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고빠지기 시장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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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짱시장도 있지요?

트렌드는 사회적인 열풍처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내기도 하며 기존 시장을 업그레이드 하기도 합니다.

본인 판단에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런 트렌드를 빨리 따라갈 수 있는

쇼핑몰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짜피 트렌드는 항상 변해가니 말이죠.

요즘 또 정리형 인간이 뜬다고 하는데 말이죠.

이런 시장을 생각하면 단순히 가볍게 볼 일만은 아닌 거 같내요.

트랜드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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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까지! ^^

혹 누구 보시고 만드시면 한턱 쏘세요. 쇠주에 삼겹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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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폭행으로 공무집행방해죄라는 무시무시한 죄로 벌금형 100만원이 나왔으나 유치장에 하루 있었다고 4만원 깎아서 96만원 오늘아니 어제까지 입금하란다 안 하면 수배내려서 지구끝까지 쪼차간다는 무시무시한 엄포와 함게...
열받은 꾸미! 정식재판 청구하고 왔다.
경관가슴 한 대, 정강이 세 대를 찼다고 횟수까지 적혀있다는 것이다. 대질심문때 그 경관의 황당한 애기를 듣고 내 구둣발에 정강이를 세 대나 차였다면 상처나 흔적이 남았을 터이니 내가 가지고 있는 디지탈 카메라로 찍자고 말을 했으나 불응했던 경관의 진술만이 넘어갔다. 악몽의 지난 여름밤 애기가 다시 들려온다.
다른 행인과의 시비끝에 파출소에서 경찰서까지 넘어갔으나 서로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서 해결했는데 경관의 업악적인 행위에 반항아닌 반항을 했다. 그리고 그런 억압적인 행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항의 방법으로 디지탈 카메라를 빼어들었다.
이 것이 화근인지도 모르겠다. 가뜩이나 관료체제에서 인터넷으로 인하여 그 간의
무사안일?주의가 많이 손상을 받았는데 말이다. 그들만의 세상이 인터넷으로 인해서 드러나고 비난 받고 그랬던 그들에겐 미운오리새끼 일 지도 모를 인터넷.

괘씸죄였을까? 그냥 조용히 벌금내고 얌전히 술이나 퍼먹을까도 생각을 했지만...
검찰청같은 곳은 가기 싫지만 공권력이 이렇게 쓰여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나와 같은
사람이 검찰이나 경찰이라는 신분만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검찰청 갔다가 전에 모시던 사장님과 약속이 있어 대화를 나누던 중에
이 애길 했더니 사장님 왈!

"넌 100% 진다. 국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너가 무죄판결이 나면 공권력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것이며 그 것은 판례로 남을 것이다. 너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올 것이냐.  일반인끼리의 문제라면 모르겠지만 100%질 것이다"

으~~ 듣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 가슴아프다. 왜 그런거지?
공권력은 절대선인가?
검찰청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곳에서 담당자의 무성의한 태도와 불친절은 나의 안좋은 상황으로 그렇게 느껴졌을까? 검찰청이나 경찰서, 또는 가까운 동사무소 같은 곳도 민원인의 입장에선 부탁?하는 처지로 간다. 담당자의 영향에 따라 어쩌면 본인의 요청?요구?사항이 잘 처리되고 안 되고 할 수 있는곳. 담당자의 한 마디가 민원인에겐 큰 도움이 되는 곳. 그리 불친절한 기억만 남아있는 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언젠가 박찬종씨가 서울시장선거에 나서면서 "행정은 서비스다"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이들에게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건 그렇지 못했던 행정서비스의 모습을 반증하는 게 아니었을까.

