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꼬맹이가 태어난 후 그 감격이 오래갔다.

첫 아이, 퇴근하고 집에 가면 웅얼 웅얼 대는 모습이 얼마나 이뻤겠는가.

기념겸, 선물겸 보험을 들었다. 흥국생명 드림재테크 저축보험과 KB플래티넘연금보험II이다.

아이가 둘이라 결국은 보험을 2개 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만기가 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적금 1년짜리도 제대로 넣지 못하던 내가 ㅎㅎ 10년간을 부었다는게 ... 뭐 사실 놀랍지는 않다.

최초의 취업이후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쪼개서 꾸역꾸역 적금이라고 넣다가 결국 해약하고 까먹었던

몇 번의 어린 시절이다. 너도그렇잖아. 그러다가 사업시작한 이후로는 깬 것은 없다. 하긴 적금은 넣지 않았고

주택부금만 십 년 가까이 넣다가 깬 적은 있다. 그냥 돈주고 사자라고 부동산재테크에 깜깜이었기에 가능한

무식함이었다. 하지만 펀드 3년짜리는 2번 만기채워서 쏠쏠했었고그러다가주식망테크

그리고 그 당시 들었던 보험이 이렇게 만기가 되었다.

 

청구시 구비서류가 복잡하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4월 1일이 만기일이라 다시 전화를 달라고 한다. 본인 확인절차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상담받기 위해서 이름, 주소, 이체 은행 물어보더니... 이 거 아닌가?

설마 그 때 되서 다시 저 청구서류 챙겨서 오라는 것은 아니겠지?

오~~~

잠깐, 이 돈을 ㅎㅎ

생각도 했지만 주식계좌를 만들어 주는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아이의 미래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믿기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보험이 2개가 더 남았다. 내 년 작은 꼬맹이 태어났을 때 넣은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얼떨결에 회사로 찾아온 보험판매원에게 넣은 것. 크... 순진했던 때다.

지금 같으면 칼일텐데...

그래도 여하튼 목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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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일간조회수는 188인데 페이지뷰는 14페이지뷰?

티스토리 일간조회수와 애드센스의 페이지뷰가 달라서 이게 무슨 일일까? 검색을 해 보았다.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라 고민을 해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티스토리 조회수.

같은 날짜로 구글 애드센스를 확인할 내용이다. 티스토리에선 188 조회수인데 구글 애드센스에선

페이지뷰가 14다. 이건 무슨 변고일까? 검색을 해 보았지만 다 뜬금없는 소리다.

그래서 해결책이 뭐냐고?

티스토리와 만든지 한 달도 안 된 워드프레스 블로그 페이지 뷰다. 놀랄노짜다.

티스토리에 글을 쓴다고 모두 구글에 검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글 메일을 확인하다가 구글 써치콘솔에서 온 메일을 확인했다.

구글 써치콘솔에서 티스토리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티스토리는 기본적으로 글을 올리면 구글에서 검색이

되는줄 알았다. 아니다. 설사 검색, 즉 색인에 등록되더라도 시간이 길다. 지금 이슈가 되는 글인데

등록이 늦어져 컨텐츠의 시한성이 상실되는 것이다. 그래서 번디는 글을 등록하면 바로 색인 요청을 한다.

써치콘솔에 로그인 하면 상단의 주소줄에 포스팅한 글주소를 입력하고 색인요청을 한다.

색인 생성이 되징 않은 컨테츠가 8천개가 넘는다. 이런...

색인이 생성되지 않았으니 이게 검색이 될 일인가. 네이버, 다음에서만 보인 것이다.

너무나 많은 글이 색인이 되지 않았다.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면 카테고리도 색인을 해 주어야 한다.

 

오늘 하루 종일 티스토리 글들을 색인 등록 요청을 했다. 결국 100개 이상을 요청했다.

너무나 많은 글이 색인이 되지 않아 구글에서 검색이 되지 않았다.

구글 애드센스로 수익을 벌겠다고 티스토리를 시작했는데 구글 노출이 되지 않아 수익이 나지 않는 번디와 같은

초보자라면 꼭 확인하기 바란다. 다른 애드센스 고수들이 말한 내용도 참고할만하겠지만 번디와 같은

초보자가 가장 많이 놓칠거라는 생각이다. 위에서도 내용이 나와 있지만 티스토리와 워드프레스를 한다면

애드센스 수익화가 목적이라면 워드프레스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이미 결과가 나와 있지 않은가. 한 달도 되지 않은 워드프레스는 구글 노출이 잘 된다.

상위 노출에 대해서는 구글 seo를 공부해야 될 일이지만 티스토리보다 훨씬 노출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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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56기 출신으로 제707특수임무단장 현직 육군대령이다.

제707이라는 이름은 아무나 쉽게 불러댈 수 있는 이름이 아닌 자부심이 있는 이름이다. 

쉽게 불러대지도 않는다. 개나소나 해병대를 부르짖는 것과는 다른 무게가 있는 이름이다.

