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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Rules

No Alchole in the Hostel, only in the Beer Garden

No smoking in the hostel only in TV area

In the morning, before work

No Vistors on the Premises unless you check them in at office first

No Drinkiing, Eating or Smoking in the vans.

Genaral Information
Bike Hire $2(leave keys as deposit) Video hire $2(leave keys as deposit)
There are Sings around the Hostel Read Them.
Shopping Runs are every Monday and Thursday at 6.15pm
Sheets-You are responsible for the washing of your own sheets.
When checking Out Please Return Fitted sheet-Top Sheet-Pillow
and Pillow Slip or $5 for such item will be charged.

Telephone
Please direct all incoming calls to (071) 511 334
(Phone Messages ONLY taken for flats)
FAX (071) 511 334 After 8am-before 8.30pm ($3.00 to send)

Mail
can be sent to this address and will be available in the pigeon holes
near the back door


Prince of Wales Backpackers
22 Princess Street
Bundaberg 4670
Queensland Australia


We will post your mail as long as you put a stamp on it.

Deposit
pots and pans are in the offise (leave keys as deposit)
If you don't clean your pot $5.00 will be charged to get your deposit back
Plates, Bowls, Cups-$1 each Knife,Fork,Spoon-50c each
(Only 1 of each item refunded when you check out)
Food Crate-10$ Lock-$2
Blankets-$10
All money deposits are refunded when you leave.

Work
Are you colour blind? You can't pick tomatoes if you are
Please ensure you provide each employer with the following:
Employmentdeclaration form (in office)
Bank details for direct credit where applicable

Tax File Number
Tax Number must be applied for
Please make sure your name is on the work roster if you want to work
If you don't get up in the morning you will lose your job.
We don't pick you up if you get the sack
if you get the sack twice
we can't guarantee you work after that
Take Food, Hat and plenty of Water when working

CHECK OUT TIME IS 10am
No Cash Refunds unless by prior arrangement
if you want to work the day you check out you must pay for another night.
Office clloses 9pm every night
The week rate has to be paid in advance
if the rent is not paid on time
the day rate will be char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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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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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다버그에는 CNS가 있다. 언젠가 그 곳을 찾아 갔을 때 드문 드문 서서 전산화된 호주 구인망을 이용해서 정보를 입수하고 그 걸 프린트 해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당시 번다버그에 도착한지 일 개월이 다 되가는 상황에서 일이 없어 애만 태우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그 곳까지 갔지만 여러 일거리들을 뒤져 봤지만 거의 장기간 일할 근무자를 찾고 있었고 또 거리가 멀기도 하고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베낭여행자나 워킹메이커가 CNS에서 일을 구하기는 힘들 것 같다. 면담을 심청해 볼 까 했지만 나의 짧은 영어는 아직까지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던 상황인지라 엄두만 내 봤다. 그렇게 실망을 안고 나오다 벽에 붙은 안내글을 보았다. 그 글을 보고 메모를 해 놓았는데,

"Accomodation and meals in exchange
   for 4 hours week per day (painting, gardening)
to north 1.5hours from Bundaberg
   takalvan st - cyber cafe around worker st. 533-388"

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반가운 마음도 있고 행여나 싶어 전화를 해 보았다. 여자가 받았고  그 여자의 말또한 오전만 일하면 나머지는 자유시간이라는 메모내용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가 있다고 하고 친구와 상의해본다음에 결정을 내리겠다며 수화기를 내렸다. 백팩으로 털레 털레 걸어오며 생각을 해 보았다. 괜찮은 조건이라 할 수도 있다. 흠. 하지만 그 것도 경제적인 뒷받침속에서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건 완전히 우프하고 하등 다를 것 없는 것이었다. 굳이 우프에 가입하지 않고도 우프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하나의 소득이라면 소득일터였다. 백팩의 일상으로 돌아와 언제나 일이 올까 기다리며 영어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는 날들.

