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한국인? 그렇다. 그래서 검새을 해 보니 배정자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이기를 거부했던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가 한국 서울에서 죽었다. 1952년에 말이다.
일제시기 요화(妖花)로 불렸던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로 숱한 화제를 뿌렸으며 또한 일제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무릅쓰고 정보를 얻어내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실력을 보여 주었던 일제의 밀정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배정자를 일제의 밀정으로서보다는 뛰어난 용모를 지녔던 이토의 양녀로 많이 알고 있다. 또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를 다룬 어떤 소설에서는 배정자가 마치 조선을 위해 일본 밀정으로 위장활동을 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배정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시각의 차원을 넘어서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배정자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일제의 충견이었다.
배정자는 1870년 김해에서 밀양부의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분남(粉男)이었다. 배정자라는 이름은 나중에 이토가 직접 지어준 일본 이름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에서 나온 것이었다.
4세 되던 1873년 배정자는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당시 대원군이 권좌에서 쫏겨난 뒤 불어닥친 숙청 바람에 휩쓸려 대구감영에서 처형되었다. 졸지에 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산산조각이 나자 어머니로서는 살길이 막막했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마음대로 일할 수도 없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눈까지 멀어 버렸다.
이에 어머니는 어린 배정자를 데리고 집을 뛰쳐나와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집을 나와 유랑생활을 한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는 어린 배정자를 양산에 있는 통도사에 맡겨서 키워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가 1882년으로 12세 되던 해이다. 배정자는 이때부터 여승이 되어 절에서 승려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승려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 1년도 넘기지 못하고 그녀는 절에서 뛰쳐나왔다. 절에서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녀는 죄적에 올라 있는 역적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곧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다.
그런데 당시 밀양부사로 있던 정병하(鄭秉夏)는 배정자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여서 그녀를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살기 어려운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여 당시 무역상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던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에게 부탁하여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배정자는 1885년 15세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물 안경수(安경壽)를 알게되었다. 안경수와의 만남은 이후 배정자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생각하면서 새로이 다야마 데이코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주었다.
이토는 배정자에게 수영, 승마, 자전거, 사격술, 변장술을 가르쳐 밀정으로 써먹을 날을 대비했으며, 당시의 동양 정세를 설명하면서 일제가 동양 3국을 지배해야 동양의 평화가 온다는 일제의 침략사상으로 그녀를 철저하게 무장시켰다.
고종의 총애 속에 세도를 부리다
이토에게 세뇌된 배정자는 드디어 1894년 24세의 나이에 밀정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도중 체포되었다. 이 때 그녀는 김옥균이 국내의 어윤중(魚允中), 김홍집(金弘集) 등에게 보내는 편지와 안경수의 밀서를 지니고 있었다. 체포되어 조사 받는 과정에서 김옥균의 편지와 밀서가 발견되자 그녀는 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배정자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3년 말, 밀정으로서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당시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는상황이었다. 민영휘*, 이용익(李容翊) 등 친러파 거두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릴 경우, 러시아가 승리한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군대를 끌어들여 일본과 전쟁을 벌이려고 생각하였고, 이를 구실삼아 고종을 외유라는 이름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 가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배정자에게 블라디보스톡에 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비밀이 일본으로 사전에 새나가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밀정으로서의 진면목을 훌륭하게 발휘한 것이었다.
35세가 될 때까지 혼자 살고 있던 배정자가 재혼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녀는 원래 일본에서 김옥균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전재식(田在植)과 결혼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한때 기생집에 있었을 때 대구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알게 되어 깊은 관계에 빠졌다가, 훗날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자 배정자는 그와 다?만나 결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배정자의 첫 결혼생활은 당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다니던 전재식이 잠깐 귀국했다가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끝장나고 말았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英運)이었다. 현영운은 배정자의 노력으로 박영철*, 박두영(朴斗榮) 등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배정자에 대한 고종의 총애 덕분에 현영운은 결혼한 뒤 눈에 띠는 대우를 받았다.
즉,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육군 참령, 육군 참장, 육군 총장, 삼남 순무사를 거쳐궁내부 대신 서리까지 오른 것이다. 현영운의 남다른 출세는 고종이 일제의 밀정이었던 배정자를 얼마나 아끼고 신임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은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이름은 '형'이었다.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즉위 후 10년간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대신 나랏 일을 돌보았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는 등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개화당이 정권을 잡아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1897년, 나라를 ' 대한 제국 ' , 왕을 황제라 칭하였다
개화정책으로 나라의 문을 열고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군비 축소와 세계 평화를 위하여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두 번의 국제 회의로, 우리 나라의 이준, 이상설 등이 파견됨)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폐위되었다. 1919년에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전하며, 그의 독살설은 3·1운동으로 이어졌다.
