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개의 시선 (If You Were Me, 2003)
감독
여균동박진표정재은
출연
김문주정애연전하은변정수   더보기
요약정보
한국 | 드라마 2003.11.14 | 12세이상관람가 | 110분
줄거리
요즘, 심심하셨죠? 이제 우리랑 함께 가보시겠습니까?첫 번째 여행: 실업고 3학년 여고생의 속마음 훔쳐보기(감독: 임순례)그녀의 .. 더보기

여섯개의 시선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후원을 해서 6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옴니버스 영화이다. 다양한 주제이지만 인권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세대,구성원,주체들간의 인권관련주제를 드러내었다. 물론 가볍게 행해지는
문제에서부터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꾸어 버릴 인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들여다 보면 부끄럽거나 혹은 불편하거나 메스꺼울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 중에서 마지막 작품 실제 있었던 네팔 노동자 찬드라 사건을 다양한 시점에서
관찰하듯 재구성한 "믿거나 말거나"
한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공권력또는 사람들의 무관심 내지는 귀찮음으로 인해
이렇게 힘없이 무너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내심 울분을 금치 못했던 내용.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나 할까? 어쩜 같은 한국인도 이런 경우가 없으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찬드라에 얽힌 대한민국이 이주노동자에게 보여주는 현실을 들춰보았다.

다음을 이용해서 찾아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아래----

이 글은 최성각님이 풀꽃세상 사무처장 시절, <풀밭>5호와 <녹색평론> 2002년 3-4월호를 통해 세상에 '범국민 참회모금운동'을 제안한 글입니다. 이후 2002년 3월부터 6월까지 풀꽃세상에서는 참회모금운동을 벌였고, 같은 해 4월13일과 10월22일, 두 차례에 걸쳐 모금총액 18,200,000원을 찬드라씨를 방문해 직접 전달했습니다. 네팔인 찬드라씨와 한국사회와의 만남은 다시 떠올리기 힘들 정도의 '악몽의 만남'이었으나, 풀꽃세상의 작은 노력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솥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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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 참회모금운동을 벌이며
네팔여성 찬드라에게 사죄해야 하지 않겠는가(1)
최성각 -- 작가
네팔여인 찬드라 꾸마리 구릉(46)이 단기비자로 한국에 처음 온 때는 1992년 2월9일이었습니다. 이후 서울 광진구 자양1동에 있는 대신섬유공업에 입사해 일하다가,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후 찬드라)은 이듬해인 1993년 11월 21일(일요일), 실종됩니다. 찬드라가 용인정신병원에 있다는 것이 발견된 때는 그로부터 ‘6년 3개월 26일’ 후인 2000년 3월 18일이었습니다.

찬드라는 한국에 돈 벌러 온 외국인노동자였지 걸리지도 않은 정신병을 고치려 온 정신병자가 아니었습니다. 실종될 때 찬드라의 신분은 당시 발효중인 외국인노동자 출국유예조치로 인해 합법적인 체류상태였습니다.

이 믿어지지 않는 일은 바로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멀쩡했던 찬드라가 정신병자로 오인되어 6년 4개월여 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던 세월 앞에서 ‘우리’라는 초국가적 민족개념은 부끄러움의 극치, 비례(非禮)의 극치, 인권유린과 후안무치, 그래서 야만의 절정에 달하고야 맙니다. 이 사건 앞에서 그야 말로, ‘우리’는 더 이상 이 나라가 문명국가라고 믿고 있거나 그리로 가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무색해지면서 내면에서 치솟아오르는 부끄러움의 열기와 만나게 됩니다.
지난해 말, <녹색평론> 10주년을 맞이해 한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으로 인해 대구에 갔던 필자는 김종철 선생님과 점심 후, 필자가 일하고 있는 환경단체 풀꽃세상의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찬드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선생님은 충격으로 얼굴빛이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김선생님의 얼굴에 번진 참괴스러운 놀라움은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일부로서 벗어날 길 없는 ‘우리’에 대한 절망감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잘못 읽을 수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이 글은 풀꽃세상과 찬드라가 만난 이야기, 그리고 그가 정신병원에서 나온 뒤 한국인의 이름으로 우리가 그에게 드렸던 참회의 시간, 그리고 찬드라의 생존소식을 알고 네팔에서 날아온 그의 아버지와 친척을 모시고 함께 했던 해후의 시간들에 대한 짧은 기록입니다. 그리고 1년 후 찬드라가 ‘대한민국 외 1인’을 피고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 재판이 진행되던 중, 네팔에 찾아가 찬드라에게 재판소식과 속죄의 인사를 다시 드리고 돌아온 뒤, 2002년 3월 현재 아직도 재판이 진행중이라, 재판과 관계없이 혹시 우리가 할 일은 뭐 없을까, 답답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못난 한국인의 이야기입니다.

정신병원에서 강제치료를 받게 된 네팔 여성

(사진:네팔 히말라야의 어린이들)
찬드라 구릉 소식을 처음 필자에게 알려준 이는 네팔인 케이피 시토우라였습니다. 케이피는 필자가 히말라야를 들락거리며 준비중인 개인작업 때문에 한국에 있는 네팔인 노동자를 찾던 중 알게 된, 한국말을 잘 하는 30대 초반의 네팔청년입니다. 그 역시 다른 외국인노동자들이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인 것처럼 무사계층의 높은 카스트로서 네팔의 트리뷰반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이른바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케이피는 옷도 깔끔하게 잘 입고 아리안계라 콧대도 높고 키도 큰 미남청년으로서 네팔 카트만두에 코리안 드림이 만연했던 1992년께에 한국에 온 대표적인 ‘한국통 네팔인’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는 필자를 정확한 발음으로 ‘형님’이라 부르고, 저 또한 그를 아우처럼 대하는 사이라 자연스레 필자가 일하는 환경단체의 한 회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나던 당시, 8년여 한국 체류기간 내내 그는 돈 벌 생각은 않고 직장을 계속 옮기면서 섬유쪽의 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봉재의 기본부터 디자인까지 배워 장차 네팔의 섬유산업에 기여하겠다는 게 케이피의 야무진 꿈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인종주의, 즉 GNP 수치와 백인문화 우월주의에 바탕해 형성된 나라간 위계서열의식 때문에 온갖 모욕을 참고 고생해서라도 돈만 벌면 돌아가서 경제적 중상층이나 상층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여느 외국인노동자들과 달리, 번 돈을 공부하는 데 다 쓰고 있는 케이피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형님, 찬드라 구릉이라는 네팔 여성이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이근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풀꽃세상에서 할 일은 뭐 없을까?”
케이피가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때가 2000년 3월말께였습니다. 정신과의사이며 단체 회원이신 이근후 선생님은 당시 이화여대에 출강하면서 이대부속병원에 재직중이었습니다.

3월 29일에 가졌던, ‘찬드라 꾸마리 구릉 실종사건 진상조사와 이주노동자 인권보호대책 기자회견’ 때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의 이란주 사무국장이 정리한 공식적인 경과보고에도 드러나 있듯이 찬드라가 용인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깥에서 최초로 알게 된 이가 바로 이근후 선생님이었습니다. 용인정신병원의 황태연 박사가 이근후 선생님에게 “네팔 여성이 우리 정신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린 날은 3월18일, 그 소식을 접한 이근후 선생님이 풀꽃세상 단체활동으로 구면이었으며, 재한네팔인공동체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는 케이피에게 그 사실을 곧바로 알렸던 것입니다. 찬드라가 네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의사는 이근후 선생님이 20여년 이상 네팔의료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자, 혹시나 네팔인에게 연결되지 않나 해서 연락했다고 합니다. 당시 양재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케이피는 찬드라 소식을 접하자, 그 사실을 풀꽃세상과 함께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에 알렸습니다.