외국친구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던 중에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들에게 일본 옆에 있는 나라라고 하면 그제서야 이해 한다. 글쎄 그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떠올리면서 어림잡아 일본 비슷한 나라 하고 생각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88올림픽을 애기해도 모르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자. 당신이 과거에 올림필을 열었던 어느 국가의 도시를 대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될 지 말이다. 10여년전의 올림픽을 열었던 도시라고 말하면 기억 할 수 있겠는가? 외국인들은 한국보다 일본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의 경제력이 문화까지 전파하고 있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호주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언젠가 뉴스에서 호주 모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제 2외국어로 채택해서 가르친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일본어는 필수 외국어에 가까운 형편이다. 들은 애기지만 어떤 집안은 가정의 모든 제품이 일제이고 그 집의 농부는 자기 자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가 제 2외국어로 채택된 경우야 대서특필될 정도지만 그 건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가
호주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 못 할 때 애기지만 호주인의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지만 글쎄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최근에 우리나라 관광산업을 많이 양성화하고 있는 입장이라 개인적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호주에 가면 퀸즐랜드는 여행자들의 힘을 빌어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돈을 다시 관광으로 쓰게 하는 절묘한 시스템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다. 백팩이나 유스호스텔이 투어 에이전시 역할을 하며 시내의 유흥가의 모든 시설들이 거미줄 같이 연결되어 있는 관광산업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같을 정도로 잘 돌아간다.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한국을 가 보았다는 영국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한국을 경유해서 일본에 갔는데 일본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인상에 대해서 그는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은 꺼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롯데월드를 가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끝이란다. 사실 동양을 찾을 정도의 여유있는 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 롯데월드나 동양최대의 워터파크라는 용인 캐러비안 베이에 오기 위해서 한국을 찾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양에는 그 보다 더욱 웅대한 놀이 공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찾는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문화,그리고 한국인의 정서를 알고 싶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충남 부여의 落花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낙화암 그 지명의 유래를 말이다. 그는 무척 놀라운 표정이었다. 3000 궁녀가 떨어졌다는 그 애기를 해 줄 때 마치 그 장면을 상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의 영어가 제대로 어필 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만으로도 그는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다. 서양인들이 들으면 믿기지 않을 그런 아름다운 애기들이 말이다. 백제시대의 "도미와 아랑의 전설", 그리고 "견우와 직녀"의 애기가 그럴 것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이유가 그런 문화적인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서양과는 다른 우리의 정적이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감동적인 이벤트 행사를 연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지금은 전국적으로 많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기에 다행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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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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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는 나의 그 짧은 영어를 성실히 들어주었고 내가 중학교 시절의 영어를 떠 올리는데도 그녀의 인내심이 큰 도움이 됐다. -이 대목은 나이 영어실력이 황이었음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언젠가 멜버른 유학생이 내일 귀국한다며 마나미에게 술 한잔 하자고 했나보다. 그 녀는 방구석 스프링 침대에 쳐 박혀 인터체인지를 읽고 있던 나에게 같이 가자고 팔을 끌었고 난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일어났다. 얼마 남지 않은 시드니기에 그냥 보내기엔 아쉬움이 남은 시간들이었다. 술이란 건 가끔 고마울 때가 있다. 그 건 질척거리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현실에서의 문제들을 희미하게 퇴색시켜 버리기도 하니 말이다. 그 날또한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고, 난 제 기분에 그만 길을 가다가 뒤로 빠져 어느 골목에 실례를 하고 말았다. 어느 집앞의 수은등은, 본 적은 없지만 어릴 적 빠져들었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씨리즈에 으례 나오는 안개 낀 영국의 거리와 흔히 동반되는 그런 칙칙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투영되는 나의 모습. 음산하기만 한 그 건 또 무엇인지, 음~ 그런데 마나미가 내 모습이 안 보이자 나를 찾다가 그 모습을 보았는데 일순 드는 당혹스럼. 하지만 더 황당했던 것은 그 날 돌아와서 그 유학생이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마나미에게 나의 그 모습을 빗대며 한국사람이 싫다는 애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은 코스포폴리탄이라고 그러면서, 겸연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고 그냥 방으로 들어와 누워 버렸다.

