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전국에 설치된 26만8000대의 공중전화를 관리하는 KT링커스(KT의 자회사)는 최근 서울시와 청계천 부근의 공중전화 부스를 교체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낡은 공중전화 부스가 청계천 주변 경관을 해치고 있다는 서울시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서울 강서구에 있는 한 아파트 상가는 최근 상가 내 공중전화 부스를 없애 달라는 민원을 KT에 냈다. 이용하는 사람도 적은 데다 간판을 가리고 보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54년 등장한 후 반세기 동안 서민의 ‘입과 발' 노릇을 했던 공중전화. 하지만 휴대전화의 빠른 보급이라는 시대상황에 따라 이제 곳곳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다.

○ 휴대전화에 내몰리는 공중전화“비가 오는 날 한 젊은 친구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있더라고요. 싼 공중전화를 코앞에 놔두고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을 보니 착잡했습니다.”공중전화 홍보 업무를 맡고 있는 오재록(吳在綠) KT링커스 과장은 “예전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사용하는 시외전화 요금이 비싸다며 밖에 나가 공중전화로 걸곤 했다”고 말했다.

일부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단지 안에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를 뜯어내라고 요구한다. 뜯어낸 자리에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를 설치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작년 말 현재 전국의 공중전화 대수는 총 26만8576대. KT링커스가 직접 관리하는 공중전화는 12만8098대이고 나머지 14만478대는 다방, 편의점, 유흥업소 등이 자체 관리한다. 공중전화 보급대수는 1999년(56만4054대)의 절반 수준이다.

반면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1월 말 현재 3851만5541명. 휴대전화 대 공중전화 비율은 144 대 1이나 된다.

요금은 3분 기준으로 공중전화가 70원, 휴대전화는 평균 320원으로 휴대전화가 훨씬 비싸다.

○ KT와 이동통신 3사가 결손금 보전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3개 이동통신업체가 지난해 올린 매출액은 20조 원을 웃돈다.

반면 KT링커스는 지난해 858억 원 매출을 올리는 데 그쳤다. 1998년 7300억 원의 매출액과 비교하면 11%밖에 안 된다.

KT링커스는 공중전화 유지 보수에 대당 월 7만 원을 쓴다. 공중전화 한 대에서 올리는 평균매출은 한 달에 5만5800원. 매출보다 유지 보수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쓰는 셈이다.

사업성만 감안한다면 당장 공중전화 사업을 관둬야 한다. 하지만 공중전화는 국민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공익사업인 ‘보편적 역무사업'에 해당돼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에서 해마다 결손금을 일정 부분 보조해 준다.

○ 재기의 몸부림공중전화의 쇠락은 되돌릴 수 없는 추세로 보이지만 최근에는 다소 다른 흐름도 나타난다. 일부 중고교에서 휴대전화 안 쓰기 움직임이 일고 있고 휴대전화 사용요금이 너무 많다는 의견도 나온다.

KT도 공중전화를 살리기 위한 노력에 동참했다.

이장세(李長世) KT 홍보부장은 “앞으로 공중전화를 통한 문자전송서비스(SMS)와 위치정보 서비스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서비스를 내놓을 계획”이라며 “전사적으로 공중전화 이용 장려 캠페인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공중전화 서비스의 변천 과정>△1954년 8월 16일: 사람이 관리하는 유인(有人) 공중전화 서비스 첫 실시△1962년 2월 1일: 주화투입식 공중전화기 첫 설치△1971년 3월 31일: 교환원 필요 없는 장거리자동전화(DDD) 개통△1986년 10월 20일: 카드식 공중전화기 설치△1988년 9월 1일: 요금 수신자부담 공중전화 서비스 개시△1995년 2월 13일: 주화 및 카드 겸용 공중전화기 등장△1998년 2월 16일: 걸고 받는 공중전화 서비스 개시


처음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을때는 전화할 일이 있으면 공중전화를 찾고는 했어. 인터넷을 보면 가끔 공중전화 옆에 두고 휴대전화쓰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듯한 글도 있었는데. .. 공중전화쓰다가 나오는 휴대폰 요금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말이야. 이젠 그렇지 않네. 공중전화에 익숙해져있던 통신비용이 이젠 휴대폰에 익숙해진 거겠지. 인식비용이 말이야. 윤종신의 거리에서 인가? 공준전화 수화기를 들고 미처 통화를 못하는 그의 노래를 지금 세댄 이해하긴 어렵겠지. 자기번호가 찍히는 전화에 그런 떨림과 그 비련은 찾기 어려울 꺼야. 무엇이 대신하는걸까? 궁금하네. 잊혀지는 것은 주위에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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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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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그랬다는 구료.

흔히 힘과 권력으로 사람을 굴복시키기를 능사로 여기나

진정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아래에서 겸허히 대함이 가장 빠른 길이겠지요.

지당함에도 불구하고 힘과 권력으로 그리하는 건 용이함때문이 아닐지 모르겠소.

단기적인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과연 평생의 업을 같이 할 동지를 만들 수가 있느냐 말이외다.

이젠 버려야 하오.

아집과 편견, 그리고 독선이 빚어내는 혼돈을 정리해야 하지요.

누구를 탓하기 보다는 자신을 먼저 탓하는 법에 익숙해 졌으면 하오.

그렇구료.

지당하신 말씀이외다.

맞소이다. 내 탓이외다.

내 그간 모르고 그러지는 않았을터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과오가 더욱 크구료.

감사하오이다.

변함없는 듯 하지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속에서 변화하지 않고 있었으니

내 자충수를 두고 있었나 보오.

마소의 빌은 26년뒤를 예견한다 하고 삼성의 이건희는 10년뒤를

내다 본다하는데 본인은 오늘도 못가누고 있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외다.

하루 하루 새로날 수 있도록 해야겠소.

오의 구천과   월의 합려의 심정을 되새겨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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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그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을까.
로렐라이라는 영화가 일본 보수파의 절대적인 성원과 기대속에 절찬리 상영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만을 보자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그 것이 러닝 타임 내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의 처절함 속에셔 오직 나라를 위하였던 영령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일본이 있었다는 것을 젊은 세대들에게알리고자 하는 눈물겨움이 엿보인다. 전쟁이라는 그 인류의 죄악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없이 말이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선 전쟁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인간은 모순된 삶을 그려나간다. 전쟁을 없애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영화속의 로렐라이가 아닌가 한다.

