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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주일 전쯤이었나?
아침에 일어나서 목뒤의 느낌이 이상해서 만져보니 콩알만한 종기가 난 것이 아닌가.
뾰루지, 뽀드락지? 뭐 그렇게 부르기엔 좀 더 크고 말이다.
만져보니 통증이 있고 약간 물렁한 것이 안에 고름같은 것이 혹시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짜려다가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그냥 놔두었다. 하긴 고름이라고 해도 좀 커서 혼자 짜기는 쉽지가 않았다.
다음 날은 더욱 커졌다. 그러니까 존재를 알게 되고 이틀동안 커져갔던 것이다.

이때 상당한 업무스트레스로 인하여 잠도 못이루던 시간이었다. 외우내환이라고나 할까.
목뒤의 종기가 또 위험한 병의 초기증세라는 어떤 내용?도 본 것 같다. 기억은 안 나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봤으나 증상만 나올 뿐 시원한 답변도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이명래 고약이 생각나서 이 것을 찾아보니 올 해 초에 납이 약 성분에서 검출되어
인체에 피해를 주는지 안 주는지 확인을 하고 재허가를 내줄지 안 내줄도 약사부에서 결정한다는 그런 내용의
언론보도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후 기사는 없었고 또 내일 약국에 가보자는 생각에 잠을 이뤘는데,

다음날 아침 조금 딱딱해지면서 대신에 크기가 적어졌다.
통증도 없어지고 말이다. 흠.. 물론 약간의 통증은 있지만 초기와 비교하면 좋아졌다.
병원을 가 볼까 말 까 고민은 해 봤는데 별로 병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솔까말 의료보험료만 15만원이상을 매월 월급에서 원천징수당해서 아깝기도 하지만
그냥 의료보험이 필요한 분들에게 쓰여 지겠지 하는 위안으로, 혹은 착한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병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의사에 대한 불신이라고나 할까? 종합병원은 그나마 낫지만
내가 경험한 개인병원은 의술이 아닌 상술을 펼치고 한 번 온 손님 오래 오래 끌거나
간단하게 시술해도 될 것을 거창하게 포장하고 어려운 방법을 이용해서 치료를 하고
결과적으로 환자는 돈은 물론 몸까지 해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종합병원을 가려고 한다. 사실 종합병원은 손님으로 미어터지기 때문에
의사 입장에서는 빨리 치료를 끝내고 싶어하고 또 교수직을 겸직하고 있는 의사의 경우는
본인의 피로도에 의해서도 일찍 치료를 마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것이 더 낫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후자가 낫지 않을까. 어쨌거나 개인병원이나 종합병원이나 그들의 의술에 대해
신뢰도는 없다. 물론 상술에 대한 신뢰도는 있지.

그로부터 몇 일이 지나면서 종기는 점점 크기도 작아지고 통증은 없어지는 듯 했다.
시간이 지나면 낫겠다는 생각도 들고 생각해 보니 스트레스로 인하여 종기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는 글, 혹은 무언가를 본 기억도 나고 해서 그냥 두었다.
주말에 시골내려가서 어머니께 보여드렸더니 병원을 한 번 가보라고 말씀 하시길래
대수롭지 않게 돌아왔는데 어제 전화가 왔다. 빨리 꼭 가보라고 말이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래, 한 번 가보자. 나도 의료보험 혜택 한 번 받아보자고 약국에 들러 홍제역 가까운 곳의
피부과를 물어보고 신한은행 3층에 있는 모 피부과를 찾게 되었다.

데스크엔 2명의 여성이 있었고 목 뒤의 종기때문에 왔다고 보여주었더니
와~~ 하고 놀랜다. 헐... 환자가 부위를 보여주는데 우선 설레발을 친다.
뭘 그렇게 놀라냐고, 환자가 더 겁먹겟다고 했더니 종기가 너무 커서 그렇단다.
그리고 나서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1차 진료비는 7800원입니다.
" 아니 왜 보험이 적용이 안되요?"
그랫더니 옆에 있는 아가씨 왈.
"점이나 사마귀 이런 것은 보험 적용이 안된다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이게 점도 아니고 사마귀도 아니고 종기 때문에 온건데 보험적용 안된다고 단정지었잖아요."
".... 그럴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어짜피 치료받으러 왔고 나는 아쉬운 마당인데 더 말해야 뭐하겠나 싶어 앉아서 주변을 보니
보톡스시술과 가격표가 1미터 정도되는 입간판에 보란듯이 세워져 있다.
한 번 시술한때마나 영국식은 얼마, 미국식은 얼마 이렇게 비교가 되어 있다.
보톡스를 성형외과에서 하는 줄 알았더니 피부과에서 하는구나. 피부과도 성형외과의 한 종류인가?
흔하게 양방측이 한의사를 비하할때 치료는 안하고 한약이나 판다고 하더니 니들은 보톡스나 성형수술 팔아먹는구나.

의사가 들어오라고 하더니 애기를 한다.
"가운데 구멍이 뚤어져 있는 것을 봣을때는 (아..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 무엇일 확률이 80%입니다.
진단을 받아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그 것을 그냥 두면 그 구멍으로 세균이 들어가 재발하게 됩니다.
칼로 째야 합니다'

"꼭 칼로 째야 하나요. 다른 방법은 없나요?"