시드니의 밤은 쓸쓸했고 킹스크로스의 밤은 화려했다. 북적거리던 이 곳 두리하우스도 다 제 갈길을 찾아 떠났고 이제 나만이 남은 것인가. 자신만만을 펼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마나미가 웃으며 화났냐며 걱정이 되서 왔다는 것이다. 그 녀와 많은 애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는 돈도 얼마 없다. 그래서 지난 몇 일간 괴로웠지만 지금은 괜찮다. 번다버그로 가서 돈을 많이 벌 것이다 등등 나의 그 재미없는
애기를 조용히 들어주었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 후 우린 게이스트리트로 소문난 옥스포드의 밤거리를 하릴없이 같이 걸었고 30$짜리 스피커 달린 중고 카세트 (귀국하기 전까지 함께 했던)를 사기도했다. 어학공부할량으로 살 거니까 비싼 거 사지 말라며 망설이던 나에게 조언을 하던 그 녀의 모습이 당시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왔을까. 난 그녀와 조그만 항구에서 아침 산책을 하기도 하며 잠시의 여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시간은 빠르다.
왜 찍었을까??? 번다버그로 향하는 아침. 어느 정도 짐을 정리 하고 담배 한 개비를 물던 나에게 그 녀는 나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1시간쯤 뒤에 내 방으로 들어왔다. 거기에는 유카타를 입은 일본 여성이 서 있었다. 한복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주는 유카타속의 마나미는 수줍은 듯, 보여주고 싶었다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저 잘있으라고 할 뿐이었다. 한국에서 얼마전에 내려온 남자 두명과 지영이, 그리고 마나미가 전철역까지 나와 영숙을 배웅해줬다. 난 이놈의 시드니에 다시 올때는 정말 돈 때문에 걸리적 거리지는 말아야지 하며 전철에 올랐고 영숙의 짐을 들어주었다. 그 녀는 전철역에서 연결되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케언즈에 간다. 괌에서의 생활을 다 가져왔을까? 내 짐과 그 녀의 짐은 내 셔츠를 땀으로 금방 물들였다. 하기야 2년간 생홯하던 것을 정리 했으니, 영숙은 기차에 오르며 너무 고맙다며 케언즈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하지만 그 때 케언즈를 생각하기엔 너무 일렀다.

이제 혼자다. 비장하기까지 했던 그 때. 나는 지도를 보며 길을 물어 터미널을 찾았다. 베낭의 무게를 재고-마치 비행기에서 보딩체크 하듯이-예약권을 승차권으로 바꾸고 버스에 올랐다. 몇 시간쯤 걸리냐는 질문에 운전기사는 갈아타는 Brisbane까지 18시간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번다버그까지 6시간이 걸린다며 웃음을 지었다. 시드니에서의 생활을 묻어버리고 번다버그로 가는 24시간. 그 건 고독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길이었다


