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도 다로드는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한다고, 나는 사콕인가?

잠자는 시간 빼고는 일만 하는 거 같아 재미가 없다고 생각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벌어야 나를 먹여 살리고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그런데 흠,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좀 그러네. 쓰압!

아침에 나와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블로그 포스팅 3개을 올렸다. 유튜브를 보면 챗 gpt를 이용해서 블로그를 쉽게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로드는 그것에 익숙지 않다 보니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린다.

기본적으로 3개의 블로그 포스팅을 하는데 오늘은 블로그씨 답변까지 4개 포스팅했다.

올해 들어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이제 3개월 차에 들어간다.

작 년부터 시작된 매출 저하로 인해 긴장이 되는 날들이라 이게 또 힘을 주네.

오늘은 대체 휴일인데 왠지 공짜로 얻은 기분이다. 책상도 좀 정리하고 청소도 해야겠다.

ㅋ... 이 난리다. 좀 정리를 했는데... 쓸고 닦아야 한다.
한때는 청소 정리에 광적이었는데... 아.. 이것도 포스팅 가능하겠다. 다로드가 정리 강박관념이 있었다. 탈출한 것 까지는 좋은데 지저분해졌다. 쩝.청소,정리 강박관념 탈출기로다가 말이다. 부작용까지도.아, 위 사진이 부작용이다.

업무에서 자잘한 것들도 해결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지만 ...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 것까지 따지면 참 게으르다.

 

인증서 갱신할 것이 2개가 있는데 한 개만 했다. 비밀번호가 틀려서 은행에 방문을 해서 해지 요청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지만 거래내역서를 뽑을 일이 있으니 한꺼번에 해결해야겠다.

OTP까지 배터리가 없다며 Lo Bat가 뜬다. 이런 경우도 있군. 이것도 교환해달라고 하자.

인증서 갱신할 것이 2개가 있는데 한 개만 했다. 비밀번호가 틀려서 은행에 방문을 해서 해지 요청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지만 거래내역서를 뽑을 일이 있으니 한꺼번에 해결해야겠다.

OTP까지 배터리가 없다며 Lo Bat가 뜬다. 이런 경우도 있군. 이것도 교환해달라고 하자.

 

오늘은 하체 운동하는 날이다.

천국의 계단이다. 30분 채웠다. 430칼로리 빠졌네. ㅎㅎ

일주일에 5일 이상은 운동을 하려고 한다.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출근 전에 4,50분 정도 운동을 한다.

하루는 상체, 다른 날은 하체를 하는 식이다. 이제 컨디션을 찾으니 예전 중량의 90%까지 돌아온 것 같다.

체구가 크지 않은 편이라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금방 사라지고 평범하다 못해 왜소해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지금은 근 손실이 지속되는 연령대인지라 운동을 하지 않으면 더 나이가 들어 골치 아프다. 골골~~~

다로드는 요통이 있다. 이것도 참 나름 스토리가 있는데 언젠가 포스팅해 봐야겠다. 참 쓸 거 많네.

잠을 잘못 자거나 물건을 잘못 들면 허리가 삐끗한다고 하나? 그럴 때는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는 했다.

잠을 잘 때 옆으로 누워 잔지가 3십 년 내외가 될 듯하다. 책이며 좋다는 글들 많이도 보았지만 별 효능을 못 보았는데

서울대 의대 정선근 교수님의 유튜브를 보다가 힙 어브덕션을 하면 엉덩이 근육을 키워주고 허리를 받쳐준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여러 운동 중에 하나였는데 마침 짐에 있길래 한 달 정도 해 보았다. 그런데 허리 아픈 것이 확 줄었다.

어쩌면 허리가 아프지도 않을 것 같다는, 나한테 딱 맞는 운동이었다고나 할까.

허리 아픈 이웃들은 백 년 허리 정선근 박사님의 유튜브 추천한다. 내가 그 심정 안다.

정선금 교수님은 딱 봐도 아주 허리가...아우~~~ 신뢰가 간다. 저 목봐라 목. . . 레슬링 선수 아녀? 공부는 언제 했대?

힙업도 된다. 가끔 거울을 통해서 보면 히햐~~~ 아 나이에 나도 엉덩이가 생기는구나 한다니까.

 

 

정선근 TV

 

www.youtube.com

어느덧 6시가 넘었다.

아. 블로그에 협찬이 와서 협찬 업체에 발행전 저장된 포스팅 메일을 발송했다.

식사하고 와서 내일 해야 할 일 정리하고 크로스 보더 이커머스 좀 들여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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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중국 마늘 관세 통상 협상 논란: 실패한 협상의 교훈과 현재의 도전

1. 서론: 한덕수와 마늘 관세 협상의 역사적 맥락

한덕수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2000년대 초반 중국과의 마늘 관세 협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중국산 마늘의 급증하는 수입으로 인해 국내 마늘 농가의 피해를 우려하여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전까지 30%의 관세를 부과하던 마늘에 380%를 때린 것이다. 한덕수가 한 짓이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은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중단하는 보복 조치를 취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핸드폰 시장을 휘어잡던 삼성 애니콜이었다. 이 것을 팔지 못한 삼성은 똥줄 타지 않겠는가.

