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에 걸맞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가져온 기업사이다.

IMF에 수 많은 기업이 사라져갔지만 그 이전에는 정부의 미움을 받아서 사라져 간 기업도

수두룩하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매 번 뉴스에 나올 정도로 권력을 끼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었던

기업사들이 있었다. 권력의 미움을 받아서 사라진 것인지, 부실경영으로 사라진 것인지...

단순하게 볼 수 없는 기업, 율산 신선호 이야기다.

 

율산그룹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율산실업을 주축으로 한 무역중심 기업집단이다.

 

1975년 6월 17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신선호가 27세에 강동원, 최안준, 신태승, 권순우

(신태승을 제외한 4명은 광주서중, 또는 광주일고 출신이다.)등 서울대 출신과 함께 

동창생들과 함께 자본금 5백만원(100만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으로 율산실업을 세웠다.

율산그룹을 모티브로 만든 KBS드라마.

기업의 성장.

초창기에 중동붐을 타고 건축자재를 수출하면서 사세를 신장시켰다, 신선호 씨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시멘트수출로

큰 재미를 볼 수 있었던 데는 물리학박사인 맏형 은호(殷浩) 씨와 친한 사우디 왕자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고, 원기업(元企業)의 원길남(元吉男) 씨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율산이 재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신진(新進)알미늄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곧이어 금용해운(金龍海運), 동원건설(東源建設)을 잇달아 인수하고 1976년 4300만 달러,

1977년 1억6500만 달러를 수출,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했다.

1976년 회장직에 장인인 원로언론인 부완혁을 추대하면서 그룹사 모습을 갖췄다.

수출을 할 때는 기발한 방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바이어들로부터 수주 받은 물건을 수출할 때 국내에서 노는 선박을

자신들이 직업 임대해 화주가 선주를 겸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화물을 빨리 내리게 하기 위해서

화물선 선장실에 화재를 고의로 일으켜 부두에 접안해 물건을 내리게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전차상륙함을 통해 물건을 실은 트럭을 임시도로가 깔린 해안에 상륙시켜 운송을 했고, 헬기까지 동원해서

하역을 하게 했다. 물건이 하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가 항구에 계속 정착해 있다는 것은 비용이 계속

나가기 때문에 기발한 방식을 통해 물건을 빨리 하역하게 한 것이다. 마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보는 것처럼

저돌적이고 기존의 방식을 탈피한 방법들이었다. 1977년 경흥물산을 인수해 패션업에 진출하고,

동아공업, 울산엔지니어링, 호텔내장산, 율산제화,율산공업전문학교 등으로 계열사 수를 11개로 늘렸다.

이에 1978년 율산실업이 정부로부터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경기도 이천 부지는 통일그룹에 팔고,

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지를 사들여 돈을 벌었다. 1970년대 재계의 신화로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언론에서는 "재계 신데렐라의 탄생" 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기업의 몰락.

율산이 급속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율산맨들의 노력과 집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타고 급성장을 할 수가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수출업체들에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혜를 베풀었다.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오면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할 수 있도록 수출 기업에게 특혜를 주었다. 은행 대출 금리가 25%를

넘나들던 시절이었지만 수출 기업에게는 연 6% 저리로 대출해주는 관치금융의 시대였다.

율산은 이런 흐름을 꽉 잡아 저돌적으로 수출에 총력을 쏟아부었다. 당시 수출기업의 성장배경에는

이런 관치금융의 수출우대정책이 있었으며 결국 이 대출지원은 율산의 목줄을 죄었다.

1978년 박정희 정부가 8.8 투기억제조치를 단행하면서 율산그룹의 주력사업이었던 건축자재수출을 금지하면서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게 됐다. 아울러 그해 추석에는 남성 기성복 '밤빔' 판매직원들이

중앙청(현 정부서울청사)에서 선물티켓을 마구 뿌리다 청와대 사정반에 적발됐다.

여기에 3억 5천만달러 상당의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 아파트 공사 입찰마저 경쟁 업체들의 방해로

최종단계에서 무산되면서 종합상사 자격을 잃어버렸다. (당시 경쟁하던 현대건설 이명박이 앞장서서...)


 

뿐만 아니라 1979년 1월 25일,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오 2시 30분쯤 경제기획원(지금의 광화문 앞) 정문 앞에서

 

모고위기관을 사칭한 20대 괴한 3명에게 승용차로 납치당했다가 55분 만에 경부고속도로 양재 톨게이트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청와대 눈밖에 나게 됐고, (당시 경찰과 그룹측은 높은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은행직원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고 말을 맞추었으나 일개 직원의 부름에 대표가

나가냐는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얼떨결에 신선호가 사실대로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한 괴한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1979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 씨가 10년 만에 청와대를 떠나 주일대사로 나갔다.

그리고 남덕우(南悳祐) 경제기획원장과 김용환(金龍煥) 재무부장관까지 경질되어 3명의 경제팀이 교체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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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에 청와대 사정당국자에게 이상한 첩보가 날아들었다.

“신선호의 처 부정애(夫貞愛) 씨가 거액 도박을 한다. 강남에 있는 수억원대 호화주택이 그의 것이다.”

당시 청와대 사정당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우선 치안본부에 특수수사대를 편성케 하여 장악한 수사력과 국세청을 동원한 탈세조사,

그리고 은행감독원 검사원을 이용한 은행계좌 즉, 자금추적을 지휘하고, 검찰의 지원까지 받는 등

권력이 무소불위(無所不爲)였다. 즉각 수사팀이 구성되고 국세청 조사원이 투입되어 첩보내용을 중심으로

내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부정애가 도박을 한 사실도 인지된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주택도

그리 호화스럽지도 않다는 후문이다. 국세청 조사원도 이렇다 할 탈세사실을 적발하지 못했다.

어쨌든 청와대사정당국자는 율산그룹 처리에 몰두하게 된다. 이미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은행의 감리단이 파견되었고, 경영부실이 국민의 눈에 비치고 있는데 물러설 수는 없었다.

특수수사대는 3월 20일 신선호 사장을 불러 드렸다. 이에 앞서 율산그룹의 장부도 압수했으며,

융자해준 시중은행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신선호 사장을 구속수사를 함으로써 율산그룹으로부터

손을 떼게 하고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사정당국자에게 있었는지 모른다. 사정당국자에 의해서

작성된 율산사건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대책의 하나로서 신선호 사장을 구속한다는 내신이 담겨 있었다.

4월 3일.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어온 주광일, 심재윤 두 검사는 율산그룹 총수 신선호 사장을

업무상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하게 된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1975년 6월 17일 100만원의 자본금으로 율산 실업을 세운 이래 1978년 말까지 총자본금 100억원에 이르는 14개 계열회사와 37개 해외지사에 8300여명의 회사원을 거느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일반융자금, 수출융자금 해외공사선수금 등을 그룹산하 계열사에 제대로 입금시키지 않고 가지급금 형식으로 변태지출, 다른 회사를 잇달아 흡수합병, 인수하거나 증자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으로 지난 3년 동안 134차례에 걸쳐 회삿돈 15억여원을 빼돌려 회사자본금의 89%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만들었다.

