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구(1960년 11월 20일 ~ )는 대한민국의 방송인이자 기자이며 前 문화방송의 방송의 주말 《MBC 뉴스데스크》의 앵커이다. 경기도 안성시삼죽면 출생으로 대성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1985년 문화방송에 입사하여 보도국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제부, 정치부, 정보과학부 기자, 스포츠취재팀 팀장 등 오랜 기간 방송 기자로 활동하면서 국세청, 관세청, 총리실 등 여러 정부 부처에 출입했다. 이후 2003년 10월 11일부터 2005년 3월 13일까지 《MBC 뉴스데스크》의 주말 진행을 담당하였으며, 출연을 종료 한 뒤에는 MBC 뉴스의 홈페이지인 《아이엠뉴스》의 코너 <그 뉴스>에서 1987년부터 보관되어 온 MBC 《뉴스데스크》의 방송 영상 자료를 3 ~ 8분으로 재편집하여 투고하기 시작했다.[1] 이를 계기로 2007년 4월 9일에 아이엠뉴스의 홈페이지 개편 때부터는 1987년 2월 3일자 뉴스부터 약 7300일 분량의 뉴스를 전격 제공하는 '20년 뉴스'의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MBC의 프로그램 가을개편에 따라 2010년 11월 6일부터 2012년 2월 19일까지 MBC 《뉴스데스크》의 주말 진행을 했으며 최근에는 MBC 보도본부국 부국장으로 재직하다 MBC 파업에 동참해 보직을 사퇴했다. 앵커로 뉴스를 진행하는 중 독특한 멘트를 종종 하면서 '최일구 어록'으로도 유명하다. 2013년 4월 13일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의 위켄드 업데이트 진행 크루로 합류하였다.
생애 [편집]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편집]
최일구는 어린 시절 내성적인 아이였다.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서 수탉에게 쫓겨서 도망갈 정도로 숫기없는 애였다.[2] 초등학교때 선생님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1968년 서울로 전학을 온 최일구. 당시 경부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이었으나 버스를 타고 한나절만에 서울에 도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처음으로 네온사인을 보면서 놀라기도 했던 그였으나 다음날 가족 모두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고 전해진다.[3]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그것이 1969년에 부실공사로 무너진 와우 아파트였다. 곳곳에 균열이 발생하여 최일구는 불안한 가운데 이사온 내내 잠을 설쳐야만 했다. 그 후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부실공사 사건마다 크게 분노한 사람이 바로 최일구였다.[4] 한편 효심이 지극했던 아버지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최일구를 두고 종종 시골로 내려갔고 최일구는 서울에서 지내야만 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최일구는 부모님과 소통하기 위해 신문에 편지를 써서 부모님께 부치기도 했다.[5]
최일구는 어렸을 때 가수 아니면 작가, 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모 잡지에서 펜팔을 주고받는 시스템을 통해 최일구는 '장래희망 대통령, 취미 모터사이클' 이라고 적어놓자 여학생들의 편지가 쇄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펜팔 주소를 잘못 써 아버지에게 펜팔이 들어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혼난 이후로 펜팔은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6] 가수가 되고 싶은 열망이 강렬했으나 고등학교 3학년 대입시험 후 노래를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갖고 적어놓은 <로케트를 녹여라>는 힘들었던 고3 생활과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 '로케트를 타고 태양에 가서 우리 사는 모습을 보자, 싸우지들 말자' 는 내용으로 적었다고 한다.[7] 당시 멜로디 없이 가사만 남아있었으나 본격적으로 녹음을 하기 위해 쌍문동 스튜디오에서 컴퓨터로 곡을 만들고 노래를 더빙한 일화는 유명하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 신입생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당시 학도 호국단(총학생회) 주최로 예심을 받고 <로케트를 녹여라>를 불러 대상을 수상해 많은 친구들을 사귀는 계기를 만들었다.[8] 그 후 컬러링 등 음원 수입이 꽤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최일구는 결국 2006년 음원저작권협회에 음원을 등록했다.[9]