이로 인해 양국 간의 통상 갈등이 심화되었고, 한덕수 본부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습니다.

2. 마늘 협상의 전개와 결과

2000년 7월, 한덕수 본부장은 중국과의 협상을 통해 마늘 수입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정부가 중국산 마늘 세이프가드 연장을 2년 반으로 제한하는 이면합의를 추진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중국의 통상무역 보복 위협에 마늘시장 수입 안전 장치를 내준 것으로 비판받았습니다.

결국 한덕수 본부장은 이로 인해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한덕수는 등신이었다. 아주 대한민국 경제를 내어주고 바짝 엎드린 것이다. 해결하긴 개뿔!

퍼주기의 달인, 강자에게 바짝, 이런 걸 처세술의 달인이라고... 헐....

 

 

3. 현재의 통상 협상과 한덕수의 역할

넌 미국가서 협상하면 안봐도 유튜브고,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구속!

최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미국과의 통상 협의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한덕수 대행의 과거 마늘 협상 실패를 언급하며, 그가 다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무역협상에 나서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국혁신당은 한덕수 대행을 "실패한 협상가"로 지칭하며,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

이런 놈이 미국과 협상한다고??? 또 얼마나 빨아댈라고...

어떻게 참... 인물 없다.

 

 

정치권 "'마늘파동' 한덕수한테 한미FTA를 맡겨?"

청와대가 최근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한 한명숙 전 총리의 후임으로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를 지명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열린우리당을 제외한 제 정파가 일제히 "한미 FTA 내각"이...

www.pressian.com

 

 

4. 교훈과 시사점

한덕수 대행의 과거 마늘 협상 사례는 통상 협상의 중요성과 그에 따른 책임의 무게를 상기시켜줍니다.

특히 국가 간의 무역 협상에서는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전략과 국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협상 과정에서의 투명성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집어쳐 짜샤!


자주 묻는 질문(FAQ)

Q1: 한덕수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마늘 협상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A1: 한덕수 전 본부장은 2000년대 초반 중국과의 마늘 관세 협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당시 중국의 보복 조치에 대응하여 협상을 주도했습니다.

Q2: 마늘 협상의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A2: 협상 결과, 정부는 중국산 마늘 세이프가드 연장을 2년 반으로 제한하는 이면합의를 추진했으며,

이는 국내 마늘 농가의 보호에 대한 우려를 낳았습니다.

Q3: 현재 한덕수 대행이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 나서는 것에 대한 우려는 무엇인가요?


A3: 정치권에서는 한덕수 대행의 과거 협상 실패를 언급하며, 그가 다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무역협상에 나서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Q4: 마늘 협상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A4: 이 사례는 통상 협상의 중요성과 책임의 무게, 그리고 협상 과정에서의 투명성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Q5: 한덕수 대행의 현재 통상 협상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A5: 한덕수 대행은 미국과의 통상 협의를 앞두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Q6: 정치권의 반응은 어떤가요?

A6: 정치권에서는 한덕수 대행의 과거 협상 실패를 언급하며,

그가 다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무역협상에 나서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결론

한덕수 전 통상교섭본부장의 마늘 관세 협상 사례는 통상 협상의 중요성과 그에 따른 책임의 무게를 상기시켜줍니다.

현재의 통상 협상에서도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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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특례 디딤돌대출이란?

정의와 목적
신생아 특례대출은 출산율 저하와 육아 부담 완화를 위해 정부가 출산 가정에 제공하는 특별한 금융 지원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특히 신생아를 둔 가정이 초기 양육 비용과 주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도입되었습니다.

도입 배경 및 정책 취지
최근 수년간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부는 다양한 출산 장려 정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신생아 특례대출은 출산 직후 가계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주거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제도입니다.


대상자 자격 요건

신생아 기준
신청자는 최근 1년 이내에 출생한 자녀를 둔 가정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출생일 기준으로 대출 신청일이 12개월 이내여야 하며, 주민등록등본상 자녀가 기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소득 및 자산 기준
정부는 특정 소득 기준 이하의 가정을 우선 대상으로 하며, 중위소득 150% 이하 가구가 일반적인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자산 보유 기준 또한 일정 한도를 초과하지 않아야 하며, 자동차나 부동산 등의 고가 자산은 평가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 및 주택 조건
일부 지역에서는 특례 조건이 강화되거나 완화될 수 있으며, 대출 신청 당시 무주택자 또는 1주택자일 경우 우대 조건이 적용됩니다.


대출 조건 및 한도

최대 대출 한도
보통 신생아 특례대출의 최대 한도는 2천만 원에서 5천만 원 사이로, 소득 및 자산 수준, 주택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자율 및 상환 기간
이자율은 시중 대출보다 낮은 1.0%~2.5%의 고정 금리로 제공되며, 상환 기간은 일반적으로 5년에서 20년까지 가능합니다. 일부 대출은 거치 기간도 포함되어 있어 초기 부담을 줄여줍니다.