또 그룹산하 회사원들의 해외출장비를 실제 지급액보다 10% 정도 많게 책정, 그 차액인 73000여 달러를 빼돌린 다음

이를 금융기관 등에 보관하거나 등록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 보관했다.’

먼저 주간조선 논설위원 김성두(金成斗) 씨가 쓴 ‘누가 율산을 욕할 것인가?’를 보자.

“원리적으로 따져 기업인이 애국애족하며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기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기업인들은 산업훈장을 타기 위해 기업 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고 수출목표달성을 위해 기업 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인이 기업하는 목적은 하나에서 열까지 돈을 벌자는데 있다. 돈벌이가 가능한 한에 있어서 수단방법의 윤리성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렇다. 당초부터 반사회적이며 비도덕적인 업종을 택해 출발하는 기업들도 우리 주변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많다.

그 ‘왕성한 기업의욕’을 사회경제의 발전을 위해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유도하고 반사회적인 해악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제도가 할 일이요, 정치권력이 담당해야 할 과제이다. 율산사건은 이 권력(權力)이 담당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얼마나 소홀히 하고 허술하게 수행해 온 것인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믿고 귀중한 국가 재산을 집중 공급한 위에 그렇게 허술하게 내맡겨 둔 것인지는 몰라도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지 기업인이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국회재무위에서 신상우(辛相佑) 위원의 발언을 보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에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한 구절 있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이나 양조장이나 빵집의 자비심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돌볼 것이라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그 나름대로의 하나의 합리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곧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부가 된다는 뜻이올시다. 때문에 이번 율산사건을 계기로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하나의 그러한 구실을 빙자해 가지고 권력만 가지면 돈을 버는 것은 막연하나마 나라의 부(富)로서 연결된다고 하는 이런 추상적인 관념만 가지고 권력의 보호 속에서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오만불손한 생각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탁은행장 홍윤섭 행장 구속…이대로 ‘꼬리자르기?’

김치열 검찰총장에 의해서 율산그룹 간부, 과다 융자한 시중은행, 이를 묵과한 여신관리당국인 은행감독원,

금융정책당국인 재무부를 비롯한 정부관계부처 등 관련자에 대한 전면수사로 확대하게 된다.

그래서 서울지검 특수부를 중심으로 수사지휘권을 확보하였고, 강달수 서울지검 제3차장 등 4명이 맡고 있는

수사본부를 보강해 7명의 검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그리고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는 윤종수 특수1부장검사를 비롯,

보강된 홍함표, 이건개, 이종찬, 이상현 검사가 파견된다.

한편 사정당국의 지휘를 받던 각 기관의 요원들도 이에 편성시켰다. 4월 12일 오후, 1주일 동안 수사를 진행한 검찰은

중간보고서를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보고 받은 대통령은 금융부조리의 진상과 실태에 대해 크게 노했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고위관계자들이 관련자들에 대한 단호한 문책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이에 재무장관은 12시에 은행집회소에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격려를 했는데, 2시에 청와대에 갔다가 5시에 돌아와

조진희(趙晉熙) 은행감독원에게 정부의 방침을 전달, 전격적으로 홍윤섭(洪允燮) 주거래 서울신탁은행장,

김정호(金正浩) 부거래 한일은행장, 홍승환(洪承煥) 제일은행장 등 3명의 사표를 전격 수리하였다.

대한민국 주식회사 사장인 대통령이 재채기하니, 재무부장관은 감기 걸리고, 하수인 은행장은 앓아눕는 격이다.

율산그룹에 대한 부정대출의 책임자를 구속한다는 방침을 굳힌 검찰은 4월 13일 오전,

상업은행장을 제외한 4개 시중은행장을 한꺼번에 소환, 12시간에 걸쳐 마라톤 심문을 했다.

누가 구속되느냐? 국민의 초유의 관심은 검찰에 모였고, 서소문 검찰청사 15층 조사실에는 불이 밤새도록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기자는 15층 입구 철문 앞 복도에서 밤을 맞고 있었다.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었던 홍함표, 이종찬, 이건개, 이상현 검사가 4개 시중은행장을 각각 맡아 심문하였다.

홍종수 부장검사와 홍함표 검사가 홍윤섭 행장을 구속하려 한다고 ‘세 홍 씨 시리즈’라고 우스갯 소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홍윤섭 행장에 대한 심문은 이상현 검사가 맡았다.

이 검사는 상업은행 출신으로 검사 중 가장 금융에 밝았다. 본래 그가 접근하는 방법은 기업분석기법이었다.

4월 14일 12시 40분. 서울신탁은행장 홍윤섭 씨는 업무상 배임혐의로, 율산그룹의 창업멤버이며

종합기획본부장인 정문수 씨를 외환관리법위반 및 업무상횡령혐의로 각각 구속하였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은행장 홍윤섭은 1978년 9월 율산그룹이 극도의 자금압박을 받아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한일은행 김정호 행장, 조흥은행 이동수 행장, 제일은행 홍승환 행장 등을 모아 구제금융회의를 열고 무담보로 특혜금융 1차 30억원, 2차 40억원, 도합 70억원을 지원해 주었다.’

그 회의과정에서 홍 행장은 율산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MOH)과 계약한 3억 달러 공사가 취소된 줄 알면서도

앞의 세 은행장에게 마치 이 사실이 있는 것 같이 이야기했고, 또 율산이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양호하다고 기만했다.”  은행에 손실을 끼쳤다는 내용은 없다. 도산을 알고도 대출해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은행장 하나를 속죄양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셈이다.

베일 속의 관치금융 그리고 율산, 종지부를 찍다

4월 27일, 국회가 폐회한지 10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재무위가 갑작스럽게 소집되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여야 총무회담이 있었고, 2일간 상임위를 개최하도록 합의하는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재무위 위원 21명 전원이, 재무위원 아닌 의원도 20명이나 출석하였다. 또 이 자리에는

재무부 장관 김원기(金元基) 씨를 비롯한 국장급 이상 전원, 국세청장 김수학(金壽鶴) 씨와 간부전원,

그리고 신병현(申秉鉉) 한은 총재와 조진희 은행감독원장이 출석하였다.

그런데 재무위 초두부터 말만 무성했지 무엇 하나 풀리는 것이 없었다. 이 사건을 정치권력의 개입에 의한

특혜부조리로 간주하여 정치문제화 시키려던 야당과 단순한 금융제도상의 모순에서 야기된 사건으로

다루려는 여당의 입장은 처음 출발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야당이 개회벽두부터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는 김원기 재무장관 외에 남덕우 전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용환 전재무장관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을 증인으로 출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도

바로 금융에 대한 권력의 개입여부를 캐기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여야의 팽팽한 주장은 증인출석을 둘러싼

문제에서부터 첫 대결을 벌였다. 김승목(金承穆) 위원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은행장 임의대로

이 막대한 돈이 대출될 수 있었는지 전 경제 팀이 국회에 나와서 증언을 해주어야 하다고 주장했다.

