 미워도, 괜히 밉고 또 밉더라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워 죽겠다 할지라도 나에게 공정한 게임의 룰을 적용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조금만 따뜻한 시선으로 보아줬으면 좋겠다. 직접 나를 만나보고 또 나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 하나라면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고 나로부터 손톱만큼의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이 아흔 아홉일진데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토록 내가 용서가 안 되는 놈이라면 나의 영정 사진 앞에 향을 피우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내가 시대인의 눈속에 존재하는것 조차 부담스러운 그림이라면 먹물 가득한 붓을 들어 영정의 여덟팔자를 긋고 또 긋는 것으로 잠시만 편견을 유예해 주었으면 한다. 

 

절망도 짓 씹으면 단 맛이 나고 습관이 되면 친숙해진다. 절망 끝에 매달려 오는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기어이 살아 남아야 한다. 편견에서 비롯된 절망의 터널 끝에 있는 한 줄기 빛을 잡아야 한다. 그 절망을 딛고 서면 기어이, 그때서야 비로소 격려의 갈채를 보내줄 것인가. 

 

 

3월27일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인 "바보네가게" www.itsMK.com 오픈 

 

지금부터는 전세계 모든 인터넷 쇼핑몰 중에서 감히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신비즈니스 모델인 "바보네가게"라는 쇼핑몰 it's MK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 미다스칸에 있어 it's MK 는 빛이자 구원이다. 절망 끝에 매달려 오는 참혹한 희망이다. It's MK 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인터넷 쇼핑몰이면서, 네티즌에게는 오락의 장이 되기도 하는 새로운 인터넷 비즈니스의 혁명적 개념인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를 수 있는 뉴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오는 3월27일 it's MK 쇼핑몰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에게 행운을 퍼주는 바보네가게를 선보이고자 한다. 모든 소비자는 it's MK 에서 물건 먼저 가져가고 자신이 가져간 물건 가격을 광고를 보는 것으로 결제케하는 신개념의 쇼핑몰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3월27일 쇼핑몰 개장과 함께 선착순 가입회원 10만명 전원에게 6~2천원을 차등 적용하여 카지노 보다 더욱 스릴있는 배팅머니를 주게 될 것이다. 네티즌들은 그 배팅머니로 노트북, 오디 오, 냉장고, TV 등이 걸려있는 6억의 대박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이번 보도건으로 it's MK 를 구축하는 전력의 90%를 잃어야 했지만 다행히 꾸려낼 수 있었던 나머지 10%의 호흡만으로도 세상에 작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인터넷 비즈니스의 신세계를 열어내리라 믿는다.. 나는 이번 시련이 한편으론 고맙게도 여겨진다. 이 시련을 딛고 서면 비로서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될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치렁치렁한 불신의 사슬을 끊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이 순간에도 나는 새로운 시장으로의 비상을 꿈꾸고 준비하고 있다. 만약 나의 노력이 큰 열매를 맺는다면 "참 어려운 일 했네"라는 치하를 해 주었으면 한다. 먼지투성인 내 얼굴을 시대인의 고운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으면 한다. 설령 또다시 실패한다 하더라도 격려 박수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특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공정한 룰을 적용시켜 달라는 것이다. 나는 세계의 CEO 들과 경쟁을 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자랑스러운 깃발로 휘날리고 싶다.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나에게도 공정 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에너지로 달려간다. 미다스칸이 이 나라에 가장 부도덕한 기업으로 매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괄적 업무 협정을 맺어준 41개 기업들이 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시장을 열어갈 것이다. 4월 말경, 늦어도 5월 달에는 it's MK 원안의 모습으로 달려나갈 것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함께 구동 시키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이 땅의 소비자들의 성원속에 연착륙 시킬 것이다.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나는 it's MK 를 조속한 시일 내에 해외로 진출하고자 했다. 상반기는 국내기반을 잡고 하반기에는 일본이나 미국본토에서 세계의 벤처기업들과 진검승부를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세계는 이미 격변기를 맞고 있다. 인터넷 비즈니스가 발달한 곳 일수록 온라인 시장의 한계에 대한 인식으로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 모델의 개발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거대 인터넷 기업의 합종연횡이 바로 자사의 주가만큼 수익을 내기 위한 극약 처방이라는 사실은 온라인 비즈니스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들에게 나는 최선이자 최고인 비즈니스 모델을 결합시켜 줄 것이다. 

 

해외에 진출해 있는 국내 기업들과 연대도 하고 경쟁도 하면서 강한 민족의 의기를 떨칠 것이다. 만약 그곳에서의 진검승부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 때는 이 모든 고난과 힘겨움이 찬란한 영광을 비추는 복선이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때문에 나는 간다. 하나의 힘이 든 열의 힘이든 마지막의 안간힘까지 동원하여 달려나간다. 이젠 정말 편견 받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버림받을 곳도 없다. 나를 척박한 환경의 황무지로 내버려둔 나의 생마저도 내곁을 영원히 떠난 것이다. 평생 나란 이름이 맺힌 옹이고, 매듭이었을 텐데 이제서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버려지고 말았다. 예전에는 죽도록 괴롭고 힘들 때마다 생모에게 하소연이라도 한번 해볼까 라는 생각이라도 품을 수 있었는데 이젠 그나마도 허락치 않은 것이다. 어차피 얼굴 맞대고 살 비빌 수 없을 바에야 이승이든 저승이든 무슨 상환이 있을까마는 사람의 마음이 그를 한사코 구분하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불러보지 못한 한보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이 나에겐 더 아픔으로 달려온다. 

 

봉분의 흙도 채 마르지 않은 무덤 속 당신의 눈에서 잠을 퍼 낼 수만 있다면… 

 

며칠 전 미다스칸이 험한 파도에 휘말려 있을 때, 나는 '어머니'라는 단어와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나를 이 세상에 떠밀 듯 내어놓은 생모가 돌아가신 것이다. 남에겐 향기 나는 생화였던 그분은, 내게는 한 평생 향기 없는 조화로 자리했던 당신은 이승의 이별도 모자라 영혼의 저승으로 또 나를 떼어 놓고 떠나신 것이다. 내게 단 한번의 체온도 허락치 않은 그 분이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불 켜지 않은 방에서 오래도록 주저 앉아 있었다. 당신에게 있어 나는 키운 정이 전혀 없는 자식이었지만 내게는 아득한 그리움이었고 아픔이었고, 홀로 꿈꾸던 소망이었던 그분이 떠나신 것이다. 

 

당신이 건강하실 때는 당신의 새 식구들과 편안하게 사시다가 나이가 들어 당신 스스로 움 직일 수 없데 되면,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면 그때는 이 버려진 자식에게도 효도할 기회를 주시리라 고대해 왔는데, 무정한 당신은 내 마지막 소망마저도 허락치 않으신 채 떠나버린 것이다. 

 

어.머.니! 

 

목이 쉬도록 불러보고 싶은 이름. 가슴 터지도록 안아보고 싶었던 사랑의 발음기호. 다른 이들에게는 일상인 일이 왜 내겐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생전에도 그분을 붙들고 울어볼 기회가 없더니, 나는 당신과의 인연이 끊어진 순간에도 나는 당신을 품고 통곡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분의 가족들에게 있어 성씨 다른 나는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아득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바득바득 우겨서라도 염하는 모습이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나도 그분 자식인데 왜 큰 절 올릴 자격이 안 되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하지 못했다. 자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떼어놓은 모정이 어디 있겠으며, 온전히 편한 잠자리가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내가 괴로움에 흘린 눈물이 한 말이면 구분이 남몰래 흘린 눈물도 서말은 됐을 것. 평생 그분의 위안이고 안식이 되어준 사람들의 배웅이 그분이 바라시는 뜻인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장지는 고사하고 영정 사진 한 번 쓰다듬지 못했다. 게다가 내겐 밤 새워 부둥켜 안고 울음 울 어머니의 빛 바랜 사진 한장이 없었다. 그래서 어딘가 내 얼굴 속에 당신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기에 당신을 가장 닮고 닮은 사진을 골라 지면에 실었다. 이 사진은 내 어머니의 영정사진이요, 나의 어두운 과거를 지우는 영정사진이며,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 시대인의 초상일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버림 받을 곳조차 없다. 누가, 나의 형제가 되어주고, 어머니가 되어 주 실 것인가! 

 

나는 안다. 붕어 빵식 꿈을 가진 젊은이들에겐 대지가 씨앗을 가리지 않고 꽃을 피워내지만 시대적 문양이 될 꿈을 가진 이들은 씨앗이 토양을 가려 꽃을 피우는 것을. 그러하기에 나는 아직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생은 짧다

청년의 때는 더욱 짧다

그러나 아무일도 할 수 없을만큼 짧진않다

나 차지혁, 꿈을 꾸는 모든 이들에게 시대의 깃발이 되고 싶다

 

2000년 3월24일

한사람으로 이루어진 백만의 군대

그 창의의 전사 차지혁 배상 

 

1990ㄴ년 9월 28일 본격 사업시작 뉴스가 나와 있다.

1990년에 나온 동아일보의 광고이다. 기사들을 쫓아보니 1989년도부터 시작했다는 내용이 있어
네이버 뉴스아카이브를 뒤지고 뒤져서 찾은 건데 이 것을 보면 199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광고는 차지혁의 얼굴이 나와 있고 본인 돈 24,000원? 과 빌린 돈 얼마로 사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의 상당히 보기 힘든, 그래서 기억에 남는 광고가 있었는데 그 것은 찾지 못했다.

서비스를 보면 자동차 구매부터 폐차, 사고시 변호사에서 보험서비스까지 토탈 대행업이다.
당시에 우리나라 자동차가 400만대내외였기에 대기업에서조차 이런 서비스가 없었다.
보험은 보험회사에, 자동차 수리는 제조사 AS센터에 가는 뭐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니
얼마나 획기적인 서비스였는지 가늠해 볼 수가 있다.

 

부도 당시 얼핏 뉴스로 무리한 서비스 확장과 제대로 된 공임이 가맹점에 지급되지 않았다면 예견된 부도라는

식의 뉴스기사를 보았다. 차지혁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사였었다.

 

 

고속도로에서의 사고시 긴급환자 후송을 위해 헬기를 생각했었던 사람. 무모한 건지, 대단한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누구나 생각?을 하기도 쉽지 않았을 뿐 더러ㅓ 그는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다시보는 차지혁, 비운의 사나이

 

[이코노믹리뷰 2005-05-26 10:15] 

(차지혁씨를 만나본지도 벌써 1년 6개월이 훌쩍 지났네요. 그와의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어 , 차지혁씨가 아니신지요"  솔직히 저는 그를 사기꾼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된 바 있는 그의 얼굴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차씨의 진면목을 정확히 파악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지요. 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한가지 점만은 명확하더군요.

그가 상당히 똑똑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우 선 구사하는 단어의 수준이 남다른 데가 있었어요. 뭐라고 할까요. 매우 정교하다고 할까요.

인터뷰 내내 신세한탄, 억울함을 털어놓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책을 2만권 읽었다는 그의 주장이 허풍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차씨는 여러차례 불만을 털어놓더군요. 자신의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번은 식당에서 라면을 먹다가 그의 전화를 받았는 데, 다시 라면을 먹으려고 하니 퉁퉁 불어 도저히 입에 대지를 못하겠더군요. 차씨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토라진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휴대폰 메시지와 함께 가수 이승철의 〈인연〉을 배경음악으로 띄워 보세요. (당신의) 애틋한 마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풍운아(風雲兒) 차지혁 씨(47)가 5년여의 은둔 생활을 끝내고 다시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며 재기에 시동을 걸었다. 지난 1999년 벤처기업 ‘미다스칸’을 설립하고 비상(飛上)을 꿈꾸다 사기공모 등의 혐의로 날개가 꺾이며 오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낸 그의 복귀 일성(一聲)은, 뜻밖에도 휴대폰 부가 서비스인‘컬트링’이었다. 신세대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컬러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신(新)개념 서비스라는 게 그의 설명.


지난 17일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그의 개인 사무실(지인 회사의 사무실 한켠을 빌려 쓰고 있다)에서 만난 차씨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심정으로 지난 5년간 치열한 반성과 더불어 뼈를 깎는 자기 개발 노력을 거듭해 왔다고 고백했다. 초췌한 얼굴에 움푹 들어간 눈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가 보낸 풍상의 세월을 웅변하고 있었다.


“셋방을 전전했습니다. 조그만 골방에 묻혀 사업 구상과 연구에 골몰하다 보면 간혹 과거 교도소 생활로 다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 하지만 소득은 있었다. 차씨가 이 기간 동안 출원하거나 등록한 특허 건수만 무려 100여 건. 이 특허를 활용해 세상에 첫 선을 보인 작품이 휴대폰 부가서비스인 ‘컬트링’인 셈이다.


지난 1990년 단돈 2만3000원의 자본금으로 자동차 관리업체 ‘트리피아’를 설립해 그 해 1500억원의 매출을 올린 차씨의 화려한 이력 탓일까? 기자는 그에게 “휴대폰 부가 서비스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기존의 컬러링 서비스는 음성 통화 시장만을 겨냥하고 있다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컬트링은 서비스의 범위를 SMS, 무선 인터넷, 컬러링등 데이터 통신 시장으로 넓혔다는 점에서 획기적입니다. ”아직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그 누구도 개척해보지 못한 이른바‘블루오션(Blue Ocean)’시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서비스의 특징은, 문자 메시지 비용만으로 휴대폰 메시지를 배경 음악과 함께 전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윤종신의 〈너에게 간다〉나 장윤정의 〈어머나!〉등을 배경 음악으로 지정해 함께 보낼 수 있다. 메시지 사연을 읽다 보면 전송자가 지정한 음악이 동시에 은은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울려 퍼지게 된다는 게 차씨의 설명이다.


특히 음악을 듣거나, 다른 문서 업무를 처리하면서 굳이 휴대 전화를 확인하지 않고도 상대방이 보낸 메시지를 컴퓨터 화면 상에서 바로 볼 수 있는 것도 큰 강점이다. 20~30대 젊은 직장인들이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업무시간 대부분을 보낸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메신저 상에서 바로 상대편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날릴 수도 있으며, 인터넷 전화 환경을 갖춘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은 메신저 상에서 바로 통화도 할 수 있다는 게 차씨의 설명이다. 차씨는 조만간 이동통신 3사에 이러한 내용의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전략적 제휴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실패한 벤처기업인 경험도 소중한 자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투자자를 울린 희대의 사기꾼, 21세기판 봉이 김선달, 대중선동에 능수능란한 한국의 히틀러. 사실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은 아직도 만만치 않다.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 물이라도 팔았지만, 저는 물건도 없이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피해를 안겼다는 게 지난 92년 저를 심문한 젊은 검사의 말이었습니다.”


차씨는 92년 트리피아 부도 후 그를 심문하던 당시 20대 검사의 발언을 담담히 회고한다. 그는 지난 1999년 미다스칸 주식 공모 과정에서도 사기공모, 과대광고 등의 혐의로 고발됐지만, 대부분 무혐의 처리됐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어느덧 세인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면서 그를 두고두고 고통스럽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격 복귀 선언을 하게 된 배경은 “두려움 탓이 컸다”고 그는 고백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역사의 뒷 무대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4시간 남짓한 인터뷰 내내 자신을 겨냥한 세간의 비판을 의식한 듯 매우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에게도‘패자부활’의 기회를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물론 옥석을 가려야 합니다. 머니게임을 하다 몰락한 벤처기업인인지, 아니면 치열하게 기술 개발을 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다 실패한 기업인인지 명확히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한 벤처 기업인들의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입니다. ”


차씨는 특히 과거 자신의 도덕성을 통째로 허물어뜨렸던 여직원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도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이며 무죄를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정배 열린우리당 의원(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인터뷰 내용이 실린 월간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천 의원은 이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차씨의 무죄를 주장한 바 있다.