지금도 라인강 너머의 로렐라이에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올까.
영화에선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인 듯 착각을 한다.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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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몰라도 나이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나이 어린 축이라 그런건가?
아니면 이 나이에 걸맞지 못한 환경에 주눅이 든 것인가? 그 건 인정하기 싫고,
뭐 어리게 보이고 싶은 건 인지 상정이라지만  누구나 이 나이쯤이면
동안이나 어려보인다는 말에 기분 좋아지는 것인지 피터팬 증후군이
얇게든 깊게든 누구든지 갖고 있따 보다. 그 것이 처음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며 고상하다고도 말 할 수 있는 것에서 결과적으로 외모나 놀이나
일상으로의 표현이 될땐 좀 유치해지나 보다.
어제 홍대 클럽을 가게 되었다. nb와 할렘이 유명하다고 해서 물어물었는데
홍대 젊은이들중에도 상당히 모르는 사람 많네.
NB와 할렘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겉보기에는 할렘이 더 클럽스러워서 결론은 할렘.
역쉬 일반화의 오류는 너무 일반적이다. 12시 넘어 들어간 클럽.
흡사 필리핀의 클럽과 다를 바 없었다. 어둠 침침하고 그다지 넓지 않은 홀과 스테이지.
그 사이에서도 요리조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
땀에 젖고 저마다 육체적 관능이 끈적끈적하게 흐느적 거린다.
자리가 너무 좁아서 그런지 몰라도 힙합이라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춤이 있을줄
알았는데-그래서 주눅 들었나?- 쉽게 말해서 막춤이고 지들말로 프리스타일이다.
그리고 부비부비라는 것도 있기는 하고. 뭐 사실 그 것도 별건 없고 말이다.
가끔 이런 날이 있기는 있어야 할 거 같다. 조명아래 선 그나마 빨 받으니 말이다..
일명 조명미남.^^;; 아주 가끔 가 봐야지. 운동된다.
6시까지 흔들어댔으니 이 놈의 지칠출  모르는 체력 ^^V 푸힛~

클럽에 대한 기사를 보니,
“잘 생기면 원나잇…” 한 달에 한 번, 춤추고 노래하며‘짧은 하루’를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밤이 되면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는 젊음의 해방구로 변한다. 5000명이 넘는 남녀가 펼치는 춤과 음악의 향연 ‘클럽데이’. 이 날은 홍익대학교 앞의 뮤직클럽이 모여 한 달에 한 번씩 벌이는 축제다. 2001년 3월에 처음 열려 오는 3월 25일이면 47번째를 맞는다. 한 클럽의 입장료가 1만원 안팎인데 이날은 1만5000원짜리 ‘티켓 팔찌’ 하나만 사면 14개 클럽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클러버’(클럽을 자주 찾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조어)가 많게는 1만명까지 모인다.

“요즘 20대가 어떤 식으로 젊음을 누리고 사는지 알려면 클럽데이에 가서 보세요. 청담동 카페나 대학로의 놀이문화에 비해 훨씬 다양한 자기표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제멋대로라거나, 아니면 자유롭게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순전히 당신 사정이지만 그들은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습니다.

기성세대에 반항하지도 않고, 그럴 듯한 의미를 굳이 담고 싶어 하지도 않는, 그들만의 거리낌 없는 ‘놀자판’인 거죠.” 클럽매니아로 클럽데이 산파역 중 한 명이기도 한 추계예술대학 박은식(여·40) 교수의 말이다.

‘팔찌’ 하나 사면 14개 클럽 마음대로

2월 25일 밤 12시 홍대 앞 힙합클럽 ‘NB’. 100평 남짓한 플로어를 발 디딜 틈조차 없이 가득 메운 300여명. 질척한 힙합 리듬과 천장에서 뿜어대는 인공안개 속에서 남녀가 밀착한 채 흐느적거리고 있다. 뜻밖에도 무려 70%가 여자다. 그것도 모두 TV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쭉쭉빵빵 미녀들. ‘강남의 미녀가 요즘 홍대 앞으로 몰린다’는 말이 실감난다. 기어를 한 단계 낮춘 듯한 템포, 휴대폰 광고음악으로 귀에 익은 메리 J 블리지의 ‘패밀리 어페어’가 리믹스되어 스피커를 울린다.

인파 속에 떠밀려 여자들 틈으로 들어갔다. 야자수처럼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가슴에 닿았다. 한 가닥 끈으로 가린 흰 등줄기 아래 반원을 그리는 엉덩이의 웨이브가 유압을 받은 브레이크 드럼처럼 내 몸에 밀착해왔다. ‘맙소사!’ 얼굴이 달아올랐다. 스타일리시한 미니스커트에 붉은 탱크톱. 미녀가 암만 많아도 최고는 한눈에 띈다. 땀에 젖은 그녀가 턴할 때마다 배꼽과 허리에 매달린 은색 피어싱과 스트링이 찰랑거렸다. 흥분한 사내들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양손으로 떠받치고 환호성처럼 후렴을 래핑한다. “Put your hands up! Put your hands up!…” 오늘밤 그녀는 춤의 여신이다.

하우스뮤직클럽 ‘M2’. 이곳도 줄을 서야 입장할 만큼 붐비긴 마찬가지다. 폭발하는 사운드에 귀가 뜨겁다. 빡빡머리 남자가 즐비하고 여자는 거의 오프숄더 차림이다. 비키니 수영복 수준도 있다. “거기! 우두커니 섰지 말고 비켜요!”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외쳤다. 돌아보니 두 명의 롱부츠 아가씨. 깊게 팬 가슴 위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꽂힌다. 동행한 김승욱 기자가 맥주를 내밀었다. 인천교육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클럽은 나이트보다 싸잖아요. 나이트 가면 비싸고 귀찮게 부킹해야 되고….” 미래의 교사들은 맥주 한 병씩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럽데이를 제대로 즐기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단다. “그렇게 입고 안 추워요?” 뒤따라 나가며 괜히 한마디 던졌더니 한심하다는 듯 돌아본다. “여자 맘을 모르시네. 오늘 같은 날은 무조건 예쁘게 입어야죠. 청바지에 패딩 입고 춤 추면 누가 봐주기나 하나요?”

자정이 넘어가자 거리는 오히려 더 붐볐다. 동성끼리 움직이던 남녀가 쌍쌍으로 짝을 이루기 시작했다. 2:2 또는 3:3이다. 옷 잘 입고 훤칠한, 춤꾼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진짜 커플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니 “진짜 커플이 어딨어요! 열에 하나 정도? 거의 다 처음 본 애고 맘에 들면 원나잇 가는 거죠”라고 했다. 대부분 춤 추면서 파트너를 정한다. 여초현상 덕에 커플 형성이 더 원활하다. 파란 눈의 외국인도 제법 보였다. 대부분 한국 여자들을 다정하게 끼고 있다.

2명의 여자가 다가와 ‘후퍼 클럽’ 가는 길을 물었다. 한 명은 파티복이고 한 명은 평상복이다. “지방에서 왔어요. 나는 두어 번 와봤지만 내 친구는 첨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의상이 중요했다. 평상복은 얼굴이 더 예쁜데도 공주를 모신 시녀 같지 않은가. 그녀들은 후퍼까지 가기 전에 3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였다.

문턱 낮아지면서 색깔도 옅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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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은 나이트와 다르다. 나이트는 부킹과 술이 우선이지만 클럽은 음악과 춤이 우선이다. 또 클럽에는 늙었다고 문전박대하는 속칭 ‘물관리’가 없다. 클러버의 개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이가 좀 많아도, 청바지에 남방을 입거나 정장에 구두를 신고 들어가도 상관없다. 춤을 못 춘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사실 반 이상이 그냥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이다. 소수의 매니아들이 향유하던 클럽문화가 대중화를 이루게 된 계기가 바로 클럽데이다.

