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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따스한 기후에 감싸인 해변에 행복이라는 물결이 넘실 거리며 구리빛으로 그을린 청춘 남녀들의 미소들이

떠도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호주는 말이다. 별천지로만 여겨졌던 그 곳에서의 스물 여섯의 내 모습.

10개월 나에게 무척이나 고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것은 신문에서나 혹은 TV에서나 보며 막연하게나마

동경하던 호주로 갔다는 생소함 이상의 것이다.

 

내 또래의 젊은 청춘이 그렇듯 나 또한 느즈막한 나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열병들과 번민이라 불러도 좋을

-적어도 나에겐- 고민들은 그 곳으로 내 몰았다. 여행이라고 해도 좋고 도피라 불러도 좋을 호주 Working holiday maker로서의 10개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내게 다가온 것은 그 이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 그 기억을 용기삼아

현재의 불편을 이겨 나가고자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 아름답기만 하던 내 스물 여섯의 호주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기억에 다시 곱게 빛을 내려면 지금 힘을 내야 하지 않을까.

 

벌써 10여년이 흘렀내요. 저는 1996314일 출국하여 그 해 일 년을 못 채우고 IMF구제금융을 받던 12

그 것도 24일에 입국하였습니다. 당시 호주에서는 한국의 경제상황에 많은 관심을 보였었기에

한국의 IMF는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한국은 호주의 두 번째 무역 상대국이었으니 당연할 지도 모르죠.

 

첫 째요? 일본이었죠. 전 그 때 공항 면세점에서 part timer로 근무하면서 고생쫑 행복쨍을 누리고 있었는데

고 놈의 IMF가 절 부르더군요. 비장한 마음으로(정말 비장했음) 일찍 들어가 보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인생의 반환점과도 같은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워킹홀리데이와 같은 것 말이죠.

10여개월의 호주생활은 지금까지도 내 삶에 용기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든든한 응원군이며

소중한 자산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약간의 무책임과 치기가 버무러진 자세로 시작된 호주의 첫 도착지인 시드니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긴 기초 회화마저 쑥맥인 실력에 가져간 현금이라곤 86만원이 전부였으니 말이죠.