필자는 케이피로부터 이 놀랍고도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자, “이럴 수가?”,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이상하게도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알란 파커 감독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였고, 다른 한편은 스티브 매퀸이 주연했던 <빠삐용>이었습니다. 참으로 뜬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는 터어키에서 일어났던 실화로서 한 미국청년이 공항에서 마약범으로 잡혀 감금-탈옥-다시 체포의 과정을 통해 수십년간 터키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빠삐용>이야 소설이나 영화로 너무나 유명한 탈출기라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엉뚱한 연상을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면서 필자는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바로 이곳 대한민국, OECD에 포함되어 자랑스럽다느니, 올림픽을 치른 뒤 득의에 차 있는 탈근대(?)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고, 팔뚝에서부터 힘이 빠지면서 나중에는 아득해지기까지 했습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와 함께 더 이상 이 야만의 나라에서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찬드라 사건을 압축하고 있는 3월 25일자 한겨레 보도를 살펴봅니다.


찬드라 꾸마리 구릉
대한민국 정신병원에서 6년 4개월간 감금된 생활을 해 온 사람.
멀쩡한 네팔인 정신병원 감금
--서툰 한국말 오해, 행려병자로 6년간 수용
한 네팔인 여성이 경찰과 병원등의 어처구니없는 행정착오로 한국인 정신병자로 둔갑돼 6년 넘게 정신병원에 수용돼온 사실이 드러났다.

용인정신병원은 24일 선미야라는 이름으로 정신병동에 수용돼온 환자가 확인 결과 네팔인 찬드라 쿠마리 구릉(40)으로 밝혀져 본국으로 송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찬드라는 94년 7월 24일 서울시립부녀보호소에서 용인정신병원으로 넘겨졌으며, 이에 앞서 93년 11월 서울 동부경찰서에 의해 1종 행려자로 처리돼 서울 청량리정신병원에 수용됐다. 당시 경찰과 부녀보호소, 병원 등은 찬드라가 서툰 한국말로 네팔인이라고 주장하자 한국인이 정신질환에 걸려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고 정신병원에 수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용인정신병원 오석배 원장은 “보호소에 넘어올 때 한국인으로 처리돼 있었고, 본인이 네팔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에서 살다 왔다는등 워낙 횡설수설하고 지능도 낮아 어쩔 수 없이 정신분열증으로 치료를 했다” 고 말했다.

용인정신병원쪽은 최근 찬드라의 주치의 황태연 박사가 주한 네팔인 모임인 ‘네팔공동체’에 연락해서야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93년 검거될 당시 찬드라는 한 가게 주인과 음식물 계산문제로 다투다 동부경찰서에 넘겨졌으며, 곧바로 1종 행려자로 처리돼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것으로 나타났다. 네팔공동체 총무인 시토우라는 “경찰이 하룻만에 찬드라를 바로 정신병원으로 옮겼다”며 “한국말이 서투르다고 외국인을 정신병자로 몰아 가든 사실이 당혹스러울 뿐” 이라고 말했다.

찬드라는 92년 2월말 한국에 입국해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한 섬유공장에서 다른 네팔인들과 함께 일해왔다.

한국사회에는 충격적인 인면수심의 일들이 매일같이 다반사로 일어나,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엔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정도로 충격에 면역이 되어 있는 판인데, 왜 그토록 찬드라 사건이 필자의 마음을 둔중하게 때렸는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그동안 여러 차례 히말라야 산중을 헤매면서 필자가 탐욕과 경쟁, 경제지상주의에 오염되어 있는 조국의 이웃들과 달리 아직 산업사회에 진입하지 않아 사람이면 누구나 형제처럼 대하는 그들 히말라야의 라다키나 구릉족, 티베탄들에게서 더 깊은 인간애를 느껴왔던 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침 그즈음, 푸스카르 사하(32)라는 네팔 젊은이가 자전거를 타고 전세계를 돌고 있었는데, 그가 3월말 어느날 자전거를 끌고 풀꽃세상에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이야기를 들어본즉, 90년대초 네팔 민주화운동 때 총상을 당한 사하는 1998년 자전거를 타고 네팔을 떠난 뒤, 아시아를 돌다가 마침 한국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발목 총상이 치료되자 그는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해야겠다고 결심, 네팔의 자전거회사로부터 자전거 한 대를 얻어타고 온 세상을 돌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풀꽃세상은 마침 사하도 네팔인이기에 찬드라 사건과 함께 이 소식들을 묶어 다시금 세상에 알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거기에는 일부 신문에 찬드라 사건이 이미 보도되었지만, 찬드라가 아직 퇴원하지 못한 상황인데다 이미 보도되었지만 그의 퇴원을 열망하는 초조감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풀꽃세상이 마련한 기자회견의 명칭은 ‘풀꽃세상과 함께 하는 위로와 격려의 네팔티타임’이었습니다. 찬드라 소식을 병원으로부터 최초로 연락 받은 이근후 선생님이 네팔 차를 준비했고, 찬드라 소식을 접하자마자 진상보고 작업에 달려든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 일꾼들과 케이피를 포함한 재한네팔인들이 풀꽃세상 회원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정신병자로 몰려 정신병원에서 강제치료를 받고 있는 찬드라에게는 참회와 위로의 마음을,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방문한 사하에게는 격려의 마음을 전달하면서,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더욱 강조한 일은 찬드라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자회견장에서 찬드라가 기자회견장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들었는데, 그것은 신원이 확인된 이후 케이피를 포함한 네팔 동족을 만난 정신적 충격과 당장의 거처와 여러 수습할 일들이 남아 있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근후 선생님은 “지금은 사건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생각할 때다”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것은 6년 4개월만에 동족을 만나 네팔 말을 하게 된 찬드라의 충격에 대한 설명 같았습니다. 아무렴, 왜 충격이 없었겠습니까.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그것도 개화 이래 백인들에게는 꺼벅 죽으면서 유색인 중에서도 못사는 나라에서 오면 도무지 사람 취급 않는 ‘이상한 이국땅’의 정신병원에서, 받을 필요가 없는 강제치료를 받으며 보낸 6년 4개월여 시간. 어디가 지옥일까요? 지옥이 죽어서야 가는 하늘에 있을까요? …찬드라가 6년 4개월여만에 케이피를 만나 네팔어로 처음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케이피가 “그래, 넌 미치지 않았다는 걸 우리가 알어!” 했을 때, 그 다음에 찬드라는 마음놓고 쓰러져도 되었을 것입니다. 혼을 가진 생명체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시 만난 빛 때문에 생긴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찬드라 사건의 경위를 기자들에게 알렸고, 즉석에서 회원들로부터 모금한 368,300원을 양분해 반은 사하에게 전달했고, 나머지 돈은 케이피를 통해 병원에 있는 찬드라에게 전달했습니다.


기자회견 이후, 사하의 자전거 순례소식과 함께 찬드라 사건은 동아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등 주요 일간지와 시사저널, <말>지, 코리아헤럴드, 여성신문 등에 다양한 형태로 보도되었습니다. 한 방송국에서는 취재를 왔으나 바로 방영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우리는 찬드라의 사진을 벽면에 걸어놓고, 마침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네팔인 노동자 10여 명에게 네팔 티를 대접하면서 머리도 숙이고 허리도 숙여 사과했습니다. 한국인의 일그러진 인종주의와 이민족과 함께 살아가는 데 서툴기만 한 무례함과 야만성에 대해 우리는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이는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는 풀꽃세상의 추구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간)에 대한 무례한 태도가 환경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들의, 나쁜 원인들의 뿌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양민학살을 참회하는 데 30여년이 걸렸다면, 우리 시대에 일어난 야만적인 인종주의는 그때그때 곧바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찬드라 사건을 세상에 다시 알린 때는 4월 11일, 찬드라가 퇴원한 때는 찬드라 사건이 세상에 보도된 이후인 2000년 4월 18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세상에 찬드라 사건을 알리는 10여일 동안,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과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은 풀꽃세상의 케이피와 함께 진상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찬드라와 면회를 하고, 담당의사를 만나고, 그가 용인정신병원에 오기 전에 있었던 서울시립부녀자보호소도 방문하고, 그가 잃어버린 6년3개월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한 소송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찬드라가 어떻게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되었는지 최초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그를 병원에 처넣은 동부경찰서 청문감관실을 방문하여 진상조사를 요구했습니다. 실종 당시 제작해 배포했던 포스터를 발견하면서 경찰에서 찬드라를 처음 청량리정신병원에 넣어버렸던 병원을 방문, 의사를 찾기도 했습니다. 진상조사와 함께 명백히 이 사건은 경찰의 업무상 과실임이 드러나자, 찬드라를 원고로 대한민국과 청량리정신병원을 피고로 하는 소송준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법무법인 덕수의 이석태 변호사가 찬드라로부터 사건을 일임받아, 2002년 3월 현재, 재판중이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지요.

