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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술을 너무 과히 먹었던 탓일까? 싸구려 포도주였지만 알콜 도수는 충분이 사람들을 만족하리 취기에 오르게 할 정도였다. 12도, 4리터에 약 12불정도. 참고로 호주는 포도주로도 유명하다. 관광코스 중에는 호주 포도생산 주산지견학이 있으며 포도를 직접 따는 체험이 포함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포도따는 것도 돈이 되는 가보지만 난 포도를 딴 경험은 없다. 하지만 포도를 따면 돈도 벌고 그런 관광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워터 멜론, 쯔뀌니, 에그 토마토 등 그 외도 많은 과일들을 따 봤다. 장장 4개월가까이를 농장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그 첫 시작이었던 번다버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우연한 소리에 무조건 택한 결과였다. 다이녹스라는 시내에 DYNOX서점이 있는 빌딩에서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무작정 가 보았다. 사람들에게 "아 이머 스트레인저 히얼, 아임 루깅 훠~ "를 들이밀며 길을 묻고 잘 듣지 못해 같은 길을 수 없이 물어보고 DYNOX 서점에 들어갔다. 그 곳 윗층에 있는 투어 에이전시에서 버스 티켓을 구하기 위한 내 영어의 몸부림. 흐~,"아이 워너,아임 고잉 투 고투 번다버그. 번다버그. 아이 워너 바이 더 티켓" 귀를 쫑긋이 하고 그 녀의 질문에 대답을 했고 날짜는 앞으로 5일 뒤 아침. 23일 티켓이었다. 오늘이 18일. 그레이 하운드와 맥패커씨의 장거리 노선버스중 맥패커씨가 몇 불이 더 싸서 그 걸 택했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맥패커씨가 그레이 하운드에 비해 싸다. 그리고 한 달전에 표를 끊으면 50%가 싸진다. 그리고 철마다 세일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에 표를 사면 또 50%가 싸다. 그러니 장거리 여행자는 이 버스티켓 정보를 잘 구하기 바란다. 그 건 몇 백불을 버는 거다. 요소 요소에 티켓 에이전시가 있고 그 곳에서는 투어뿐 아니라 버스,기차표등을 예약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정보를 구할 수 있다. 그렇게 버스 티켓을 구하고 다시 털레 털레 두리로 돌아오면서 본 킹스크로스 입구의 코카콜라 입간판. 코카 콜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 그냥 생각뿐이다. 콜라 한 잔에 1불이 넘는 상황에서 콜라를 먹는 다는 건 나에겐 사치!. 내가 콜라를 마시게 된 건 호주 입국 7개월째에 케언즈에서 마시게 된 것이 처음이다. 이제 모든 건 번다버그다.


이제 시드니를 즐겨보자. 10개월뒤쯤에나 호주 생활에 익숙해지면 다시 돌아오리라던 시드니를 즐겨보기로 했다. 하버 브리지를 건넜고 혼자 버스를 타고 물어 물어 어느 해변에서 담배 몇 개비를 폼나게 피기도 했고 서쿨러 키 록스라는 곳에도 가 보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근사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거나 한국에 와서도 그 곳에서의 풍경을 근사하게 떠 벌리거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없었다는 등의 시덥잖은 소리는 하지도 않았다. 그 날 저녁 나는 내 각오를 놀러 온 지영이에게 애기 했다. 정말 기쁜 듯이 말이다. 그 앞날은 어떻게 될 지모르지만 당장의 목표가 정해졌다는 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영이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취직했다고 한다. 뜨~악! 머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 그 녀는 어딜 가든지 잘 해낼 아가씨였다. 어학실력에서 비롯된 건지는 몰라도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참 이 애기를 들려주면 알 수 있으리라.