비록 내가 가고 싶지 않고 익숙치 않은 곳이지만 정식재판을 받고 판결을 받아야 겠다. 내가 지더라도 혹시라도 내 주위에 그리고 내가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다면 이 것이 경험이 되어 보다 당당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것에, 그리고 익숙치 않은 것이라고 해서, 또는 좋은게 좋은거라고 그냥 넘어간다면 변화가 있을까. 그래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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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성 수행 능력을 아내가 평가한다면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의 나이가 40, 50대라면 60점만 받아도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우선 성생활의 활동성을 보여 주는 성행위 빈도에서 우리나라 남성이 세계 평균의 절반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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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킨제이 보고서로 일컫는 한국성과학연구소(소장 이윤수 비뇨기과 원장)가 2002년 국내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자. 40, 50대 남성의 성행위는 평균 주 1회. 세계 평균인 연간 97회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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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위의 질은 어떨까. 발기가 전혀 안 되거나, 너무 약해 행위가 불가능한 중증이 40대는 5.5%, 50대는 17%, 60대에선 28%에 이른다. 또 성관계 도중 발기력 저하로 중도하차하는 경증도 각각 19%, 26%, 36%에 달했다. 40대와 50대 집단을 더하면 30∼40%의 남성이 D 또는 F학점 수준으로 아내에게서 낙제점을 받을 위치다. 왜 이렇게 한국 남성이 약한 모습을 보일까. 이윤수 원장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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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인병 증가다. 비만 인구가 급증하면서 당뇨·고혈압·심장병 같은 혈관성 질환이 크게 늘어 발기부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발기와 이들 질환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특히 모세혈관을 망가뜨리는 당뇨의 경우 대표적인 합병증이 발기부전이다. 이 원장은 “당뇨는 관리하지 않으면 10∼15년 이내 발기력에 이상이 온다”며 “인구의 10%가 당뇨병 환자인 당뇨대란 시대는 곧 발기대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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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 정보의 범람이다. ‘주범’은 인터넷이다. 성 정보에 쉽게 접근하는 지금의 구조는 빠른 속도로 기존 성문화를 무너뜨린다. 성은 의약품과 마찬가지다. 자주 노출되면 내성이 생기고,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의존증이 된다. 특히 스와핑, 그룹 섹스 등 과거에는 생각지 못했던 성 행태의 변화가 성에 대한 신비감을 권태감으로 바꾼다. 서울아산병원 비뇨기과 안태영 교수는 “어릴 때부터 포르노나 음란한 성문화에 노출된 청소년의 경우 웬만한 자극도 싱거워질 수 있다”며 “성인이 돼 섹스리스 또는 발기부전 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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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약물의 오·남용이다. 바야흐로 ‘해피 드러그’ 시대. 현재 발기부전 치료제 시장을 겨냥한 국내외 신약들이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연 600억원 매출액의 대부분이 40대 이후 남성에게서 발생하는 만큼 시장의 타깃도 이들이다. 문제는 이런 약물을 과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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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유발제를 멋대로 사용하다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도 있다. 고려대 안암병원 비뇨기과 김제종 교수는 “정상적인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되풀이해 약을 사용하다 보면 나중에 약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갖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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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침실에서 아내의 핀잔을 받은 김모(45) 부장. 과로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석연치 않아 비뇨기과를 찾았다. 하지만 의사는 김 부장에게 종합검진을 권했다. 진단 결과는 당뇨병. 3대 증상인 다음·다뇨·다식 증상이 없는 그에게는 의외의 결과였다. 성인병이 급증함에 따라 최근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흐름도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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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종 교수는 “과거에는 고혈압·동맥경화·심장질환 등 성인병 환자를 내과에서 먼저 보고 비뇨기과로 보냈다. 하지만 요즘엔 거꾸로 발기부전 환자에게서 성인병이 발견돼 내과 치료를 권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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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병의 최초 경고 사인이 발기부전이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논문도 많다. 엘리릴리가 190만 명의 미국인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수긍이 간다. 발기부전 환자 중 고혈압이 있는 환자 비율은 41%에 이른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의 고혈압 환자는 19%에 불과했다. 혈관과 발기부전의 상관관계를 보여 주는 연구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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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둘레가 성능력의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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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경은 조금 과장해 표현하면 혈액 주머니다. 음경해면체라는 모세혈관에 혈액이 충만해지는 현상이 곧 발기인 것이다. 따라서 혈관이 막히면 발기도 이뤄지지 않는다. 당뇨·고혈압·심장질환은 모두 혈관이 딱딱해지거나 막혀 나타나는 질환이다. 발기부전은 곧 다른 혈관들도 건강하지 않다는 신호인 것이다. 이들 성인병의 가장 큰 적은 고지방식·운동부족에 의한 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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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비만이 어떻게 당뇨가 되고, 다시 발기부전으로 이어지는 걸까. 비만은 쓰고 남은 열량이 피하뿐 아니라 간·내장 등 구석구석에 쌓인 것을 말한다. 더 이상 축적될 곳이 없는 당은 혈관 내를 떠돌게 마련이다. 이는 인슐린 생산공장인 췌장의 과로를 의미한다. 자동차 엔진에 과부하가 걸리면 매연이 나듯 불량 인슐린이 쏟아져 나온다. 이른바 내당능장애라는 당뇨 전 단계로 돌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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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세브란스 내분비내과 임승길 교수는 “인슐린이 세포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면 체내에는 걸쭉한 혈액이 남아 떠돌고 이런 혈액이 콜레스테롤·중성지방과 어울려 모세혈관에 끼이면서 동맥경화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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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복부 비만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인간영양센터가 남성 2만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허리둘레 34∼35인치, 36∼37인치, 38∼39인치 그룹은 허리둘레가 가장 짧은 29∼33인치 그룹에 비해 당뇨병 발생 위험이 각각 2, 3, 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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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의 성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나이가 들면서 체내에서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드는 것이다. 여성 폐경기처럼 급격한 변화는 아니지만 남성들도 갱년기 장애를 겪기 때문이다. 남성호르몬은 뇌하수체와 고환의 합작품. 따라서 노화와 함께 분비가 줄고, 뇌하수체나 고환 질환도 분비에 영향을 미친다. 흡연·음주·지방식·복부 비만도 테스토스테론 저하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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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호르몬이 줄면 나타나는 현상이 남성다움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아내 의존증이 높아지고, 소심해지는 것은 이 호르몬 부족 때문이다. 신체 증상도 다양하다. 기억력·집중력이 떨어지고, 근력과 지구력이 저하되면서 피로를 호소하고, 성욕 저하·발기력 감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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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남성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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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도 성욕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가뜩이나 바람 앞에 촛불 신세인 중년의 성에 찬바람을 불어넣는 격이다. 중앙대의대병원 비뇨기과 김세철 교수는 “스트레스와 불안·우울증은 성욕을 촉발하는 남성호르몬 저하의 원인이 되고, 결국 발기력 감퇴로 이어진다”며 “사오정이 되지 않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사는 남성에게 조로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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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성능력을 높이는 데 비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학적인 치료를 제외하고 성기능을 높이는 데 왕도는 없다. 손가락 하나만 튼튼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성기능도 신체적인 건강이 담보돼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매사 계획적인 삶을 살아야 하듯 강한 남성이 되려는 노력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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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들이면서 효과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처방이 운동이다. 김세철 교수는 “하루 30분씩 속보만 해도 발기부전 발병률을 65%나 줄일 수 있다”며 “비만 감소 효과와 함께 혈관이 탄력을 받기 때문에 혈액순환이 원활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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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섭생도 중요하다. 비만을 줄이기 위해 운동과 병행해야 할 행동요법이 식습관 교정이다. 고지방식을 피하고 전통식으로 돌아오라는 것. 특히 도정하지 않은 곡물, 콩 같은 식물성 단백질, 다양한 색깔의 채소나 과일을 매일 먹어야 한다. 이들 식품은 호르몬 분비와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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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성생활도 필요하다. 섹스는 무관심할수록 퇴보하게 마련이다. 