‘Gurung’과 ‘Gorum’은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요약된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지만, 찬드라는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기 전에, 자양1동 파출소로 연행됩니다. 1993년 11월 21일이면 이미 쌀쌀해진 날씨, 자양동 언저리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뒤 음식값 때문에 식당주인과 실랑이가 붙자 주인은 112에 신고를 하고, 식당에 출동한 자양1동 파출소의 경찰은 몇 마디 말을 붙이다가 ‘성명 주소 불상의 행려병자’로 찬드라를 분류하여 청량리정신병원에 수용 요청을 합니다. 찬드라는 스스로 자신을 ‘네팔인’이라고 밝혔습니다. 구릉족이라 코에 코걸이 자국이 있고, 알 수 없는 나라 말을 중얼거리는 이 남루한 여성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행려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소통을 위한 노력도, 신원 파악을 위한 노력도 충실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어렵지 않게 짐작됩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말이 잘 안 통하고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이 이 땅의 멀쩡한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짐작해 보면. 졸지에 행려병자가 되어버린 찬드라는 연행되던 당일 저녁 7시30분경에 청량리정신병원으로 옮겨집니다. 그 순간은 한 멀쩡한 네팔여성이 6년3개월여 기간 동안 말끔하게 세상에서 소거되는 ‘결정적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청량리병원에서도 찬드라는 “나는 (이 잘난 나라에) 돈 벌러 온 네팔사람이다. 나는 합법적인 체류자 자격이 있다. 내가 일하는 공장에 가봐라. 거기 여권이 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병원 직원의 바지자락을 움켜쥐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남루한 옷에 묻은 때와 냄새는 ‘위생상태 미흡’으로, 내보내달라는 호소는 ‘고집이 센 정신병자의 특성’으로 기록되어 더욱더 그를 늪속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병원에 감금-‘입원’을 감금이라 표현하면 의사선생님들은 비위가 상하겠지만, 푸코가 병원이나 학교나 감옥이 사실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한 적도 있으므로, 더욱이 찬드라의 경우에는 ‘감금’이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된 지 사나흘 후에 찬드라는 정신질환자에게 나라에서 분류하는 ‘1종 생활보조대상자’로 낙인되면서 ‘선미야’라는 한국이름을 얻습니다. 강제치료 상태로 돌입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나지막하게 묻게 됩니다. 히말라야 산골여성 찬드라가 언제 대한민국 정부에 정신질환의 강제치료를 요청한 적이 있었는가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요구를 할 턱이 없는 노릇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찬드라가 외국인일지도 모른다는 논란은 열흘즘 후에야 벌어졌습니다. 병원에서는 동부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대책을 요구하였으나 경찰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길 잃은 외국인의 경우, 경찰은 출입국관리소에 연락하게 되어 있었건만 경찰은 직무를 유기했습니다. 만약 그가 백인이었다면, 단지 영어를 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 나라 학원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대접을 받고 있는, 영어권의 백인이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리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1994년 7월 20일 찬드라는 청량리정신병원에서 서울시립부녀자보호소로 옮겨집니다. 그곳에서도 찬드라는 정신질환자로 감정받아 8일 후, 용인정신병원으로 옮겨집니다. 이후 황태연박사가 평소 네팔의료봉사를 하고 있던 이대병원의 이근후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던 2000년 11월까지 ‘찬드라의 감옥’은 용인정신병원이었습니다.

왜 그가 발견되는 데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황박사는 찬드라가 네팔인이라는 것을 안 뒤, 주변에서 네팔인을 만나기 위해 적잖이 애썼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 파키스탄인을 만났는데, 그때 그가 ‘선미야’가 아니라 ‘찬드라 꾸마리 구릉Chandra Kumari Gurung’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찬드라와 서툰 우르두어(지역언어)로 의사소통을 한 파키스탄인은 찬드라가 발음하는 대로 ‘Chandra Kumari Gorum’이라고 써 주어 의사는 그 이름으로 출입국사무서에 공문을 보내 조회를 요청했으나, 출입국관리소는 ‘신원확인이 되지 않는다’라는 간단한 회신만 보내왔다고 합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영문철자가 일부 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Gurung’과 ‘Gorum’은 스펠링이 확실히 달라 할 말이 없긴 합니다. 관료주의는 고골리 시대에만 무서웠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 산간지대에 흩어져 사는 구릉족은 몽골리안으로서 불교를 믿으며, 우리 한국인과 외모가 아주 비슷합니다. 병원이든 출입국관리소든 ‘구릉족’이 히말라야의 몽골리안들이라는 것만 알았어도, 이런 비극이 조기에 마감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신원을 찾아주기 위해 명백히 애썼고, 나중에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근후박사에게 연락해 결국 찬드라를 다시 세상에 내놓은 황태연박사는 분명 좋은 일을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황박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오는데 걸린 너무나 긴 시간에 대한 충분한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미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은 용인정신병원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 책임을 서울시립보호서에도 청량리정신병원에도 동부경찰서에도 돌리고 싶지 않은 마음마저 입니다. 그 책임은 온전히 우리 ‘한국사회’가 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그래도 양심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 가질 생각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우리는 조금 다르고 많이는 같습니다

풀꽃세상에서 찬드라가 불참한 ‘위로의 시간’을 가진 일주일 후인 4월 18일, 찬드라는 마침내 병원을 나왔습니다. 발견되고 병원에서 나오기 전에 케이피는 네팔의 찬드라 가족에게 “찬드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소식을 받은 그의 아버지와 친척이 한국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찬드라 사건을 다시 세상에 환기시켰던 풀꽃세상은 찬드라 소식을 처음 케이피에게 연락한 이근후선생님이 운영하는 삼청동 ’예띠의 집‘(현재 이근후열린마음클리닉)에서 4월 26일, 다시금 점심식사와 함께 작은 위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말하자면, ’주제가 있는 점심식사‘였습니다. 찬드라 구릉의 아버지 람 프라사드 구릉, 그의 사촌오빠 테즈만 구릉, 케이피 시토우라, 부천에서 온 네팔인 엘비 퍼르단, 순일 마쓰께 등의 네팔인과 풀꽃세상 회원들, 그리고 한 잡지사에서도 그날 그 점심에 참석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찬드라의 아버지 람 프라사드 구릉은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온 히말라야의 촌로였습니다. 이날 우리는 찬드라에게 꽃과 부채(1999년 ‘동강한마당’ 때 만들었던 부채)를 선물했고, 재한네팔공동체에서는 풀꽃세상에 감사패를, 찬드라는 한국에 오기 전에 손수 짠 야크털로 된 방석으로 답례했습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아버지를 만난 찬드라의 얼굴은 밝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우리는 찬드라의 손을 잡고 서로 껴안으면서 오래된 이웃집 동생처럼 반가워했습니다. 필자는 기회만 허락되면 히말라야의 라다키들, 티베탄들, 구릉족들을 찾아다녔기 때문에 그들이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찬드라 또한 ‘부끄러워하는 이상한 한국인들’을 티없이 반갑게 대했습니다. 찬드라는 정신질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날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옮겨 봅니다.