“이 율산 문제라고 하는 것은 성격상으로 규정짓는다면 저는 이 문제가 건국 이래 유래 없는 중대한 부정사건임과 동시에 국민적 공분을 사는 사건이다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치금융체제하에서 은행이 자율기능을 잃은 지 오래인데 이 율산에 대한 변칙금융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결과를 금융인에게만 뒤집어 씌어 가지고 금융인을 제물로 삼는 것은 정책당국자는 시정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이면을 가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은행장 뒤에서 이것을 시켜서 한 것이 있다 이거예요.”

이에 대하여 공화당의 구범모(具範模) 위원은, 율산사건의 본질은 수출주도형의 경제성장정책에 의해 빚어진 것으로

권력이 작용했거나 장관이 개입한 것이 아니라며 종합무역상사나 기업이 악용만 하려 든다면 이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제도적 허점을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급선무라고 말했다.

결국 여야의 찬반토론 끝에 이 출석요구 안은 여당의 반대로 찬성 7, 반대 12, 기권 1로 부결되고 말았다.

호남출신 일부 위원들은 질문과정에서 율산이 호남인의 기업이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냐는

항간의 오해가 있다는 것을 소개했다.

담양, 곡성, 화순 출신 신민당 고재청(高在淸) 위원의 발언내용.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정치권력의 소지관계로 인해서 그러는지 또는 세간에 말하고 있는 금융인맥상에 있어서 여기에서 그러한 비운을 맛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또한 율산기업이 많은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 전라도 기업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고 침몰 파산했다는 많은 항간의 얘기에 대해서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

한편 해남, 진도출신 민정회 임영득(任煐得) 위원.

“율산실업은 분명히 호남인의 기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이 재무위원회에서 따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 호남지역에 가면 왜 하필이면 율산실업이 얻어맞아야 되느냐 많은 종합상사들이 그러한 수출금융을 악용하고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율산만이 얻어맞아야 되느냐고 어떤 의미에서는 분개하고 있는 그런 일부의 여론이 있습니다.”

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율산금융부정사건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국회재무위는 국민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한 채 아쉬운 이틀간의 회기를 모두 끝냈다. 거액의 금융특혜이면을 샅샅이 파헤쳐보겠다던

야당의 으름장은 증인출두요구와 특별위원회의 구성요구결의안이 모두 부결돼 버림으로써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다.

율산사건에 관련된 공직자가 수백 명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제102회 제4차 국회본회의 질의 내용에 대한 답변.

한병채(韓柄寀) 의원은 율산실업에 관련해서 수뢰한 공무원 150명의 처리결과를 밝히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한 김치열(金致烈) 법무장관의 답변을 들어보자.

“국무총리에게 질의하신 사실을 제가 답변 드리게 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50명의 공무원이 수뢰했다 하는 근거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산실업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그 규모가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수사 또는 비밀계좌의 유무 각 방면의 수사를 다 했습니다.

그 결과 관련 공무원이 11명 있었습니다. 수사는 20여명이 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밝혀진 것이 11명인데

그 사람들이 받은 돈은 5만원 내지 50만원입니다. 그것이 명절에 지극히 의례적인 성격의 것으로 판단하고

공무원축정원칙에 따라서 각 해당 부서에 통보함으로써 면직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실채권과 채권보전대책은 어떠했는가?

국회재무위에서의 이용만 재무부재정차관보 브리핑내용을 들어보자.

“1979년 3월 말 현재 형태별로 본 여신현황을 말씀드리자면 대출금 597억원, 선수출환어음매입 344억원, 지급보증이 391억원 합계 1332억원입니다. 은행 측 추정으로서의 채권회수가능액은 기업체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731억원, 그리고 부동산 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10억원, 장부상의 해외자산 480억원 중에서 회수가능부분을 최대한 관리 처분하여 회수한다고 볼 때 약 24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울종합 터미널의 고가매각 추정인데 시가기준으로는 190억원이고 장기상환기준으로는

400억원 이렇게 해서 대체로 1171억원 내지 1381억원의 회수가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족채권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담보가액은 물론 재무당국이 부풀린 액수이겠지만

오늘날 대우채권 사태로 온 국민이 예금원리금 피해를 보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우량기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 홍윤섭 행장 재판결과를 보자.

서울형사지법은 1979년 8월 31일 율산그룹 부정사건과 관련, 구속 기소된 전 서울은행장 홍윤섭 씨에게

업무상배임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율산그룹의 주거래은행장이었던 홍윤섭 피고인은 율산계열기업의 재무구조가

지극히 나쁘고 사업전망이 어두워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 그룹에 여신행위를

계속해 준 것은 앞의 은행에 손해를 발생시킬 목적은 없다 하더라도 손해발생을 충분히 예견하고 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음이 인정된다’ 지적하면서 ‘이 같은 여신행위가 감독관청인 재무부의 지시에 따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은행장은 소속은행의 이익을 위해 경영해야 되고 설사 감독관청의 부당한 지시에 따랐다 해서

위법행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판시했다.

 

베일 속의 관치금융은 이렇게 젊은 기업인을 강타하고 율산을 침몰시킨 뒤 우리 곁을 떠났다.

신선호 대표는 비리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고, 계열사들은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1979년 5월 17일 서울형사지법 2백12호 법정에서 강철구판사 심리로 열린 율산그룹 부정사건 첫 공판에서 진술하는 좌로부터 전대표 신선호씨 정문수 전종합기획본부장 부완혁 전회장./사진=연합뉴스

당시 신선호 대표는 외국환관리법(1999년 폐지) 위반과 횡령죄로 구속되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신선호 대표가 

광주서중 출신이고 상기한 장인 겸 회장 부완혁 씨가 장준하의 국회의원 당선 이후 사상계의 2대 발행인을 

맡은 야당 성향의 인물이어서, 한마디로 김대중과의 커넥션이 의심되어 당시 정권이 조진 거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이와 연관해 비호남계 정재계 인사들이 많은 당시, 호남 기반의 대기업이 나오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인사들이 나섰을 거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다.

그룹 해체 이후 신선호 대표는 서울종합터미널을 지키면서 센트럴시티그룹 회장으로 기업인의

삶을 이어가다 2013년 초에 센트럴시티 의장직에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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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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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오세훈 정치 입문전.

1961년 1월 4일 서울 출생.

제33,34대 서울시장, 제38,39대 서울시장. 2021년 4월 8일~ 현직.

유년기 아버지의 부도로 인해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달동네에서 자랐으며 중학교를 다닐때까지

학비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1979년 한국외국어대학 법정학부 법학과 입학, 고대 법학과로 2한년 편입 1984년

제26회 사시합격, 1988년 사법연수원 17기 수료. 1993년 인천 경남아파트 일부세대에서 일조권 침해로 인해

주민들의 대리인으로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에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제기, 13억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성과를 만들어낸다. 당시 일조권이 헌법상 환경권으로 인정되는 최초의 판례를 만들어내며 유명세를

만들어냈고 환경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까지 만들어준다. 이후 환경운동 연합창립 참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환경위원으로 활동하는등 환경운동가로 적극활동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만들어낸다.