고등학교 시절 최일구는 머리를 짧게 자른 후 도시락을 2개씩 싸서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으나 가슴 통증으로 병원에 가보니 허파에 물이 차 있는 늑막염 진단을 받고 공부를 하지 말라는 의사의 조언을 받아 휴학계를 내고 여름을 보냈다. 다행히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대입 공부를 시작했다. 물리·화학·수학은 포기하고 국어·영어만 집중적으로 공략해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최일구는 2년간 무조건 놀고 군대를 갔다 온 후 남은 대학교 2년간 언론사 입사 공부를 하자는 전략을 세워, 다행히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기자 [편집]
방송기자는 말도 잘해야 하고 영어도 잘해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신문사 입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모든 신문사 입사에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MBC 입사에 성공했다. 훗날 최일구는 자신을 25년간 먹여 살려준 MBC에 감사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0]
1985년 기자로 MBC에 입사하여 4년간 경찰서 출입기자로 활동했다.[11] 최일구의 고향에서 내내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대가 컸으며 최일구 자신도 꿈을 이뤘다는 것에 대견해했다. 그러나 경찰서 출입기자 생활은 쉽지 않았다.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 많았던 탓에 군대보다 힘들다고 생각했다. 경찰기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에 상황보고를 해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12] 특종 취재 경쟁이 특히 심한것은 야간이었다. 언론사들은 각각 취재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한 차량이 중간에 없어지면 경쟁사 기자들이 특종 취재를 간 걸로 생각하고 긴장하기도 했다. 최일구는 단독 특종 보도를 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고 말했었다.[13] 그러나 아깝게 특종을 놓친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김만철 탈북 사건이었다. 당시 정부는 보호 처소를 마련해 두었고 기자들은 김만철 가족이 어디서 묵는지를 취재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타사보다 확실한 영상을 확보했다는 승리감에 도취한 최일구는 그러나 경쟁 방송사에 김만철의 누나가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알고보니 서울에 김만철의 누나가 생존해 있던 것이었다. 제보자는 MBC에 먼저 전화를 해 "김만철 누나 생존해 있다"고 제보했으나 MBC 직원은 장난으로 생각하고 끊어버려 특종을 놓친 것이었다. 최일구는 당시 보도가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14]
최일구는 이후 MBC 《뉴스데스크》 카메라 출동으로 활동했고, 1992년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서울 야경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 2월에 시작한 2580 초창기 기자로도 활동했다. 대표적인 보도로 충남 보령 서해 앞바다 식인 상어 취재가 있다. 식인 상어가 출몰했다는 제보를 받고 내려갔는데 상부에서 상어를 잡으라는 지시가 내려와 보령의 전문 잠수부 연합을 섭외하고 수중카메라까지 동원했다. 상어를 유인하기 위해 돼지피를 이용했으나 끝내 식인상어는 출몰하지 않았고 근처 어민들을 취재하고 수중취재를 하는데 그쳤으나 29.5%의 시청률을 올리며 인기를 끌었다.[15]
가장 위험했던 취재는 1987년 6월 항쟁이었다. 사건 기자였던 최일구는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아보자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주목했다. 특히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에 모든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는 시위도 횡행했다. 최루탄 공방이 오가던 중 대다수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해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가 열흘쯤 지나 해산하는 날, 모든 취재를 마쳤음에도 제대로 보도가 안될 정도로 언론 통제가 심했고 최일구는 이에 대해 부끄럽다고 뇌까렸다. 차량이 훼손되어 취재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16]