기자는 차씨에게 “선의의 투자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넌지시 던져 보았다. 자신의 주장대로 무죄라고 하더라도 그를 믿고 투자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에서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서랍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지난 1999년 미다스칸 공모에 참가했던 투자자들의 명단이었다. “투자 판단에 따른 손실은 투자자들의 몫입니다. 법적인 책임에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의적인 책임까지 회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추후 재기에 성공하면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 척박한 토양의 국내 벤처 업계에도 훈훈한 전례를 세워나가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차씨는 지금도 사무실에 아침 6시면 출근해 새벽 2∼3시가 돼야 퇴근하는 강행군을 하고 있다. 요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탐독하고 있다고 한다.


IQ 174의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차씨는 과거의 실패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그는 ‘조급증’ 탓이었다고 말한다. 지난 87년 대선 당시 평화민주당 캠프에서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을 조직하다 당 지도부의 눈 밖에 나자 스스로 당을 박차고 나온 그는, 지난 13대 총선을 앞두고 후보 수십여 명의 선거 기획 의뢰를 수주하며 정치권에서 상종가를 기록한 바 있다.


그가 훗날 벤처기업 설립과정에서 발휘한 기획 능력도, 이때의 경험이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이러한 성공이, 자신을 주변과 적당히 타협하지 못하는 ‘독불장군’으로 변모시킨 것 같다고 차씨는 고백했다. 그는 이제 인내의 미덕을 새삼 절감하게 됐다고 말한다.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견제를 극복하고, 훗날 ‘미가와’ 시대를 활짝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으로는 새가 울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겠다”는 그는, 지난 12일에는 지인들에게 빌린 도토리 79개로 사이월드에 자신만의 온라인 사무실(cyworld.nate.com/digitalboy)을 열어 1촌 맺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IQ 174의 천재…기다림의 미학 배웠다


차씨는 창의력이 뛰어난 인물로 유명하다. 지난 2000년에도 시내 곳곳에 단말기를 설치해 이를 통해 고객들이 제품을 살 수 있는 가상백화점과, 돈 없이 물건을 살 수 있는 ‘노머니 매직서비스’ 등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면서 역시 차지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명성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은 아닌 듯 했다. 그가 지난 2000년 저술한 《청년 차지혁 그 꿈과 야망은 늙지 않는다》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이 눈에 띈다. 치질 치료 약재가 첨가된 화장지, 선적립 마일리지가 들어 있는 역발상 신용카드 운용시스템 등은 지금 보아도 새롭다.


이날 인터뷰 중 그가 즉흥적으로 제안한 ‘은행 매장을 활용한 상품 마케팅’도 이른바 차지혁식(式) 재기(才器)를 가늠하게 했다. 그가 제시한 은행 내 백화점 상품 매장 설치 아이디어를 보자. 백화점과 은행이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고 백화점에서 한 주 동안 가장 높은 인기를 얻은 제품을 은행 점포에서도 판매한다는 게 골자다. 은행 방문객들은 송금. 환전 등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면서 물건도 구입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특히 지난 2000년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재웅 회장을 만나 게임서비스와 온라인 쇼핑몰을 제안했는 데, 이 사장이 이를 거부했다는 비사(秘事)도 공개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이 당시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면 인터넷 포털 업계의 판도가 변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


차씨는 요즘 후속 사업 준비 작업에도 골몰하고 있다. 직장인과 어린이들을 겨냥한 경제 포털 사이트가 그가 준비 중인 회심의 카드이다. 어린이들이 주식 거래를 실연해볼 수 있고, 특히 직장인들도 이곳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고수들에게 주식 거래를 위탁할 수 있다고 일부 기능을 귀띔했다.


이 경제 포털사이트가 출범하면 국내 증권산업 분야에도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그는, 아울러 한 업체와 손잡고 유무선 도메인 표준화 작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재기에 성공한다면 될성부른 벤처 기업에 투자하는 재단 ‘꿈은 현실로’를 세우고 싶습니다. 이 곳은 최고경영자의 학벌이나 인맥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창의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조직이 될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도 모두 이를 위한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 그가 인터뷰 막바지에 밝힌 포부다.

박영환 기자(blade@ermedia.net)

2006년 3월 27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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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사고의 무단횡단자”

미켈란젤로, 돈키호테, 봉이 김선달, 희대의 사기꾼….

아직 벤처산업 개념이 채 정립되기 전인 90년대초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한 차지혁(48)씨가 돌아왔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재기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1990년 자본금 2만3000원으로 자동차 관리업체 ‘트리피아’를 설립해 그해 1500억원의 매출을 올려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의 5부작 자전적 이야기 <키재기>는 2백만부 이상 팔렸다. 그리그 1992년 어느날 사라졌다. 트리피아가 부도나 검찰에 구속된 것이다. 만 6년여 옥살이 끝에 1999년 출소한 차씨는 벤처기업 미다스칸을 설립했다. 그러나 2001년 과대광고 및 사기공모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90년대 초 트리피아로 1500억 대박
2년만에 부도로 구속…‘사기꾼’ 오명
크레비즈 연구소 통해 화려한 제기 꿈꿔

그는 “30대 초중반, 꿈이 너무 커서 추방 당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창의력은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자유사고의 무단 횡단자’라며 거침없다.

“IT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80년대 중반, 90년대초 통화 연결음(컬러링)과 유무선 통합 도메인 사업, 휴대폰을 통한 데이터 통신 사업 등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저를 두고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한 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부끄럽거나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당시 제안했던 사업들이 ‘대박 컨텐츠’로 인정 받고, 많은 수혜를 받은 기업들이 생겨나 보람을 느낀다”면서 “아직도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있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92년 트리피아 부도건으로 실제 기소된 금액은 2억4천여만원. 나머지는 1, 2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한번 각인돼 버린 ‘사기꾼’ 오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1999년 평화은행과 손 잡고 미다스칸이라는 카드법인을 설립해 인터넷으로 70배 공모에 성공해 화려하게 재기하려는 순간 이번엔 금융감독원이 그를 고발했다. 혐의는 인터넷 사기공모, 과대광고. 검찰 수사가 다시 1년여 이어졌다. 다시 무혐의 판정. 하지만 회사는 파산직전, ‘역시 차지혁은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부정적 인식만 깊어졌다. 그리고 6년, 그가 이달 중순 몇몇 언론에 자신의 사업 아이템을 알리는 양면 의견광고를 냈다.

1월25일 설립한 ‘차지혁 크레비즈 연구소’를 통해 23번째 출사표를 들고 나선 것이다.

그는 연구소를 통해 그간 개발한 100여개의 크레비즈 모델을 개인 및 기업에 제공할 것이라며 자신에 차있다. 쌍방향 멀티 발신자 번호표시 서비스, 사생활 보호 콘텐츠인 프라이버시 콜서비스 등이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는 “꿈꾸는 이들의 깃발이 되고, 희망이 되고 빽이 되는 게 가장 큰 꿈”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지닌 창조적 재능과 실천 행위를 시대와 국민을 위해 완전 연소될 때까지 낭비하고 싶다”고도 했다.

광주 출신으로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IQ 174의 아이디어맨이 재기에 성공할지 세간의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이제 시대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하지만 아직도 내 가슴엔 새로운 길을 내려는 열정이 꿈틀거린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 삶은 실패한 것일 수 없다.”

글·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사진·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11515.html#csidx20117769377defb80fbb1ca9465efea 

 

 

풍운아 차지혁 ‘3전 4기’ 구글에 도전장

[일간스포츠] 입력 2009.04.0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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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서가 아니다.” 차지혁(51),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아이큐 174, 1만 4000여권의 서적을 독파했고, 한때 기발한 발상으로 두 번씩 사업을 벌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남자, 그가 10년만에 IT업계에 다시 돌아온다. 그것도 전세계 검색광고 시장의 77%를 차지하고 있는 구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트리피아, 미다스칸 카드 그리고 IT

오는 7일 차지혁씨는 검색광고의 새 모델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20여명의 창업자와 함께다. 그의 삶은 늘 도전의 연속이었다. 1988~90년 ‘자동차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모토로 트리피아를 창립해 1년만에 매출 1500억원 돌파했지만, 급성장에 정치 자금 소문과 관련, 송사에 휘말려 7년 형을 살았다.

다시 감옥에서 340원의 빠른 우표 요금과 60원이 인지대로 미다스칸이라는 개인사업자로 등록해, 출소 직후 99년 1월 쌍용그룹을 찾아가 온라인 자동차보험을 제안해 1200평의 사무실을 제공받았다.(3년 후 다음이 온라인 자동차보험 시작) 또 은행을 찾아가 카드사를 설립하자고 제안해 미다스칸 카드(현우리은행 카드)를 만들고 6개월 만에 공모 주식 가치 총액 5800억원(70배)을 돌파했다. 하지만 금감원의 고소로 자동차보험도 카드사도 물거품이 되고 빈털터리가 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에겐 여러 가지 별명이 있다. 특허가 전세계적으로 100여가지가 넘는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돈키호테, 봉이 김선달, 희대의 사기꾼 등 여러 가지다.

그는 “10년간 철저히 잠행해왔다. 사기공모와 과대광고로 고소된 금감원 건은 1개월간 ‘두들겨맞고’ 회사가 공중 분해되었지만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도 무혐의에 대해 어디 한 줄 다뤄주는 데가 없었다”고 말했지만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내 삶은 언제나 도전이었다.

컬러링(84년)을 하자고 KT에 제안을 할 때도, 도메인(90년) 사업을 발표할 때도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청년 차지혁 그 꿈과 야망은 늙지 않는다’라는 책을 통해 아이폰 같은 이야기 했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며 “하지만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웹2.0의 검색 광고에 도전해 구글을 누르겠다”고 말했다.


▶ 이번엔 IT로 컴백 “구글 오버추어 나와라”

그의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역삼역 근처에 있다. ‘지나가기만 해도 부자가 된다’는 전설을 지닌 골콘다I란 인도의 도시명을 딴 사명이 특이하다. 뉴욕 월스트리트 골목의 지명이기도 하다. 직원 20명, 그의 공식 직함은 CICO(Crebiz Imagination Chief Officer)다. 무의식 에너지인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사람의 뜻을 담았다.

그의 프로젝트의 베일은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감은 누구보다도 넘쳐났다. “2000년 무렵 다음 이재웅 사장을 찾아가 구글 애드센스와 비슷한 광고 모델을 제안했지만 시장성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는 추억을 회상하며 “구글이 5년 동안 5000억 원을 들여 검색엔진을 개발한 후 최고에 올랐지만 수익은 전세계 6만개 사이트에 연결하는 광고 검색 플랫폼인 애드센스(기사나 블로그 밑 광고)와 애드워즈(검색어 입력 결과페이지 스폰서 링크), 오버추어(스폰서 링크)에서 내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 검색광고 매직퍼스를 쓰지 못한다면 전세계 포털이 감당 못할 환경이 왔다. 한국은 IT 강국이라지만 꼭대기에 올라선 업체가 없다. 매직퍼스를 통해 IT 넘버원, 리딩기업을 하나 만들어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전에는 차지혁 한 사람의 꿈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20여명이 함께 이 일을 하고 있다. 10년간의 무정란, 아니 공동묘지 주민 같은 생활을 하며 함께 가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말뿐이 아니었다. 그의 새 검색기술은 미국 유명업체와도 MOU도 맺었고, 수십억의 특허 출원을 했거나 심사 중이다. 한국의 몇몇 포털과도 계약을 맺고 테스트 중이다.

▶ “이제 차지혁이 성공할 때가 오지 않았나”

김경호 전 평화은행장이자 티맥스소프트 회장은 “차지혁은 야생마 같은 친구다. 학벌도 없고, 인맥도 없지만 머리가 비상하다. 하루에도 한두 끼밖에 안 먹고 밤새워 일한다.

그런 친구는 뭔가 이뤄낼 것이다.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말했다. 김 회장은 “그의 10년 전 아이디어가 다른 곳에서 현실화되는 것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마케팅에 약한 측면이 있지만 저는 그의 성공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그가 힘든 시절을 보내는 동안 밥을 사준 8명 중 한 명이다. 서울대와 하버드대를 나와 투자운용회사 사장과 증권사 대표를 역임한 이정진 사모펀드 사장은 “기인 같은 면도 있지만 몇 년 동안 지켜보니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다. 사고 발상이 정통교육과는 다른 면이 있어 일반인들의 오해를 많이 한 거 같다. 비현실적인 거 같지만 그게 IT나 벤처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차지혁씨는 며칠 전 담배를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 4갑씩 피운다. 90년 결혼했지만 구속 후 헤어져 혈혈단신인 그가 “섹스보다 더한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하는 발상과 상상의 멈추지 않는 전진을 보면 그는 이미 성공신화를 만들고 있다.

8년 동안 준비한 그의 꿈이 투자한 미래의 캐피털이 지구촌을 흔들 그런 날은 올 수 있을까. 그는 “제 꿈은 30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창업만 23번을 해봤다.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어 실패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차지혁 프로필
- 1957년 11월 출생
-고흥초등학교 6년 수료
- 극단 ‘마당’ 대표
- (주)태멘(국내 최초의 문화 그룹) 기획조정실장
- 민주연합 청년 동지회(연청) 기획조정실장, 정책실장, 상황실장, 상담실장 (제13대 대선)
- 한국 선거정책 전략 연구소 연구 소장
-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 축전 지구촌축제 기획조정실장
- 백상 경영 연구소 연구 소장
- 90년 (주)시티프랜(트리피아) 회장
- 92년 (주)에이스뱅크 회장
-93~99년 복역
-99~2001 (주)미다스칸 회장
-2001년부터 8년간 IT 콘텐트 개발 주력
- CCL 연구소장

[ 저서 ]

○희곡
- 사랑과 죽음의 서사시
- 태를 잘못 빌어 태어난 아이

○비소설
- 개인결백
- 13월의 이름 전4권
- 키재기 (1부 5권)-186만권 판매
- 노비문서 (3권)
- 청년 차지혁 그 꿈과 야망은 늙지 않는다

○각색
- 이어도
- 내사랑 하비
- 황혼녘에 생긴 일

 

글·사진=박명기 기자

 

〈스포츠칸〉구글 사냥 칼 갈은쉰둘 ‘디지털 소년’ 차지혁

 

경향신문|입력2009.11.09 21:07

 

 

ㆍ90년대 대박신화 쓴 업계 이단아

ㆍ'사기꾼' 낙인 씻고 10년만에 재기선언

ㆍ하루 2~3시간 자며 200여 IT모델 기획

ㆍ신개념 검색광고 '매직퍼스' 들고

ㆍ'세계 IT 리딩기업' 포기 모르는 도전

90년대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재벌도 부럽지 않은 벤처 성공신화를 이루며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차지혁씨(52)다. 차씨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일푼에서 수천억원대의 기업을 일으켰다가 세상의 편견에 가로 막혀 빈털터리에 '희대의 사기꾼'으로 낙인 찍히며 인생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졌다. 그런 그가 지천명의 나이에 재기에 나섰다. 8년간의 칩거 끝에 새로운 검색광고와 IPTV 콘텐츠로 무장, 구글 등 세계적인 IT업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루 2~3시간만 자며 명예회복의 칼을 갈았다는 차씨를 지난 4일 강남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난 살아 있다"
IT업체 골콘다아이의 CCO(Chief Crebiz Officer), 즉 창의 최고 책임자로 돌아온 차씨의 일성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 이를 위한 첫 행보가 11일 개최하는 신 개념 웹2.0 검색광고 서비스 '매직퍼스' 사업설명회다.

