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의 기억

번디는 학창시절과도 같은 공장근로자 시절이 있었다. 10대때다. 20대때도 있었다.

그래서 국민연금을 이미 10대에 넣고 있었던거다.

당시 구로구 온수동에 영등포기계공업단지가 있었다. 지금은 온수산업단지

신도림역 남부대일학원 옆엔 한국타이어가 있었다.

구로구 온수동, 오류동은 다로드의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다.

다로드의 기억에 존재하는 모든 지역명이 아릅다운 기억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기억은 없다.

애증조차도 아닌 살리고 싶고 색깔을 채우고 싶은 그런 기억들이며 도시, 지역들.

어디에 존재해 있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나름 노력했고 그 노력이 빛이 바래는 것을 원치 않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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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안 변했다.

그 때 공장에서 일하며 아주 우연하게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뭐 지금처럼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시기도 아닌

그 저 남들보다 이른 삶의 현장에 매일 매일 출근했었던 시기다.

공장에서 머시닝센터로 금속을 깎아내다 보면 깍인 금속을 수집해가는 폐철업체가 있었다.

나보다 물론 연장자 분이신데 그 분이 담배를 한 대 건내는 것이 아닌가. 흠... 어린 마음에 어려보이고 싶지 않아

담배를 빨았는게 그 한 순간의 몸 짓이 30년을 넘게 갈 줄은 몰랐다. ㅎㅎ 뭐 그렇다고 그 이후에도 이 때를

원망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누구나 담배피던 계기가 있었을테고 그런 것들중에 하나일 뿐이며

선택의 주체는 나였다는 거지.

 

담배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서먹서먹했던 또래들과 담배 하나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한 다는 것은

중요한 일상중의 하나다. 그 나이 또래에 있어 공장에는 나 말고는 전부 경상도친구, 동생들이 있었고

나만 전라도였으니 말이다. 뭐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지역감정이 있었겠나. 그저 치기어린 주도권?

뭐 그런 것들이었을게다. 하지만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것은 그 어린 나이에도 인력이 있는 중요한 고리다.

그나마 담배라도 함께 피었으니 이런 저런 대화를 함께 나눌 수 있었던게다.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 구로공업단지의 원진정밀이다.

 

어린나이에 퍽퍽한 삶의 현장에서 그나마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는짧으나마 합법?적인

휴식의 시간이 흡연시간이었다. 참 다시 돌아봐도 묘하다.

그 이후로 노가다를 뛸 때도, 군대를 다닐때도, 직장을 다닐 때도, 그리고 내가 사업을 할 때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흡연 시간을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인 약속같은 것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더라. 더구나 담배값이 지금처럼 급격하게 오르기 전인

몇 년전까지만 해도 어디에서나 담배 하나 쉽게 얻어 필 수 있을 정도로

담배인심도 후했다.

 

담배를 피우기에는 참 좋은 환경이었다.

그 때는 담배자판기도 있었다. 88이 600원이었던가?

 

 

생애 첫 금연은 군대에서다

 

그게 어느덧 30여년을 넘어섰다.

담배를 끊어보려는 시도야 뭐 한 두 번 해 보았겠나.

매 해 정초마다 하던 것은 차치하고, 결혼하고 난 이후, 첫 째 아이를 난 이후,

그리도 둘 때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인생의 큰 기쁜, 변곡점을 기회로 삼았으나 물거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버렸다.

 

처음 금연을 시도햇던 것이 군시절이었는데 작심삼일이었을까?

3일째 늦은 밤에 걸린 집합으로 인해 담배를 다시 피게 되었는데 뭐 핑계였겠지.

여튼 처음의 그 계획이 틀어지고 나니 이후 금연의 시도조차 무기력해지기까지 했었다.

금연에 대한 욕구는 스모커라면 다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혼자 끊는 것은 쉽지가 않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 것은 그 사람들이 대단한 것이다.