평시에는 대테러 최정예 특수부대이지만 전시/준전시 상황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극비임무는 물론,

각종 특수작전, 특히 참수작전중 가장 극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그 창설과정에서 하나회 소속 역적 최세창이 상관인 정병주 제3대 육군특수전사령관을 불법체포하고

부관인 김오랑 소령을 사살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국가역적 전두환이 6월 항쟁때 특전사령관인

민병돈에게 유혈진압을 명령했지만 민병돈은 거부했기에 6월 항쟁이 성공하는 숨은 공신이 되기도 했다.

이런 제707부대에서 부하들을 속이면서까지 일신상의 안일만을 챙기는 특임단장이 나온 것이다.

이 배신감은 어찌할꼬?

시작은 폼 났다. 윤석열의 개뻘짓 123내란으로 가뜩이나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나라를 나락으로

보내는 과정을 정리하나 싶었다. 김현태는 국민적인 분노가 극에 달했던 12월 9일 아침,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와 707특임단은 김용현 장관에게 이용당한 피해자"

라며 "부대원들은 죄가 없는 만큼 선처해달라"고 말하며 "(본인이) 군을 떠나겠다." 라고 말했으나.

2025년 2월 6일 오전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6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은 곽종근 특전사령관에게 국회를 봉쇄하고 건물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도착해보니 예상 외로 

시민 등 인원이 너무 많아 봉쇄, 확보가 안된다고 보고하자 테이저건과 공포탄[5] 사용 가능하냐는 

연락을 받았는데 제한된다고 답변, 이후 비상계엄 해제안이 가결되기 전 "(윗선에서 국회의원) 150명 넘으면 

안 된다는데 들어갈 수 있겠냐"와 가결 10여분 전 단전 지시를 받았고[6], 그래서 지하 등 단전할 곳을 찾아봤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그냥 상황을 방치했다고 진술했다. 고.짓.말.

 

철수도 대통령 지시는 받은 적 없고 지하 1층에 있는데 새벽 1시 좀 지난 무렵 국회 관계자가 계엄 해제안 가결되었으니

군인들 나가라고 해서 곽 사령관에게 보고하자 곽 사령관이 철수하라고 해서 즉시 철수했다고 한다.

다만 국회 나와서 버스 타고 인원 확인하는 등 절차에 시간이 걸려 새벽 3시 6분 무렵에서야 철수하려는데,

이때 복귀하면 되냐고 묻자 계엄사령부에서 아직 승인이 없다고 해서 기다리다 3시 12분에 연락이 와

철수했다고 한다. 이 것도 고.짓. 말!

->박안수 계엄사령관도 국회청문회에서 해제안이 가결된 1시 무렵이 아닌 2시 50분~3시 무렵이 되어서야

철수 관련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참고로 이 시간까지도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에서 해제안 가결 즉시 해야

되는 계엄해제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은 상황이었고(4시 30분 되어서야 국무회의 해제안 의결.

한덕수 총리가 설득했다고 보도된 바 있다.), 2차, 3차 계엄을 준비했던 정황도 보도된 바 있다.

이 외에도 그의 거짓말은 한 두개가 아니지만 제707특수부대원이 느껴야 할 그 치욕감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지

한숨만 나온다. 자신의 상관인 곽종근 사령관까지 무시하면서 까대는 것을 볼 땐 그에게 군인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을 것 같다.

 

2025년 2월 19일, 김현태 특임단장의 이전 주장과는 달리 비상계엄 당일, 707 특수임무단의 지휘부가 

모두 참여한 텔레그램 단체대화방에서 김현태 특임단장은 의원들의 국회 본회의장 진입을 막으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한 걸로 확인됐다. 이는 앞서 2월 6일 헌재 탄핵 심판 증인으로 출석했을 당시 "의원들을 막은 게 아니라 

국회를 봉쇄하라는 지시만 받았다"는 김현태 주장과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2024년 12월 3일 밤 11시 46분, 

김현태 특임단장은 "본회의장 막는 게 우선"이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이어 "진입 시도 의원 있을 듯"이라며, 

"문 차단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입 차단 막고"라고 덧붙였다. '본회의장 의원 진입 차단'이라는 지시로 

분명하게 읽히는 내용인데, 비상계엄 당일 707특임단 대화방에선 '의원'이라고 해놓고, 헌재 증언 때는 

다른 얘기를 한 셈이다. 이에 대해 김현태는 당시 곽 사령관 지시를 공유한 것이라 이후엔 기억을 못했다고 주장했다.

헌재에서조차 자신의 발언을 부정하며 헌재 능멸.

 

이외에도 그는 문을 잠그려고 케이블 타이를 가져갔다는 둥, 실탄사용문제, 자신의 상관인 곽종근 사령관 회유설까지

유포하며 구라만 까대다가 결국 나락으로 가며 707부대원들에게 치욕적인 열패감까지 느끼게 만들며

2025년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이 철저히 망가지고 있다. 뭐 이런 색희가 707특임단장이라고... 얼척이 없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5/nwdesk/article/6689163_367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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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변호사 시절.

경북안동에서 초등학교 졸업이후 성남시로 이사한 이후 가난한 어린 시절, 지금의 장애를 갖게된 소년공,

우울증과 장애를 이겨내고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후 1986년 사법시험 합격, 1987년 사법연수원 입소후,

우연히 듣게된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에 감명을 받는다. 역시 연설의 달인이다. 흔들림 없는 삶의 철학은

원고가 필요 없다. 삶의 철학이 없는 이들은 원고를 봐야 한다.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깊이 고민하고 사색하며

물방울을 뚫는 바위와 같은 그 철학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으며 쉽게 변하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의 연설을

들을 때 번디는 저 사람이 원고를 보나 안 보나를 유심히 본다. 특히 열변을 토할때 말이다.