"현재 구글과 오버추어가 장악한 키워드 검색광고 시장이 생기기 이전인 1999년 국내 포털업체들에게 제안했지만 시장성이 없다며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벌써 여러 포털사이트에서 연락이 오고 유명 인터넷 마케팅 대행사 두 곳과 계약을 체결했다."

차씨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도 그럴 것이 매직퍼스는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오버추어처럼 광고주가 일방적으로 광고비를 내야 하는 검색광고 서비스와 다르다. 쇼핑몰 등 인터넷 사이트 주인장이 광고비를 내면 일정 부분이 네티즌의 쇼핑 지원비로 제공된다. 네티즌이 클릭할 때마다 적립금이 쌓이고 이 돈으로 해당 사이트에서 쇼핑할 수 있다. 더구나 네티즌 클릭으로 적립금이 많이 쌓일수록 검색순위가 올라가서 광고비 출혈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차씨가 자신하는 이유는 또 있다.
"90년대에는 검색광고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할 때라서 사기꾼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시장도 있고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어 사업하기가 쉽다."

차씨는 이날 매직퍼스 외에 8년간 구상하고 기획했던 200여개의 IT사업 중 몇 가지를 추가로 발표할 예정이다. "세상에 차지혁의 창의력과 열정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봉이 김선달, 동키호테, 희대의 사기꾼…
차씨는 굴곡 많은 인생역정을 말해주듯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두 가지 벤처신화는 그를 '봉이 김선달', '동키호테', '창의의 미켈란젤로'로 불렸다.

하나는 90년 단돈 2만3000원과 지인들이 모아준 5000만원으로 자동차 종합관리대행사 벤처기업 '시티프랜'과 '트리피아'를 설립, 1년만에 매출 1500억원 신화를 세웠던 일이다.

또하나는 1999년 옥중에서 빠른 요표 요금 360원과 인지대 60원 등 400원으로 '미다스칸'이라는 개인사업자를 내면서 이룬 대박신화다. 차씨는 출소해 평화은행과 제휴, 같은 해 9월 미다스칸 카드를 만들어 100원짜리 주식을 7000원으로 70배 공모하고 3개월 후 액면가 100배 공모까지 진행, 기업가치를 2600억원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세상은 초졸 출신의 '회장님'을 가만두지 않았다. 트리피아는 야당에게 정치자금을 댄다는 등의 악성루머로 3개월간 관계당국의 내사를 받는 바람에 부도를 맞았다. 미다스칸 때는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과대광고와 벤처기업 공모사기로 조사를 받으면서 또한번 좌절을 맛봤으며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주홍글씨까지 새겨졌다.

차씨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트리피아 내사나 금감위의 고발은 모두 무혐의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93~99년까지 6년여간 옥살이를 했지만 사기죄와는 무관했다.

"사람들이 한번도 해보지 않은, 금기시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체험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그게 차지혁이 사는 방법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꿈을 현실로'
차씨는 미다스칸 이후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왔다. 월세 25만원을 내지 못해 단전·수를 당한 것이 9번이나 되고 끼니도 하루에 한끼가 전부였다. "지인이 찾아와 한턱 쏜다며 억지로 데려갈 때가 배불려 먹는 날이다."

돈도, 가족도 없는 힘겹고 외로운 생활이었지만 차씨를 버티게 한 것은 끊임없이 샘솟는 창의력과 상상력이다. "하루에 2~3시간을 자며 새로운 IT 비즈니스 모델을 기획, 200개나 만들었다. 재기의 밑천인 셈이다."

차씨의 창의적 열정을 일으켜 세운 또다른 동력은 깊은 절망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꿈이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고 성공해 얻은 부로 재단법인 '꿈을 현실로'를 만들어 제2, 제3의 차지혁이 나오고록 하는 것이다.

"3년내 국내 검색광고 시장에서 최고봉에 오르고 향후에는 세계적인 IT 리딩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 50대에 '디지털 미소년'를 자처하는 차지혁의 포부다.

< 글 I 권오용기자·사진 I 이석우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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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11일 뉴스데스크에서의 뉴스가 내가 찾아본 바로는 가장 최근이다.
imnews.imbc.com/replay/2000/nwdesk/article/1858691_307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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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출소 차지혁 인터넷 주식공모 사기혐의로 검찰에 고발[문철호]

 

imnews.imbc.com

 

그의 책을 군에 있을때 구매했다. 회사는 부도가 나고 그가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을 때

출간된 것으로 안다. 재소자의 책. 그럼에도 그 책이 250만부가 팔렸단느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비록 날개가 꺾이고 말았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것들은 영감으로 남아 나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남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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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도탁에 글쓸 그 당시에 정리가 안되었는데  이제 이 이야기도 끝이 났고

한국생활도 슬슬 정리해야하기에 과거 정리하는겸 일기보면서  친구한테 쓰듯이 쭈욱 적었어요

반말체 이해 부탁드려요 ㅎㅎㅎ..

 

내가 앞으로 쓸 얘기는 자세한 내막까지 아는사람은 실제에선 그사람과 나뿐이야 앞으로도 그럴꺼고.

앞부분은 그사람 만나기전에 내 이야기야 이 얘기를 해야 그사람과의 긴 인연도 이해가 감.

 

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고 큰형과 작은 형과는 각각 12살 10살씩 차이가 나

10살때까진 집이 어느정도 괜찮았다. 부족함은 없었음 그래서 그런지 큰형은 대학다니다가 성적개판이었는지

다시 공부한다면서 학교 자퇴하고 서울에 부모님이 얻어주신 조온나 좋은 원룸에서 알바 한번도 안하고 놀았어

공부할때 알바 겸하면 공부에 집중못한다고 찡찡거리니까 부모님이 보내주심

천국이지 돈 안벌고 서울 생활하면서 놀거 다 놀수 있으니까.

그걸 본 작은형도 혹 했는지 자기도 공부한다면서 올라가서 딩가딩가 놀았다.

진짜 부모님이 답답했는데 그에 앞서  자식새끼가 먼저 일하러가야 되는거아니냐?

 

그 후엔 상황이 감 잡히지? 올라가서 몇 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식 둘에 대한 원망은

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고

어머니는 그래도 자식새끼 위에 가있는데 어떻게 인연을 끊냐며 적금까지 깨가며

몰래 돈을 보내주시고 우울증 약을 드셨고 말도 없어지셨다.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 마시고 오셔서 자식새끼들 다소용 없다고 집안 물건을 던졌고

어머니한테 자식 교육을 그따위로 시키니까 이렇게 됐지 너랑 나랑 만난 게 잘못이다 등등

자고 있는 날 술에 취해 흔들어 깨워 너만이라도 잘 돼야 된다 안 그럼 우리는 진짜 죽는다 라고 했고

어머니도 그 아무것도 모르는 청소년기 애를 잡고 눈물을 흘리시는 게 부지기수였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집안은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졌고 형들은 존나싸가지 없게 돈안보내주니까

엄마아빠가 우리들한테 투자안해서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연락 끊음 미친놈들이야

그 후 한두 달 있다가 아버지 사업 부도나서 집도 넘어가서 계속 이사다녔다.

 

집안이 저러니까 학창시절 집에 가기가 너무 싫었어

그래서 일부러 독서실에서 12시까지 더 공부하고 1시간 정도 집 주위 공원에 앉아있다가

다 잠들었을 때쯤 들어갔다.

그때부터 좀 빡치는 일 있으면 공원이나 고요한 절에 가서 몇 시간이고 진정될 때까지 앉아있는 버릇이 생겼음

 

나도 부모도 지쳐가는 와중에 내가 고1때였을꺼다 토요일이었어

아버지는 화나셔서 아침부터 썩을 놈의 집구석이라면서 현관문을 쾅 닫고 어디론가 나가셨고

난 학교에서 자습하고 집에 도착했는데 분명 사람이 있는데 쎄한 느낌 있지?

나도 뭐라 표현이 안 되는데 여하튼 뭔가 느낌이 너무 불안해서 엄마? 엄마?하고 불렀다?

근데 대답이 없어 그러다가 안방에서 걸걸걸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 이게 뭔가 하고 문을 열었는데

어머니가 약 한 움큼 드셨는지 입에서 거품 비슷한 게 나온 채로 약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더라

 

그 순간에 어머니를 업은 채로 병원 가는 길에 내가 스스로가 무서워질 만큼 울지도 않고 엄청 침착해졌어

‘성인 되자마자 무조건 이 집을 떠난다 나라도 살아야지’ 라는 생각과 함께

안그래도 과묵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난 진짜 하루에 한마디할까말까해서 입에 단내가 났다.

사방에 벽을 치고 나 혼자 살았어.

(그 와중에 고등학교 3학년 친구들은 아직까지 만나는데 걔들은 날 음지에서 끄집어내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어  고마워 병신들아 죽을때까지 갚음)

 

그러다가 내가 어떠한 취미를 가지게 됐는데 이 취미를 배우고 싶고 이 일을 하고 싶어졌어

너무 재밌었어 아니면 내 어깨에 짊어져있는 짐에 대한 도피처로 삼았는지도 몰라.

근데 이일과 관련된 학과를 가려면 학원이 거의 필수적이더라

더럽게 비싸 그 당시에  50만 원했어 물품 값 제외하고 순수 학원비만 말이야..

집안이 그 꼬락서니인데 내가 학원 다니고 싶단 소릴 할 수 있겠어?

그래서 뭐 어떻게 해 이론만 독학했어

 

고2가 되었을 땐 어머니와 아버지는 마침내 이혼하셨지.

난 여전히 아버지에게 시달렸어 술 마시고 오면 아버지는 분노에 차서 술병을 집어던지시고 그랬거든

난 고등학생 내내 전교에서 열손가락을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내가 마음을 닫아 버린 건지 아버지가 닫혀버린 건지 나의 진로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없었고

내 성적엔 관심도 없었어

아버지는 죄도 없는 날보고 자식들 땜에 내 인생 망가졌다 어떻게 보상할꺼냐고 날 타박했고

나보고 20살 되면 그냥 돈 벌러 가라고 하셨지 너까지 책임질 돈 없다고 했어

자식 꼴도 보기 싫다고 시발 자기가 술먹고 왔으면서 2시쯤에 와서 자는 날 밖에 내쫓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면 다음 날 학교는 가야하니까 책가방들고 공원에 밤새도록 앉아있다가 학교 가고 그랬음.

근데 난 내가 꿈꾼 일을 하고 싶었어 그리고 수능을 쳤고 성적도 좋은 편이었지

합격은 무조건 하는거였고 담임한테 사정 말하고 그대로 서울로 가출했지 옷 몇 벌 들고 핸드폰도 없애고 말이야

 

남들 학교 가기 전에 운동도 하고 술도 먹고 클럽도 가보고 그럴 때 서울 생활을 시작했어

말이 생활이지 노숙생활이었지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었고 고속버스타고 서울오니까

4만 원밖에 없었거든 아는 사람도 전무했었고 뭘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어

하루는 찜질방에서 자고 하루는 짐 들고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밤을 새우고 그랬지

배도 진짜 고팠는데 언제 일이 구해질지 모르니까  돈 아끼려고 식빵 사서 물통에 물채워서 먹고 그랬다.

 

난 진짜 뭐같이 비싼 등록금과 등록금 만큼 비싼 왕창렬 그 자체인 과와 관련된 물품을 사기 위해서

일을 시작해야 했고 사투리가 심했는데 일은 의외로 쉽게 구해졌어  알고보니 개같은 곳이었지만.

아침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고 카페 뒤쪽이 유흥가였는데 끝나자마자

거기서 새벽 4시 마감 때까지 술집 알바를 했어

 

내가 일한 곳 중에 저 카페가 제일 씨발 같았어. 욕을 싫어하는데 욕 말고 설명할 길이 없다.

사장님은 천사였는데 점장이 여자를 미친 듯이 밝혔어 알바들한테 치근덕 대고 그랬다

내가 일하고  알바 애들이 나랑 친하게 지내려고 하니까 날 겁나게 눈치 줬어

12시간 일하는데 식비가 두 번 나오거든? 10시엔 그 새끼 안 나와서 삼각김밥 두 개 먹을 수 있었는데

2시부터 누나 둘이 나왔단 말이야 그러면 나 밥 못 먹게 했고 말도 못하게 했음

그럼 묻는말에 대답도 안할까? 한번도 내가 먼저 말 건적 없었는데 시불놈

뒤에 가서  그냥 오후 식비 챙겨서 다 끝나고 먹어라 이딴 개소리 지껄였다고 끝나고 바로 일가야 하는데..

그래놓고 다같이 밥 먹을 거 시킬 때 누나들이 너 안 먹느냐고 그러면 쪼다가 와서 쟤는 배불러서 안 먹는데 이럼

배고파 숨질 것 같은데 뭔 배가 불러 그래서 일부러 일할 때 화장실 한 번도 안 가고 참았다가 출근하면서

샌드위치 1400원짜리인가 사뒀던 거 유니폼 안에 숨겨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우걱우걱 먹었다.

어쩌다가 번호 달라고 하는 손님 있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다 거절했는데도

뒤에서 그새끼가 넌 여자꼬시려고 일하냐 이래서 가출한 애는 받아주면 안되는건데 이딴 개같은 소리했음.

 

이 새끼 땜에 20살 되자마자 하나 깨우친 게 있다

사회에는 악질or 오지라퍼가 많아서 최대한 내약점을 숨겨야하고

내 약점이 한사람한테 알려졌다고 생각하면 벌써 두세단계 번져나가서 10명이알고 20명이 알게된다는거.

악질은 내 약점을 물고 살점이 떨어져나갈때까지 그걸로 날 괴롭히고

오지라퍼는 걱정하는 척 하면서 OO가 그렇게 힘들었대 참 불쌍하다 아냐 이러면서 동네방네 다소문냄

둘다 상종할 인간들이 아니다.

 

내가 주급으로 받았거든 그러면 이틀에 한번 씩 찜질방 가서 잤는데 그것도 돈이 많이 깨지더라

그땐 여인숙이 뭔지도 몰랐음 ㅎㅎ

짐 내버려 두고 여러 번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아닌 거 같아서 술집 사장한테 마감 청소다 하고 나서

잠시만 얘기하자고 하고 부엌에서 무릎 꿇고 내 사정을 얘기하니까 진작 얘기하지라면서

가게에서 자도 된다고 했지 그러면 4시부터 한6시반까지 두 시간 반 정도 자고

보일러 틀고 씻으면 혼날까봐 주방에서 얼어 죽을꺼 같은데 찬물로 씻고 다시 출근하고 그랬어.