한국성과학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3개월 동안 성관계가 한번도 없는 섹스리스 부부가 3%나 된다. 남성의 위축된 성을 풀어 주는 해법의 일부는 아내가 가지고 있다. 활기 있는 성생활에 아내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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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남성 심볼의 천적이다. 혈관을 부식시키기도 하지만 혈관 확장물질 분비를 억제하는 대신 수축하는 물질을 분비하도록 촉진한다. 성생활을 위해서라면 담배부터 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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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적극적인 치료를 받으려는 자세다. 현대 의학은 부부의 정서적인 면뿐 아니라 다양한 검사를 통해 발기부전의 원인을 밝혀 개인에게 맞는 치료를 선사한다. 특히 최근에는 비아그라·레비트라 등 각종 발기부전 치료제가 앞다퉈 출시되는 등 신기술이 발달하고 있다. 이들 약품의 경우 의사 처방에 따라 사용하면 성기능 장애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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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수 비뇨기과 원장은 “대규모 조사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성능력과 성의식은 변강쇠와 옹녀를 지향하면서도 부부가 따로 노는 잘못된 성의식을 드러낸다”며 “남성 갱년기는 부부가 함께 노력할 때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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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능 장애 어떤 것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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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요인이 가장 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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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욕 장애 성욕 감퇴는 발기부전과 달리 이성에 대한 욕구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실제 성행위는 물론 성적 공상도 없다. 부부 간의 미움과 갈등이 원인일 수 있으며 과거의 심한 성적 공포감, 우울증, 장기간 적절한 이성을 만나지 못할 때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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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적 흥분 장애 발기부전이 여기에 속한다. 성적인 욕구가 있어 시도는 하지만 흥분이 되지 않아 발기력이 약하고, 잘 유지되지 않는다. 성인 남성의 10~20%가 경험한다. 청년의 9%가 성적 흥분 장애를 호소하며, 나이가 들면서 늘어나 80대가 되면 75%가 여기에 해당한다. 당뇨, 약물 남용, 비뇨기 질환, 남성호르몬 부족이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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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정감 장애 사정 지연으로도 불린다. 적절한 성적 흥분 상태에 도달해도 사정이 안 되거나 지연되는 것을 말한다. 성반응 주기 중 흥분기나 고조기에는 잘 도달하는데 절정기에 진입하지 못한다. 대부분 심리적 원인으로 부부 간의 갈등, 상대방에 대한 매력 상실, 성적 행위에 대한 파트너의 과도한 주문, 억제된 성심리, 불안 등이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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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루증 조루증도 역시 절정기 장애다. 다만 사정 조절능력이 없어 질 삽입 전이나 직후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정되는 현상이 반복된다. 현대 성의학에서는 성행위 시 1~2분 이내에 사정이 되든, 혹은 배우자가 절정감에 도달하기 전에 사정이 되든 상관없이 사정반사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병적 요소로 본다. 감각신경의 과도한 분포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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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존을 강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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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부에서 무릎 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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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존(Power Zone)은 복부에서 무릎 위에 이르는 인체 부위를 말한다. 배꼽 아래 단전과 엉덩이·허벅지 근육이 집약돼 있다. 남성을 단련하는데 파워존을 강조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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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부위엔 가장 길고 굵은 근육이 모여 있다. 근육은 에너지를 태우는 공장이다. 근육의 볼륨이 클수록 기초대사량이 높아져 비만이 해소된다. 음경혈관의 구조물이 건강해져 발기력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둘째, 성기 중심의 근육이 강해진다. 음경 괄약근은 물론 회음부·골반 근육이 모두 튼튼해진다. 음경 자체는 근육이 없지만 이를 지지해 주는 주춧돌을 유지함으로써 발기력을 키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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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남성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진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과 근육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성호르몬은 몸에서 단백질을 합성해 근육을 만들고, 또 근육량이 많아지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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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존을 강하게 하는 운동으로는 자전거 타기(30분 이내), 스쿼트(역기를 어깨에 메고 쪼그려 앉았다 일어남), 런지(양손에 덤벨을 들고 한발을 앞으로 길게 뻗어 굽혔다 일어나는 것을 반복), 레그컬(엎드려서 발목 뒤쪽에 고정식 역기를 걸고 발을 뒤로 젖히는 운동), 레그 레이즈(누워서 다리를 위로 들어올리는 운동) 등이 있다. 모두 성기를 중심으로 위로는 복근, 아래로는 허벅지(대퇴 이두·사두근), 엉덩이 근육(둔근) 등을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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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능 장애 어떻게 치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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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부전 치료제, 호르몬 요법 등 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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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활하지 못한 성기능은 중년 남성이 가장 좌절하는 증상 중 하나다. 호주 모나시대학 의대는 성기능이 약화되지 않는 예방법으로 채식, 운동, 성인병 예방, 호르몬 검사, 스트레스 조절, 충분한 수면 등 여섯 가지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습관 개선만으로 불충분한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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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 이상 남성의 절반가량이 발기부전이란 사실을 감안할 때 발기부전 치료제의 등장은 의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필연적인 일이었다. 현재 2세대 신제품 레비트라(바이엘)가 출시되면서 비아그라(화이자), 시알리스(릴리)와 함께 ‘삼국전쟁’이 시작됐다. 복용 후 10분 이내 발기된다는 레비트라, 36시간 지속형인 시알리스에 의해 촉발된 ‘발기 시작과 지속 시간’에 대한 비교우위 논쟁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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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어떤 발기부전 치료제가 가장 좋을까? 비뇨기과 의사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발기부전 치료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담배를 선택하듯 나이, 약물의 장단점, 본인의 질병을 분석한 뒤 고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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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에게 의사들은 약을 먹은 뒤 효과가 언제부터 나타나는지, 일단 발기되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발기됐을 때 얼마나 단단해지는지 등을 물어본다. 8년 전 출시된 비아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의 선두주자다. 그러나 복용한 지 한 시간이 지나야 발기돼 빠른 약효를 바라는 남성들로서는 불만이었다. 레비트라는 약을 먹은 후 10~15분 만에 효과가 나타나며, 발기됐을 때 단단해지는 정도가 높다고 바이엘 측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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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 간의 임상효과는 비슷하나 약제를 선호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비아그라는 ‘발기가 잘된다’, 레비트라는 ‘강직도가 좋다’가 가장 많다. 시알리스는 ‘약효가 오래간다’는 게 강점으로 꼽혔다. 따라서 성관계에서 단단함(강직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비아그라보다 레비트라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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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부전 환자의 경우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다른 병을 함께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뇨와 고혈압 등 혈관 관련 질환이 생기면 대부분 발기부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중년 남성에게 흔한 당뇨병은 성기능 장애와 직결돼 있다. 이처럼 당뇨병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레비트라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6월 미국당뇨병학회 조사에서는 당뇨병 환자 중 발기부전이 있는 환자에게 레비트라가 가장 좋다는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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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부전 치료제 외에 남성호르몬을 보충할 경우 성기능 장애가 개선되기도 한다. 남성 갱년기 증상은 근력 저하, 복부 비만, 골밀도 감소, 성욕 감퇴 및 발기력 저하, 안면 홍조, 신경질, 우울감 등 육체적·성적·정신적 변화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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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호르몬 투여로 남성호르몬 수치가 정상으로 교정되면 성욕이 회복되고 활력을 찾게 되며 수면 양상 개선, 공포감이나 슬픔의 감소, 성기능 저하의 부분적인 개선 등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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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봄비뇨기과 원장·urogy59@empal.com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는다. 그 것을 비하하곤 했다.

