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한국 대중음악 55선
- 맥빠진 주류와 지친 비주류

|||| 박준흠 ||||



이상은 - 공무도하가 한상원 - Seoul, Soul Soul Of Sang 80년대에도 댄스가수들은 있었고, 이들이 역시 주류 뮤지션들이었고, 물론 '오빠부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때의 뮤지션들은 '가수'라는 본연의 기능성은 최소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전반적인 상황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느낌이다. '엔터테이너로서의 자질'은 메이저 가수가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위하여 개발하는 부수적인 자질이다. 한 번이라도 더 TV(현재의 시스템에서는 가장 '안전한' 홍보 매체)에 출연해서 노래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이다. 그런데 지금의 주류 씬에서는 '가수들'은 보이지 않고, '엔터테이너들'만 바글거린다. 그리고 이제는 "시장에 내 놓은 상품이 엔터테이너이니까 가수를 기대하지 말라"고 '가수 무늬만 있는 자들'의 실질적인 꼰대(음반기획자)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가수의 음반은 딴 데 가서 알아보라니? 이들이 이런 말을 이토록 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의 기반은 그리도 확고하게 자리잡혔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문화적인 향유권'을 박탈당하고 살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델리 스파이스 - Deli SpiceVARIOUS ARTISTS  - A Tribute To 신중현 90년대에 들어와 우리 대중음악산업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본격적으로 '마케팅기법'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뮤지션은 기업의 '상품'으로서 관리되기 시작했고, 공산품을 만들 때와 같이 분업화된 시스템이 운영되었다. 이런 와중에 음악생산자(또는 표절자) '집단'에서 뮤지션들은 점점 더 '얼굴 마담'으로 전락해 갔고, 댄스 음악 진영에서는 더욱 그런 느낌이다. 이는 홍보와 유통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부 생산자 집단에서는 이미 주체가 뮤지션이 아니라 이들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조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조직은 매체와 결탁해서 천년왕국을 꿈꾸고 있다. 정말로 아뜩한 현실이다.

한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류 음반기획자들과 매체 관련자들 간의 결탁이 공고하다는 점이 아니다. 바로 수용자들 자신과 평론가들이다. 주류 음반기획자들은 어차피 돈 벌려고 무슨 짓이든지 하는 사람들이고(아닌 사람들에게는 죄송!), 상당수의 매체 관련자들은 직장 갈 때 자기집 냉장고에 '직업윤리'를 두고 오는 것을 '관행'쯤으로 여기는 족속들(그들이 바로 90년대 매체에서 회자되던 신인류?)이다.

윤도현밴드 - 2집유앤미 블루 - Cry… Our Wanna Be Nation! 하지만 '가슴속 감정의 응어리들을 분출하는'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철저하게 '짜깁기' 형태로 만들어진 노래들을 즐기는 일반 사람들은 뭔가? 그리고 이를 용인(면죄부를 주는) 내지는 수수방관하는 평론가들은? 주류 씬 대부분의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이 '30대 아저씨, 아줌마'들이고, 그 수용층의 주류가 '10대 소녀들'이라는 점은 너무 황당하지 않나? 30대 아저씨 작사가가 만든 "너는 나의 전부야~ 우리의 만남은~ 어쩌구~"하는 '유치뽕' 가사를 10대 미소년/소녀들이 떼거리로 부르고, 이들 보는(!) 소녀들이 기절하는 광경은 '기절하는 소녀들' 자신들이 생각해도 코미디 아닌가?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총 300단어 안짝에서 만들었을 법한 초등학생 작품 수준의 노래에 뻑이 갈 정도로 저열한 수준이었나? '만남', '사랑', '이별'이 빠진 노래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이 단어들은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3대 요소인가? (만약 그렇다면 제도권 교육 당국자들은 여태까지 헛교육시킨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누누이 들어온 '충효'나 동방예의지국의 그 '예의'는 어디로 가서 씨알머리도 보이지 않나?)

나는 지금 제도권(주류 대중음악판)의 구린내 나는 현상과 작태 그리고 '전망부재'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석에서나 어울리는 얘기이고, 술자리에서 '안주' 기능의 '뒷다마 까기'에서 할 얘기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얘기하는 것도 지쳤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전략이 없는' 말들은 허울 좋은 한담이고, 매체에서 가공해서 쓰기 좋은 '상품적인 가치'만 갖는 맥빠진 얘기들이다. 이는 '전투적 지식인' 무늬를 가진 일부 문화평론가들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여태까지 했던 작태들 아닌가? 그들은 결국 적당한 시기에 이르면 제도권의 하수인이 되던가(그 때까지도 그가 상품적인 가치를 가진다면), 그렇지 않으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리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스트레인저- Sailing Out 서태지와 아이들 - 1집나는 현재 대중음악평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변혁'을 바라는 사람이고, 그 변혁은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된 새로운 질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주류 질서를 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적어도 대중음악판에서) 기존의 매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 매체에서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달콤한 기득권을 절대로 놓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효과적이기는 해도 '현실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기존 매체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가던가 '새로운 질서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시킬 수 있는 역량 있는 평론가와 기자들이 많이 등장해야 하고, 역시 이들을 수용하는 매체가 있어야 한다(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면 주류 질서도 바뀌게 마련이다).