이재명의 연설과 권성동의 연설을 비교해 보면 당장 알 수가 있다. 뭐 거기까지 안 가도 내란수괴의 연설을 봐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원고를 보지 않고 발언하는 것은 대통령초기 도어스테핑시절과 내란범으로 전락한 후

헌법재판소에서이다. 계엄해제를 하면서도 원고를 봐야 한다. 도대체 머리가???

 

 

이재명이 유명해진 시기는 2004년 성남 시립병원 설립운동 당시 공공의료원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국내 최초로 18.595명의 서명으로 주민발의 조례를 했다. 하지만 성남시의회에서는 여러 여건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심사보류로 결정이 되었다.

2004년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가 시의회에서 ‘날치기 부결’되자 본회의장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오열하고 있다. 이재명 공공의료원 설립운동하다 野에 발목 잡혀 정치시작. “집안이 엉망이라고 흉보더라, 나쁜짓 안했다”

이에 주민대표중 한 사람으로 성남시민과 의회에서 항의하다가 주민 30여명과 연행되면 특수공무원집행방해 및

공용물건손상죄를 선고 받는다. 그는 이 시절을 회상하며 성남의료원 설립을 못한다면 내가 시장이 되어

설립을 하자며 정치를 시작하게 된 동기로 이야기한다. 이 시절, 검사사칭 공범,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처벌을 받은 일로 그의 정적들이나 안티들에게 두고 두고 먹이로 까이는 일이 생긴다. 옛다 먹이.

이후 성남시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후 인천시와 광주시의 노동상담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을

하는 등 사회운동을 하며 지역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2006년 지방선걸를 즈음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단수공천으로 성남시장에 출마하나 한나라당 이대엽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당시는 열린우리당 지지율도

바닥이었고 당시 성남시는 보수색채가 강한 곳이었다. 이후 2008년 성남시 분당구 갑 선거구에 전략공천되었으나

한나라당 고흥길 후보에 밀려 낙선.

이재명 성남시장 시절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51.2%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 2014년에도 그 보다 더 높은 55.1%의

득표율로 재선에 당선된다. 심지어 부자동네로 서울이 강남에 비견되는 보수강세지역인 분당구에서도 승리한다.

그는 시장으로 당선된뒤 서민친화적이며 참신한 정책으로 시민들의 호응을 받는다.

  • 고층의 펜트하우스에 위치한 시장실을 북카페 전환, 저층 2층의 앞쪽으로 이동, CCTV설치.
  • 시립의료원 건설.(메르스 전염병 예방 음압병상 완비) https://www.kyeongin.com/article/1166573
  • 노후주택 리모델링지원
  • 무상 공공산후조리원 건설
  • 시장기준가격으로 건설공사비 입찰 서현도서관 11억원 절감
  • 10억이상 공공발주건설사업 세부내역정보 홈페이지 전국최초 공개로 공공 공사비 부풀리기 방지.
  • 성남시 모라토리엄 선언후 2013년 모라토리엄 종결.전임 이대엽 시장 6765억 부채상환.
  • 청년배당.무상 산후조리. 무상교복 지원.(성남사랑 상품권 발행으로 지역내 소비촉진)
  • 공무원 인사운영에 논술구술 평가와 SNS 평가도입으로 투명성과 효율성 재고
  • 교종합사회복지관, 판교노인복지관, 도촌종합사회복지관, 성남종합스포츠센터,
    성남국민체육센터, 논골작은도서관, 판교어린이도서관, 서현도서관 등 건립으로 삶의 질 향상.
  • 기초생활 수금 청소년에게 생리대 지원
  • 성남시 초등학교 35곳에 무료 문방구 설치(학습준비물센터)
  • 전국최초로 빈교실에 시립지역아동센터 설립(저소득 가정 방과후 돌봄)
  • 성남시 모든 초등학교 치과 주치의 도입
  • 60세~64세도 무료독감 접종 시행(국가지원은 65세 이상)
  • 매년 3,000여명 노인들에게 일거리 제공
  • 하루 3천명 이용가능한 전국 최대 규모 판교 노인종합복지관 건립
  • 성남시 모든 시내버스 공공와이파이 서비스 실시
  • 성남시 모든 시민 대상으로 자전거 보험 서비스제공
  • 분당-수서 고속화도로에 1.9Km 구간에 방음터널설치, 상부에 녹지공원 조성

이 외에도 수 많은 친서민 정책을 실행하여 성남시장 재선은 물론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되며

성남시 또한 전국적으로 유명세 및 부러움을 얻게 된다. 그가 당선된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는  민주당에 대한

지역민들의 신뢰와 기대를 갖게 되며 민주당 후보가 연이어 당선되는 이력을 만들게 된다.

박근혜 정부와의 갈등

역시 없으면 연설을 못하는 것은 물론 햄버거도 칼이 없으면 먹지 못하고 우산도 들어줘야 하는

천상 공주과인 박그네와의 전쟁이야기다.