경제적인 궁핍에서 오는 조급함으로 도착하자마자 파트타임 잡을 찾아나서야 했지만

먼저 온 한국인들이 이미 지나간 자리들뿐이었습니다. 마치 때늦은 늦여름 바닷가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사장을 홀로 걷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시드니에 있었던 9일간, 일본인 마나미를 알게 되었고 일본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설픈 영어에 귀를 기울여 주고 또 격려해 주며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수 많은 생각과 단어를 떠올려야 했던 그 답답함을 오히려 안쓰럽게 지켜봐 주었습니다. 그 건 다분히 편향적이었던 일본인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충분한 이유였으며 이후로 여러 일본의 젊은이들을 만나며 전 그들을 친구로서 충고와 격려를 해줄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둘이 고민하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저 빈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9일간을 긴장과 초조함속에 보내다가 우연히 그리피스에서 온 여행자를 통해 번다버그를 알게 되었고 지체할 것 없던 나는 맥패커씨를 타고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포도 주산지로 알려진 Grifith에서 농장일을 하다가 번다버그로 가는 길에 시드니에 들른 것이었습니다. 18시간을 타고 브리즈베인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탄 후 6시간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터미널에서 알게된 Princess of wales까지 찾아가던 그 길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한 낮 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차량도, 인적마저 드물어 오히려 불안했던 도시. 짊어진 배낭아래로 흘러내리던 땀방울, 업었다가 들쳐 매었다가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하며 황량한 그 곳에 도착했지요. 농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니 편해지더군요. 외국인 친구들과도 함께 놀러 다니며 한 잔의 맥주로 피로를 풀기도 하며 말이죠. 호주에서 다가오는 모든 경험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리라 믿었습니다. 외국인들과 격의없이 만나며 대화하고 친구처럼 즐겁게 지내기도 하며 함께 Bundaberg Aqua Scuba에서 open water 라이센스를 취득하였습니다. 가끔 주말이면 시내의 다른 백팩에서 한국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하기도 하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지요. 번다버그에서 보낸 약 3개월의 시간동안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별 것 아니구나하는 자신감을 얻은 것은 확실 했습니다. 가진 돈이 없어 일을 구해야 한다고 1000$을 들고 번다버그로 들어갔던 제가 다음 행선지인 Fraser island로 갈 때는 700$이 있었으니 말이죠. 번다버그에서 일본인 지애를 만났습니다. 동갑내기인 지애와 함께 한 2개월여의 여행은 호주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중 하나입니다. 함께 히치하이크를 하고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매니저에게 말해 같이 일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전 보물처럼 가지고 있던 된장과 고추장으로 수퍼에서 산 여러 호주 야채를 곁들여 국이나 찌게를 끓이곤 했는데 지애는 그 국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입맛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번다버그를 떠나 프레이저 아일랜드에서 Safari tour를 마치고 전 Gold coast로 갔고 지애는 Rock hamnpton으로 갔습니다. Suffers paradise 라는 이름처럼 왜 그리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지 그 때의 지독한 외로움은 지애와 헤어진 직후라 더했는지 모르죠. 식당을 찾아봤지만 잡을 구한다는게 하늘의 별따기와 같더군요. 번다버그에 있을 무렵 써퍼스 파라다이스에서 올라온 누군가가 극구 말리던 기억이 새삼 떠 오릅니다. 결국 다시 TNT를 뒤적이다 눈웨 띈 보웬. 보웬으로 갈 생각을 하고 거리를 거닐던 중 일전에 지애가 보여주었던 유스호스텔 티켓이 생각났습니다. 롹 햄프턴의 몇 개 유스호스텔 전화번호를 알아내었고 그 중 몇 군데 연락을 하다가 통화가 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감정이 나와 다름이 없음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 녀는 Woof를 위해 Miliam vale로 간다더군요. 결국 그녀와 다시 Agnes water의 독일인 가정에서 일주일간 팜스테이를 함께 했습니다. 독일인 부부와의 생활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독일인부부는 vegitarian이었으며 BeatlesImagine처럼 종교에도 국적에도 그리고 피부색에도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빵이나 요쿠르트를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식탁에서는 Korea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보며 BeatlesImagine을 애기하곤 했습니다. 아침이면 꽃이나 수목에 물을 주고 오후엔 히치하이크로 주변에 놀러 다녔지요. 일주일 머무른 이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에어리비치를 향했습니다. 에어리비치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여러 도시중 호주에서 아름다운 곳중 한 곳이라 감히 말씀 드립니다. 아담한 마을과 같은 분위기에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아름 다운 곳이죠. 13Begley에서 3일을 지내며 에어리 비치를 만끽했습니다. 45$하는 Cruze도 괜찮았습니다. 비록 배멀미와 감기가 겹쳐 고생을 했지만 말이죠. 지애와 함게 했기에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릅니다. 마을너머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정경에 취하기도 하고 언덕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유치한 궁금증에 걸어 올라갔다가 털래 털래 걸어 내려오는 무미건조함도 있었지만 말이죠. 이제 돈도 떨어졌으니 다시 보웬으로 가야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간 보웬의 정류장 근처에 있는 Denison hotel에서 몇 일 지내다가 이 곳 저 곳에 정보를 얻어 Trinity backpackers로 옮겼습니다. 보웬의 가장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그 곳에서 다시 일을 하면서 부족한 잠과 싸워가며 회화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어떤 이는 호주에 도착하면 어학원에서 3개월정도의 회화공부를 하고 쉐어나 하숙을 하지만 전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오히려 악이 생기더군요. 처음 방을 얻었을 때 룸메이트로는 스코틀랜드의 귀여운 아가씨 Sarah Rollo였습니다. 호주에 오기전 멜 깁슨 주연의 Brave Heart를 감명깊게 본 지라 영화 애기를 하며 스코틀랜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니 반가워하며 잘 해주더군요. 치마입고 악기 부는 남자들하며 이런 저런 애기를 하자 사라도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고 말이죠. 우린 쉽게 사라와 친해습니다. 같은 방을 쓰는데다 워낙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라였기에 우리 유니트는 사라의 친구들로 차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옆 방에는 23살인 Hieth라는 뉴질랜드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확실치 않지만 전 히쓰라고 불렀습니다. 히쓰의 영어만 그런 건지 뉴질랜드 영어가 그런건지 모르지만 조금 발음이 특이했어요. 히쓰는 사라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있는 곳엔 히쓰의 모습도 보였으니 말이다. 2주일뒤 사라가 케언즈로 갔을 때 외로워 보이던 히쓰. 언젠가 일이 끝나고 와서 보니 씨익 웃는 그의 입에서 이빨 두 개가 없어진 것을 알았고 나는 누가 그랫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뒤에 알고 보니 싸움이 있었는데 히쓰가 상대방에게 더 많이 상처를 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큰 키와는 달리 정말 순진해 보이던 히쓰. 언젠가 술에 취해 쓸쓸한 듯 사라가 보고 싶다며 말하던 히쓰의 푸른 두 눈엔 연민이 가끔 비치곤 했습니다. 사라에게 전화도 못하고 그 저 주소와 전화번호만 갖고 있다던 뉴질랜드에서 온 히쓰와는 같이 일도 하며 훗날 보웬을 떠나기 떠나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습니다. 당시 보웬은 전국에서 Picker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한국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자신의 계획대로 생활을 잘 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또는 그렇지 못한 이도 있습니다. 어학은 호주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의 활동폭을 넓힐 수 있고 다른 여행자들과의 교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요. 