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해뜸다.



뭐 사는게 다 그렇더라구요. 에휴.. 여기 중고딩도 많은데.. 지기로서.. 알아서 들어라~~~요. ^ㅛ^;;
여하튼간데 LG 한 20년전쯤에... 당시 pcs라고 나왔지요. 200만원정도 하던 핸드폰이 헉~~~!!!
10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참 사람들 많이 샀더랬습니다. 네ㅣ.. ㅎㅎ 저도 그 중에 하나.
가장 저렴한 것이 LG였지요. 당시 배용준이를 앞세워서
"사랑해요 LG "
이건 광고계에서도 거의 레전드급이죠.
당시 붐업 절정기이던 휴대폰, 거기에 최대 악셀을 밟던 배용준.
절묘한 하모니, 환상의 커플, 다시 볼 수 없는 듀엣공연이었으니 흠..ㅎㅎ
뭔 소리 하냐. 여하튼!



그때부터 저렴한 맛으로 이어진 LG폰이 지금까지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G2.
액정 4번 갈았씁니다. 금만 가면 액정이 먹지를 않습니다.
한 번 갈때마다 평균 14먄원 들더군요. 흠.. 얼마냐. 56만원이군요.

한 달전 쯤에 조금 사용하다 보면 뜨거워져서 센터 가니 보드 나갔다고 28만원.
그냥 나왔습니다. 액정간 돈만 해도 S6엣지로 갈아탈텐데... 뭐 꼭 그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
LG! 
저 LG AS 예찬론자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중요한 제품은 대기업 사라. AS가 다르다. 뭐 이런~~
그런데 이번에 보드를 안 갈았더니 AS기사..훗! 대우가 다르더군요.
뭐랄까. 하기 싫음 말고. 헐...할할할.
그러니까 이런 것 같습니다. AS를 받고 나면 해피콜이 옵니다. 
그래서 만족,불만족 점수를 매기는데 AS를 받으면 마치 간이라도 빼 줄 것 같이 대하는데 
안 받으면 아무 기록은 남기지 않으니 이건 뭐 남대문 시장만도 못한 고객이 되는 겁니다. 
아니 고객이 아닌 것이죠. LG제품 구매했으면 LG의 고객이어야 할텐데
LG AS센타의 고객은 아닌 것이죠. 알고 보니 액정 사설업체에선 7만원이면 가는데
2배나 받으니 확실히 남는 장사죠.



하하 이 걸 알았습니다.
예찬 아니 극찬을 마다 않던 LG의 AS수준이 이 거 였구나. 민낮을 생생하게 보았다나 할까요?

이제 앞으로 LG제품 쓸 일 없습니다.
대우를 쓰면 썼지 LG는 ㅎㅎ 글쎄 술이나 먹으면 모를까, 맨 정신엔 절대 없다.
가지고 있는 주식이나 상황봐서 팔아야 겠다.

이거 왜 이래~~
나 LG주식 갖고 있는 사람이야~~

따가지 없는 넘들.

그렇게 하면 안되지.
20년 넘게  LG 먹여살려온 고객인데..훗!
가이사꾸들.
미워미워.~~~ 빠이~~~ 영 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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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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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드나들게 되면서 통장의 필요성이 느껴지게 되더군요. 중국과의 무역거래에 있어서

샘플이나 소량을 구매하게 될 경우 현금거래를 하게 되는데 돈을 항상 들고 다니기도 불편한 뿐 더러

분실의 위험도 있으니 말이죠. 사실 중국에서 몇 번이나 지갑,가방등을 분실했는지 모릅니다.

여권까지 분실한 적이 있으니 참 중국에서 분실, 아니 해외에서 분실이란 분실은 다 해 본듯 합니다.


중국에서 통장개설시 외국인도 개설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일부은행, 혹은 일부지점에서는 중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제가 처음 중국은행에서 만들때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현재 주소지와 핸드폰 번호등이 필요하며 핸드폰번호나 주소지는 이후 분실등이 경우

증명할 수 있는 자료이니 꼭 기록이나 사진을 찍어두시기 바랍니다.


현금카드도 만듭니다. 중국거래처에서는 현금카드도 받는 곳들이 있습니다. 돈이 필요없이

바로 이 카드로 결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인터넷뱅킹도 함께 신청을 합니다. 인터넷 뱅킹을 하는 요령이 적혀있는 이런 것을 주는군요.


이번에 새로 하나 만들었는데 이유는 카드를 분실해서 카드 신고하고 재발급받는 기간이 15일정도가

걸려서 아예 하나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입출급시 전화통지해 주는 서비스는 국내처럼 비용을

받는데 2위안을 받습니다.한 달에 2위안이니 꼭 신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국은행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민박집에서 가까웠고 중국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서 중국에서 가장 많은

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는데 실제는 공상은행이 제일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상은행이나 교통은행을 추천합니다. 그런데 공상은행에서 하나를 만들려고 했는데 런민난루에 있는

지점에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일하고 있다는 증명서를 필요로 하더군요. 그런데 화창루의 지점에서는

그냥 만들수도 있더군요. 이렇듯 아직까지는 틈새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카드도 아니고 통장을

만드는데 왜 직장이 필요한지 의문이긴 하군요.


중국에서 지내다보면 국내와는 다른 환경에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외국이려니 하고 이해 합니다.

마음이 넓어지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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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현재진행형.

민중들은 일제치하에서 나라잃은 설움으로 신음하고 있을때 그 압잡이로 호위호식하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아전인수격 변명으로 일관하며 반성할 줄 모르는 이 시대
일제주구들에게 바친다. 자가당착적 합리화로 일관하지 말고 진정으로 이 땅과 민중들에
반성하며 남은 여생을 바쳐야 하지 않겠느냐.


]한 주를 여는 생각

간도 특설대 
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

‘간도 특설대’의 항일 독립군 토벌 실상을 밝힌다

얼마 전 국군 첫 4성 장군에다 한국전쟁 때 평양에 가장 먼저 들어간 백선엽씨를 육군 명예원수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요란했다. 그 발목을 잡은 건 그가 간도 특설대 장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간도 특설대가 뭐길래?

언론인 김효순의 <간도 특설대>는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든다.

간도 특설대가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토벌·소탕’하던 일제의 특수부대가 아니냐는 질문에 특설대 출신자들은 흔히 “독립군은 구경도 하지 못했고, 토벌 대상은 ‘공비’나 ‘팔로군’이었을 뿐”이라고 얘기한단다. 이는 자가당착이다. 일제와 당시 친일신문 등이 ‘공비’, ‘비적’(도둑떼)으로 폄훼했던 이들이 바로 항일독립군이었다. 지은이는 중국에서 공인한 연변(옌볜) ‘항일 열사’ 3125명 가운데 조선인 비율이 98%나 됐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간도 특설대>는 특설대 장교와 만주군 연길(옌지)의 헌병분단 중위였던 백선엽씨의 창씨명이 백천의칙(白川義則)이었다는 사실도 당시의 일본인 연길 헌병분단장의 회고록을 인용해 밝히고 있다. 통상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읽히는 이 이름은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숨진, 관동군사령관 및 육군대신을 역임하고 ‘상하이 사변’ 당시 파견군 사령관이던 바로 그 일본 육군대장 이름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간도 특설대 초기의 지휘부. 1930년대 초반 중국공산당 만주 전체 당원 중 거의 절반이 조선인이었고, 동만주 지구당원의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 특설대 창설은 이런 상황을 바꾸려는 일제 공작의 연장이었다. 서해문집 제공

항일 무장군 토벌한 손으로 대한민국 요직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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