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 다운 시절의 노래들이다.
사람들에게 기억이 있다는 것이 가끔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론 그 것들이 힘을 주고 오늘의 활력을 이끌기도 하며 내일의 희망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니 말이다.
뭐 기억이야 싫은 기억도 있겠지만 나의 의지가 있다면
어떤 기억인들 아름답지 않을까

가수 : 박지원
기획/제작사 : Orange Popular, 제작년도 : 1995년
프로듀서 : 전기현, 엔지니어 : 도정회, 녹음장소 : {SEOUL STUDIO}, 총시간 : 0:40:08분

< 수록곡 >
01 이미 너는
02 참 아름다운 세상이야
03 네가 있기에
04 나의 멜로디
05 관심
06 너의 표정
07 조그만 꿈
08 저 하늘에 너
09 처음부터 끝까지
10 느낌만으로

이 노래만 딱 생각이 나고 그 뒤로 수 많은 가수들처럼 사라져버렸나 보다 했는데
교통사고를 당했었구나. 지금은 다른 가수와 함께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마침 기사가 나와있다.

박지원 “90년대 꽃미남 가수 기억하세요?”  
추억의 스타를 만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가슴 한 켠이 씁쓸하다. 화려했던 스포트 라이트를 받던 스타의 모습이 현실 모습과 눈앞에 교차하면 어린 시절 추억 속 일기장 한 장을 떼내온 것처럼 설레고, 때로는 낯선 실망감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90년대 댄스 가수 출신으로 작곡가로 변신한 박지원(본명 박진형·34)은 마치 가수 시절을 까맣게 잊은 듯 했다. 97년 뇌수술까지 받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작곡가로 변신, 최근에는 장윤정의 <이따, 이따요>를 히트시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이제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요, 뭘"(박지원)
사진 촬영 후 10년만에 해본 메이크업이 부담스럽다며 급하게 비누로 쓱쓱 지우고 맨 얼굴로 인터뷰 자리에 나섰다. 그가 자신에게 두번째 인생의 숨결을 불어 넣어 준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은 몸의 침대 시절, "내 인생은 이제 2막이 펼쳐지는 셈."
 
'야야 감추긴 싫어 내이름을 불러 봐, 솔직해 진 너의 느낌만으로, 내 이름을 불러봐'(노래 <느낌만으로> 中)
 
95년 데뷔한 그는 당시의 '제2의 김원준'이라는 타이틀의 얼짱 댄스 가수. 당시 박지원은 대형 의류업체 광고 모델로도 활동하고 여고생 팬들을 몰고 다니며 가요프로그램 1,2위를 휩쓰는 인기 절정의 꽃미남 스타였다.
97년 갑작스런 눈길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뇌출혈에 이은 사흘간의 뇌사 상태, 경추 2,3번 골절, 광대뼈 함몰과 팔다리 골절로 병실에 눕기 전, 그는 자신에게 이런 혹독한 운명이 다가올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추의 신경을 건드렸다면 하반신 마비도 각오했어야 하는 상태였다.
 

"불행인지 다행인 지 사고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그랬겠구나'하고 기억을 되살릴 뿐…. 사람에 따라서는 큰 충격을 받으면 당시 기억이 함께 지워지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는데, (주치의가) 내가 그런 케이스라고 했다." 겨우 의식과 기억을 차린 것은 사고가 난 지 2주나 지났을 때쯤. 박지원의 시야로 머리 맡에서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어머니 얼굴이 조금씩 들어왔다.
 