아마 이 때쯤이었을 거다. 한국에서 한 아가씨가 왔다. 여대생이었는데 나 만큼 준비성이 없다는 생각! 아니 어쩜 너무 많은 준비를 해 왔다일까? 밥통을 들고 왔다면 믿겠는가? 그리고 그 녀는 옷가방이 정말 큰 가방. 내 베낭 두개의 용량은 될 법한 가방에 하나. 그리고 내 베낭만한데에 옷이 하나였다. 그런데 보여야 할 영어책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녀가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나는 외국인과 부딪쳤고 그 녀는 피했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호주로 왔고 두리하우스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녀의 말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정말 한심스러움이었다. 그런데 지영은 부딪치면 된다며 3일간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식당이란 식당. 그리고 일거리가 있을 만한 곳을 같이 다니며 일을 주선해 주었다. 훗날 번다버그에서 그 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어느 한국인 가정의 베이비 시터로 들어갔다가 3개월뒤 귀국했다고 한다. 결국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만큼 가져간 것이었다. 그 날 저녁 새로 들어온 한국인 몇 명 그리고 마나미와 킹스크로스의 한 나이트에 놀러갔다. 일단 목표가 생기고 나니 마음껏 놀 수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 지 모를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었고 특히 마나미는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무대도 양이 안 차는 지 무대 위의 또 다른 작은 무대로 올라가 춤을 춰대는 그녀를 보고 우리들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정말 대단하군이란 생각을 하며 그 날만큼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나또한 한 막춤 하는지라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마나미가 올라오라고 할때는 스테이지 위의 좁은 공간으로 한국남자는 할땐 한다는 걸 보여준다는 치기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흔들어댔다. 그 날 옷갈아 입고 온다던 지영이 들어왔는데 후우~청바지만 입던 그녀가 짧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고 주위의 외국인들은 휘파람을 불어재꼈다. 그 녀도 처음이었던 나이트라 그랬는지 이쁘게 보이고 싶었는 지 화장을 했고 짧은 하얀 미니스커트를 입고 왔다. 그 모습을 보며 여자가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난 공연히 기분이 좋았고-어쨌든 그 날은 누구하고 싸움 붙어도 차라리 몇 대맞고 돈 벌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으니깐 (쿠~)-. 아마 내가 술에 취했나보다. 어쨌든 그 날은 너무 기분이 캡빵이었다. 조마조마 하게 보냈던 4일간을 보상받는 기분. 아니 악착같이 보상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날은 몇 시간동안을 흔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밤은 특별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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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참고로 제가 가지고 간 것을 대략 말씀드리지요.
인터넷을 해 볼 양으로 노트북(486임)-두고 두고 후회하다
결국 한국으로 보냄- 과 베낭에 옷가지들 (겨울 옷까지 챙겨와서
이 것또한 보냄-호주에는 재활용이 생활화 되어 있어
우리나라 보다 훨 싼값에 옷을 마련 할 수 있답니다
)이 있었고
호주 관련책자는 자신만만 세계여행',
영어 공부는 영영사전(longman), 한영사전과 영한사전(프라임), interchange 네 권 tape 6개 (권당 두 개씩이나 마지막 권은
못 가져감-cambidge 출판), 맨투맨 기본 상,하권
(제 영어실력이 어느정도였는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죠)과
소형 카세트(AIWA)가 호주에서 보낸 10개월 내내
나의 충실한 영어 지도교사였고 동반자였습니다.
참! 왜 10개월만 보내고 왔냐고 묻는 분이 계시길래
이 기회에 말씀드리지요. 귀국하기 약 4개월 전부터
Cairns 국제 공항내의 면세점인 Down town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귀국 하기 보름전에 한국에 난리가 났다고 동료들이
걱정을 하는투로 말이 많더라구요. 신문에서도 난리가 아니고
TV에서는 뉴스시간마다 한국의 경제 환란에 대해 말이 많구요.
그래서 2개월을 더 채워서 남들에게도 말하기 좋게 1년을
딱 채울까 했지만 사실 한국이 그립기도 했고 (전 그랬답니다.
다른 제 주위 친구들도 그러더군요. 누가 호주오면 귀국할 때
귀국하기 싫다고 그랬냐고) 어짜피 갈 바에야 일찍 적응한다는
심정으로 왔지요. 그 만큼 호주에서는 한국의 사태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였지요. 호주가 한국에 적극적으로
융자 지원해준 거 기억하실 지 모르겠내요.
한국은 호주에서 두 번째 큰 교역국이었으니까요.
첫 번째는 일본이구요. 뒤에 적겠지만 호주는 일본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어느 세월에 10개월의 생활을 더듬을까 싶군요.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한도에서 답변을 할테니
급한 분은 게시판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분이 답변을 해 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출국이 확정된 분은 저에게 메일을 보내 주시면
제가 개인적으로 매일을 보내던 채팅을 하던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드리지요. 그리고 영어에 너무 겁먹지 마세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전 정말 영어엔 깜깜 무식이었답니다. 맨투맨 기본을 가져갈
정도로 말이죠. 물론 지금도 못하지만 외국인 앞에서 주눅이
안 드는 정도랄까요. 내가 말 못하면 지가 답답하지 내가
답답하냐는 여유랄 까요. 참! 그 실력에도 제가 면세점에서
한 일은 일본인을 상대로 일어로 양주나 초콜렛,담배 팔다가
호주인이 일본인을 상대하기 거북할 때(영어문제로) 제가
통역해 주는 일이었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일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면세점에서 아쉬운 대로 쓰는 극히 한정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는데 여러분은 못 할거
있겠습니까? 그럼 다시 그 때로 돌아갑니다

