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간 써퍼스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주기고 있자니 답답키만 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분명 어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말이다. 기운 내라.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넌 쉬고 있는거야. 이런 생각으로 써퍼스의 밤거리를 걷곤 했다. 나같은 이방인에겐 너무나 화려해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곳. 가끔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보았지만 쉬이 말을 부치기가 힘들었다. 자격지심일까? 다음에 이 곳에 다시 온다면 그 때는 정말 써퍼스를 만끽하리라.

결국은 농장으로 다시 돌아 가야 하는가하는 초라함에 가슴 조이며 침대 한 켠에 세워져 있는 베낭의 귀퉁이에서 백팩 정보지를 빼 내었다. 농장 주변의 백팩에는 일자리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이 되어 있어서 좋은 정보가 된다. 물론 100% 믿을 것은 못된다. 그 중에 눈에 뜨이는 Bowen. 그래 이 곳으로 가자. 조금 더 버텨 보자. 농장에서 말이야. 영어 공부나 하지 머, 이런 자기합리와 호주에서 농장생활만 하다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괴리감속에 자신이 그렇게 왜소해 보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애가 가자고 할 때 같이 갈 것을 하는 아쉬움. 내가 나약해 진 걸까? 여전히 저 바닷가에선 누군가는 써핑보드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즐기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을텐데 말이다. 지랄,.. 욕이 나왔다. 누구에게 향하는 걸까? 이런 제길, 어쨌든 여길 뜨자고 결심하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내일 뜨기로 하고 써퍼스의 마지막 야경을 구경하고자 거리로 나섰다. 써퍼스는 밤이 아름다운 도시다. 언제고 다시 간다면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싶은 곳이다. 10시쯤 되었을까? 지애와 같이 갈 것을, 하는 아쉬움으로 더욱 허전함에 절어 다니다가 문득 지애가 보여준 유스호스텔 티켓이 생각이 났다. 동경에서 끊어 왔다던 유스호스텔 숙박권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래, 지애는 유스호스텔을 이용하겠지. 락 햄프턴이라고 했으니 그 곳의 유스호스텔에 전화를 걸어보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락 햄프턴의 유스호스텔 전화번호 몇 개를 알아 내었고 몇 번의 전화를 걸쳤을 때였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 곳이 분리되어 있다고 해서 여자쪽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번호를 눌렀다. 누군가 수화기를 든다. 나는 쟈니라고 하는데 그 곳에 야마다 지애라고 하는 일본 아가씨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통화를 부탁한다고 했지만 그 아가씨는 모른다고 한다. 순간, 같은 일본인끼리는 잘 알리라 생각되어 일본인을 바꿔달라고 했고 이어 일본 아가씨가 받는다. 그 녀는 지애가 여기 있다고 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지애를 부르는 소리가 저 만치서 들린다. 곧 이어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 쟈니야.

지애는 락 햄프턴에서 남쪽, 번디에서 3시간 북쪽으로 올라가는 Milliam vale이란 곳으로 간다고 했다. Farm staying. Woofing과는 일맥 상통한 것이지만 우핑의 경우 우프회원이어야 하지만 팜 스테이의 경우는 일반 농가의 주인이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개인적으로 광고를 내어 여행자들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국의 낯 선사람을 집에 들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진데 다민족 국가이기에 가능한 제도인지도 모른다. 밀리엄 베일은 또 어딜까 지도를 찾아 보니 내륙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내륙지방은 사막 때문에 덥다는데,... 지금 그 것을 따질 땐가.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 놓아란다고, 별 생각을 다 한다. 내 앞에 일이 놓여 있다는 건 어쩜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것. 그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운 것도 없을 것같다.