우대금리 및 특례 조건
셋째 아이 이상을 둔 다자녀 가정이나 장애 자녀가 있는 경우, 추가 우대금리나 대출 확대 혜택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청 절차 안내

신청 시기와 절차
신청은 자녀 출생 후 12개월 이내에 진행해야 하며, 일정한 서류 준비와 함께 주거 형태, 소득 등 조건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대출 신청은 정부와 연계된 금융기관 또는 관할 지자체를 통해 이뤄집니다.

필요 서류

  • 신청자 신분증
  • 가족관계증명서
  • 주민등록등본
  • 출생증명서 또는 출생신고 확인서
  • 소득 증빙자료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건강보험료 납부내역 등)
  • 부동산 등기부등본 (주택 보유 시)

온라인 및 방문 신청 방법
대출은 정부24, 주택도시기금 포털, 금융기관 앱 또는 웹사이트를 통해 온라인 신청이 가능하며, 가까운 은행 창구 또는 주민센터를 방문하여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온라인 신청 시 본인 인증 및 공동인증서가 필요합니다.

 

 

주택도시기금

주택도시기금 소개, 주택구입(내집마련디딤돌 등), 전세자금, 월세대출, 국민주택채권, 주택청약, 신혼부부대출

nhuf.molit.go.kr

 


금융기관별 대출 상품 비교

금융기관최대 한도이자율상환 기간우대 조건
국민은행 50백만원 2.2% 최대 20년 다자녀 우대
농협은행 40백만원 1.9% 최대 15년 무주택자 우대
우리은행 30백만원 2.0% 최대 10년 신혼부부 우대
하나은행 35백만원 2.3% 최대 20년 소득 기준 완화
신한은행 45백만원 1.8% 최대 20년 출산 장려 특별조건

조건별 추천 상품
소득이 낮은 가정은 신한은행농협은행의 상품이 유리하며, 다자녀 가정국민은행의 우대금리 혜택이 큽니다. 주택이 없는 무주택자라면 우리은행이나 하나은행의 우대 조건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신생아 특례대출의 장단점

장점 분석

  • 낮은 금리와 넉넉한 상환 기간
  • 자녀 수에 따른 우대 조건
  • 주택 마련 자금 지원 효과
  • 초기 육아 비용 부담 완화

단점 및 유의사항

  • 자격 조건 제한으로 인해 일부 가정은 혜택을 받기 어려움
  • 신청 서류 준비의 번거로움
  • 이자 면제나 상환 유예가 아닌 점
  • 중도 상환 시 수수료 발생 가능성

자주 묻는 질문 (FAQ)

Q1. 특례대출과 일반 대출의 차이점은?
A. 특례대출은 정부 지원으로 금리가 낮고 상환 조건이 유리하며, 자녀 출산이라는 특정 상황에 따른 혜택입니다.

Q2. 신청 거절 사유는 무엇인가요?
A. 소득 초과, 주택 보유 수 초과, 신용불량자, 신청 기한 초과 등이 주요 거절 사유입니다.

Q3. 만기 연장이나 조건 변경이 가능한가요?
A. 일부 은행은 사유에 따라 만기 연장이나 거치 기간 조정을 허용합니다. 계약 당시 확인이 필요합니다.

Q4. 둘째 아이도 적용되나요?
A. 네, 출생 순서와 관계없이 출산 후 12개월 이내이면 자격이 주어집니다. 단, 일부 혜택은 첫째/셋째 기준으로 다를 수 있습니다.

Q5. 신용점수에 영향이 있나요?
A. 대출이므로 신용조회가 이루어지며, 대출 금액이 반영되어 일시적 점수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Q6. 공동명의로 대출이 가능한가요?
A. 일부 금융기관은 부부 공동명의로 신청을 허용하며, 소득 합산 등 혜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결론 및 전문가 조언

신생아 특례대출은 출산 가정에게 큰 경제적 도움이 되는 제도입니다. 금리 부담 없이 장기적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만큼, 재정 계획에 따라 전략적으로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 대출 전, 자격 조건과 이자율을 충분히 비교 분석하세요.
  • 신청 기한을 놓치지 말고, 서류는 미리 준비해두면 좋습니다.
  • 은행마다 상이한 조건을 고려해, 가족 상황에 맞는 상품을 선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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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역사상 '레전드'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름, 바로 이종범입니다.
화려한 플레이, 전천후 능력, 국가대표로서의 활약, 그리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성까지.
"야구는 이종범이다" 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는 그의 인생은, 단순한 선수로서의 기록을 넘어서 한 시대를 정의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야구 인생 전체를 깊이 있게 조망하며, 후배들에게 끼친 영향과 지금도 회자되는 플레이들을 생생하게 전해드릴 것입니다.


이종범은 누구인가?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이종범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축구와 야구 모두에 소질을 보였고, 결국 야구에 매료되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다닌 광주제일고는 이미 야구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곳에서 그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선수로 성장합니다. 특유의 민첩성과 빠른 판단력은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죠.

야구와의 첫 만남

이종범의 야구는 단순한 취미가 아닌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야구는 내 모든 것을 걸게 만든 존재"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종범이 프로 선수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단순한 재능의 결과가 아닌, 끊임없는 연습과 자기 단련의 산물이었습니다.