 

후에 돈 좀 모은 다음엔 고시원에 들어갔는데 창문도 없었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썼지만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거에 감사했지

 

그리고 난 이때쯤 부모에게 버림 받았다는 걸 알았다.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어떤 아저씨랑 오셨어 원망도 했지만 웃으시는거 보니까 반갑더라

부산에 살던 어머니가 왜 서울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재혼이든 또는 연인이었겠지

내가 주문을 받으면서 엄마랑 눈을 마주쳤다? 근데 날 보고 흠칫 놀라더니 아저씨를 붙잡고 나가 버렸어.

난 내가 연락을 끊어버려서 어머니가 연락을 못하신 줄 알았는데 그냥 날 버린거였지.

너무 상처받아서 혹시 아버지는 날 찾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그날 저녁에 서울 올라오고 처음으로

고3담임선생님께 전화드렸고 난 물어봤지 혹시 아버지가 저 찾지 않던가요? 라는데 선생님이 대답을 못하시더라

더 들을것도 없어서 건강히 지내세요 하고 끊어버렸어.

 

아 그리고 입학 한 이틀 전에 학교 근처로 일하는 곳 다 옮겼다.

 

그 후 학교 입학한 부터는 이것저것 살게 많으니까 돈이 모자라서 고시원을 나오게 됐고

1학년 도중에 다시 오갈 곳 없는 놈이 된거야 공부할 책들 들어가 있는 큰 책가방 하나랑

장비 가방이라고 칭하고 세면도구랑 장비랑 내 옷 몇 벌 없는 거 넣은 가방 이걸 두 개 들고 학교생활했음

 

그러다가 사정을 아신 어떤 교수님이 학교 바로 앞 자기 원룸에 짐 내버려 두고 같이 생활하자고 하셨어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아서 그걸로 나중에 국밥이나 한 그릇 사달라고 하셨지

근데 그 당시에는 그게 너무 싫었어 난 왜 이런 동정 받으면서 살아야 하느냐는 생각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짐만 놓고 가겠다 잠자는 곳은 있다면서 센척하며 거절했어

 

아침 6시부터 우리 과 작업실 쓸 수 있었거든?

그럼 그때부터 학교 가서 아침 거르고 점심은 샌드위치 먹고 수업하고 작업실 밤 11시~12시까지 쓸 수 있었는데

남들 학기 초라 친해지려고 술 먹고 놀 때 난 그 늦은 시간까지 작업실 안에서 박혀있었지 .

작업실은 1명~2명 들어갈 수 있는 방인데 거기서 배운 거 복습도 하고 (원래 그런 공간이 아니야)

밥 대신 샌드위치 먹어가며 작업도 하고 그랬지 내 집같이 생활했나 봐

 

그리고 작업실 문 닫으면 학교에서 좀 더 나가면 술집이 줄줄이 있었고

그중에 호프집에서 거기 마감할 때까지 (손님 많으면4시 적으면3시반) 일했어

힘들지 않느냐 할 텐데 난 빨리 일하러 가고 싶었어 왜인 줄 알아?

남들이 안주 남긴 거 내가 버리는 척 하면서 먹을 수 있었거든

남들이 침을 튀겼든 포크로 난잡하게 난도질 해놨든 난 맛있었어

그래서 그런지 난 지금도 치킨 보면 울컥해서 치킨 못 먹음 치느님 꺼지라 그래 빼애애액

 

여하튼 잘 곳이 없었고 잘 시간도 충분하지 않아서 가게 정리 다하고 가게 의자에 누워서 두세 시간 자다가

일어나서  6시쯤에 다시 학교 가고 입학전에 한 그 생활과 거의 흡사하지만 돈을 모아가고 있었기에 참았지

 

생각해보자면 난 이때 제일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나도 20살이었어 갓 성인이 되었고 술 먹고 고주망태도 한 번쯤 되고 싶었고 오바이트도 한번 해보고 싶었어

가게문을 닫고 의자에 누워서 있으면

가게 안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났고 그래서였는지 술취한 대학생들 이야기하는 게 더욱 선명하게  들렸어

‘너무 취한다 1교시 수업 째야지 용돈 부족하다 알바나 할까’  이런 말들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가슴 아프더라

난 알바 안하면 굶어 죽는데 학교도 못 다닐텐데 쟤들은 용돈벌이로 생각하구나

세상 불공평하다고 느꼈지 진짜 좇같더라고

강한척 안 힘든척 스스로 최면 걸던 내가 그때만큼은 혹시 밖으로 소리가 들릴까봐

베개로 배고 자던 수건으로 입 틀어막고 날 버린 부모들 원망하면서 터져나오는 눈물 참고 그랬어.

 

 

노잼일까 봐 걱정된다 다음글에 여자얘기나옴
그 당시에 나는 악에 받혀있어서 말도 안 하고 공부만 미치도록 하고 술자리 일절 못나갔어

소심하면서 착한 것도 아니고 그냥 싸가지 없었어 날 까는게 들리면 앞에 가서 조곤조곤 화 냄

주먹질은 안 했어 물어줄 돈이 없었음 ㅎㅎ

딱 뒤에서 뒷담화 하기 좋은 대상이지.

특히나 우리 과는 돈 많은 집 자제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악질들이 있었어 걔들한테 참 무시를 많이 당했지

뭐 아르바이트하면서도 많이 당했고 말이야

일하는 호프집에 과에 동기들이 와서

야 너도 좀 술도 먹고 그래라 아등바등 살아서 뭐 하냐 그런다고 안 달라져 이딴 말 하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놨고

알바 사장도 그렇게 살면 결국에 너만 지친다 내가 취업자리 알아봐 주겠다 꿈도 입에 풀칠하고 나서야 있는 거다 이런 말을 종종 했어

 

난 힘들게 살았어도 학창시절부터 항상 되뇌던 말이 있었어

 

27살전에 성공할 것이고 결혼할 것이고 아버지가 될 것이다.

 

어머니 거품 무는거 보고 그날 저녁에 일기에 적었던데 나도 왜 27살인 진 모르겠어

젊다라고 할수있는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나봐 빨리 성공하고 싶었으니까 28살아재들 ㅈㅅ

아마 좀 불우한 가정환경이었기에 하루 빨리 정착해서 가족애란걸 느끼고 싶었나봐

 

그런 생활이 이어나가던 중 동기들한테 좀 심한 얘기를 들었어

들을만했던 게 1학년 초기에 난 정말 좆도 모르는 병신이었어

애들이 어떤 어려운 말 하면 난 뭔 소린 지도 몰랐고 몇 년을 준비한 애와 그냥 성적으로 대갈 박치기해서

들어온 나랑은 비교가 안됐지

 

그날 어떤 자유주제로 작업한 걸 서로 토론하는 시간이었어 교수님이 잠시 나가셨는데 동기 애들이 내껄 보면서

‘돈 없어서 새벽 내내 아르바이트할 거면 어디 공장이나 가서 입에 풀칠이나 하지 왜 학교 다니는지 모르겠다’

쟤랑 같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게 쪽팔린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거보니 안타깝다’라면서 비웃고

‘쟤는 표정도 없고 눈만 보면 독만 차 있는 것 같다

‘집안 환경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실력도 없으면서 왜 다니는지 모르겠다 ‘

‘쟤 벙어리 아니냐고 출석할 때 빼곤 말을 안 하더라”

이런 얘길 소근 소곤거리는데 다 들렸지.

씨발 다 기억해 누가 어떤 표정으로 말했는지  헉 혹시 내 얘긴가 찔리는 너 그래 너 얘기임 개새끼들아

평생 니들은 그렇게 남 약점 가지고 놀아라 난 성공한다.

 

이 얘길 듣고 수업 끝나고 물품 살게 있어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부모에 대한 원망, 사람들 말대로 쥐뿔도 없는 게  잘되려고 발버둥 치다가 끝나는 거 아닐까?

주말되면 나도 고향 내려가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도 먹고 싶고 대학생활 재밌다 가족들한테 말하고 싶었고

스스로가 불쌍하다 라는 생각들이 들면서

몸에 힘이 풀리더니 주저앉아지더라 참으려고 했는데도 꼭 꼬맹이 우는 것처럼 끄어엉 울었어.

목소린 굵으니까 곰 같았을듯

울화를 토해낸다는 게 어떤 뜻인지 이때 이해했지

 

그때 그 사람이 일으켜줬어

그 사람은 우리 과 인건 알지만 이름도 몰랐었어

한두 달 전에 레드벨벳 처음 알았는데 얘가 아이린 8 이휘재부인2 정도로 아이린이랑 정말 닮았어

두달전엔가 도탁에서 보고 얘가 데뷔한 줄 알고 식겁해서 검색해보니 이름이 다르더라

지금도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어 아닌가 맞는 거 같은데 이러던데

이사람은 단발임 중발이라해야하나 여튼 좀 짧고 더 이쁘다

여튼 남자들이 딱 좋아하게 청초하게 예뻐서 고추들이 드글드글거렸어 여왕벌을 넘어 여왕개미 수준이었음

학식 먹으러가면 얘는 친구들이랑 먹고 싶어 하는데 선배고추들이 식판 들고 다 붙었고

얘가 수업할때면 지나가던 선배들이 꼭 아는 척 할려고 들어와서 얘기하고 가고 그랬어 그러면 착해서

다 받아주는데 철벽이었음

여하튼 진짜 너무 예쁘고 인기많은 그 사람이 날 일으켜 주는 거야

그 당시에 맛이 가버렸는지 난 그 사람을 꼭 엄마 품 그리워하는 아이처럼 진짜 내 온 힘을 다해서 꽉 안았고

근데 그 사람도 처음에 흠칫 놀라더니 이내 날 그냥 안아주더라?

내 엄마는 나에게 상처만 줬는데 난생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게 엄마가 아닐까? 엄마가 주는 안락함일까? 란 걸 느꼈어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안았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눈 퉁퉁 불고 콧물 훌쩍이면서 쪽팔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그 자리를 도망쳤어

 

여하튼 다음날이 됐는데 이 사람이 자꾸 수업 쉬는 시간에도 그렇고 나한테 말을 걸어

쪽팔려죽겠는데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난 자꾸 무시했고 수업 끝나자마자 후다닥 짐 챙겨서 작업실 갔는데도

또 따라들어와 내가 어제 미쳤었나 보다 죄송하다 저랑 있으면 괜히 안 좋은 소리 듣는다 좀 따라오지 마라 이래도

그 사람은 그러든가 말든가 1~2명 들어갈 수 있는 작업실에 의자를 들고 따라와서

내가 작업하는 동안 계속 옆에 있고 노래 틀고 노래하고 그랬어

(노래는 진짜 말도 못할정도로 못부른다. 얼굴만 이쁨)

먹을 거 가져와서 옆에서 먹고 자기 수업 끝나면 다시 또 와서 옆에서 공부하고

내가 수업 있을땐 이사람이 먼저 자리 잡아놓고 이걸 한 1주일을 반복하는 거야

 

처음에는 모든 말을 다 무시했다가 어 그래 몰라 싫어 시간 없어 이 정도까진 말하게 된 거 같아.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겠지만 어딜 가던 차갑고 말 없고 여자 관심 없다고 소문났던 나인데.

딱 까놓고 옆에서 청초 존예가 밥 먹으러 가자, 노래 좋다 아냐?

나 노래 잘하는 거 같아 아이돌이나 할 걸 이건 왜 이렇게 하는 거야

그때 왜 안았어? 이러면서 재잘재잘 떠들어봐 마음 안 움직임?

그래도 예쁜 애가  이럴 리가 없다 동정으로 이러는 거다

만약 마음이 있다고 그래도 지금 나한테 연애는 너무나 사치 다라며 혼자 김칫국 시원하게 한 사발 하고

성공하고 생각하자 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어

 

그리고 그날도 난 작업실에 박혀있는데 역시나 얘가 의자 들고 와서 내 옆에 앉더니

한 시간 정도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 속으로 얘도 이제 지쳤나 보다 하는데

갑자기 난 좋다? 이러더라

아무 생각 없이 난 뭐가 라고 했고 또 자기 노래 취향 얘기하는 줄 알았지

그리고 그 사람이  “너” 라고 했어

내가 좋대 눈에 악만 남고 진짜 차갑게 생기고 말도 없어서 누구도 친해지기 싫어하는 날 말이야

이때 진짜 누가 머리통을 오함마로 내려치는줄 띵하니 어지럽고 심장은 두근거리구 얼굴은 시뻘개졌어

지금 생각하면 찐따같은데 원래 사랑은 찐따같은거 아니겠어?

손이 벌벌벌 떨리면서 ‘ 나도’ 라고 대답했어

 

성공 후 연애 이딴 다짐 같은 건 개뿔 존예가 그러니까

그딴 거 없고 엉엉! 사귈래여 헎ㅋ헠헠헠 이렇게 됨 그렇게 우린 자연스럽게 사귀게 됐고

 

그사람은 다른 자기 나이 또래 여자들과 좀 많이 달랐어

차분했고, 찡찡대는것도 없었고, sns는 불필요하다고 전혀 하지 않았어, 술 자리를 싫어했고

예뻐서였는지 고추들이 번호 따려고 용을 썼지만 한 번도 주지 않았어. 책임감도 강하고

여자들은 이야기하는 것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입이 무겁고 말을 가려서 했지.

알고 나서 얘기지만 나처럼 이 사람도 사람한테 받은 상처가 많았기에 노출되는걸 좀 극도로 꺼려했던거.

 

사귀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어

사귀고 얼마 안 있어서 모은 돈으로 원룸을 구했다는 거? 그리고 그 사람이랑 같이 동거한 거?

말이 동거지 진짜 잠만 잤음 내가 아침 7시에 나가서 새벽 4시에 들어오고 그랬으니까

진짜 잠 말이야 고추들이 생각하는 잠자리말고

 

작업실에 있을 땐 그 사람이 옆에 항상 있었고 호프집에선 그 사람이 피곤하지 않은 날이면 2인석에서

내가 일하는 걸 지켜보다가 꾸벅꾸벅 졸면 집에 가서 자라고 하면 그제서야 자러 갔고

주말에 카페에서 종일 일할 때도 딴 여자한테 번호 따이는거 감시한다면서

바로 정면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할 일 하고 공부하고 그랬지

 

그 사람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서툴지만 학식 대신 밥을 해줬고 같이 먹었어 나중엔 잘하더라 주부9단임

 

그리고 내가 일 끝나고 한밤중에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자다가도 눈도 못 뜬 채로 왔냐고 누운채로 바바리맨처럼 덮고 있던 이불을  쫙 펼친 다음에 OO!  들어와! 라고 했고

난 그 사람이랑 장말 더 이상 꽉 안을 수 없을 만큼 서로 안으면서 잠들었지

정말 꽉 안으면 그 사람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그 사람한테 안겨 있으면 세상이 포근했고 그 사람 향기도 너무 좋았어.

너무 피곤하고 지쳐도 그사람 품에 있으면 치유되는 것 같았지.

 

이때 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꿈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르고

나쁜 길로 들어섰을지 몰라 카페알바하면 호빠삐끼들이

힘들게 이런 일하지 말고 새벽에만 잠시 일하고 돈 빡세게 벌라고도 꼬셨고

술집 여사장이 한달에 내 월급만큼 용돈줄테니까 지 애인하라고도 했어 물론 그 소리 듣자마자 옮겼지만

근데 난 이 사람한테 떳떳하고 싶어서 한 번도 눈을 안 돌렸어.