찬드라 구릉 : 너무 기쁜 일은 8년 반만에 아버님을 만난 일입니다(한국에 오기 전에 찬드라는 일찍부터 히말라야에서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에 나와 있었다). 경찰서나 병원에 있을 때 여러 사람에게 그토록 애원했지만 아무도 내 얘기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밥도 안 먹고 구석진 곳에서 혼자 울기만 했습니다. 내게 일어난 불행은 모두 내가 못 배워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병원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꿈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만난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저는 지금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나이도 어느덧 많이 들었고, 앞날이 걱정됩니다. 억울한 시간이었지만, 한국인들을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그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람 프라사드 : 딸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어느 날 용한 사람을 찾아가 점을 쳤습니다. 점쟁이 말로는, 딸이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믿었습니다. 내 딸 찬드라의 반인생은 날아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 네팔 속담에 ‘어디를 가려고 해도 길은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따뜻하게 환대해주고 지나치게 사과를 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케이피 시토우라 : 저는 한국에서 8년 이상 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약한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지난 60년대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외국에서 고생하셨던 경험이 있는 세대가 지금 한국경제를 일으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은 나중에 자기들의 조국에 돌아가서 중요한 일들을 할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청춘시절을 그들이 지금 한국에서 보내기 때문에 좋은 것을 배워서 돌아갈 수 있도록 한국사회가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따로 돈을 쓸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바로 한국의 이미지를 더 효과적으로, 확실하게 알리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순일 마스키 :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한국사회에 대해 많이 실망했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Money is good servant, but bad master.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어디에나 있는 것 같습니다. 구릉 가족의 일로 두 나라 사이가 가까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근후 : 저는 사과를 하기 위해 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한국인으로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일을 보면서 저는 한 불교설화가 생각났습니다. 옛날 사냥을 즐기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매일 사슴 한 마리를 사냥했습니다. 사슴들은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때 새끼를 밴 암사슴 한 마리가 왕의 사냥감이 되기를 자청했습니다. “네가 누구냐? 새끼를 배었구나.” 왕이 물었습니다. “임금님은 매일 사슴을 죽여야 편안하신 분이지만, 이제 새끼를 밴 저를 죽이는 것으로 사슴들을 그만 사냥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슴이 말했습니다. 깊이 감동한 왕이 말했습니다. “아아, 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너는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도 그토록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구나.” 그 뒤에 왕은 사슴을 매일 죽이는 일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사건으로 한국인들에게 신이 무엇인가 깨달음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 찬드라 구릉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이게 바로 보살행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는 찬드라 구릉 사건이 우리에게 준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차라리 기쁜 날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간 뒤, 풀꽃세상의 인사말을 단체대표이신 정상명 선생님이 드렸습니다.

찬드라 구릉의 퇴원을 축하하며, <풀꽃세상>에서 드리는 글
-우리는 조금 다르고, 많이는 같습니다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내려앉고, 수련회에 보낸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멀쩡한 바다가 메워지고, 땅과 강이 썩어들어가도 무덤덤하기만 한 완악한 감수성이 지금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습니다. 상식과 정상이 비상식과 편법으로 둔갑하고, 함께 살아갈 이웃에 대한 배려가 증발해버리고 경쟁만이 부추겨지는 우리 시대 위기의 일상에 우리는 매일같이 절망합니다. 이러한 모든 비정상의 근저에 식민시대와 분단이라는 민족의 원형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그 비극은 우리 인성 속에 습관적인 위기감을 심었고, 위기감은 타인에 대한 무례함과 ‘나만의 생존’을 위해 어떤 추한 짓도 서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 단지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노동자라는 이유 때문에 행려병자로 분류되어, 자그마치 6년 5개월여, 시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었다가 마침내 빛을 보게 된, 네팔인 ‘찬드라 구릉(44,여) 사건’ 도 우리 사회의 난폭성과 야만적 인종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민족에 대해서 굴종적 사대주의가 아니면, 멸시와 학대밖에 선택할 줄 모르는 ‘못난 한국인’들이 저지른 이번 사건에 대해 같은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깊은 수치감과 함께 자성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는 기치로 모인 환경단체 풀꽃세상을위한모임은 우리 시대의 환경문제가 무엇보다도, 1차적 자연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 제도와 체제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찬드라 구릉 사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 그의 퇴원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탠 바 있습니다. 찬드라 구릉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배경에 우리 단체의 회원이 깊숙이 개입했던 것입니다.
..........(중략).................


오늘(4월26일) 6년여 세월 동안 어처구니없는 고통을 겪은 찬드라 구릉과 그의 부친과 오빠, 그리고 찬드라 사건을 세상에 알리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근후 박사님과 네팔인 케이피 등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귀한 시간을 마련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이에 찬드라 퇴원에 일조한 이근후박사님과 케이피 시토우라 등이 모두 <풀꽃세상>의 중요한 일원이라는 데에 작은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풀꽃세상>은 찬드라 구릉의 뒤늦은 퇴원을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지난 6년 5개월 동안 찬드라가 원치 않던 곳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그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한국인으로서의 깊은 부끄러움과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아울러 찬드라가 잃어버린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받을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마음과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찬드라 구릉과 한국에 와 살고 있는 네팔인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사실, 조금 다르고 많이는 같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외국인과 함께 사는 일에 서툴고, 무례하기만 한 미숙한 한국인에 대해 히말라야 같은 큰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불행한 사건으로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워서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운 이웃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00.4.26
풀꽃세상을위한모임 올림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 찬드라와 필자가 가볍게 포옹을 했습니다. 히말라야에 가면 잘 하는 짓이기도 했지만, 찬드라 또한 자신들을 익숙하게 대하는 저를 밝은 얼굴로 안았습니다. 그때 찬드라가 제 귀에 대고 처음으로 한국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놀러 와!”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점심식사였습니다. 이후 풀꽃세상은 비행기삯에 보태라고 10만원의 성금을 케이피를 통해 전달했고, 6월 15일 아버지와 함께 한국을 떠나기 전에 찬드라는 네팔어로 편지 한통을 보내왔습니다.


‘풀꽃세상을위한모임’의 모든 회원들께 인사드립니다. 나마스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본 모임의 회원 두 분, 케이피와 이근후 박사님 덕분에 제가 6년 동안 보낸 병원생활을 청산하고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난 기분을 맛보게 되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병원에 있었던 시간과 퇴원 후의 저에 대해 본 모임에서 한국정부의 잘못됨을 같은 한국인으로서 대신 사과하시고, 격려말씀을 해 주신 따뜻한 마음을 저는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습니다. 모임의 발전과 회원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200. 6. 14
찬드라 구마리 구릉



찬드라는 그렇게 한국을 떠났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찬드라의 마음속에 한국은 어떻게 각인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못해 두렵습니다.

“내게 일어난 불행은 모두 내가 못 배워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병원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꿈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라는 찬드라의 또렷또렷한 말에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그가 그 긴 시간 동안 갇혀 있으면서도 ‘진짜 정신질환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마음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의 힘과 그 힘의 실현을 히말라야의 마흔여섯 살 된 미혼 네팔여성, 찬드라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다시 자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떠났습니다.