이종범의 대학 시절과 프로 진출

고려대학교 시절의 활약

이종범은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뒤 대학 야구계에서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줍니다.
당시 동료 선수들과 함께 한 팀을 이끌었고, 대학야구리그의 강자로 군림하며 야구팬들 사이에서 이미 '프로급 선수'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입단과 데뷔 시즌

1993년, 이종범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인 프로 야구 인생을 시작합니다.
신인답지 않은 자신감과 경기 운영 능력은 팬들과 해설진 모두를 놀라게 했고, 데뷔 첫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신인왕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전성기와 신화적인 기록들

1994년의 전설적 시즌

1994년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이종범의 해'로 기억됩니다.
그 해 그는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라는 믿기 어려운 성적을 기록했으며, 이는 KBO 역사상 유례없는 공수주 완전체 시즌으로 평가됩니다.

도루, 타점, 수비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퍼포먼스로 인해 그는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한국의 이치로'라는 평가까지 받았죠.

도루왕으로서의 위엄

특히 도루에 있어서 이종범은 그야말로 천재적인 센스를 지닌 선수였습니다.
상대 투수와 포수의 타이밍을 완벽히 꿰뚫어 보며 단독 도루뿐 아니라 더블스틸, 희생도루 등 다양한 상황에서 팀에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냈습니다.
1994년 시즌 84도루는 아직도 쉽게 깨지지 않는 대기록 중 하나입니다.

메이저리그와의 인연 – 해외 진출기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서의 활약

1998년, 이종범은 일본 프로야구(NPB)의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며 해외 진출의 꿈을 실현합니다.
당시 한국 야구 선수로서 일본 진출은 흔치 않은 일이었고, 그의 도전은 많은 야구 팬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종범은 주니치에서 주로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뛰어난 수비력과 빠른 주루 능력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비록 타격에서는 기대만큼의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일본 투수들의 빠르고 다양한 변화구에 적응하며 노력하는 모습은 현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3시즌 동안 일본에서 활동한 뒤 다시 KBO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 경험은 이종범이 야구를 보는 시야를 더욱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외 무대에서 얻은 경험

이종범은 일본 무대에서 철저한 프로 정신과 훈련 시스템을 직접 경험하며, 선수로서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일본에서 배운 세세한 기본기와 집중력은 내 커리어 후반을 더 빛나게 만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이종범의 일본 진출은 이후 이승엽, 박찬호, 이대호 등 후속 한국 선수들의 진출 길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상

아시안 게임 및 올림픽에서의 활약

이종범은 한국 야구 국가대표로서도 빼놓을 수 없는 선수였습니다.
특히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또 하나의 정점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상대로도 강한 모습을 보였고, 결승전에서의 결정적인 안타는 팬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됩니다.

또한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선수권 등 다양한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경험과 리더십으로 후배들을 이끌며 대표팀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가대표팀에서의 리더십

이종범은 단순히 경기력만으로 대표팀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선배로서의 인품과 리더십으로도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경기 상황에서 후배들을 독려하고, 결정적인 순간엔 항상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였죠.

이종범과 함께한 국가대표팀은 언제나 강한 단결력과 긍정적인 분위기로 평가받았습니다.


포지션별 다재다능한 플레이

유격수, 외야수, 3루수까지

이종범의 또 하나의 강점은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다재다능함입니다.
프로 데뷔 초반에는 유격수로 활약하며 빠른 발과 강한 어깨로 주목받았고, 후에는 외야수, 3루수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기용되었습니다.

야구에서는 포지션 변경이 흔히 일어나지 않지만, 이종범은 어디에 있든 최고 수준의 수비와 경기 운영을 선보이며 팀에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수비에서도 보여준 천재성

특히 외야수 시절에는 눈부신 슬라이딩 캐치, 정확한 송구, 타구 판단 능력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KBO 역사상 손꼽히는 최고의 수비 장면들 중 상당수가 이종범의 플레이에서 나왔다는 평도 있습니다.

그는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게임을 바꾸는 선수였다는 점에서 완성형 야구 선수로 인정받았습니다

 

타격 기술과 전략의 정수

빠른 배트 스피드와 정확성

이종범의 타격 능력은 단순한 타율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빠른 배트 스피드와 정확한 컨택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어떤 유형의 투수와도 잘 맞서 싸웠습니다.
특히 초구 공략과 타이밍 조절에 탁월해, 초반에 흐름을 끊지 않고 공격을 이어가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타자는 타이밍이다"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으며, 손목의 유연함과 민첩한 반사신경으로 다양한 구종을 컨트롤했습니다. 이종범의 타격은 기술과 감각이 조화된 완성형 스타일이었죠.

전략적인 타격 운영

단순히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종범은 상황에 맞는 타격을 할 줄 아는 전략적 선수였습니다.
1루에 주자가 있을 땐 의도적으로 3루쪽 번트를 대기도 하고, 때로는 히트 앤 런 플레이에 적합한 타구를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타격은 언제나 팀을 위한 것이었고, 득점을 만드는 타격이라는 점에서 현대 야구에서 매우 가치 있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팬들이 기억하는 명장면들

레전드 플레이 TOP 5

이종범의 커리어를 떠올리면 단연코 팬들의 뇌리에 각인된 명장면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1. 1994년 4연속 도루 성공 장면
  2. 한일전에서의 역전 2루타
  3. 극적인 슬라이딩 캐치와 더블플레이
  4. 복귀 후 첫 홈런을 친 감동의 순간
  5.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승부욕 넘치는 스틸

이런 장면들은 야구팬들의 추억 속에 깊이 남아 있으며, 매년 야구 레전드 하이라이트에서 빠지지 않고 소개됩니다.