1990년대 말까지 클럽은 ‘마약의 온상’이란 이미지가 강했고 그로 인해 수시로 영업제재를 받아야하는 ‘불량업소’였다. 2001년 3월 4명의 클럽 주인과 800명의 클럽매니아가 ‘홍대 클럽 하나 되기’라는 슬로건으로 제1회 클럽데이를 열었다.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뒀다. 클럽은 물론 홍대앞 상가 전체를 마케팅하는 효과를 거둬 지역 상인의 호응까지 얻어냈다. 급기야 단속이나 일삼던 서울시에서 홍대앞을 야간 관광명소로 지정했다.

그러나 문턱이 낮아진 만큼 클럽문화 특유의 색깔은 옅어졌다. 음악보다 부킹과 일회성 섹스에 관심을 두고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클럽데이는 변질된 클럽문화의 현주소’란 자조도 들린다.

1990년대 후반까지 홍대앞은 라이브 클럽이 전성기를 누렸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와 인디 밴드가 공연을 했고 그 중에는 메이저로 올라선 뮤지션도 상당수다. ‘델리 스파이스’ ‘크라잉넛’ ‘자우림’ 등이 홍대앞 라이브 클럽에서 싹을 틔웠다. 그러나 클럽데이를 계기로 큰 자본이 투입된 댄스클럽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반면 원조격인 라이브 클럽은 재정난에 허덕이며 인디뮤직의 실험무대라는 의미마저 퇴색하고 있다.

재즈클럽 ‘에반스’의 홍세존(43) 사장은 “일부 매니아를 제외하면 고객은 규모가 크고 설비가 잘 된 댄스클럽으로 가게 마련이다. 댄스클럽 중에서도 영세한 곳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했다. ‘프리버드’ 클럽의 김원석(35) 사장은 “10년 전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 라이브 클럽은 3곳밖에 없었다. 지금은 10여곳으로 늘었지만 라이브 손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새벽 2시 클럽 ‘후퍼’. 술에 젖은 사내들이 더욱 대담해졌다. 벽 쪽에 붙은 남녀는 몸을 밀착시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남자가 맘에 드는 여자 뒤로 돌아가 몸을 비비는 이 구애의 몸동작을 ‘부비부비춤’ 혹은 ‘매미춤’이라고 한다. 여자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흘낏 돌아보고 ‘물’이 좋으면 잠자코 응하지만 맘에 안들면 바로 털어버린다. 한쪽에서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싫다는데도 남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나가버렸다.

“아우, 애들이 진짜 더럽게 놀아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클럽이 나이트보다 더 심해요!” NB클럽에서 나온 4명의 여자가 인상을 쓰고 있다. 얼굴은 빠지는 편이나 복장은 화려했다. 21살부터 23살까지라고 했다.

“여자애들도 부비부비 열라 좋아하는 애 많아요. 우린 아녜요. 여자들은 남자보다 옷에 목숨 거는 편이죠.” 그들의 드레스는 오늘을 위해 의상실에서 특별히 맞춘 것이다.

서울과 일산에 사는 24살 남성 5명에게 말을 걸었다. “왜 오냐고요? 춤이 좋고 음악이 좋아서 와요. 우리 춤 잘 추거든요.” “2차는 옵션이지 의도하지 않아요. 부비부비 목적으로 오는 애는 한눈에 딱 알 수 있어요. 얼굴 잘 생겨야 원나잇 가능해요.”

새벽 3시 반. 짝을 지어 택시를 타고 떠나는 커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 백인이 한국 여자를 차에 태우고 사라졌다. “저 새끼, 남의 나라 와서 X지랄 떨고 있네. XX들!” 어려보이는 남자 셋이 가운데 손가락을 펴보이며 침을 뱉었다. “우린 지방에서 올라왔어요. 술 한잔 하고 홍대클럽 한번 가보자 해서 왔는데 뭔 양놈이 이렇게 많아요? 재수 없게.” 욕설을 하면서도 지나가는 여자들을 훔쳐보느라 눈동자가 바쁘다.

“모텔 갈 양이면 신촌으로 가든가”

홍대앞은 서울에서 이태원 다음으로 외국인이 많다. 다양한 나라 다양한 인종이 모이면서 홍대앞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제 ‘문화의 해방구’보다 ‘성의 개방구’로 알려지면서 단순히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찾는 외국인이 많아졌다. 지난 1월 초 인터넷 영어 동아리 ‘잉글리시 스펙트럼’의 외국인 강사들이 한국 여성과 문란한 파티를 벌였다는 일명 ‘매리제인 사건’도 이곳에서 벌어졌다. 매리제인은 이곳의 한 카페 이름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클럽은 ‘미군 출입을 금지한다’는 메모를 출입구마다 붙였다. 클럽 입구에서 만난 종업원 박모씨는 “하도 싸움질을 해서 미군은 안 받는다. 일반 외국인도 아이디 카드가 있어야 입장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미군 출입금지는 매리제인 사건 이전, 2002년부터 이미 클럽에서 행해온 조치다. 거리에서 만난 대학생 이모(22)씨도 다르게 말했다.

“클럽의 단골고객 중 외국인이 많아요. 클럽에서 많이 벗고 잘 추는 애들을 일부러 고용하는데 그런 애들이 외국인을 주로 유혹하죠.”

새벽 5시, 파장 분위기다. 술집 전단지가 어지럽게 흩어진 길바닥에 밤새 노느라 지친 남녀가 여기저기 주저앉아 있다. 한쪽에서는 젊은 남자 둘이 시비가 붙었다. 길에 서 있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었는데 이미 파트너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들은 이중부킹된 여자를 두고 욕설을 주고 받더니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다. 경호업체 요원들이 뛰어와 나뒹구는 둘을 겨우 떼어놓았다.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폭력사건이 빈발하다보니 각 클럽에서는 경호업체에 의뢰해 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있다. 경찰이 오기 전에 현장을 수습할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인지 싸움이 없는 편이란다.

새벽 6시, 여관을 찾았으나 빈 방이 없다. “오늘 같은 날 방이 있나. 이 주변은 다 마찬가지야.” 여관 주인과 이야기 하는 도중 마침 한 커플이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주인 아주머니는 “다 예약돼 있고 다음 손님이 곧 올 것”이라며 우리 등을 떠밀었다. 예약은 방마다 1시간 단위로 두 탕 세 탕씩 짜여 있었다. 여자를 방에 재워두고 나간 남자가 새 파트너를 데리고 와 딴 방을 찾기도 한단다. “모텔 갈 양이면 신촌으로 나가보든가.”

인근 사우나에는 젊은 남자들로 넘쳐났다. 수면실이 모자라 탈의실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다. 거의 클럽데이에 온 사람이었다. 잠자리를 찾노라니 낯익은 친구들이 눈에 띄었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외국인을 욕하던 지방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클럽데이 도전’은 시시하게 끝난 모양이다.

