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정몽주'에 해당되는 글 2건

포은 정몽주 선생.

고려말 최후의 충신. 어릴때 성남시에서 살 때 집에는 위인전 전집과 함께 동화전집이 있었다.

그 접집에는 이성계도 있었고 안중근도 있었고 정몽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의아한게

김옥균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게 된 정몽주.

어릴때의 그 때 감상은 알 수가 없지마 개성에 있는 선죽교, 단심가, 그리고 철퇴와 대나무는

기억이 난다. 나에겐 쓰러져가는 나라와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절개있는 충신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이슈가 없었던지, 아니면 고려사가 그다지 수능에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지 몰라도 정몽주의 이야기는 어릴때에 머물러 있엇다. 그러다 발견한 것.


"죽전 포은 휴게소' 정식 명칭인 걸까? 아니면 그냥 이 기념물에만 붙인 이름인걸까.

내가 알고 있는 모습도 그렇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주군을 모셨으면 끝까지 모셔야 남자지 하는 모습 말이다.


이 안에는 내가 보았던 어린이 위인전의 이야기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뒤에 다시 돌아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개혁과 혁명. 쓰러져가는 고려였을까. 혁명이 성공했으니 쓰러져가는 이라고 붙여도 타당하겠지만

난 개혁이 내 스타일이다.

일화로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더 비장하게 그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급관심에 다시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른 이야기도 있다. 뭐 이젠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그래도 한 때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 혹은 정의가 뒤틀리거나 생채기가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는 믿고 싶지 않았고

완강하게 나름 저항을 했는데 이젠 그러려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거 아니겠어? 

이게 나이가 드는건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로 다시 고쳤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다섯 살 아래의 후배였던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초상화, 궁중화가였던 이한철이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에 보관된 초상화를 1880년 모사하였다.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정몽주는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나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친명파로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으나, 마지막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라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성환을 내려갈 때면 항상 들르는 곳인 죽전 휴계소. 그런데 못 보던 것을 보았다. 생긴지 얼마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죽전휴계소 명칭의 유래까지 알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포은 정몽주 선생이시다. 초딩시절 눈망울 초롱초롱 하던 시절에 위인전으로 만나게 된 포은 정몽주.

그리고 중딩때 다시 만난 시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에 추상같은 대꾸로 단심가로 심장을 얼어붙게 하신 그 분이 아니던가.

 

유래는 이렇다고 한다. 죽전리가 수지읍 소재지의 풍덕천 동쪽에 위치하는데 정몽주 선생의 묘소가

이 곳에서 가까운 모현면 능원리에 있는데 그 영정이 이 곳을 지났기에 죽절이라 한 것이 변형되어

지금의 죽전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조가 곧고 충절이 있는 분이 있으니 역사라는 것이 후대에

교훈을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 시대가 질풍노도의 시대이고 대외적으로는 급변하는

정세였으니 이성계같은 인물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정몽주 선생이나 최영 장군을 따르는

이들이 이성계나 정도전 보다는 많지 않을까?

 

죽전서원에는 선생의 영정과 흥미로운 일화들이 담겨져 있다.

고려말기 정몽주와 이방원의 시조대결. 그리고 이후 말을 거꾸로 타고 간 사연등.

개혁과 혁명은 다르다.

 

리후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그래도 아빠는 정몽주 선생이 존경스럽단다. 왜냐하면 우선 한 나라의 충신이셨고 지조를 꺽지 않았기

때문이지. 생각해 보면 역사가 정몽주 선생과 같은 분이 계시고 정도전과 같은 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정도전이 이기는 거지? 흠. 역사는 둘 다 기억을 하고 사람들마다 정도전을 인정하기도 하니

꼭 정몽주 선생같은 분이 옳다는 것이 명제도 아닌 것 같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 후에도 얼마나 많은 이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뒤엎고 백성을 기만하며 시대에 편승을 했는지 참 기구한 역사다.

 

 

 

 

누가 옳은것 인지 모르겠다. 또 나라면 어떻게 해야 할 까?라는 생각도 이젠 굳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건 확실하다. 적어도 어릴때는 정몽주 선생을 따라야 했고 김구선생과 같은 분을 존경해야 하고 나였어도 ... 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었다는 것.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