로가디스(1994년), 생명보험협회(1996년), 청호나이스 정수기(2004년)등 cf까지 찍기도 했으며

"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 "그 것이 알고싶다". "sbs뉴스따라잡기", "오늘과 내일"등 각종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을 맏으며 방송진행능력을 인정받기도 한다.

 

 

정치 입문.

이런 인지도를 통해 제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서울 강남구에 출마하여

59.4%의 득표율로 당선이 된다. 그가 발의한 오세훈 3법(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 정당법 개정안)은

선거공영제, 비례대표제 실시 및 지주당, 정당 후훤회 폐지가 주된 내용으로서 당시 상당히 개혁적인 법안이었고

차떼기당으로 오명을 가지고 있었던 한나라당의 이미지 쇄신에도 한 몫을 한다. 심지어 5공용퇴론을 주장하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니 그의 정치적인 사상은 보수보다는

쇄신과 개혁을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개혁적인 노선은 2006년 서울시장 당선이후 다산콜센터 설립,

인천광역시, 경기도와 협의하여 대중교통환승제 실시, 천연가스 버스교체사업도로 및 도로 물청소등의

환경정책 추진등으로 서울시민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역점적으로

추진한 한강르네상스사업에서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반포, 뚝섬, 여의도, 난지등 4개 한강공원을

문화,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특화공원으로 조성하는 1단계까지는 비교적 평가가 좋았으나

한강에 5천톤급 관광크루즈를 띄우겠다며 한강 바닥을 6m나 긁어대고 대형선착장을 지어 서해까지 연결하겠다며

서해뱃길 사업을 시작하며 비난 여론이 커지고 서울시의회가 관련예산을 깍으면서 시와 시의회가 대립하기도 한다.

경제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감사원 분석에도 불구하고 예비비까지 동원해 사업을 강행한다.

이외에도 빛좋은 개살구가 되어 버린 새빛둥둥섬등 전시성 사업에 대한 비난이 더욱 커진다. 평가가 엇갈리는

디자인 서울 사업등에도 불구하고 재임중 수해로 인해 광화문과 강남등 도심일대가 잠기면서 안전을

소홀히 했다는 비난도 받는다.

이로서 오세이돈이라는 오명이 추가된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시절부터

시작한 뉴타운 사업을 이어받았지만 집값 상승만 부추기며 투기판으로 변해 오히려 서민의 보금자리는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20005년 50여곳으로 늘리겠다고 공약했지만 취임 뒤 3차 뉴타운 10곳을

선정한 뒤 4차 뉴타운 후보지 발표를 포기하면서 막을 내린다.기존 뉴타운 정책도 휴먼타운으로 수정한 상태다.

하지만 그가 재임중 진행한 생활밀착형 정책들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좋은 성과들을 보인 정책들도 있다.

저소득층 대상으로 저축금액만큼 시가 추가적립해주는 희망플러스 통장(2007년)은 성과도 좋아서

첫 가입자의 98%가 3년 만기를 채워 서민들의 자립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학교폭력과 사교육비 부담, 학습준비물이 없는 '3무(無) 학교 만들기'에 공을 들여 1102명의 학교 보안관을

국공립 초등학교 551개교에 2명씩 배치하고 시교육청과 예산을 분담해 학습준비물을 학교에서

대신 준비해주며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밀착형 서비스보다 그가 집착했던 것은

퇴임후에도  외형적으로 남아있꼬 파급효과가 큰 대규모 토목건축 정책이었다. 물론 잘 되었을 경우이지만

잘못될 경우 두고 두고 후유증이 남음에도 많은 위정자들이 강행하는 이유는 더 큰 권력을 향한

사다리로 삼기 때문에 그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이유다. 결국 재임중 공과가 있었음에도 위험한 승부수로

인해 그의 정치인생중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상급식 조례안이 2010년 12월 1일 서울시의회를 통과를 했다. 2011년 서울시 예산 20조 6천억원중

무상급식예산 695억원이 신설된 대신에 서해빗길과 한강 예술섬 사업등 오세훈의 역점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빡돌은 오세훈 시장.

1월 10일 무상급식 전면 실시여부를 주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의회는 거부.

결국 오세훈은 주민투표를 시행하기 위하여 보수성향 16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복지포퓰리즘 추방 국민운동본부"르 동원하여 공동대표 3인에게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트표를

시행하기 위한 절차를 밟아나간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들어 놓을 길로 말이다.

8월 24일 투표일로 정해진다. 당시 투표 문구이며 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 실시

. 소득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 2011년부터, 중학교 2012년부터 전면적으로 무상급식 실시

8월 21일 오세훈 시장은 무릅을 꿇고 읍소하며 투표율이 33.3%에 미달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는 당시 한나라당과 어떤 의견 조율도 없는 본인의 똥고집이었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의 진화과정.

신의 한수였을까, 자충수였을까. 벼랑끝 전술까지 가며 퇴로없는 서울시민과의 전쟁 선포였다.

서울 시민은 주민투표 생각도 없었으나 오세훈이 각본쓰고 감독해서 개봉한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는

결국 투표율 25.7%로 마감하며오세훈은 나락행. 2011년 하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박원순 통합야권 후보가 승리, 한나라당은 홍준표 등 지도부가 총사퇴, 박근혜가 비대위원등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결국 이듬해 새누리당으루 개명. 오세훈의 나비효과였다.

 

개천을 잊은 개천용.

가난한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을 개척해 온 그의 개인사는 누구나 바람직한 자수성가의 모습으로

보여질만 하지만 그가 서울 시장이 되면서부터 자라온 개천을 잊고 빠르게 수구 기득권으로 편입되어

전형적인 가진 자의 모습으로 빠르게 과거를 세탁하는 과정은 우리가 보아온 개천용의 변화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11평형은 대각선으로 누워서 자야할 정도로 좁다"

"돈이 많은 적든 마음이 괴로우면 서민"

"부잣집 자제분들, 가난한 집 아이" 

"헬조선? 개도국서 한 달만 지나보면 금방 깨닫는 게 국민적 자부심"

"장애인이 만든 생산품의 질이 떨어지더라도 우선 구매한다"

노회찬을 거론하며 "돈 받고 스스로 목숨 끊은 분"

문재인을 향해선 "중증 치매환자 넋두리 같은 소리"

2024년 12월 14일 서울시청에서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 대한 브리핑을 한답시고 비상계엄을

촉발한 원인이 더불어민주당에 있다는 윤석열 시각을 그대로 전달.

 

국민의 힘 대선 잠룡.

그는 항상 대선이 벌어질 때마다 잠룡으로 순위권에 들었는데 결정적으로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서사가 없고 광범위한 비토세력도 없지만 그에 반하여 강력한 팬덤이 없기에 대선주자로서

부족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외에도 중앙 정치무대에서 경험이 적기에 그의 세력부재로

정당내 지지세력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명씨는 다른 글에서도 "지금 오세훈 서울시장, 홍준표 대구시장은 누구 덕에 시장이 됐느냐"며 "감옥 가기 전에는 아무 말 못 하다가, 구속되고 나니 이때다 싶어 이야기하는 것이냐. 은혜를 원수로 갚는 금수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했다.

