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라인 스케이트를 한 10년된 거 가고, 스키도 한 12년 된거 같고 스케이트는 기억에 없다.

썰매라면 2,3년전에 서울대공원에서 가족이 탔으니 말이다. 흠.

정말 스케이트는 기억에 없네.

이번 푸신방문에서 탔다. 짱이 ㅎㅎ 나와 함께 둘만의 데이트를 하고 싶어했나 보다.

그래서 나선 길.


나서기 전 든든히 점심식사를 한다. 장인,장모,그리고 짱이다.

방에 있는 화분. 가운데 있는 것이 영지버섯이다.

푸신의 시내.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다행이 가기 전까지는 참 추웠는데 내가 간 이후로 날이 풀렸다고 한다. 하늘의 도우심인가. 올때까지 날씨는 푸근했다.

시내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짱이의 지난날을 들어본다. 누군가가 추억을 애기할 때 들어준 다는 것. 아니

내가 추억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가슴 든든한 일이다.

푸신의 전통시장을 둘러보았는데 짱의 말로는 전통시장도 쇠락해가고 대형 쇼핑몰이 강세라고 한다.




한 겨울에 얼어버린 강에 스키장이 있다. 스키화를 빌려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스키를 타 본 기억은 없는데 말이야.

스키화를 신고 달려보니 빙질은 고르지 않고 여기저기 패였지만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추운지 모르겠다. 한 참을 말이다.

ㅎㅎ 스키화가 안 맞아서 아프더라.



짱난꾸러기 짱.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찍은 사진.




또 스키타러 가야지. 짱이하고 말이다. 아니 온 가족이 탈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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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모델,아기모델,유아모델,남아모델,여아모델"


23개월된 남아 리후와 38개월된 여아 리하입니다. 성격이 활발하고 누구에게나 잘 따르는 친민감이

돋보이는 꼬맹이들이죠. ^^  리후의 일상사진입니다. 손가락을 베어서 조금 피가 났는데 겁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뭔가 궁금한 표정이죠.





누나인 리하와 찍은 사진입니다. 아..저 액자속의 사진은 리후입니다. 리후는 표정도 아주 잘 짓습니다.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표정이 아주 맑습니다.







사진을 찍으니 포즈를 취한다고 이렇게 ㅎㅎ





리하도 따라서 포즈를 취한다고 해 보는군요.















1일 4시간 가능하구요. 쇼핑몰광고든 카타로그든 어떠한 모델도 괜찮습니다. 아직 지명도가 없으니

모델료는 저렴하답니다. ㅎㅎ 리후, 리하 1인당 8만원이며 2인 모델시 6만원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댓글로 연락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보너스로 리하가 다치고 난 후 겁먹는 표정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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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

고려말 최후의 충신. 어릴때 성남시에서 살 때 집에는 위인전 전집과 함께 동화전집이 있었다.

그 접집에는 이성계도 있었고 안중근도 있었고 정몽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의아한게

김옥균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게 된 정몽주.

어릴때의 그 때 감상은 알 수가 없지마 개성에 있는 선죽교, 단심가, 그리고 철퇴와 대나무는

기억이 난다. 나에겐 쓰러져가는 나라와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절개있는 충신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이슈가 없었던지, 아니면 고려사가 그다지 수능에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지 몰라도 정몽주의 이야기는 어릴때에 머물러 있엇다. 그러다 발견한 것.


"죽전 포은 휴게소' 정식 명칭인 걸까? 아니면 그냥 이 기념물에만 붙인 이름인걸까.

내가 알고 있는 모습도 그렇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주군을 모셨으면 끝까지 모셔야 남자지 하는 모습 말이다.


이 안에는 내가 보았던 어린이 위인전의 이야기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뒤에 다시 돌아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개혁과 혁명. 쓰러져가는 고려였을까. 혁명이 성공했으니 쓰러져가는 이라고 붙여도 타당하겠지만

난 개혁이 내 스타일이다.

일화로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더 비장하게 그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급관심에 다시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른 이야기도 있다. 뭐 이젠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그래도 한 때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 혹은 정의가 뒤틀리거나 생채기가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는 믿고 싶지 않았고

완강하게 나름 저항을 했는데 이젠 그러려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거 아니겠어? 

이게 나이가 드는건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로 다시 고쳤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다섯 살 아래의 후배였던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초상화, 궁중화가였던 이한철이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에 보관된 초상화를 1880년 모사하였다.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정몽주는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나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친명파로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으나, 마지막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라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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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북아현동. 그 곳에 2004년경이 아닐까한다. 전세 2,000만원에 들어온 이후로 7년가까이 살아온 곳. 산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퇴근후 올라가는 길이 가파랐지만 즐거운 길이었다. 회사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지금은 센트레빌이 서 있지만 당시 재개발이 결정되어서 그 곳에 살던 원주민들의

이주가 오늘 내일 하던 때였지만웬지 모르게 정겨움이 묻어나는 건 아마도 덜 발전된 곳? 아니면 

동네 점포아줌마, 미용실에을 갈 때면 반갑게 맞아주는 그런 소박함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그런데 그 동네에 불이 났다. 토요일이었을까. 퇴근하는 길에 올라가는 골목으로 연신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오고 소방차가 좁은 길을 올라가기 위해 비좁게 주차되어 있는 차들 사이로 느린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주차되었을 그 차들의 주인이 미웠고 소리를 들으면 빨리 나와서 치워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었지만 그저 안타깝게 바라만 볼 뿐이다.