밀리엄 베일(Milliam Vale)에서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서퍼스를 홀가분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9$가량 하는 와인을 하나 사서 같은 방의 영국인,일본인과 마셨다. 내일 간다고 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술 마시면 혀가 잘 굴러가서 그런 걸까?  평소의 영어보다 잘 나온다. 아마 긴장 되지 않은 속에서 두뇌의 활동이 보다 활발해져서 그런건 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랬다. 영어를 잘 하려면 외국 친구와 술을 많이 마시라고,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그냥 가볍게 넘길 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웃고 떠들며 소리를 질렀다. 백팩안에는 퍼브가 따로 있어서 그 곳에서의 소음이 우리의 웃음을 덮어 버렸다. 이 백팩은 일 주일에 한 번씩 가면무도회가 있어서 백팩에서 준비한 옷가지들을 입고 얼굴에 페인팅도 하며 각자의 특이한 모습을 뽐내곤? 했는데 내가 머무른 날 중 그런 날이 있었다. 나는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만 했지만 말이다. 그 날 지애에 대한 설레임과 밀리엄 베일에 대한 기대로 충만한 밤이었다. 역시 난 운이 좋은 것 같다. 넌 운이 좋은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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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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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터벅 터벅 걸어온다.
엄습하는 외로움. 호주에 첫 발을 내 디딜을 때만해도 안 그랬는데,
번다버그로 출발하더 그 날, 터미널을 찾으면서 이랬을까.
하비에이 터미널은 무척 넓다.
저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너무나도 한적한 빈 터들.
하지만 난 움직여야 했다. 난 서퍼스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
잡을 구해야 했기에 말이다.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고
내일 이곳을 떠난 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우선 경찰서에 가서 분실 신고를 하고 접수증을 받아야겠지.
이미 해는 저물고 있었다. 깔리는 어둠으로 더욱 혼자임을 느끼던
그 곳에서 경찰서 찾기를 30여분. 다행히 경찰서는 Olympus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 경찰서 간판을 보고
들어섰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경찰서 업무가 끝났나?
경찰서도 문을 닫나 싶었지만 리셉션으로 보이는 곳은 불만 켜 있고
경찰관은 없었다. 유리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설마 경찰서가 문을
닫으랴 해서 문을 흔들기 시작했다.
"excuse me" "Nobody there"를 연발하며 말이다.
내일이면 이 곳을 떠야할 텐데 촉박했다. 얼마를 흔들었는지 모른다. 저 귀퉁이에서 느릿 느릿 경찰관이 걸어 나온다.
반가운 마음이었고 그는 의아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는대로 프레이저에서 카메라를 잃어 버렸고 보험에 들었기
때문에 경찰관의 접수증이 증거로 필요하다고 애기를 했다.
다급하니까 말이 어떻게든 나온다. 물론 문법같은 것을 따지며 하는
그런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 알아 듣고 있다는 것이 어딘가. 영어는 많은 경험을 쌓으며 늘어나는 것 같다. 그는 차분히 들어주고 나의 말을 확인한 후 나의 여권을 보았고 접수증을 써 주었다.
그 곳에는 그의 이름과 소속.그리고 접수번호등이 적혀 있었다
한국의 경찰과는 다른 느낌. 마치 어떤 가게에 손님으로 온 느낌이
들 정도로 친절했다면 억지일까?

올림푸스로 돌아왔다. 잠시 누웠다가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가치를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서퍼스 파라다이스. 지금은 비수기라는데 과연 일자리가 있을까? 지금도 지애는 버스를 타고 있겠지?
락 햄프턴이라,..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 번디의 친구들은
잘 있을까? 머리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상념의 가지들. 나는 한 끼의
식사를 준비했고 그 것들을 먹어야 했다. 때론 먹는 게 얼마나 사람을 구속시키는 건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이 건 물론 그런 적이
있었다는 과거형이다. 대과거형으로 쓰고 싶다). 정말 미워했던
부류중에 한 사람이 취미가 식도락이라는 사람들이었다. 먹는다는 것, 잔다는 것,이런 기본 적인 것들에 회의를 품어본 사람은 알리라.
내 기분을, 침대위에는 짐들이 어수선하게 놓여있었고 지애가 남겨놓은 흔적들이 얄미워 보이는 밤이다. 그 날 덴마크에 입양된 한국인을
만났다. 그리고 재일교포도 보구, 덴마크 여성은 나에게
자기의 이름을 한글로 써 보이며 어떻게 읽는지 물어봤고
 한문으로는 어떻게 쓰는 지도 물어보았다. 나는 한글만으로 정확한
한문을 알 수는 없다고 말하자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자기의이름이 한국에서 어떻게 불리는 줄 알아서 기쁘다고
했다. 그 날 잠을 어찌 잤는 지 모르겠다. 대충 잤겠지.
다음 날 올림푸스 밴을 타고 터미널로 왔고 서퍼스 표를 한 장 끊었다. 내내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돌아다녀야 하는 걸까?
인생이 참 뭐 이따위냐. 젠장.
그래, 여행이라 생각하자. 그냥 서퍼스도 갔다 왔다고 말하면 되지 머,
여행이 별거냐. 푸~! 제길. 도대체 버스를 몇 시간을 타는 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4시간만 버스를 타도 빨리 내리고 싶었는데,
이제 그 정도는 우스울 것 같았다.