번다버그라고?
그 들중 나이든 사람은 썬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제프였다(주로 애칭을 부르는 게 편하다).
그리피스에서 포도를 타며 돈을 벌고 포도 철이 끝나자 위로
올라와서 시드니에서 몇 일을 보낸다음에 이제 도마토 철이
돌아오는 번다버그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들말로는 과일따기를
잘 만하면 한 달에 천 불은 쉽게 모을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돈이 당시 1100불 정도
(당시 환율은 1불에 800원이 채 안 되었음).
"그래 한 달에 1000불이면 가자. 지금 이 것저 것 가릴
게재가 아니다. 나도 가자. 번다버그. 그 날 내 일기장엔
번다버그가 또박또박 적혀졌고 멜버른에서 올라온 유학생과 나,
지영, 마나미는 그 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킹스크로스를
걷다가 장난끼 많은 썬은 나와 지영을 잠깐 따라와 보라고
해 놓고는 어덜트 샵으로 밀어놓고 나갔다. 으헉!
이상망측하면서도 신기한^.^, 마치 손가락으로 얼굴 가리고
그 틈으로 보고싶은 심리였지만 지영은 의외로 담담하게 보다가
같이 나왔다.(다음에 꼭 혼자 와서 보리라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 체 시드니를 떠나야 했다 쩝!) 우리는 퍼브에 가서
맥주를 마셨고 당구장에서 포켓볼을 쳤다. 이 나라는
사구라는 게 없다. 전부 포켓볼이다. 취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라면으로 때운 몸에다가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 지
그 날밤 꿈을 꾸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꼬대를 했는데,
그 잠꼬대가 영어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자면서도
내가 잠꼬대를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졌고
그 것이 영어였다는 것도 알았을 정도니,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음을 짐작할 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들을 보는 이를 생각하면
좀 더 멋지게 포장하고 싶기도 하고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이 글을 쓰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홈페이지가 나의 한 시대를
말할 수 있으리라는 뜻에서 일기를 써가는 의미도 있기에
기억이 자신하는 한은 사실대로 쓰고 싶다.