찬드라가 떠난 뒤, 이석태 변호사는 소송대리인으로서 2000년 8월 31일, ‘대한민국 법률상 대표자 법무부장관 김정길’ 과 청량리 정신병원 장동산‘을 피고로 ’네팔인 여성 찬드라 꾸마리 구릉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습니다. 청구액은 6년 4개월 동안 노동을 했더라면 원고가 임금으로 벌었을 돈과 이자 53,313,810원과 위자료 5천만원을 합쳐 103,313,810원입니다.
이후, 2002년 2월말 현재 총 12~13회에 걸친 재판이 열리고 있는 중입니다.(가장 최근의 재판은 이 원고마감일 이후인 2월 28일로서 재판결과의 예측은 불가능함)



딱히 찬드라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2000년 4월 29일 김대중 대통령은 외국인노동자의 인권보호 대책마련을 지시했습니다. 김대통령은 “외국인 노동자 차별대우는 인권국가를 지향하는 우리나라로서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지시를 받은 여당 정책위 의원들은 ‘외국인보호법’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되었지만, 2년이 가까워오는 오늘까지 외국인보호법은 입법안으로 상정되기는커녕 아직도 ‘신중하게 검토’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대한 자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참회의 모금운동을

찬드라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필자에게 말한 “우리나라, 놀러 와!”라는 말은 워낙 히말라야가 필자에게 익숙한 곳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후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난 해 3월, 필자는 풀꽃상을 ‘새만금의 백합’에게 드린 이후, 상 드리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하되, 드린 풀꽃상에 대해서만큼은 책임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새만금살리기 운동에 미력이나마 보태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던 중, 단체의 밀린 일 하나를 마친 뒤, 부러 짬을 내서 단체대표와 회원 두 분과 함께 네팔에 갔습니다. 신설된 작은 환경단체라 격무에 쫓겼던 탓도 있었지만, 찬드라를 그의 고향에서 한번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람 프라사드 구릉은 고향이 ‘간드룽(Ghandrung)’이라고 말했습니다. 간드룽이라면, 안나푸르나 산군(山群)에 속한 산마을로서 그곳을 더러 들락거리던 필자가 알 만한 곳이었습니다. 간드룽은 포카라에서 버스나 택시로 안나푸르나로 올라가는 입구인 나야풀(Naya Pul)에서 내려, 도보로 꼬박 하루 거리에 있었습니다. 3월 28일 저녁 간드룽에 도착했으나 찬드라가 살고 있는 마을은 그 아래 마을인 김체(Kimche)에 있었습니다. 안나푸르나 산군에 흩어져 사는 네팔인들의 살림살이는 ‘걸어다니는 오염덩어리들’인 여행자들이 오르내리는 외길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 길 언저리의 모든 마을에서 찬드라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 산악공동체의 수많은 네팔 산악족들에게 찬드라는 ‘한국에 갔다가 보상받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온 나이 든 처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외국인이든 누구든 편견없이 밝은 웃음으로 대하는 이들이건만, 찬드라 사건으로 인해 한국인에 대해 아주 나쁜 인상이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은 수도인 카트만두, 두 번째 도시인 포카라에서도 희미하게 느꼈지만, 히말라야로 들어오자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필자가 처음 네팔에 갔었던 1992년의 밝은 얼굴이 아니라 시쿤둥한 얼굴, 혹은 적의에 찬 얼굴들이었습니다. 본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상처를 받고 돌아온 사람은 찬드라뿐이 아니어서 어떤 여행자든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필자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01년 3월 29일 아침. 찬드라는 간드룽까지 가는 동안 길에서 만났던 구릉족 젊은이의 전언을 통해 우리가 왔다는 말을 듣고, 고운 분홍색 사리를 입고 산중턱에서 조용히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필자는 네팔이나 인도에서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사리를 숱하게 봤지만, 간드룽 언저리의 산언덕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시골노처녀 찬드라 구릉이 곱게 단장한 분홍색 사리보다 더 아름다운 사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찬드라와 우리가 서로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는 동안, 몇 십명의 구릉족들이 모여서 그 광경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놀러오라 했지? 그래서 왔다!”

필자가 말했고, 찬드라는 “그래 그래, 참 잘 왔다”고 꽃무늬가 새겨져 있던 분홍색 사리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찬드라의 집은 김체에서도 20분여 숨이 턱에 차는 가파른 산길을 더 올라가야 했습니다. 설산 마차푸차레가 바로 코 앞에 보이는 그의 고향마을에서는 한국에서 온 손님소식으로 온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우리는 찬드라에게 광명을 찾아준 특별한 사람들로서 극진하고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찬드라는 사리를 벗어제낀 뒤, 음식을 만들었고, 마당의 닭들과 병아리들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이 이상하다는 듯 때없이 꼬꼬거렸고, 마당에 세워진 룽다(불교도임을 나타내는 깃발)는 다른 때보다 더 요란하게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마을 소년은 피리를 불었고, 일찍이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 찬드라의 아버지 람 프라사드는 행복하고 여유 있는 얼굴로 한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촌장인 그의 형과 함께 맞이했습니다.

평온을 되찾아 행복한 찬드라의 얼굴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 그가 한국에서 겪었던 시간이 떠오르자 다시금 마음 속으로 날카로운 것이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한국정부와 한국인의 무례한 만행에 대해 찬드라와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 정중하게 사과했고, 떠날 때 케이피를 통해 공항에서 들었던 3차 재판결과에 대해 전했습니다. 당시 재판은 사안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판사들도 인간적으로 공분하고 있다고 했으며, 낙관적인 결과를 예측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좋은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고 쉰 뒤, 짧았지만 잊을 수 없는 축제의 시간을 마치고 마을을 떠날 때, 우리는 준비했던 약간의 위로금을 전달했고, 찬드라 구릉은 지난 해처럼 야크털로 직접 만든 네팔 방석 석 장을 우리에게 답례했습니다.


다시 카트만두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에 계시는 금정스님과 그곳 분들의 도움으로 카트만두의 유력 영자신문인 지의 기자를 만나, ‘풀꽃세상이 지향하는 공존의 가치와 그 작은 실천이 이번 기회에 안나푸르나 산군에도 널리 퍼져 이민족과 함께 살기에 서툴고 무례했던 한국인에 대한 나쁜 인상이 조금이라도 희석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나위가 없겠다’라는 말을 전했고, 그 내용은 우리가 네팔을 떠나는 날이었던 4월 21일 아침, ‘찬드라 꾸마리가 상처로부터 치유받다’라는 제목으로 신문의 1면에 제법 크게 실렸습니다. 그즈음, 네팔은 수상의 뇌물사건과 의회 내 공산당과 산중의 마오이스트(Maoist)들의 왕정철폐, 수상하야를 외치는 데모로 연일 어수선한 정국이라 기사가 넘치는 즈음이었는데도, 신문 1면에 우리가 찬드라 구릉을 방문해서 좋은 시간을 나눈 일을 다뤄준 일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네팔 사람들, 네팔의 한국인들이 입을 모았습니다.

기사는 찬드라사건과 우리들의 방문소식을 상세히 전한 뒤, “아이러니컬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찬드라 꾸마리 구릉을 구출해 그녀의 집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낸 이들은 바로 환경단체였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필자는 환경단체가 한 인간을 그토록 모욕적으로 상처를 준 일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일을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환경문제는 곧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대하는 예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는 줄잡아 35만명 가량. 그들은 하루 12시간의 중노동과 폭행과 욕설, 성적 모욕, 산업재해, 임금체불, 의료헤택의 사각지대에서 학대받고 혹은 잘못된 국가간 서열의 질서에 따라 턱없는 동정과 연민어린 멸시의 ‘일상적 차별’ 속에 내던져져 있습니다. ‘일하고 잠자는 시간’밖에 허락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그들은 신문지상에서나 눈에 띄는 별종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찬드라 구릉 사건은 바로 우리 사회가 아직 ‘우리(인간)는 모두 외국인이다’라는 의식에 다다르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는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이즈음, 우리는 찬드라 사건의 재판결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13~14회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재판은 한국법원이 국가배상법 제7조에 의해 네팔 정부로부터 상호보증서를 보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상호보증의 방식은 ‘피해자인 외국인의 국적이 속하는 해당 외국의 대사관 또는 정부에서 유사한 사안이 당해 외국에서 발생할 경우 해당 외국 정부에서 배상한다는 취지의 확인서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한다’고 합니다. 즉, 이 확인서는 네팔정부가 네팔의 한국인에게 국가가 실수를 했을 때에도 배상해 주겠다는 보증서 같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필자가 이 원고를 작성하는 동안, 법원은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상호보증서를 요구했고, 2월 22일 확인결과 네팔로부터 답신이 법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간 상호보증서가 오고간 뒤 내려질 법원의 판결결과는 그것대로 비록 사후책이긴 하지만, 의미 있고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법’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재판과 관계없이 한 인간을 학대한 공동체의 일원인 우리 또한 학대 받은 자와 똑같이 잃어버린 인간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뒤늦게나마 <녹색평론 편집실>과 녹색평론 독자들께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라는 상처받은 ‘이웃’에 대한 참회의 구체적 실천으로서 <풀꽃세상>과 함께 대국민 모금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합니다.