서퍼스에 대한 기억이 적다. 서퍼스를 띠엄 띠엄 봐서 그런가 보다.
4일간의 체류기간이 짧다면 짧을 수도 있겠지만 가슴에 와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단 한 시간의 기억가지고도 책 한권을 쓸 수 있다고 행각을 한다. 아마 서퍼스에 대한 강한 인상이 남지 않아서 인가보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도시. 기억에 남는 대로 끄적거려 본다.
터미널엔 써퍼스에 있는 백팩의 직통전화가(무료) 있어서 이 곳 저 곳에 전화를 걸어 가장 싼 곳을 택했다.
너무 멀어도 안 되기에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저렴한 곳을 찾았다. 단 1불의 차이었지만
아직까지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방을 구하고
시내를 돌아다녀 본다. 써퍼스 파라다이스. 써퍼들의 천국.
그래 바닷가가 좋다. 파도가 써핑하기에 알맞게  치고 그 위로 써핑을 즐기는 사람들. 서핑을 즐긴다. 일자리를 찾는다. 하 하 하!
아침 나절부터 일어나서 가장 번화가인 Orchid av.를 거닐며
일거리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비수기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답변만을 들으면서 공치면 바닷가로 나가 미팅에서
바람맞은 사람 심정으로(사실 이 기분은 모르지만 짐작에, 아니
실연당한 기분으로, 이 건 당해봐서 안다.) 바닷바람을 맞곤 했다.
바다에 잠겨서 즐거워 웃고 마냥 떠드는 사람들. 번디에서 떠나기
얼마 전 써퍼스에서 올라 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가 써퍼스로
간다고 하자 극구 말렸었다. 그는 써퍼스에서 같은 백팩을 쓰던
외국인과 친해져서 그 외국인이 일자리도 알아주고 외국인이 떠날 때는 자기가 갖고 있던 써핑보드를 주고 가서 해변에서 써핑보드를 타곤
했다던 부러운 기억의 소지자였다. 그의 우려를 뒤로 하고 이 곳에
왔는데 푸하~! 참. 당시 난 프레이저에서 얻은 발바닥 상처 때문에
바닷물도 아닌 모래사장 근처에서만 맴돌며 그 것들을 보고 있었다.
참. Surfer's paradise라는데, 이 곳까지 와서 모래사장에도
못들어가고 바닷물근처에도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그렇게 이틀간을 보내며 밤에는 일본인이나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들은 저녁이면 나이트에 가서 흠씬 놀다오곤
했는데 나갈 때는 분명 혼자인데 아침에 일어나면 둘이 누워있곤 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런 거 신경쓸 것이 있겠는가. 써퍼스는
부르조아들의 천국이었다. 거리에는 세계 유명 브랜드의 식당과
상품점들. 그리고 24시간 열려있는 편의점들. 일본인만을 위한
편의점이 있다. 쩝! 그런데 이상한 건 그 곳 거리는 무척 좁다는 사실. 그 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그 곳은 남부에서 브리스베인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인데도 불구하고 길은 편도 2차선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 번은 일본의 스모선수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의상으로 서퍼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가끔 호텔에서 일본 스모선수들을
초대해서 스모를 소개하는 것 같았다. 서퍼스가 일본의 자본에 의해서 발전한 것인만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케언즈가 일본의
자본에 의해서 키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의
좀 이름있는 섬들은 일본인 것이다. 세상에 그게 다 부러울 때도
있던데 사람 마음처럼 오락가락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한국에 있을 때 사업가들이 해외에 땅을 사두면
그렇게 욕을 하고 그랬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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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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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날 8시경, 지애의 성화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준비를 하고 나니 밖에서 투어를 가는 다른 여행객들과 투어에 사용되는 짚차들로 웅성거렸다. 각 짚차별로 배정을 받고 여러 도구 -식기류나 기타 잡다한 것들-들과 연료까가지도 할당 받는다. 이런 모든 것들에는 bond라고 하는 보증금이 붙어 있어서 분실하게 되면 bond를 못받게 된다. 운전하는 호주인은 나이가 21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는지, 그 호주인은 무척 활달하고 농담을 잘 해서 투어 내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캐나다에서 뉴질랜드에서 세계 여기 저기에서 온 젊은이들이 Toyota 짚차속에 앉아 있다. 누가 머랄 것도 없이 각자 소개를 하고 보니 나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는 내 나이를 무지 어리게 본다. 정말 무지하게 말이다. 케언즈에서는 미성년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카드를 만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게 아마 18세 이상임을 증명하는 것일게다. 17센가? 큭! 어쨌든 2박 3일간의 프레이저 투어는 시작이 됐다. 거금 90$이 투자된 호주 최초의 투어였으니 그 만큼의 기대는 당연하지 않을까? 운전하는 호주인은 연신 Pasta!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까지도 나의 영어에 반신반의 하던 터라 으레 하는 애기들. 나는 한국에서 왔으며 현재 몇 개월 체류중이고 번다버그에서 올라왔다. 앞으로 어디로 갈 거다. 너 거기 가 봤냐? 어떻냐? 너는 어디서 왔냐? 호주는 얼마동안 있었냐?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등, 이런 애기가 끝나고 보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 때분터는 머리에 열나기 시작한다. 후훗! 지애는 나보다 영어를 잘 했는데 그 건 이미 나 보다 10개월 가까이를 더 호주에서 체류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호주를 돈 것 같았다. 퍼스, 멜버른 등, 멜버른은 참 좋았다고 한다. 그 곳에선 퍼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말이다.