동부아파트 정문에 못 미치는 길이다.

불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부에서 타고 있었고 빠른 진화가 없다면 옆집으로도 붙을 것 같다.

골목은 꽤나 좁다.

소방수들의 거친 움직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바삐 움직인다.

호수를 내리끌고 연기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혀차는 소리가 들리고 웅성웅성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동네사람들이다. 이웃들이다.

사람들이 밀려들어오자 간이 바리케이드를 쳤다.

나는 집쪽으로 올라가이 위해 위 쪽에 있었는데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옛된 여고생 한 명.

그 소년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골목으로 들어서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되었다. 

할머니와 손녀.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그 때의 모습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왔을 고등학교 손녀. 항상 그렇듯이 할머니가 계시고 맞아주었을텐데 

오늘은 알 수가 없다.

그 할머님과 손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냥 아무 일 없듯이 잘 계셨기를 하는 바램이다.


재개발이 되어 그 동네는 이제 없다. 돈의문 센트레빌이 세워진 자리. 그 때 그 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대는 바뀌고 나라도 발전했다지만 사람들은 왜 이리 끊어짐이 많은지 모르겠다. 점점 사람들이 그리워

지는 세상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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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베드,제로니모텐트,에어매트,한국소리터"

 

중국출장을 가기전에 아래층과 캠핑을 가기로 했는데 아래층에서 빠질 수 없는 약속이 생겨 우리 가족만의 시간을 갖게 된 캠핑 아침. 목적지는 한국소래촌.

사실 캠핑을 가보지를 않아 몇 군데 조사를 해 보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지난 번에 갔던

한국소리터로 행선지를 정했다.

인터넷에서 구매한 물통. 이렇게 많이 담아갔는데 사실 다 쓰지도 못했다.

아이스백, 와플베드, 그리고 휴대용 가스렌지가 보인다. 아이가 둘이 있어 그런지 가져갈 것도 많은지

와이프는 이 것 저 것을 챙긴다.

기저귀는 필수이고 아이들 물토이며 손수건, 옷가지까지.

리후는 신났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별 거 아니지만 아빤 그 것을 알려주고 싶단다. 세상은 넓다고 말이야.

소리터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보다 자리가 많더군요. 아마도 오락가락 하던 장마비에 예보까지 비가 온다고 하니 아마 캠핑을 미룬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긴 소리터가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더군요. 계곡이나 천변쪽보다는 부족한 듯 하지만 초보캠퍼에겐 부족함이 없는 듯 합니다.

와플베드와 에어매트리스를 펴서 놓으니 리후가 좋아라 합니다.

제로니모텐트, 와플베드, 그리고 에어매트리스.

 

 

제로니모텐트와 이마트에서 구매한 그늘막 텐트입니다. 제로니모는 7만원대이고 이마트텐트는 3만원대입니다. 그늘막텐트도 날씨만 좋으면 쓸만한데 비가 오면 비가 다 들이닥쳐 문제입니다만 이 날은 비가 오질 않아서 이 곳에서 잤습니다.

제로니모텐트 내부입니다. 전방과 후방이 열려있고 양쪽에 망사가 있어 4면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에어매트리스는 이렇게 이어붙일 수가 있습니다.

정말 더운 날씨입니다. 나무 그늘에 있음에도 바람이 불지 않아 끈적끈적한 땀이 나오더군요.

식사준비를 하는 와이프.

 온 가족이 다 모였다. 이런 날은 처음이다. 바깥으로 나와서 이렇게 식사를 한 것은 말이다. 우...

뭐 이렇게 뻑뻑해. 이런 기회를 종종 가져야 하지 않겠어?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이쁜 짓. ㅎㅎ

소리터 옆에는 이렇게 놀이터가 있어 아이들과 함께 가기에 좋다. 리후와 리하도 정신없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새벽 2시까지 대화소리가 끊임이 없던 이 곳.

호텔앞은 가로등이 켜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시간이 아쉬운 듯.

여보. 잘 자 ^^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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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오락가락해지는 날이다. 월요일이라 그런가. 몸이 찌뿌드한 건지 기운이 없다. 먹어도 그러네.

쩝. ㅎㅎ 오늘은 유달리 컨딘션 난조다. 어제 먹은 장어가 효과를 발휘하기엔 역부족인지.

그래도 먹었으니 이 정도지 하는 마음이다. 인터넷에서 구매한 민물장어. 대짜 3마리에 6만9천원이다.

아이스박스에 담겨온 민물장어를 와이프와 함께 먹으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모든 부부는 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요즘 작은 불만들이 생긴다. 마냥 참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 우린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해왔고 요즘도 변함은 없는데 말이다.

간혹 자신을 반성해 보지만 그래도 아쉽거나 섭섭한 것들은 어쩔 수가 없다. 서로가 이해를 하지 못하면

평행선을 걷는 것과도 같은데 말이다. 


아이들에게 당연한 관심을 갖는 와이프와 조금은 섭섭한 나의 모습. 글 쓰고 보니 이런 모습에선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두 사람의 갈등문제를 풀어가지 않으면 한없이 커지고 한 없이

깊어질텐데... 대화하기도 쉽지가 않다는 생각. 휴.. 복잡하다. 소강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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