침대 위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한 5개월 간의 입원과 1년간의 재활 치료, "음악 공부는 어떻게든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대학원 상명대 컴퓨터 음악과에 돌아가 학업을 마쳤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그의 체중은 42kg. 69kg을 유지했던 그가 27kg이나 체중이 빠졌다. 그는 "키 182cm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를 털어놨다.
●"댄스 출신이 음악을 뭘 안다고…"에 상처
 
댄스 가수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그에게 만만치 않은 마이너스 조건이었다. 좋은 곡을 들고 음반 제작자를 찾아가도 "댄스 가수 출신이 뭘 아냐"고 편견섞인 시선이 컸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록밴드에서 활동하며 실제로도 데뷔 후 1,2집에서 4~5곡의 자작곡을 수록했던 그였지만 그의 열정이 생각만큼 금새 전달되진 못했다. 다른 직업을 택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음악은 그를 또다시 건반과 오선줄 앞으로 이끌었다.
"할 수있는 것도 하고싶은 것도 음악 밖에 없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순 없지만, 음악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게 유일한 낙이고 삶의 전부였다. "(박지원)
유명세에 밀려 타이틀로 선정됐던 곡이 막판에서 다른 작곡가에 밀려 후보에서 빠지거나, 프로듀싱한 가수의 앨범이 믹싱까지 마쳐놓고 출시가 무산된 경우도 많았다. 몇년 전만해도 작곡가의 곡(작업)비를 떼먹는 제작자들이 많아 그는 언제나 팍팍한 경제적인 현실에서 각박해해야 했다.
백제예술대학 실용음악과와 우성정보대 실용음악과에서 시간 강사로 출퇴근하며 적은 강사료를 받는 그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다니며 절약한 돈으로 녹음 기계를 사들이고 자기에게 투자했다. 7년 전부터 가수 박혜경 3집을 시작으로 거미 3집, 왁스 5집 김민종 김정민 김경호 등의 크고작은 가수들의 앨범에서 프로듀서 겸 작곡가로 활동, 차근차근 역량을 쌓았다.
 

그러던 중 눈에 띈 것이 신세대 트로트 가수. "의외로 요즘 세대들은 음악 장르에 대한 편견이 덜하다는 것을 알았다. 잘나온 댄스와 발라드에 꺾는 창법이 되면 트로트로도 변신하고, 좀 더 색깔을 입히면 록도 된다.
재미있고 신선한 미개척지 같은 느낌이었다."(박지원) 학생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젊은 세대의 달라진 입맛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됐던 셈. 박지원은 "'활동 못하는 잊혀진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의 편견에 당당하게 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하지만 그 껍질에서 나오고 나니, 세상은 평등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더라"고 말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살게되니 나는 행운아"
 
박지원은 요즘 장윤정의 새 곡과 박현빈, 다른 가수들의 곡 의뢰가 많아 작업에 한창이다. 발라드와 록, 트로트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은 곡의 멜로디가 생각날때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멜로디를 녹음하고 집에 가자마자 작업실에 앉는다.
'가수 장윤정에게 노래를 준 사람들의 모임'으로 칭한 작곡가들의 소모임 '윤정계'에서도 신선한 발상들을 교환한다. 어쩌면 자기 세상에 빠져 편협해 질수있는 작곡가 특유의 근성을 탈피하자는 데에서 만들어진 시도로, 박지원을 포함한 배테랑 작곡가들은 매달 모여 회비 중 일부인 10만원을 떼내 정기적으로 사회복지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한다. 만약 사고가 없었다면, 어쩌면 더 이름있는 가수로 우리에게 기억되지 않을까. 사고로 놓쳐버린 돈과 명예가 지금도 아깝게 생각되지 않을까. 박지원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한 '아니오'였다.
"아마 인생의 맛을 모르고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도 알지 못한채 살았을 겁니다. 좌절과 시련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 저는 감사하게도 사고 후에 더 많은 것을 얻고 보고 살게 되었습니다. 내게 준 두번째 기회에 고맙습니다." 얼굴 사이 아직도 당시를 그리게 하는 패인 사고의 상처,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그가 12년 전 TV속 꽃미남 박지원보다 훨씬 멋있게 느껴졌다. 그는 이미 인생의 두번째 장막을 봄 햇살처럼 활짝 열었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야

http://tvdeep.mnet.com/DetailVod_view.asp?vodid=3055&vodSrvid=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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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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