눈물짜기 위해 눈깜박이지 않기 신공구사. 그가 언제 국민을 위해 눈물을 흘려봤을까.

청년배당. 무상 산후조리. 무상교복 지원의 무상복지 확대를 진행하며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게 되자

당시 박근혜 정부는 물론 타 자치단체, 한나라당에서 본격적인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2016년 4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지방자치단체의 가용예산을 근거로 하면서

"성남시 등의 부자 지자체의 포퓰리즘을 줄여야 한다"며 법인지방소득세의 50%를 도세로 전환하는

방안을 내놓았고 이재명은 페이스북을 통해 즉각 반발한다. 하지만 지자체 지방세에 중앙정부의 교부세까지

포함된 1인당 예산은 경기도 내에서 중간정도로 결코 높은 편이 아니었다. 당시 과천시나 동두천시의

경우 1인당 예산이 성남시의 거의 2배에 육박했다. 또한 청년배당으로 "성남사랑상품권"을 지급하자

일부가 현금깡으로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라오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해당 글 자체는 지급전에 올라온 글이라

공작성이 있지 않나 의심되기도 한다. 무상지급에 경끼는 물론 개거품을 무는 한나라당인지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공작을 한 두 번 일으킨 것도 아니지 않나.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재명이 시행하는 정책에 제대로 태클을 걸기 위해 지방재정개혁 개편안을 시행하기로 한다.

그러자 이재명은 단식투쟁에 들어가게되고 행자부에서 정부합동감사를 통해 특정된 90일간의

이재명의 일정을 제출하라며 정식공문이 아닌 스프링노트를 찢어 해당 내용을 메모한 후 팩스로 보내며

강대강으로 돌입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단식은 당시 김종인 위원장의 만류로

11일만에 종료한다.

이런 그의 업적으로 인한 정부와의 갈등은

영국의 유력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 이재명이 이끄는 성남시를

"전임 새누리당 시장이 만든 막대한 빚을 3년 6개월 만에 상환하면서도 한국 정부가 인정한 재정자립도가

높은 도시"로 소개하며 각종 정책과 시민반응을 소개하며 "박근혜 정부는 이재명의 복지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전 새누리당 대표인 김무성 의원은 "악마의 속삭임"이라 칭하였다"라며 성남시와

한국 정부간의 갈등을 집중 소개하였다.

성남시장 재임시절 공약이행률은 94.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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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디가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다.


먼저 이 말부터 해야겠다. 다로드는 쪼잔한 짓도 하고(좀 많이, 없이 살았으니까 생활이...),

지금 돌아보면 왜 그랬을까하는 이불킥 이야기등 그리고 법을 지키고 산 것만도 아니다. 말은 못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좀 내가 지은 죄를 좀 감할 수는 없을까에서 비롯되는 고해성사와 같은 반성,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양심은 있다.


중학교때 그는 이미 교과서에 나온 위인이다.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유일한 박사와 딸 유재라 여사.

 

그는 말한 것은 행동으로 보여준다. 언행일치.

 


나도 안티푸라민 주주가 되어야겠다.

어릴때 안티푸라민은 만병통치약이었다. 피가나도 바르고, 손이 삐어도 바르고, 겨울철 튼 곳에도 바르고 ... 바셀린?

 

그는 독재정부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워낙 올바른 기업가였기에 흠결이 없다. 정치자금? 뭐 그런거 없다.

다로드가 자신있게 이야기 하는데 대한민국의 어느 기업이든 삼성뿐만 아니라 MBC, KBS,조선일보 등 언론사,

중소기업이든, 다로드 회사든 세무조사하면 다 두들겨 맞는다. 털면 나온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달래 나온 말이 아니다. 기업들이 정치권에 바짝 기는거다.

정칙가 개판이면 서민들이 힘들다. 너의 삶이 힘들면 정치탓이다. 행복하면 정치에 고마워해야 한다. 정치는 생활이다.

금수저, 흙수저 탓만 할 일은 아니다. 흙수저는 인생 패배자냐? 아니다. 스스로 패배하지 말자.

그 서슬퍼런 독재정권때도 유한양행은 털어도 안 나오는 것이다. 그런 회사. 유한양행이다.

자신의 아들을 해임할 정도다. 쉽게 말해서 이 건희가 이 재용을 해임한 것이다.

국민기업 삼성? 글쎄 그 건 모르겠고 유한양행이 국민기업이다.

가정상비약이었던 안티푸라민도 정말 저렴하게 팔았다. 온 가정에 안티푸라민이 있었다.

유한공전이다. 검색해보니 유한대학교로 바뀌었다.

라면 한 봉지 20원 하던 시절에 전 재산이 이미 36억원.

그는 죽기 전 유언에서 빈손으로 돌아간다. 우리에겐 이런 기업인이 있었다.

창립이래 단 한 번의 노사분규가 없었다

상장하면 액면가의 몇 배, 몇 십배 상장이 당연시 되던 시기,

그는 국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었다.

국민들의 도움으로 유한양행이 컸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일제치하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그는 독립운동에서도 독립군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에서 톡립운동을 한 것 뿐만 아니라

나이 50세에 국내 침투를 위한 OSS(CIA전신) 냅코 작전에 참가하여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으며

무장 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이 이야기는 그의 사후 20년뒤에 밝혀진다.