그런데 그 것이 섹스라는 행위를 위한 것만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다. 정신력을 뒷받침해 주기위해서 말이다.

가끔 날을 샐 수도 있어야 하고 밤새 술을 마실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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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랫만에 독서 삼매경에 빠져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해박한 경제지식과 그의 삶을 관통하는 열정에
탄복하면서 지금의 내가 얼마나 나약해 진건지 생각해 보았다.
사실 누군가는 절망이라고 부르는 것도 누구에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며
약진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어짜피 하나뿐인 인생.
나에게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것.
그 것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또는 잃고 있는 것들.
프로로 산다는 것. 난 아마추어였나 보다.
작은 것들에 힘들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것에 얽매여 큰 것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날개를 접고 있지 않는가.
남들이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 할 수 있었던 이가 바로 이 사람 아니었을까.
프로란 무엇일까.
나의 가치로 재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프로인가?
그렇다면 가치를 높여야 더 큰 재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경제적인 가치뿐 아니라 자기역량의 발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를
향해 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 할 수 있는
삶이란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그는 프로다.
자기자신을 제어할 줄 안다. 그 것이 극기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닌
이미 체화되어 있어 우러나오는 경지의 내공이다.
냉철한 판단력과 동물적인 관찰력은 그가 오랜 세월동안 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 하나 일구어낸 산물이다.
세상에 가치없는 행위는 없다.
단지 그 행위를 그 행위 이상으로 발전시켜가려는 열정이 없는 것 일뿐이다.
한 순간 끓어오르는 에너지는 열정이 아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사그라지지 않는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것은 평생을 지고 간다.

단지 지금 어떤 상황, 조건, 위기, 기회, 위치 그런 것들은 내가 이용해 갈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변치 않으면 된다.
변하지 않는 이상이 있으면 된다 그 것은 너의 열정을 위대한 승리로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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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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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현실적이 되어간다는 것은 돈에 대해서 민감해진다는 것이 아닐까?
이상과 현실이 어떻고, 각박한 현실... 뭐 이런 것들 전부가 돈에서 기인하는 것들일게다.
돈을 쫒아 다니는 사람이 있고 돈이 따라오는 사람이 있다. 옆에서 지켜보면 보이는데
그 입장이 되어 보면 돈을 쫒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도 된다. 그런다고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작년 이 맘때 시작한 주식. 아직까지 마이너스이다. 주식서적도
몇 권 사보고 가치분석이며 차트투자며 여러권을 봤지만 결국 귓동냥으로 따라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년이 조금 지났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묘한 법칙? 또는 우연의
일치일지 모를 나만의 원칙이 하나 생겼다. 즉, 돈 좀 벌어야 겠다고 까페며 지식인이며
증권사 추천주며 따라다니며 심사숙고해서 구매한 주식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아주 우연히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주식. 그런 것들이
플러스 수익을 주었다. 때론 아주 크게도 말이다. 그런 것들에서 번 것을 심사숙고해서
잃는다. HTS를 꺼놓고 볼일이다.

스페코 비트컴퓨터 모빌링크 액티패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당장 시작하라. 그리고 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제1회 샌프란시스코 국제 도서전을 추진할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는 관람료를 얼마나 받아야 전시장 사용료와 기타 부대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걸려서 첫 번째 모임에서 부터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실력이 쟁쟁한 사람들이 뛰어난 아이디어와 엄청난 열성을 갖고 함께 일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자금계획 문제만 나오면 그 순간부터 한숨만 나올 뿐 꼼짝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짜고짜 “앞으로 돈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신경쓰지 마소!” 하고 말해버렸다.
결국 행사 전이나 기간 중이나 할 것 없이 돈이 문제가 된 경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경비를 지불하고도 돈이 남았다.

샐리 라스베리가 자유학교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자문을 해준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지적한 것은, 첫 회의에서부터 참석자들이, 교사 채용에는 얼마의 비용이 들고, 학교 건물을 짓는 데에 또 얼마의 비용이 든다는 등 돈 문제를 논하게 되면 그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운을 다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일단 ‘시작해 놓고 보라’는 것이고, 그러면 돈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돈 걱정을 피하는 방법은, 따로 한 사람 또는 한 팀을 정하여 돈 문제에 전념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힘까지 흩어지는 일을 방지하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하고 실제로 우리 내부에서 정열이 용솟음치고 있다면,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의 무한대의 방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모든 지출은 기록을 해야 하고, 영수증을 받는 경우에는 이를 보관 해야 한다. 어느 정도 상세하게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하한선을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아주 가난하다면, 50센트가 넘는 지출은 모두 기록해야 한다. 만일 두 달쯤 지났을 때 기록 유지에 혼선이 생겨 계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기록하기가 어렵게 된다면, 기록을 멈추고 거슬러 올라가서 앞뒤가 정확하게 맞을 때까지 차근차근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돈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즉 지금 갖고 있는 돈은 얼마나 되고, 쓰는 돈은 얼마나 되며, 들어오는 돈은 얼마나 되는가 하는 돈의 흐름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을 대강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돈을 쓰는 데 대한 적절한 제동장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돈이란 다분히 마음의 상태이다. 환상 그 자체, 순전히 꿈인 것이다.
돈을 현실이라 보고 잡을 수 있는 것이라 좇는 사람들, 다시 말해 수십만 달러를 벌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방향을 그것에 맞추고, 그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어떠한 것도 감수한다. 그들 자신이 목적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목적은 꿈 (신기루)이기 때문에 도중에 그들은 처음 출발한 때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돈을 상대적인 가격 체계의 일부라는 측면으로 생각한다면, 환상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 모든 물건의 가격은 그 물건의 수요와 희소성에 비례하여 결정된다.