감동을 준 인터뷰 모음

이종범은 경기 외적으로도 성숙한 발언과 진심이 담긴 인터뷰로 많은 감동을 줬습니다.
그는 늘 팀을 먼저 생각했고, "내가 잘하는 건 팀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특히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팬들과 후배들에게 전한 진심어린 감사의 말이 큰 울림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장면은 유튜브 영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고 있죠.


이종범과 KBO 역사에서의 위치

한국 야구사에서의 위상

이종범은 단순히 뛰어난 성적을 남긴 선수를 넘어, KBO 리그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가 등장했을 때, 야구의 재미와 전략이 한 차원 높아졌다는 평가가 있었고, "이종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KBO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플레이는 수많은 야구 유망주들에게 영감을 줬고, 이종범의 등번호인 7번은 지금도 많은 어린 선수들이 선호하는 번호입니다.

명예의 전당 후보로서의 자격

은퇴 후에도 이종범은 계속해서 KBO 명예의 전당 후보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통산 성적, 팬들과의 소통, 국제대회 성과 등 모든 측면에서 명예의 전당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선수로 평가받습니다.

팬들 역시 그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며, 이는 한국 야구의 발전을 상징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타격 기술과 전략의 정수

빠른 배트 스피드와 정확성

이종범의 타격 능력은 단순한 타율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빠른 배트 스피드와 정확한 컨택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어떤 유형의 투수와도 잘 맞서 싸웠습니다.
특히 초구 공략과 타이밍 조절에 탁월해, 초반에 흐름을 끊지 않고 공격을 이어가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타자는 타이밍이다"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으며, 손목의 유연함과 민첩한 반사신경으로 다양한 구종을 컨트롤했습니다. 이종범의 타격은 기술과 감각이 조화된 완성형 스타일이었죠.

전략적인 타격 운영

단순히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종범은 상황에 맞는 타격을 할 줄 아는 전략적 선수였습니다.
1루에 주자가 있을 땐 의도적으로 3루쪽 번트를 대기도 하고, 때로는 히트 앤 런 플레이에 적합한 타구를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타격은 언제나 팀을 위한 것이었고, 득점을 만드는 타격이라는 점에서 현대 야구에서 매우 가치 있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야구 외 활동 및 방송 출연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모습

이종범은 은퇴 후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야구 이외의 매력도 선보였습니다.
특히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인 《뭉쳐야 찬다》,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등에서의 모습은 인간적인 매력과 유쾌함으로 대중의 호감을 얻었죠.

그의 예능 출연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선수 시절의 비하인드 이야기, 훈련철학, 아들 이정후와의 관계 등 진솔한 내용들을 통해 많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종범은 방송에서도 여전히 ‘팀워크’, ‘배려’, ‘성실함’을 강조하며, 프로 정신을 예능에서도 실천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방송인으로서의 입지

이종범은 단순한 게스트 출연이 아닌, 고정 패널로 활약하며 방송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그의 진중한 조언, 상황 판단력, 유머감각은 스포츠 전문가 이상의 가치를 보여줬습니다.

또한,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며 KBO 리그에 대한 깊은 해설을 제공하고 있으며, 팬들은 그를 통해 야구의 본질과 경기 흐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성과 철학 – 야구관 엿보기

팀워크와 리더십

이종범이 많은 선수들과 팬들에게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팀워크 중심적인 철학입니다.
그는 "혼자 잘하는 야구는 의미 없다"는 말을 자주 하며, 항상 팀원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는 선수였습니다.

주장으로서도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며 선수 간 갈등을 중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후배들에게 전한 메시지

이종범은 수많은 후배들에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멘토로서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야구 외적인 문제로 흔들리는 후배들에게는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선수들에게 "기록보다 더 중요한 건 야구를 대하는 태도"라며, 정신력과 인성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종범을 기념하는 공간들

기념관 및 관련 전시

이종범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 전시와 박물관 섹션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KBO 명예의 전당에는 이종범 관련 유니폼, 배트, 영상 등이 전시되어 있고, 광주와 서울 지역의 야구 박물관에서도 그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은 야구팬뿐 아니라 일반 관람객들에게도 스포츠 정신과 인간승리의 감동을 전해주는 소중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팬들이 남긴 추억들

팬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팬카페, SNS 아카이브, 응원 영상 등은 이종범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 인터뷰 하나하나가 팬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레전드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들 (FAQ)

Q1. 이종범은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남아 있나요?

A. 네, 그는 현재까지도 야구 해설과 지도자 활동을 병행하며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Q2. 이종범의 최고의 시즌은 언제인가요?

A. 대부분의 팬들과 전문가들이 꼽는 최고의 시즌은 1994년으로, 타율 0.393과 84도루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Q3. 아들 이정후와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뛰어난가요?

