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제가 가지고 간 것을 대략 말씀드리지요.
인터넷을 해 볼 양으로 노트북(486임)-두고 두고 후회하다
결국 한국으로 보냄- 과 베낭에 옷가지들 (겨울 옷까지 챙겨와서
이 것또한 보냄-호주에는 재활용이 생활화 되어 있어
우리나라 보다 훨 싼값에 옷을 마련 할 수 있답니다
)이 있었고
호주 관련책자는 자신만만 세계여행',
영어 공부는 영영사전(longman), 한영사전과 영한사전(프라임), interchange 네 권 tape 6개 (권당 두 개씩이나 마지막 권은
못 가져감-cambidge 출판), 맨투맨 기본 상,하권
(제 영어실력이 어느정도였는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죠)과
소형 카세트(AIWA)가 호주에서 보낸 10개월 내내
나의 충실한 영어 지도교사였고 동반자였습니다.
참! 왜 10개월만 보내고 왔냐고 묻는 분이 계시길래
이 기회에 말씀드리지요. 귀국하기 약 4개월 전부터
Cairns 국제 공항내의 면세점인 Down town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귀국 하기 보름전에 한국에 난리가 났다고 동료들이
걱정을 하는투로 말이 많더라구요. 신문에서도 난리가 아니고
TV에서는 뉴스시간마다 한국의 경제 환란에 대해 말이 많구요.
그래서 2개월을 더 채워서 남들에게도 말하기 좋게 1년을
딱 채울까 했지만 사실 한국이 그립기도 했고 (전 그랬답니다.
다른 제 주위 친구들도 그러더군요. 누가 호주오면 귀국할 때
귀국하기 싫다고 그랬냐고) 어짜피 갈 바에야 일찍 적응한다는
심정으로 왔지요. 그 만큼 호주에서는 한국의 사태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였지요. 호주가 한국에 적극적으로
융자 지원해준 거 기억하실 지 모르겠내요.
한국은 호주에서 두 번째 큰 교역국이었으니까요.
첫 번째는 일본이구요. 뒤에 적겠지만 호주는 일본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어느 세월에 10개월의 생활을 더듬을까 싶군요.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한도에서 답변을 할테니
급한 분은 게시판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분이 답변을 해 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출국이 확정된 분은 저에게 메일을 보내 주시면
제가 개인적으로 매일을 보내던 채팅을 하던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드리지요. 그리고 영어에 너무 겁먹지 마세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전 정말 영어엔 깜깜 무식이었답니다. 맨투맨 기본을 가져갈
정도로 말이죠. 물론 지금도 못하지만 외국인 앞에서 주눅이
안 드는 정도랄까요. 내가 말 못하면 지가 답답하지 내가
답답하냐는 여유랄 까요. 참! 그 실력에도 제가 면세점에서
한 일은 일본인을 상대로 일어로 양주나 초콜렛,담배 팔다가
호주인이 일본인을 상대하기 거북할 때(영어문제로) 제가
통역해 주는 일이었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일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면세점에서 아쉬운 대로 쓰는 극히 한정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는데 여러분은 못 할거
있겠습니까? 그럼 다시 그 때로 돌아갑니다