돈이란 전 세계적으로 그 물건에 가해지는 수요와 공급의 압력을 기록하는 의사소통이다. 실체하는 것이 아닌, 환상인 것이다.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돈을 찾아 나선 사람들은, 현실을 망각 하고 우왕좌왕하게 되어 주변과 충돌을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 환상의 일부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의 절친한 친구 중 멜리사는 일급 화가였으며, 화랑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명석하고 따뜻한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지인들과의 사교 모임에서 언제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화랑사업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이 판매와 영업의 귀재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사업은 계속 번창했으며, 근사한 화랑을 운영 하는 데 필요한 돈만 벌면 만족하겠다던 그녀의 소박한 희망은 사업을 더 크게 키워보겠다는 열정으로 변했다.

사업은 커졌고, 그녀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그녀 곁에서는 어떤 편안함을 느낄 수가 없다.
그녀에게서 친구들은 떨어져 나갔으며, 그녀의 관심은 편협해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고독한 사람이 되었으며, 직원들에게 강압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범죄의 약 90%는 돈 때문에 일어나며,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의 약 80%도 돈과 관련된 범죄 때문에 징역을 살고 있다.
요컨대 돈은 사람들이 감옥살이를 하는 극히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어쩌면 사람마다 돈에 대한 열망과는 달리 돈을 버는 능력에는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죄를 짓기까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경우가 흔하다.
내가 보기에는 은행이나 식품점에서 돈을 훔치다가 잡히는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어떻게 은행이나 식품점을 털려고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편, 많은 돈을 물려받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도 돈은 악몽이다. 내가 아는 이 중에 젊고 매력적인 데비라는 이가 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그것이 그를 불행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데비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해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생의 의미 내지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그 많은 돈을 상속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좋은 학교를 다니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나, 보람 있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자기에게 돈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용하려 들 것이라는 공포 속에 늘 전전긍긍하고 있다.

돈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우리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돈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주변 세계간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관계는 장부를 기록하는 일에서부터, 우리가 돈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돈을 다루는 행동에 반영된다.
또한 가능하면 유머감각을 갖고,돈이 꿈이며 전적으로 환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돈을 인생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일을 위한 동기부여 요인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고통으로 끝나게 된다.
 
 


나는 돈을 정적이기도 하고 동적이기도 한 흐름으로 파악하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동적인 측면에서 돈은 어떤 관계를 표시한다. 그 관계는 차입자와 대출자의 관계일 수도 있고, 판매자와 구입자의 관계일 수도 있으며 또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시간을 두고 관찰해 보면, 마치 전선을 통해 전기가 흐르듯이 돈은 일정한 경로를 통해 흐른다.
양쪽이 연결된 전선 때문에 관계는 한정되고, 그 사이의 흐름은 의미있는 관찰 대상이 된다.

포인트 재단의 이사로 있을 때, 수십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했다.
내가 지원한 보조금이 좋게 쓰인 경우도 있고 나쁘게 쓰인 경우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나쁘게 쓰인 경우는, 이성적으로 들어맞기는 하지만 왠지 감정적으로 끌리지는 않은 사람이나 사업에게 자금을 제공한 경우였다.

이런 경우는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정해져 있는, 즉 자금이 상환 되지 않는,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설령 상환이 된다고 하더라도 감정적인 만족도 아울러 충족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내가 성사시킨 최선의 보조금 지원사업 중 하나는 경제우선순위 협의회의 앨리스 테퍼 마를린에게 나간 보조금이었다. 앨리스의 훌륭한 자질, 그리고 그녀와의 긴밀한 유대관계 덕분에 다수의 우량 사업이 우리와의 협력 위에 실현되었다.
이처럼 유능한 개인과의 관계를 기초로 제공되는 보조금은 효과가 크고 강렬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다. 앨리스는 보조금의 만기가 지난 후까지도, 제공된 보조금을 아직 다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돈은 차입 또는 대출되거나 투자된다. 이러한 개념이 배제된 채로 돈을 주고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돈을 주는 행위 내지 주기로 한 행위는 어떤 [관계]의 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일시적인 불균형이다. 돈을 준다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반대급부가 따른다. 반대급부가 따르지 않는다면, 돈의 악몽적인 요소가 침투하게 되는 것이다.

재단들은 훌륭한 제안서를 작성하여 자금을 신청하는 이들이,막상 자금을 받고 나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 임을 알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부담 없이 돈을 신청하는 까닭은, 돈과 함께 부과되는 것, 즉 그에 상응하는 책임에 대한 이해가 자신들에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오랜 기간에 걸쳐 각양각색의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기금 제안서를 받아 보았다. 나는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제안서를 작성하고 보조금을 받는 과정에서 다분히 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

얼마 전에 넓은 토지를 구입하려는 한 단체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당신들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고 후원자로군요. 가서 후원자들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분들에게 헌금을 요청해보세요. 하지만 당신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아니라 바로 후원자라는 것을”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소액의 헌금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액의 헌금이 바로 후원의 약속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단체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만일 그 단체가 처음부터 기부를 받았다면 십중팔구 전 장래를 망쳐 버렸을 것이다.
단체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후원자와 친구들인가, 아니면 2~3년만 지나면 고갈되는 기부금인가?
 
 


돈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우리가 잠을 자며 꿈을 꾸고 있을 때가 돈이 없는 세상이 아닌가. 이 우주에는 전혀 딴 세상이 있을 수 도 있으며, 돈이 없어도 되는, 지금과는 개념이 다른 삶의 형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마지막 법칙, 제 7법칙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일 모두가 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기 어렵게 만든다.