영어를 잘 하시는 분은 괜찮겠지만 못하시는 분이라도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한다면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호주까지 가서 어학 하나의 이유로 풍부한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을까요. 지애의 비자가 끝날 무렵 이 되어 귀국편을 타기 위해 케언즈로 출발하게 되는 날 아침입니다. 지애가 떠나는 날 전 지애를 배웅한다고 전날 매니저에게 말하고 하루 쉬었습니다. 모처럼 늦잠을 잤어요. 햇살이 창가로 나 몰래 살짜기 발을 내 딛은 늦은 아침. 눈을 떠 봅니다. 허리가 여전히 묵직합니다. 이리 저리 뒤척여봅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지애가 보입니다. 바보같이 웃내요. 헤하고 말이죠. 방긋 저두 웃습니다... 몇 시 차냐고 묻자 2시차라고 합니다. 밥먹고 가면 되겠구나. 일어나서 이빨을 닦고 샤워를 해 봅니다. 백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다들 일나갔군. 방에 들어와보니 짐을 챙기고 있는 지애. 지애는 내가 일과 후에 다른 곳에 가서 술을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면 따라 오지 않고 혼자서 방에 있었는데 쉽사리 다른이에게 말을 못 거는 성격이라 심심했을 것입니다. 있을 때 잘 할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 하기 보다는 듣기를 좋아했던 지애. 지금 생각하면 처음엔 정말 당돌하다 싶던 아이. 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정말 안 어울릴 거 같았는데 말이죠. 둘이서 공연한 일로 신경전을 펴기고 하고, 애써 토라진 너를 달래려고 애쓰기도 하고,.. ~! 너를 안지 어느새 2개월이구나. 이제 가는구나. 점심때 어제 저녁에 Coles에서 사 온 닭다리를 이용해서 야채를 섞어서 닭죽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식사입니다. 지애와 함께하는. 버스안에 지애가 앉아 있습니다. 울지 않습니다. 그래 너는 강하니까, 차가 출발 할 무렵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고 어깨에 교대로 올리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내요. 나도 같이 해 주었는데 어제 같이 본 영화에서 어느 연인이 헤어지면서 나누는 제스춰였습니다. 몇 일뒤 케언즈에서 신라면과 과자, 그리고 고추장이 소포로 배달되었더군요. 이후 1400$이 모이게 되면서 케언즈로 출발했습니다. 워킹홀리데이 기억에 농장에서 과일딴 기억만 있는 거 아냐? 하는 자문에서 비롯된 자답이었습니다. 케언즈에 와서는 다른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는 신념으로 찾아나선 끝에 국제공항내의 면세점에서 파트타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잡을 찾기 위해 비디오가게, 모텔, 백패커스, 주유소등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힐튼 호텔을 찾았을때의 기억이 납니다. 정성스럽게 resume를 작성하고 그 것을 봉투에 넣어 호텔문으로 들어가저 도어맨이 묻더군요. 손님같지는 않아서 그러했겠지요. 전 잡을 구하고자 지원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자신이 매니저에게 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냥 전해주고 말았는데 몇 일뒤에 편지가 왔더군요. 관심에 감사하지만 현재는 채용계획이 없고 계획이 있을때 다시 연락하겠다는 글과 매니저의 싸인이 든 내용이었습니다. 비록 소기의 성과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어디든 두드려보면 그래도 대답은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밤에도 문을 여는 가게는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저녁밥을 먹고 돌아다녔지요. 결국 에스플러네이드의 푸드코트에 있는 중국식당에 디쉬워셔로 취업했지만 곧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던 일을 다른 이가 같이 하게 되면서 말이죠. 한 시간에 6$ 50C였지만 감사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우연찮게 일본인들이 자주 가는 일본의 식료품점의 보드를 보다가 공항의 면세점에서 일본인을 찾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급히 연락을 하고 곧 인터뷰를 한 결과 고용이 되었지요. 면세점에서 하는 일은 일본인이나 한국인에게 보다 비싼 위스키나 꼬냑을 프로모션 하는 일이었습니다. 할인점에 도우미들이 물건 홍보하듯이 말이죠. 유럽인들은 대부분 저렴한 제품, 자신의 기호품을 찾는데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은 선물을 하기 위함에서인지 몰라도 비싼 제품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판매를 위해서 제가 고용되었던 것이죠. 농장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한 근무환경과 높은 급료는 그 동안 고생했던 것에 보답이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대견스럽더군요. 시간당 15$이 넘는 페이를 받았으니 꽤 많은 금액이었지요. 집도 렌트해서 일본인에게 작은방을 임대하고 큰방은 도서관에서 알게 된 한국인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일본인은 물론 이태리인과도 같이 생활을 하며 보다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에 대한 이해가 가장 컸던 거 같내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작은 목소리로 애기를 하며 한국인에 대한 어떤 오해도 없었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라면 충결일까요. 호주는 전 세계 특히 유럽에서 많은 젋은이들이 옵니다. 호주의 드넓은 자연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또 체계적으로 짜여있는 관광 시스템은 그 돈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그 곳처럼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중 3일에서 4일 오전은 공항게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콜스에서 산 싸구려 낛싯대를 들고 케언즈항에서 낛싯대를 드리우곤 했습니다. 제가 렌트한 집이 있던 Sheridan st. 에서 케언즈항까지는 번화가인 esplanage st.를 지나 자전거로 15분정도 걸립니다. 큰 도로 주변으로 있는 도시의 건물들은 시드니나 여타 도시와는 다른 특색을 엿 볼수가 있습니다. 당시 인구는 10만 정도의 작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더욱 커졌겠지요. 변화도 많았을테구요. 작지만 우리나라의 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market도 있고 큰 공원도 있으며 문화적인 환경이 잘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밤에는 Beaches라는 나이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추며 놀기도 했습니다. 케언즈는 그 간의 농장생활과는 또 다른 이국생활의 묘미를 주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이국문화와 호주를 조금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간 적막하기만 했던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생활에 또 다른 파스텔빛 색채를 안겨주었습니다. 10여개월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로서의 생활을 짧게나마 요약을 하려니 불완전한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미숙한 글솜씨로 인해 군데 군데 이 빠진 동그라미처럼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은 귀국이후 제 홈페이지인 http://dcity.co.kr 을 통해 조심스럽게 올려놨답니다. 그리고 호주의 경험을 기억삼아 다른 나라도 갈 수 있었고 말이죠. 일상에서 그 때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애기할 일도 없고 또 말한 다는 것도 겸연쩍었는데 그 동안의 생활을 이렇게 쓰면서 뒤 돌아보니 그 건 기억뿐이 아니었내요. 가끔 그 때의 앨범을 뒤적이거나 호주 소식을 우연찮게 보거나 접하게 될 때는 그 때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클로즈업되기도 합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의 충실함에 감사하며 내일의 계획을 다지다가도 그 때의 모습들이 미소짓게 하는 걸 보면 말이죠. 길지도 않은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호주에서의 생활은 이후 그 해 IMF로 인하여 일정보다 빨리 돌아와야 했지만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경험은 이후 제 인생의 새로운 변곡점으로 용기와 기회를 가져다 준 무지개와도 같습니다. 누군가 워킹홀리데이로 고민을 한다면 전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젊다는 건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그 기회다.”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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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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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시작한지가 햇수로 4년을 넘어간다. -.-;
이젠 그 때의 기억을 떠 올리거나 꺼낼 기회가 있으면 호쾌한 웃음이 나온다.
그 웃음은 잘 했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일 것이리라.