번다버그라고?
그 들중 나이든 사람은 썬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제프였다(주로 애칭을 부르는 게 편하다).
그리피스에서 포도를 타며 돈을 벌고 포도 철이 끝나자 위로
올라와서 시드니에서 몇 일을 보낸다음에 이제 도마토 철이
돌아오는 번다버그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들말로는 과일따기를
잘 만하면 한 달에 천 불은 쉽게 모을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돈이 당시 1100불 정도
(당시 환율은 1불에 800원이 채 안 되었음).
"그래 한 달에 1000불이면 가자. 지금 이 것저 것 가릴
게재가 아니다. 나도 가자. 번다버그. 그 날 내 일기장엔
번다버그가 또박또박 적혀졌고 멜버른에서 올라온 유학생과 나,
지영, 마나미는 그 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킹스크로스를
걷다가 장난끼 많은 썬은 나와 지영을 잠깐 따라와 보라고
해 놓고는 어덜트 샵으로 밀어놓고 나갔다. 으헉!
이상망측하면서도 신기한^.^, 마치 손가락으로 얼굴 가리고
그 틈으로 보고싶은 심리였지만 지영은 의외로 담담하게 보다가
같이 나왔다.(다음에 꼭 혼자 와서 보리라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 체 시드니를 떠나야 했다 쩝!) 우리는 퍼브에 가서
맥주를 마셨고 당구장에서 포켓볼을 쳤다. 이 나라는
사구라는 게 없다. 전부 포켓볼이다. 취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라면으로 때운 몸에다가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 지
그 날밤 꿈을 꾸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꼬대를 했는데,
그 잠꼬대가 영어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자면서도
내가 잠꼬대를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졌고
그 것이 영어였다는 것도 알았을 정도니,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음을 짐작할 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들을 보는 이를 생각하면
좀 더 멋지게 포장하고 싶기도 하고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이 글을 쓰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홈페이지가 나의 한 시대를
말할 수 있으리라는 뜻에서 일기를 써가는 의미도 있기에
기억이 자신하는 한은 사실대로 쓰고 싶다.

다음 날 지영이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 주었고 점심식사 후에
워킹 홀리데이에 협회에다시 한 번 가보자는 약속과
함께 난 두리 하우스로 돌아왔다. 마나미가 어딜 가려는 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또 그 놈의 하이를 하고 물러서려는데
마나미가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지영이는 이사를 잘 했냐고
물었고 나는 떠듬거리며 문법을 떠 올리며 단어를 꽤 맞추고
있었지만 마나미는 상당한 그 긴 시간?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내 답답함에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인터체인지를 펴고
"웨어 러유 프롬" 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면 해야 하는 것들을 외우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점심식사를 하고(항상 saving라면), 자신만만을 펴고
호주에 대해서 머리에 구겨넣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어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 얼마 뒤 지영이가 노크를 했고 그 뒤에는
멜버른 유학생이 있었다. 오다가 만났나 보다.
지영이와 내가 워킹 홀리데이 협회를 간다는 말에
그는 자기가 안내해 주겠다고 했고 나는 길을 모르고
지영은 워킹 홀리데이 협회 위치를 모르는 지라 우리는
그를 따라 전철을 처음으로 타고 시드니 시내에 나갔다.
두 세정거장 거리. "아! 거금 2달라. 드럽게 비싸군.
킹스크로스에서는 1달러면 피자가 세조각인데,
피자 6조각짜리 전철이라..." 어쨌든 그는 우리를 협회까지
안내했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다시 찾아간
워킹 홀리데이 협회. 하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정말 nothing이였다. 한국에서도 협회에서 권유하는 학원과
홈쉐어등을 등록을 안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의 서비스가
불만족 스러웠지만 행여나 공연한 불만을 말하면
시드니 가서 도움받을 때 피곤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오는 길에 지영이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며
직접 일자리를 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쥐길 놈들을 연발하며 협회를 성토했고
번다버그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 날 밤 찾아온 썬과 제프와 함께 포도주를 사서 예의
그 일당들과 자주 찾아오는 한국사람들(그러고 보니
다 남자다)은 자리를 함께 했고 그 곳에서 '영'이 우프
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 후 그는 번다버그에서
다시 만난다). 한국에서 뿐이 아니라
이 곳에서도 우프를 더 저렴한 값에 손쉽게 가입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에게 자신이 우프 갖다와서 잘 애기
해 줄테니 꼭 건강하게 잘 있으라는 우량아 몸집의
인상좋은 사람이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중에는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3개월을 그냥 보낸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그 날 시드니 생활의 비애를 들을 수 있었고
나는 번다버그라는 이름을 각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그 들중 몇 몇 이 마나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일본여자는 쉽다?는
생각! 물론 나도 그들의 성문화에 대해서는 들어봤기에
그 녀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마나미는 내가 호주에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첫 외국인이었고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계속된 일본인과의 만남은
내가 갖고 있던 일본관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런 변화는 이 홈페이지에서도 알 수 있으리라.
몇 몇 한국인들이 그토록 두리하우스에 드나드는 이유중 하나가
마나미였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그 때까지 마나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형편조차 못되었었다. 사실 나도
두리하우스에서 인기가 좋았던 마나미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눈치로 보아 몇 몇 한국인들의 모습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았고 또 내 문장 짜맞추는 그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대화의 불편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드니에서의 3일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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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11시나 됐을까.
시드니에서 첫 날밤을 어떻게 보냈는 지 기억에 없다.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부석부석해지는 기분.
세수하고 라면에 밥 말아 먹고 킹스크로스로 향해 난 창가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영이에게 찾아갔다. 노크를 하자 문을 여는 일본 여자.
아 마나미지. 굿 모닝을 하며 미소를 만들고 머리에 정리아니
암기된 지영이 어디갔냐고 영작을 하자 그녀는 지영? 지영?
고개를 갸웃 댄다. "나하고 같이 왔던 한국여자"
그러자 그녀는 아! 하는 제스춰와 함께 아침에 나갔다고 한다.
아침에? 어딜 갔지? 나는 딱히 더 할 말도 없고 없는 게 아니라
말이 안 되니 문을 닫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영어 교재를
들척이고 있었다. 귀에 익은 한국말 소리. 앗! 반가운 마음에
나가보니 두 명의 한국남자. 그들은 어딘가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의 소개끝에 그들은 어제 저녁에
도착했으며 지금은 워킹 홀리데이 협회에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안 반가울리가 있겠는가) 그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시드니의 시내로 들어가는 첫 발걸음이었다.
얼마나 걸었는 지 모른다. 그들 영어나 내 영어나 바닥을
기고 있었고 간신히 질문을 하면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이해가 빨랐다. 그들과 대화중에 저 만치 보이는
다리가 하버 브리지라는 것도 알았고 시드니 인구가 어떻고
하는 것을 알았으니, 어쩜 이 글은 읽는 분중에는 정말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지 모른다. 어쩜 그게 당연하다.