가령 포로수용소를 생각해보자. 포로들로부터 돈을 몰수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곧 담배가 돈이 된다. 사람들이 깨어 있어 상호 교류하는 한, 돈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7법칙은 돈이 없는 세계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세계는 미술과 시, 음악, 무용, 성(性)의 세계로 인간 삶의 본질이 구현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제 7법칙은 우리를 인도하는 별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별은 물리적으로 우리 삶의 일부가 될 수 없지만, 방향을 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우리는 그 별에 도달할 수도, 도달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를 인도하는 그 별 없이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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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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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

휴가있는삶 2008. 5. 16. 15:41

청도 김씨 (淸道金氏)  청도김씨 홈으로 이동


 1> 시조 :  김지대[金之岱]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청도(淸道)는 경북 남쪽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이서소국의 땅이었으나
     고려초에
오악현, 형산현(荊山縣), 소산현(蘇山縣) 3개현을 합하여 청도군(淸道郡)이 되었다.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8세 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과 원종때의 명신으로 비서소감, 지공거, 추밀원부사를 거쳐 첨서추밀원사에
     승진하였다. 1258년 몽고군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다스린 공훈으로 오산(청도)군에 봉해졌다.
     원종이 즉위한 후  이부상서를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도를 관향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세계를 이어왔다.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지대의 아들 선장(善莊)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증손 한귀(漢貴)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최영과 함께 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때 형조와 호조판서를 역임한 점(漸 :한귀의손자)과 세조때 단종복위를
     도모한
차산(次山)이 유명했으며, 난상(鸞祥)은 을사사화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조때 직제학을 거쳐 대사성에 올랐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때 임란공신에  책록된 몽룡(夢龍)과 희방(希邦)이 이름났고,
     순조때 성리학자로 유명한
응하(應夏)는 문하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한말에 와서 청도김씨를 빛낸  인물인 정호(正浩)는 정밀한 지도 작성에 뜻을 두고 36여년간
     전국을 돌며
[청구도(靑丘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여 우리나라 문화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청도김씨(淸道金氏)는 남한에 총 15,596가구,
     64,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영주시 가흥동

경남 밀양군 청도읍 두곡리, 인산리

     경북 달성군 옥포면 교항동

경남 거창군 마리면 일원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동



자신의 본관과 유래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www.burimhong.pe.kr/name1/000korean%20name.htm

 

청도에는 소싸움도 있는데 ^^ 언제 보러 가야쥐. 언제가지?


KBS 역사 스페셜

  김정호의 꿈,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방송일: 2003208                                                      동영상 :

방송(동영상)을 시청하시기 위해서는 KBS 홈페이지(http://www.kbs.co.kr)에서 회원가입(무료)을 하시면 됩니다.

■ 방송일시 : 2003년 2월 8일 (토) 20:00-21:00 KBS 1TV

■ 담당 P D : 박현민 [781-3557] / 작가 : 정윤정

■ 더빙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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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140여년전. 국토의 깊고 얕은 곳까지 속속들이 알고자 했던 한 사내의 꿈!
그것은 한 장의 지도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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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는 모두 10여본.
그 중에서도 성신여대 소장본이 보물 850호로 지정돼 있다.
상태가 가장 양호할 뿐 아니라,
지도 일부에 색을 칠한 것이 조화를 이뤄서,
예술적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철종 12년인 1861년.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우리가 흔히 봐오던
한 장짜리 지도들과는 달리 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의 종이를 옆으로 길게 이어 붙여 놓았는데,
이같은 책이 스물 두권이 모여서 하나의 지도를 이루게 된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려놓은 전국지도인데,
만약 이것을 한 장으로 만들었다면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때문에 떼어 놓으면 분리도가 되지만 합하면 전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어느 정돌까?
진본과 똑같이 만든 영인본을 가지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바닥에 펼쳐진 지도책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한반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스물 두권의 지도책을 모두 붙이자
엄청난 크기의 전국 지도가 완성되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이 거대한 지도속에는 과연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맥이다.
산봉우리를 각각 떼어서 그리지 않고 줄기와 줄기를 이어서
마치 하나의 구조물처럼 표현하고 있다.
땅을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동일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국토관이 반영된 결과다.
산맥은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이며,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혈맥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백둑대간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인데,
백두산에서 시작된 국토의 큰 흐름이 남북을 관통해
마치 척추처럼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동여지도 속에 나타난 산봉우리는 모두 삼천여개.
전체를 하나로 표현하면서도 각가의 산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백두산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렸다.
'백두'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려는 듯 흰 봉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함경북도 명주군에 위치한 칠보산-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듯이 보인다.
금강산은 무수한 봉우리를 표현해, 일만이천봉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의도적으로 과장한 오대산.
서울의 삼각산 역시 세 개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 계룡산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것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속에 살아있는 산의 이미지를 지도속에 옮겨놓은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도로에 대한 표현이다.
모든 도로가 마치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듯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사실과 달리 도로를 왜곡해서 표현한 까닭은 물길과의 구별을 위해서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나타냄으로써
한가지 색깔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판지도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 것이다.
이전의 지도들과 대동여지도를 구별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은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두 스물 두 개가 기호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은 모든 지도에서 당연하게 사용되는 것들이지만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최초였다.
구체적인 활용의 예를 살펴보면,
영아를 표시하는 이 기호는 병영 등의 군영,
읍치는 오늘날의 시청이나 군청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군사기지를 나타내는 진보다 역참, 봉수 등 다양한 기호가 사용됐는데,
이전과 달리 글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지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140여년전에 만들어졌음에도 현대 지도 못지 않은 아이디어가 활용된 지도-
대동여지도는 크기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당대 최고의 지도였다.

-------------------------------------------------------------------------------------
[VCR 2]
예나 지금이나 지도를 가장 많이 활용하게 되는 경우는 길을 찾을 때다.
고지도를 연구하는 이상태 선생과 함께 대동여지도의 도로망을 확인해보았다.
직선으로 표현된 도로들은 지도상에서는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길이거나 구불구불하게 돌아가는 길이라 훨씬 더 멀 수도 있다.
도로의 길이만 가지고는 실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이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다.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하나씩 찍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방점들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산악지역의 경우엔 주로 조밀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좁은 곳은 1.5센티미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넓은 곳은 얼마나 될까?
2.5센티미터- 주로 평야지대에서 확인된 수치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방점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두 지점간의 거리를 파악하는데만 머물지 않는다.
전국 어느 지점에서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일정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 네트워크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모든 도로망이 서울만을 중심으로 표기되던
이전 지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획기적인 변화다.