그를 기업인이 아닌 박사로 호칭하는 이유가 그런건가? 돈을 벌고 기업을 키우기만 한 기업인이 아닌 것이다.

나도 뭔가 조금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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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에 걸맞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가져온 기업사이다.

IMF에 수 많은 기업이 사라져갔지만 그 이전에는 정부의 미움을 받아서 사라져 간 기업도

수두룩하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매 번 뉴스에 나올 정도로 권력을 끼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었던

기업사들이 있었다. 권력의 미움을 받아서 사라진 것인지, 부실경영으로 사라진 것인지...

단순하게 볼 수 없는 기업, 율산 신선호 이야기다.

 

율산그룹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율산실업을 주축으로 한 무역중심 기업집단이다.

 

1975년 6월 17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신선호가 27세에 강동원, 최안준, 신태승, 권순우

(신태승을 제외한 4명은 광주서중, 또는 광주일고 출신이다.)등 서울대 출신과 함께 

동창생들과 함께 자본금 5백만원(100만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으로 율산실업을 세웠다.

율산그룹을 모티브로 만든 KBS드라마.

기업의 성장.

초창기에 중동붐을 타고 건축자재를 수출하면서 사세를 신장시켰다, 신선호 씨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시멘트수출로

큰 재미를 볼 수 있었던 데는 물리학박사인 맏형 은호(殷浩) 씨와 친한 사우디 왕자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고, 원기업(元企業)의 원길남(元吉男) 씨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율산이 재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신진(新進)알미늄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곧이어 금용해운(金龍海運), 동원건설(東源建設)을 잇달아 인수하고 1976년 4300만 달러,

1977년 1억6500만 달러를 수출,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했다.

1976년 회장직에 장인인 원로언론인 부완혁을 추대하면서 그룹사 모습을 갖췄다.

수출을 할 때는 기발한 방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바이어들로부터 수주 받은 물건을 수출할 때 국내에서 노는 선박을

자신들이 직업 임대해 화주가 선주를 겸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화물을 빨리 내리게 하기 위해서

화물선 선장실에 화재를 고의로 일으켜 부두에 접안해 물건을 내리게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전차상륙함을 통해 물건을 실은 트럭을 임시도로가 깔린 해안에 상륙시켜 운송을 했고, 헬기까지 동원해서

하역을 하게 했다. 물건이 하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가 항구에 계속 정착해 있다는 것은 비용이 계속

나가기 때문에 기발한 방식을 통해 물건을 빨리 하역하게 한 것이다. 마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보는 것처럼

저돌적이고 기존의 방식을 탈피한 방법들이었다. 1977년 경흥물산을 인수해 패션업에 진출하고,

동아공업, 울산엔지니어링, 호텔내장산, 율산제화,율산공업전문학교 등으로 계열사 수를 11개로 늘렸다.

이에 1978년 율산실업이 정부로부터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경기도 이천 부지는 통일그룹에 팔고,

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지를 사들여 돈을 벌었다. 1970년대 재계의 신화로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언론에서는 "재계 신데렐라의 탄생" 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기업의 몰락.

율산이 급속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율산맨들의 노력과 집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타고 급성장을 할 수가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수출업체들에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혜를 베풀었다.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오면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할 수 있도록 수출 기업에게 특혜를 주었다. 은행 대출 금리가 25%를

넘나들던 시절이었지만 수출 기업에게는 연 6% 저리로 대출해주는 관치금융의 시대였다.

율산은 이런 흐름을 꽉 잡아 저돌적으로 수출에 총력을 쏟아부었다. 당시 수출기업의 성장배경에는

이런 관치금융의 수출우대정책이 있었으며 결국 이 대출지원은 율산의 목줄을 죄었다.

1978년 박정희 정부가 8.8 투기억제조치를 단행하면서 율산그룹의 주력사업이었던 건축자재수출을 금지하면서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게 됐다. 아울러 그해 추석에는 남성 기성복 '밤빔' 판매직원들이

중앙청(현 정부서울청사)에서 선물티켓을 마구 뿌리다 청와대 사정반에 적발됐다.

여기에 3억 5천만달러 상당의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 아파트 공사 입찰마저 경쟁 업체들의 방해로

최종단계에서 무산되면서 종합상사 자격을 잃어버렸다. (당시 경쟁하던 현대건설 이명박이 앞장서서...)


 

뿐만 아니라 1979년 1월 25일,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오 2시 30분쯤 경제기획원(지금의 광화문 앞) 정문 앞에서

 

모고위기관을 사칭한 20대 괴한 3명에게 승용차로 납치당했다가 55분 만에 경부고속도로 양재 톨게이트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청와대 눈밖에 나게 됐고, (당시 경찰과 그룹측은 높은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은행직원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고 말을 맞추었으나 일개 직원의 부름에 대표가

나가냐는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얼떨결에 신선호가 사실대로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한 괴한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1979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 씨가 10년 만에 청와대를 떠나 주일대사로 나갔다.