번디는 구청에 금연클리닉에도 참여를 해 보았으나 이틀을 못 넘어가더라. 금연패치를 붙이고 생각이 날 때마다

금연껌을 씹어서 흡연욕구는 크게 없는데 습관. 그 습관을 못 벗어나는 것이다. 밥을 먹고 난 이후,

커피를 마실 때, 아침에 일어나서, 잠 자기 전에 으례 진행했었던 흡연이 빠지게 되니 하루의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시공간이 비는가. 하루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 한 그런 허전함들 말이다.

 

금연이 당위라면 방법론을 고민해 보자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다. 금연의 동인이 될 수가 있는 강력한 방법을 찾아보자.

기억에 남는 볓 번의 검험을 돌아 보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음대로 담배를 피고 싶을 때 필 수 있는  환경을 배제해야 한다.

담배를 필 수 있는 환경이 적어야 한다. 스스로 흡연욕을 제어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야 성공가능성이 크다.

그 때가 나에겐 군대있을 때였고 마지막에 성공한 병원에서였다.

물론 이런 환경은 금연캠프등을 통할 수도 있다. 이번의 입원이 아니었다면 4박5일간의 금연캠프도

올 해 계획이 있었으니 말이다.

 

금연두드림

금연두드림 국가금연지원센터, 금연정보 및 금연지원서비스 제공

nosmk.khealth.or.kr

일반적인 흡연자의 경우 입소나 입원이 쉽지 않다. 그럴 경우는 각 구청에 있는 보건소의 금연클리닉을

이용해 보자. 번디도 이 곳을 이용했지만 성고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는 편이다.

만약 이 곳에서 안 될 경우에 입소나 입원을 해서 흡연권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7월 11일 일요일부터 담배를 끊기 시작했다. 금연의 동인은 사실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병원에 2박 3일간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난 그 상황을 이용해서 금연을 하고자 마음 먹었던 것이고

그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물론 병원에 있다고 해서 흡연이 불가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흡연하고 싶을 때 흡연을 하기에 까다로워야 하고 조건이나 제어가 평소보다 제약이 클 때

성공가능성이 높다. 담배를 끊겠다는 각오에 더 큰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환경에서 담배를 끊기 보다는 제약과 조건이 만들어졌다면 그 것을 이용해야 한다.

2박3일간의 입원기간이었지만 담배를 피려면 병원바깥을 나와야 했고 5분이상의 거리를 링게르를 들고

가야 했었다. 더구나 건물을 들고 나갈때 코로나 체크까지 해야 했으니 담배 한 번 핀다는게 쉬웠겠나.

더구나 부비동 염증치료로 인하여 통증이 심해서 담배생각이 떠 오를 틈이 없었다.

그렇게 2박3일을 담배를 참고 퇴원을 하고 나니 3일간의 금연이 아까워서 담배를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작심삼일을 넘기고 보자. 그렇게 7월이 지나고 8월의 막바지에 와 있는 것이다.

 

눈치를 안 봐서 좋다

집에서든, 바깥에서든 난 당당하게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담배냄새 난다고 하거나
바깥에서 담배를 필 때도
타인의 시선이 신경쓰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눈치를 보지 않는다.
아이들도 아빠가 담배를 끊은 것에 대해서 너무 좋아한다. 아이들과 더 친해졌다.

하루 5천원가량이 모이니 한 달이면 15만원정도의 돈이 절약, save되는 거다. 
이게 은근히 기분이 좋다. 

2달도 안 되었는데 가래가 없어진 것 같다. 

담배 한 개비에 피는 시간 5분, 20개비는 100분이다.
1시간 40분간 무엇을 해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매일 무엇인가에 투자를 한다면 말이다.
무엇인가를 만들어 보자.

지금도 담배생각이 날 때가 있지만 지금까지 금연을 해 왔기에 흡연에 익숙해져 있던 하루 하루를
금연에 맞추어 리빌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 더 멋진 삶을 만들 수가 있다.

한 달 15만원의 금액과 하루 1시간 40분의 시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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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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