대한민국은 과연 세계속의 대한민국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야기.
나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지는 않았었는지 반성을 해 본다.
그냥 뭐 참지, 좋은 게 좋은 거지, 세상이 변하겠어? 어느덧 익숙해지는 것들이
조금은 슬퍼지는 하루다.


네팔은

N
ever


Ending


Peace

A
nd

L
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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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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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보려고 마악 하다가 웬 뚱딴직 같은 궁금증이 잃어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되었다.
그 궁금증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의 두 아들.
영화에서는 첫째아들이 일본군이 준 캐러멜로 인하여 독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금시초문인라 사실 여부나 확인을 위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런 청천벽력의 날벼락과도 같은 상당히 거시기한 글이 인터넷에 떠 올라 있다. 그 내용은?

안중근 의사 아들 장례식장의 가족들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5.08.01 20:22



1952년 11월 부산 중구 중앙성당에서 치러진 안중근 의사 아들 준생씨의 장례식 모습.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왼쪽에서 네번째)씨의 실존 모습이 나와 있다. 안 여사 왼쪽으로 안 의사 동생인 안정근 선생의 부인 이정서 여사, 안 여사 오른쪽으로는 준생씨 부인 정옥녀씨와 아들 안웅호(미국거주.의사)씨, 안춘생(전 독립기념관장)씨의 모습이 보이고 맨 오른쪽이 안 여사의 외아들 권헌씨이다. /지방부 기사참조 /국제신문 제공 2005.8.1 (부산=연합뉴스)
1874 일본 오이타 현[大分縣]~1955.
일본의 군인·정치가.
미나미 지로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을 지내면서 일본말 사용, 창씨개명 등 조선민족문화말살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관동도독부 참모를 거쳐서 1919년 소장이 되었다. 이어 중국파견군사령관·기병감·육군참모차장 등을 역임했다. 1929년 대장으로 승진해 조선군사령관이 되었다. 1931년 육군대신을 거쳐 1934년 관동군사령관이 되었다. 1936년 2·26사건의 책임을 지고 군에서 제대하고, 8월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국민총력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해 한국민들을 기만적인 황민의식하에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민족의식의 말살과 황민화를 꾀했다. 또한 모든 행사에 앞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제창을 강요했다. 이를 기반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으며, 국민징용법에 따라 많은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다. 한편 '선만일여'(鮮滿一如)란 표어 아래 만주의 관동군과 경제·문화·치안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1945년 종전 후 전범으로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받고 복역중, 1954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죽었다.

 ‘안중근 유해’ 찾아라!

▲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의 안 의사 초상.
지난 1월 4~5일 주간조선 취재팀은 경기도 포천의 천주교 공원묘지 세 곳을 헤맸다.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아들 안준생(安俊生)의 묘지가 포천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첫날 두 곳을 거쳐 이동교리의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도착했지만 관리소장과 전화연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져 현장을 확인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다시 현장을 찾기로 했는데, 박명춘 관리소장은 “오전에 선약이 있다”면서 안준생의 묘소 약도를 그려 관리소장실 현관 문에 붙여놓겠다고 했다. 취재팀은 관리소장이 친필로 그린 1549호(안준생 묘 번호) 약도만을 들고 산을 오르내린 지 1시간30분 만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준생의 묘는 산마루 바로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봉분 왼편에 ‘순흥안공준생지묘(順興安公俊生之墓)’라는 비석이 서 있고, 봉분 오른편에는 ‘동래정씨옥녀지묘(東萊鄭氏玉女之墓)’의 비석이 있었다. 정옥녀는 안준생의 부인, 즉 안중근 의사의 며느리다. 정씨는 1991년 사망해 이곳에 합장되었다.

안준생 선생의 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써 있었다.

‘…부친(안중근)은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주하였다. 1907년 봄에 선생의 태중(胎中) 6개월 때에 부친은 29세의 청년으로 뜻한 바 있어 노령(露領) 해참위(海參威)로 망명의 길을 떠난 후 그해 음력 8월 13일에 선생은 진남포 용정동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10월 26일에 부친은 정의대도(正義大道)에 입각하여 하얼빈 역두에서 침략 원흉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각국 대표들과 만인이 둘러싼 가운데서 연격(連擊)사살하여 당시 세계인들로부터 코리아가 아직 살아 있었다는 찬사를 받았고 천추(千秋)에 빛나는 민족정기의 일대 표상이 되었다. 이는 선생 3세 때의 일로….

6ㆍ25 전쟁 중인 1951년 1월에 부산으로 피란 중 선생은 병을 얻어 정말(丁抹ㆍ덴마크의 음역어) 병원선에 입원 치료타가 1952년 11월 18일 45세를 일기로 병원선에서 별세하였다. 부산시 초량 4동 뒷산에 안장하였다가 1971년 5월 12일 이장하였다.’

▲ 뤼순형무소에서 두 동생(정근과 공근·왼쪽 끝)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안중근(오른쪽).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중국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 직후 두 동생(정근, 공근)은 형님의 유해를 요구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거부한 채 시신을 감옥 뒤편의 감옥묘지에 묻었다. 이후 안중근의 동생 정근은 유가족 일가를 이끌고 북만주로 망명한다.<주간조선 1818호 ‘안중근 동생 안정근 스토리’ 참조> 이후 세 살배기 준생은 일제를 피해 삼촌을 따라 러시아, 상하이, 홍콩 등을 거치며 유랑생활을 한다. 안중근은 슬하에 분도, 준생, 현생 2남1녀를 두었으나 장남 분도는 12세에 러시아에서 죽었다. 준생은 상하이서 살다가 1948년 상하이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홍콩으로 피했다가 6ㆍ25 전쟁 중 가족을 이끌고 부산에 온다. 안준생ㆍ정옥녀 부부는 1남2녀(웅호, 선호, 연호)와 함께 부산에서 잠시 피란살이를 한다.

정옥녀 여사가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오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50년대 후반. 외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정옥녀 여사가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87년. 한국 생활 중 간암 선고를 받고 보훈병원에서 투병하다 1991년에 사망했다. 외아들 웅호씨는 현재도 미국에서 의사로 있다.

1948년 김구 선생도 공동발굴 제안

안중근 의사 유가족이 지금 관심을 끌고 있는 까닭은 정부에서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22일 중국 베이징에서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협력해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면서 “중국도 이 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지난 1월 3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남북한 공동발굴을 ‘광복 60주년 남북공동사업’으로 책정하고 당국간 대화가 재개되는 대로 북한에 제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은 또 “남북이 합의한 뒤 중국에 요청하면 중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장관의 언급처럼 남북한이 공동으로 요청하고 중국이 협력하면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발굴된 유해를 남과 북 어디에 안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 안 의사 장손 안웅호 박사가 1984년8월 미국에서 작성한 '유해 봉환' 동의서(왼쪽).