허클베리핀 - 18일의 수요일전자의 경우는 '인디 라디오/TV'가 생겨나면 가능한 방법이고, 후자는 경우는 양식 있는 매체에서 새로운 평론가들을 발굴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현재 얘기되는 '저출력 라디오 방송국'(서울의 경우 2개 구 정도를 커버하는 작은 출력의 방송국)이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대로만 정착된다면 사실 기존의 공중파 라디오는 이들과의 경쟁력에서 상대가 안 된다. 거개의 공중파 라디오의 음악프로그램을 보면 알겠지만 그 집단에 '전문성'을 갖춘 인력이 부재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인터넷 방송국'도 가능성을 가진 매체이다.

'90년대 한국 대중음악 55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말이 길어졌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에서는 '상식적이고 순리적인 질서'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다음에 내가 뽑은 음반 55장은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선정이기는 하지만 90년대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음반들인 것만은 확실하다. 적어도 뮤지션과 엔터테이너를 구분하는 것을 독자들이 허락하다면...

* 이 글은 서브 99년 12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90년대 한국 대중음악 55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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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2O
오늘 나는
(1993 / 로얄레코드)
김준원(v), 박현준(g), 강기영(b), 김민기(d)
2.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1995 / 킹레코드)
3. 안치환
4집
(1995 / 킹레코드)
4. 이상은
공무도하가
(1995 / 폴리그램)
5. 듀스(DEUX)
Force DEUX
(1995 / 월드뮤직)
이현도(v, all inst., prog), 김성재(v)
6. 장필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1997 / 킹레코드)
7. 한영애
불어오라 바람아
(1995 / 디지탈미디어)
8. 서태지와 아이들
4집
(1995 / 반도음반)
서태지(v, prog, k, g, b), 이주노(v), 양현석(v)
9. 김현식
5집
(1990 / 서라벌레코드)
10. VARIOUS ARTISTS
A Tribute To 신중현
(1997 / 서울음반)
11.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
Deli Spice
(1997 / 도레미레코드)
김민규(g, v), 윤준호(b, v), 이승기(k), 오인록(d)
12. 미선이
Drifting
(1998 / 라디오)
조윤석(v, g, b, k), 김정현(d)
13. 김광석
4집
(1994 / 킹레코드)
14. 신촌블루스 3집
(1990 / 서라벌레코드)
엄인호(g, v), 정경화(v), 김미옥(v), 김현식(v), 이은미(v)
15. 강산에
나는 사춘기
(1994 / 킹레코드)
16. 듀스(DEUX)
DEUXISM
(1993 / 지구레코드)
이현도(v, prog), 김성재(v)
17. 이상은
외롭고 웃긴 가게
(1997 / 킹레코드)
18. 봄·여름·가을·겨울
Best Of The Best
(1997 / 동아기획)
김종진(g, v), 전태관(d)
19. 서태지와 아이들
2집
(1993 / 반도음반)
서태지(v, prog, b, g), 이주노(v), 양현석(v)
20. 이상은
이상은
(1992 / 제일)



21. 한상원
Funky Station
(1997 / 디지탈미디어)
22. 유앤미 블루(U&ME BLUE)
Cry… Our Wanna Be Nation!
(1996 / 송)
방준석(g, b, k, seq, v), 이승열(g, seq, v)
23. 김광석
다시 부르기 1
(1993 / 킹레코드)
24. 윤도현밴드
2집
(1997 / 다음기획)
윤도현(v, g, har), 강호정(k), 유병열(g), 엄태환(g), 박태희(b), 김진원(d)
25. 시나위
5집
(1995 / 워너뮤직)
신대철(g), 손성훈(v), 정한종(b), 신동현(d)
26. 서태지와 아이들
1집
(1992 / 반도음반)
서태지(v, prog, k, g), 이주노(v), 양현석(v)
27.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개, 럭키스타
(1998 / 펌프 / 디지털미디어)
저자(v), 장영규(v, b, g, k, prog)
28. 조동진
5집
(1996 / 킹레코드)
29. 봄·여름·가을·겨울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
(1992 / 서라벌레코드)
김종진(g, v), 전태관(d)
30.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
Welcome To The Delihouse
(1999 / 뮤직디자인)
김민규(g, v, prog), 윤준호(b, v, prog), 양용준(k, prog), 최재혁(d)
31. 박선주
Alphabet Soup
(1995 / LG미디어)
32. 스트레인저(Stranger)
Sailing Out
(1990 / 서라벌레코드)
이승철(v), 임덕규(g, prog), 김동규(k, prog), 박인호(b), 박석민(d)
33. 정태춘
아!대한민국
(1990 / 삶의 문화 / 한국음반)
34. 안치환
Desire
(1997 / 킹레코드)
35. 이현도
D.O Funk featuring Han Sang Won
(1999 / 디지탈미디어)
36. 삐삐 롱 스타킹(Pipi Long Stocking)
원웨이 티켓
(1997 / 동아기획)
박현준(g, prog), 달파란(b, prog), 고구마(v)
37.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18일의 수요일
(1998 / 강아지 문화 예술)
이기용(g, b), 남상아(v, g), 김상우(d)
38. 노이즈가든 (Noizegarden)
Noizegarden
(1996 / 베이)
박건(v), 윤병주(g), 이상문(b), 박경원(d)
39. 정태춘·박은옥
정동진/건너간다
(1998 / 삶의 문화)
40. 아무밴드
이·판·을·사
(1998 / 인디)
이장혁(g, v), 이상훈(b), 서길환(d)