그리고 남덕우(南悳祐) 경제기획원장과 김용환(金龍煥) 재무부장관까지 경질되어 3명의 경제팀이 교체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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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에 청와대 사정당국자에게 이상한 첩보가 날아들었다.

“신선호의 처 부정애(夫貞愛) 씨가 거액 도박을 한다. 강남에 있는 수억원대 호화주택이 그의 것이다.”

당시 청와대 사정당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우선 치안본부에 특수수사대를 편성케 하여 장악한 수사력과 국세청을 동원한 탈세조사,

그리고 은행감독원 검사원을 이용한 은행계좌 즉, 자금추적을 지휘하고, 검찰의 지원까지 받는 등

권력이 무소불위(無所不爲)였다. 즉각 수사팀이 구성되고 국세청 조사원이 투입되어 첩보내용을 중심으로

내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부정애가 도박을 한 사실도 인지된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주택도

그리 호화스럽지도 않다는 후문이다. 국세청 조사원도 이렇다 할 탈세사실을 적발하지 못했다.

어쨌든 청와대사정당국자는 율산그룹 처리에 몰두하게 된다. 이미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은행의 감리단이 파견되었고, 경영부실이 국민의 눈에 비치고 있는데 물러설 수는 없었다.

특수수사대는 3월 20일 신선호 사장을 불러 드렸다. 이에 앞서 율산그룹의 장부도 압수했으며,

융자해준 시중은행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신선호 사장을 구속수사를 함으로써 율산그룹으로부터

손을 떼게 하고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사정당국자에게 있었는지 모른다. 사정당국자에 의해서

작성된 율산사건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대책의 하나로서 신선호 사장을 구속한다는 내신이 담겨 있었다.

4월 3일.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어온 주광일, 심재윤 두 검사는 율산그룹 총수 신선호 사장을

업무상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하게 된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1975년 6월 17일 100만원의 자본금으로 율산 실업을 세운 이래 1978년 말까지 총자본금 100억원에 이르는 14개 계열회사와 37개 해외지사에 8300여명의 회사원을 거느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일반융자금, 수출융자금 해외공사선수금 등을 그룹산하 계열사에 제대로 입금시키지 않고 가지급금 형식으로 변태지출, 다른 회사를 잇달아 흡수합병, 인수하거나 증자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으로 지난 3년 동안 134차례에 걸쳐 회삿돈 15억여원을 빼돌려 회사자본금의 89%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만들었다.

또 그룹산하 회사원들의 해외출장비를 실제 지급액보다 10% 정도 많게 책정, 그 차액인 73000여 달러를 빼돌린 다음

이를 금융기관 등에 보관하거나 등록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 보관했다.’

먼저 주간조선 논설위원 김성두(金成斗) 씨가 쓴 ‘누가 율산을 욕할 것인가?’를 보자.

“원리적으로 따져 기업인이 애국애족하며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기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기업인들은 산업훈장을 타기 위해 기업 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고 수출목표달성을 위해 기업 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인이 기업하는 목적은 하나에서 열까지 돈을 벌자는데 있다. 돈벌이가 가능한 한에 있어서 수단방법의 윤리성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렇다. 당초부터 반사회적이며 비도덕적인 업종을 택해 출발하는 기업들도 우리 주변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많다.

그 ‘왕성한 기업의욕’을 사회경제의 발전을 위해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유도하고 반사회적인 해악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제도가 할 일이요, 정치권력이 담당해야 할 과제이다. 율산사건은 이 권력(權力)이 담당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얼마나 소홀히 하고 허술하게 수행해 온 것인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믿고 귀중한 국가 재산을 집중 공급한 위에 그렇게 허술하게 내맡겨 둔 것인지는 몰라도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지 기업인이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국회재무위에서 신상우(辛相佑) 위원의 발언을 보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에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한 구절 있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이나 양조장이나 빵집의 자비심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돌볼 것이라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그 나름대로의 하나의 합리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곧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부가 된다는 뜻이올시다. 때문에 이번 율산사건을 계기로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하나의 그러한 구실을 빙자해 가지고 권력만 가지면 돈을 버는 것은 막연하나마 나라의 부(富)로서 연결된다고 하는 이런 추상적인 관념만 가지고 권력의 보호 속에서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오만불손한 생각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탁은행장 홍윤섭 행장 구속…이대로 ‘꼬리자르기?’

김치열 검찰총장에 의해서 율산그룹 간부, 과다 융자한 시중은행, 이를 묵과한 여신관리당국인 은행감독원,

금융정책당국인 재무부를 비롯한 정부관계부처 등 관련자에 대한 전면수사로 확대하게 된다.

그래서 서울지검 특수부를 중심으로 수사지휘권을 확보하였고, 강달수 서울지검 제3차장 등 4명이 맡고 있는

수사본부를 보강해 7명의 검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그리고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는 윤종수 특수1부장검사를 비롯,

보강된 홍함표, 이건개, 이종찬, 이상현 검사가 파견된다.