안중근은 순국 직전 감옥에 면회온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저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동생 안정근이 광복 이후 부인(이정서)을 먼저 한국에 보내놓고 자신은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에 남은 까닭은 형님의 유해를 모시고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안정근은 장개석과 접촉하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뤼순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바람에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안정근은 뇌암이 악화되어 1949년 3월 사망한다. 아들 안준생 선생 역시 상하이에서 부친의 유해를 봉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만다.

안중근 의사 유해 봉환 문제를 놓고 남북간의 접촉도 있었다. 1948년 평양을 방문한 김구 선생은 당시 노동당 부위원장이던 김일성에게 공동발굴을 제안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이룬 뒤 본격 추진해보자”고 밝혀 이를 사실상 거부했다.

동생 정근과 아들 준생의 사망으로 유가족 차원의 노력은 더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부 차원에서도 중국과 국교가 없는 상태여서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김영광씨. 안중근숭모회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김씨는 1979년 10대 국회의원이 되고서부터 안 의사 유해 봉환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김씨는 11대 의원이던 1982년 8월, 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ㆍ여당의 비공식 사절로 방한한 자민당의 미쓰즈카ㆍ모리 의원을 안중근 의사 동상에 참배토록 한 인물.

김씨는 1984년 3월, ‘안중근 의사 유해 환국봉안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이 위원회에는 당시 한국을 움직이는 각계의 핵심적 인물이 대거 참여한다. 그 면면을 보면, 고정훈 신정사회당 총재,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김수환 추기경, 김연준 국제인권한국연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홍렬 숙명여대 총장, 민관식 아세아정책연구소 원장, 박영준 독립유공자협회 부회장,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백두진 전 국회의장, 서영훈 흥사단 이사장, 송지영 KBS 이사장, 안진생 안 의사 조카ㆍ전 미얀마 대사, 윤치영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이병주 작가, 조영식 경희대 이사장, 조향록 목사, 최석채 대구매일신문 명예회장(가나다 순) 등 40여명이었다. 김씨는 또 1984년 7월 안 의사 초상을 화폐도안에 채택하자는 건의문을 국무총리에게 제출하였다.(김씨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정권이 나올 때마다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여사, 아들 준생씨와 딸 현생씨.(1908년 찍은 것으로 추정)
김씨는 국내에 남아 있는 안 의사 유가족을 찾아가 유해발굴 동의서를 받기로 했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진생 전 미얀마 대사로부터 동의서를 받았으나, 5촌 조카로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안춘생 전 국회의원에게서는 동의서를 받지 못했다. 김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안 의사의 장손 안웅호(安雄浩) 박사를 만나기 위해 1984년 8월 미국으로 날아가 유해발굴 동의서에 서명해줄 것을 설득했다. 안 박사는 얼마 뒤 본인이 직접 작성한 영문 동의서(‘Letter of Consent’)와 위임장을 김씨에게 보내왔다. 이후 장손인 안 박사와 김씨의 유해 봉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안 박사와 김영광 위원장은 공동명의로 1984년 9월 중국의 자오쯔양 총리에게 유해발굴에 협조해달라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의 탄원서를 덩샤오핑, 장쩌민 주석에게도 보냈다.

한편 김씨는 뤼순에서 안 의사 묘지를 확인한 유일한 목격자인 신현만씨를 찾아냈다. 김씨는 신씨로부터 자세한 증언을 들었고 그와 함께 포천 안준생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신현만씨는 1944년 당시 다롄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뤼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뤼순형무소 뒤 야산 공동묘지에서 안 의사의 묘를 발견했다. 그는 이후 6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 각각 한 번씩 안 의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신씨의 증언에 따르면 안 의사의 묘비는 각목으로 되어 있었으며 흰색 페인트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安重’ 두 글자만 희미하게 보였으며 ‘根’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당국도 안중근 의사 유해에 관심

김영광씨는 신현만씨에게 당시 뤼순형무소장의 딸이었던 이마이 후사코 여사(당시 87세로 도쿄 거주)로부터 입수한 뤼순형무소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었다. 신씨는 묘소가 있는 장소로 형무소 뒷산 203고지 등대와 정반대쪽에 있는 능선을 가리켰는데, 이것은 이마이 후사코 여사의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 경기도 포천 이동교리 혜화동천주교 묘지에 있는 안준생·정옥녀 묘.

 

김씨가 동분서주하며 유해 봉환을 위해 뛰고 있는 가운데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안 의사 유해 환국을 추진해 신축 독립기념관에 봉안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보도가 있자 안 의사 유해와 관련된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이 처음으로 나왔다. 로동신문 1984년 9월 4일자는 ‘친일주구의 정체는 감출 수 없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안 의사 유해의 연고권을 주장했다. 로동신문은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태생이며 북반부에는 그의 친척들이 있다. 그가 반일 계몽운동을 한 기본 활동 무대는 황해도와 평안도였으며 의병투쟁을 벌인 곳도 함경도 북부 지방이었다”고 밝혔다. ‘북반부의 친척들’이란 안 의사의 막내동생 안공근과 그의 자손이 중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해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북한 당국도 간헐적으로 안 의사의 유해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안 의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해 중국 인민TV에 방송했고, 2004년 봄에는 김영남이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고위층에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안 의사를 보는 북한 정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하는 쪽도 있다. 북한 공식기관이 편찬한 일제하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은 안 의사에 대해 “봉건지주의 아들로 농민을 천대·멸시하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홀로 싸웠다”고 지적하면서 “탁월한 지도자(김일성)의 영도를 받지 않고는 혁명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일깨운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당국의 이런 시각은 북한이 제작한 영화 ‘안중근 의사’의 끝부분에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수령절대주의를 강조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석한다. 안 의사의 항일운동은 독립운동 세력이 좌우로 갈라지기 전에 벌어진 일이어서 남북한 모두 그를 숭배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1984년부터 본격화된 김영광씨의 유해 봉환 노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는 한·중 국교정상화 이전에 무려 국내외 인사 47명을 중국에 현지 조사를 부탁했을 만큼 정성을 기울였다. 국교정상화 이후 김씨가 유해 봉환 문제로 중국을 방문한 게 30여회에 달하고, 이 중 뤼순과 다롄에 간 것만 일곱 번이나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사재를 1억9000만원이나 썼다고 한다. 그는 성형외과 의사인 부인으로부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렇게 돈과 시간을 쓰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금강산 운운은 말도 안되는 얘기”

김씨가 안 의사 유해 봉환에 정성을 기울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1947년 여름, 당시 수원농고 학생이었던 그는 학교에서 광복 2주년 기념으로 올린 연극 ‘의사 안중근’에서 안중근 역을 맡게 되었다. 주인공 배역 때문에 정인보의 ‘의사 안중근 전기’를 비롯해 안중근 관련 자료를 읽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인생관을 바꿔놓았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거의 배우지 못했던 나에게 안 의사의 일생은 경이롭고 신비스럽기만 했다. 일본 근대역사상 최대의 인물이라고 배웠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논지를 펼쳤던 안 의사의 기개를 읽고서,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나는 투쟁을 했던 선열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역만리에서 오직 신념 하나로 의롭게 죽은, 한 고독한 영웅의 생애는 그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식민주의적 의식의 찌꺼기를 철저히 세척시켜주었다.”

김씨 외에 안중근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는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들 수 있다. 최 원장은 2004년 가을 이세기 전 국회의원, 김영호 전 산자부 장관과 함께 뤼순전시관(옛 뤼순감옥)에 다녀왔고, 이때 알게 된 사실을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것이 정 장관이 지난해 중국에서 안 의사 유해 남북 공동발굴 문제를 언급한 배경이 되었다.