41. 한상원
Seoul, Soul Soul Of Sang
(1993 / 동아기획)
42. 이성우
시간이 흐르고 나면...
(1990 / 서울음반)
43. 동물원
3집
(1990 / 예음)
김창기(g, v), 유준열(g, b, v), 박경찬(g, v)
44. 갱톨릭(Gangtholic)
A.R.I.C
(1998 / 강아지 문화 예술)
김도영(v, k), 임태형(v, k)
45. 99
스케치북
(1998 / 강아지문화예술)
이덕순(g, v), 이한별(테크니컬 어드바이저), 상지훈(d), 이새롬(v), 최소희(b)
46. 언니네 이발관
후일담
(1998 / 석기시대 / 신나라뮤직)
이석원(v, g), 이상문(b), 김태윤(d), 정대욱(g)
47. 이상은
Asian Prescription
(1999 / EMI)
48. 조동익
Movie
(1998 / 하나뮤직)
49. 크래쉬(Crash)
Experimental State Of Fear
(1997 / 서울음반)
안흥찬(v, b), 이성수(g), 하재용(g), 정용욱(d)
50. 신성우
Eight Smles Of Klein
(1993 / 로얄레코드)
51. 김진표
열외
(1997 / 신촌뮤직)
52. 조동익
동경
(1994 / 킹레코드)
53. 이병우
야간비행
(1995 / LG미디어)
54. VARIOUS ARTISTS
겨울노래
(1997 / 하나뮤직)
낯선 사람들, 장필순, 안치환, 더 클래식, 한동준, 함춘호, 박인영, 권혁진, 박용준, 윤영배, 조동진, 조동익
55. 달파란
휘파람 별
(1998 / 펌프 / 도레미레코드)
   



4. 이상은
공무도하가 (1995 / 폴리그램)

88년 '담다디'로 MBC 강변가요제 대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상은은 90년 '사랑할거야'가 수록된 2집을 발표할 즈음에는 '10대 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당시까지 철저히 기획사가 만든 '돈 잘 버는 예쁜 상품'일뿐이었던 이상은은 만약 그녀가 그 때 '중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은 가끔씩 '심야 TV 토크쇼'에 나와서 신변잡기적인 만담이나 늘어놓던가(곁들여서 '원숭이쇼' 같은 장기자랑과 함께), 연예신문의 가쉽란에 빛 바랜 옛 사진과 함께 해당 신문사 지면 메꾸기용으로 '뜬꿈 없는' 얘기들을 내 비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고, 91년 뉴욕 브룩클린의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 조각공부차 도미하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새 출발을 하였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남자 거장'은 있어도 '여자 거장'은 눈 씻고 찾아보기가 힘든 현실을 생각한다면(이상은, 한영애, 장필순 이외에 또 누가 있을까?) 대중음악산업 관계자들은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도 만약 '90년대의 이상은'이 부재했다면 여자 뮤지션들의 평론거리의 반이 없어진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91년 셀프 프로듀스의 3집 앨범 [더딘 하루(Slow Days)]의 발매로부터 관심을 촉발시킨 그녀의 작업은 92년 4집 [Begin]에서 김홍순(프로듀서, 프로그램)과의 힙합 실험, 93년 안진우(프로듀서, 기타)와의 공동 작업으로 발표한 5집 [이상은]에서의 섬세한 기품으로 정점에 달하는 듯 하였다. [이상은]은 당대 가장 섬세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그리고 이를 자신의 음악작업으로 용해시키는 방법을 체득한 뮤지션이 만든 기념비였다. 하지만 [이상은]은 많은 평론가들과 팬들의 추측들을 깨버린 작품이기도 했다. 그 작품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을 것"이란 예상을 바로 다음작인 6집 [공무도하가]에서 여지없이 깨버렸기 때문이다.

[이상은] 이후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팬들과의 교류(팬클럽 'Lee SangEun Busters'가 결성됨)를 통해 그곳의 사람들과의 끈끈한 교감을 얻었고, 하지무 다케다라는 필생의 음악적 동반자(이후 이상은과 하지무 다케다는 '펭귄즈Penguins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앨범의 프로듀싱, 편곡, 세션을 같이 하게된다)를 만났다. 하지무 다케다와의 만남은 이상은에게 표현 영역의 확장을 가능케 했다. 상상 속의 이미지로만 맴돌던 자신의 기질들(보헤미안, 신화 속의 주인공, 새 등)이 비로소 하지무 다케다라는 '통로'를 통해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일원론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 신화 속의 인물로 빗대는 자신('공무도하가'는 고대시가이고 3인의 등장인물이 빗어내는 하나의 콘서트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물을 건너가는 백수광부로 그는 디오니소스의 상징이고, 또 하나는 그런 백수광부를 노래하는 처자로서 오르페우스를 상징한다. 그리고 제3의 인물로 처자의 노래를 듣고 있는 청중이 존재한다. 오르페우스는 백수광부와 청중 사이에서 홀로 노래하는 존재이고, 이상은이 스스로 자신을 지칭하는 '중간자'이다) 그리고 꿈꾸기를 통한 무제한적인 상상력의 발동은 우리에게는 무척 이질감을 주는 작업이었지만, 반대로 여태까지 거개의 뮤지션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무릇 창작자와 비평자 간의 재질을 가르는 기준을 "그가 얼마마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이를 작업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가?"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이상은은 이를 충족시키는 소수의 예술가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자질론을 떠나서 음악과 노래 자체만으로도 살 떨리는 경험을 하게 만들었던 앨범이 [공무도하가]이다. 전설 속의 음률을 이끌어내어서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보헤미안', 'Don't Say That Was Yesterday', '공무도하가', '삼도천', 'Come, The Children Do', 'September Rain Song' 등은 이 음반을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신비로운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 같은 것이 약간 바뀌는 느낌이라든지. 그것은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 중에서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몇 년 전 이야기인데, '공무도하가'를 불렀을 때 '오늘 저희들의 마음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는 어떤 노부부의 편지를 받았다. 그때 너무 기뻤었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공간으로 가게 만들고, 눈에 다른 풍경이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음악은 너무너무 신비한 것 같다"라는 이상은의 고백은 이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0. VARIOUS ARTISTS
A Tribute To 신중현 (1997 / 서울음반)
강산에, 시나위, 윤도현밴드, 이중산, 봄·여름·가을·겨울, 퀘스천스, 이은미, 복숭아, 사랑과 평화, 김광민, 정원영·한상원, 한영애, 김목경, 논 피그