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
※본 기사 작성에는 김승욱(kswforever@freechal.com)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 M2
특징:하우스 음악이 주류를 이룸다른 클럽과 달리 DJ를 향해 일률적으로 춤을
춘 다. 기존에 클럽과 차별되는 세련된 인테리어와 음향시설 + 2층 독립공
간 보유, 1000명 수용

tip:현재 홍대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수질이 좋다는 뜻) 클럽 답게 연예인도 많
고, 비주얼이 좋은 클러버들이 많았다.음악을 즐기러 온 사람들 보다는 작업
을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NB
특징:양현석이 대표로 있어서 인지 소속사 연예인 프로모션이 많고,
시설이 미비 하지만 인산인해를 이룸.플로어가 위쪽은 클러버들을 위한 공간

tip:홍대 클럽중 가장 연령대가 어린 손님들~ (물론 나이든 사람도 간혹 보임)
정장차림으로는 이방인 취급 / 야한 옷차림 + 개성있는 옷차림 환영
흑인 힙합문화를 답습한 분위기

★SABB
특징:주말에는 힙합 가수들과 연계한 행사가많고,
하우스+힙합 음악 5:5 비율 / 독특한 인테리어 / 좁지만 손님 많음
tip: 외국사람(카추사)더러 보임.
비주얼이 좋은 손님보다는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음.

★Hooper (사브2층입니다~)
특징:홍대에서 유일하게 가요가 나오는 곳.처음 클럽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환영 받음대중적이며, 친근한 곳
tip:노출보다는 편안한 옷차림이 환영 받는곳.나이트 음악이 나오지만
홍대 특유의 분위기를 즐길수 있는곳.

추천 할만한 곳들을 적어봤어요~
클럽에 익숙하시지 않다면~
홍대 정문에서 극동 방송국 가는길 쪽에 포진해 있는

사브,후퍼,할렘 이런곳 추천해드리구요~

힙합좋아하시면 nb추천해 드립니다.

나이트 분위기 원하시면 럭셔리 수 노래방 뒷골목에 있는
새로생긴 M2나 같은건물 2층 큐보~ 추천해 드리구요~

무엇보다 가격경쟁력이 있으니까~ 후회는 안하실듯~
입장료(음료 한병) 만원~만오천원 선이면 주말에도 가실수 있구요~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에는 클럽데이라구 만오천원만 내면 12개 클럽을
다 입장할수가 있어요~
오늘이 클럽데이에요~

그럼 즐겁게 놀다 오세요~

교양 다큐를 쓰는 방송작가는 최신 문화 정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좋아하는 공연조차 챙겨 보기가 여의치 않다. 그렇다고 원망만 할 순 없는 노릇. 온몸을 전율케 하는 공연이 매일 밤 열리는 클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나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켜 줄 제 1의 오아시스다.

한때 나의 취미는 홍대며 대학로 거리에 붙어 있는 콘서트 포스터를 탈취, 갈취(?) 등 무단 취득하여 천장을 포함한 내 방 전면에 붙여놓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 유지한 취미였으니, 벌써 6~7년 전의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라디오나 팸플릿 등이 오프라인 정보의 중심이니, 그러한 취미는 나를 꽤나 앞서가는 정보통으로 만들어주었다. 여의도 바닥에서 노트북으로 밥 짓기 시작한 지 올해로 7년째. 여의도 방송가에서 괴담으로 떠도는 방송작가에게 없는 것에 따르면, 작가 1~2년 차에는 돈이 없고, 3~4년 차는 빈번한 약속 펑크 낸 끝에 친구가 없고, 5~6년 차는 물 오른 자신감에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 그다음은? 알아서 상상하시길…. 물론 현실을 상당 부분 반영한 괴담이지만 나의 경우 작가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문화를 즐기고 흡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인간의 목표는 노동이 아니라 여유라는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 선생의 말씀을 가슴에 아로새기며 부단히 정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노트북은 밥만 지을 줄 알지 공연 ‘예매’라곤 도대체 할 줄 모른다(영화든, 공연이든 중요한 건 바로 예매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 방송에 스케줄을 저당 잡힌 지난 세월, 그동안 번번이 뒷전으로 밀린 약속에 상처입은 친구들과 떠나간 지인들이 어지간히 많았을까. 이런 상황 속에 공연을 예매하는 호사를 어찌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찾은 대안이 바로 홍대 앞 라이브 클럽. 지금은 대중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마이 앤트 메리, 미선이 등 인디 밴드들의 모처이자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본 등 펑크 또는 스카 밴드들의 아지트. 때때로 기타리스트 김광석, 신촌 블루스 엄인호, 사랑과 평화의 공연을 예매없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이다.

애드벌룬처럼 부푼 가슴을 안고 홍대 주차장 골목에서 읊조린다.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

만일 내가 4~5년 정도 차이가 나는 후배와 함께라면 단연코 드럭 DRUG(http://cafe.daum.net/dgbd)으로 발길을 옮길 것이다. 우리나라 라이브 클럽의 시작을 알린 드럭. 현재 예전 드럭 자리에는 펑크 밴드들의 아지트 스컹크 헬 Skunk Hell이 들어섰고, 지금은 일 마레 안쪽 골목 옛 DGBD 자리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드럭은 이제 로큰롤 밴드로 불리길 바란다는 크라잉넛 같은 팝 펑크 밴드의 공연이 자주 열리기 때문에 초심자들의 입문 코스로 적절한 편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펑크 밴드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면 고등학생들의 과격한 슬랭을 어느 정도 각오해야만 한다. 라이브 클럽 중 상당한 인지도를 획득한 드럭은 다른 곳에 비해 입장료는 비싼 편이지만(음료 한 병을 포함한 가격이 무려 1만5000원) 기성 밴드와 인디 신에서는 검증된 신진 밴드들의 무대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인디 밴드 하면 보통 펑크를 떠올리지만 홍대 인디 신 10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언니네 이발관과 같은 모던 록 밴드다. 그리고 현재 홍대 인디 신에서 모던 록 계열 밴드들은 확고한 주류로 자리 잡았다. 클럽 빵(http://cafe.daum.net/cafebbang)은 영화 <버스정류장> OST로 유명한 루시드 폴의 전신인 미선이 유의 밴드를 만날 수 있는 모던 록 전문 라이브 클럽. 슬픈 음악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 좋아지는 나 같은 성향의 이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산울림 소극장, 쌈지 스페이스, 루프, 팀 프리뷰 등 대안 공간이 밀집한 지역에 위치한 클럽 빵은 그래서인지 음악 공연 외에도 인디 영화 상영이나 대중음악 강좌 등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아이템 선정과 섭외, 밤샘 원고 끝에 찾은 여유니 뭔가 위로가 필요한 날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은 재즈 클럽 클럽 에반스 Club Evans(http://www.clubevans.com)다. 보통은 공연료가 5000원인데, 유명한 밴드가 나오는 날은 8000원이다. 주인공은 플루드 prelude. 다가올 5월, 이 밴드는 재즈 뮤지션들에겐 꿈의 무대인 뉴욕 블루 노트에서 공연하는 최초의 한국 밴드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무작정 클럽으로 향한 날, 기대하지도 않았던 훌륭한 밴드를 만나는 행운이란…. 에반스처럼 단정한 양복을 세련되게 갖춰 입은 이들은(아, 뭔가 대접받는 기분이다) 연주도 에반스를 닮았다. 흑인 재즈와는 달리 에반스의 음악은 어딘가 심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절로 발장단에 외마디 소리까지 지르다니…. 내 귀가 좀 더 섬세해졌거나 그들의 연주가 압도적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의 연주 중 내 귀를 잡아 끄는 것은 단연 베이스였다. 내지르는 악기가 아니라 감싸 안는 악기라는 베이스. 악기에 대한 감정이입이 높아가고 그간 쌓인 피로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라이브 음악은 장르를 불문하고 언제나 내 마음보다 힘이 셌다. 밤 11시 홍대 앞. 두 시간 동안의 공연 끝에 나온 거리는 짧은 톱에 아찔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관능적인 몸매를 뽐내는 젊은 언니야들로 넘쳐난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클럽 데이가 있는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정도에만 볼 수 있었던 과감한 힙합 패션이 언제부터인가 날을 가리지 않더니 이제는 계절마저 가리지 않는다. 클럽 nb 정도로 시작했던 홍대 앞 댄스 클럽 이 M2, 후퍼, 큐브 등으로 점차 확장되었다. 홍대 클럽 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과 맞닿아 생겨난 변화들이다. 문득 밤샘 작업으로 한층 짙어진 내 눈가의 다크 서클과 꽁꽁 둘러맨 목도리가 민망해진다. 잠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배경 음악으로 깔리고 찬 바람이 내 주변으로만 회오리치는 듯한 쓸쓸한 기운을 느껴야만 했다. 현재 홍대 앞 댄스 클럽과 라이브 클럽의 관객 수는 거의 10배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이와 함께 댄스 클럽과 수용자에 대한 세인들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그러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사람일 뿐 문화는 죄가 없다. 클러버들이 유행이 아닌 각자의 취향에 민감해질 때 지금의 불균형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 같은 사람도 풍요로운 나이트 라이프를 즐길 수 있지 않겠는가!