▲ 1984년8월, 김영광 의원(오른쪽 끝)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정옥녀 여사와 안웅호 박사를 만나고 있다.
김씨는 “안 의사 유해 봉환은 국가대사이고 개인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국가권력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먼저 남북한과 중국 정부, 그리고 개인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공개한 뒤에 이 정보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면서 “분석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발굴해 나온 유골을 DNA 확인작업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후손으로서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이 중요하지, 그 유해가 남과 북, 어디로 가느냐는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정동영 장관 역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해를 찾으면 그것은 민족의 경사이며 어디에 안장할 것인지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북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 1991년, 정옥녀 여사의 장례식에서. 왼쪽부터 김영광씨, 상주 안웅호 박사, 고 이승만 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내외.
중앙일보는 1월 3일자에서 “일각에선 남북 교류협력의 상징 지역인 금강산에 안장하자는 주장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김영광씨는 “금강산 운운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로 통하는 B교수 역시 “어이 없는 얘기”라고 했다.

법적으로 보면 망자의 유해도 소유권의 대상이라는 게 다수의견이다. 그 귀속자는 상속인, 상주, 제사 주재자 또는 호주 승계인 등이다. 법률사무소 나무의 양웅 변호사는 “유해에 대한 소유권이든 관습상의 관리권이든 그 권리가 그 후손에게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고 해석한다. 양 변호사는 “설사 안 의사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정서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정서를 안 의사 후손의 의견보다 우선시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강산 운운’은 유가족의 의사를 무시한 발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안 의사의 질부(姪婦)인 박태정 여사는 현재 서울 창동에 살고 있다. 박태정 여사는 유해를 찾게 되면 어디에 안장할 것이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큰아버님 고향이 황해도 신천이지만 준생 아주버님과 옥녀 형님이 생전에 한국에 살기를 원했고 아버님도 형님의 유해를 한국에 모셔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있는 웅호가 큰아버님의 유해가 한국에 오는 것을 바라고 있지요.”



안중근의사의 저격사건을 히틀러 치하의 본 회퍼 목사님과 견주며 정당방위론에 가까운 신학을 펴며 안중근 의사를 변호하는 교회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러나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의 고위 성직자 가야파가 예수 하나를 로마에 넘겨주면 유대민족의 안전을 보장받으리라는 논리를 펼치며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이토 히로부미도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나의 생명으로 죽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70세의 노인으로 저격 당시 30세인 안중근에게는 아버지의 연배이다. 이토는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을 하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간 집에 받아들여져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가난한 시절, 그에게 밥을 넉넉히 주었던 어느 하녀를 잊지 못하고 끝내 그를 찾아 보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원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지방의 토호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황해도 관찰사는 동학도들이 해주감영을 침탈한 것을 안태훈에게 알려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태훈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도들을 소탕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학도들이 사용하던 정부미를 빼앗아 안태훈의 민병에게 먹인 것뿐인데, 동학란이 가라앉은 후, 대한제국 정부 관료들이 안태훈에게 정부미 일천 포를 내놓으라는 협박을 해왔다. 그러자 그는 천주교의 신부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이때의 만남으로 신자로 거듭나게 된 사람들이다.


마지막 양심의 총탄 한 발


1909년 10월 25일 밤, 하얼빈의 어느 외진 방에서 7개의 총알에 십자 표시를 하던 안중근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다음날 이토와 수행원들에게 6발을 발사하고 한방은 남겨둔 이유가 무언지 헤아려 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죽어 마땅(?)한 벌레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그를 끝내 시베리아 유형지를 자청하게 만들고 거기서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른 생명을 해할 자격이 없음을 자각한다. 어느 산문에선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식인이란 자신의 이마에 총을 겨눈 사람들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여명의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시대만큼의 어둠을 소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안중근 토마의 생애는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늘 외세의 욕망 앞에 벌거숭이로 온갖 고역을 다 맛보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낯선 타지, 도쿄에서 소설가로 일어서보려다 실패하곤 돈이 떨어져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옷을 저당 잡히고 빌려온 돈 중에서 덜어내어 하얀 목련과 꽃병을 샀다고 한다.


나는 안중근 의사가 남겨둔 십자 표시의 총탄 한 발을 하느님 앞에 선 자의 피 같은 양심으로 읽는다. 가당치 않은 순간에 사보는 한 송이 목련처럼 자신의 이마를 겨누는 양심의 총탄 한 발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 아닐까.

그 분이 목숨을 바쳤던 대한민국은 물질만능주의에 나락에 떨어져
과거의 기억을 잊은체 오직 현재만을, 또는 돈만이 모든 악을
구원할 것만 같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 돈 많아져서 행복해?
안중근 의사는 잘 계실까?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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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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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찬란한 술내음이 난무하는 포복졸도극.
글로발 로케이션에 빛나는 액션블락버스타.
영화 여기저기에 묻어나는 지난영화의 흔적들은 전작들과 비교를 하게 만든다.
가볍게 웃어넘겨버릴 수많은 없는 영화라고나 할까? ㅎㅎ

아쉽게 흥행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은 거 같지만 이런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도 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류승완감독같은 사람도 있다.
참 다양한 감독들이 있어서 좋은 거 같다. 결국 관객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폭이 커지니 말이다. 아쉽게도 그 것에 주어지는 몫이 감독들에게도 다양한 장르를
제작할 수 있게끔 힘을 줄 수있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결국 몫이 작아질텐데,

박시연이 사랑스럽게 나온다. 사실 그 배우에 대해선 아는 것도 없고
잘 몰랐는데 하~~ 어쩌면 배우의 입장에서 이런 맛도 있지 않을까?
자신을 알지못하던 사람들을 하나 하나 알아가게 한다는 것 말이다.


http://www.dachimawalee.com/ 다찌마와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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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픽 썬더
  • 감독 : 벤 스틸러
  • 5일만에 제작비 탕진, 어쩌다 실전이 되어버린 최고의 전쟁영화 현장!
    슈퍼스타 여섯명의 상상초월 리얼작전이 펼쳐진다!
    .. 더보기


    최근작중에 가장 씌레기틱한 영화다.
    끼어맞추기식은 물론이고 유머마저없는 코미디영화.
    미국식 코미디인가 보다 해야 하나?
    웃음은 세계공통코드 아닌가?

    도입부분 10분이 클라이맥스다.
    기대 기대했는데... 실망.

    캐스팅도 감독의 역량이긴하지.
    괜찮은 배우들 나와서 이게 뭔 꼴이람.
    아..탐크루즈도 갈데까지 간 모양이다.

    벤 스틸러의 영화 참... 솔직히 기억에 남을만한 영화가 없다.
    박물관정도? 특수효과 아니면 영화가 살아나지를 않는구나.

    연기만 해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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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에르네스토 게바라에서는 이때 이미 체 게바라였는지 모르겠다. 남미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 가 체험한 것은 피폐한 민중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모습은 달라도 그런 모습은 지금의 한국에서도 투영되는지 모르겠다. 어떤 시대든 체를 애타게 찾지 않을까?  분출되지 못하는 다수 인간 본능 그 이상과 자유와 소수의 이기적인 탐욕은 항상 투쟁하니 말이다. 모습만 다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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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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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갑자기 헷갈려지기 시작한다.
영화와 실제 인생의 차이는 무엇일까?

소지섭-그는 깡패다. 뭐 조폭이라거나 건달이든 뭐 상관없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나오듯이 악의적인 내용은 없어지고 그냥 멋있어 보일 만한
그런 내용만 보여진다.

마치 오랜 옛날 영화의 법칙중 하나였던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 뭐 이런 공식과도 같이 충분히 소지섭을 배려한 것인지 모르나 영화와 실제와의 간극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배우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소지섭 멋지게 나왔다. 좀 식상할 것 도 같다.
강지환은 참 인간적인 매력은 물론 스타로서의 매력또한 크다.
이 영화뿐 아니라 요즘 관심이 가는 배우.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하정우와 더불어 보물같은 배우라고나 할까?
대중성못지 않게 영화판에 노는 물고기라고나 할까.
이런 배우 흔치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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