밀서사건으로 절영도로 유배가다
러일전쟁이 점차 확대되자 배정자는 일본 군부의 종군 명령을 받고 만주로갔다. 배정자는 만주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하여 여자밀정 배정자 하면 일본군 장교들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다시 친러파가 득세하자 배정자는 이를 막으려는 일본군의명령을 받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고, 서울에서 친러파를 몰아내는 작업에 밀정으로서 봉사하다가, 고종이 이토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아들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오랫만에 배정자를 만난 이토는 너무도 기뻐 그녀를 스루가타이(駿河臺) 하마다(濱田)병원에 입원시켜 피로한 심신을 풀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않아 그녀는 이토로부터 중요 밀서를 받아 귀국하여 고종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이때 이봉래(李鳳來), 강석호(姜錫鎬) 등이 배정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을세웠으나 일본군이 보호하고 있어 성사되지 못하였다.
밀서는 일제가 고종에게 보내는 일종의 권고서로서 일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오만 방자한 문서였다. 밀서를 전달받은 정부에서는 너무 놀라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다짐하였다. 특히 이때 고종과 일본이 가까워지는 것을 염려한 친러파 내각은 일제의 밀정 배정자의 밀서 전달을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고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배정자도 밀서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배정자는1905년 2월, 3년 유배형을 받고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絶影島)로쫓겨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34세였다.
일본에 충성을 다했던 밀정 배정자가 유배되자 일본공사관에서는 서기관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 간카와 이치타로(監川一太郞) 등을 파견하여 위문하였다. 또 일본 정부에서도 이토 등이 대리사절을 보내 위로하였다.
배정자의 유배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1905년 11월 14일 부산에 도착한 이토는 비서관을 보내 배정자의 사면을 정부에 종용하였다. 당시 이토는 일본특파대사 자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오는 길이었다.
이에정부는 할 수 없이 배정자를 석방하였다. 이제 배정자로서는 자신의 양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이토가 서울로 옴으로써 자신의 친일 능력을 발휘할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잡게 된 것이다. 또 일제의 야심이 노골화되던 시기여서 고종에게도 일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배정자는 어느 정도 필요한존재였다.
고종은 배정자를 불러 이토의 방문에 공로가 컸다고 치하하면서 이토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배정자가 이토는 폐하와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고 대답하자, 고종은 이토는 일본의 중신(重臣)이니 응당 자국을 위하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를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대가 이토를 성의껏 모셔 이 나라에 도움을 주도록 하라고 말했다.
배정자에게서 고종의 말을 전해 들은 이토는 네 남편 현영운이 의병대장이되고 엄비나 순비도 요즈음 너를 멀리한다는데, 궁중에서 나의 일을 도울수가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배정자는 궁중의 김영진과 이용복,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이갑(李甲)과 유동열(劉東悅), 그리고 일진회의 이용구*와송병준*이 모두 일제를 위한 좋은 협력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이토를 안심시켰다.
착검한 일본군 병사들이 궁을 에워싸고 있다.
이토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석에 눕다
을사조약에 따라 1906년 3월, 이토가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밀정 배정자는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배정자덕분에 그의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 동생은 경무 감독관으로 승진되기도 하였다. 밀정 배정자가 그야말로 생애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것이었다.
배정자는 이토라는 막강한 보호막을 뒷배경으로 삼아 아무 거리낌없이 밀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그녀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 일제가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을 때, 밀정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배정자는 1909년 6월 이토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빛을 잃기 시작하였다. 막강한 후원자였던 이토와 운명을 같이해 온 배정자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배정자는 당시 조선에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던 청나라와의 국제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 도쿄로 떠나던 날 배정자를 자신의 관저로 부른 이토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
청나라의 앞으로의 움직임은 조선과 일본은 물론 동양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것이며, 또한 위안 스카이(袁世凱)의 부인이 조선인이라 하니 그대가 접근하여 일본과 청의 화목을 이루도록 하라. 나의 이상은 동양 3국을 병합하여 동양평화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배정자는 그러나 이러한 지시를 실천에 옮기기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이토가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마음의 태양같이 믿고 따르던 이토가 죽은 뒤 배정자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생활하다 드디어 병으로 드러누웠다. 이토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고 따랐던 일제 밀정 배정자 다운 자세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배정자는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일본도 시베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 배정자도 일본군을 따라 함께 갔다. 이곳에서 배정자는 포로가 되기도 하고 마적단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죽을 故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도 일본군의 밀정으로 맹활약했다. 이때 배정자는 중국 마적단의 두목과 상당 기간 동거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빼내 일본군에 넘겨주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서 일제의 밀정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 뒤 배정자는 일본 외무부 촉탁으로 자리를 옮겨 펑톈(奉天)영사관에근무하면서 주로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감시하여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그후 국내로 들어와 얼마동안 활동하다가는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임무를 부여받고 만주로 갔다. 일제가 배정자에게 내려준 임무는 만주에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하는 것이엇다.
1920년 봄, 일제 총독부는 최정규(崔晶圭), 이인수(李寅秀) 등을 중심으로 한 옛날의 일진회 잔당들을 끌어모아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무장 첩보단체로서 보민회를 만들었다.