A. 두 사람은 스타일이 다릅니다. 이종범은 스피드와 다재다능함, 이정후는 정교한 타격과 안정감에서 강점을 보입니다.

Q4. 이종범은 왜 ‘야구천재’라고 불리나요?

A. 타격, 수비, 주루, 팀워크 등 모든 부문에서 완벽에 가까운 활약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Q5.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어떤 활약을 했나요?

A.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3시즌 동안 활동했으며, 빠른 주루와 안정적인 수비로 팀에 기여했습니다.

Q6. 이종범 관련 기념관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A. 서울 고척돔에 있는 KBO 명예의 전당과 광주 지역 야구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론 – 야구는 이종범이다

"야구는 이종범이다"라는 문장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닙니다.
그의 화려한 성적, 팀에 대한 헌신,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은 한국 야구의 전설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그의 야구 인생은 한 세대를 넘어서고, 그 영향력은 다음 세대에게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이정후라는 이름을 통해 이종범의 정신은 계속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앞으로도 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이름이 될 것입니다.

아!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가수 하청일이 그가 도루를 할 때 바람소리가 들린다며 지어준 별명이라고 한다.

작명센스 Goooooooooooooooooo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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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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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소음이라는 존재를 알 게 된 것이 내가 처음으로 열심히 돈 모아 내 이름으로 계약한 전세집에서 였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산 꼭대기는 아니고 등성이에 있는 집이었는데

그 위로도 집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는 했다. 서울이 크긴 크다. 오밀조밀 하게 모여서 살아간다.

어쩌면 나 어릴때 어렴풋한 TV드라마 달동네? 그랬을 거다.

달동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나도 기억할 정도이니 꽤나 인기있었던 드라마였던 게다.

내 기억엔 아련한 듯, 선명한 듯 그런 곳이다.

사업 초기 서대문 오거리 냉천동에 사무실을 얻은 이후 집도 그 근처에서 구하면서 출퇴근시에 오르내렸던

그 길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길이었다. 아침에 산 위로 뜨는햇살을 받으며 눈을 뜨고 길을 내려오는

말 그대로 가벼운 발걸음. 퇴근후 집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집?이라는 생각과

높은 곳에 있기에 차 지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야말로 조용 그 자체였던 집이었다.

중국집과 떡집은 아직 그대로다.
이 집이다.

주인은 인천의 공무원인데 투자차원에서 재개발그당시서울은재개발열풍기대로 투자를 했다고 들었다.

정말 저렴한 가격에 방2개짜리를 구하고 화장실은 정말 비좁았지만 행복한 기분은 나 만의 공간과

문만 나서 잠깐 걸어가면 한가로이 산책로를 걸을 수 있는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입지조건이었다.

한 쪽으로 걸어가면 수목이 우거지고 새소리를 들으며 힐링을 만끽할 수 있었고 또 한 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된 철거예정의 아파트가 쩍쩍갈라진 벽면을 드러내며 건재해 있는 이색?적인 곳이다.

하루의 전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나만의 평화를 만끽할 수가 있었는데 위 층에서 어느 날,

마치 아령을 일부러 아래로 찧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밤 11시쯤이다.

처음엔 참을 수 있었던 것이 위 층에는 연로하신 노인 내외분이 살고 있었고 추석이나 설날, 뭐 그런

명절에만 있는 경우였기에 참았는데 추석연휴가 1주일정도되면 내내 그러니 한계에 다다른다.

나도 아파트에서 살면서 위 층에서 아무리 쿵쿵대고 떠들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아요.

2층에 올라가서 문을 여니 따님인듯 한 분이 문을 연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인데요. 아이들이 너무 시끄러우니 조금만 조용히 해 주셨으면 해서요."

이건 내 기억이고 정확치는 않다. 불편한 내색이 당연히 있엇겠지.

"아이들 조용히 놀고 있는대요. 이상하네?"

사실 이런 나몰라라 식의 태도를 싫어하는지라 일단 사과해야 하는거 아냐?,

"무슨 말씀이세요.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방금까지 들렸는대요."

"여보세요. 나도 아파트에서 살면서 위층에서 아무리 쿵쿵대고 떠들어도 아무 말하지 않아요."

이건 적반하장이다. 혐오한다.

"네?"

"위 층이 떠들어서 피해를 받으면 나 때문에도 다른 사람이 피해 받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다행히 남편이 나와서 사과를 하기에 그냥 넘어가기는 했지만 잠깐이나마

자기가 피해를 받으면 오히려 동병상련을 가지지는 못할망정 자기도 그렇게 한다는게 좀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건가? 하는 혼돈이 일기도 했었다. 나는 속이 좀 좁은 편이다.

지금의 아파트는 산 꼭대기에 있다. 공기도 좋고 출퇴근시에 등산하는 기분을 느끼는 참 거시기한 곳이다.

이사하고 한 동안 즐거운 기분으로 출퇴근을 했느데 토요일 7시쯤인가? 갑자기 문을 거세게 퉁퉁친다.

뭐지? 하고 문을 여니 잔뜩 성이 난듯한 아래층 아저씨가 너무 시끄럽다고 잠을 잘 수 없다고 언성을

높인다.