최일구가 취재한 내용중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보도는 1996년 당산철교 부실공사 보도였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 당산철교가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 많이 보도가 되었으나 최일구는 비파괴 검사를 해보기로 계획하고 밤에 다리에 올라가 무려 100군데 넘게 균열이 발생한 것을 확인했다. 이후 언론사들의 후속 취재가 이어졌고 재공사에 착수하게 되는 결실을 맺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17]
앵커 [편집]
최일구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앵커를 꿈꿨다. 기자가 방송을 하다보면 리포팅을 하거나 중계할때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판이 쌓이게 되며 그것이 나중에 앵커 오디션에서 긍정적인 점수를 받게 되어 앵커가 된다. 최일구는 목소리가 좋은 앵커가 좋은 앵커라고 말한다. 2003년 사회부에서 사건 데스크를 하고 있던 최일구에게 보도국장이 주말 앵커를 제안하고[18] 오디션을 거쳐 2003년 10월 11일부터 최윤영 아나운서와 함께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가 됐다. 최일구는 자신의 목소리가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신뢰가 가는 목소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19] 그러나 앵커가 되어 첫 뉴스를 진행하는 날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한 시간 특집으로 진행되어 최일구는 크게 긴장했다. 9시 정각이 되면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오며 방송이 시작되는데 이 불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제때 시작을 못하거나 말을 수시로 더듬는 등 실수를 저질렀다.[20] 2005년까지 앵커를 하다가 다시 보도국들로 들어가서 생활하던 중 2010년 1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다시 주말 《뉴스데스크》 진행을 맡았다. 주말 《뉴스데스크》에서는 최일구가 직접 출동하여 현장 체험을 하고 인터뷰를 하는 코너도 마련했다.[21]
최일구는 앵커 멘트에 대해 짧고, 쉽고, 공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CNN 뉴스처럼 좀 더 자유롭게 진행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22] 뉴스가 딱딱하다고 느꼈던 최일구는 대화하는 것 처럼 뉴스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여 "~군요"라는 독특한 말투와, 멘트를 탄생시켰고 '최일구 어록'이 나오기도 했다.[23][24] 모든 멘트는 사전에 대본으로 만들어놓고 진행하며 애드리브는 하지 않는다.[25] 여러가지 어록에 대해 "너무 가볍지 않느냐", "장난하는 것 같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26]
MBC 파업과 퇴사 [편집]
2012년 2월 MBC 파업 직후 파업에 참여하기 위해 부국장 보직사퇴와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에서 자진 하차하였다. 파업 참여 이유로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고, 징계가 풀린 후 보직을 받지 못해 2012년 10월 MBC아카데미 교육발령을 받아 3개월동안 교육을 받았고, 교육 종료후 교육발령이 3개월 연장되었다. MBC아카데미 교육을 받는 도중 2013년 2월 MBC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퇴사를 하였다. 퇴사 직후 SNL 코리아 제작진의 적극적인 설득에 2013년 4월 tvN SNL 코리아 위켄드 업데이트 진행자로 방송에 복귀하였다.
- 최일구의 주요 어록
- 위안부 강제징집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정부가 개입한 게 아니라고 우겨왔습니다. 기록이 없었기 때문인데 드디어 그 공식문서를 찾아냈습니다. 일본 사람들, 우길걸 우겨야죠.
- 홍도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가보지도 못했는데…. 홍도가 울고 있습니다
- 7호 태풍 민들레가 홀씨가 되어 소멸됐습니다. 다음 태풍도 장미 국화 채송화 이렇게 꽃으로 이름지으면 중간에 없어지지 않을까요?”
- 이렇게 더울때는 냉면이 최고 아닙니까? 그런데, 일부 냉면집육수에서 식중독균이 검출됐습니다. 그래도 저는 냉면먹겠습니다
- 항공기에 폭발물이 실려있다는 전화가 또왔습니다. 장난전화였는데요. 항공기 상대로 장난전화하면 큰일나니까 장난전화하지 마세요. 징역 3년입니다.
- 유권자들은 깨끗한 정치를 당부했습니다. 299명 당선자 여러분들 제발 싸우지 마세요. 머슴이 싸움하면 그 집안 농사 누가 짓습니까?
