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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석주 의사 의거 83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나석주 의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은데, 나석주 의사는 1926년 12월 28일 일본의 경제침략 본거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중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장렬하게 자결하신 분입니다.
 
나석주 의사는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여 1913년 간도로 이주했고, 간도에 있는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은 후 귀국하여 국내에 있는 부자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송금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항일무장 저항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0년 김구, 김창숙 선생 등의 밀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후 남대문옆 중국인 여관에 유서를 써놓고 을지로에서 작전을 개시, 일제 경제침략의 본산인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후 일본 경찰들과 시가전을 벌이다 자결, 장렬하게 순국하신 민족 정기의 화신입니다.
 
나석주 의사는 죽음을 맞는 최후의 순간에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쉬지말고 분투하라”고 절규했다고 전해집니다.

비록 나석주 의사의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진 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나석주 의사의 애국 애족정신만은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5천여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던진 훌륭한 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892(고종 29)~1926.
독립운동가.
나석주 /나석주
의열단원으로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다(→ 동척투탄의거). 아버지는 병헌(秉憲)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재령 명신학교(明信學校)에서 2년간 공부한 뒤 농사를 짓다가, 1913년 간도로 이주했다. 간도 뤄쯔거우[羅子溝]의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상업을 하며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석방된 뒤 정미업을 하며 비밀항일결사를 조직,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 숙청공작에 크게 활약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뒤 임시정부 경무국 경비원으로 일했으며, 1923년 허난 성[河南省]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1925년 상하이로 돌아와 1926년 유자명(柳子明)의 소개로 톈진[天津]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6년 6월 톈진에 체류중이던 유림대표 김창숙(金昌淑)과 모의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 들어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자 총격전을 벌인 끝에 다바타[田畑唯次] 등을 사살, 탄환이 떨어지자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나는 그 처럼 할 수 없기에 이 글이라도 올리는 바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지극히도 이기적인 사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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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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