이제 케언즈이야기도 마무리지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항상 새로운 길을 걸어왔고 도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케언즈를 모처럼 떠올리니 생각이 난다. 이름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강남어디에서 까페를 운영하다가 아버님의 성화에 못이겨 호주로 왔다는 그 아인 돈은 많았다. 나보다 세 네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디쉬워셔로 일할때 피얼스 뒷편에서 낛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때의 만남이었다. 그 아이가 말하는 것은 의아심을 넘어 또는 부러움까지 때론 갈 때가 있다. 자신이 운영하던 까페가 강남에서 꽤 이름난 곳이이서 연예인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그런 류의 시시껄렁한 애기였지만 귓가를 자극하는 강남이란 동네의 풍속도를 얼핏 들을 수 있었다. 그 때까지 강남이란 곳에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여유를 즐길만한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다. 가끔 매스컴에서나 들었을까? 그 아인 친구와 둘이 케언즈로 와서 쉐어를 구하고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케언즈를 택한 이유가 순전히 꺼리가 많다는 이유란다. 볼꺼리, 놀꺼리, 애깃꺼리 말이다. 이제 케언즈 생활도 익숙해져서 피얼스의 부두에 앉아 저 바다 건너 어드메쯤 우리 집이 있겠지 하며 잡담을 나누기도 하며, 외모에서 부티가 나는 그는 한동안 종종 만나면 영어도 안되고 그래서 어학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가끔 피얼스에 나와 나와 이런 저런 잡담을 했는데 어느때부턴가 안 보이길래 친구에게 물어보니 일본인들과 친해져서 놀러다니기 바쁘단다. 하하 그냥 웃고 말았다. 이 후 그 아이완 대화 한 번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도 머하나? 까페 하나?