"완벽한 치료를 할려면 째는 수 밖에 없습니다."

" 흠..그럼 우선 오늘은 이 것이 무엇인지 진단부터 받고 제가 좀더 알아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칼로 째서 그 일부를 진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칼로 째야 합니다."

"헉. 그럼 진단후 치료가 아니고 치료와 진단을 병행한다는 말인가요?" (헐... 이런.. 뭐 이런..)

"그렇습니다."

"치료방법은 그 외 다른 방법이 뭐가 있나요?"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째는 그냥 놔두는 것이고,
둘 째는 그 안의 내용물만 빼내는 것이고
세 째는 째야 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재발할 확률이 높습니다."


"네. 그러면 좀더 확인해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문을 나와 계산을 하려하니 데스크에서 의사한테 가더니 돌아온다.
4,500원. 의사 참 쉽구나.
데스크에서부터 공포감을 조성하고 의사까지 세트로 노는구나.
어느 누군들 병원에 오면 일말의 불안은 있게 마련이다. 의사나 간호원은 그런 환자에게
증상에 대하여 나을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안심을 시켜야 하는데
먼저 공포감을 제시하고 만약에 치료가 안되면 일상에 지장을 주게 될 것이라는
협박? 을 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의 의사들이다.

그 사람은 3가지 방법을 말했고 그렇다면 그 중에 나는 1번, 그냥 두겠다를 선택할 것이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 건 확실한 근거에서 말할 것이고 일반적인 의사(그 것이 선의이든, 상술이든)
확실하게 단정을 하고 그냥 둔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찍은 사진이다.


지금만져보니 더욱 작아졌다. 사진으로 봐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지만 만져보면 안으로 콩알만한게 느껴진다.

에혀.. 글쎄 돈이 개입되는 모든 것에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나의 성향일 지 모르지만 개인의 상처로 인해 돈을 벌려는 의사들,
아이에 대한 산모의 모성을 돈으로 계산하는 산부인과,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을 상술로 후려대는 장의사들. 의사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기에 가질 수 없는 본성으로 인한 욕구, 그리고 불완전함, 또 영원히 미완성일 수 밖에 없는
사회의 불편부당한 처사들에 난 환멸을 느낀다.


*추가 2012년 2월 9일. 목뒤 뾰루지, 종기로 검색해 오는 분들이 많더군요. 일주일전쯔음에 종합병원 갔더니 의사분이 쿨하게 그냥 두라고 하더군요. 얼마되었냐고 물어서 한 1년 된 거 같다고 했더니 그냥 두라고 말이죠. 생활하는데 지장없다고 하더군요. 왜 나냐구 그랬더니 또 뭐 다 난다고 그러내요. 뭐 다 저같지는 않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걱정되시면 종합병원피부과에 가시면 진찰 금방입니다. 의료보험적용되서 7천얼만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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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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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엉덩이에 종기가 난 기억이 있다.
그 때 약국에서 산 이명래 고약. 아마도 어떤 상품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제품. 내가 기억 한 것중 최초가 아닐까 싶다.
뭐 지금도 그다지 많지는 않으니 말이다.
외국 같은 경우는 상당히 많은데 우리 나라는 그다지 많지는 않은 거 같다.
아.고등학교때 주재훈 베이커리? 무슨 피자도 있던데...
그런데 이명랙 고약같은 경우는 아마도 국민브랜드급이지 않았을까 싶다.
할리데이비슨이나 혼다, 스즈키, 미쯔비시등 외국에 비해서는 훨씬 빈약하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이명래 고약을 생각하게 된건 사실 지금도 엉덩이에 ㅠㅠ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없으니, 전형적인 중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간추려 모은 ‘성원록(姓源錄)’에는 홍천 피씨가 두 집안 실려 있는데, 중시조인 피수장(皮壽長)과 피하조(皮河照)가 모두 무인 출신이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역관, 계사, 율관들과도 혼인했는데,‘성원록’을 편찬한 이창현은 이 집안을 의원 집안으로 분류했다. 종기를 잘 고쳤던 피재길(皮載吉)의 후손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직계에게는 의원의 맥이 끊어진 듯하다.

어머니에게 처방 배워 고약을 만들어 팔다

 
▲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부근에서 환자를 보던 1940년 무렵의 의원 이명래.임재형 원장 제공.
의원 피홍즙(皮弘楫)은 주로 종기를 고쳤는데, 백광현과 달리 침으로 째기보다 약을 잘 써서 고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재길은 아직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지 못했다. 어머니 박씨가 남편 옆에서 보고 들었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쳤다. 재길은 의서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약재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법만 배웠다. 종기를 고치는 온갖 고약을 팔러 여염을 돌아다니면서도 의원들과 맞서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고약을 사 썼는데, 효험이 매우 뛰어났다.