90년대 넘어와서 '가요 재평가'의 일환으로 평론계/매체에서 실행했던 일들 중의 하나가 60년대 - 80년대 뮤지션들의 재평가 작업이었다. 이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 때 신중현, 산울림 등이 대표적인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며, 결국 이들의 '트리뷰트 앨범'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정말로 '제대로' 재평가되었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적어도 나는 "아니올시다"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를 얘기할 때는 첫 번째가 그 사람의 작업 결과물이 되어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생활에 혹여 문제가 있더라도 이는 결정적인 평가에서 논외로 얘기돼야 하는 것이다(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가 않지만). 그런 점에서 볼 때 신중현은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되지가 못했다.

신중현 음악의 정점은 발산하는 에너지로 볼 때는 69년 덩키스(Donkeys) 앨범을 꼽아야하고, 그의 공력으로 볼 때는 80년도 신중현과 뮤직파워 1집을 말해야 한다. 69년 미국에서 히피문화가 정점에 치솟았던 시대에서 젊은이들간의 핵심적인 음악적 소통 매개체(표현수단)였던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당시 '신중현 사운드'는 당대의 트렌드를 자신의 개성으로 흡수한 필생의 작품이었다(덩키스의 '마음'을 들어보도록). 68년 펄 씨스터즈 1집에 실린 '님아'에서 오묘한 느낌의 새로운 작법을 보여준 신중현은 드디어 습작의 시기를 마감하고, 덩키스 앨범으로 마스터가 되었다. 하지만 기존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신중현과 엽전들(74-75), 장현 And The Men(72), 김정미(72) 등의 앨범들은 앞에서 얘기한 음반들에 비해 한 단계 아래의 작품들이고, 퀘션스(70) 같은 경우는 별로 얘기할 거리도 없는 앨범이다. 신중현을 신화로 만드는 일은 신중현 주위의 사람들과 팬들에게는 과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체에서만큼은 객관적으로 다루었어야 한다.

어쨌든 신중현이 대중적으로 붐업되면서 나온 결과물이 이 헌정음반이다. 신중현에게 영향받았다는 많은 뮤지션들이 신중현의 원곡들을 자신의 개성으로 재해석하여 한곡한곡 가다듬어서 불렀다. 특이한 것은(기획이 충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각 뮤지션과 곡의 성향에 따라서 레코딩 엔지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 매우 상식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이 음반에서는 뮤지션, 세션맨들 간의 각축전의 장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참여 엔지니어들(이훈석, 최병철, 김윤성, 노현수, 신대철, 신상철, 고종진, 박홍신, 이용준, 박병준, 조성오, 이우상, 백성호)과 스튜디오들의 특성을 비교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 결과 '미련'을 믹싱한 '80년대 최고의 엔지니어'로 평가를 받았던 최병철의 경우 특히 과감하게 스네어 드럼의 소리를 잡아내는 것을 느끼게 한다(이는 잔재미이고, 팬서비스이다).

강산에의 '바람'(김정미가 72년에 부름)으로 시작하는 이 음반의 압권은 봄.여름.가을.겨울과 한상원이 참여한 '미련'(임아영이 71년에 불렀고, 리메이크곡 후반부에서는 한상원의 '훵키한' 솔로 기타 연주의 진수를 들을 수 있음), 이은미가 부른 '봄비'(덩키스의 이정화가 69년에 불렀고, 리메이크곡에서는 박성식, 샘 리의 연주가 뛰어남), 정원영, 한상원이 참여한 '석양'(장현이 72년에 더 맨에서 부름), 신윤철, 한상원의 연주로 추측되는 '미인'(신중현과 엽전들이 74년에 부름)이다. 일부 수록곡들이 원곡을 능가하는 드문 경우를 보여주는 이 앨범은 "헌정음반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야!"라고 얘기하고 있다.


11.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
Deli Spice (1997 / 도레미레코드)
김민규(g, v), 윤준호(b, v), 이승기(k), 오인록(d)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10월 2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델리 스파이스가 '챠우 챠우(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부를 때 이 곡의 리듬에 맞추어서 모든 관중들의 어깨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연주 상태는 비록 좋지가 않았지만). 이를 보면서 어느덧 이 노래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찬가'가 되었음을 느꼈다(가사는 '찬가'가 아니지만).

이제는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매개체가 '바보' TV('끝말잇기' 수준의 개그와 재탕/삼탕을 반복하는 공주와 왕자만 나오는 연속극-시대 사극도 아닌데-, 그리고 이 모든 유치함의 절정인 018광고-"우정이냐? 사랑이냐? 눌러주세요"- 등등) 하나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타자와의 '소통'은 개개인이 원하더라도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서기가 힘들다(TV는 조작된 현실이지 진짜 상대가 아니다). 아니면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가. 이런 시대에 '챠우 챠우'를 확 터진 공간에서 출렁이는 감정들의 파도와 같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행운이었고, 감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이고, 그럼으로 해서 인식하기는 힘들겠지만 우리사회 구성원들은 대체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다.