어쨌든 그들과 함께 워킹 홀리데이 협회를 찾아가게 되었고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마자 보이는 구인광고와 쉐어광고등이
덕지덕지 붙은 게시판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여기서 일자리를
잡을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사무실 안에는 한 무리의 떼거리들이
있었고 그 들중에는 정희의 모습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물었더니 어느 호주인집에서 쉐어를 하고 있는 데 너무 좋다나
어쨌다나. 이그.. 그리고 학원은 다음 주부터 다닌다는
속 뒤집어 놓는 소리들이었다. 흠...나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냥 씩~웃음 짓고 말았지만, 곧 그들은 헤어졌고 그 것이
정희와의 마지막이다. 사무실 아가씨에게 어제 한국에서 왔다고,
이 곳에서 통장도 만들어주고 일자리도 알선해 주고
세미나같은 것(초기 체류자를 위한 안내같은 것)도 해 주냐고
-이 것들은 한국에서 협회 가입당시 안내문에 명시된 내용들이었다.
회원 혜택이라는 이름으로- 물었을 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저 사람들은 다 만들었다고, 일자리는 알선해주는 것은 아니고
단지 정보만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미나에 대해선
기억이 안난다. 단지 기억에 남는 건 너무 큰 실망과 허탈감에
황당해 했던 기억뿐. 게시판에 대해 물었을 때 그 것은
단지 한국 정보지(교차로 비슷하지만 책자 형태)가 발행되기 전날
미리 정보를 입수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좀 더 빠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일 뿐 협회에 따로 일자리가 들어오는 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가씨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에서였는지 은행에 전화를
해 주겠으니 가면 알아서 해 줄 것이라는 배려?를 해 줬다.
우리는 털레 털레 common wealth bank를 물어 물어 갔더니
은행원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여권번호와 두리하우스 주소등을
적고 통장을 만들었다. 1주일 뒤에 주소지로 보내 진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한가지를 했다는 만족감에 두리로 돌아왔다.
시드니 시내를 걸어오며 어떻게 해야 할 까라는 난감한 기분과
까짓 설마 여기서 죽기야 하겠냐라는 생각등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난 지금도 시드니는 별 기억이 없다. 물론 그 곳에서 어떤 비치와
하버 브리지를 건너고 오페라 하우스를 가고 그랬지만
기억에 남는 건 마나미함께 했던 킹스크로스에서 가까운
윌리암 스트리트와 옥스포드 스트리트뿐이다.
여기서는 내 기억에 있는 내용만 담을 것이다.
그렇게 두리로 돌아왔을때 지영이가 있었다. 지영이에게 통장을
만들었다고 하며 아까 어디 갔냐고 했을 때 그 녀는 방을 구했으며
내일 방을 옮긴다는 것이다. 맙소사! 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역시 여기서는 영어가 최고다. 학교에선 공부 잘하는 놈이 최고지만
나이트에선 춤 잘추는 놈이 최고 아닌가.
그 녀는 자기도 통장을 만들어야겠다며 같이 은행에 가게 되었다.
은행원과 예의 그 유창한 대화끝에 그 녀는 신청을 마쳤고
나는 카드를 직접 은행에 가서 찾으면 더 빨리 가질 수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두리로 왔을 때 멜버른에서 왔다는 유학생을
만났다. 그는 올 해 졸업하게 되어 귀국을 앞두고 있다는 학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주 생활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말하는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거북스러울 수도 있는 자칭 cosmopolite
였지만 그런 말들이 모두 나에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는 다른 곳에서 머물고 있는데
예전에 이 곳에서 머물렀던 기억이 있어 놀러 왔다는 것이다.
그 날 밤,
우리는 그리피스(Greefith)에서 올라온 두 명의 시커먼스를
만나게 되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로 필리핀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그들이 내게 준 정보.
그 건 번다버그(Bundaberg)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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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도착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모든 걸 지영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정희와 난 지영을 쫓아 다녔고
그렇게 해서 비자에 입국도장을 찍고 시드니 공항내부로 들어섰다.
정희는 pick up 서비스를 신청한 상태라 워킹 홀리데이 협회에서
나온 사람을 찾고 있었고 나는 지영에게 우리도 그 사람에게
한 번 부탁해 보자는 애기를 했다. 하지만 웬 걸,
내 또래의 남자는 내가 웃으며 애길 꺼냈을 때 한국에서 신청한
사람들만 태운다는 차가운 대답만 들어야 했다.
어짜피 pick up서비스를 신청할 땐 약 5만원 가량의 돈을
한국의 워킹 홀리데이 협회에 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
머 할 말은 없었다.
그래, 이제 모든 건 나 혼자 해내야 하는 것 아닌가.