한편 사정당국의 지휘를 받던 각 기관의 요원들도 이에 편성시켰다. 4월 12일 오후, 1주일 동안 수사를 진행한 검찰은

중간보고서를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보고 받은 대통령은 금융부조리의 진상과 실태에 대해 크게 노했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고위관계자들이 관련자들에 대한 단호한 문책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이에 재무장관은 12시에 은행집회소에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격려를 했는데, 2시에 청와대에 갔다가 5시에 돌아와

조진희(趙晉熙) 은행감독원에게 정부의 방침을 전달, 전격적으로 홍윤섭(洪允燮) 주거래 서울신탁은행장,

김정호(金正浩) 부거래 한일은행장, 홍승환(洪承煥) 제일은행장 등 3명의 사표를 전격 수리하였다.

대한민국 주식회사 사장인 대통령이 재채기하니, 재무부장관은 감기 걸리고, 하수인 은행장은 앓아눕는 격이다.

율산그룹에 대한 부정대출의 책임자를 구속한다는 방침을 굳힌 검찰은 4월 13일 오전,

상업은행장을 제외한 4개 시중은행장을 한꺼번에 소환, 12시간에 걸쳐 마라톤 심문을 했다.

누가 구속되느냐? 국민의 초유의 관심은 검찰에 모였고, 서소문 검찰청사 15층 조사실에는 불이 밤새도록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기자는 15층 입구 철문 앞 복도에서 밤을 맞고 있었다.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었던 홍함표, 이종찬, 이건개, 이상현 검사가 4개 시중은행장을 각각 맡아 심문하였다.

홍종수 부장검사와 홍함표 검사가 홍윤섭 행장을 구속하려 한다고 ‘세 홍 씨 시리즈’라고 우스갯 소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홍윤섭 행장에 대한 심문은 이상현 검사가 맡았다.

이 검사는 상업은행 출신으로 검사 중 가장 금융에 밝았다. 본래 그가 접근하는 방법은 기업분석기법이었다.

4월 14일 12시 40분. 서울신탁은행장 홍윤섭 씨는 업무상 배임혐의로, 율산그룹의 창업멤버이며

종합기획본부장인 정문수 씨를 외환관리법위반 및 업무상횡령혐의로 각각 구속하였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은행장 홍윤섭은 1978년 9월 율산그룹이 극도의 자금압박을 받아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한일은행 김정호 행장, 조흥은행 이동수 행장, 제일은행 홍승환 행장 등을 모아 구제금융회의를 열고 무담보로 특혜금융 1차 30억원, 2차 40억원, 도합 70억원을 지원해 주었다.’

그 회의과정에서 홍 행장은 율산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MOH)과 계약한 3억 달러 공사가 취소된 줄 알면서도

앞의 세 은행장에게 마치 이 사실이 있는 것 같이 이야기했고, 또 율산이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양호하다고 기만했다.”  은행에 손실을 끼쳤다는 내용은 없다. 도산을 알고도 대출해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은행장 하나를 속죄양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셈이다.

베일 속의 관치금융 그리고 율산, 종지부를 찍다

4월 27일, 국회가 폐회한지 10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재무위가 갑작스럽게 소집되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여야 총무회담이 있었고, 2일간 상임위를 개최하도록 합의하는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재무위 위원 21명 전원이, 재무위원 아닌 의원도 20명이나 출석하였다. 또 이 자리에는

재무부 장관 김원기(金元基) 씨를 비롯한 국장급 이상 전원, 국세청장 김수학(金壽鶴) 씨와 간부전원,

그리고 신병현(申秉鉉) 한은 총재와 조진희 은행감독원장이 출석하였다.

그런데 재무위 초두부터 말만 무성했지 무엇 하나 풀리는 것이 없었다. 이 사건을 정치권력의 개입에 의한

특혜부조리로 간주하여 정치문제화 시키려던 야당과 단순한 금융제도상의 모순에서 야기된 사건으로

다루려는 여당의 입장은 처음 출발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야당이 개회벽두부터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는 김원기 재무장관 외에 남덕우 전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용환 전재무장관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을 증인으로 출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도

바로 금융에 대한 권력의 개입여부를 캐기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여야의 팽팽한 주장은 증인출석을 둘러싼

문제에서부터 첫 대결을 벌였다. 김승목(金承穆) 위원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은행장 임의대로

이 막대한 돈이 대출될 수 있었는지 전 경제 팀이 국회에 나와서 증언을 해주어야 하다고 주장했다.

“이 율산 문제라고 하는 것은 성격상으로 규정짓는다면 저는 이 문제가 건국 이래 유래 없는 중대한 부정사건임과 동시에 국민적 공분을 사는 사건이다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치금융체제하에서 은행이 자율기능을 잃은 지 오래인데 이 율산에 대한 변칙금융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결과를 금융인에게만 뒤집어 씌어 가지고 금융인을 제물로 삼는 것은 정책당국자는 시정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이면을 가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은행장 뒤에서 이것을 시켜서 한 것이 있다 이거예요.”

이에 대하여 공화당의 구범모(具範模) 위원은, 율산사건의 본질은 수출주도형의 경제성장정책에 의해 빚어진 것으로

권력이 작용했거나 장관이 개입한 것이 아니라며 종합무역상사나 기업이 악용만 하려 든다면 이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제도적 허점을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급선무라고 말했다.

결국 여야의 찬반토론 끝에 이 출석요구 안은 여당의 반대로 찬성 7, 반대 12, 기권 1로 부결되고 말았다.