노이즈가든의 데뷔 음반(96)과 함께 이 음반은 '새로운 음악 조류'가 시작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준 '역사적인 앨범'이다. 그리고 이들은 넓게 보면 한국 인디 씬의 시작으로 얘기할 수 있다. 썩어빠진 한국 대중음악계의 유일한 희망이 '인디 씬'임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출현은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다. (물론 '아저씨, 아줌마들'이 만든 노래를 '미소년, 소녀들'이 부르는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를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래서 특히 이 음반은 '싱글'로서가 아니라 '앨범'으로서 들어야 되고, 느껴봐야 된다.

지난 이야기지만 노이즈가든과 델리 스파이스는 사실 영국의 오아시스와 블러처럼 다루어졌어야 했다. 적어도 매체에서 글쓰는 사람들이라면 이를 한번쯤은 생각했어야 했다. 인디 씬의 '이슈적인 기사'에만 매달렸지 정작 아티스트를 발굴/평가하고, 아티스트로(!) 키워주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대중음악계 변혁의 욕구'를 느끼는 평론가/기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


22. 유앤미 블루(U&ME BLUE)
Cry… Our Wanna Be Nation! (1996 / 송)
방준석(g, b, k, seq, v), 이승열(g, seq, v)

유앤미블루는 재미교포 출신인 이승열과 방준석('이인'이란 이름을 쓰기도 함)이 만든 밴드이다. 이들은 94년에 데뷔 음반 [Nothing's Good Enough]에서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진가를 보여주었고, 새로운 사운드(U2가 생각나는)와 나이에 비해 세련된 곡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1집에서는 '세상 저편에 선 너'와 '영화 속의 추억'이라는 훵키한 연주가 담긴 노래가 주목할만 했다.

96년에 발표한 2집 [Cry… Our Wanna Be Nation!]는 1집에 비해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때로는 수줍은 우울함을, 때로는 순수한 솔직함을 보여주는 이 앨범은 1집에서는 다소 약했던 록적인 요소들이 표현되고 있다"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소수의 매니아들만이 지지를 보였을뿐 단독 공연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들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미약했다. 결국 아쉽게도 이들은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결심하고, 97년 1월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의 첫 단독공연이자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 표면상의 이유는 "멤버 중 이승열이 밀린 학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1년 예정으로 미국에 머물기 때문"이라고는 하였지만, 주변의 얘기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상업적인 측면에선 실패하고만 고국에서의 음악활동에 지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일부에게서 너무 "빠다 냄새가 난다" 또는 "U2의 카피이다(특히 에지의 기타 연주)"라는 얘기도 듣기는 하였지만, H2O와 마찬가지로 이들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록 세션'을 보여준 밴드는 없었다. 그리고 '천국보다 낯선', '없어', '그날'에서 이승열의 기타 연주는 톤, 감성뿐만 아니라 구성에서도 전율적이고, 독자적인 것이어서 '예전(83년 [War]에 수록된 'New Year's Day'나 88년 [Rattle & Hum]에 수록된 'All Along The Watchtower'를 연주하던 때)의 에지'말고 '지금의 에지'와 비교한다면 이승열의 플레이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이 활동 중단을 하면서 이제는 '연주의 미감'만을 즐길 수도 있게 하는 밴드가 사라졌다.

이후 방준석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감독), '꽃을 든 남자'(황인뢰 감독)의 영화음악에 참여하였고, 임재범 2집 음반 프로듀스를 하였다. 그리고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2집 [개, 럭키스타]와 패닉 2집 기타 세션을 하였다. 이들은 97년 한상원의 2집 [Funky Station]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4. 윤도현밴드
2집 (1997 / 다음기획)
윤도현(v, g, har), 강호정(k), 유병열(g), 엄태환(g), 박태희(b), 김진원(d)

72년 파주에서 태어난 윤도현의 음악 성향은 과거의 행적으로부터 추론된다. 그는 고등학교 때 헤비메틀 밴드에 있었고, 한 때는 포크록 그룹 종이연('이등병의 편지'를 만든 김현성이 주도했던 그룹이었고, 이를 인연으로 윤도현 1집에 그의 곡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수록되었다)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윤도현밴드(2집부터는 '밴드'로 불림)의 초기 사운드를 결정지은 것은 94년 윤도현 1집에도 참여했었던 강호정(세션, 믹싱 엔지니어, 음반 디렉터로)의 노련함이었다. 지금은 기그스(Gigs, 정원영·한상원밴드가 패닉의 이적이 참여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12월에 앨범 출시 예정이다)의 멤버이자 인정받는 음반 프로듀서가 되어서 이정현 1집까지 손 댄 그이지만, 당시 강호정은 독일에서 막 음악공부(음향공학)를 마치고 온 뮤지션이었다. 물론 메이데이, 천지인, 조국과 청춘, 마루, 이정열 등 주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앨범에서 편곡과 디렉터, 세션맨으로 활동하였던 유병열(기타)의 역할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성이 짙은 가사를 노래하는 록밴드'라는 평가를 듣게 만들었던 2집은 세간의 평가가 정당했다고 여겨지게 만들고, 그 이상의 의미부여도 할 수 있게 한다. 이 음반은 거침없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록밴드의 '가사쓰기'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 은유적인 가사쓰기를 하였던 한대수, 김민기를 지나서 드디어 정태춘이 숨김없는 목소리로 이 사회의 모순과 약자의 비참함을 얘기한 적은 10년 전에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형식미를 갖춘 록밴드의 경우에는 이들이 처음이었다(메이데이, 이스크라와 같은 '특정 목적하에' 급조된 밴드들의 음악은 별로 거론하고 싶지가 않고, 한국 대중음악사의 맥락에 넣고 싶지가 않다. 그들의 음악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을 얘기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명확한 컨셉하에 가슴에 담긴 얘기들을 이끌어 내었고, 이를 뛰어난 형식미(편곡, 세션, 녹음)로 받쳐주었다.