글을 쓴 박민경은 여전히 시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쫓겨 다니는 방송작가다. 방송 취재를 통해 만났던 홍대리안(?)들의 순수와 열정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수용자로서 그들을 응원하고 있지만, 10년 안에 그녀 또한 홍대리안으로 변모할 계획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으니,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참고로 아래 카페에 가면 클럽 공연 일정과 인디 밴드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http://cafe.daum.net/Indiestory(김 기자의 인디 속 밴드 이야기)
기자/에디터 : 한지희 / 사진 : 글·박민경/일러스트·밥장

http://www.mnow.net/viewer/?tid=888 신촌클럽 정보
서울시 구라정보
http://www.visitseoul.net/korean_new/seoul_seoul/k20010829_cafe/k20010829_cafe_m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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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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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김씨 (淸道金氏)  청도김씨 홈으로 이동

 

 1> 시조 :  김지대[金之岱]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청도(淸道)는 경북 남쪽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이서소국의 땅이었으나
     고려초에
오악현, 형산현(荊山縣), 소산현(蘇山縣) 3개현을 합하여 청도군(淸道郡)이 되었다.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8세 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과 원종때의 명신으로 비서소감, 지공거, 추밀원부사를 거쳐 첨서추밀원사에
     승진하였다. 1258년 몽고군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다스린 공훈으로 오산(청도)군에 봉해졌다.
     원종이 즉위한 후  이부상서를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도를 관향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세계를 이어왔다.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지대의 아들 선장(善莊)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증손 한귀(漢貴)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최영과 함께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때 형조와 호조판서를 역임한 점(漸 :한귀의손자)과 세조때 단종복위를
     도모한
차산(次山)이 유명했으며, 난상(鸞祥)은 을사사화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조때 직제학을 거쳐 대사성에 올랐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때 임란공신에  책록된 몽룡(夢龍)과 희방(希邦)이 이름났고,
     순조때 성리학자로 유명한
응하(應夏)는 문하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한말에 와서 청도김씨를 빛낸  인물인 정호(正浩)는 정밀한 지도 작성에 뜻을 두고 36여년간
     전국을 돌며
[청구도(靑丘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여 우리나라 문화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청도김씨(淸道金氏)는 남한에 총 15,596가구,
     64,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영주시 가흥동

경남 밀양군 청도읍 두곡리, 인산리

     경북 달성군 옥포면 교항동

경남 거창군 마리면 일원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동



자신의 본관과 유래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www.burimhong.pe.kr/name1/000korean%20name.htm

 

청도에는 소싸움도 있는데 ^^ 언제 보러 가야쥐. 언제가지?


KBS 역사 스페셜

  김정호의 꿈,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방송일: 2003208                                                      동영상 :

방송(동영상)을 시청하시기 위해서는 KBS 홈페이지(http://www.kbs.co.kr)에서 회원가입(무료)을 하시면 됩니다.