1793년 여름에 정조 임금의 머리에 헌데가 났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헌데가 얼굴과 턱으로 퍼졌다. 게다가 날씨까지 무더워, 정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의원의 여러 어의(御醫)들도 어쩔 줄 모르고, 대신들도 날마다 모여 의논했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정조를 옆에서 모시던 사관 가운데 피재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를 불러들여 치료법을 물으시라고 추천했다.

웅담 고약을 처방해 정조의 헌데를 사흘 만에 고치다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재길이 말했다.“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볼 만합니다.”

물러가 약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자,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정조가 약원(藥院)에 유지를 내렸다.

“전해 오는 약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의 괴로움을 다 잊게 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뜻밖에도 숨은 솜씨와 비장된 의서가 있으니, 의원도 명의(名醫)라 말할 만하고, 약도 신약(神藥)이라 말할 만하다. 그의 수고를 갚을 방법을 의논하라.”

약원의 신하들이 “우선 내침의(內鍼醫)를 맡게 하고 6품을 내린 뒤에 벼슬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정조가 허락하고 즉시 나주 감목관(監牧官)을 제수하였다. 감목관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 관원인데, 대개는 부사나 첨사 같은 지방 수령들이 겸직하였다. 중인이나 서얼이 수령에 천거되려면 먼저 감목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감목관 벼슬을 준 것은 나중에 수령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해서,‘성원록’에도 피재길을 의원으로 소개하지 않고 목관(牧官)이라고 소개했다. 의원이 겸할 수 있는 명예직인 셈이다.‘정조실록’ 17년(1793) 7월16일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냈기 때문이다. 피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종6품 나주 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신의 피재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청구야담’에서는 그의 명성을 이렇게 기록했다.“(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약원의 여러 의원들이 모두 놀라 감복했으며, 두 손을 맞잡고 그에게 맞서기를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피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졌으며, 웅담고약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임금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해 유배되다

천금의 처방을 터득했지만,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민간의 고약장수가 내의원 침의로 승격했지만,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로 위태하고도 귀중한 일이었다.1800년 여름에 정조가 병에 걸려, 여러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올려도 쾌유되지 않았다.‘정조실록’ 6월22일 기사에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는 기록이 실렸다.

도제조 이시수가 안부를 묻자 “잡아당기는 통증이 조금 나은 듯하다.”고 답했다.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를 이미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수라를 어찌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겨우 쌀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이병정이 “봉해 올린 장고( 膏)는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지금 같은 입맛으로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의 안부인사를 다 들은 뒤에 “피재길에게 지방의원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온갖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마땅한 약도 없었으므로, 믿을 데라곤 웅담고약의 신의 피재길 한 사람뿐이었다. 내의원 의원들이 며칠이 되어도 고치지 못하자, 온 나라에서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지방 의원들이 함께 진찰하였다.

피재길이 진찰하고 나자 정조가 “찹쌀밥을 붙인 뒤에 고름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나 곪았는가?” 물었다. 김한주는 푹 곪았다 아뢰었고, 백동규는 고름이 많이 나왔지만 아직도 푹 곪지는 않았다고 아뢰었다. 의원들 사이에도 진단이 다르게 나오자, 정조가 “마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쓸 처방을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정조의 종기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뒤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연적만큼 크게 부어오른 곳까지 있었다.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병이 든 지 오래 되어 원기가 차츰 약해지고 있으니, 지방의 잡다한 의원들은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피재길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또 지나도 차도가 없자, 이제는 피재길도 믿을 수 없었다.24일에는 정조가 “어제 정오부터 나오는 고름이 조금 적어졌다. 이제는 피재길 한 사람에게만 진찰하게 할 수 없으니, 여러 의관 가운데 누가 좀 더 나은가?” 물었다. 그러나 피재길의 치료도 끝내 효험이 없어, 정조는 나흘 뒤인 6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가 즉위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정조를 살려내지 못한 의원들의 죄를 따지는 것이었다.7월4일 사헌부에서 “내의(內醫) 강명길과 피재길, 방외의(方外醫) 심인을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냈으니, 속히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 나머지 약(藥)에 대해 의논한 의원들도 아울러 엄히 조사하여 해당되는 형벌을 속히 시행하소서.”하고 아뢰었다. 곧바로 피재길을 유배보내라고 명이 떨어졌으며, 언관들은 의원들을 역의(逆醫)라고 명명하였다. 임금을 제대로 치료못한 책임 정도가 아니라, 시해한 혐의까지 덮어쓴 셈이다. 열흘이 넘게 고문당하던 끝에 의원 강명길은 매맞아 죽었으며, 피재길은 7월14일에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다. 순조 3년(1803) 2월6일에야 대왕대비의 명으로 대사령이 내려 무산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침술과 고약 하나로 고약장수에서 종6품까지 올랐던 피재길은 결국 침술과 고약 때문에 천리 유배길에 올랐다. 전문지식인 중인의 책임이자 비애라고도 할 수 있다.

21세기까지 애용되는 고약의 효험

20세기의 고약으로는 이명래고약, 됴고약 등이 유명한데, 이명래 고약은 전통적인 고약과 좀 다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성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내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이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리다가, 이명래의 민간요법까지 더해지며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이 개업했다고 한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 넘게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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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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