강호정의 개성을 드러내는 '긴 여행', 96년 파주의 물난리를 보고서 만들었다는 박노해 시에 곡을 붙인 '이 땅에 살기 위하여'(올해까지 파주에서는 세 번의 물난리가 있었으니, '이 땅에 살기 위하여 2/3'이 나올 법도 한데), 양심수 문제를 거론한 '철문을 열어' 그리고 아름다운 슬로우 록 '다시 한번'은 '록의 진품'에 수록된 대표곡들이다. 우리나라의 록밴드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을 꿈꾸기에 앞서 바로 우리 앞의 현실을 얘기하는 이런 음반을 만들 생각을 했어야 했다.

현재 윤도현밴드는 강호정이 탈퇴한 상태에서 98년에 3집 [소외]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는 영화 '맨'(여균동 감독)에 '긴 여행'이, '정글 스토리'(김홍준 감독)에 '바다'가 삽입되었다. 또한 97년 [신중현 트리뷰트]에서 '이제 그만 가보자'를, 98년 [Rewind]에는 '불놀이야'를 불렀던 이들은 현재 한국록 리메이크 음반을 발표했다.


26. 서태지와 아이들
1집 (1992 / 반도음반)
서태지(v, prog, k, g), 이주노(v), 양현석(v)

92년 서태지의 이 데뷔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의 새로운 시작점이었고, 많은 문화적인 화두들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서태지 데뷔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근본적인 변혁을 맞은 것이다. 댄스뮤직이 주류 가요계를 평정했다는 점, 음반 소비자들이 10대들로 재편되었다는 점, 팬 관리에 기획적인 마인드가 도입되었다는 점 등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80년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적인 뮤지션들(김현식, 전인권, 시인과 촌장, 신촌 블루스, 한영애 등)을 정말로 '언더그라운드'로 밀어 넣었고, 음반 시장에서 20대 이상을 떠나게 만들었고, 그루피 성향의 팬클럽이 아니라 "순수한(?) 팬클럽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낳게 만들었다. 김현식이 더러운(?) 꼴 보지 않고 일찍 죽은 것은 그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태지 초기에는 그에 대해서 잘못 얘기된 것이 있었고, 서태지 은퇴 후에도 그와 관련되어서 잘 못 얘기되는 것들이 있다. 매체는 서태지 데뷔 때만해도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몰라서 허둥댔었고, 그가 가진 역량과 시대에 미칠 파장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 1집 앨범평도 제대로 된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앨범은 댄스 뮤지션의 단순한 '댄스뮤직'이 아니다. 사실은 '댄스 플로어'용 보다는 '라운지'용에 가깝다. 이는 수록곡들의 멜로디라인이 워낙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것일 수도 있다. 알려진 곡들보다 '내 모든 것(Live Mix)', 'Rock'n Roll Dance', '너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를 들어보면 서태지의 멜로디 감각은 놀랍다. 손무현, 신대철의 재기 넘치는 기타 솔로가 첨가된 앞의 두 곡은 록, 팝, 댄스의 절묘한 교배였다. 그리고 마지막 연주곡 'Missing'은 98년 서태지 솔로 1집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단초이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된 이후에 주류 음악씬에서는 계속 '포스트(post) 서태지'를 얘기했지만(가당치도 않게 H.O.T. 등), '포스트 서태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태지는 유일했던 존재였고, 비교 대상이 없다. 주류 씬에서 '전복자'의 이미지를 가진 뮤지션이 그 말고 또 누가 있었나? 어쩌면 주류 씬과 매체를 농락한(?) 첫 번째이자 마지막 뮤지션으로 그가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32. 스트레인저(Stranger)
Sailing Out (1990 / 서라벌레코드)
이승철(v), 임덕규(g, prog), 김동규(k, prog), 박인호(b), 박석민(d)

스트레인저는 89년에 록귀 출신의 임덕규(기타)가 자신의 솔로 앨범을 만들기 위하여 만든 팀이다. 하지만 초기 멤버들은 팀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나갔고, 이후 박인호(베이스), 김동규(키보드)와 프라즈마, 디오니서스 출신의 이승철(보컬)이 들어오면서 녹음에 들어갔다(이 음반에서는 드럼대신 드럼머쉰을 썼고, 박석민은 녹음 후 가입).

80년대의 대표적인 메틀 기타리스트들인 신대철(시나위), 이근형(작은하늘, 카리스마), 김도균(백두산), 김태원(부활)이 각기 전향을 하거나 활동을 중단한 시기인 89년-90년은 '제 2세대' 메틀 밴드들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전에 비해 메틀의 연주 성향이 바뀌어지고 있었다. 전 세대 메틀 연주자들이 70년대의 (블루스 성향의) 하드록에 영향받아서 음악을 시작한 것과는 달리, 이 때의 뮤지션들은 잉베이 맘스틴 류의 바로크 메틀과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의 스래쉬 메틀에 가장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88년 언더그라운드 헤비메틀 모음집 [Friday Afternoon 1]에서도 대표적인 경향이 80년대 초반의 LA 지역의 팝 메틀(크라티아)과 스래쉬 메틀(아발란쉬)이었다. 그리고 2, 3집으로 가면 테크니컬 메틀과 스래쉬 메틀의 비중이 높아갔다.