나와 같이 자취하던 그 아일 빼 먹으면 안 되지. 두 달정도 되는군. C대 경제학과를 다니던 그 아인 내가 쉐리단 스트리트의 쉐어룸을 구하고 이태리인과 일본인이 자기친구한테로, 여행으로 떠나면서 그 집을 나 혼자 사용하게 되면서 구한 아이다. 전형적인 대학생의 외형으로 CPA를 따고 싶다며 열심히 공부하던 아이. IMF사태로 일찍 귀국하며 이런 저런 일상에 치이다 보니 연락도 못하고 결국 무얼하나 가장 궁금해하는 동생이다. 내가 잘해주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던 지금 생각해도 많이 미안한 동생이다. 그 때 동생이 보던 책이 "오성식의 SOS 7200" 맞나? 그 책을 무던히도 열심히 공부하더라. 아마 지금쯤 좋은 곳에 취직 하였으리라. ㅋㅋ 그 곳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좋아하고 오해하고 애정 싸움도 한 다는 것을 보여준 동생이다.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적어가다 보니 무슨 사람애기가 이렇게 많나 싶기도 하다. 내 생에 사람이 부족해서일까? 하~ 생각해 보면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웃고 떠들던 기억이 참 행복하기도 하다. 그래 난 사람이 부족한가 보다. 앞으로의 생은 사람농사 잘 지어야 겠다. 이제 틈틈이 호주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려면 나도 이 곳을 찾아봐야 할 거 같다. 몇 년 전에 쓴 글들을 보다 보면 아~ 그 때 그랬었지. 하며 씨익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나는 오늘도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고 또 과거의 사실을 잊어 간다. 머 이 것을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인 애긴 할 순 없겠지만 아쉬울 때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어쩜 공연한 글쓰기에 시간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일상에서 그 때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애기할 일도 없고 또 말한 다는 것 조차 겸연쩍기 짝이 없었는데 그 동안 이렇게 써왔고 뒤 돌아보니 그 건 기억뿐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렇게 난 살아있고 앞으로도 내가 있는 이 땅을 밝고 있는 동안은 그 것들도 이 땅을 밟고 있지 않을까.