누구에게 의존하려 하지 말자. " 다시금 머리를 흔들고
있을때 지영은 두리 하우스로 가자는 애기를 꺼냈다.
" 두리 하우스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잖아요.
책에서 보니까 주인도 한국사람이고 하니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쪽으로 우선 가보죠"
공항을 나서자 밀려드는 더위와 피곤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가자고 정희에게 말했다. 택시 기사는 우리의 베낭을
직접 트렁크에 실어줬고 난 생소한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사람이 마음이 약해지면 감동도 쉽게 받나 보다.

두리 하우스에 도착하고 보니 요금은 약 23불 정도.
팁을 합해서 25불을 지급했다. 당시 환율이 호주 1$당 800원정도.
약 2만원 가량의 요금이었다. 그 곳은 책자에서 말하는
남반구 최대의 환락지구라는 킹스크로스에 위치한 곳이었다.
두리 하우스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 2층의 카운터에서
지영의 유창한 영어 (난 지영이가 미국에서 살다 오지 않았는가
의심스러웠다)로 남미 쪽의 청년에게 일 주일간 방세 95$을 내고
나는 2층의 도미토리에 침대 한 칸을 얻었다. 침대가 6개가
놓여 있는 그 곳은 마침 홀랜드인 3명이 있었다. 나는 짐을 정리했고
영어 사전과 영어 회화 책인 interchange를 꺼내는 걸 잊지 않았다.
창 밖을 보며 담 배 한개비를 물었다. 호주 안내 책자를 들척이며
이 곳에 대해 외우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 산 뒤로
한 번도 들척이지 않던 책. 정말 그렇게도 무관심할 수가 잇었는 지,
저녁 무렵의 시드니는 한국의 초가을과 같은 날씨였고
그 것은 날 더욱 힘들게 했다. 어쩜 이 글을 보는 어떤 이는
내가 심약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 심정들이 나 개인의 소심함에서 비롯된다
할 지라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최소한 나보다는
준비를 착실히 해가는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이다.