더구나 최근 민주당에서 발의한 명태균특검이 실행이 된다면 과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명태균의 과거 발언이나 강혜경의 발언을 보았을때 전혀 근거없는 발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캐비넷에 고이 넣어둔 황금폰은 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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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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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디도 한 때 그의 유튜브 구독자였으며 그에게서 용기를 얻곤 했다.

본명 전유관

1970년 8월 21일 경상북도 경산군 출생.

정말 지지리도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경북대 지리학과 졸업후 동대학 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사학석사과정을 수료한다. 대학원 졸업후 대구에서 한국사, 사회탐구 강사를 하며 경산시 홍보대사로

활동할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크다.

그의 유튜브에서도 여러차례 밝혔는데 경산고 3학년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대입에 실패했는데

어느날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러 "어렵게 대학 보낼 돈도 모아놨는데 너희는 대학교 갈 생각을 안 하냐"라며

조용히 울었다고 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각성한 전한길은 이듬해 경북대학교 지리학과에 합격하게 된다.

80년대 철 지난 신파극인데 자신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강사에겐 이게 먹힌다.

1997년 대학원 재학중에 알바로 학원 강의를 했는데 교재, 시험문제등을 철저히 연구, 분석하여 강의 컨텐츠를

만들고 배포하였는데 수험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서 강의 시작 1년만에 대구지역에서 유명한

유신학원으로 스카웃되었다고 한다. 정말 밥먹을 시간도 아껴가면서 연구를 했는데 그런 그의 노력들은

정신차리지 못한 학원생들에게 욕을 섞어가며 공부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의외로 잘 먹혔다.

돌이켜보면 MZ세대들이 들으면 두드러기 난다는 라떼 이야기인데 그들은 공시족이었다.

공무원 채용인원이 점자 감소하고 공무원 수험시장이 불황에 접어들고 본인이 소속된 메가공무원이

누적적자를 이유로 2024년 12월 31일부로 공무원 사업을 종료하면서 강의로 얻는 수입이 크게 줄었는데

다행히 공무원 사업쪽을 넥스트스터디에서 인수를 한다. 현재는 넥스트스터디 공무원 한국사 선생님.

 

홍범도 흉상 철거에 대한 답변 회피와 예매한 스탠스.

2023년 8월 31일 전한길 온라인 카페에 어느 학생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이슈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올리자(어쩜 그의 사상에 의문을 품은 이의 글일 수도 있다.)

전한길은 댓글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에 대해서 

우린 팩트만 공부하면 된다"며 "우리 카페 기준 정치와 종교에 대한 것은 개인마다 옳고 그름이 달라 

(이야기를) 금기시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심해지자 홍범도 장군은 일관되게 훌륭한 독립군이라고 강의해 왔다며 원론적인 입장만을

이야기할 뿐, 흉상철거에 대한 답변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변.

"본인은 정치인도 아니고, 정치할 생각도 없고, 정치적으로 이해관계도 없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공무원한국사 강사로서 팩트에 근거해서 강의하고, 민감한 근현대사 단원에서는 수험생 입장들을 존중하고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늘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해왔다."

어쩌면 그의 속내를 내심 짐작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는게 학생들이 궁금한 것은 홍범도 장군의 평가가 아니라

흉상철거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정치적인 스탠스에 익숙해진 걸까?

 

차별금지법 법안 내용 왜곡과 성소수자 혐오 표현과 조장.

여기에서부터 숨겨져있던 그의 꼰대적인 기질이 드러나게 된다. 이 건 참을 수 없었을까?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남자가 ‘나는 여자다’라고 선언하면 곧바로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도 되는 것이 된다

"입대를 앞두고 남자가 여성으로 성전환하겠다고 하면 군대 안 가도 된다"

"동성애 같은 경우는 흔히 알려진 대로 에이즈 감염위험도 크고 비위생적일 수 있는데

이런 표현도 하게 되면 차별금지법에 따라 처벌받게 된다. (차별금지법이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구속할 수도 있다.

" "캐나다에서는 남자 옷을 입은 여자, 여자 옷을 입은 남자가 수업에 들어온다."

이런 택도 없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강사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읊어댄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꼰데 기질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대놓고 반감을 드러낼 수 없는 공시생들의 반응이

그에게 잘못된 사상적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생계수단이었던가? 정밍아웃.

그런 그도 비상계엄 선포직후에는 비상계엄령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국회에서 계엄 빨리 해제해달라고 가결되는 순간 감격스러웠다는 표현까지 사용을 한다.

윤석열과 김건희도 깠다.

물론 이재명 돌려까기가 있었지만,

 

그런 그가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며 수구꼴통으로 전향?을 한다. 아니다. 정밍아웃한거다.

결국 유튜브에서 정치적인 발언은 삼가한다며 자신은 한국사 강사로서 팩트만을 이야기한다던 그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데..., 그의 급발진에서 어떤 조급함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선관위 부정선거론을 그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올리게 된다. 대만처럼 수개표를 하자는 둥,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 표현을 하더니 윤석열과 수꼴들의 주장을 그대로 올리면서 그의 인지관계에

문제가있지 않나라는 의심을 사게 된다. 대한민국은 이미 제22대 국회의원 시기부터 수검표를 하고 있다.

음모론을 넘어서 윤석열을 찬양하기까지 이르는 것을 보면 아뿔싸! 내가 전한길을 잘못 봤구나라는 생각에

ㅇㅏ이구 두야! 머리를 싸매게 된다.  한 때 번디는 그가 수강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그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죽을때까지 최선을 다해보라는 둥, 환경을 탓하지 말라며 공부에 매진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유튜브를 구독하며 정주행도 했는데 결국 그는 꼰대였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고

결과도 내가 질 것이니지금 변명하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밥먹을 시간에도 시험 합격을 위해

 공부하라고 말한 그 것은 꼰대의 전형적인 라떼 레파토리였던 것이다.

 

혹자는 좁아지는 공무원시장에서 메가공무원이 넥스트스터디로 지분이 모두 넘어가기 전에 60억을 포기하고

정치적 발언을 한다고 하지만 이미 지나 12월 말에 넥스트스터디가 인수한 상태였다. 어쩌면 불안한 공무원수험시장에서

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하여 정치색을 이용하여 정치인맥이나 강성수꼴들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넥스트스터디는 지난 해 11월 설립된 신생교육업체로 직원 110명, 자본금은 500만원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본사는

서울 강남구 4층짜리 근긴생활시설 4층으로 안내가 되어 있다. 홈페이지에는 브랜드 스토리, 비전, 가치만

나와 있을뿐 전화번호등은 나내되어 있지 않다. 현재 밝혀진 바로는 "공단기"를 운영하는 에스티유니타스 출신

인사들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법인 대표인 윤훈희 대표이사는 mbc아카데미 뷰티학원을 운영하는 뷰티르샤라는

법인의 사내이사로 밝혀졌으며 뷰티르샤는 공단기 운영사 에스티유니타스의 100% 자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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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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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요안나

1996년 4월 30일 광주광역시 출생. 