(현장음)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지도들에선 이전보다는 발전된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도는 옆에 따로 표를 만들어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자리에
두 지점간의 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이 표를 활용할 경우 거리는 알 수 있지만 여전히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동여지도의 도로 표기 방법이 왜 탁월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조선시대 물길은 도로 못지 않게 중요한 교통로였다.
때문에 대동여지도 상에도 물줄기들이 매우 상세히 표현돼 있는데,
한가지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물줄기가 어떤 지점에서는 두줄기로,
또 다른 곳에서는 한줄기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쌍선과 단선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마을 옆을 흐르고 있는 강은 낙동강의 본류다.
상류임에도 불구하고 배를 이용하지 않고선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강폭이 넓은 편이다.
그러나 이 지점을 기준으로 상류쪽은 강의 깊이가 급격히 얕아져서
돛단배는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공물을 실어나르던
조운선들의 종착지가 이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

결국 대동여지도에서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돛단배를 운행할 수 있는 구역인 동시에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하는 구간을 나타낸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양으로 가려면 육로를 이용해 문경새재를 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나루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유곡동.
도로로 변해버린 이곳은 조선시대 문경새재를 오가던 여행자들에게 말을 제공하거나
숙소를 알선하던 역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공덕비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유곡역의 위치도 정확하게 표시되어있다.
때문에 대동여지도만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물류 운반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공물을 싣고 동래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게된다.
물줄기가 단선으로 바뀌는 문경에 다다르면,
유곡역에서 교통편을 마련하고 육로를 따라 문경새재를 넘는다.
다시 충주에서 배를 갈아타면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곧장 한양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대동여지도에는 당시의 교통, 물류 정보가
완벽하게 담겨있어 매우 실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제작된 지도들과 비교할 때 대동여지도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일까?
대동여지도를 현대 지도와 동일한 크기로 축소해서 그 외곽선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남해안과 서해안 지방에서는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북부지역으로 가면서 오차가 발생했는데
주로 산악지형에서 실제보다 조금 더 넓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터뷰)

인공위성에서 찍은 서울의 모습이다.
하천 매립등으로 일부 지형이 벼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은 140여년전에 만들어진 고지도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정확하면서도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이같은 특징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당시 조선의 교통 물류네트워크를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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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오가는 차량들로 붐비는 중림동 로터리.
몇해전 이곳에 김정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에 비석을 세운 까닭은 현재까지 김정호에 대해 밝혀진 유일한 단서가
이 일대에서 거주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인터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김정호 개인에 대해서는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 외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이 때문에 그를 둘러싼 과장된 소문들이 오랜 시간동안 진실처럼 전해져오기도 했다.
당대에 김정호에 대해 적은 유일한 기록은 이향견문록이라는 책이다.
이책에는 김저호가 만든 지도가 매우 훌륭했다는 간단한 내용만 담고 있다.
다만, 중인 이하 사람들의 업적만을 싣고 있는 이 책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터뷰)

김정호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일제 때 간행된 조서어독본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는 김정호가 나라에 정확한 지도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혼자서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오르고 전국을 수없이 답사하며 조사한 결과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나라를 위해 쓰고자 대원군에게 가져갔지만
지도가 너무 상세해서 국가의 기밀이 다른 나라로 새나갈 것을 염려한
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혔고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호가 평생을 바쳐서 만든 대동여지도 목판은 모두 압수돼 불태워졌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90년대 초반까지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난 90년대 초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여러 매의 목판이 발견되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동여지도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목판을 두고 정밀조사가 실시되었다.
수장고에서 발견된 목판은 모두 열 한 매.
하나의 목판에는 앞과 뒤 각각 두 면씩 총 네 개의 면이 새겨져 있다.
확인 결과 이 목판은 대동여지도 인쇄본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오상학 학예연구사 인터뷰)

목판의 존재는 대동여지도가 압수, 소각된 적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김정호의 옥사설 또한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단서다.
이향견문록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책에서는 김정호의 죽음을 '몰'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약 옥사했다면 '물고'라고 적어야 옳다.
또한 대원군 집정기에 쓴 이 기록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대동여지도를 한 부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김정호가 처벌을 받았다면 결코 적지 않았을 내용이다.
결국 조선어독본의 내용은 대원군을 우매한 지배자로 묘사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했던 일본의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정호의 작품은 대동여지도 하나만이 아니다.
제작시기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선전도는
역시 목판으로 만들어진 서울지도인데,
현존하는 가장 큰 서울지도일 뿐 아니라 서울을 담은 목판지도들 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대동여지도 못지 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야할 업적이 지리지의 편찬이다.
지리지는 국토의 정보를 집대성해 놓은 일종의 지리 백과사전인데
김정호는 일생동안 여도비지, 동여도지, 대동지지 등 세 종류의 지리지를 만들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살아생전 김정호는 이름을 날리거나 명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지리학적 성과들은
국토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과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인물 김정호를 되살아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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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우리나라 전통 지리와 천문에 관한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회장-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들도 대거 선보였는데 대동여지도 이전의 지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여지전도- 대동여지도보다 40여년 앞섰을 뿐인데도
지도의 정확성은 매우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글씨는 지도라기 보다 지리지를 연상시킨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곤여전도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 지도 속에서도 한반도의 모습은 심하게 왜곡돼있다.
그렇다면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현대 지도 제작과정을 통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측량을 위해 먼저 GPS 장비를 설치했다.
인공위성을 통해서 이 지점의 경위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현재 전국에는 측량 기준점들이 정해져있는데.
이것은 측정할 때마다 생길 수 있는 오차를 막기 위한 조치다.

(인터뷰)

각 지점에서 산출된 데이터를 조합하면 지점과 지점간의 거리,
경위도상에서의 정확한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지도 제작의 상당부분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데,
지명이나 경계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지도 제작에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을 활용함으로써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인터뷰)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실측지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토지측량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
실측자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서를 찾던 중 김정호의 지리지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쓴 첫 번째 지리지인 여도비지는 도별로 지역을 나눠놓은
일종의 군현 지리지인데 친구였던 최정환과 함께 저술한 책이다.
이 여도비지 속에 매 지역마다 그 지방의 경위도를 기록한 표가 들어있다.
여기에 적혀있는 경위도는 북극고도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경위도 기준이 있었고,
실제 지도 제작에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김정호가 직접 측정했던 것일까?

(인터뷰)

김정호의 또다른 지리지 속에서도 이와 동일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정조 15년. 8도에 명을 내려 북극고도와 편동서도를 측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때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측량이나 측정을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한 결과 세종 때 이미 측량을 시작했고
전국의 주요도로에 30리마다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거리 측정을 위해 기리고차라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는 스스로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반자동 거리측정기였다.
이 놀라운 거리 측정기에 대해서는
호대용이 쓴 담헌서 속에 그 작동원리를 짐작해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기록에 다라 복원해보면 기리고차의 겉모습은 마차와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상당히 복잡한 형태다.
수레가 반리를 가면 종이 한번 울리고, 1리를 갔을 대는 여러 번 울리도록 했다.
사람은 수레위에 앉아 소리를 듣고 기록하기만 하면 됐는데,
북소리는 5리에서 한번, 10리에서는 여러 번이 울렸다고 한다.