난 새로운 길을 간다. 그 간의 낯부끄러울지 모를 경험담을 보고 발길을 돌렸을 지도 모를 분들에게 책임못질 사과를 같이 하며 호주의 경험담은 행여라도 어느날 이유없을 뒤척임으로 잠못이루다가 아직 일상에서조차 끈적거리는 지난 호주에서의 내가 떠오른다면 컴퓨터를 부팅할 것이다. 이 글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더니 연재를 시작하면서 계획했던 끝은 Do it again 이다. 하하. 또 기약없는 글을 올려야 겠군. -.-;

* 근데 말이야. 마지막을 좀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낙서가 되어 버렷다. 마음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아서 일꺼야. 아마도 말이야. 지애도 생각나고 마나미도 생각이 난다. 지애. 마나미. ^^; 참, 이빨 빠진 부분은 음..담에 담에... 정말 담에... 담에 하자. 담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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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town duty free shop.


시간당 15$이 넘는 pay. 시원한 근무환경. 여기서 근무하게 될 줄 몰랐는데 결국 나에게 온 거야.
유치할 지 모르지만 행복하다. 쉐리단 스트리트에서 이 곳까지 오는데 자전거로 약 이십분이
걸린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 곳에 자전거를 채워두고 공항으로 들어간다.
이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탑승객들이 통과하는 문을 지나 내부직원용 도어에
카드를 넣고 들어간다. 그러면 공항내부보다 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의 땀을 식혀주며
더욱 시원하게 해 준다. 면세점안으로 들어가서 끝에 있는 직원용 휴계실에서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넥타이를 매고 나오면 9시. 근무시간은 하루에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하지만 페이가 커서 생활하는데 지장은 없다. 매니저가 주류를 맡으라고 했지. 즐비하게 놓인
각종 주류와 함께 기념품,초코렛등을 맡는다. 이 매장엔 한국인이 두 명이 있다.
두 분 다 일본에서 적지 않은 기간을 살다 오신 분들이다. 한 분은 결혼해서 일본에서 살다가
호주로 이민온 분이고 또 한 분은 나이가 나보다는 어린 아가씨다. 일본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일본에서 삼 년 살다 왔다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아가씨와 함께 주류를 팔았다.
주로 일본 손님은 그 아가씨가 했고 그 외 영어권의 손님이 오면 내가 판매를 하곤 했다.
매니저가 말하기를 일주일에 만명의 고객이 온다면 그 중에 일본인이 팔천명이고 한국인이
일천명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꼬냑을 좋아한다. 그러니 고가의 꼬냑을 팔 수 있도록 푸쉬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틈틈이 주류 박스에 기재된 내용을 읽으며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떠듬거리며 유치하면서도 과장된 제스춰로 설명을 하곤 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일본인은 아주 좋아했고 그 것들을 구매하곤 했다. 일본인들은 여행을 갔다가 귀국할 무렵 아는 이들에게 선물을 해 줄 요량으로 많은 것들을 사 갔지만 그 건 아주 작은
기념품에서부터 쵸코렛등 사소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담배같은 것도 말이다.
마나미의 말로는 일본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들을 선물해주기 좋아한다고 한다.
그 것이 예의상일 지는 몰라도 말이야. 10시30분에 쉬는 시간 10분은 공항내의 탑승객 흡연실에
가서 담배를 피는 것이 좋았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짧은 대화지만 이야길 나누다 보면
나도 탑승객으로 이 자리에서 담배를 필날이 있겠지 하며 귀국하는 날을 기다려 보기도 한다.
면세점 내의 동료들은 무척 친절하고 근무 조건도 무척 좋았다. 농장에서 과일따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었으니 비교가 되지. 후훗, 요즘도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코엑스 같은 곳에서
푸드 코트들을 볼 수 있고 또 쇼핑몰들에선 일반화 되는 것이 푸드코트인 것 같다.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그 푸드코트에서도 한 쪾에선 열심히 접시를 닦고
있는 이들이 있다. 한 번 유심히 본다면 말이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자전거 페달을 가볍게 밟으며 케언즈의 바람을 즐긴다.
조금 여유가 생기고 부터는 pears 뒷 편에서 낚싯대를 드리운다. 경제적인 구속에서 해방되고
느끼는 그 편안함은지난 호주에서의 7개월의 고단함에서 오는 것일 꺼다. 그럴꺼야. 이 모습을
재이닐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말야. 호주에 처음 와서부터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
난 호주에서의 7개월들을 생각하며 내가 스쳐간 사람들을떠 올리며 궁금증을 케언즈 바다로
날린다. 어떤 이들은 진심으로 날 위해줬고 안타까워 했으며 잘 되기를 바래주었다.
모두가 그렇진 않았다. 그 것이 나로부터 인한 것일지라도 무시하거나 피하는 이들을 볼 때는
호주라는 곳에서의 외로움, 그리고 고독은 곱절로 다가오고 있었다.