"내가 일때문에 이 시간에 잠을 자고 있는데 쿵쿵 소리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일단은 사과를 했다. 아이들이 2명인데 초등학생 그 또래가 그렇듯이 발 뒷꿈치 소리가 날 수도 있고

내가 개의치 못하는 소리가 들릴 수도 있을 것이리라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과를 하고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는데 아이들이 갸우뚱한다.

"저 책보고 있었는대요."

"전 TV보고 있었어요"

흠... 어쨌거나 아이들이 시끄럽게 할 때도 분명히 있었기에 주의를 주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두, 세차례 올라와서 같은 항의를 하고 사과를 했는데 점점 뭔가 꺼림칙하다.

아이들과 대화를 하거나 영화를 보고 있을 때도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가 있기에 혹시나 싶어 사과는 했지만,

그런데 3박4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짐을 옮겨놓고 와이프가 짐을 푸는 사이에

담배 한 대 필요량으로 집을 나와 흡연장소에서 담배를 피고 올라오니 왁자지껄하다.

"아까부터 쿵쿵 소리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우린 방금 일본에서 돌아왔어요"

""어찌되었든 아이들이 너무 떠드니 조용히 해 주세요"

일단 사과를 하고 보냈는데 와이프의 억울한 표정이 여간 아니다.

도대체 우리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저 사람 이상한 거 아니냐라는 거다.

미스테리 써클

혼자서 생각을 해 보았다. 분명 우리는 없었는데...

우리 위층의 소음도 사실 장난이 아니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소음이 나는데, 의자끄는 소리. 뛰어다니는 소리. 못 박는 소리 뭐 그런 소리들 말이다.

그런데 나나 와이프나 좀 둔감한 편이다. 어쩌면 초딩을 둘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우리가 피해를 끼칠 경우를 더 많이 생각해서인지 다른 이의 소음에 신경을 안 쓰는 것도 있다.

가끔 위층의 소음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했는데 엘이베이터에서 만난 그 아이들은 우리와 같이

남매이고 우리 아이보다 2,3년 더 큰 아이들이다. 뭐 아이들이야 귀여우니까.

층간소음은 아래층, 윗층만 생각을 했는데 이게 8층 소음이 6층까지 전달이 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하긴, 이 아파트가 20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인 지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아래층에 내려갔다.

도어벨을 누르니 잠시 뒤에 그 아저씨가 나온다.

"안녕하세요. 층간 소음때문에 궁금한 것이 있어 왔습니다,

"네. 뭔데요?"

"저희가 이사오기 전에 말이에요. 3년전에요. 그 때도 층간 소음 있었지요?"

"네, 있었어요."

"그 때 그 집에 아줌마 한 분하고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쿵쿵 거리고 심하게 소리가 날리가 없을 것 같은대요{"

"..."

"우리 위층에서 시간이 없이 소음이 심해요. 저희는 그냥 저희도 아이들이 있으니

넘어갔는데 아저씨 집에까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앞으로 위층에서 소리가 들리면 제가 메세지를 보낼테니 시간이 되시면 올라와 보세요."

"..., 그래요."

나는 억울하다고,

그렇게 올라오고 나서 위 층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문자를 보냈다.

이렇게 문자를 보낸 심정에는 우리한테 그러지 말고 우리 위층인 8층에 가셔서 그 분들한테 큰 소리쳐서

우리도 좀 조용히 살자는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이 문자를 보낸 이후로 우리한테 올라오지는 않는다.

8층의 소음은 그대로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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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의 정의와 어원

‘콘클라베(Conclave)’는 라틴어 “cum clave”, 즉 **“열쇠로 잠근 장소”**를 뜻합니다. 이는 교황 선출을 위해 전 세계 추기경들이 철저히 외부와 격리된 채 모이는 비밀 회의를 의미합니다. 교황의 죽음 또는 퇴위 후, 새로운 교황을 뽑기 위한 신성한 절차로서 중세 이후 카톨릭 전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콘클라베의 역사적 기원

콘클라베의 역사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268년 교황 클레멘스 4세 선종 이후 교황 선출이 3년 가까이 지연되자, 시민들이 추기경들을 감금하고 빠른 결정을 요구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 제도를 공식화했습니다.


콘클라베가 열리는 이유

카톨릭 교회의 수장이자 전 세계 신자들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이 선종하거나 자발적으로 퇴위하면, 교황직은 공석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때 전 세계 추기경들이 바티칸에 소집되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시작됩니다.


시스티나 성당과 콘클라베

콘클라베는 전통적으로 **바티칸 시국 내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에서 열립니다. 이곳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벽화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사결정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당 내부에는 특별한 기표소, 투표함, 연기 장치 등이 설치됩니다.


교황 선출 참여자: 추기경단

교황 선출에는 만 80세 미만의 추기경들만 투표권을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120명 내외의 추기경이 참여하며, 이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로 구성됩니다. 투표 전, 각 추기경은 비밀 엄수와 외부와의 단절을 서약해야 합니다.


콘클라베의 절차

콘클라베는 ‘엑스트라 옴네스(Extra Omnes)’, 즉 **“모두 나가시오”**라는 외침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명령이 내려지면 비추기경 및 보조 인력은 모두 회의장 밖으로 나가고, 추기경들만 성당 안에 남습니다.