스트레인저는 89년에 데뷔한 배재범(기타)이 이끄는 디오니서스와 함께 바로크/테크니컬 메틀을 대표하는 밴드였고, 배재범과 임덕규는 당시 각기 메틀계의 '기타 영웅'이었다. 특히 임덕규는 파워풀하면서도 좋은 멜로디 감각으로 품격 있는 메틀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승철의 진가도 보여지는 'Take Away (This Pain)', 'Song Of Dreaming', 'After You'를 들어보았다면 느끼겠지만, 그는 80년대 이근형에 이어서 90년대 가장 훌륭한 메틀 기타 연주를 보여주었다. 임덕규는 "이번 앨범에서는 인간 본연의 슬픔, 고독을 나름대로의 기, 승, 전, 결로 표현해 보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앨범 이후 완성도 있는 메틀 음반을 들으려면 크래쉬 1집 [Endless Supply Of Pain]과 최일민 1집이 나오기까지 4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 기간에는 1세대, 2세대 메틀 밴드들이 블랙신드롬을 제외하고는 거의 '지리멸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안회태(기타, 전 파트 포), 서안상(베이스, 전 파트 포), 이시영(이승철에서 개명)의 참여로 기대를 모은 미스터리가 결국 가요-메틀 성향의 졸작 [My Rock'n Roll & My God](93)을 만들었고, 더우기 넌센스는 정형섭(기타, 전 나티), 장민(기타, 전 디젤), 서안상 등 메틀계의 '중진'들이 모여서 멍키헤드 1집(94)과 같은 '코미디 메틀'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만약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음악을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한가지 더 얘기할 것은, 스트레인저 1집과 같은 해에 서라벌레코드에서는 클럽 1집, 디오니서스 2집이라는 명작들을 발표하는 의욕을 보였지만 자금난으로 중단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스트레인저는 1집 발매 후 임덕규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탈퇴하였고, 조현수(보컬), 주원식(베이스), 황병근(드럼)이 가입하여 93년 메틀 컴필레이션 앨범 [Power Together]에 마지막으로 참여하고 해산하였다.


37.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
18일의 수요일 (1998 / 강아지 문화 예술)
이기용(g, b), 남상아(v, g), 김상우(d)

이 음반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98년 초 코코어, 허벅지밴드의 앨범 발매로 시작된 인디 레이블이 세상에 보여준 첫 번째로 완성도 있는 앨범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97년 [One Day Tours]부터 시작된 독립음반사 강아지문화예술이 본궤도에 올랐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앨범이다. 그리고 또한 얘기할 것은 98년도에 발표된 한국 대중음악 음반들 중 베스트를 꼽는다면 반은 바로 인디 레이블에서 나온 작품들이다(또는 인디 씬에 몸 담고 있는 뮤지션들의 작품들이거나). 사람들은 인디 레이블이 인디 씬의 이슈성 기사에서만 묻어져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막연히 프로와 아마추어의 중간 지점을 점유하는 뮤지션들의 터전으로 여기거나 '싸게 음반을 만든 곳' 정도로만 알고 있고, 인디 뮤지션들을 한국 대중음악산업에서 '열외'로 여기는 느낌이다.

맞다. 인디 뮤지션은 메이저 씬에서의 '프로'라는 의미(기준)에는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프로와 아마추어의 중간'으로 볼 수 있고, 인디 음반 제작비가 메이저 음반의 10% 정도밖에 안 되니까 '싸게 만든 음반'도 맞는 얘기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우리나라 전체 음반 제작비의 0.1%도 안 되는 투자비로) 한국 대중음악계가 만들어낸 좋은 앨범들의 50%를 만들어 냈다는 점은 '저비용 고효율'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 것이고, 결국 인디 씬이 향후 한국 대중음악의 대안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음반들은 결코 '열외'도 아니고, 인디 뮤지션들은 따로 얘기되어져야 할 대상이 아니다. 평론가/기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 대중음악산업 내에서 이들을 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진정 우리 음악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허클베리 핀은 네이키드 런치 출신의 이기용(기타, 베이스, 보컬, 72년생)과 코코어 출신의 김상우(드럼, 74년생)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아우라를 창출하는 남상아(보컬, 기타, 73년생)가 97년 6월에 만든 밴드이다. 그리고 시작은 홍대 부근 클럽 '스팽글'의 1주년 기념 공연에서부터였다(베이시스트가 없는 관계로 녹음 시 이기용이 베이스와 기타를 오갔으며, 공연 시는 베이스 세션으로 현재 '3호선 버터플라이'의 권효준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98년 초 데모 테이프를 공연장에서 팔기도 한 그들은 같은 해 초여름에 도현호(노클루 보컬)와 권병준(고구마, 원더버드 보컬/기타)이 엔지니어를 맡은 데뷔 음반을 발표하였다.