시드니가 끝이 났습니다. 번다버그로 향한 버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생활들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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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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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술을 너무 과히 먹었던 탓일까? 싸구려 포도주였지만 알콜 도수는 충분이 사람들을 만족하리 취기에 오르게 할 정도였다. 12도, 4리터에 약 12불정도. 참고로 호주는 포도주로도 유명하다. 관광코스 중에는 호주 포도생산 주산지견학이 있으며 포도를 직접 따는 체험이 포함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포도따는 것도 돈이 되는 가보지만 난 포도를 딴 경험은 없다. 하지만 포도를 따면 돈도 벌고 그런 관광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워터 멜론, 쯔뀌니, 에그 토마토 등 그 외도 많은 과일들을 따 봤다. 장장 4개월가까이를 농장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그 첫 시작이었던 번다버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우연한 소리에 무조건 택한 결과였다. 다이녹스라는 시내에 DYNOX서점이 있는 빌딩에서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무작정 가 보았다. 사람들에게 "아 이머 스트레인저 히얼, 아임 루깅 훠~ "를 들이밀며 길을 묻고 잘 듣지 못해 같은 길을 수 없이 물어보고 DYNOX 서점에 들어갔다. 그 곳 윗층에 있는 투어 에이전시에서 버스 티켓을 구하기 위한 내 영어의 몸부림. 흐~,"아이 워너,아임 고잉 투 고투 번다버그. 번다버그. 아이 워너 바이 더 티켓" 귀를 쫑긋이 하고 그 녀의 질문에 대답을 했고 날짜는 앞으로 5일 뒤 아침. 23일 티켓이었다. 오늘이 18일. 그레이 하운드와 맥패커씨의 장거리 노선버스중 맥패커씨가 몇 불이 더 싸서 그 걸 택했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맥패커씨가 그레이 하운드에 비해 싸다. 그리고 한 달전에 표를 끊으면 50%가 싸진다. 그리고 철마다 세일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에 표를 사면 또 50%가 싸다. 그러니 장거리 여행자는 이 버스티켓 정보를 잘 구하기 바란다. 그 건 몇 백불을 버는 거다. 요소 요소에 티켓 에이전시가 있고 그 곳에서는 투어뿐 아니라 버스,기차표등을 예약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정보를 구할 수 있다. 그렇게 버스 티켓을 구하고 다시 털레 털레 두리로 돌아오면서 본 킹스크로스 입구의 코카콜라 입간판. 코카 콜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 그냥 생각뿐이다. 콜라 한 잔에 1불이 넘는 상황에서 콜라를 먹는 다는 건 나에겐 사치!. 내가 콜라를 마시게 된 건 호주 입국 7개월째에 케언즈에서 마시게 된 것이 처음이다. 이제 모든 건 번다버그다.


이제 시드니를 즐겨보자. 10개월뒤쯤에나 호주 생활에 익숙해지면 다시 돌아오리라던 시드니를 즐겨보기로 했다. 하버 브리지를 건넜고 혼자 버스를 타고 물어 물어 어느 해변에서 담배 몇 개비를 폼나게 피기도 했고 서쿨러 키 록스라는 곳에도 가 보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근사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거나 한국에 와서도 그 곳에서의 풍경을 근사하게 떠 벌리거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없었다는 등의 시덥잖은 소리는 하지도 않았다. 그 날 저녁 나는 내 각오를 놀러 온 지영이에게 애기 했다. 정말 기쁜 듯이 말이다. 그 앞날은 어떻게 될 지모르지만 당장의 목표가 정해졌다는 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영이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취직했다고 한다. 뜨~악! 머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 그 녀는 어딜 가든지 잘 해낼 아가씨였다. 어학실력에서 비롯된 건지는 몰라도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참 이 애기를 들려주면 알 수 있으리라.