존재 그 자체로 고마운 사람이야

 

그사람과의 사랑은 격정적인 사랑은 아니었어 느긋한 행복이라는 표현이 맞으려나

그 사람과 한 시간에 한마디 할까 말까 할 정도로 둘 다 말이 없지만

눈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거든

연인보다 부부 같았지.

 

안 믿기겠지만 이 사람과 만나면서 우린 한 번도 싸운 적이 없고

난 지금까지도 언성조차 높인 적도 없어 야 라고도 안 해봤다. 야 라는 말을 내가 좀 싫어해

사랑하는 사람한테 자기야는 못해줘도 야 가 뭐야 ..

그리 길게 만나면서 싸우지 않은 이유로는 신뢰가 단 1%도 끊어진 적이 없어.

서로가 저 사람이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나? 이런 걸 느낀 적이 없고 세상이 날 욕해도 내 옆에 있어줄 것 같았어.

저렇게 확신이 있으니 다른 연인들처럼 막 사랑을 굳이 확인을 안 해도 됐고 건강한 연애를 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사람이 나에게 참 많은 양보를 했기에 가능했어.

 

나도 일하다 보면 아가씨들이 몇몇 호감을 표하기도 했는데

그 사람은 진짜 돈 많은 집 자식들+번호 달라고하는 남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었거든.

 

예를 하나 들자면

그날도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어 근데 한 선배가 카페 문을 열더라 걍 개새끼라고 말할게

이 새끼는 건설회사 아들이었는데 진짜 수업 시작 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아 이번에 우리 아빠가~,이번사업이~

저런 것처럼 돈 많은 거 어필하려고 생지랄을 다했기에 돈 많은 줄 알았고 차도 재규어 타고 댕겼음.

근데 이 미친놈이 내가 앞에서 손님 주문받고 있는데 그 사람 손목 잡더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더라

근데 그 사람이 싫어요라면서 손을 뿌리치는데 또 잡아 그니까 사람들이 2층에서 내려와서 구경하더라고

뛰쳐나가서 멱살 잡으니까 걔가 날 보고 비웃더니 그 사람한테 하루 종일 일하고 골방에 박혀서 공부만 하는데

얘가 뭐가 좋으냐고 얘가 못해주는 거 난 다해줄 수 있다 하더라

숨이 턱 막혔지 쥐구멍에 숨고 싶었어 사실이니까.

멱살 풀고 주문받으려고 축 처져서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4학번 위에 선배한테

네까짓 게 저 사람 대해서 뭘 아는데 함부로 말하냐 돈이면 다인 줄 아냐

두고 봐라 난 쟤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했어

그니까 그 개새끼가 거지 옆에 있으면 거지 된다 하고 나가더라

 

기분은 나쁜데 솔직히 그 사람은 대시했던 돈 많은 사람들이랑 연애했으면 정말 풍족한 연애할 수 있었어

해외여행을 갈 수도 있었고 구두랑 명품 백도 받을 수 있었고 비싼 고기도 썰어볼 수 있었겠지

근데 그 새끼 말대로 거지랑 만나서 거지처럼 연애한 거야.

그래도 그 사람이 날 버리고 다른 사람한테 가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은 진짜 요만큼도 안 했고

만에 하나 그사람이 너 너무 가난해서 힘들어서 떠날 거야라고 해도 씁쓸하지만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었다.

 

 

외동에 엄마뿐이었던 나에게서 엄마가 떠나갔다.

머리가 멍해졌다.

연락을 할까 말까 하다가 나중에 꾸지람을 들을까 봐 OO에게 알렸다.

휴무를 죽어도 안 쓰던 그는 즉시 기차를 타고 내려왔고 3일내내 장례를 도와줬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니 세상에 혼자 남았단 사실이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무서워서 그에게 안긴 채로 울었다.

그는 어떤 말도 미동도 없이 해가 지도록 안아줬다.

그는 세상이 무너져도 날 지켜줄 것이다.

난 그와 결혼한다.

 

너무 피곤했는지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친구들은 과음해서 토를 하는데 나는 일한다고 헛구역질을 한다 왜 사나 싶고 포기하고 싶다.

무의식적으로 비밀번호를 치고 억지로 3층까지 계단 하나하나씩 올라간다.

그러면 그녀가 자다가도 눈 못 뜬 채로 일어나 날 맞이해준다.

2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 사람은 전혀 변함이 없다.

후다닥 씻고 자려고 그 사람 품에 안기면 그녀가 묻는다

오늘 손님은 많았는지 자기보다 예쁜 사람은 없었는지 어지러운 건 괜찮은지

아 난 이 사람 때문에 버티고 살아가고 있구나

무조건 이 사람과 결혼한다. 성공해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준다.

(남자가 안아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우린 반대야.. 그 사람이 안아주면 그 사람 쇄골이랑 목에 얼굴 붙이고

팔로 그 사람 허리 확 당겨서 안으면 딱 편함)

 

 

위에껀 그사람 일기 밑에껀 내 일기야 원래 그가 아니라 그이인데 그러면 그사람 너무 아지매 같아 보일까 봐 바꿈

 

개자식한테 그 사람이 나랑 결혼 얘기 한 것처럼 우린 20대 초반 첫사랑인데도 심심치 않게 결혼 얘기를 했어

결혼식을 어떻게 하고 애를 몇 명 낳고 뭐 이런 얘기 있잖아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이 사람이랑 결혼할 같다가 아니라 한다 였어 우리도 일기장 서로 바꿔보고 놀람

 

근데 그런 행복을 꿈꾸기엔 내 상황이 너무 암울했어 너무 작아졌고 스스로 이 행복이 언제 끝날까 무서웠지

그렇기에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더 일에 매달리고 공부에 매달렸던 것 같아

 

글 보면서 느꼈겠지만 말이야 그 사람과 온전히 있는 시간이 일 끝나고 잘 때, 아침, 휴무 밖에 없었어

그 휴무도 한 달에 한 번 쓸까 말 까였는데 휴무 중에 70~80%는 집에서 진짜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자기만 했어.

방학 때도 8시에 나가서 4시에 들어왔거든 그 중간에 공부시간엔 작업실 가고

 

내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특별한 데이트가 아예 없었어

날 생각해서였는지 어쩌다가 나가서 먹는 날이면 항상 김밥천국우동,찌개류,노량진쪽에 쌀국수 이것만 먹었어

당연히 어디 여행 가는 건 꿈도 못 꿨지.

그래도 너무 미안하고 이 사람한테 뭘 해주고 싶어서 이 사람이랑 나랑 윤종신 진짜 좋아하거든

그때 학업 관련된 물품 살게 있는데 그딴 거 조까 담에 산다 라고하고 콘서트 간 거 랑

두 달에 한 번 정도 영화관 간 거밖에 없어 영화비도 너무 비싸서 웬만하면 집에서 다운로드해서 보고 그랬어

 

더 미치게 만드는 건 그렇게 모자란 나인데도

이 사람은 서운해하는 티를 안 내는 거야 그리 길게 만나는데도 항상 변함이 없었어

예쁘고 맘씨 착한 여자 만나서 좋겠네 자랑질 ㄴㄴ 라고 하겠지만

정말 사랑하는데 남들과 비교해서 뭘 해줄 수가 없을 때 그게 얼마나 비참한지 겪어본 사람 아니면 모를 거야

 

그 사람이 욕심을 해탈한 빡빡머리 비구니도 아니고서야 얘도 20대인데 왜 남자친구랑 고기도 썰어보고 싶고

커플옷 커플링 같은 거 안 하고 싶겠어 여름이면 비키니 입고 물놀이도 가고 싶고 다 하고 싶을 거 아냐

 

그러다가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어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 사람 슬퍼하는 거 보기 싫어서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면 말하자 이런 생각이었어.

그래서 고향 내려간다고 뻥 침 고향 가도 반겨줄 사람 없는데 ㅎㅎ

근데 눈치 없는 친구 병신 하나가 이 사람한테 말한 거야 그래서 수술 다하고 병원에 한 3일째 누워있는데

그 사람이 달려왔나 봐 머리카락 개털처럼 삐죽삐죽 삐져나와있고 헉헉거리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어

넌 왜 나한테 기댈 생각을 안 하느냐고 난 도대체 너한테 뭐냐고 내가 기대야 자기도 기댈 수 있지 좀 기대라고

널 보면 불쌍해죽겠다고 라고 병실에 누워있는 나한테 빼애액 소리를 지르더라 그리고 날 붙잡고 울더라고

그 사람이 처음 화냈고 소리 지르는 것도 처음 들었어

난 놀라서 토끼눈 돼버렸고 같은 병실 쓰던 아재들도 놀래셨지..

옆에서 잔다는 그 사람 보고 혼자 있어도 된다고 다른 사람들 불편하니까 집에 가서 자라고 보냈지

그 사람 보내고 나니까 아재들이 젊은 친구들이 뜨거운 사랑한다고 부럽다며 퇴원할 때까지 놀렸어

 

이일을 계기로 이 사람은 너무나도 혼자사는 방법 밖에 몰랐던 나한테 조금은 지쳤던 것 같아

 

용량이 딸린다네요 바로 이어서 올릴께요

 

 

그렇게 좀 시간이 꽤 지났고 내 생일날이었어 그 사람이 휴무 내라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만나서 오랜만에

카페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눈이 촉촉해지면서 정말 진지하게 묻더라고

 

“우리 앞으로 더 오래 만날 거잖아 일하는 곳 말고 밝은 데서 너랑 있고 싶다

아니면 주말 아르바이트를 종일 말고 아침에만 해라 저녁엔 둘이 있자 ”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는데

 

왜 그 사람이 저런 얘기를 했냐면 저 시기부터 서서히 몸이 맛탱이가 가버리기 시작했거든

삐이이이이 거리는 원인불명에 이명이 생겼고

2주에 한 번씩은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갔고 나중엔 돈 아까워서 집에서 누워있었지

그럼 그 사람은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울먹거리면서 내 팔다리만 주물러주는 거야

일주일 중에 4~5일이 코피가 질질 났고 그것도 일하는 와중에 나면 그 사람이 안 봐서 상관없는데 꼭 일 끝나고

새벽5시쯤에 잘 자다가 피가 질질 나니까 이 사람은 이대론 안되겠다 싶었던 거지

 

헌데 위에도 적었다시피 사고가 나서 돈 계산이 잘 안 맞아졌어 병원비 땜에 모아왔던 돈이 헉하고 나가버렸고

물품 땜에 돈 쓸 일도 좀 있었어 그래서 내가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되느냐고 지금은 힘들 것 같다니까

얘가 울면서 뛰쳐나감 나도 쫓아가니까 그 예쁜 애가 눈이 벌게져서

진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더 묻는다며

‘네 시간을 나한테 좀 투자해 아니 처음으로 부탁할게 나 좋으면 주말에 오후든 오전이든 아르바이트하지 마

내가 물품비 절반 줄게 나중에 잘 돼서 갚아 ‘라고했는데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쉬어라는 거겠지 걱정되니까 하지만 난 쉴 수 없었어

 

그때 내가 한 발짝 양보하고 알겠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한데

여자친구는 그 사람 많은 거리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뺨을 후려쳤고

처음으로 나한테 십 원짜리 욕에 더해서 넌 여자 만나지 말라고 평생 일이나 하다가 혼자 늙어 죽어라고 했지

거기서 난 달래줄 수가 없었고 그 얘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어

결국 난 뒤돌아섰고 그렇게 헤어졌지

 

이 글쓴이 븅신새끼 달래줬어야지! 개노답 !! 빼애애액 할 수도 있는데

그 당시엔 난 진짜 하루가 모자랐어 오죽했으면  2~3시간 자면서 살았겠냐

돈이 많이 드는 학과를 택한 내탓도 있고

성공에 미쳤다고 욕해도 돼 빨리 성공해서 이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 당시에 내가 아니면 함부로 평가 안 해줬으면 좋겠어

아마 그래도 여성분들은 욕할 거 같은데 ㅇㅇ.. 걍 욕해라

 

정말 헤어지고 나서 힘들었어 뭘 하던 그 사람 생각에 멍 때리면서 살고 그랬다.

하루하루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진짜 이러다가 죽지 않을까 했어 그래도

이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버텨지더라

 

그리고 수년이 흘러갔고 난 여전히 하루에 3시간~4시간 정도 자면서

남들이 봤을 땐 미쳤다 싶을 정도로 일이랑 공부에 몰두했고 당연히 건강은 더 안 좋아졌어

교통사고 난 허리 때문에 진통제도 매일 몸에 들이붓고 통증이 심해서 복대 차고 다녔어

위궤양도 걸리고 이명은 더 심해졌고 피로가 한도 이상으로 쌓여서였는지 폐결핵도 걸려서 3주정도 입원도 했다

그래도 하루도 온전하게 안 쉬었어 병원에 입원해서도 노트북 가져가서

4시간씩이라도 내가 해야 할 거 해서 같이 일하는 형한테 보내주고 그랬지

결핵 때문인지 아직도 종종 목에 비린내 나고 가래 낀 거 같아서 기침하면 각혈함. 손수건 들고 댕겨야해

 

내가 그 사람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조금이라도 더 자 그러다 큰일 나’ 이 말인데

서울로 올라오고부터 잠자는 게 진짜 무서웠어 여느 대학생들처럼 6~7시간 자면 난 항상 밑바닥에서

진짜 알바만 하다가 늙어 죽을 것 같았어

그니까 그게 어느 순간에 강박으로 되더라고

퇴근할 때든 출근할 때든 너무 피곤해서 헛구역질이 나오고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야 심적으로 안정이 왔어.

그게 내 몸을 망친 거지

 

하늘이 보기에도 간절했을까 건강은 정말 나빠졌는데 반해

그동안 작업물들이 급작스럽게 인정받아서 이리저리 불려 다녔고

어린 나이에 감당이 안될 정도로 기회도 엄청 생겼어

힘들 땐 그렇게 꼬여가며 괴롭히던 삶이 풀릴 때는 꼭 마술같이 샤샤샥 하고 풀려버리더라?

한스럽더라고 그사람 만날 때 이렇게 좀 풀리지 싶은 마음에..

알바는 다 때려치웠고 이쪽 바닥에선 꽤나 명성도 얻었어 그러니까 돈은 따라서 오더라고,

이쪽 업계 특성상 부가 집중돼있어 상위 한 10%만 뚫어 버리면 벌이가 들쑥날쑥 하긴 해도

제일 적게 버는 게 웬만한 직장인 정도거든.

 

잘 풀리고 나서도 그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트라우마로 박혀버렸는지

어떻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몇몇 있어서 연애할 기회가 꽤나 많았는데 다 거절했어 거의 3년을 말이지

그 사람 같은 사람이 없더라 그 사람은 날 항상 편안하게 해줬는데

어쩌다 연결된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니 말에 진실이 없고 애 같고 동생 같은 느낌?

 

딱 까놓고 얘기하면 그사람말고 내옆에 누가있는게 상상이 안됐어

그 나이때에 그사람만큼 이쁜데 참하고 어른스러운 사람 없어 단연코

 

그렇다고 다시 만나자고 할 용긴 없었어 너무 못 해줬다 보니까 다시 만나곤 싶어도 참았고

그냥 제발 제발 내가 조금 덜 행복해도 되니까 그 사람 행복했으면 좋겠더라고 등신 같지?