보민회의 후원자는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총독부 경무국장 등이었다. 보민회의 반민족적 성격은 1920년 4월11일 초대 보민회 회장 최정규 등이 독립군 장기정을 잡고 무기와 서류를 빼앗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최정규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뒷날 중추원 참의에 오르기도 했다. 배정자는 밀정이었으므로 제우교 성부인(濟愚敎誠夫人)이라는 직함으로 발기인에 참여했으며, 보민회 고문이 되었다. 배정자는 보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총독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기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호색한(好色漢)이었다. 용모를 가리지 않았고 하룻밤 상대로만 여겼다. 그의 집에는 밤마다 기생이 들끓었다. 당시 대중잡지가 '메이지 왕의 기밀비까지 빼내 기생놀이에 유용했다'고 보도했을 정도다. 이때 그 유명한 일본 밀정 배정자(裵貞子)가 등장한다.
배정자는 17세 때인 1887년 망명 중인 김옥균의 주선에 의해 이토를 만났다. 밀양 아전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역모죄로 아버지가 참수당하자 관기, 비구니로 떠돌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토의 양녀가 돼 4, 5년간 이토의 지극한 보호와 훈육을 받았다.
그녀가 직접 구술한 자서전 '배정자 실기'(實記·1927년)에 나오는 얘기다. "말 타기, 총쏘기, 탐정술, 변장술 등을 배웠다. 이토가 직접 가르치는 사상교육도 있었다." 19세기 말에 스파이 교육을 받았다는 말인데 과장됐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구술 당시 총독부에서 나오는 밀정 월급으로 겨우 먹고살 때여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리라. 아마 오랫동안 이토를 따라다니며 정부 노릇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1899년 일본 주한공사의 통역으로 귀국, 미모와 세련미를 앞세워 황실에 드나들며 밀정 노릇을 했다.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오빠와 남동생을 한성판윤과 경무감독관(서울경찰청장)에 임명하는 등 세도를 부렸다.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자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 그후 수많은 염문을 뿌리며 조선, 중국에서 밀정 노릇을 했고 70세가 넘는 나이에 100명의 꽃다운 처녀를 모집, 종군위안부로 보내는 짓거리도 했다. 1952년 82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죽었다.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195인 명단에 들어있다. '요화 배정자'(1966) '요화 배정자 2'(1973)로 영화화돼 김지미와 윤정희가 각각 그 역을 맡았다.
책도 나왔다.
흑치마 사다코
자신을 구원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랑한 조선 여인 배정자
그녀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시대의 희생자인가?
▶ 줄거리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인 밀양 부사 정병화가 분남을 찾아온다. 그는 분남에게 일본 상인을 따라 일본을 갈 것을 권하고, 분남은 천한 신분으로 조선에서 살기 보다는 보다 자유롭게 살고자 왜인 상인인 마쓰오를 따라 일본으로 떠난다.
편집자의 책 소개 생의 어두운 단면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줘왔던 은미희의 새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인물과 시대의 철저한 고증에 들인 정성, 고전적인 글쓰기, 새로운 소재 탐사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일본의 침략 아래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올곧게 자신의 의지를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며 살다 간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신의 영화만을 위한 삶을 산 배정자 같은 사람이 있었다. 배정자, 그녀는 철저히 자신의 본능대로만 살았던 여자이다. 그녀는 욕망의 노예였고 욕망의 피조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권력 찬탈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를 잃고, 눈이 먼 어머니와 함께 떠돌며 어렵사리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그녀에게 풍요로운 삶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악마의 유혹과 같이 떨쳐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며, 천대 받는 자신의 삶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떼어내고 싶은 진저리나는 허물이었을 것이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아직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배정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돼 생각하고, 그녀가 돼 말하려 했다. 이 인물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허구라는 소설적 장치들을 덧대 새로운 인물로 탄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 쓸 것인가. 작가의 이러한 고민은 이 작품이 얼마나 논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걱정을 알아보기에 충분하다. ∎ 배정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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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자료들을 보다 보니 자료들이 짜깁기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이 글을 남겨놓는 것은 그런 인간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이 별 것 아닌 행위가 조금이라도 그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말이다.
배정자는 자신의 자서전도 냈었다고 하는데 그가 일본에서 이토히로부미 양녀로 들어가
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 자서전에서 나오는 글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그 건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그 녀는 안에서는 애첩,
바깥에서는 양녀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경우로 보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찾다 보니 배정자의 조카딸이 배구자라고 있는데 그 배구자가 근대무용을 개척했다고 뉴스에 나온다.
조선일보다. ㅋㅋ . 난 왜 조선일보가 이런 짓을 하면..쩝. 그냥 웃음이 나온다.
참고. http://blog.chosun.com/article.log.view.screen?blogId=2682&logId=6454913
근대무용의 전설은 최승희씨로 알고 있는데 개척??? 하긴 우리나라 근대사에 친일에서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있을까?
잘먹고 잘살면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였던 이들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김구선생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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