(인터뷰)

조선시대 궁궐의 모습을 그려놓은 동궐도.
당시 궁궐안 곳곳에 설치돼 있던 천문 관측기구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경위도 측정의 전통 또한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겨위도를 측정한 가장 큰 목적은
날씨를 연구해서 농사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측정된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지 활용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이미 측정해 놓은 정확한 데이터가 있다면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기 위해서
매번 새로이 측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김정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동지지 속에 자신이 참고한 도서명을 밝혀놓았는데,
모두 예순 다섯 종으로 고금의 지리학 서적들이 망라돼있다.
이것은 김정호가 전통 지리학의 성과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서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던 김정호.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과 64년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됐는데,
이 두 개의 판본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이 경우는 산맥을 새로 삽입했다
지명이 새로 추가된 경우도 있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도 십 여 군데가 넘는데
대동여지도의 수정이 목판작업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김정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김정호가 눈을 감은 그 순간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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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인천에 위치한 화도진 공원.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은 강화조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됐다
강화조약이라고는 하지만 무력을 앞세운 열강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 측 대표로 참석한 이는 전권대사 신헌
대원군 집정기의 대표적 무관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인물이다.
신헌은 자신의 문집에서,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로서는 국가 1급 기밀 서류에 해당하는
비변사나 규장각의 지도들도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호가 당대 최고의 군사 지도들을 볼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당시의 군사지도들은 어떤 특징을 자지고 있을까?
18세기에 만들어진 이 지도는
당시 청나라와 마주하고 있던 국경 지역의 지형을 그려놓은 관방지도다.
이 지역의 지형, 성곽, 도로 등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돼 있다.
정방 산성도.
이 역시 이 지역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군사지도다.
성벽과 진보 등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우물과 창고까지도 세밀하게 표현해 전쟁시에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특정 지역에 편중됨이 없이
전국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전국의 봉수 체계를 파악해야 한다면
지도상에 표시된 봉수 기호들을 모두 연결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한 장의 훌륭한 봉수도가 완성되는 셈인데,
역참이나 창고, 진보 등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 지도라도 개별 지역에 대한 정확성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
서울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는 강화도를 살펴보면,
먼저 성벽의 위치가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강화도 전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봉수나 창고 등 각종 군사 시설들에 대한 파악도 손쉽다.
이것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군사지도로서 활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의 군자시도로서의 활용가치는 이미 입증된 바 있다.
1925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정호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청일전쟁 당시 양국 군대가 모두 대동여지도를 작전 지도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지리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도
대동여지도를 사용해서 군사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일본군은 우리나라에 과한 상세한 지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지도도 그 중 하나인데 서해안과 한강 주변의 해로를 표시한 것이다.
서울까지, 배를 이용해 들어 올 경우 대비해
한강 전체의 수심까지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근대 측량기법으로 만든 정밀한 지도를 가졌음에도
대동여지도를 활용한 것은 이 지도가 현대 지도 못지 않게
정확하고 편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누가 보아도, 그 어디에서 보아도
똑같은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의도했던 김정호의 생각 속엔,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의 공유라는 현대적인 사고 방식이 녹아있는 것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만든 시기는
이양선과 외국함대들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활용 가능성을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저술이었던 대동지지 속에
유독 군사항목이 강조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전고라는 항목인데,
이전의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항목을 통해
국방을 중시했던 김정호의 지리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궁극적인 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대동여지도의 첫머리에 실린 지도유설이다.
그의 뜻은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F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사용하고자 함이었다.
대동여지도는 이전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무모하게까지 여겨지는 한 사내의 꿈에서 비롯됐다.
국토 정보를 지도상의 네트워크로 구축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희망했던 그 꿈은
지금 우리 앞에 6.6m 초대형 지도로 남겨졌다.

출처 http://www.kbs.co.kr/history/vod.shtml


보다 더 많은 청도 김씨에 대하여, http://my.dreamwiz.com/dbaseman/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의 출자지().



관적() ·본적() ·성관() ·본() ·관향() ·적관()이라고도 한다. 보통 성()과 병칭되어 개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본관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본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으나 995년(성종 14)경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시 초기의 본관제는 지역사회 내부의 자체적인 질서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다. 즉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민() 지배방식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 전기에 본관을 벗어나는 거주지 이동은 입사() ·입산() 등을 통한 신분이동이나, 방수() ·행상() 등 역()의 수행이나 직업상의 필요, 또는 사민() 유배 등 정책적인 경우를 비롯하여 기타 공식적으로 허용받은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유망민으로 간주되어 본관 지역으로 되돌려졌다. 본관은 양인() 이상에게만 주어졌으며, 노비양수척() 등의 천인()들은 본관제 질서에서 배제되어 국가에 대한 국역()의 부담도 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고려 정부는 지역사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성() 및 직역()을 분정()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부세() 징수 등의 행정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토성은 신라 말, 고려 초 변동기의 자위조직의 기초집단인 성()을 중심으로 분정되었는데, 이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읍()’과 같은 공동체 관계로 파악한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에서 각 성관의 시조들이 해당 지역에 식읍() 또는 채읍()을 사봉()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려 후기 이래 향촌사회에서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고, 유망이 극심하게 일어나면서 본관과 거주지의 분리현상이 확대되어갔다. 이제는 본관 지역을 이탈한 농민들을 원래의 본관으로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현재의 거주지에 적()을 붙여서 수취를 도모하는 방편이 보다 편리해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되고, 본관이 점차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성()은 처음에는 동본()이었다는 관념에서 성관()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즉 군소 성관들이 동성의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본관은 이제 성관으로서 ‘동성동본은 백대지친()’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었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특히 이러한 관념이 강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들은 반드시 원조()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식 아래에서 조선 후기에는 족보 편찬이 활발해졌다.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 본관의 사회적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지하는 등 법률적인 면에서 그 기능이 남아 있고, 특정 성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분관념의 상징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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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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