근데 진짜 이랬음 그리고 지금도 그래

 

아니 잘 됐으면 다시 만나면 되지 왜 안 만남?이라는 댓글을 봤는데

만나고싶단 생각보다 죄책감에 못 만나는 마음이 더 크다고 너희들이 꼬추달고 전에 저렇게 못 해줬어 봐

주로 여자들이 욕하는데 특히 가난했던 남자들은 이해할 거다 내 편 들어줘…

오늘 하체하는날이라..빼먹으면안되서 헬스갔다와서 나머지쓸께요.

 

 

시간이 더욱 지났고 건강이 어느정도는 괜찮아졌어 그래서 운동도 시작했고 몸도 좋아졌지

 

그러다가 최근에 짝사랑에 빠지게 됐어 웃긴 건 뭔지 알아?

그 사람 얼굴이 좀 희미했거든 아니 기억하기 싫었던 거였을지도 몰라.

난 몰랐는데 컴퓨터 정리하면서 옛날 그 사람이랑 찍었던 사진 보니까

짝사랑하는 여자랑 자매라고 해도 믿겠더라

난  본능적으로 그 사람과 닮은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

 

여하튼 짝사랑을 했는데 그 대상이 남자친구가 있었어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지

대신에 마음의 변화가 생긴 거야 아 나도 다시 꽁냥꽁냥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구나

이젠 괜히 죄책감에 인연을 밀어내지 말자 오는 인연 그냥 받아들이자

나도 드디어 죄책감에서 벗어날 때가 된 거 같다고 생각을 했어

 

그 짝사랑도 잊고 살다가 외주 땜에 출장을 갔다?

난 우리 팀만 일하는 줄 알았어  근데 다른 한 팀도 같이 한다네

내가 같이 일하는 형한테

빼애액 그런 게 어딨어 나 다른 사람이랑 일하는 거 싫다고 막 투정 부리는데

저기 반대편에서 엄청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길래 헉 시발 뭐지 했지

그 사람이었음

전완에 있는 잔털부터 머리털까지 쭈뼛 서더라

 

7시간 정도 일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얼굴 한 번도 안 마주쳤고 안 쳐다봤어

쳐다보면 내가 감당이 안될 것 같은 거야

끝나고 그쪽 팀이랑 회식을 한댔는데 난 핑계 대고 차 타고 집에 와버렸어 내 진심과는 반대로 도망친 거지

 

솔직히 그 사람 다시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서웠어

내가 너무 못해줬으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정말 힘들어했던 생각하기 싫은 과거가 생각나더라고

 

집에 와서 나 혼자 심란해서 노래 틀어놓고 누워있는데

그 사람이 카톡으로 다짜고짜 욕하는 거야 너 왜 나보고도 모른척했냐 죄졌냐고 그동안 연락한 거 왜 다 씹었냐고

넌 어떻게 한 번을 안 잡냐고 쉴 새 없이 카톡을 보내더라

이걸 보는데 아 얘도 나만큼 힘들었구나 그런 생각에 좋기도 하면서 착잡하기도 하고 묘했다.

 

그동안 그 사람이 2년 정도는 연락을 해오긴 했어 자기 일 오픈할 때도 3번이나 친구 통해서 초대했는데 다 안 갔고

어쩌다가 전화 오는 거 문자 오는 거 다 씹었어 왜냐면 난 얘를 생각하면 내 과거가 떠올라

정말 부족하고 처절하고 미안한 성공에 미쳐서 사랑하는 사람 위해 양보 하나 못할 만큼 괴로웠던 과거가

그녀가 트라우마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벗어나려고 무던히 노력했지

그리고 거의 벗어났어 근데 마주쳐버린 거야

 

이번엔 얼굴을 마주쳤기 때문에 카톡 씹기는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 서로 격해졌어

위에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럼 아직까지 내가 그 죄책감 가지고

너라는 사람한테 갇혀서 바보처럼 지내길 원했냐고 그런 걸 원한 거냐고 하니까

그렇대 진짜 나락으로 갔으면 좋았을 건데 너무 잘 지내서 화가 난 대

 

그러다가 전화가 오더라고 오래간만에 보는 번호였지만 기억하고 있었지

받을까 말까 하다가 그 몇 십초 동안 수만 번을 고민하다가 받았어

받았더니 혀 꼬인 소리로 미친 듯이 날 욕하면서 주소를 부르래

싫다고 했더니 어차피 너 말 안 해줘도 내 친구들 통해서 알 수 있을 거래

등신 같은 내 친구들은 알려줄게 뻔하기 때문에 알려줬고 다 제쳐두고 일단 보고 싶었음 나란놈 .. 병신같다

 

조금 있으니까 그 사람은 술도 못 먹는데 술 만취 상태로 집에 왔어

그렇게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문 열라고 빼애액  하는 게 스크린에 보이는데 여전히 이쁘더라

오자마자 그 사람은 울기 시작했고 날 엄청 때렸어 진심으로 개쌔게 맞았어

여하튼 날 엄청 원망하고 있더라고 얘기가 서로 접점이 없어서 우는 거 달래고

조곤조곤 그 사람에게 다음에 얘기하자고 너 연락하면 이번엔 안 씹을 테니까 주말이든 연락해라고 했지

취해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데 고개를 끄덕이더라 그때 정말 여전히 너무 예뻐서 안아버리고 싶었어

그래도 정신 차리고 차 운전해서 집에 데려다주는데도 얘가 빡이 덜 풀렸는지 자다 깨서 운전하는

내 온몸을 꼬집고 팔물고 하이힐 벗어서 허벅지 찍고 그랬음..

집 앞에 내려주니까 비밀번호치다가 비틀거리면서 돌아오더니 요즘에도 코피 쏟고 다니냐고 묻는데

날 걱정하는 그 눈을 보니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지.

집에 와서 몸이 아프길래 보니까 찝혔던데는 피나는 곳도 있고 멍들고 허벅지는 찍혀서 상처가 나있더라

참 그거 보면서 몸도 마음도 아팠어

 

그리고 다음날 출근하는데 이 일 겪고 나니까 일이 안되는 거야

 

나한텐 정말 지우고 싶은 그 과거였는데 그 사람은 지우기 싫은?

뭔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이딴 말 같은데

내가 잘못해준 거고 나발이고 다시 같이 있고 싶더라고 그 품 안에서 잠들고 싶고 그 사람 꽉 안고 싶어졌어

자고 일어났을 때 그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서로 다른 의견이 상충되니까 머리가 터질 거 같았지.

 

도저히 일이 안되길래 먼저 퇴근하고 공원 가서 머리 식히려고 몇 시간이고 앉아있는데 카톡이 왔어

‘어제 정신은 헤롱헤롱해도 내가 그냥 뱉은 말이 아니다 너도나도 힘들었던 거 아는데 너도 자리 잡고

나도 자리 잡았잖아’ 라고 왔고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이제 너라는 사람에게서도 과거에서도 좀 벗어나고싶다 충분히 힘들었다’라고 카톡을 답장을 했고

그 사람은 나에게 이기적인 새끼라는 답을 남기고 연락이 오지 않다가

새벽에 다시 카톡이 왔어 이때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만나서 진짜 깔끔하게 얘기하고 끝내자고

어차피 그 다음날 우리 둘 각자 팀은 서로 만나서 일했어야 했기 때문에 난 알았다고 했지

 

그리고 정말 많이 생각했고 결론을 내렸어.

이 여자는 과거의 사랑이고, 힘들었던 그 시절의 나고, 기억하기 싫은 트라우마다

이젠 좀 털어내고 싶었고, 흔들려왔던 건 워낙 못해줬기에 애틋한 감정으로 인해서 온 거다

미안한 감정으로 만나는 건 잘못된 것이다. 이 사람한테도 상처가 될 거야.

단단히 마음 먹었지.

 

다음날 일하러 이제 출근하는데 안 좋은 쪽으로 너무 떨리는 거야

내가 과연 모질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최대한 상처를 안 줄까? 혹시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저녁 8시쯤에 일이 끝났어

 

이날은 차를 안 가지고 가서 퇴근 후에 회식 가자는 거 따로 볼일 있다고 하고  여자친구 차로 갔지

처음에 차 타고 안전벨트 매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라 나도 마음 단단히 먹었으니까 할 말 있으면 해

그러면서 옛날 얘기를 먼저 꺼내는 거야

뭐 정말 자잘한 것 있잖아 이터널선샤인 몇십 번 본 얘기 그 사람이 밥하고 있으면 내가 뒤에서

껌딱지처럼 안고 있던 거나 등 소소한 추억들

나도 그때 참 좋았는데 한편으론 기억하기가 무섭다고 했더니

“난 조금 부족했어도 그 시절이 너무 그립고 좋은데 너에겐 기억하기 싫은 과거야?

라고 말하더라 여기서 말대꾸하면 저번처럼 하이힐로 두들겨 맞을까 봐 입 다물고 있었어.

공원에 도착해서  걷자 라고 하길래 주인한테 혼나는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져서  쫄래쫄래 따라 감

 

걸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그 사람이 ‘만난 시간만큼 헤어진 시간이 길었는데 너무 힘들었다

자기도 정신 차리려고 엄청 노력을 하다가 세월이 지나 무뎌져가는데

자리 잡은 나의 모습을 보니까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을 했다’ 하더라

그리곤 대답을 원하는지 날 쳐다보더라고 그 당시엔 어떤 말을 해도 이 사람이 울 거 같았어.

 

아무 대답못하고 한참을 계속 걸었어 그러다가

마음먹고 말했지

“너무 힘들어했던 날 보듬어주면서 사랑이 아닌 연민이었던 것 아니냐

나 역시도 그 당시에 너무 외로웠기에 잠시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너랑 만나면서 너한테 못해주고 공부랑 일에만 미쳤던 것 너한테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

나에게 너무 트라우마로 자리 잡혔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가 너를 통해 보인다 죄책감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

제발 서로 이제 놓아주고 다른 인연을 찾자 정말 미안하다. 나를 평생 욕해도 되고 지금 이 순간부터 잊어버려도 된다. “라고 그 사람에게 엄청나게 상처 주는 말을 해버렸어

 

그리고 그 사람은 난 괜찮았는데 뭘 죄책감 가지느냐며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고

꼭 옛날에 헤어졌을 때가 오버랩되더라

그때처럼 난 보듬어주지도 눈물을 닦아주지도 못했지

난 그사람한테 그때나 지금이나 너 달래주지도 못한다 그냥 진짜 나쁜놈 만났다고 생각해라 하고

뒤돌아서서 가는데 여자친구가 눈물범벅에 화장 다번 진 얼굴을 내 팔에 묻으면서

알겠으니까 어떤 말인지 이해했으니까 자기 차까지만 예전처럼 걸어만 가자고 했고 미련한 나는 알겠다고 했어

 

읽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왜 이토록 날 잡으려는지 이해가 안될 것도 같은데

우린 서로에게 너무 깊숙한 곳까지 엮여있었어

너무 닮았었거든 이 표현이 이해가 될지모르겠는데 그사람이 나였고 내가 그사람이었어.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컸고 그래서 사람을 절대 안 믿는 것

남에게 속 얘기 절대로 안 하는 것  속은 썩어 문드러지는데 강한 척 괜찮은 척 하는 것

만나는 동안 편모 가정에 외동인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난 엄마에게 버림받고 연락 안 하던 아버진 돌아가셨지

우린 둘 다 세상에 가족 하나 없이 혼자였어

그런 우린 서로에게 가족이자 연인이고 스승이었어.

내가 모질게 밀어내도 그게 진심이 아닌 걸 그 사람은 알았던 거야

 

돌아와서 차에 그사람을 태우고 갈게 라는 말과 함께 뒤돌아서 갈려는데

나 분명 차 문을 닫았었거든? 근데 울음소리가 미세하게 들리더라 차를 개똥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원래 안 들려야 되잖아 차에서 들리려면 소리를 질러야 들릴까 말까 알 텐데

그 절규 비슷한 소리 때문인지 아직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였는지 미치도록 돌아보고 싶었어

달래서 집에 보낼까 이 생각도 하다가 그래도 난 못 들은 척 하고 뒤돌아가버렸지

그렇게 수년간 그 사람과의 질긴 인연이 끝났어.

혹여 과격한 표현이 있는건 일기보면서 후다다닥 써버린거라서 그러니 양해점 ..

 

바로 이어서 쓸께요 노잼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이야기가 이전 글에서 끝나야 해 끝날 줄 알았고.

그사람과 그렇게 끝이 나고 혹여라도 연락이 올까 해서 카톡도 원래대로 없앴고 번호도 바꿨어

그날 이후로 거의 뭐 내가 나 자신이 아니었지
그 사람 속해있는 팀이랑 일이 앞으로도 4번 정도인가 남았다더라고
매주 그 사람을 보라고? 사람 미치는 거지

그래서 같이 일하는 형보고 나 소처럼 한눈 안팔고 진짜 열심히 일해왔고 한 번도 안 쉬었잖아
외주 갈 때 난 빼라고 나 대신 다른 친구 소개해줄 테니까 제발 그냥 왜 그런지 묻지도 말고
그냥 빼달라고 했어 나 아니면 안 된다 그러면 돈도 물어줄 테니까

그 형이 내 얘기 듣고 원래 일본에 출장이 며칠 후 였는데 일본 쪽 클라랑 얘기해서 3일 정도를 빨리 갔어
꽤나 많은 돈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친 거야 다시 보면 나 울고불고 그 사람한테
매달릴 거 같았거든
그래서 도망치듯이 일본으로 출장을 갔어

내가 그렇게 맛이 가버린 걸 직원들이랑 형은 처음 봤는지 계속 내 눈치를 보더라고
아무 일 아니니까 일하자 하고 일 다 끝났는데
내가 술을 진짜 싫어해 어쩌다가 회식해도 3잔 정도 먹고 그만 먹거든
근데 술이 없으니까 일 끝나고 숙소에 누워있는데 감당이 안 되더라 미칠 것 같았어
지금 당장 일이고 나발이고 비행기 타고 바로 그 사람한테 가고 싶었어
그래서 형이랑 직원들이 술 마시고 있는데 가서 뭔 술인지도 모르고 그냥 병째로 한 병 꿀꺽꿀꺽 마셨고
그다음 기억이 없는데 동영상을 찍었더라고 다 큰 놈이 눈물 훌쩍이면서 으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 소리만
반복하더라 겁나 추했어

그리고 일본에서 일이 끝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행사 참여할게 있어서 일본에 더 남아있어야 했고
사실 내가 행사 참여했어야 하는데 도저히 웃으면서 행사를 참여할 수가 없겠더라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오고 갔던 취업 얘기를 하러 조금 일찍 유럽으로 갔어
여하튼 간에 그곳은 생각보다 날 많이 원하고 있었어 얘기가 3~4일은 될 줄 알았는데
가자마자 포트폴리오 앞에 10분만 듣더니 정리하는 대로 빨리 오래
내가 일하는 직종이 그 나라에선 굉장히 대우가 좋더라고 (그나라에선 전문직이라서 그런가봐)
한국에선 수입이 편차가 진짜 컸거든 여긴 딱 그 중간치보다 10%정도 높은 임금을 줄 수 있대
세금이 좀 과하긴 한데 그만큼 내가 받는 거니까 복지도 좋고
거기다가 일과 관련해서 더 깊은 공부까지 도와준다니 얼마나 좋은 기회야
5시 반 칼 퇴근에 주말엔 온전한 휴일 제공이래 시발 내 인생에 휴일이라니
정말 좋은 기회라서 좋아해야 하는데 다시 이곳에 올 때 되면 영영 그 사람 못 보겠구나
진짜 영원히 안녕이겠구나 싶었어.
숙소에 와서도 처음 온 유럽인데 바깥 구경도 안 하고 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 사람 생각에 누워서 술만 퍼먹었지 맛있더라..
비행기를 타고 오는 하루 내내 그 사람 잡을까 말까 근데 너무 두려워 그 사람 보면 과거에 내가 보이고
정말 기억하기도 싫은 가난함이 보여 이런 생각들이 부딪히니까 잠을 한숨도 못 잤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집에 가서 도어록 띡띡띡 누르는데 옛날 생각이 나더라