주요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입장식과 기도
  2. 첫 투표 시행
  3. 하루 4번의 투표 가능
  4. 과반수 이상 득표자 없을 시 반복 투표

투표 방식과 규칙

  • 교황 선출에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합니다.
  • 매일 오전 2번, 오후 2번 총 4번의 투표가 이루어집니다.
  • 아무도 과반수를 얻지 못할 경우, 하루 4회의 투표가 며칠간 반복됩니다.
  • 필요시 후보를 줄여 결선 투표도 실시됩니다.

백연과 흑연: 연기의 의미

콘클라베의 상징인 연기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순간입니다.

  • 흑연(검은 연기): 투표 실패, 교황 미선출
  • 백연(하얀 연기): 교황 선출 완료

이 연기는 투표지 소각 시 넣는 화학 물질로 조정되며, 흑연은 무기염과 탄소화합물, 백연은 젖은 짚과 백색염류가 혼합됩니다.


교황 선출 후 절차

교황으로 선출된 추기경은 수락 여부를 즉시 결정해야 하며, 수락 시 새로운 교황명을 정합니다. 이후 교황의 등장과 함께 **“Habemus Papam(우리에겐 교황이 있습니다)”**라는 역사적 발표가 바티칸 발코니에서 울려 퍼집니다.


최근 콘클라베 사례 분석

베네딕토 16세(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이후 2일 만에 독일 출신의 요셉 라칭거 추기경이 선출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2013년)

사상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 출신이자 예수회 출신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콘클라베의 비밀성과 보안

콘클라베는 철저한 보안 하에 진행됩니다. 내부 인터넷 차단, 휴대폰 및 모든 통신 장비 압수, 보안 직원 상시 대기 등으로 외부 정보 유출을 원천 차단합니다. 비밀 유지 위반 시 파문 등 강력한 교회법적 제재도 따릅니다.

콘클라베 관련 법령과 규칙

콘클라베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닌, 엄격한 법적 근거에 따라 운영됩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문서는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6년에 공포한 **「Universi Dominici Gregis」(주님의 양 떼 전체에 대하여)**입니다.

이 교황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규정합니다:

  • 교황직 공석 시 즉시 콘클라베 준비 돌입
  • 추기경단의 거주 및 식사 제한
  • 전자기기 사용 금지
  •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만 교황 선출 인정
  • 정보 유출 또는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 포함

이 외에도 교황청은 콘클라베 직전마다 소소한 규정을 개정하며 시대 변화에 발맞추고 있습니다.


콘클라베에 대한 대중의 오해

콘클라베는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인 행사이기에, 다양한 오해도 존재합니다.

Q.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A. 특정 기간 내에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규정에 따라 일정 수의 투표 이후 후보군을 줄여 투표를 계속합니다.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콘클라베는 끝나지 않습니다.

Q. 선출된 즉시 교황인가요?

A. 네, 당선자가 수락하는 순간부터 교황직이 시작됩니다. 그 즉시 전 세계 가톨릭의 수장이 됩니다.


콘클라베의 종교적, 상징적 의미

콘클라베는 단순한 선거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 아래 이루어지는 신성한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가톨릭 교리에서는 교황이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다고 믿습니다.

교황 선출 순간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Habemus Papam!"이라는 선언은 신자들의 기쁨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언어입니다.


교황 선출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

종교적 리더십

교황은 전 세계 약 13억 명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윤리, 생명, 평화, 빈곤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교황의 발언은 전 세계적 주목을 받습니다.

국제 외교 및 정치적 영향

교황청은 독립된 국가인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자, 외교적 중재자 역할도 합니다. 교황의 교체는 각국 외교 관계, 특히 개도국 및 갈등지역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콘클라베와 문화예술

콘클라베는 영화, 소설, 드라마 등에서도 자주 다뤄지며 대중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콘클라베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며, 추기경 납치와 음모가 그려집니다.
  • 소설: 로버트 해리스의 『콘클라베』는 리얼리즘과 서스펜스를 가미해 실제 콘클라베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 드라마: 여러 다큐멘터리와 가톨릭 관련 프로그램에서 콘클라베 과정을 소개하며,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에게도 깊은 인상을 줍니다.

향후 콘클라베 전망

디지털화 가능성

21세기 들어 디지털 사회로의 변화에 따라, 일부에서는 콘클라베의 온라인화나 디지털 투표 가능성을 논의합니다. 그러나 교황청은 신성한 비밀성과 전통 유지를 중시하여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습니다.

투표 시스템의 변화 예측

전자 투표는 배제하되,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보안 장치 도입이나 추기경 이동의 유연화는 앞으로 점진적으로 개선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감염병 대응을 고려한 콘클라베 절차 재검토도 논의되었습니다.


결론: 전통과 신성함이 만나는 콘클라베

콘클라베는 단순한 선거가 아닌, 가톨릭 교회와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신성하고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수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이 전통은 전 세계인의 관심과 경외 속에 치러지며, 종교와 문화, 정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음 콘클라베가 언제, 어떻게 진행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 순간 역시 또 한 번의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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