Toyota는 하비베이의 외곽지역을 돌아 선착장에 도착했다. 영화속에서 보는 그런 길이다. 프레이저까지 가기까지의 길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착장에는 프레이저로 가는 정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승선이 시작되어 우리는 선내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 바람이 세차게 지애의 머리를 날린다. 바다가 좋다.
산을 오른뒤의 해방감을 들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다는 언제든지 가슴을 열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좋다.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바다가 좋을 뿐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프레이저로 가는 걸까. 선착장에 도열해 있던 수많은 차가 배 안으로 빨려들어갔고 배는 고동을 울리며 출발을 알렸다.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바다에 끌려가길 30여분. 저 만치 프레이저가 보인다. 울창한 수풀로 우거진 섬이 보인다.길게 쭉 뻗쳐 내린 섬이 곱게도 생겼다. 검푸른 바다위로 파도가 물줄기를 휘감는 곳. 우리는 2층과 아래층을 돌아다녔다. 2층에는 각종 기념품과 간단한 음식류를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갑판에 나와 끊임없이 주절 거리고 있었다. 순간 불어온 강풍이 내 모자를 날린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론가 떠 내려 가고 있을까.

프레이저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신호에 따라 차에 탑승을 하고 배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프레이저의 수풀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우리도 환호성을 질렀다. 열대림을 지나며 보이는 건 어느새 해변으로 나온 Toyota. 호주인은 나에게 운전을 해 보겠냐구 물었다. 닌 해변가를 달리며 소리를 지르며 어떤 열기에 휘감겨 차를 몰았다. 뒤 따르며 앞서가는 Toyota사이로 해변가의 바닷물이 솟구친다. 그렇게 한 참을 달려 우리는 잠시의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작은 공원과도 같이 조성된 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고 프레이저 기념품 가게에서 이 것 저 것을 구경하며 호주에서 처음 갖는 투어를 만끽했다. 다시 출발해서 다다른 어느 호숫가! 에메랄드 빛이 이런 걸 보고 말하는 지도 모른다. 한없이 빠져 들 것만 같은 호수의 맑은 물결이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 되어 우리는 야영지를 찾았고 그 곳에서 텐트를 치고 나무를 모아서 불을 부쳤다.

바비큐를 하고 한 쪽에선 각자 준비해 온 식사와 술을 꺼내 들었다. 말도 쉬이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렇게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이 주는 매력이 아닌가 싶다. 여행은 마술이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를 잊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를 떠난다는 것. 내 모습을 잊는 것. 어쩜 그 것이 자기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 밤늦게까지 떠들고 놀았다. 바닷가를 걸었고 하늘의 별을 셌으며 야영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 그런데 그 곳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릴 줄이야, 나는 지나온 휴게소에서 놓고 온 것을 알고 호주인에게 다시 가 보자고 했고 그는 흔쾌히 같이 가 주었지만 카메라를 찾진 못했다. 혹시나 여느 책에서 보았던 서양에서의 분실물 습득애기가 떠 올라 가게 곳곳에 물어봤지만 허사였다. 난 여행자 보험을 떠 올리며 아마 분실물 보험도 들지 않았나 싶어 다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프레이저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커다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말이다. 다른 베낭객들에게 들은 대로 하비베이에 돌아와서 경찰서에 가서 분실신고와  함께 신고증을 받는다.그 게 또 가관이었다. 푸~! 이 건 다음 편에 애기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다시 섬을 돌기 시작했다.이른 아침의 기운은 서늘한 바닷바람으로 몸을 움츠리게 했고 점심때는 뜨거운 햇살이 바다에  빠져 들게 했다. 우리는 교대로 차를 몰았고 Toyota에 몸을 맡기며 프레이저를 즐겼다. 섬전체가 거대한 모래섬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고운 모랫살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저만치에 언젠가 낮선 호주에 내려 절망을 간직한 체 사라져 갔을 이름 모를 선원들을 태웠던 난파선이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난파선. 난파선. 가야 할 목적지를 잃은체  낮선 곳에 결국 순응하고 마는 난파선.

우리는  또 다른 호수에 도착했다. 이미 친해진 다른 친구들과 호수에서 물장난을 치며 서로 물을 먹이기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나를 빠트리려 쫓아오는 그들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며 흥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프레이저에서 제일 큰 호수로 관능적인 모래  언덕위로 태양의 뜨거운 입김이 작렬한다. 가는 모래알들처럼 많은 우리의 기억들은 어디에서 반짝이고 있을까.
 
