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이면 들려오는 닐의 마이크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내가 속한 목장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다시 잠에 빠지고는 했다. 가끔 깊은 잠에 빠져 나오지 않으면 닐이 직접 와서 깨우고 나가는 데 그래도 안 나오면 다른 대기 인력으로 대체 하고는 했다. 한 번 대체되면 그 날부터 그 사람의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못 나간 사람은 다시 일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처음 일거리가 없을 무렵 혹시 그런 일이 있을까 해서 3일을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일이 없어 그냥 기다리다 들어오고 말았다. 그런 경우 외에 농장에서 직접 해고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 또한 두 번째 농장에서 그렇게 당했으니 말이다. Sam의 농장에서 토마토를 딸 무렵이었다. 토마토를 따는 기계에 앉아서 기계가 가는 대로 손놀림을 빨리 해서
익었다 싶은 것은 무조건 따는 것이었다. 너무 안 익은 것을 따도 너무 익은 것을 따도 안 되며 또 속도가 너무 늦어도 안 된다. 기계속도에 맞추어서 그리고 자기의 앞에 앉은 사람과 보조를 잘 맞추어 따야 한다.또 그 뒤에서는 기계에 앉아 따던 사람이 미처 못 딴 걸 따라다니며 따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처음 Sam의 농장에서 그 일을 했다. 3일 뒤부터 기계에 앉아 토마토를 따기 시작했는데 쉴 틈이 없고 허리를 계속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고 손은 토마토를 찾아서 움직이는데 편해 보일 듯하던 그 일이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 일 주일쯤 되던 언젠가였다. Sam은 기계에 앉아 정신없던 내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잠깐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어떤 말도 없이 그냥 집에 가라는 것이다. 그 것도 웃으면서,푸~ 나도 웃으면서 그 동안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느 농장을 가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샘의 농장에서 과일을 따면서도 앞에 앉은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면서 했는데 그 것이 눈에 걸린 것 같았다. 말하러 이 곳에 왔냐는 경고를 들었으니 말이다. 샘의 농장은 평판이 좋지 않은 곳이었고 다른 여행객들도 그 곳으로 일을 나가게 되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쌕을 당한 후 그 곳에서 다시 백팩으로 갈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 했다. 백팩에서 그 곳까지 벤으로 한 시간 이상을 달려온 거리이니 말이다. 결국 히치 하이크를 처음으로 하게 된다.

호주에선 히치 하이크가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다. 하지만 워낙 여행객이 많은지라 묵인하고 있지만(실제로 투어 에이전시에서 나누어주던 여러 책에선 히치하이크가 호주에선 금지되어 있다고 안내글을 볼 수 있다.), 쌕 당한 이후 히치를 한 이후 번디에서 시내를 나갈 때는 히치를 많이 이용했다.   신호등에 멈춰 서있는 차를 보면 그 옆으로 다가가 좀 태워달라고 때 쓰는? 내 모습이 지애는 재미있어 보였나보다 지애는 방 구조가 특이해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내 방으로 들어가면 그 곳에 또 문이 있는 작은 방에 다른 여자 여행객들과 방을 쓰고 있었다. 더블침대가 2개 있는 곳! 여자들이 쓰는 방이라 어느 정도는 깨끗하지만 칙칙함은 남아 있었다.번디에 온지 얼마 안 되었던 지애는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과거의 역사를 물었을 때 그 녀가 우리 한국의 초등학생 정도의 역사지식 (한,일관계에 있어서의)정도밖에 없음에 자못 놀랐다.. 하지만 그 건 다른 일본인에게도 물었을 때 그 건 마찬가지였다.
일본 위정자들이 그들의 과거를 밝히지 않으니 젊은 그들이 우리가 과거에, 그리고 현재의 일본에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신세대역시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하지는 않은 지 반성해 볼 일이다.지애는 일본의 현대 젊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젊은 여성 자기 주장이 있었고 그 만큼 개성도 뚜렷한 아가씨였다. 시내에 놀러가 무엇을 먹어도 그 녀는 더치페이를
고집했고 어디 보러가자고 하면 그 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다른 곳으로 혼자서 가곤 하는 아가씨였다. 요즘 일본의 아가씨들이 그런가? 그렇다고 들었다. 그 곳에서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참 잘 어울렸다. 무슨 음식을 하면 같이 나누어 먹었고 또 같이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그 곳에서 만난 일본인들이 좋아서 그런걸까? 아마 그 건 아닐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젊은 가슴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미래에 사는 젊은이들이 미래를 위해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겐 살아야 할 날이 더 많기에.

sack당한 이 중에 smith라는 영국인이 있었다. 영어공부를 코치해주던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풀장을 가기도 하곤 했는데 스미스라는 친구는 나의 영어발음을 무시?또는 바꿔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던 친구였다. 나는 발음을 미국식으로 하려 애썼고 스미쓰는 미국식 영어는 미국밖에 안 쓴다. 유럽에선 전부 영국 영어를 쓰고 있고 이 곳 호주도 영국식 영어를 쓰는데 왜 미국영어를 고집하느냐는 투였다. 어쩔 때는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는데 난 우리나라는 미국영어를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을 해도 여전한 그의 고집.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지. 호주는 영국 영어에 가깝다. 물론 영영사전을 보면 호주 영어 특유의 구분이 있지만 최근에는 미국영어에 가까워지고 있는 편이다. 아니 미국 영어를 많이 쓰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호주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마치 유행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미국영어 특유의 음악같은 운율이 아마 고급스러워 보이는 지도 모른다. 어쩜 전 세계로 뻗어가는 미국의 힘이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지도 모른다.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보여지는 헐리우드의 영영화를 통해, NBA의 농구를 보며 또는 팝송을 들으며 미국의 문화에 익숙해 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스미스는 영어를 많이 도와줬고 그런 일로 티격대곤 했지만 재미있는 친구였다. 휘파람 불면 "삐삐"하고 소리나는 중국제 열쇠보조 장치를 사와 한 밤중 자는 모두를 깨우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느라 한 바탕 부산하게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그는 넉살 좋게 코를 골았고 또 무슨 냄새나라의 왕자같이 그의 몸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정말 그는 씻지를 않았다-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도 결국엔 닐이 하도 일을 주지 않아 다른 곳으로 백팩을 옮겼지만 가끔 놀러와서 닐을 원망하곤 했다. 사람들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이에게 잘 해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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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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