새벽 4시에 정말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을 열면 그 사람이 웃으면서 이불 펼치면서 들어와! 한거
아침이나 학식 대신에 원룸으로 날 데려와서 밥해준 거
같이 이터널선샤인,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 진짜 몇십 번 본거
내가 일하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이 눈물 흘리면서 응급실 찾아온 거
돈이 부족했을 때 몰래 자기 용돈 아껴서 내 통장에 넣어준 거
같이 결혼을 얘기한 거 등등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딨나 싶었지
내가 열심히 한눈 안 팔고 살아 온 이유가 그 사람인데 그 사람을 내가 밀어내고 있었더라고

그 사람이 옆에 없는 난 상상이 안됐어 잡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돈을 벌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그 사람 없으면 안 된다 이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현관에 캐리어 던져놓고 차 타고 그 사람 집 기억을 더듬어서 갔다 (이때 신호위반해서 딱지 날라올듯..)
도착해서 그 사람 이름 미친 듯이 불렀어 잠시만 얘기하자고 막 부르니까
어떤 아주머니 내려오시더니 2층 아가씨 외국 갈 거라고 며칠 전에 이미 방 정리 다했대
그 얘기를 듣는데 그 사람이 걸어가면서 너 한 번만 더 밀어내면 나 못 본다 이랬거든 그 생각 나면서
머리가 띵하더라 난 욕하는 거 싫어해서 욕을 안 하는데 그때만큼은 내가 너무 병신같아서 진짜 육성으로 씨발 외쳐버렸어

침착하고 그 사람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바보 같은 난 너무 급하게 나온다고 가방에다가 전화기 넣어놓고 왔나 봐
병신 병신이라면서 막 자책하다가
공중전화로 미친 듯이 달려가서 전화하려고 했는데 방금까지 기억나던 전화번호가 기억이 안 나 메멘토도 아니고
아마 너무 당황해서 기억이 안 났나 봐

침착하자 침착하자라면서 집에 가서 전화하면 되겠지 설마 벌써 떠났을까 하고 마음 다스리고 차 타고 가는데

만날 당시에 그 사람한테 해준 게 없는 것,
헤어질 때 그 사람 말대로 양보 한 발짝도 안한 것,
다시 나에게 다가왔을 때 정말 매몰차게 밀어낸 것  생각이 나면서
내가 병신 같고 진짜 나 자신한테 화가 나가지고 막 괴성 지르면서 핸들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면서 갔다

용량땜에 바로 이어서 올릴께요 다음이 마지막임

 

진짜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는데 주차 대충 해놓고

내가 너무 한심해서 머리통 내손으로 쥐어박으면서 병신아 병신아 이러면서 올라갔어

너무 화가 나니까 눈물이 나더라

 

급하게 문을 열었는데 현관에 던져놨던 캐리어가 없어  어 뭐야 시발 도둑인가

이러는데 현관에 여자 단화가 있더라.

심장이 쾅쾅쾅 요동치고 설마 하고 안을 슥 들여다봤는데

 

그 사람이 앉아있었어.

 

딱 보자마자 머리가 하얘지더라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멍했지 이게 꿈인가 하며 얼타고 있는데

그 사람도 날 봤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더라

나도 신발도 안 벗고 그대로 그 사람 무릎에 얼굴 박고 울었어

 

그때 깨달았지

난 그 사람에 대해 죄책감만 남았다고 스스로 를 속이며 비참했던 그 시절과 함께 이 사람을 밀어냈지만

진심은 이 사람을 정말 뼛속까지 사랑했구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는구나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때 내가 좀 더 이해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나랑 결혼한다며 나 좀 밀어내지 마라 라는거야

나도 너 없이 못 산다고 내가 양보했어야 하는데 너무 미안하다고 서로 붙잡고 울었어

 

그렇게 우린 헤어지고 근 3년을 서로를 못 잊고 방황하다가 제자리를 찾게 됐어

 

진정하고 얘기 도중 그 사람 공부하러 가는 곳이 내가 일하러 갈 곳 바로 옆 나라로 가게 됐단 걸 알았지

꼭 우리 헤어지지 말라고 하늘이 도와준 것 같았음. (근데 시발 유럽이 너무 흉흉하다 무섭다)

서로 며칠만 어긋났다면 우린 다신 만날 일이 없었을 거야 일본 외주를 원래대로 갔다거나 행사 참석했다거나

취업 얘기가 3~4일씩 더 길어졌거나 그랬다면 말이지.

여튼 우리는 한국에서 4일 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없었어.

그래서 난 그 4일을 내가 그동안 못 해줬던 것들을 같이 하며 이 사람에게 통째로 바치기로 했어

그 시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

 

그날 당일은 그 사람이 노량진쪽에 쌀국수집 가고 싶다고 해서 먹이고

시간이 늦어서 집에서 일기장 서로 바꿔 읽어가면서 처음 만났을때부터 이야기했고

그러다가 난 그렇게 그리던 그 사람 품에서 먼저 잠들었어.

 

아침에 시끄러워서 일어나니까 벌써 그 사람이 밥을 차려놨더라고

밥 먹으면서 그 사람한테 뭐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니까

자기 머리하는 동안 뒤에서 봐줬으면 좋겠대 친구들이 자랑할 때마다 그게 참 부러웠다고 

난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 못해줬거든 여자들 미용실 머리하면 오래 걸리잖아

옛날엔 난 그 시간도 아까워서 그동안 학교에서 공부했어

그래서 미용실 따라가서  그 사람이 머리 하는 3시간넘게 다른데 눈길 잠시도 안 주고

거울 통해서 그 사람 눈만 봤지 그러니까 미용사가 남자친구분이 고객님 진짜 사랑하시나 봐요 부럽다 이러는데

이 사람이 몇 년 만에 데이트라고 화장 그렇게 신경 써서 했는데

엉엉 울기 시작하더라 화장이 점점 번져서 얼굴이 엉망이 됐는데 그것마저도 예뻤음

그 모습을 보는데 과거에  이런 사소한 것조차 못해줬나 라는 생각에

나도 눈물 참는다고 이 꽉 깨물고 천장 쳐다봤지

 

미용실에 나오고 이 사람 코트도 한 벌 사주고 싶어서 백화점에 갔어

내가 사준다니까 돈 아끼라고 필요없다고 한참을 실랑이 벌이다가 그 사람이 알겠다고

포기하고 웃으면서 여기저기 이거 어때 저거 어때 하면서 둘러보더라고

그러다가 예쁜 아이보리색 롱 코트를 고르더라 마음에 드는지 날 돌아보면서 어때 예뻐? 라고 묻는데

정말 이쁘더라 내가 입 벌리고 바라보니 활짝 웃더라고 그 웃음 다시 볼 수 있단 거에 감사했지.

그러다가 그 사람이 점원한테 가격 물어봤는데 그 사람 생각보단 비싸다고 생각했는지

머뭇머뭇 거리더니 다른데도 보고 올게요 하는 거야

그 사람한테 선물 준거라곤 핸드폰 케이스가 깨졌길래 사준 게 다고

기념일도 못 챙겨줬어.  조그마하게 케이크라도 사가면 자기는 단거 싫어해서 필요없고

기념일 챙기는거 이해가 안간대 그나마 생일 때 그사람 좋아하는거 요리 해주고 그게 다야.

세상에 기념일 챙겨주는거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냐 다 내 생각해서 한 말이지.

오히려 그 사람이 옷 같은 거 몰래 사서 내 원룸에 옷 걸어두고 그랬거든

그 생각이 나면서 미안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이제서야 좀 연인 같아지니까

그걸 본 그 사람도 내 눈물의 의미를 알았는지 방금 전에 화장 고쳐놓고 또 울음을 터뜨렸어

다 큰 남녀가 옷사다가 말고 엉엉 우니까  점원이 당황하면서 분위기 풀려고 그랬는지

남자친구분이 가격이 너무 비싸서 우시나보다 라고 개드립을 치더라?

그거에 뚜껑 열려서 일시불로 샀는데 후회 중 3개월 할 걸

집에 와서 모르고 일시불 했다는 거 말해서 미친 거 아니냐고 혼났음..

 

나와서 뭐하고 싶었냐니까 영화보면서 같이 맛있는거 나눠먹고 싶었다고해

그땐 영화는 진짜 좋아했지만 표값도 비싸서 우린 각자 생수 한병씩 들고 들어간게 다였거든.

검색해보니까 난 닫은줄 알았는데 이터널선샤인 아직 재개봉 중이더라

가서 예매하고 뭐 먹고 싶냐니까 못고르더라구 그래서 오징어 팝콘 핫도그 다 사들고 들어갔다

어짜피 영화는 대사까지 줄줄 외우는거고 영화 내내 그사람 오구오구 먹는거만 지켜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되자마자 그사람 데리고 군산에 갔어 위에 썼던 것처럼 우린 같이 여행 가본 적이 없거든

해 질 녘 돼서 비응항 인지 비응항 인지 가서 지는 노을 바라보면서 걷는데

그때 참 왜 못 데리고 왔을까 시간을 좀 낼 걸 그러면 이리 멀리  돌아오지 않았어도 됐는데 그런 생각도 들면서

눈가가 촉촉해지더라 울리기 싫고 나도 울기 싫어서 난  태양이나 강한 빛보면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눈물 나면서  재채기가 나와 그래서 지는 노을 보면서 일부러 재채기해서 눈물 훔치고 그 사람 슥 봤는데

그 사람은 이미 눈물 흘리고 있었어.

 

근처 모텔에서 자고 일어나서 한국에서 보낼 마지막 날이라서 오늘은 뭐하고 싶으냐니까

이 사람이 돌아가신 내 아버지  묘에 가자고 하더라

내가 정말 진심으로 싫다고 땡깡 부렸는데도 무조건 가야한대

 

그래서 거의 4시간 차를 타고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버지에게 수년만에 처음 갔지.

형들이 추석 때 벌초 했는지 할아버지 할머니묘랑 아버지묘는 깔끔하게 정리 되있더라.

아버지가 피우셨던 거 담배 사서 묘에 꼽아드리고 (아버지가 할아버지 묘에 항상 그렇게 하셨어 )

그사람이 사온 과일같은거 묘앞에 올려두고 같이 절하는데

그 사람이 아버님 제가 OO이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이 사람 옆에서 보듬어 줄게요.

너무 늦게 찾아뵈서 죄송합니다

이러는데 난 아버지 묘에서 안 울 줄 알았다?

근데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들면서 진짜 내가 너무 불효 자식인것 같고 그동안에 마음속 응어리,

서울 올라와서 무시당하고 가게에서 잘때 그런 옛날생각이 복합적으로 터져서 꺽꺽거리면서 눈물나더라.

그 사람은 아무 말 안 하고 내 등에 손을 올려줬는데 이 여자는 정말 성숙한 사람이구나 란 걸 느꼈지.

그리고 1시간 정도 거리에 그 사람 어머니 모시고 있는 절이 있어서 거기 가서도 인사드렸어

그 사람은 앞에 있으니 눈물 난다면서 잠시 좀 떨어져 있고 난 인사드리면서 말했어

어머님 OO이 부족하지 않게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엥 이거 완전 울보 커플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는데

만나는 동안 각자 여기에 쓰기 너무 길 정도로 힘든 일이 많았어.

정말 우리 둘만 아는 힘든 일들 말이야.

그 시절 그 사람에게 내가,나에게 그사람이 없었으면 우린 벌써 무너졌을 거야.

그땐  금전적,시간적으로 다 여유가 없었고 참 못해줬기에 처절하게 미안했는데

그런 나를 이해하고 대부분을 포기한 그 시절 그 사람 생각에 눈물이 났고

그 사람은 미안해하는 내 마음을 온전히 다 느꼈기에 다시 만나는 4일 내내 울었던것 같아.

 

그 사람이 마음만 먹었다면 이 남자 저 남자 꼬셔가면서 여왕벌로 재미있게 학교 생활 할 수도 있었고

그중에 진짜 돈 많은 금수저에게 벌써 시집가서 명품 빽 들면서 호화롭게 살 수도 있었지

그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모든 걸 포기하고 나만 바라봐줬어.

정말 가진 건 악바리 근성 밖에 없던 날 말이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했던 금수저처럼은 누리게 해줄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조금씩 아껴가며 살면 그 사람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은 벌 수 있어.

정말 많은 걸 날 위해서 포기했던만큼 난 이제 그 사람에게 내 모든걸 줄꺼야.

 

마침내 그사람 떠날 시간이 왔어

비행기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 우리가 처음 만난 지하철 내려가는 계단으로 그 사람을 데려갔고

그리고 난 그 사람에게 청혼했어.

그 사람은 이말 듣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거냐며 눈물을 흘리면서 내 품에 안겼지.

 

그 시절부터 바래왔던 대로 우린 결혼하게 될꺼야.

 

그 사람은 내게 트라우마가 아니었어.

 

그 사람이 있었기에 그 시절 이를 악물며 버틸 수 있었고

그 사람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이만큼 성장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옆에 있을 거니까 미래를 꿈꿀 수 있지.

 

그 사람은 내 인생 그 자체야

 

 

다시 한번 절망 속에 있던 날 버티게 해주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 옆에 있어준 그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끝ㅋ

 

 

+글에서 최대한 숨겼는데 몇몇 없겠지만 친형,그리고 날 무시한 사람들, 그사람 상처준 개새끼들 친한척 니들얘기아니냐고

연락하지마 진짜 개쌍욕퍼부어버릴꺼야 조용하게 살꺼니까 그리고 날 그렇게 무시했던 사람들 좀 조언좀 구하지마

그렇게 날 무시해놓고 이제와서 술사줄께 내 얘기좀 들어줘 여기서 어떻게 나아가야될까 이딴거 묻는게 내 뇌론 이해가 안간다.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 사람이랑 일기장 바꿔가며 얘길 하다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 얘기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이란 말이 나왔어요

짐 정리하는 김에 제 일기장 보면서 쭈욱 썼네요

 

사실 그 사람 일기에 대화랑 제가 해줬던 말들이 정리가 더 잘 돼있어서 재밌는데

그사람은 쓰라고 했는데도 제 칭찬이 대부분이라 제 손으로 글쓰기가 민망해서 ?다가 삭제.

그사람 일기 제외하고 쓰니까 제가 개쌍놈이고 그사람은 부처네요. ㅎㅎ; 실제로도 부처임..