■ 방송일시 : 2003년 2월 8일 (토) 20:00-21:00 KBS 1TV

■ 담당 P D : 박현민 [781-3557] / 작가 : 정윤정

■ 더빙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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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140여년전. 국토의 깊고 얕은 곳까지 속속들이 알고자 했던 한 사내의 꿈!
그것은 한 장의 지도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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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는 모두 10여본.
그 중에서도 성신여대 소장본이 보물 850호로 지정돼 있다.
상태가 가장 양호할 뿐 아니라,
지도 일부에 색을 칠한 것이 조화를 이뤄서,
예술적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철종 12년인 1861년.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우리가 흔히 봐오던
한 장짜리 지도들과는 달리 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의 종이를 옆으로 길게 이어 붙여 놓았는데,
이같은 책이 스물 두권이 모여서 하나의 지도를 이루게 된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려놓은 전국지도인데,
만약 이것을 한 장으로 만들었다면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때문에 떼어 놓으면 분리도가 되지만 합하면 전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어느 정돌까?
진본과 똑같이 만든 영인본을 가지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바닥에 펼쳐진 지도책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한반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스물 두권의 지도책을 모두 붙이자
엄청난 크기의 전국 지도가 완성되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이 거대한 지도속에는 과연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맥이다.
산봉우리를 각각 떼어서 그리지 않고 줄기와 줄기를 이어서
마치 하나의 구조물처럼 표현하고 있다.
땅을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동일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국토관이 반영된 결과다.
산맥은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이며,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혈맥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백둑대간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인데,
백두산에서 시작된 국토의 큰 흐름이 남북을 관통해
마치 척추처럼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동여지도 속에 나타난 산봉우리는 모두 삼천여개.
전체를 하나로 표현하면서도 각가의 산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백두산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렸다.
'백두'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려는 듯 흰 봉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함경북도 명주군에 위치한 칠보산-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듯이 보인다.
금강산은 무수한 봉우리를 표현해, 일만이천봉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의도적으로 과장한 오대산.
서울의 삼각산 역시 세 개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 계룡산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것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속에 살아있는 산의 이미지를 지도속에 옮겨놓은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도로에 대한 표현이다.
모든 도로가 마치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듯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사실과 달리 도로를 왜곡해서 표현한 까닭은 물길과의 구별을 위해서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나타냄으로써
한가지 색깔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판지도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 것이다.
이전의 지도들과 대동여지도를 구별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은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두 스물 두 개가 기호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은 모든 지도에서 당연하게 사용되는 것들이지만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최초였다.
구체적인 활용의 예를 살펴보면,
영아를 표시하는 이 기호는 병영 등의 군영,
읍치는 오늘날의 시청이나 군청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군사기지를 나타내는 진보다 역참, 봉수 등 다양한 기호가 사용됐는데,
이전과 달리 글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지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140여년전에 만들어졌음에도 현대 지도 못지 않은 아이디어가 활용된 지도-
대동여지도는 크기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당대 최고의 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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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예나 지금이나 지도를 가장 많이 활용하게 되는 경우는 길을 찾을 때다.
고지도를 연구하는 이상태 선생과 함께 대동여지도의 도로망을 확인해보았다.
직선으로 표현된 도로들은 지도상에서는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길이거나 구불구불하게 돌아가는 길이라 훨씬 더 멀 수도 있다.
도로의 길이만 가지고는 실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이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다.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하나씩 찍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방점들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산악지역의 경우엔 주로 조밀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좁은 곳은 1.5센티미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넓은 곳은 얼마나 될까?
2.5센티미터- 주로 평야지대에서 확인된 수치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방점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두 지점간의 거리를 파악하는데만 머물지 않는다.
전국 어느 지점에서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일정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 네트워크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모든 도로망이 서울만을 중심으로 표기되던
이전 지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획기적인 변화다.

(현장음)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지도들에선 이전보다는 발전된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도는 옆에 따로 표를 만들어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자리에
두 지점간의 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이 표를 활용할 경우 거리는 알 수 있지만 여전히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동여지도의 도로 표기 방법이 왜 탁월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조선시대 물길은 도로 못지 않게 중요한 교통로였다.
때문에 대동여지도 상에도 물줄기들이 매우 상세히 표현돼 있는데,
한가지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물줄기가 어떤 지점에서는 두줄기로,
또 다른 곳에서는 한줄기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쌍선과 단선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마을 옆을 흐르고 있는 강은 낙동강의 본류다.
상류임에도 불구하고 배를 이용하지 않고선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강폭이 넓은 편이다.
그러나 이 지점을 기준으로 상류쪽은 강의 깊이가 급격히 얕아져서
돛단배는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공물을 실어나르던
조운선들의 종착지가 이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

결국 대동여지도에서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돛단배를 운행할 수 있는 구역인 동시에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하는 구간을 나타낸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양으로 가려면 육로를 이용해 문경새재를 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나루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유곡동.
도로로 변해버린 이곳은 조선시대 문경새재를 오가던 여행자들에게 말을 제공하거나
숙소를 알선하던 역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공덕비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유곡역의 위치도 정확하게 표시되어있다.
때문에 대동여지도만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물류 운반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공물을 싣고 동래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게된다.
물줄기가 단선으로 바뀌는 문경에 다다르면,
유곡역에서 교통편을 마련하고 육로를 따라 문경새재를 넘는다.
다시 충주에서 배를 갈아타면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곧장 한양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대동여지도에는 당시의 교통, 물류 정보가
완벽하게 담겨있어 매우 실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제작된 지도들과 비교할 때 대동여지도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일까?
대동여지도를 현대 지도와 동일한 크기로 축소해서 그 외곽선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남해안과 서해안 지방에서는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북부지역으로 가면서 오차가 발생했는데
주로 산악지형에서 실제보다 조금 더 넓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터뷰)

인공위성에서 찍은 서울의 모습이다.
하천 매립등으로 일부 지형이 벼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은 140여년전에 만들어진 고지도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정확하면서도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이같은 특징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당시 조선의 교통 물류네트워크를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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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오가는 차량들로 붐비는 중림동 로터리.
몇해전 이곳에 김정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에 비석을 세운 까닭은 현재까지 김정호에 대해 밝혀진 유일한 단서가
이 일대에서 거주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인터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김정호 개인에 대해서는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 외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이 때문에 그를 둘러싼 과장된 소문들이 오랜 시간동안 진실처럼 전해져오기도 했다.
당대에 김정호에 대해 적은 유일한 기록은 이향견문록이라는 책이다.
이책에는 김저호가 만든 지도가 매우 훌륭했다는 간단한 내용만 담고 있다.
다만, 중인 이하 사람들의 업적만을 싣고 있는 이 책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터뷰)

김정호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일제 때 간행된 조서어독본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는 김정호가 나라에 정확한 지도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혼자서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오르고 전국을 수없이 답사하며 조사한 결과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나라를 위해 쓰고자 대원군에게 가져갔지만
지도가 너무 상세해서 국가의 기밀이 다른 나라로 새나갈 것을 염려한
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혔고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호가 평생을 바쳐서 만든 대동여지도 목판은 모두 압수돼 불태워졌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90년대 초반까지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난 90년대 초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여러 매의 목판이 발견되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동여지도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목판을 두고 정밀조사가 실시되었다.
수장고에서 발견된 목판은 모두 열 한 매.
하나의 목판에는 앞과 뒤 각각 두 면씩 총 네 개의 면이 새겨져 있다.
확인 결과 이 목판은 대동여지도 인쇄본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오상학 학예연구사 인터뷰)

목판의 존재는 대동여지도가 압수, 소각된 적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김정호의 옥사설 또한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단서다.
이향견문록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책에서는 김정호의 죽음을 '몰'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약 옥사했다면 '물고'라고 적어야 옳다.
또한 대원군 집정기에 쓴 이 기록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대동여지도를 한 부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김정호가 처벌을 받았다면 결코 적지 않았을 내용이다.
결국 조선어독본의 내용은 대원군을 우매한 지배자로 묘사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했던 일본의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정호의 작품은 대동여지도 하나만이 아니다.
제작시기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선전도는
역시 목판으로 만들어진 서울지도인데,
현존하는 가장 큰 서울지도일 뿐 아니라 서울을 담은 목판지도들 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대동여지도 못지 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야할 업적이 지리지의 편찬이다.
지리지는 국토의 정보를 집대성해 놓은 일종의 지리 백과사전인데
김정호는 일생동안 여도비지, 동여도지, 대동지지 등 세 종류의 지리지를 만들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살아생전 김정호는 이름을 날리거나 명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지리학적 성과들은
국토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과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인물 김정호를 되살아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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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우리나라 전통 지리와 천문에 관한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회장-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들도 대거 선보였는데 대동여지도 이전의 지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여지전도- 대동여지도보다 40여년 앞섰을 뿐인데도
지도의 정확성은 매우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글씨는 지도라기 보다 지리지를 연상시킨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곤여전도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 지도 속에서도 한반도의 모습은 심하게 왜곡돼있다.
그렇다면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현대 지도 제작과정을 통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측량을 위해 먼저 GPS 장비를 설치했다.
인공위성을 통해서 이 지점의 경위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현재 전국에는 측량 기준점들이 정해져있는데.
이것은 측정할 때마다 생길 수 있는 오차를 막기 위한 조치다.