케언즈에서도 만난 사람들은 많았다. 인생은 어쩜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아닐까.
그 것이 꼭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 들은 나의 일자리를 부러워 하기도 했고 지난 7개월의 호주 생활을 술자리에서든 이야기 하면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들 중에는 집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고 어학원을 다니면서 쉐어를 구해서 여유있게 사는 이들도 있었고
나처럼 농장에서 일하다가 돈을 모아 올라온 이들도 있곤 했다. 그들과 대화를 하며
내가 자신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어색하지만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영어 실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체계적인 공부를 하면서 어학실력을 키우고
있었지만 난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호주의 적지 않은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이 나와 같이
또는 더 어렵게 노력을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 그 것 이었을 것이다. 젊음이라는 것을 믿고 호주 이 낯선 땅에 내려
누군 어학원을 찾을 때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한 끼의 식사와 잠자리가 절실하기도
했던 많은 사람들. 나 또한 이러한 모습들을 훗 날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도록
오늘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하려 한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현실에서도 말이야.
그래야지 그런 이야기들이 결코 묻히지 않겠지. 그러려면 난 더욱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말이야. 아마 너희들도 그럴거야. 지금의 어려움은 과거가 되는 거야.

그리고 우린 미래에 있는 거야. 그 건 꿈이고 희망이야. 절대 희망을 놓치진 말아.
지금의 과거가 빛나는 빛깔로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을거야.
그런 날들을 위해 우린 열심히 사는 거지. ^^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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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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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일하는 면세점은 시내에서 꽤나 큰 편이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2층으로 된 건물안에는 신과 같은 일본인 아르바이트생이 1층에 대 여섯명의 아가씨가 있었고 신은 위층에서 담배와 초코릿등의 식료품을 판매한다.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 신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일본인 답지 않게 순진하게 생긴 신. 어쩜 내가 호주에서 본 일본인의 70%는 내가 생각하는 일본인의 외모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금은 간사하게, 조금은 멋있게도 생긴 거 같은 외모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난 한국인이나 일본인 구별을 90%이상 할 수 있었다. 어떤 특색이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일본인은 나를 일본인인 줄 알고 한국인은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을 했다. 내가 머리를 길고 묶고 있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전에도 종종 시내에 들르면 이 곳에 들러 신에게 내 처지를 애기하고 신은 위로하고 난jerkey며 초콜릿을 주섬주섬 먹고는 했는데... 후훗~ 신에게 내일에 있을 인터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은 진심으로 내가 취업이 되길 바라며 같이 기대에 들떠 있었다. 마침 손님이 들어오자 "이랏사이 마쎄" 하며 신이 고개를 숙였다. 신에게 간단한 일본어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신이 일하는 곳을 나오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쩜 현실로 돌아올 지 모를 희망에 모든 것을 채색되고 있었나 보다.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얼마전 서울에서 내려온 유학생에게 100불 주고 산 자전거를 타고 물어 물어 케언즈 공항으로 향한다. 시의 외곽지대라서 거리는 한산하다. 그리 많지 않은차량들을 지나다 보면 헬스 클럽도 보이고 작은 서점들, 그리고 가게들, 10분쯤 달리다 케언즈 국제 공항이라고 쓰여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돈다.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비행기 한 대가 머리위로 날아간다. 공항이구나. 공항버스도 지나가고 택시 몇 대도 지나간다. 페달을 밟으면서도 머리속에선 공항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대기만 하다. 어쩜 여기에서 근무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은 들지 않는다. 혹시 나의 긴 머리가 인터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개성인데... 존중해 주겠지 하면서 가볍게 생각한다. 보인다. 서울 공항이나 싱가폴의 창리공항과는 다르다. 좀 작은 거 같다. 공항내를 잘 꾸며진 꽃밭을 지나 어느 건물로 들어가서 근무자인듯한 사람에게 국제선을 물었다. 그가 가르켜준 방향으로 다시 폐달을 밟아서 도착한 케언즈 공항 국제선. down town 이라고 했지. 내가 본 국제 공항은 서울과 창리 밖에 없으니-아 마닐라도 있군- 기억이 번화하고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는데 그 건 아니었다. 중소도시의 어떤 무역 박물관 찾아 가는 기분이랄까?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게 조성된 꽃밭과 잘 정비된 도로들 사이를 지나 국제선의 down town을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보니 다운타운은 탑승객이 안으로 들어가는 대기실에 내부에 있었다. 헐.. 난 어떻게 해야 할 까 하다가 유리창 쪽에서 다운타운에서 근무하는 사람인 듯한 금발머리 아가씨에게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마이클을 만나기 위해 왔다고 중얼거렸다. 입모양으로 알아 들었을가? 잠시 뒤에 난 공항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항내부는 에어컨으로 인해서 시원했다. 수많은 면세품들이 쌓인 곳을 지나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휴계실인 듯 했다. 잠시뒤 30대 중반쯤의 인상좋은 남자가 들어왔다. 난 쟈니이고 면접을 보러 왔다. 연락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는 다운타운엔 일본손님이 약 70%된다며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세일즈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며 일본사람이 들어오면 뭐라고 하는 줄 아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랏사이 마쎄". 나는 신이 말해줬던 대로 애기를 하자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바로 그거다. 여기 호주 사람들은 그 것을 할 줄 모른다. 쟈니가 그 것을 해줘야 한다며 말했다. 나는 대학시절때 일본어를 했고 이 곳 케언즈에 일본인 관광객이 많기에 일본어를 해야 겠다고 생각이 되어 지금 공부하는 중이다라고 했다. 물론 허풍이다. -.- 그는 다음주 월요일부터 나오라고 한다. 근무시간은 오전 시간으로 말이다. 페이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시간당 15불. 난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환한 미소를 짓고 다운 타운을 나왔다.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다시 국제공항편을 바라보며 나에게도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소리지르고 싶었다. 여전히 태양은 케언즈를 내리 쬐었고 바람은 뜨거웠지만 나의 가슴은 시원한 오아시스를 찾은 사막의 여행객마냥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이제 잡때문에 울고 싶고 곱씹던 누군가에게로 향한 원망도 없을테고 체념도 안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위의 것들을 유심히 지켜 본다. 자동차 고치는 garage, 수영장도 있었네. 아무리 봐도 케언즈는 너무 사랑스러운 거 같아.

사람은 희망에 사는 것일까. 머 어떤 책 제목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던데... 난 아마 희망으로 살아갈 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잃을 것이 없다는 어느 무엇처럼, 멍청하지 않은 내 머리와, 부실하지 않은 내 몸뚱아리. 하하. 이런 것들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 난 너무 많은 것에 나를 힘들어 했다. 스스로를 말이야. 별 것 아닌데...,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그 것이 이런 것 아닐까. 내가 내가 말이야. 정말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말이야. 난 헛되이 살 수는 없어. 그래 이 세상은 충분히 살아갈 만한 가치를 너에게 전해 줄꺼야. 너가 찾으려 노력하고 어두운 밤에서도 가로등 불빛을 거울 삼아 걸어 나간다면 어디에선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찾아봐, 어려울 거 없어. 그저 살아가면 돼. 힘들어 하지마. 그리고 다가가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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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이 많았던 생활에 익숙해서 인지는 몰라도 금방 안정을 찾고 케언즈에 적응해 지려던 쯤이었을 거다.job도 구했겠다. 저렴한 쉐어를 구했고 다국적 환경에서 영어를 익히기는 수월하다 할 수 있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바로 옆방의 일본여자와는 거의 그 여자가 나갈때까지 몇 마디 나눠본 기억이 없다. 각자간의 생활을 누구도 침범하지 않았고 또 근무시간이 달랐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거 같다. 금요일에 가끔 맥주와 함께 담소를 나누곤 했다. 류와는 특히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류는 여자친구가 가끔 집에 와 아래층 거실에서 함께 자곤 했다. 외국에서 연인끼리 함께 있다는 것은 나에겐 정말 부러움 그 자체였다. 혹시 여러분중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연인끼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취득해서 가 보는 것도 서로에게 정말 크나큰 경험과 서로를 더욱 믿을 수 있는 반석이 되어 주리라 생각을 해 본다. 중국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까지 걸어 돌아오면서 부딪치는 일상들에 익숙해 지면서 난 에스플러네이드에서 가까운 peers 뒷편 선착장에서 싸게 주고 산 낙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다고 했던가? 강태공이 말이다. 그런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그 때 우연히도 시드니에서 만났던 영숙씨를 만나게 되었다.케언즈로 간다고 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혼자서 며칠만에 질려버린 기름기가 유난이도 반짝이는 중국식사를 하고 있는데 저 만치서 걸어들어오는 일단의 일행들. 한국인이구나 하면서 보는데 그 중 영숙씨가 보이는 것 아닌가. 나는 영숙씨에게 다가가 나를 기억하냐고 물으며 반가워 했다. 그 녀 또한 반갑게 맞이 했고 일행이 있는지라 짧은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일행은 같은 여행사의 직원이었고 귀국하는 직원이 있어서 같이 식사중이었나 보다. 이제는 케언즈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하는 그녀는 곧 한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며 내가 귀국하거든 한국에 있을거라며 연락처를 적어주었다.그 녀를 통해서 지영이 영국인과 결혼해서 영국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연한 섭섭함이 드는 건 무언지 몰라도 말이다. 