아쉬울 수밖에 없던 그 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우린 하비베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이제 록 햄프턴으로 가는 지애와 아쉬운 헤어짐의 시간. 말없이 얼굴만 본다. 때론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저 안타까움만 더 할 뿐이었다. 지애는 나에게도 북으로 가자고 했지만 난 서퍼스에 가야했다. 서퍼스에서 안 된다면 너에게 가겠다고 했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넓은 곳에서. 그리고 지애는 갔다. 차창너머로 지애의 눈물이 보인다.

프레이저는 유엔에서 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거대한 모래섬. 고운 모래알과 태양이 어울리며 바다를 향해 다가갈 수 없는 연민을 부르듯 한 없이 아름다운 섬.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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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그리 가깝지 않은 터미널까지 밴을 타고 가려면 말이다. 닐은 백팩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이른 새벽에 같이 일어나는 경우, 터미널까지 태워주었는데 짐이 많은 이용자들의 경우는 일찍 일어나서 마지막 밴을 타고 터미널에 내려선다. 그 동안 같이 일했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떠나려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에 내려선 우리는 예약한 버스를 확인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베낭을 확인해 보니 이 곳에 낯 선 이방인으로 세 개의 가방을 들고 올 때가 떠 오른다. 베낭이 줄어든 지금은 그 무게만큼 시원섭섭한 마음이다. 두 달전에 이 곳에 내려섰을 때 지금을 상상했을까? 버스는 번디를 출발하면서 번디의 관통하는 강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나는 틈틈이 저 강에 가서 말보로를 말며 시선을 던지곤 했는데, 후훗! 지애는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있다.

시간 20분 뒤! 어느새 버스는 하비베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건물들과 도로는 번디와는 다른 깔끔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여서 그런가보다. 우선 숙소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숙소를 잡는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저 편 주차장 앞에서는 1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숙소직원들이 자기 숙소로 오라고 장점들이 적힌 나무판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지애를 세워두고 그들에게 다가가 이 것 저 것을 물어보았다. 우선 하루를 묶고 더 나은 곳이 있다면 그 곳으로 갈 요량으로 괜찮아 보이는 한 곳을 선택했다. Olympus 였다. 밴을 타고 그 곳에 도착한 것은 5분쯤 뒤 유럽의 어느 가정집과 같은 생김새의 근사한 곳에 내려섰다. 리셉션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른 몇 명의 여행객을 상담하고 있었다. 체크 인하기에 앞서 사무실 내에 있는 여러 브료셔들을 챙겼다. 사파리에 관한 내용들. 그리고 이 곳 하비베이의 지도등을 몇 부 집어들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응해줬고 편한 마음으로 방을 잡았다. 번디에선 상상도 못할 정도로 깨끗한 방이 2층에 4개 있었다. 거실에는 보기에도 편한 소파와 티브이가 자리하고 있었고 베란다엔 다 자란 나무가 양 팔을 길케 뻗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빛살에 반짝였고 그 위로 섬들이 보인다. 저 중에 하나가 프레이저일까?

몇몇 외국인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2층에 방이 4개. 그리고 아래층엔 방이 두 개있고 작은 부엌이 잇었다. 탁자가 놓여진 깨끗한 모습. 여행하는 기분이 이런 걸꺼야. 짐을 풀고 지애와 상의한 끝에 3일뒤에 프레이저 사파리 투어 예약을 하기로 했다. 예약과 방요금을 정산한 후 시내로 나가 큰 수퍼로 들어갔다. 울월씨(Wool wolthy)체인은 호주전역에 깔려있는 대규모 수퍼 체인망이다. 그 곳으로 들어가 간단한 몇 가지 야채와 빵과 음료수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를 구경했다. 시내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지애는 음식을 잘 못하는 편이다. 언젠가 지애가 해 준 수시(초밥)외에 할 줄 아는 음식이 없었다. 수시라고 하니까 수시인 줄 알고 먹었지만 말이다. 난 물을 올려놓고 야채를 썰고 번디에서 어느 한국인이 귀국하게 되면서 나에게 건네 준 고추장을 이용해서 국을 끓였다. 딱히 머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엇지만 고추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 든든한 그런 호주 생활들이었다. 참! 고추장도 좀 많이 가져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처음에 호주 음식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해 오지 않았지만 사실 호주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드는 음식을 찾기는 드물다. 물론 하숙이나 쉐어를 들어가서 어느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굳이 가져 갈 필요야 없지만 혼자 이곳 저 곳을 돌아다닐 양이라면 고추장이나 된장을 가져가는 것이 음식문제에 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한 통 사면 정말 두고 두고 먹는다. 머 거기 가서까지 고추장을 챙기냐구 묻는다면 난 할 말 없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 한푼이 아쉬울 때 그 것들이 주는 안정감! 이 말이 무슨 뜻인는 그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