아마 이 때쯤이었을 거다. 한국에서 한 아가씨가 왔다. 여대생이었는데 나 만큼 준비성이 없다는 생각! 아니 어쩜 너무 많은 준비를 해 왔다일까? 밥통을 들고 왔다면 믿겠는가? 그리고 그 녀는 옷가방이 정말 큰 가방. 내 베낭 두개의 용량은 될 법한 가방에 하나. 그리고 내 베낭만한데에 옷이 하나였다. 그런데 보여야 할 영어책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녀가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나는 외국인과 부딪쳤고 그 녀는 피했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호주로 왔고 두리하우스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녀의 말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정말 한심스러움이었다. 그런데 지영은 부딪치면 된다며 3일간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식당이란 식당. 그리고 일거리가 있을 만한 곳을 같이 다니며 일을 주선해 주었다. 훗날 번다버그에서 그 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어느 한국인 가정의 베이비 시터로 들어갔다가 3개월뒤 귀국했다고 한다. 결국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만큼 가져간 것이었다. 그 날 저녁 새로 들어온 한국인 몇 명 그리고 마나미와 킹스크로스의 한 나이트에 놀러갔다. 일단 목표가 생기고 나니 마음껏 놀 수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 지 모를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었고 특히 마나미는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무대도 양이 안 차는 지 무대 위의 또 다른 작은 무대로 올라가 춤을 춰대는 그녀를 보고 우리들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정말 대단하군이란 생각을 하며 그 날만큼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나또한 한 막춤 하는지라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마나미가 올라오라고 할때는 스테이지 위의 좁은 공간으로 한국남자는 할땐 한다는 걸 보여준다는 치기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흔들어댔다. 그 날 옷갈아 입고 온다던 지영이 들어왔는데 후우~청바지만 입던 그녀가 짧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고 주위의 외국인들은 휘파람을 불어재꼈다. 그 녀도 처음이었던 나이트라 그랬는지 이쁘게 보이고 싶었는 지 화장을 했고 짧은 하얀 미니스커트를 입고 왔다. 그 모습을 보며 여자가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난 공연히 기분이 좋았고-어쨌든 그 날은 누구하고 싸움 붙어도 차라리 몇 대맞고 돈 벌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으니깐 (쿠~)-. 아마 내가 술에 취했나보다. 어쨌든 그 날은 너무 기분이 캡빵이었다. 조마조마 하게 보냈던 4일간을 보상받는 기분. 아니 악착같이 보상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날은 몇 시간동안을 흔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밤은 특별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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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가 가지고 간 것을 대략 말씀드리지요.
인터넷을 해 볼 양으로 노트북(486임)-두고 두고 후회하다
결국 한국으로 보냄- 과 베낭에 옷가지들 (겨울 옷까지 챙겨와서
이 것또한 보냄-호주에는 재활용이 생활화 되어 있어
우리나라 보다 훨 싼값에 옷을 마련 할 수 있답니다
)이 있었고
호주 관련책자는 자신만만 세계여행',
영어 공부는 영영사전(longman), 한영사전과 영한사전(프라임), interchange 네 권 tape 6개 (권당 두 개씩이나 마지막 권은
못 가져감-cambidge 출판), 맨투맨 기본 상,하권
(제 영어실력이 어느정도였는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죠)과
소형 카세트(AIWA)가 호주에서 보낸 10개월 내내
나의 충실한 영어 지도교사였고 동반자였습니다.
참! 왜 10개월만 보내고 왔냐고 묻는 분이 계시길래
이 기회에 말씀드리지요. 귀국하기 약 4개월 전부터
Cairns 국제 공항내의 면세점인 Down town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귀국 하기 보름전에 한국에 난리가 났다고 동료들이
걱정을 하는투로 말이 많더라구요. 신문에서도 난리가 아니고
TV에서는 뉴스시간마다 한국의 경제 환란에 대해 말이 많구요.
그래서 2개월을 더 채워서 남들에게도 말하기 좋게 1년을
딱 채울까 했지만 사실 한국이 그립기도 했고 (전 그랬답니다.
다른 제 주위 친구들도 그러더군요. 누가 호주오면 귀국할 때
귀국하기 싫다고 그랬냐고) 어짜피 갈 바에야 일찍 적응한다는
심정으로 왔지요. 그 만큼 호주에서는 한국의 사태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였지요. 호주가 한국에 적극적으로
융자 지원해준 거 기억하실 지 모르겠내요.
한국은 호주에서 두 번째 큰 교역국이었으니까요.
첫 번째는 일본이구요. 뒤에 적겠지만 호주는 일본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어느 세월에 10개월의 생활을 더듬을까 싶군요.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한도에서 답변을 할테니
급한 분은 게시판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분이 답변을 해 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출국이 확정된 분은 저에게 메일을 보내 주시면
제가 개인적으로 매일을 보내던 채팅을 하던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드리지요. 그리고 영어에 너무 겁먹지 마세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전 정말 영어엔 깜깜 무식이었답니다. 맨투맨 기본을 가져갈
정도로 말이죠. 물론 지금도 못하지만 외국인 앞에서 주눅이
안 드는 정도랄까요. 내가 말 못하면 지가 답답하지 내가
답답하냐는 여유랄 까요. 참! 그 실력에도 제가 면세점에서
한 일은 일본인을 상대로 일어로 양주나 초콜렛,담배 팔다가
호주인이 일본인을 상대하기 거북할 때(영어문제로) 제가
통역해 주는 일이었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일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면세점에서 아쉬운 대로 쓰는 극히 한정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는데 여러분은 못 할거
있겠습니까? 그럼 다시 그 때로 돌아갑니다