잘 된 거겠지. 그리고 또 한 명의 한국여자는 결국 영어가 안되서 한국인의 베이비 시터를 하다가
귀국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소식을 접하며 나두 한국에서 아무것도
준비를 해 오지 못했는데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이 감사했다.공연한 뿌듯함마저도 들기도 했는데 말이다. 정말 호주가 좁기는 좁은가 보다. 쿠~ 그런데 나에겐 황당한 일이 다가올 줄이야. 5일째인 것 같다. 일을 하러 나왔는데 예전에 테이블을 부지런이 오가며 접시를 나르던 일본인이 보이지 않고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난 가게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날 돌아오는 접시는 내가 닦을 필요가 없었다. 다 기계로 닦이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 것 저 것을 나르고 썰고 자르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던 일을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할래니 공연히 보이는 눈치. 결국 다음날도 마찬가지. 일을 다 마치고 주급을 주면서 여사장 왈!

담주부터 나오지 마라.
우리가 또 사람이 필요하게 되면 연락을 주겠다.
으~~~이 황당함. 3주간 놀다가 구한 일자리인데 일주일만에
짤리다니 난 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

Peers로 자주 갔다. 십 몇불짜리 낛싯대를 들고 터벅 터벅 들고가서 낛싯대를 드리우고 저 멀리 바다를 쳐다보곤 했다. 어느쪽이 한국이 있는 곳인지도 모른체 저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쳐다보았다. 내 미래를 생각해 본다. 어딘가에 있겠지. 저기 어드메에 말이야. 가진 것도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재산이라던 자신감과 용기는 나의 경험으로 다 남아 있겠지.
아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낛싯대를 드리우고 있을까? 수염이 텁수룩하니 멋있게도 생겼군. 나두 저렇게 좀 멋있게 수염이 나면 좋겠다. 내가 나이 들어도 지긋하게 늙는다면 좋을텐데...션코네리 처럼 말야. 참 리차드 기어도 멋있던데. 이런 맛에 낛싯대를 드리우는 지 모르겠다. 일본청년이 여자친구와 함께 걸어와서 내 옆 저 만치에서 자리를 잡는다. 난 일본말로 아침인산지 점심인산지 모를 간단한 인사를 한다. 그들도 방긋 미소를 지며 내게 인사를 한다. 햇살이 따갑다. 피얼스에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고독을 날려 버리려 애썼다. 아무도 아는 이는 없었던 케언즈.
이 작은 도시에서도 고독감을 느끼는데 서울에선 어떻게 생활을 할까. 난 서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년의 그리 좋지 못했던 기억때문 일 것이다. 하지만 누굴 원망해. 제길.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 겨울바다를 많이도 찾았는데 말이다. 이젠 그럴 여유도 없다. 그리 깨끗한 바다는 아니었지만 투어에 이용되는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고즈넉함이 좋았고 가끔 귀항하는 배들에서 토해져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환한 미소가 좋았다. 대리 만족하는 걸까? 나를 편안하게 해 준 몇 군데중 한 곳 Peers.
또 돌아 다녀야 겠군. job을 구하려면 말이야. 정말 돌아다니기는 지겨운데 말이야. 쿠쿠. 머 할 수 없지. 그래도 모처럼 담배를 비록 제일 싼 것이지만 40개비짜리 박스담배를 피곤 했는데 다시 말로보 말이 담배를 펴야 되려나 보다. 피얼스에서 부터 바닷가를 따라 쭈욱 내려오다가 어떤 노년의 신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싱가포르에 자주 간다고 했다. 지금은 휴가중. 홍콩이라 했던가? 홍콩이군, 어렵게 해석해 본 걸로는 그는 중계무역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호주에서 굴러다니는 한국산 차에 대해서 애기했다가 그 건 싸니까 사는 것이라며 다른 나라에서 더 싸게 팔면 그 걸 사람들은 찾을 것이라고 말해서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말이야. 어쩜 동남아에 굴러 다니는 우리차도 가격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그 분과 나는 나이차도 상당한 차이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먼저 말을 부쳐왔고 쉽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건 정말 좋은 거 같다. 쉬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여는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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