지영이 머무르게 된 곳은 여자들만 쓰는
싱글베드 2개. 2층침대가 하나 있는 계단 옆의 방이었다.
그 곳에 찾아 갔을 때 그 곳에는 일본 여자가 있었고
그녀의 이름은 마나미란 걸 알게 되었다. 여자치고는
큰 키에 일본인 특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나미와 간단한 인사
-결국은 Hello와 Where are U from정도-를 했고
정희와 난 근처의 woolwolthy라는 대형 수퍼마켓에 가서
저녁부터 해결을 해야 했다. 지금은 한국도 대형 슈퍼 체인의
형태가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신기하기만 한 그 곳 -제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계산대에서도 바코드로 인식하는-에서
라면중 제일 싼 saving 상표가 붙은 라면을 4개와 쌀 1kg을 샀다.
수퍼를 나오며 영수증을 꼭꼭 챙기던 정희는,
" 우리는 호주 국민이 아니라 세금을 낼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제품에는 다 세금이 붙어 있는데 귀국 할 때 세금을
환불 받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나는 지영에게 내 영수증을 같이 주며 웃음을 지었다.

킹스크로스는 밤이 되면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을 걸어갈때 들리는 한국말과 일본말,
그 건 나이트 클럽에서 호객하는 소리였다.
그들은 우리가 일본인인 줄 알고 일본말로 했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다시 한국말로 호객하는 것이다.
네온사인과 형형색색의 불빛들, adult shop, 그리고 PUB들,
우린 백패커스로 돌아왔고 저녁을 각자 해결했다.
방 한쪽에 창문으로 통하는 곳에 샤워실이 있었고 그 곳에는
전기오븐이 있었다. 코일이 감겨있어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으면
코일이 가열되는 방식의 오븐. 한 쪽 싱크대엔 식기류가
아무렇게나 팽개쳐 있었다. 그 것들은 공용이었다.
saving라면을 먹으며 생각한 것은 한 끼를 해결했다는 것!
영어를 공부한 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우선 의사 소통이나
하자는 뜻으로 책자를 들척이다 지영에게 찾아 갔을 때
지영은 마나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나미는
그 곳에 온지 3개월이 되었고 그 뒤로도 만난 다른 일본인과는
다르게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다. 항상 누구에게나 웃는 표정을
지어주었고 상냥해서 백패커스에서는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한국인이 나, 정희외에 3층에 1명이 있었는데
그는 백패커스 청소를 해주며 숙박비를 면제 받고 있었다.
나는 지영과 우선 내일은 워킹 홀리데이 협회를 찾아 가기로 했다.
당장은 그 곳 밖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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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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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03 정권시절 호주 그리고 캐나다와 협정을 맺어
젊은이들끼리 상호 자유롭게 ? 방문하여
문화교류를 하자는 뜻에서 맺어진 협정이지요.
처음에는 영연방에 한하여 가능했지만 점차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한국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 일 양국간의 협정을 맺어서 일본도 갈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dear Japan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97년 3월 14일 출국하여 그 해 일 년을 못 채우고
IMF구제금융을 받던 12월 그 것도 24일에 입국하였죠.
당시 호주에서는 한국의 경제상황에 많은 관심을 보였거든요.
한국은 호주의 두 번째 무역 상대국이었으니 당연할 지도 모르죠.
첫 째요? 일본이죠. 전 그 때 공항 면세점에서 part timer로
근무하면서 고생쫑 행복쨍을 누리고 있었는데 고 놈의 IMF가
절 부르더군요. 비장한 마음으로(정말 비장했음)
일찍 들어가 보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귀국을 했는데...
이 후 정말 실감나는 IMF한파를 겪었죠.
아니 겪고 있죠.  여러분 처럼요.