다음 날 지영이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 주었고 점심식사 후에
워킹 홀리데이에 협회에다시 한 번 가보자는 약속과
함께 난 두리 하우스로 돌아왔다. 마나미가 어딜 가려는 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또 그 놈의 하이를 하고 물러서려는데
마나미가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지영이는 이사를 잘 했냐고
물었고 나는 떠듬거리며 문법을 떠 올리며 단어를 꽤 맞추고
있었지만 마나미는 상당한 그 긴 시간?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내 답답함에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인터체인지를 펴고
"웨어 러유 프롬" 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면 해야 하는 것들을 외우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점심식사를 하고(항상 saving라면), 자신만만을 펴고
호주에 대해서 머리에 구겨넣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어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 얼마 뒤 지영이가 노크를 했고 그 뒤에는
멜버른 유학생이 있었다. 오다가 만났나 보다.
지영이와 내가 워킹 홀리데이 협회를 간다는 말에
그는 자기가 안내해 주겠다고 했고 나는 길을 모르고
지영은 워킹 홀리데이 협회 위치를 모르는 지라 우리는
그를 따라 전철을 처음으로 타고 시드니 시내에 나갔다.
두 세정거장 거리. "아! 거금 2달라. 드럽게 비싸군.
킹스크로스에서는 1달러면 피자가 세조각인데,
피자 6조각짜리 전철이라..." 어쨌든 그는 우리를 협회까지
안내했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다시 찾아간
워킹 홀리데이 협회. 하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정말 nothing이였다. 한국에서도 협회에서 권유하는 학원과
홈쉐어등을 등록을 안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의 서비스가
불만족 스러웠지만 행여나 공연한 불만을 말하면
시드니 가서 도움받을 때 피곤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오는 길에 지영이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며
직접 일자리를 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쥐길 놈들을 연발하며 협회를 성토했고
번다버그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 날 밤 찾아온 썬과 제프와 함께 포도주를 사서 예의
그 일당들과 자주 찾아오는 한국사람들(그러고 보니
다 남자다)은 자리를 함께 했고 그 곳에서 '영'이 우프
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 후 그는 번다버그에서
다시 만난다). 한국에서 뿐이 아니라
이 곳에서도 우프를 더 저렴한 값에 손쉽게 가입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에게 자신이 우프 갖다와서 잘 애기
해 줄테니 꼭 건강하게 잘 있으라는 우량아 몸집의
인상좋은 사람이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중에는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3개월을 그냥 보낸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그 날 시드니 생활의 비애를 들을 수 있었고
나는 번다버그라는 이름을 각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그 들중 몇 몇 이 마나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일본여자는 쉽다?는
생각! 물론 나도 그들의 성문화에 대해서는 들어봤기에
그 녀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마나미는 내가 호주에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첫 외국인이었고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계속된 일본인과의 만남은
내가 갖고 있던 일본관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런 변화는 이 홈페이지에서도 알 수 있으리라.
몇 몇 한국인들이 그토록 두리하우스에 드나드는 이유중 하나가
마나미였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그 때까지 마나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형편조차 못되었었다. 사실 나도
두리하우스에서 인기가 좋았던 마나미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눈치로 보아 몇 몇 한국인들의 모습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았고 또 내 문장 짜맞추는 그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대화의 불편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드니에서의 3일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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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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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최대의 환락가인 킹스크로스 입구에 서 있는 코라콜라 입간판.
아...저 코크 한잔을 호주에서 8개월만에 마셨다.

번다버그를 떠나면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함께. 지금 어디에 있을까. 너무 아쉽다.

당시 케언즈까지 가면서 이용하였던 티켓. 나라가 커서인지 이런 종류의 티켓이 많다.

번다버그 시내. 참...아름다운 곳이다. 외국이라서 그런가? ㅋ

오픈워터 라이센스를 따고 기념으로!

에어리비치에 있는 상어기념관. 뭐 그다지 볼 것은 없지만,

아그네스워터 주변의 누드비치. 쩝. 정말 아무도 없어서 누드로 다녀도 될 듯 하다라는 의미에서의 누드비치?

캐나다에 있던 마나미가 보내준 사진. 어디있는 거니?

에어리비치의 어느 백패커스

1주일 우핑을 했던 독일인 가정.

보웬. 벽이란 벽에는 이렇게 벽화가 모두~

케언즈 공항 면세점에서 일하면서!


참 시간이 찰라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자세한 경험담은 http://someday.dreamwiz.com 한 때는 유명했던 곳이랍니다. ^^;
헉...홈페이지 서비스 종료. 아~~ 도대체 몇 번째인지 원.
서비스 종료하면 또 옮겨야 하는거야? 참. 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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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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