호남출신 일부 위원들은 질문과정에서 율산이 호남인의 기업이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냐는

항간의 오해가 있다는 것을 소개했다.

담양, 곡성, 화순 출신 신민당 고재청(高在淸) 위원의 발언내용.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정치권력의 소지관계로 인해서 그러는지 또는 세간에 말하고 있는 금융인맥상에 있어서 여기에서 그러한 비운을 맛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또한 율산기업이 많은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 전라도 기업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고 침몰 파산했다는 많은 항간의 얘기에 대해서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

한편 해남, 진도출신 민정회 임영득(任煐得) 위원.

“율산실업은 분명히 호남인의 기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이 재무위원회에서 따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 호남지역에 가면 왜 하필이면 율산실업이 얻어맞아야 되느냐 많은 종합상사들이 그러한 수출금융을 악용하고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율산만이 얻어맞아야 되느냐고 어떤 의미에서는 분개하고 있는 그런 일부의 여론이 있습니다.”

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율산금융부정사건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국회재무위는 국민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한 채 아쉬운 이틀간의 회기를 모두 끝냈다. 거액의 금융특혜이면을 샅샅이 파헤쳐보겠다던

야당의 으름장은 증인출두요구와 특별위원회의 구성요구결의안이 모두 부결돼 버림으로써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다.

율산사건에 관련된 공직자가 수백 명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제102회 제4차 국회본회의 질의 내용에 대한 답변.

한병채(韓柄寀) 의원은 율산실업에 관련해서 수뢰한 공무원 150명의 처리결과를 밝히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한 김치열(金致烈) 법무장관의 답변을 들어보자.

“국무총리에게 질의하신 사실을 제가 답변 드리게 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50명의 공무원이 수뢰했다 하는 근거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산실업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그 규모가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수사 또는 비밀계좌의 유무 각 방면의 수사를 다 했습니다.

그 결과 관련 공무원이 11명 있었습니다. 수사는 20여명이 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밝혀진 것이 11명인데

그 사람들이 받은 돈은 5만원 내지 50만원입니다. 그것이 명절에 지극히 의례적인 성격의 것으로 판단하고

공무원축정원칙에 따라서 각 해당 부서에 통보함으로써 면직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실채권과 채권보전대책은 어떠했는가?

국회재무위에서의 이용만 재무부재정차관보 브리핑내용을 들어보자.

“1979년 3월 말 현재 형태별로 본 여신현황을 말씀드리자면 대출금 597억원, 선수출환어음매입 344억원, 지급보증이 391억원 합계 1332억원입니다. 은행 측 추정으로서의 채권회수가능액은 기업체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731억원, 그리고 부동산 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10억원, 장부상의 해외자산 480억원 중에서 회수가능부분을 최대한 관리 처분하여 회수한다고 볼 때 약 24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울종합 터미널의 고가매각 추정인데 시가기준으로는 190억원이고 장기상환기준으로는

400억원 이렇게 해서 대체로 1171억원 내지 1381억원의 회수가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족채권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담보가액은 물론 재무당국이 부풀린 액수이겠지만

오늘날 대우채권 사태로 온 국민이 예금원리금 피해를 보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우량기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 홍윤섭 행장 재판결과를 보자.

서울형사지법은 1979년 8월 31일 율산그룹 부정사건과 관련, 구속 기소된 전 서울은행장 홍윤섭 씨에게

업무상배임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율산그룹의 주거래은행장이었던 홍윤섭 피고인은 율산계열기업의 재무구조가

지극히 나쁘고 사업전망이 어두워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 그룹에 여신행위를

계속해 준 것은 앞의 은행에 손해를 발생시킬 목적은 없다 하더라도 손해발생을 충분히 예견하고 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음이 인정된다’ 지적하면서 ‘이 같은 여신행위가 감독관청인 재무부의 지시에 따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은행장은 소속은행의 이익을 위해 경영해야 되고 설사 감독관청의 부당한 지시에 따랐다 해서

위법행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판시했다.

 

베일 속의 관치금융은 이렇게 젊은 기업인을 강타하고 율산을 침몰시킨 뒤 우리 곁을 떠났다.

신선호 대표는 비리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고, 계열사들은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1979년 5월 17일 서울형사지법 2백12호 법정에서 강철구판사 심리로 열린 율산그룹 부정사건 첫 공판에서 진술하는 좌로부터 전대표 신선호씨 정문수 전종합기획본부장 부완혁 전회장./사진=연합뉴스

당시 신선호 대표는 외국환관리법(1999년 폐지) 위반과 횡령죄로 구속되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신선호 대표가 

광주서중 출신이고 상기한 장인 겸 회장 부완혁 씨가 장준하의 국회의원 당선 이후 사상계의 2대 발행인을 

맡은 야당 성향의 인물이어서, 한마디로 김대중과의 커넥션이 의심되어 당시 정권이 조진 거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이와 연관해 비호남계 정재계 인사들이 많은 당시, 호남 기반의 대기업이 나오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인사들이 나섰을 거라는 식의 음모론도 있다.

그룹 해체 이후 신선호 대표는 서울종합터미널을 지키면서 센트럴시티그룹 회장으로 기업인의

삶을 이어가다 2013년 초에 센트럴시티 의장직에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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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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