2024년 9월 15일 마포구 상암동 가양대교에서 투신자살.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을 누가 꺾었을까?

 

지난해 9월 사망한 MBC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의 "직장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여전히 일기예보 방송을 진행하는 배경이 무엇일까?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인간들인데 말이다.

오씨는 2021년 MBC 공채 기상캐스터로 합격해 주목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 향년 28세로 사망했다.

고인의 사망 소식은 3개월여 만에 알려졌고, 오요안나가 생전에 사용했던 휴대폰에서

직장 내 괴롭힘 정황이 담긴 원고지 17장 분량의 문건 내용과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일부 공개돼

직장 내 괴롭힘 의혹이 불거져 있다. 논란이 불거진 이후 김가영이 MBC FM"굿모닝 FM테이입니다"에서

지난 4일 자진하차했지만 김가영 역시 지난 1일까지 일기예보를 진행했다. MBC게시판에는 당연히 이들을 보고

싶지 않다는 수 많은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MBC에서 현재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사건 당사자들이 본인들의 업무를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있어 MBC에서도 섣불리 이들의 출연을

정지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최악의 경우 MBC도 소송의 대상이 될 수가 있으며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출연을 중단시킬 경우 또 다른 탄압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어 MBC를 쬐려보고 있는 이들에게 빌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결과가

나올때까지 기다리는 상황이다.

고 오요안나의 어머니가 딸을 가장 괴롭힌 사람을 딸의 선배인 박하명 씨로 지목했다. 오요안나의 어머니는

6일자 디스패치 인터뷰에서 딸을 괴롭힌 주범이 박하명라고 주장하며 박하명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박하명은 김가영과 달리 그동안 가해자로 지목받지 않은 인물이다. 오요안나의 모친과 삼촌은

디스패치와의 인터뷰에서 오요안나가 박하명 대신 '뉴스투데이'를 맡으면서 박하명의 괴롭힘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유족 증언에 따르면 박하명은 2021년 '뉴스투데이' 날씨 뉴스를 맡았으나 두 차례 방송을 펑크 내 하차했다.

MBC 과학기상팀 팀장이 박하명 대신 오요안나를 투입했다. 이후 박하명은 오요안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오요안나 어머니는 딸이 어느 날 통화에서 박하명가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한다면서 “엄마, 나 미칠 것 같아”라고 말하며

통곡했다고 전했다. 오요안나 유족은 박하명이 오요안나의 실력과 발음을 끊임없이 지적했다고 했다.

실제로 일부 매체에 보도된 MBC 기상캐스터 단톡방에서 박하명은 고인의 실력을 폄하하는 글들을 남긴 것으로 드러났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에 대한 따돌림은 고인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면서 더 본격화했다고 한다.
해당 시점 이후 MBC 기상캐스터들이 동기 금채림을 제외한 기상캐스터 4명으로 구성된 단톡방을 따로 만들었으며
단톡방에 "냄새 난다" 등의 글을 올리며 고인을 비하했다. 유족은 오요안나가 박하명의 지적과 선배들의 냉대를
극복하려고 2023년 아나운서 학원 강사를 찾아가 1대 1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선배들로부터
정받진 못했다고 밝혔다. 오요안나 어머니는 딸이 선배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계속해서 노력했지만
선배들은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제자리였다고 했다.

그는 박하명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프리랜서인 기상캐스터들이

잘리길 바라진 않는다고 했다. 한편 박하명은 SNS 댓글창을 폐쇄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하명은 2018년 7월 MBC 기상캐스터 공채에 합격해 입사했으며, 입사 동기는 최아리, 김가영이다.

박하명은 현재 MBC 보도국 과학기상팀 소속으로, MBC 뉴스투데이와 930 MBC 뉴스에서 활약 중으로

6일 날씨 뉴스에도 등장해 일기예보를 진행했다. 유족이 유일하게 민사소송을 제기한 인물이다.

고 오요안나 괴롭힘의 핵심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박하명 그뇬 어떤 인간일까?

박하명 인스타그램.


명상을 어떻게 했는지??? 외모보다 인성이 훌륭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말을 들어보니 외모가 역시? 자뻑원탑!

싸이감성이냐? 중2감성이냐.

 

김가영

1989년 5월 14일 서울. 숙명여대 무용과.

2018년 7월 기상캐스터 공채합격, 동기로 박하명, 최아리가 있다.

2021년 1월, 방송인 장성규등이 소속된 JTBC스튜디오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그래서 그런가? 장성규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오요안나가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장성규에게

자기는 기상팀에서 회사에서 혼자라고 토로했는데 이 발언이 장성규와 함께 아침방송을 하던

김가영에게 전달되고 다시 이현승에게 전달, 미XX.이라고 함.

또한 장성규는 김가영이 "오빠 걔 거짓말 하는애야. 애 XXX없어" 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그 것을 오요안나에게 그대로 전달함. 대가리가???

사건 발생후 가장 먼저 가해자로 지목을 받았는데 유가족이 “진짜 악마는 이현승, 김가영”이라며, 

“박하명, 최아리는 대놓고 괴롭혔지만 이현승, 김가영은 뒤에서 몰래 괴롭혔다” 는 증언을 했다.

2025년 2월 4일 MBC라디오 "굿모닝FM 테이입니다."에서 자진하차.

본인이 출연한 유튜브 콘텐츠 "영한 리뷰" 추가 회차공개 보류.

2025년 2월 6일부로 파주시 홍보대사에서 해촉.

2월 8일 유족측은 김가영은 직접 가해자가 아니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대상도 아니며

방관자로서 가해자로 오해받는 상황을 우려한다고 유족을 대리하는 전상범 변호사는

전했다.용서를 구하면 유족은 마음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생각해 보면

박하명은 도대체 어느정도로 괴롭혔기에 유일한 민사소송 대상이 되었을까.

그렇다고 방관자라고 해서 아무죄가 없다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충분히 동기로서 중재를

할 수가 있고 잘못된 태도를 충고할 수 있어야 하며 왕따와 괴롭힘을 보고 있는 입장에서

오요안나에게 조언을 해 줄수도 있는 입장이었기에 말이다. 더욱 필요했던 때였다.

어쨌거나 다른 이들에 비하며 빠른 처세를 보인 점에서나 오히려 당해야 할 사람들이 안 당하고

유탄을 씨게 맞았다는 반응도 없지 않아 있는 편.

하지만 지난 9월 유족측이 "진짜 악마는 이현승, 김가영"이라고 밝혔고, "박하명 최아리는 대놓고 괴롭혔지만

이현승 김가영은 뒤에서 몰래 괴롭혔다"고 주장했었기에...

 

이현승. 1985년 2월 8일생.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8년 트로트가수 최현상과 결혼 아들 1명.

2010년 MBC 기상캐스터 공채 시험에 합격, 현재 MBC내 기상캐스터계의 왕고인물.

