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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의 입

또가고싶다 2008. 10. 19. 13:22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댓가를 치르고 있는 거다

 

 

                    [ 괴벨스의 말 ]

 

아마도 우리는 역사상 유래 없는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이름을 남길 것이다.

혹은 가장 악랄한 범죄자이거나.

  - 요제프 괴벨스 , 나치 선전 부 장관 -

 

'당신은 누굴 사랑하나?'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가?

 

'99가지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나에게 한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괴벨스의 일생 ]

 

언론이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파악하고 그를 이용했던 이가 바로 나치 선전부 장관으로 군림했던

요제프 괴벨스 박사였다.

 

요제프 괴벨스는 상당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집에 셋째 아들로 태어나 네 살 때 골수염을 앓아 그는 평생 그로 인해

신체 불구자라는 딱지를 안고 살아야 했고 콤플렉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있어 장애가 되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괴벨스는

문학·연극·언론계에서 거의 무보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그러했듯이 패전으로 말미암아

더욱 뜨거워진 민족주의의 열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학시절 한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눈뜨게 된 그는 나중에 상류계급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계속 반(反)부르주아적 태도를 지켜나갔다.

 

괴벨스는 처음에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존경한 스승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당시 그는 반(半)유대계 소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괴벨스가 이때쯤 정계에

입문했더라도 그의 정치행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나치스에 입당하게

된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었다.

1924년 가을 괴벨스는 국가사회주의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천부적으로 달변이었던

그는 이내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의 엘버펠트 지구 사무장이자

격주로 발행되는 국가사회주의 잡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괴벨스는 내면의 신념과는

반대로 히틀러를 지지했다.

 

괴벨스의 영향력은 1937~38년에 약화되었다. 1931년 중상류층 여성과

결혼하여 이미 6명의 자녀를 두고 있던 그는 이 기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일과 가정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그의 처지는 제2차 세계대전(괴벨스는 이 전쟁을 달가워하지 않았음)이

일어났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승리하고 있을 때는 선전책임자가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여

전세가 역전되면서 괴벨스는 절정기를 맞게 된다. 비로소 그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보일 수 있었다.

 

1944년 7월 20일 감행된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은 히틀러가 괴벨스를 자기

곁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8월 25일 괴벨스는 '총력전을 위한 제3제국

전권위원'이 되었으나 그가 곧 탄식했듯이 모든 것이 너무 늦게 왔다.

1945년 5월 1일 괴벨스는 베를린의 포위된 벙커 안에서 초창기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심복으로 히틀러를 보좌하고 있었다. 이 재능있는 나치의

무대감독은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함으로써 가장

소름끼치는 잔혹극의 연출을 마쳤다. 전날 그는 히틀러의 뜻에 따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단 하루 동안, 불과 몇 평방미터의 공간 속에서 그는 그렇게

마지막 후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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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벨스의 언론이용 ]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당의 행사 및

시위의식을 제정하고 정력적인 연설을 행함으로써 독일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괴벨스는 국가선전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국민계몽선전부'가 그를 위해 만들어졌고 신설된 제3제국의 '문화원' 원장도

겸임했다. 괴벨스는 문화원 원장으로서 선전은 물론 언론·연극·영화·문학·음악·

미술계까지 손을 뻗쳤다. 그러나 국외선전·출판·연극·문학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통제권만을 행사했는데, 그 이유는 관할권을 놓고 심한 마찰을 빚은 까닭이었다.

 

괴벨스는 교조주의보다는 효율성을, 원칙보다는 편의를 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괴벨스는 곧 언론을 통제하고 이용해서 대중들의 인기를 사로잡는 비법을

무기로 이용했다.

불과 몇 년 전에 발명되었던 라디오를 전국민들에게 싼 가격으로 보급하게

한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독일인들은 찢어지고 갈라지는 듯한 히틀러의 목소리를 이젠 라디오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독일 각지 어디에서고 전당 모임이 있거나 연설이 있을

경우 라디오 중계차량이 그 뒤를 따라 전국 방송을 하게 했다.

우울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괴벨스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밝고 유쾌한 음악들을 흘러보내도록 했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아늑하게 만든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최신 유행곡들이 악단에 의해 연주되어 라디오 방송을

타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히틀러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가 무섭게

선전상은 즉각 그것을 잠재울 만한 효과적인 방법도 연출했다.

즉 히틀러의 살아있는 목소리로 국민들에게 격려 연설을 끊임없이 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도부 쪽에서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두려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세뇌시킨 것이 주효했던 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국민들의 대부분은

히틀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 방편으로 괴벨스는 역사적인 예를 들고 여러 사례들을 비교했으며, 소위

불변의 역사법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최후수단으로 어떤 종류의

비밀병기들을 언급하기까지 했다. 괴벨스의 활동은 특히 후방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바야흐로 총력전의 주창자가 되었다.

히틀러는 때때로 괴벨스가 만약 옆에 없었더라면 나치 정권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언론장악]

                            당신의무의식을 파고든다

 

그의 정치성공의 기반은 ‘방송장악’에 있다. 그는 방송을 정치에 이용한

이탈리아 최초의 정치인으로 거론된다.

 

새로운 뉴스보도 방식을 이용한다. 이른바 ‘샌드위치 뉴스’ 정치적 공방이

큰 사안에 대해 ‘정부-야당-여당’ 순으로 입장을 듣는 것이다.

야당의 입장도 방영되기에 얼핏 공정한 보도일 듯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청자들은 ‘마지막 입장’을 옳게 느끼기 마련이다.

시청자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공정히 보도되지만 늘상 정부가 일방적으로 승리할 뿐이다. 정부 권력에게

‘사유화’된 방송으로 전락한 것이다.

 

사람들은 방송의 신뢰도를 믿는다. 그것이 바로 영상매체의 힘이다.

내 눈으로 보면서 내 귀로 들었다. 방송에서 저렇게 대통령의 쾌활한

미소와 함께 적극적인 칭찬을 이어가고 있는데, 설마 대통령이 국정을

잘못 이끌겠느냐는 생각을 할 것이다. 설마, 방송이 저렇게 칭찬하고 있는데

내 삶을 파괴할 정책에 대해 방송이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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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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