번다버그라고?
그 들중 나이든 사람은 썬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제프였다(주로 애칭을 부르는 게 편하다).
그리피스에서 포도를 타며 돈을 벌고 포도 철이 끝나자 위로
올라와서 시드니에서 몇 일을 보낸다음에 이제 도마토 철이
돌아오는 번다버그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들말로는 과일따기를
잘 만하면 한 달에 천 불은 쉽게 모을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돈이 당시 1100불 정도
(당시 환율은 1불에 800원이 채 안 되었음).
"그래 한 달에 1000불이면 가자. 지금 이 것저 것 가릴
게재가 아니다. 나도 가자. 번다버그. 그 날 내 일기장엔
번다버그가 또박또박 적혀졌고 멜버른에서 올라온 유학생과 나,
지영, 마나미는 그 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킹스크로스를
걷다가 장난끼 많은 썬은 나와 지영을 잠깐 따라와 보라고
해 놓고는 어덜트 샵으로 밀어놓고 나갔다. 으헉!
이상망측하면서도 신기한^.^, 마치 손가락으로 얼굴 가리고
그 틈으로 보고싶은 심리였지만 지영은 의외로 담담하게 보다가
같이 나왔다.(다음에 꼭 혼자 와서 보리라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 체 시드니를 떠나야 했다 쩝!) 우리는 퍼브에 가서
맥주를 마셨고 당구장에서 포켓볼을 쳤다. 이 나라는
사구라는 게 없다. 전부 포켓볼이다. 취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라면으로 때운 몸에다가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 지
그 날밤 꿈을 꾸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꼬대를 했는데,
그 잠꼬대가 영어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자면서도
내가 잠꼬대를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졌고
그 것이 영어였다는 것도 알았을 정도니,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음을 짐작할 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들을 보는 이를 생각하면
좀 더 멋지게 포장하고 싶기도 하고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이 글을 쓰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홈페이지가 나의 한 시대를
말할 수 있으리라는 뜻에서 일기를 써가는 의미도 있기에
기억이 자신하는 한은 사실대로 쓰고 싶다.