지애는 내가 끓여준 한국식? 국 내지는 찌게를 좋아했다. 어쩜 그 건 경제적인 빈곤?에서 비롯되는 신뢰감인 지도 모른다. 그래.그 것일거야. 이 후 항상 식사는 내가 준비를 했고 정말 별 볼일 없는 식사였지만 풍족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프레이저 가기까지 시내 곳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음 날 브로셔에서 볼 수 있었던 어느 상어 전시관에 들어갔다. 그 곳은 어느 호주인이 아들을 상어에게 잃은 후 상어사냥을 나서 잡아 들인 가지가지 종류의 상어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피같은 거금 7$의 입장료. 혹시 이 곳에 가는 사람있으면 들어갈 일 없다고 말하고 싶다. 호주에도 상어가 있어서 가끔 상어가 인근 바다에 나타난다고 한다. 바다에 접한 도시에서 말이다. 하비베이는 작은 도시지만 번디와는 다른 멋을풍기고 있었다. 저녁 늦게 올림푸스 근처의 퍼브pub에서 맥주 한 잔을 걸치다가 무슨 댄싱타임이 있었든지 전부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춰대는 통에 나도 일어났고 금방 어울린 몇 명과 같이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같은 여행객들이라 마음을 열기가 쉬운지도 모른다. 호주에선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정말 편했다. 아마 내가 만난 사람들이 거개가 여행객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눈만 마주치면 웃음짓고 말을 거는 그 사람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뒤에는 오히려 그 게 더 편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어디 가느냐, 여행은 즐겁냐며 묻는 그런 모습들이 말이다.

그 곳에선 하릴없이 거리를 구경하고 사람들과 여러 기념관들을 돌아보며 모처럼의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마침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두 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우연하게도 그들은 Olympus에서 묶게 되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학원강사,그리고 회사원. 그들은 한국에서 베낭여행을 신청해서 일행들과 같이 왔다가 브리스벤에서 헤어졌다고 한다. 계산을 따져보니 여행사를 따라다니는 것보다 경비가 저렴했고 또 으례의 획일적인 관광코스보다는 그들만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로 해서 이 곳으로 왔다고 한다. 같은 여성이어서 그런지 특히 지애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지애또한 그들과 대화를 즐겼다.
한국여성 두 명이 여행을 하는 모습은 상당히 신선하게 남아있다. 그들의 우정도 그들의 여행에서 얻은 감동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한국에서의 친구와의 여행도 갖기 힘든 기회인데 이국땅에서 그녀들이 갖고 있는 우정은 깊이가 어느 정도일까? 세상에는 변해야 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만 우정은 후자일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어쨌든 섭섭하다. 허전하고 서운하고 머 그런 것아닐까? 변해간다는 것은 말이야.
당시의 일기입니다.

3.June
정말 수많은 시간을 번디에서 보내버렸다.
하지만 그 만큼 얻은 것도 많아서 좋다.
영어를 소홀히 할 수 없던 70여일의 시간들.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젊음을
보여준 것 같아서 흡족하다. 지금 옆에는 지애가 누워 있다.
서퍼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자.
우선 골드코스트로 내려가서 차분히 올라가자.
추우면 추운대로 말이야. 이 곳에서의 6일. 그리고 난 간다.
옆에서 마냥 웃고 있는 지애의 모습을 보니 씁쓸하다.
난 내 갈길이 있는데, 망설이지 말자. 시내를 돌아다녔다.
정말 이 나라가 부럽다. 이 조그만 도시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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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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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6"을 기획하며 가장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던 번디를 마쳐보니 실상 보는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번디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제대로 마친 건지 하는 의문, 마치 이빠진 동그라미를 그린 것 같내요. 나의 26의 모든 글들을 쓰면서 항시 나를 붙잡았던 것은 1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과연 그 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지 자칫 혼자만의 과거에 사로잡혀 그 것들을 미화시키는 것은 아닌 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지난 과거의 흔적들은 애틋해서 아름답게 포장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있기 마련 아닌가요. 특히 어떤 것들은 기억의 골짜기에 아직까지 뚜렷하게 남아서 그 아쉬움을 아름답게 다시 재생시켜 보려는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그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과 실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실명을 넣어도 당사자가 개인적인 친분으로 무사할 것 같은 이는 실명을 기입했고 그렇지 않은 이는 가명을, 그리고 기억이 허락하지 않는 이는 부득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현재까지 제 기억에 맑은 가을 하늘 색깔로 남아있는 manami와 지애(天愛)와 관련된 내용은 문맥상 필요하다 싶은 부분에만 간헐적으로 넣었기에 글의 구성에 허점이 될 지도 모릅니다. 빠져서는 안되겠다 싶은 경우에 이 곳 저 곳에 자리를 하다 보니 마치 완성한 그림에 덕지 덕지 덧칠한 것 같게 되더군요. 처음에는 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그래서 마나미와의 내용도 상당량?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번디를 마칠 때쯤 기억의 여기저기에서 부딪치는 지애의 기억을 용게 피해다니다가 문득 번디이후의 생활이 약 2개월이 우려되더라구요. 어떤 오해도 걱정이지만 그 기간동안 같이 여행을 했거든요. 우선은 어떻게든 메꿔 보렵니다. 그러니까, 이 후 독일인 농장의 우핑(Woofing)과 에어리 비치(Airie beach), 그리고 보웬(Bowen)의 어느 정도까지는 내용상 헛점이 보이더라도 양해를 구합니다. 그 때의 기억들 언젠가 "나의 26"을 마치고 하릴없이 일상에서 허우적 댈 때 저의 기억들을 다시 채색해 볼 생각입니다. 고운 빛깔루다가 말이죠. 느낌이 말해주던 그 날들을 말입니다. 혼자만의 애틋함을 그리면서, 어쩜 모르죠. 혼자서 간직하며 잠이 안 오는 까만 밤에 떠 올리며 키득댈지도,
 