이 곳에선 제가 경험한 10여개월의 호주 생활들을
정리해 보렵니다. 얼마전 TV에서 보니 그 날강도 같은
워킹홀리데이 협회가 엄청 컸드라구요.
근무하는 사람들이 몇 십명단위로 말이죠.
제가 갈 때만 해도 4명인가, 5명인가 그랬거든요.
누가 워킹홀리데이로 호주나 캐나다 가는데 협회에 등록해서
간다고 하면 도시락 싸가면서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더덩넘들같으니,....흠, 어쨌든 앞으로 올라올 내용들은
비록 제 개인적인 내용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올릴께요.
우선 시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기 그 처음으로
제가 들어간 비용을 어느정도 정리해 봤습니다.


워킹홀리데이협회가맹비(수속관련 일체 포함)

비자및 기타

출국시 소지금액

약 110만원

약10만원

약80만원


워킹홀리데이 협회 가맹비에는 싱가폴 항공 1년오픈 티켓
당시 80만원인가 85만원정도에 협회에서 끊었다고 하더군요.
헐,..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그러니까
약 200만원 들어갔군요.
히휴~~ 내 돈. 제 기억에 근거한 대략 산출입니다.
정말 저는 피같은 돈 다 끌어 모아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귀국할 때 가지고 온 것 빼면 쌤쌤이네요. 쌤쌤??
후훗! 똑같다는 콩글리쉬 아시죠? 그런데 외국인들도 잘만 알아듣더군요.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시거나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연재되는 글들을 지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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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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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한 참을 눈물을 글썽이다가 말을 꺼냈다. 1년동안 가족과 친구들과 떨어져 있을려니 눈물이 난다고, 극히 소녀적인 감상이었다. 흠, 정희는 대학 2년 휴학계를 내고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했고 시드니의 어학원에 등록을 했으며 홈쉐어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나는 어학원 등록도 하지 않았고 홈쉐어도 하지 않고 무작정 가는 거라며 너털 웃음을 짓고 말았다.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 "영어 잘 하나 봐요" 나는 그저 쓴 웃음을 짓고 말았지만 일단의 부러움은 피할 수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게 살기 위함(거듭 애기하는데 이렇게 까지 절실한 표현을 한다고 역겹게 받아 들이지 말아주기를)이아닌 가족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라면 하고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뒷 좌석에 앉은 지영을 알게 되었고 지영이도 워킹 홀리데이로 시드니에 간다는 걸 알게 되어 우린 쉽게 대화를 풀어나갔고 그 녀가 어학원 등록을 하지 않았고 홈 쉐어 신청도 하지 않은, 정말 나와 같은 입장? 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정말 그 녀와 대화를 쉽게 풀어 나갔다. 나중에야 나와 그녀의 입장이 천양지차라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다.

그 녀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에는 자의적으로 가지 않았고 다음엔 스페인에 가고 싶다는, 나 보다는 두 살 어린 이쁘장한 아가씨였다. 당찬 아가씨의 모습이랄까? 콧대 센 서울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경유지인 싱가폴의 창리 공항에 내렸을 때 역시 세계적인 공항이라 다르구나라는 생각. 김포공항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창리 공항은 매 년 우수 공항에 선두를 달릴 정도로 시설이 깨끗이 정리된 모습이었다. 여느 백화점을 연상하게 만드는 내부 인테리어,친절한 직원들, 공항내부의 시장 등, 지영과 난 싱가폴 항공에서 제공하는 city tour에서 같은 코스를 신청했고 그 와중에 그녀의 영어 회화는 가희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지워졌고 우린 그렇게 싱가폴의 깔끔한 도시의 빌딩숲을 보트를 타며 누비고 다녔다. 잠시의 싱가폴 투어는 내가 갖고 있던 걱정들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 잠깐의 시간동안 지영과 난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어쩜 그렇게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이국으로 떠나는 동행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비행기는 다시 이륙했고 어느덧 기내등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하나 둘 잠을 청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모포를 덮고 잠을 청했다. 기내안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넓은 가운데 좌석으로 가서 길게 누울 수가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까? 스튜디어스의 아침 식사메뉴 권유에 일어나서 바깥을 보니 오스트레일리아를 영공을 지나고 있었다. 두어 시간 뒤에는 도착할 것이라는 방송을 어렴풋이 들었다. 정희는 이미 일어나서 창 밖을 보고 있었고 정희는 계속 잠을 청하고 있었다. 지영에게 정희를 깨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을때 정희는 생각없다고 잠을 더 자겠다고 그랬단다. 흠. 시드니에 도착하게 된다면 이런 식사를 언제 하게 될 지모른다는 생각을 식사를 꼭꼭 챙겨 먹는 내 모습이 삭막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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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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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따스한 기후에 감싸인 해변에 행복이라는 물결이 넘실 거리며 도시엔 미소들만이 떠도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호주는 말이다. 별천지로만 여겨졌던 그 곳에서의 26세의 내 모습. 그 10개월은 나에게 무척이나 고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것은 단지 호주로 갔다는 그 것 이외의 큰 것일지도
모른다. 26의 그 해를 보내며 내게 다가온 열병들과 번민이라 불러도 좋을 -적어도 나에겐- 고민들은 나를 그 곳으로 내 몰았다. 여행이라고 해도 좋고 도피라 불러도 좋을 호주
Working holiday maker로서의 10개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내게 다가온 것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 현재의 불편을 이겨 나가고자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 아름답기만 하던 내 26의 호주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기억에 다시 곱게 빛을 내려면 지금 힘을 내야 하지 않을까.