(인터뷰)

각 지점에서 산출된 데이터를 조합하면 지점과 지점간의 거리,
경위도상에서의 정확한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지도 제작의 상당부분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데,
지명이나 경계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지도 제작에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을 활용함으로써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인터뷰)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실측지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토지측량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
실측자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서를 찾던 중 김정호의 지리지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쓴 첫 번째 지리지인 여도비지는 도별로 지역을 나눠놓은
일종의 군현 지리지인데 친구였던 최정환과 함께 저술한 책이다.
이 여도비지 속에 매 지역마다 그 지방의 경위도를 기록한 표가 들어있다.
여기에 적혀있는 경위도는 북극고도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경위도 기준이 있었고,
실제 지도 제작에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김정호가 직접 측정했던 것일까?

(인터뷰)

김정호의 또다른 지리지 속에서도 이와 동일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정조 15년. 8도에 명을 내려 북극고도와 편동서도를 측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때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측량이나 측정을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한 결과 세종 때 이미 측량을 시작했고
전국의 주요도로에 30리마다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거리 측정을 위해 기리고차라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는 스스로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반자동 거리측정기였다.
이 놀라운 거리 측정기에 대해서는
호대용이 쓴 담헌서 속에 그 작동원리를 짐작해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기록에 다라 복원해보면 기리고차의 겉모습은 마차와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상당히 복잡한 형태다.
수레가 반리를 가면 종이 한번 울리고, 1리를 갔을 대는 여러 번 울리도록 했다.
사람은 수레위에 앉아 소리를 듣고 기록하기만 하면 됐는데,
북소리는 5리에서 한번, 10리에서는 여러 번이 울렸다고 한다.

(인터뷰)

조선시대 궁궐의 모습을 그려놓은 동궐도.
당시 궁궐안 곳곳에 설치돼 있던 천문 관측기구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경위도 측정의 전통 또한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겨위도를 측정한 가장 큰 목적은
날씨를 연구해서 농사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측정된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지 활용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이미 측정해 놓은 정확한 데이터가 있다면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기 위해서
매번 새로이 측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김정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동지지 속에 자신이 참고한 도서명을 밝혀놓았는데,
모두 예순 다섯 종으로 고금의 지리학 서적들이 망라돼있다.
이것은 김정호가 전통 지리학의 성과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서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던 김정호.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과 64년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됐는데,
이 두 개의 판본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이 경우는 산맥을 새로 삽입했다
지명이 새로 추가된 경우도 있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도 십 여 군데가 넘는데
대동여지도의 수정이 목판작업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김정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김정호가 눈을 감은 그 순간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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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인천에 위치한 화도진 공원.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은 강화조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됐다
강화조약이라고는 하지만 무력을 앞세운 열강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 측 대표로 참석한 이는 전권대사 신헌
대원군 집정기의 대표적 무관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인물이다.
신헌은 자신의 문집에서,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로서는 국가 1급 기밀 서류에 해당하는
비변사나 규장각의 지도들도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호가 당대 최고의 군사 지도들을 볼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당시의 군사지도들은 어떤 특징을 자지고 있을까?
18세기에 만들어진 이 지도는
당시 청나라와 마주하고 있던 국경 지역의 지형을 그려놓은 관방지도다.
이 지역의 지형, 성곽, 도로 등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돼 있다.
정방 산성도.
이 역시 이 지역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군사지도다.
성벽과 진보 등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우물과 창고까지도 세밀하게 표현해 전쟁시에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특정 지역에 편중됨이 없이
전국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전국의 봉수 체계를 파악해야 한다면
지도상에 표시된 봉수 기호들을 모두 연결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한 장의 훌륭한 봉수도가 완성되는 셈인데,
역참이나 창고, 진보 등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 지도라도 개별 지역에 대한 정확성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
서울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는 강화도를 살펴보면,
먼저 성벽의 위치가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강화도 전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봉수나 창고 등 각종 군사 시설들에 대한 파악도 손쉽다.
이것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군사지도로서 활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의 군자시도로서의 활용가치는 이미 입증된 바 있다.
1925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정호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청일전쟁 당시 양국 군대가 모두 대동여지도를 작전 지도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지리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도
대동여지도를 사용해서 군사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일본군은 우리나라에 과한 상세한 지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지도도 그 중 하나인데 서해안과 한강 주변의 해로를 표시한 것이다.
서울까지, 배를 이용해 들어 올 경우 대비해
한강 전체의 수심까지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근대 측량기법으로 만든 정밀한 지도를 가졌음에도
대동여지도를 활용한 것은 이 지도가 현대 지도 못지 않게
정확하고 편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누가 보아도, 그 어디에서 보아도
똑같은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의도했던 김정호의 생각 속엔,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의 공유라는 현대적인 사고 방식이 녹아있는 것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만든 시기는
이양선과 외국함대들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활용 가능성을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저술이었던 대동지지 속에
유독 군사항목이 강조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전고라는 항목인데,
이전의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항목을 통해
국방을 중시했던 김정호의 지리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궁극적인 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대동여지도의 첫머리에 실린 지도유설이다.
그의 뜻은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F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사용하고자 함이었다.
대동여지도는 이전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무모하게까지 여겨지는 한 사내의 꿈에서 비롯됐다.
국토 정보를 지도상의 네트워크로 구축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희망했던 그 꿈은
지금 우리 앞에 6.6m 초대형 지도로 남겨졌다.

출처 http://www.kbs.co.kr/history/vod.shtml

 

보다 더 많은 청도 김씨에 대하여, http://my.dreamwiz.com/dbaseman/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의 출자지().



관적() ·본적() ·성관() ·본() ·관향() ·적관()이라고도 한다. 보통 성()과 병칭되어 개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본관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본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으나 995년(성종 14)경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시 초기의 본관제는 지역사회 내부의 자체적인 질서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다. 즉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민() 지배방식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 전기에 본관을 벗어나는 거주지 이동은 입사() ·입산() 등을 통한 신분이동이나, 방수() ·행상() 등 역()의 수행이나 직업상의 필요, 또는 사민() 유배 등 정책적인 경우를 비롯하여 기타 공식적으로 허용받은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유망민으로 간주되어 본관 지역으로 되돌려졌다. 본관은 양인() 이상에게만 주어졌으며, 노비양수척() 등의 천인()들은 본관제 질서에서 배제되어 국가에 대한 국역()의 부담도 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고려 정부는 지역사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성() 및 직역()을 분정()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부세() 징수 등의 행정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토성은 신라 말, 고려 초 변동기의 자위조직의 기초집단인 성()을 중심으로 분정되었는데, 이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읍()’과 같은 공동체 관계로 파악한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에서 각 성관의 시조들이 해당 지역에 식읍() 또는 채읍()을 사봉()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려 후기 이래 향촌사회에서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고, 유망이 극심하게 일어나면서 본관과 거주지의 분리현상이 확대되어갔다. 이제는 본관 지역을 이탈한 농민들을 원래의 본관으로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현재의 거주지에 적()을 붙여서 수취를 도모하는 방편이 보다 편리해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되고, 본관이 점차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성()은 처음에는 동본()이었다는 관념에서 성관()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즉 군소 성관들이 동성의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본관은 이제 성관으로서 ‘동성동본은 백대지친()’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었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특히 이러한 관념이 강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들은 반드시 원조()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식 아래에서 조선 후기에는 족보 편찬이 활발해졌다.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 본관의 사회적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지하는 등 법률적인 면에서 그 기능이 남아 있고, 특정 성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분관념의 상징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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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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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에게 빗팔기