 

금수저분들이 보셨을땐 택도 없겠지만 전 저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성공을 10억 100억, 부동산, 고급 외제차 이런것처럼 물질적인 것으로 규정 지을수도 있지만

전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 그 배우자와 먹고 사는데 문제없을만큼의 돈 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쉴 틈 없이 달려와서 그런지 옛날보단 호전 되었지만 아직 건강이 안 좋아요.

외국가서는 그 사람과 함께 시간 보내면서 건강 챙기며 조금은 여유롭게 살려구요.

솜씨가 없어서 잘 못썼는데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난 나름대로 최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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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추월차선 부자들이 말해 주지 않는 진정한 부를 얻는 방법

부의 추월차선
엠제이 드마코 저 |신소영 역 |토트출판사 |2013.08.20
원제The Millionaire Fastlane
페이지 392|ISBN ISBN 안내 레이어 보기 9788994702346|판형 A5, 148*210mm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부를 일구는 방법들에 대한 수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그 것은 실제 부자들의 이야기에서부터 부자들을 인터뷰해서 내 놓은 그들의
이야기라든지 소위 성공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부류의 책들이 말이다.
그러면 그 책들은 어떠한가. 이 책과는 어떻게 다른가.
그 책들과 이 책이 다른 만큼 그 책들 서로간에도 비교하면 다르다.
내용은 같되 방법론이 다르다. 하지만 어던 책이든 그대로만 하면 정말 부자가 
될 수가 있고 성공할 수가 있으며 가치있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다. 그런데 하지 않을 뿐이다. 일반인들은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서행차선으로 가는 사람들 말이다. 난 어느쪽인가.

모처럼 책을 한 권 읽었다.그 것도 한 달씩이나 걸려서 말이다.
언젠가 2,3일만에 한 권씩 뚝딱 해치우며 책을 더 읽고 싶어서 나름의 속독법을
시전하곤 했엇는데 ㅎㅎ 이젠 웬걸.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버겁다.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어느 꼴통. 뭐 내가 보기엔 추월차선을 달린 것 같은 인간이
세금 십 몇억인가? 를 안내고 버티다가 서울 세무공무원이 집을 급습해서 수 천만원이
넘는 시계와 그림등을 압수하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는데 그 때 테이블위에 놓여져
있는 책 한권이 눈에 띄었다. 바로 이 책 "부의 추월차선"이다.
"있는 넘들도 보는 책인가? 있는 넘들이 더 하다더니,"
"헐"
"무슨 책일까?"
라는 생각들이 들어 검색을 해서 구매하게 된 책이다.

약 한 달에 걸쳐 나름 정독을 하면서 보았는데 나온 결론이다.
무척 현실적인 책이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책이다.
만약 정말 부자가 되고 싶다면 그래서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일독을 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부를 일구는 방법에 대한 기존의 책들이 부에 대한 열망을
믿음과 열정에 대하여 서술하면서 읽고 나면 주먹을 쥐게 했지만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게 했다면 이 책은 비전과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대로 한다고 해서 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필요하다. 냉정하지만 말이다.
당신이 평균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것이 신체적인 능력이든,
지적능력이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수 년 혹은 십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차적인 또 다른 능력또한 필요하다.
그 것들은 모두 평균이상의 것들이어야 한다. 
간단하고도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
은퇴하고 남은 은퇴자금을 무엇을 할 것인가? 피자집? 치킨집? 커피숍?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며 하루에 몇 명의 손님이 왔는지 검사하고 다른 경쟁가게의
메뉴는 어떤지, 평은 어떤지 하루 하루 고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추월차선을 달리는 사람은 피자집을 여는 것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시간과 
자금, 그리고 노력을 기울여 피자집 프랜차이즈를 연다. 그 것이 부의 추월차선이다.

어떤가? ㅎㅎ 자신이 없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책값이 낭비될 뿐이니 말이다.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출 수 있고 책을 읽는다면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이다.

나으생각: 사실 능력이랄 것도 없다. 하면 된다. 당장 그 문제에 맞닥트려라.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 부딪쳐온 문제들 다 해결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지구를 지키라는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하늘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
준다. 까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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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무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보는 시장이 바로 이우시장이 아닐까 한다. 국내에 판매되는

소상품들의 7,80%가 이우에서 건너왔다는 말이 들릴정도이며 세계시장의 30%라고도 하니 말이다.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아저씨들의 가방에 있는 본드며 장난감등이 바로 이우에서 온 상품이다.

이우는 우리의 이웃처럼 가까이 있다고나 할까.


광저우도 업무차로는 몇 번 다녀오지 않았지만 광저우가 의류로 유명하기에 광저우는 몇 차례 가지를

않았으나 용푸루 자동차용품시장이 있는 것처럼 광저우에도 의류뿐만 아니라 문구나 완구로 유명한

이더루시장, 인테리어용품으로 유명한 타이캉루등이 있다. 이우에는 30만가지의 상품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상품들이 있을지. 이젠 가야겠다.


이우시는 절강성 중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절강성도 항주에서 108Km 떨어진 곳으로, 면적은 1,105㎢ 상주인구 약 80만명, 유동인구 약 40만명이며 역대 최고기온 40.09℃ 역대 최저기온 -10.7℃, 연평균강수량 1,100-1,600mm의 아열대 기후 지역입니다. 이우시장은 시 전체가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중 푸텐시장은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완구류, 악세사리, 조화류, 공예품, 가방, 우산, 공구류, 부품류, 전기제품, 전동차, 주방용품, 가전제품, 통신장비, 시계, 실내용품, 선글라스, 안경, 양말, 모자, 레져스포츠 패션잡화 기타등등 30여만종의 상품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중국 이우는 소상품 시장이며, 중국에서도 가격이 가장 저렴하고 아이템 크기가 작고 상품수가 많으며 점포수가 많은(약 6만8천여개 점포-계속 증가추세임)것이 특징입니다. 세계 각지로 수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심양.청도.정주 등 대규모 도매시장으로 나가는 모든 소상품도 거의 이우에서 나간 상품들입니다. 이우시장은 재래시장에 있던 모든 점포를 한 곳으로 이주시킨 푸텐 1기, 2기 시장과, 재래시장인 소상품성, 황위앤시장, 삔왕시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재래시장인 소상품성은 주로 스카프, 양말, 모자, 내의, 벨트, 신발, 일상용품 도매시장이며, 삔왕시장은 곡물, 원단, 커튼, 이불, 수건, 옷, 넥타이, 니트, 언더웨어, 가전, 가구, 목재, 물자, 벨트, 액자시장이며, 황위앤시장은 실, 털실, 리본, 일용잡화, 신발니트, 면, 프라스틱, 벽지 도매시장입니다. 현대식 시설인 푸텐시장은 대충 둘러보는 것도 일주일이 부족할 정도로 규모가 대단히 크며, 현재 푸텐1기, 푸텐2기 시장이 완료되었고, 푸텐3기를 건설중에 있습니다. 푸탠시장은 1관은 A1구역-flower,flower accessory A2구역-hair장식품, A-3구역-축제용품.장식공예품,B-1구역 인조flwer,플러시토이, B-2구역-hair장식품, B3-장식공예품, C1구역-플러시토이, 공기주입완구,전동완구, C2-hair장식,악세사리.쥬얼리.장식공예품,D1구역-전동완구,일반완구, D-2악세사리.쥬얼리, D3-여행용품.세라믹.도자기.크리스탈.액자, E1-일반완구, E2-악세사리.쥬얼리, E3-액자. 장식용인테리어. 푸탠2관은 F구역-우비.rain 장비,가방.여행가방. 자물쇠.문고리장식.주방용품. 목욕용품.위생용품.물놀이용품.전기제품.산업용공구.가정용공구류.가전제품.자전거.오토바이.유모차, G구역-통신장비.전자제품.시계.사진장비.밧데리.램프류, H-구역-사무용품.문구류.학용품,레져스포츠용품.선글라스.안경.피혁.지퍼.의류부자재. L구역-원단.피혁등이 입주하여있습니다.
시장규모가 워낙 크고 소상품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세부적인 상품 종류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다양한 소상품, 아이디어상품 등이 있습니다.


[이우국제상무성][창춘자동차용품시장]
[악세사리시장][이우소상품]
[쪼우짜이 포장마차거리]
[상모취야시장]
[쪼우짜이 포장마차거리] 수없이 많은 포장마차와 갖가지 안주거리가 있으며, 가격이 저렴하여 부담없이 한 잔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높으며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시장이 열립니다.
[상모취야시장] 이우를 찾는 외국이면 누구나 한 번이상 꼭 들러보는 상모취 야시장, 택시를 타고 "상모취 예스" 라고 하면 택시 기사가 알아서 데려다 줍니다. 포장마차, 먹을거리, 의류.잡화.문신새겨주는곳 등등 볼거리가 많은 곳입니다. 이우시는 원래 시골이였기에 볼거리나.관광할 곳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저녁식사 끝내고 야시장이나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무료함을 달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것입니다. 


이우시장을 가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발견한 "중국소싱 노하우" 라는 책. 이 책은 중국거주 4년을 포함하여 9년간 중국을 상대로 무역업을 해 온 저자가 중국상품을 소싱하기 위한 초보자를 대상으로 중국각지의 시장안내와 함께 거래전후의 경험에 근거한 노하우와 관련 지식을 제공한하는 책이다. 약 1주일정도에 걸쳐서 일독을 한 결과 처음 중국의 시장을 접해보는 사람에게는 추천할만하다. 대부분의 초보자를 위한 책들이 추천의 평을 받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초보자를 배려하다 보니 실제 시장을 다녀본 경험이 많은 이들에게 주는 것은 적은 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심천 이외의 시장을 간접경험할 수가 있었던 점이나 저자의 중국인들과의 협상이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책이 아니고서는 접하기 어려운 귀중한 지혜가 아닐까 싶다.


중국 소싱 노하우
국내도서
저자 : 이중엽
출판 : e비즈북스 2013.04.19
상세보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3년을 중국에서 살면 조금 안다. 5년을 살면 아주 많이 안다.
10년을 살면 잘 모르겠다. 20년을 살면 정말 모르겠다는 중국. 중국을 방문하면 만나는 한국인들이나
가끔 중국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우스울 지도 모르겠다. 책의 내용은 인터넷에서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이고 더 자세한 현지내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저자가 일목요연하게 중국시장을 정리하고 상품소싱의 A부터 Z까지 안내하는
내용은 이러한 책이 아니고는 쉽게 구할 수가 없고 책이라는 결과물로 나온 만큼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가공한 고민의 산물이니 만큼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나하고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도 마찬가지이다. 그 중요성을 간파하고 빨리 행동할 수 있는 이에게 미래의 과실이 있지 않을까. 미국을 기회의 나라로 여기는 시각이 많지만 중국또한 그런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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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문정우 외 30인
출판 : 시사IN북 201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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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시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

다시 화가로 산다는 것.

다시 광주로 간다는 것.

다시 책을 펼친다는 것.

다시 ...다시, 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 기자로 살아가면서 겪는 애환과 그늘,그리고 어떤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은 그런 기자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일상, 출퇴근, 바쁜 하루 하루 뭐 이런 것들이 평소에는 나를 옭아매는 동아줄인가 싶었는데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하여 그 서클을 벗어났을때 무뎌진 사이클이 주는 적막감은 어쩜 심연의

그 것과도 같지 않을까?

 

이 책은 시사저널의 기자에서 시사인의 기자가 되기까지 사람들간의 솔직 담백하지만 않은 이야기를

진솔하고 우직하게 때론 안도의 숨을 흘러내리듯 편한 필체로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시사인이 창간기획단계에서 느꼈을 새로운 언론매체에 창간에 대한 부담과 불안. 그리고 창간후

터트렸던 굵직굵직한 이야기(신정아 인터뷰나 삼성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등)의 뒷애기들

-특히 신정아 인터뷰는 짧은 단편첩보극을 보듯 조마조마한 가슴조림과 기자들의 움직임이 생생하다-

그리고 한동안 계속 되었을 신생매체의 기자로 다시 산다는 것이 자존심과 소심함도 있었을 악이

뒷받침된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볼 때는 이제 창간 6년차로 접어들어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어쩜 책의 반가까이를 차지하는 창간당시의 배경은 시사인이 목숨과도 같은 독립언론이라는

정체성을 갖게되는 사건이자 현대 언론이 재벌에 대처하는 자세이기에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그들은 재벌을 이겼다는 것. 그 것이 팩트 아닐까.

그 사건으로 인해 시사인은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전쟁영웅의 무공훈장처럼 타 언론사가

보여주는 비굴하거나 영악한 모습이 아닌 듬직한 언론인이라는 참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시사인을 아끼는 독자(는 아니구나. 그저 인터넷으로 열독하고 있으니 독자는 독자인가)로서

지난 5년 보다 앞으로의 50년이 더욱 빛나는 시사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시사IN을 만든 사람들을 보다 보니 발견한 내 이름 석자에 더욱 흐뭇하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아쉬운점은 책 후반부에는 조금 가벼웠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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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대 벤처 CEO들이 통찰한 기회를 붙잡는 생각과 행동방식
"부의 지도가 바뀌고 비즈니스의 판이 뒤집힐 때, 반드시 그 곳에 성공의 기회가 숨어 있다."
라는 단정적이면서도 돌발적인 문구가 책의 전명에 씌여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신경제를 이끌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10여개 기업을 통하여
그들의 발자욱으로 얻을 수 있는 통념을 개는 사고(박스아웃)를 통하여
위기속에서 발견한 기회와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견하고 준비하는 자세를 배우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 세기를 돌아보면 약 10여년의 주기로 변화해 온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뜨고 지는
기업들을 발견하게 된다. 1970년대의 TV시대의 Sony 80년대의 PC의 마이크로소프트
90년대의 모토롤라, 2000년대의 구글등이 그런 기업들이 아닐까.
그럼 2010년도 후반기를 달리는 지금 이 사회는 어떤 패러다임이 사회의 변혁을 이끌고 있는 것일까.
아이폰,아이패드의 애플일까? 아니면 지난 2000년대의 구글이 연속성상에 있을 것인가.

변화속에서 그 변화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되지 않더라도 그 곳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행하는 것들에 추진력을 만들 수가 있다. 그 것이 폭발적이든 아니든 문제는 둘째이고 말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또는 그 무엇엔가 빠져 열정을 쏟아 붓더라도 그 것이 영원하지 않고 또 다른 바깥으로부터의
변화가 생긴다면 자신이 쏟아온 유무형의 것들과 현재의 것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새로운 것에 대한 부담감등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래서 삶이 고단한 것일지도 모르고 또 재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 것은 부딪혀서 맞서 싸워야 할 숙명적인 것이다.
그 숙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의 지친 어깨를 일으켜 세워 줄 것이고
다리에 힘을 넣어주며 머리엔 희망을 그려줄 것이다.
인생에 세번의 기회가 생긴다고 하지만 최근의 급격한 사회변동은 그 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준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격변기를 이루고 있다. 무엇으로 이루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그 것을 추측해 보거나 헤아려 보는 것은 잠못이루는 밤을
꿈과 희망으로 벅찬 감동을 만들어 줄 지도 모른다.

물론, 시대를 막론하고 그 것에는 기업가 정신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독일의 세계적인 경영학자인 헤르몬 지몬 교수의 말씀도 담아보자.

"기업가 정신은 국가와 시대를 초월한다.
첫째, 예술가의 정체성과 같은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
둘째, 한가지에 집중하는 전문화다.
세째, 수 십년을 내다보는 열정과 끈기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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