낙 서 후휴~ 힘들다. 가끔 실망스럽기도 해요.도대체 무슨 글들을 쓰는 건지 말이죠. 이런 글들을 써야 하나? 어디까지 써야 하며 어디까지 넣어야 하는 건지, 이러다가 손님 떨어지는 건 아닌지, 쩝! 휴~ 며칠간 낮과 밤이 뒤 바뀐 생활을 했더니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군요. 헤구, 전생에 올빼미였는 지 부엉이었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나의 26을 쓰는데 정성?을 쏟다보니 다른 메뉴를 업데이트 하기가 조금 힘드내요. 변명일 수도 있지만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도 중요한지라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하니 말이죠.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그래도 오시는 분들이 방명록에 글들을 남겨주시면 힘이 되더군요. 아마 홈페쥐 갖고 있는 분들은 그 기분 아실 겁니다.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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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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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다버그에서의 생활도 어느 덧 끝이 나간다. 스쿠바 기간중 롤러 블레이드를 타다가 다친 무릎의 생채기로 때때로 일을 하면서도 계속 나오는 고름으로 이렇게 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몇 일 쉬게 되었다. 지쳤나 보다. 따분함에 지친 것 같다. 스쿠바 자격증도 땄고 비록 갖고 있는 돈은 700여$에 불과하지만 5000km pass가 있고 해 보겠다는 의지가 나에겐 밑천이었다. 어딜가야 죽겠냐 라는 자신감. 그렇게 살아왔으니 머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풋! 번디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사실 번디의 주변 경관은 시드니나 케언즈 또는 골드코스트같은 호주의 여느 도시처럼 뚜렷하게 구분되는 매력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곳에서 지낸 3개월 가까운 기간이 나에겐 충분한 기억의 도시가 되기엔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번디의 생활도 끝이 나간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금 뭐 할까?