'첫 번째 곡', '불을 지르는 아이', 'Huckleberry Finn', '갈가마귀', 'Work' 등이 수록되었고, "반복을 통한 강조와, 감정의 날 것 그대로를 느끼게 하는 직설적인 목소리는 의외의 (비극적)서정성을 지녔으며, 이 서정성은 곡 자체의 매력 뿐 아니라 보컬 남상아의 기묘할 정도로 중성적이고 유니크한 목소리에 기댄 부분이 많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들의 노래는 전반적으로 삶의 허탈한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구체적으로 형용할 수는 없지만 원래 나이보다 20살은 더 먹었음직한(정신적으로) '중늙은이들'이 관조하는 세상 이야기가 노래에 담긴 느낌이다. "나는 이 세상이 거짓들로 얼기설기 엮어졌음을 잘 알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란 것도 알아. 하지만 '구원의 희망'이 무참히 깨진 이후 나는 단지 노래를 부를 수밖에는 없어. 나는 노래를 부를 줄 알고, 그 노래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지"라는 지극히 추측적인 감상평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극적)서정성을 노이즈와 펑크 사운드에 얹는 이유 중에 하나인 것 같다.

현재 이기용은 새로운 멤버들로 허클베리 핀을 재결성하였고, 남상아와 김상우는 성기완, 권효준과 '3호선 버터플라이'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남상아는 여름에 이상인 감독의 영화 '질주'에 출연하였는데, 본인 스스로는 실패작이라고 한다.


41. 한상원
Seoul, Soul Soul Of Sang (1993 / 동아기획)


60년생인 한상원은 76년에 정원영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면서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원영의 말에 의하면 고등학교 다닐 때 '무림의 고수가 다른 고수를 찾아가서 결투를 신청하듯이' 다른 동네에서 기타를 잘 친다고 평이 자자했던 한상원을 찾아가서 음악적인 교류를 시작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한상원이 돈을 받으면서 전문적으로 연주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라고 한다). 이후 한상원의 다채로운 경력사항을 보면 78년에 '김덕수 사물놀이'와 협연을 한 것으로 되어있고, 주한 외국인학교 그룹 'Asylum', 'Two Sang & A Hen'을 결성하여 활동한데 이어서 80년대 초에는 그룹 '석기시대', '김태화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을 하였다. 당시 김태화밴드는 라이브에서 명성이 자자했었는데, 당대의 록 보컬리스트로 평가받았던 김태화의 전성기 시절 기량이 한상원의 뜨거운 록 필과 결합되어서 국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세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국내 음악환경에 갑갑증을 느끼던 그는 84년에 버클리음대로 가서 'Professional Music'을 전공하였고, 이후 10년간은 현지에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고행을 길을 걸었다. (그는 "그때는 하루에 10시간씩 잼을 했다. 요령 있게 2시간 하는 것과 무식하게 10시간 연습하는 것을 비교하면 효과는 후자가 났다"라는 금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 때 수많은 세션을 통해서 새롭게 마스터한 것이 흑인 감성의 훵크(funk)였고, 이는 지금 그를 '훵크의 마스터'라고 부르는 시발점이 되었다. (훵크는 60년대 말 흑인민권운동기에 절정에 달했던 소울에 '그루브'를 강화시켜 재탄생 장르이다. 조지 클린턴 -70년대의 훵크 그룹인 팔리아먼트, 펑카델릭의 리더- 으로 대표된다.)

그런 그가 귀국하기 바로 전 녹음한 작품이 자신의 데뷔 음반 [Seoul, Soul Soul Of Sang]이다. "폴리(다중) 리듬적인 것을 많이 보여주려 하였다. 당시 그 곳의 엔지니어와 '한국에 이런 음반이 나오면 죽이겠다'라는 대화를 가졌었다"라는 그의 말대로 이 음반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질감의 세션을 담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코더(Roland SVC-350. 한상원은 그 보코더에 기타가 아니라 키보드를 연결하여 사용하고, 키보드 음정으로 보컬 음색/음정 조정한다)가 주요하게 사용되는 세션에서 한상원은 이질적인(적어도 그 때까지는) 훵키 플레이로 다른 만만치 않은 경력의 연주자들과 협연을 하였다. 마커스 밀러의 퓨전 앨범 스타일의 세션을 한상원을 통해서 듣게된 것이었다.

빠른 템포의 훵키 기타 연주로 심상치 않은 출발을 보여주는 'Seoul, Soul, Soul', 그의 급박한 느낌의 베이스 연주가 실린 'Hawk', 김종진이 보컬로 참여한 'You Are', 베이스 연주자 윌 리를 위한 'Will's Blues (When My Life Feels Alone)'는 연주만을 생각하고, 연주만을 삶의 전부로 받아들인 한 아티스트의 절규였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우리에게는 되어있지가 않아서 그만 그의 목소리는 땅으로 잦아들고 말았다. '표독스럽게 이빨을 드러내고' 연주할 준비가 되어있는 한 기타리스의 염원을 이 땅에서는 무참하게 짓밟은 것이었다.

이후 한상원은 94-95년에 한충완(키보드), 송홍섭(베이스),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과 '수퍼 밴드' 활동을 하였고, 전인권과도 잠시 그룹 활동을 하였다(그 결과물이 98년에 발표된 [전인권·한상원 #1]이다). 그리고 97년에는 더 진일보한 모습으로 2집 [Funky Station]을 발표하였다. 또한 한상원밴드를 결성하였다(현재는 이적이 참여하여 '기그스(Gigs)'로 바뀜).

90년대 한국 대중음악 55선- 맥빠진 주류와 지친 비주류 |||| 박준흠 ||||80년대에도 댄스가수들은 있었고, 이들이 역시 주류 뮤지션들이었고, 물론 '오빠부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때의 뮤지션들은 '가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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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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