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태 고문 별세…민주화 운동의 큰 별이 지다

-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던 김근태 고문의 명복을 빌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침묵은 동조다
김근태을 아는 어떤이가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물고문 받던 날 나는
명동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모토롤라전자 파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던 날에는
휴대전화를 샀다

그가 고문 후유증으로 딸 혼례에 참석 못하는 날
이근안은 고문은 예술이라고 했다

이 밤 김근태는
마지막 고문을 당하고 있다
고문 기구 위에서 술에 취한 자들을
어제도 나는 보았다
녹슨 고문 기구를 녹여
훈장으로 팔아먹던 자들은 그를 외면했다

침묵으로 동조하던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그를 고문하고 있다.



- 위의 시는 어제밤 트위터에 올라왔던 어떤이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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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5시31분에 타계…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5시31분께 별세했다. 향년 64세.

김 고문은 유족과 민주당 이인영 전 최고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다. 발인 시간과 장지는 이날 오전 중 결정될 예정이다.

김고문은 지난 11월 말 서울대병원에 뇌정맥혈전증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이틀전부터 폐와 신장, 간 등 장기의 기능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중태에 빠졌다.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김 고문은 전날 밤 의사들이 기계장치를 이용해 강제로 호흡을 유지시키고 있을 정도로 위중했었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 고문은 1947년 2월14일 경기 부천에서 태어났다.


▲ 학창 시절의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표,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렸다.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됐고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을 역임했다.

▲ 민청련 시절 김근태(오른 쪽은 장영달 전 의원)) ⓒ김근태 미니홈피

전두환 정권이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면서 김 상임고문은 1985년 9월 안기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에게 23일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당했다. 이 때의 고문으로 그는 말과 행동이 어눌해지는 파킨스병을 앓게 됐다.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었지만 민주화를 위한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1988년 복역을 마치고 나온 그는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활동하다 1990년 또 다시 구속됐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고문과도 싸웠다. 김 상임고문과 부인 인재근씨는 남영동 분실 고문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폭로했다. < 뉴욕타임스 > 는 이를 크게 기사화했고 세계의 인권단체들은 한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다. 김 상임고문과 인씨는 이를 통해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했다. 독일의 함부르크자유재단은 김 상임고문을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는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김근태 미니홈피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지다.


30일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서며 재야운동과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10여년 간 수배생활을 할 정도로 재야 운동권의 리더로 통했고, 제도정치권 입문 후에는 두 차례 대선후보 경선에서 대의를 위해 중도하차하는 자기희생적 모습을 보였다.

재야운동권에서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다. 그는 1965년 대학 입학 후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ㆍ대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징집됐다.

그는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됐다. 이 때부터 1979년 10ㆍ26 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하면서 `공소외(外) 김근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판ㆍ검사들이 법정에서 체포하지 못한 그를 호칭할 때 `공소외 김근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이 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

김 고문은 고문을 받은 시기인 초가을만 되면 매년 한 달 가량 몸살을 앓았다. 말도 어눌해지고 몸동작도 둔해졌다. 고문 후유증이 파킨슨병으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그 뱀도두꺼비 독에 쏘여 죽고 이후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하듯 자신에 대한 탄압을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1987년 악몽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미국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씨와 공동 수상했다. 김 고문은 자신을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도 역사적 용서를 했다.



▲1987년 열린 김근태 케네디인권상 수상기념 구속자석방 촉구대회 모습. 문익환 목사와 함께

김근태씨의 아내 인재근씨(오른쪽)가 앉아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김 고문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투옥생활을 했다.

김 고문은 1994년 제도권정치로 눈을 돌렸다. 그는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10월 에드워드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다. 원칙론을 강조하면서도 온화하고 신뢰감을 주는 성품 탓에 그는 신사다운 국회의원을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 7년 연속 뽑혔고 그 중 4번을 대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로의 개혁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며 남긴 말이다. 그 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은 죽는다"고도 했다. 두 마디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지난 2002년 3월 24일 김근태 의원과 부인 인재근씨가 국회 의원동산에서 열린 팬클럽 'GT 클럽 희망'

후원모임에 참석해 팬들로부터 노란색 프리지아 꽃다발을 선물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권우성-

'긴급조치 세대'로 386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 그는 현실정치에서 만년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정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김근태는 1995년 2월 수평적 정권교체 실현을 목표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합류하면서 정치를 시작한 이래 1996년 15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서울 도봉갑에서 내리 3선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동교동계 등 구여권 주류세력에 밀려 `재야의 리더'라는 무게에 걸맞은 당직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재야 및 486 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GT계'라는 세를 형성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입각 경험을 쌓았고,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스스로 독배를 들겠다"며 당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후반기로 갈수록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을 되살리기에는 버거웠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때 그는 또다시 기득권을 초개처럼 버렸다.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 고문은 2008년 18대 총선 당시 도봉갑에 출마했지만 서울을 휩쓴 뉴타운 광풍에 밀려 국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지난 11월 '뇌정맥 혈전증'으로 병원을 찾기 전까지 분주히 거리에서 뛰며 '민주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2008년 미국 쇠고기 완전수입 반대 촛불집회, YTN 사수 촛불집회가 열렸을 땐 촛불을 들고 나섰다. 올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위한 3차 희망버스를 타고 직접 부산에 내려갔다.

그는 또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야권통합을 위해 각계 인사들도 만나고 있었다. 내년 총ㆍ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고문은 지난달말 건강이 악화해 끝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한 측근은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민주진보 대연합을 이루겠다는 의지까지 밝혔다"고 전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지난 29일 면회를 마친 뒤 "3달 전 김 상임고문과 '통합' 문제를 두고 통화를 나눴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 이사장은 최근 다시 건강이 악화돼 한반도재단이 지난 8일 이례적으로 짤막한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정밀진단 결과 뇌정맥에서 혈전이 발견됐고 입원 치료 중 갑자기 출혈이 발생해 위급한 고비를 넘겼다. 당시 김 이사장은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 병민(29)씨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시민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글...


"2012년을 점령하라"

2011년 12월 29일 그가 떠나기 전, 지난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 역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다. 내년 총선을 준비하던 김 상임고문은 지난 10월 자신의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그가 세상에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됐다.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

...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확산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를 인용한 이 글을 통해 시민들의 정치참여 및 정당과의 연계를 강조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월가 점령 시위에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라며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드디어 미국인들이 기존 정치를 불신하고 스스로 정치를 시작했다"며 "너무나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흔한 말로 정치권의 위기, 야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라고 하지만 비난은 비난일 뿐 비난이 승리는 아니다"며 "미국의 티파티나 한국의 뉴라이트의 공통점은 적극적 참여와 정당과의 연계다. 비호감일 지 모르지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며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운 좋게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며 시민 정치 참여를 호소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고 김근태 선생님

추모서명-->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html?id=117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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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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