2월 2ㅣ일 스포츠조선을 통해 유가족이 실명폭로.

"진짜 악마는 이현승, 김가영"이라며 "박하명, 최아리는 대놓고 괴롭혔지만 이현승, 김가영은 뒤에서 몰래 괴롭혔다"

업계에서 선배가 저렇게 파렴치한 짓을 후배들과 했다는 건가? 참 나이 헛 먹었다.

유족측이 사건 발생이후 가장 먼저 접촉한 이로 판단됨. 

오요안나 어머니와 B 씨의 통화 녹취록도 공개됐다. 어머니는 B 씨에게 오요안나의 사망 소식을 알렸고,

B 씨는 크게 놀랐다. 고인의 어머니는 "하명이한테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우울해 가지고 죽겠다고 할 때도 많았고

알코올 중독도 약간 있었다"며 "내가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하명아 제발 좋은 데 시집가라,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 가라, 우리 요안나 힘들지 말게 해달라'라고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아시지 않나. 하명이가 우리 안나 힘들게 했던 거"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태도가 거시기했다. B 씨가 전화를 받으면서 빨대로 음료수를 쪽쪽 빨아재끼는

소리가 녹취록에 담겼다며 엄중한 상황에서 납득하기 힘든 싸가지 없는 태도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오요안나의 어머니가 딸이 생전 A 씨의 괴롭힘 때문에 힘들었다고 전했음에도,

B 씨가 "다른 힘든 일 없었나요"라고 물으며 힘들어한 다른 이유를 찾으며 출구를 찾는 모습도 보인다.

B 씨는 오요안나의 어머니가 허락했음에도 고인의 장례식장에서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B씨는 장례식장에 참석한다고 했으나 불참. 그러고 나선 유족측에서 부고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개소리 시전. 이현승과 김가영만 장례식에 불참.

나이를 헛 처먹은 좋은 예가 되겠다.

 

최아리

1989년 2월 22일 서울.한양대학교 ERICA 무용학과.

2018년 8월 20일 MBC합격.

오요안나가 유퀴즈에 나간다고 시기, 질투하며 박하명과 함께 부하처럼 부리고 괴롭혔다고 함.

퇴근한 오요안나를 직장으로 불러들이고 각종 폭언과 욕설 시전.

지금은 묵언 수행하며 MBC 기상캐스터 열일중. 그뇬 너무 뻔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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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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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3남 2녀 중 장남.

사랑제일교회 등기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전광훈의 호적상 생년월일은 1956년 3월 28일이다.

한 차례 생일을 정정한 기록이 있어 정확한 생일인지는 불명확하다.

이두초등학교 쌍호분교,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졸업후 부흥회를 찾아다니며 부흥사로 활동.

청파동의 미인가 대한신학교 4학년 1학기 때 중퇴한 후 당산동의 대한신학교(역시 미인가)야간 학부를

졸업하여 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어린시절부터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고 양, 양, 가...뭐 이랬으며

발달사항에 따르면 "체구는 크나 어리석고 수업 중 소변이 잦음", "기질이 온순한 편이며 언어가 명확치 못하다",

"온순하나 언어가 불명확하며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고 주의가 산만함", "동작이 느리고 주의력이 부족하고

학습의욕도 없음", "둔하며 활동면에 요령이 없고 미련한 짓을 할 때가 있고 장난이 심하며 학습의욕 부진" 등으로

적혀 있다.ADHD증상이 다분해 보였다. 그런데 이런 놈이 개신교계에서 온갖 분탕질은 물론이고

세력을 규합하기도 하는 것을 속수무책 당하는 기존 고인물들을 보면 개신교란 곳도 그 바닥이 참 의심스럽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1983년 사랑제일교회를 세웠고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소속 목사로 활동했다.

그는 대한신학교(현 안양대학교의 전신) 신학과를 중퇴한 뒤 교육부 비인가 신학교인 대한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편목 과정 등을 수료했지만, 일반 신학대 석사 과정과 다른 특별 과정이다.

그런 그가 그의 스승이라 불리는 금란교회 담임목사인 고 김홍도 목사를 만나면서 신도를 이용한 정치세력화에

논을 뜨게 된다. 김홍도는 전광훈이 1998년 설립한 청교도영성훈련원의 총재를 역임했다.

북에서 태어나 해방이후 월남한 김홍도는 극우성향이 강했고 2000년대 초반 각종 극우집회를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금란교회를 세계 최대 규모의 감리교회로 성장시켰다.그리고 아들에게 세습.

그의 형제들이 세운 감리교회들 역시 사이좋게 모두 자식들에게 세습된다. 2007년 6월 북핵 완전폐기와

대선음모용 남북정상회담 반대등을 촉구하는 국민대회를 열며 극우개신교계와 재향군인회등과 손을 잡는다.

이 집회엔 박근혜를 비롯한 보수정치인이 대거참석하였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휘날린 집회였다.

극우개신교 신자들에게 미국은 우리와 동등한 동맹이 아니라 고난받는 대한민국을 구원하기 위해 온 구원자다.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이고 우리나라를 구원한 나라임을 강조하는 신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 옹호집회에서 트럼프가 윤석열을 구출해 줄 것이라는 발언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미국 구원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충실한 전파자가 바로 전광훈이다. 한기총 25대 대표회장 취임식에서 그는 "미국의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와서

한 가장 위대한 사건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미국에 데려가서 박사를 받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 장로는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세웠다. 또 한미동맹도 세웠다. 그리고 또 하나가 기독교 입국론이다.

이런 4대 기준으로 국가를 운영했더니 전 세계 10대 대국이 된 것" 이라며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예수가 세운 나라다. 결단코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라는 개소리를 지껄인다. 그에 열광하는 신도들을

발 아래로 무릅꿀린 전광훈은 종교를 사유화하며 권력화하기 시작한다.

2005년 "젋은 여자 집사에게 빤스를 내려라. 한 번 자고 싶다 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입니다. 여러분~:" 이 지랄을 해도 성도들이 우뢰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받는다.

그의 거침없는 발언은 논란과 함께 입지를 키워간다. 2007년 4월 경남 마산에서 열린 청교도영성훈련원 집회에서

"올 해 12월 대선에서는 무조건 이명박을 찍어. 만약 (이 후보를 찍지 않으면)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버릴거야"

라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졌다.


10월 3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한

개천절 국민대회"에선 하나님의 나라를 왜 북한에 갖다 바치려 하느냐라며 남북정상회담을 비난했다.

반문재인 집회를 이어가며 나름 유명세를 얻었다.

그의 활동은 거침이 없다.2008년 18대 총선부터 극우개신교 정당 결성에 뛰어들었으며 기독사랑실천당은 2.59%(약 45만표)를 득표하면서원내진입 일보직전까지 갔다. 비례대표 의석에 필요한 최소득표율 3%에 0.41%(약 4만표)가 모자란 수치였다.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기독당으로 원내진출에 도전했지만 1.2%를 득표해 실패했다. 2016년 기독자유당을만들어 다시 도전했고 전국 대형교회의 측면지원으로 2.63%의 득표율로 62만표를 얻었다. 극우 개신교중최고득표율이다.