귀국하고 나서 처음에는 연락을 했는데 일상에 파묻혀 기억속에만 남은 사람들. 번다버그. 이름마저 가물 가물한 국민대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자주 놀러가던 시티 백팩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무척 외국인과 잘 어울리던 활발한 놈이었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마음이 통한다 싶어 더욱 그 놈과 많은 애기를 나누었는데 언젠가 가 보니 자리에 없어 동생들에게 물어보니
칠더스(Childers)로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 칠더스로 향한 것은 순전히 여자 때문이었다. 혹시 그 놈이 보더라도 오해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글을 이어나가겠다.  처음 그 놈을 보았을 때부터 그 곳에는 한국여자가 드물게 한 명이 있었는데 매우 활달한 성격의 아가씨였다.그런데 그 아가씨가 번디에 일이 없자 칠더스로 향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번디에서 한 2~3시간 내륙쪽에 있는 그 곳은 번디가 일이 없을 때에도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눈치가 있어 보이는 경희대 다니던 동생이 아마 그 아가씨 찾아 갔을 거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일뒤 다시 찾아 갔을 때 그 놈 풀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길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것이었다. 번디에서 키워왔던 그의 연정?이 칠더스에서 꽃을 피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얼마 뒤 그는 예전의 모습을 되 찾았지만 친하게 지내던 놈이 잘 안 풀리니 안 되 보였다. 하물려 그 것이 여자와 결부된 일임에야, 한국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데 이국에서야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흡사 광수 일기의 광수씨처럼 생긴 그의 모습이 참 정이 많게 생긴 놈. 훗 날 그 놈은 또 한 번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이 놈이 마리화나에 빠져서 한 참을 헤맨 사건이다. 힘들게 벌어 온 돈을 몽땅 그 것에 써 버린 것이다. 외국 친구들과 잘 어울리다 보니 마리화나가 합법적인 일부 유럽국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버린 것이다.(야, 너 혹시 이거 보더라도 화는 내지 마라 우리의 동생들을 위한 거라 생각하고 웃어 넘겨라. 연락하고 임마!) 하지만 호주는 불법이다. 힘들게 돈 몇 푼 벌어서 그 걸 그대로 연기로 날려 버렸다는 소리에 황당하기도 하고 또 화도 나기도 하고 착잡하던 기분. 내가 찾아 갔을 때 이 놈은 침대에 누워 맥이 풀려 초췌한 모습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야 대화를 나누어 주는 정도여서 아쉬움만 더 했지만 말이다. 번다버그를 떠나서 훗날 보웬(Bowen)에서 그 곳에서 경희대 동생을 만나게 되어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어딘가로 내려갔다고만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시 연락을 했을 때 물었더니 허허 하고 웃더니 대마초 재배하러 내려갔다고 웃는 것이다. 후훗! 다행히 학업에 열중하는 듯해 이런 저런대화를 나누고 후일을 약속하며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하지만 다음에 한 번 만나자는약속만큼 애매한 것도 없는 것처럼 그 걸로, 쩝! 이 글 보거든 화내지 말고 연락이나 해라. 졸업했겠구나. 시절이 하수상한데 좋은 곳에 취업이나 했으면 좋겠다.

사실은 나도 마리화나에 대한 썩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순전한 호기심에 말이다. 호기심 때문에 인생 쫑한 작자가 많다는데, 언젠가 영국친구가 권해서 몇 모금을 해 봤는데 으~~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저 몸이 붕붕 뜬 것 같은 기분. 지애가 놀라서 무슨 일이냐구 물어보는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지애. 그 건 마치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것을 또 케언즈에서 경험하게 됬으니, 아직 범죄시효가 지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행여나 높으신 분들이 볼 까 무섭다. (에그 무서버-이런 글 썼다고 또 괘씸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쩝!) 번디를 떠나기로 하면서 가지고 있는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애물단지이던 노트북과 옷,책을 보내며 65$이라는 피같은 거금이 들었다. 짐을 정말 줄여가기 바란다. 호주에서 많은 것을 하겠다고 애초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말을 해 본다.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한다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과연 그 목적에 걸맞게 호주를 갖다 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 또한 그러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부럽기는 하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지만 다음에 신혼여행을 간다면 내가 걷지 못한 호주 서부 지방을 그 녀와 함께 걷고 싶은 계획으로 미루고 나니 아쉬움은 덜하다. 그 동안 일하던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스쿠바 라이센스도 딴 후 나는 다음 목적지인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가기 위한 관문인 하비 베이(Harvey bay)를 예약했다. 5000Km 패스를 터미널에서 사 놓았기에 차비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패스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호주를 전국일주 하는 것부터 거리별로,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 구간별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 자신의 경로에 맞추어서 구입을 해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떠나는 그 전날밤 나와 함께 가고 싶어하던 눈치가 역력하던
지애는 내가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간다고 하자 자기도 그 곳에 갔었다며 나의 여행경로를 물었다. 나는 프레이저로 가서 사파리 투어를 마친 후
Surfers Paradise로 갈 것이다. 그 곳에는 한국인이 많다고 하니 일자리를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애기했다.

아래층 티브이 룸에선 심슨이 시작됐는지 왁자지껄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선 간간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정말 번디 아니 호주의 밤 하늘은 지겹도록 별이 많다. 저 별들이 다 떨어진다면 난 어디에 숨을까? 지애는 나와 같이 가고 싶다며 전에 갔을 때에도 하비베이 까지만 갔고 사파리 투어를 하지 못했다며 이번에 꼭 가고 싶다고 한다. 나는 서퍼스로 가야 하지만 너는 북쪽으로 올라 갈 거잖아.난 혼 자 가겠다. 그 녀가 눈물을 보인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크다. 그 눈에 맺힌 눈물. 왜 나에게 눈물을 보이는 걸까. 여자가 눈물이 흔해도 안 되지만 남자도 여자의 눈물에 약하면 안 된다. 말이 쉽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이쁘다. 눈만을 봤을 땐 말이다. 남자들도 하나같이 눈썹이 짙고 풍성하다. 물론 다야 안 그렇겠지만, 내가 표를 물었을 때 자기도 패스가 있다며 당일 가면 표가 있을 거라며 미소를 짓는다.
나도 웃고 만다. 닐에게 내일 check out한다고 말하겠다며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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