心身FREE 2008. 6. 14. 23:13

항상 달리 생각해 본다는 것,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길을 찾아본다는 것,
엉뚱하게 생각해 보는 것, 뭐 이런 것에 한 때 익숙한 적이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괴짜라는 소리도 가끔은 들어보고 튄다는 소리도 들어봤는데

그 땐 이런 애기는 욕이나 다름이 없었던 거 같다. "모난돌이 정맞는다"라는
부연을 하면서 말이다. 어린 시절 공부하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 산으로 놀러다니고 언젠가 먹었던 반찬이 맛있어서 그 반찬과 비슷한 풀을 책가방에 한웅큼 캐온 적도 뭐 그런 것들도 기억의 창고에 저장이 되어 있어서 가끔은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참 없어 보이는 기억이지만 말이다. 동네 아이 꼬셔서 만화방에 데려가고 장난감을 손에 쥐고 혼자서 우주를 여행하기도 하면서 한적한 길을 가다보면 황금박쥐처럼 우주에서 지구를 구할 사람은 너다라는 메신저의 목소리를 기다리던 유치짬뽕의 기억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수건을 목에 매달면 수퍼맨이 되기도 하고 가면하나 쓰면 마징가로 변신하기도 했던 그 작은 시절엔 오히려 못할 것이 없던 거 같다. 그 시절 마음대로 안되는 것은 집안에서 뿐이니 지금과는 정 반대인가?

사람이 나이가 들면 여러가지 능력이 퇴화가 되는데 그 중에서도 창의력을 많이 잃는게 아닌가 한다. 워낙 세상의 질서에 편입을 하려고 온 몸의 세포가 긴장을 하며 또다른 주입식 교육을 받게 되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는 同和作用이겠지. 사회생활을 해 나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항상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왔던 것을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한다라는 방식으론 내가 경쟁하는 카테고리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 다른데도 그렇겠지? 밤과 낮이 없는 인터넷, 어쩜 수백만이 넘을 인터넷상인들과 인터넷비즈니스 관계자들, 이런 이들과 경쟁을 해서 그냥 저냥 살아봐야 IMF이전의 또 다른 소시민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때처럼 시간이 누적되면 승진과 정년이 보장되던 모습은 아니니 말이다.

역발상이라는 것, 달리 생각해 본다는 것, 어쩜 과대망상이라는 것까지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생존의 명제가 되어 버렸다. 어제와 달라야 하고 지금까지와 달라야 한다. 그 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달라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떠올릴때 난 어릴적 가난이나 어쩔수 없이 자주 해야 했던 이사등을  가끔은 감사하게 생각하게 할 때도 있다. 수퍼맨을 만들어 주었던 수건, 다행스럽게 뛰어내리진 않았지만

우산을 들고 뛰어내리면 낙하산처럼 안전할까말까를 고민했던 옥상, 비슷하게 생기면 로봇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차로도 변신하기도 하던 나무, 돌, 고무신... 쉽게 조립이 되지 않고 부러지기 쉽상이던 100원짜리 장난감로봇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그 시절이 나에게 준 것이 상상력이 아닐까. 세상이 힘들어지거나 내 갈길을 찾기가 어려워 질때면 이런 기억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가깝거나 조금은 먼, 또는 아주 먼 미래를 마음껏 그려내는 스케치북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난 나의 과거를 사랑한다.

중국 남방의 한 대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내걸고는 영업사원을 모집했다. 회사에서는 구름 떼처럼 모여든 지원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열흘 내에 가능한 한 많은 빗을 스님들에게 팔고 오라는 다소 엉뚱한 요구를 했다. 응시자들의 반응은 제 각각이었다. 일찌감치 포기하는 사람, 하는 수 없이 해보겠다는 사람, “스님들은 모두 머리가 없는데 무슨 수로 빗을 팔겠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갑, , 병 세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각각 나무 빗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고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업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갑은 산 속에 있는 절에 가서 빗을 팔려다 스님들에게 면박만 당한 채 쫓겨났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산기슭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머리가 가려워 연신 긁어대고 있었는데 갑이 빗으로 긁어주자 아주 시원해 하며 빗을 한 개 사주었다.고 말을 했다. 한편 을은 꽤 큰 절을 찾아갔다. 참배를 하러 온 신자들의 머리가 바람에 날려 엉클어진 것을 보고 그는 절 주지스님에게 말했다. “저런 꼴로 부처님께 향을 올리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제단 앞에 빗을 놓아두어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후 참배를 하도록 하시죠.” 이렇게 해서 을은 그 절에 빗 10개를 팔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병은 빗 만개를 팔았다고 얘기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직접지시를 내렸던 사장조차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알고 보니 병은 이 평범한 나무 빗으로 공덕소(공덕을 쌓는 빗)’를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우선 유명한 절의 주지스님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주지스님이 나무 빗 위에 공덕소란 글자를 써서 시주자와 참배객에게 기념품으로 나누어 주라는 내용이었다. 참배객이 향을 올리고 나면 스님들이 직접 이 빗으로 머리를 한 번 빗겨 준 다음, 그 빗을 참배객에게 기념으로 증정하면 되었다. 병은 이렇게 하면 이 절에 참배객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며 우선 외상으로 빗 1천 개를 놓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자기 말이 틀리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을 덧붙였다. 주지스님은 반신반의 하며 그의 말을 따랐다. 그랬더니 과연 단 며칠내에 입소문을 타고 참배객들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주지는 아주 기뻐하면서 병에게 빗 만개를 주문했던 것이다. 

 대부분 기업들은 소비자의 니즈를 찾고 이를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고객의 니즈를 쫒아만 가다보면 결국 금방 경쟁 기업에 따라 잡히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가장 좋은 방법은 틈새시장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틈새시장을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고객의 모호하거나 기존에 생각지 못한 새로운 니즈를 구체화시켜주고 새로운 니즈를 창출해주는 것이다. 결국, 스님에게 빗을 팔 수 있었던 것은 스님에게 새로운 니즈를 창출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고객에게 이러한 니즈가 있으니 사용해보라는 식의 가르침이나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고객의 숨겨진 니즈를 찾아 그것을 고객이 새로운 가치로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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