다음 날 지영이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 주었고 점심식사 후에
워킹 홀리데이에 협회에다시 한 번 가보자는 약속과
함께 난 두리 하우스로 돌아왔다. 마나미가 어딜 가려는 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또 그 놈의 하이를 하고 물러서려는데
마나미가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지영이는 이사를 잘 했냐고
물었고 나는 떠듬거리며 문법을 떠 올리며 단어를 꽤 맞추고
있었지만 마나미는 상당한 그 긴 시간?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내 답답함에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인터체인지를 펴고
"웨어 러유 프롬" 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면 해야 하는 것들을 외우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점심식사를 하고(항상 saving라면), 자신만만을 펴고
호주에 대해서 머리에 구겨넣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어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 얼마 뒤 지영이가 노크를 했고 그 뒤에는
멜버른 유학생이 있었다. 오다가 만났나 보다.
지영이와 내가 워킹 홀리데이 협회를 간다는 말에
그는 자기가 안내해 주겠다고 했고 나는 길을 모르고
지영은 워킹 홀리데이 협회 위치를 모르는 지라 우리는
그를 따라 전철을 처음으로 타고 시드니 시내에 나갔다.
두 세정거장 거리. "아! 거금 2달라. 드럽게 비싸군.
킹스크로스에서는 1달러면 피자가 세조각인데,
피자 6조각짜리 전철이라..." 어쨌든 그는 우리를 협회까지
안내했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다시 찾아간
워킹 홀리데이 협회. 하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정말 nothing이였다. 한국에서도 협회에서 권유하는 학원과
홈쉐어등을 등록을 안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의 서비스가
불만족 스러웠지만 행여나 공연한 불만을 말하면
시드니 가서 도움받을 때 피곤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오는 길에 지영이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며
직접 일자리를 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쥐길 놈들을 연발하며 협회를 성토했고
번다버그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 날 밤 찾아온 썬과 제프와 함께 포도주를 사서 예의
그 일당들과 자주 찾아오는 한국사람들(그러고 보니
다 남자다)은 자리를 함께 했고 그 곳에서 '영'이 우프
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 후 그는 번다버그에서
다시 만난다). 한국에서 뿐이 아니라
이 곳에서도 우프를 더 저렴한 값에 손쉽게 가입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에게 자신이 우프 갖다와서 잘 애기
해 줄테니 꼭 건강하게 잘 있으라는 우량아 몸집의
인상좋은 사람이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중에는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3개월을 그냥 보낸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그 날 시드니 생활의 비애를 들을 수 있었고
나는 번다버그라는 이름을 각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그 들중 몇 몇 이 마나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일본여자는 쉽다?는
생각! 물론 나도 그들의 성문화에 대해서는 들어봤기에
그 녀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마나미는 내가 호주에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첫 외국인이었고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계속된 일본인과의 만남은
내가 갖고 있던 일본관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런 변화는 이 홈페이지에서도 알 수 있으리라.
몇 몇 한국인들이 그토록 두리하우스에 드나드는 이유중 하나가
마나미였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그 때까지 마나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형편조차 못되었었다. 사실 나도
두리하우스에서 인기가 좋았던 마나미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눈치로 보아 몇 몇 한국인들의 모습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았고 또 내 문장 짜맞추는 그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대화의 불편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드니에서의 3일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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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11시나 됐을까.
시드니에서 첫 날밤을 어떻게 보냈는 지 기억에 없다.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부석부석해지는 기분.
세수하고 라면에 밥 말아 먹고 킹스크로스로 향해 난 창가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영이에게 찾아갔다. 노크를 하자 문을 여는 일본 여자.
아 마나미지. 굿 모닝을 하며 미소를 만들고 머리에 정리아니
암기된 지영이 어디갔냐고 영작을 하자 그녀는 지영? 지영?
고개를 갸웃 댄다. "나하고 같이 왔던 한국여자"
그러자 그녀는 아! 하는 제스춰와 함께 아침에 나갔다고 한다.
아침에? 어딜 갔지? 나는 딱히 더 할 말도 없고 없는 게 아니라
말이 안 되니 문을 닫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영어 교재를
들척이고 있었다. 귀에 익은 한국말 소리. 앗! 반가운 마음에
나가보니 두 명의 한국남자. 그들은 어딘가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의 소개끝에 그들은 어제 저녁에
도착했으며 지금은 워킹 홀리데이 협회에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안 반가울리가 있겠는가) 그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시드니의 시내로 들어가는 첫 발걸음이었다.
얼마나 걸었는 지 모른다. 그들 영어나 내 영어나 바닥을
기고 있었고 간신히 질문을 하면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이해가 빨랐다. 그들과 대화중에 저 만치 보이는
다리가 하버 브리지라는 것도 알았고 시드니 인구가 어떻고
하는 것을 알았으니, 어쩜 이 글은 읽는 분중에는 정말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지 모른다. 어쩜 그게 당연하다.