워킹 홀리데이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학교에는 휴학계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영어 학원을 다닐까 컴퓨터 학원을 다닐까 하다가 결국은 인터넷학원을 등록했는데 밤에는 학원을 다니고 낮에는 신용카드 가입시키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많이도 쏘다녔다. 훗!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이라는 신분이
감춰주는 것들은 많은 것 같다.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사회적인 면까지 말이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가끔 그리워 지곤 한다. 공연한 말을 했군. 11월 부터 준비한 워킹 홀리데이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돼서 3월 12일발 호주행
Singapore 항공을 예약했다. 다가오는 시간들 속에 친구들에게도 그냥 베낭여행
간다는 말로 얼버무리고는 -사실 워킹 홀리데이에 애기해도 당시는 그게 뭐냐고 묻는 친구가 태반이라서 말이다-

서울을 탈출하다시피 떠나던 3월 13일 아침. 어디로 가는 사람들인지 제각기 분주한 모습이었고 협회에서 나온 사람이 탑승자 명단을 체크하고 있던 공항. 환전 창구에서 90만원이 채 안되는 돈을 AS 달라로 바꾸고 해외 출국 신고를 하고 나서 보딩 타임만 기다리고 있자니 드는 한심한 기분. 그 건 어쩌면 내 빈약한 경제적 처지에서 비롯된 기분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 것이다. 푸~ 호주에 왜 가냐고 할 때 난 이렇게 말했다. 영어도 배우면서 여행도 하겠다고, 과연 그게 말처럼 될 것인지 스스로 의문을 띄우며 시달렸다. 안전벨트 매구 어쩌고 하는 기내 방송과 함께 옆에 앉은 여학생은 계속 훌쩍 거린다.
"같은 일행이군. 그런데 왜 울고 있지? 어쩜 호주에서의 생활이 불안해서 그런가" 나는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는데 어쨌든 이 아가씨도 무언가에 불안한가 보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게 사람 마음인지 모른다.  그래서 정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는 오히려 나를 더욱 힘들게 하더라. 흠냐리~ 어학원에 이미 3개월 등록했고 홈 쉐어로 들어가며 공항에서 pick-up 서비스까지 신청해 놨다는 것이 아닌가. 우는 이유는 1년간 헤어져 있을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는 거라는 정말 소녀적인 감상때문이었다. 흠, 또다시 혼자임을 느끼며 앞 날을 씹고 있는데 정희와 대화를 나누던 뒤에 있던 지영도 워킹 홀리데이로 가는 것이며 어학원도 등록을 하지 않았고 (그 이유를 난중에 알았지만) 방도 구하지 않았으며 Sidney에 도착하는 대로 일자리부터 구해야 한다는 말에 난 동료를 만난 거 같아 너무 기뻤다. 같은 일행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묵중한 이 쇳덩어리가 어떻게 날라다닐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약간의 여유를 가지며 호주 관광책을 읽고 있으려니 김포 시가지가 점점 멀어진다. 1년 뒤에 다시 가까워질 모습들이지. 그 때는 좀 시원한 마음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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