 2019년 한기총 대표회장으로 취임이후 날개를 달았을까?

"하나님. 꼼짞마 하나님. 하나님 가불면 나한테 죽어~" 까지 간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2020년 애국집회에 참석하면 전염병도 낫는다고 헛소릴 까대다가 사랑교회 코로나 집단발병에 지까지 걸리는

븅신짓을 시전하나 그의 성도의 믿음엔 아랑곳 없다. 신천지 이만희수준의 맹신도급이다.

국짐당에서 하고 싶은 말을 전광훈이 떠벌린다. 가짜뉴스가 넘실거리며 수꼴들 사이에서 논리화시킨다.

스카이데리리 같은 찌라시에서 뉴스화하면 꼴통 유튜버들이 확대재생산한다. 윤두창 귀로 들어간다.

김홍도의 기술을 배웠다. 돈과 권력을 잡는 법을 알게 되었다.

눈에 뵈는게 없는 상황이다.

이제 국짐당도 전광훈을 무시할 수가 없다. 영호남은 국짐당의 입만 바라다 봤는데 이제 국짐당은 전광훈의 입만 본다.

이랬던 홍준표다.

우리 준표가 이렇게 변했어요.

전광훈 신도들이 김재원을 최고위원으로 만들었을 정도이다.

너도 나도 눈도장찍기.

유승민이 왜 국짐당에 아직 있는지 흠...의아하다.

 

입만 열면 거짓부렁은 수구꼴통들의 종특인가?

 

전광훈 소환통보. 경찰 열일중.

3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 안보수사과는 전 목사에 대한 전담 수사팀을 꾸리고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 목사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반대 집회에서 ‘국민 저항권’을 언급하며 서울서부지법에서의 난동을

유발한 혐의(내란 선동, 소요·특수공무집행방해 등 교사)로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10여건 고발된 상태다.

서울청은 전 목사를 피의자로 입건했고, 사람제일교회 특임전도사로 알려진 인물에 대해서도

선동 등 연관성을 수사하고 있다. 앞서 경찰은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폭동이 발생한 지난달 19일 86명을

현장 검거했다. 이후 채증 영상 등을 토대로 13명의 피의자를 특정했다. 이 중 5명은 구속했고,

3명은 아직 검거하지 못해 추적 중이다. 경찰은 전 목사와 극우 유튜버 등의 선동 의혹과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등에 게시된 서부지법 사전답사 정황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다만, 검찰에 송치된 피의자 다수는 범행 혐의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배후세력, 선동 등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부지법에 난입한 사랑제일교회 특임전도사 이모 씨도 전 목사와의 연관성을

부인 중이라고 한다. 경찰은 판사나 야당 정치인을 겨냥한 협박 글에 대해서도 수사하고 있다.

현재까지 피의자 3명을 검거했고, 7명을 추적 중이다. 121건의 입건 전 조사도 진행 중이다.

 

배후가 전광훈이라는 것은 빼박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 일부 언론에서 연관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물타기 하는 중.

 

정신차리자. 흙수저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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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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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한 어린 시절: 학교에 가지 않는 소년 노동자의 산업 생활

소년 노동자로서의 이재명

이재명은 196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고,

이는 그의 평생의 약자에 대한 태도에 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소년공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장에서 청소부로, 어머니는 화장실 손님들에게

10원, 20원씩을 받는 수금원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첫 직장은 염산과 황동을 취급하는

목걸이 공장이었고, 두 번째 직장은 붕산으로 납땜을 하는 공장이었지만 사장이 밤에 도망치자 월급을 떼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공장에서는 고무 조각이 손가락에 끼였다고 합니다.

여러 공장을 돌아다니던 중 장갑 공장의 프레스 기계에 걸려 왼쪽 손목 바깥쪽 부분에 골절상을 입었지만

당시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고로 인해 나중에 6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며 2차 병역 판정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습니다.

 

학력고사 수험표

당시 작업반장이 고졸이었는데 그를 보고 본인도 고등학교를 나오면 작업반장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검정고시를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1982년 학력고사를 통해 4년 장학금을 받고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2. 어려운 가족사: 빈곤과 갈등 속에서의 성장

 

이재명의 가족력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가난과 갈등 속에서

자녀를 키워야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가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어머니는 이를 견디고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재명은 어릴 때부터 가족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는 공부보다 생계를 우선시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가족의 소중함'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공장 월급은 8만 원 정도였지만 대학교에서 생활비로 월 20만 원은 물론 입학금과

수업료 면제 혜택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사준 교복을 입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학 교복은 이재명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대학생들이 교복을 입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중고등학교에 갈 수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교복을 사주실 때는 가만히 있었어요.

알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고만 있었어요. 어쨌든 입학 당일에 교복을 입은 사람은 그뿐이었어요.

당시 공장에서 일하던 셋째 형 이재선에게 대학 입시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가족들을 설득해 대학교에서 월 수당을 나눠주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이재명에게 매달 5만 원씩을 받아 공부를 한 이후, 4년간 학비와 생활보조금을 약속받고

건국대학교 경영학과로 진학해 공인회계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재선은

결국 이재명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재명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이재명은 자신의 용돈을 쪼개면서 도와준 형에게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3. 정치에 입문한 방법: 변호사로서의 사회적 책임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이재명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변호사로서 노동자, 빈곤층,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 상담을 제공하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004년 이재명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성남시병원 설립 운동 당시 성남시민들은 국내 최초로 주민들이 발행한 조례를 18,595명의 서명을 받아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했습니다[31]. #이재명 의원은 심의 자체가 부결됐다고 밝혔지만,

조례안 심의 당시 성남시의회 자치행정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2시간여 논의 끝에

지방자치법, 지방공기업법(타당성 검토 여부 등), 각종 의료 여건 등을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

다시 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심의 중단이 선언된 후 당시 주민 대표 중 한 명으로

성남 시민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해 시위를 벌이다 주민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공공재손괴죄로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이재명의 화가 난 듯 눈물을 흘리는 표정이 매우 강렬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남시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후 2006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단 한 번의 공천으로

성남시장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결과는 전 시장인 한나라당 후보 이대엽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대엽이 성남시장을 재선하면서 많이 해먹은 거 같습니다.

이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공천을 신청했으나

예비선거에서 조성준 후보에 밀려 탈락했고, 대신 성남시 분당구 갑 선거구에 전략공천으로 출마했으나

지역구 현역 재선 의원인 한나라당 고흥길 후보에게 패배했습니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해 51.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는 55.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4. 평범한 한국인들이 이재명을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재명의 삶은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소년공으로 일하며

검정고시와 대학을 거치며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가정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줬고,

변호사와 정치인으로서 이러한 가치관을 실천해 왔습니다.

이재명의 과거 경험이 그의 정치 철학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대한민국 서민들은 그를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희망'입니다.

이재명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입니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차기 대통령 후보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성남시장 시절의 어린 시절 경험과 가족사, 혁신 정책 등을 통해 그가 왜 평범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가 성남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시행한 정책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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