어쨌든 그들과 함께 워킹 홀리데이 협회를 찾아가게 되었고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마자 보이는 구인광고와 쉐어광고등이
덕지덕지 붙은 게시판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여기서 일자리를
잡을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사무실 안에는 한 무리의 떼거리들이
있었고 그 들중에는 정희의 모습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물었더니 어느 호주인집에서 쉐어를 하고 있는 데 너무 좋다나
어쨌다나. 이그.. 그리고 학원은 다음 주부터 다닌다는
속 뒤집어 놓는 소리들이었다. 흠...나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냥 씩~웃음 짓고 말았지만, 곧 그들은 헤어졌고 그 것이
정희와의 마지막이다. 사무실 아가씨에게 어제 한국에서 왔다고,
이 곳에서 통장도 만들어주고 일자리도 알선해 주고
세미나같은 것(초기 체류자를 위한 안내같은 것)도 해 주냐고
-이 것들은 한국에서 협회 가입당시 안내문에 명시된 내용들이었다.
회원 혜택이라는 이름으로- 물었을 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저 사람들은 다 만들었다고, 일자리는 알선해주는 것은 아니고
단지 정보만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미나에 대해선
기억이 안난다. 단지 기억에 남는 건 너무 큰 실망과 허탈감에
황당해 했던 기억뿐. 게시판에 대해 물었을 때 그 것은
단지 한국 정보지(교차로 비슷하지만 책자 형태)가 발행되기 전날
미리 정보를 입수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좀 더 빠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일 뿐 협회에 따로 일자리가 들어오는 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가씨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에서였는지 은행에 전화를
해 주겠으니 가면 알아서 해 줄 것이라는 배려?를 해 줬다.
우리는 털레 털레 common wealth bank를 물어 물어 갔더니
은행원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여권번호와 두리하우스 주소등을
적고 통장을 만들었다. 1주일 뒤에 주소지로 보내 진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한가지를 했다는 만족감에 두리로 돌아왔다.
시드니 시내를 걸어오며 어떻게 해야 할 까라는 난감한 기분과
까짓 설마 여기서 죽기야 하겠냐라는 생각등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난 지금도 시드니는 별 기억이 없다. 물론 그 곳에서 어떤 비치와
하버 브리지를 건너고 오페라 하우스를 가고 그랬지만
기억에 남는 건 마나미함께 했던 킹스크로스에서 가까운
윌리암 스트리트와 옥스포드 스트리트뿐이다.
여기서는 내 기억에 있는 내용만 담을 것이다.
그렇게 두리로 돌아왔을때 지영이가 있었다. 지영이에게 통장을
만들었다고 하며 아까 어디 갔냐고 했을 때 그 녀는 방을 구했으며
내일 방을 옮긴다는 것이다. 맙소사!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역시 여기서는 영어가 최고다. 학교에선 공부 잘하는 놈이 최고지만
나이트에선 춤 잘추는 놈이 최고 아닌가.
그 녀는 자기도 통장을 만들어야겠다며 같이 은행에 가게 되었다.
은행원과 예의 그 유창한 대화끝에 그 녀는 신청을 마쳤고
나는 카드를 직접 은행에 가서 찾으면 더 빨리 가질 수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두리로 왔을 때 멜버른에서 왔다는 유학생을
만났다. 그는 올 해 졸업하게 되어 귀국을 앞두고 있다는 학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주 생활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말하는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거북스러울 수도 있는 자칭 cosmopolite
였지만 그런 말들이 모두 나에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는 다른 곳에서 머물고 있는데
예전에 이 곳에서 머물렀던 기억이 있어 놀러 왔다는 것이다.
그 날 밤,
우리는 그리피스(Greefith)에서 올라온 두 명의 시커먼스를
만나게 되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로 필리핀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그들이 내게 준 정보.
그 건 번다버그(Bundaberg)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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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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