- ○○전자 압력밥솥이 최근 전국에서 펑펑~ 터지고 있지 않습니까? ○○전자 밥솥 쓰시는 분, 지금 당장 모델 확인해서 빨리 바꾸시고 5만원도 받아가세요
- 청춘 여러분!!! 인생 뭐 있습니까? 전세 아니면 월세죠!!!
최일구는 기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은 정치부장이나 특파원같은 일명 엘리트 기자 코스를 다닌것도 아니었다.[27]하지만 최일구는 다른사람이 알아봐주지 않아도 자기 할 일을 최선을 다한다는 신념아래 일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최일구는 은퇴 후 7080 세대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28]
주요 경력 [편집]
- 1985년 : 문화방송 입사
- 1985년 12월 : 문화방송 보도국 사회부 기자
- 1990년 : 문화방송 보도국 사회2부 기자
- 1997년 : 문화방송 보도국 경제부 기자, 노동조합 보도국 부위원장
- 1998년 : 문화방송 보도국 정치부 기자(총리실 출입 기자)
- 1999년 : 문화방송 보도국 정보과학부 IT 담당 차장
- 2003년 : 문화방송 보도국 사회1부 부장대우
- 2006년 : 문화방송 보도국 뉴미디어에디터
- 2010년 ~ 2012년 : 문화방송 보도제작국 부국장, 스포츠취재팀 팀장
- 2010년 : 《뉴스와 경제》 앵커
- 2003년 ~ 2005년 : MBC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
- 2010년 ~ 2012년 : MBC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
- 2013년 2월 8일 : MBC 퇴사(프리랜서 선언)
- 2013년 :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위켄드 업데이트 앵커
수상 경력 [편집]
기타 활동 [편집]
- 2005년 음원 <로케트를 녹여라> (작사·작곡·노래 최일구)
- 2006년 영화 《괴물》 아나운서로 까메오 출연
주석 [편집]
- ↑ MBC 최일구 前 앵커,화제의 옛뉴스 인터넷에 올려, 《국민일보》 2005년 9월 21일
- ↑ 깨방정 최일구 앵커 "와우아파트 기억, 부실공사만 보면 눈 뒤집혀 이뉴스투데이 2011년 7월
- ↑ 최일구, 9살 화려한 서울상경 불구 연탄가스 중독된 사연 뉴스엔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와우 아파트 거주…무너질까 밤 설쳐” 매일경제 2011년 7월
- ↑ 최일구 어릴적 아버지와 나눈 신문편지 추억에 결국 ‘눈물’ 뉴스엔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아버지께 러브레터 보냈다"…폭소 엑스포츠뉴스 2011년 7월
- ↑ 유세윤 “최일구의 ‘로케트를 녹여라’ UV보다 한수 위” 찬사 TV리포트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자작곡 ‘로케트를 녹여라’ 굴욕 사건은? 강원일보 2011년 7월
- ↑ 최일구 자작곡 로케트를 녹여라 굴욕담 ‘화제’ 매일경제 2011년 7월
- ↑ 최일구 “여드름 때문에 기자 포기할 뻔” 고백 TV리포트 2011년 7월
- ↑ MBC 최일구 앵커, '무릎팍도사'로 뉴스테스크 홍보에 나서다…"다음 어록은 뭐?" 마이스타뉴스 2011년 7월
- ↑ 최일구 “수습 경찰기자, 군대보다 더 힘들었다” 뒤늦은 과거 고백 뉴스엔 2011년 7월
- ↑ 최일구 “단독 특종이 대종상 수상보다 더 좋아” 익살 발언 뉴스엔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김만철 일가 탈북 특종 놓치고 후회막급" TV리포트 2011년 7월
- ↑ 최일구 “바다는 연못이 아니더라!” 취재비화 공개 일간스포츠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1987년 6월 항쟁 취재, 눈물이 났다 이데일리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부실공사' 취재로 눈에 불 켠 사연 스타뉴스 2011년 7월
- ↑ 황금어장' 최일구 "MBC 입사 때부터 앵커 꿈 꿨다" 아시아경제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싼티나는 내 목소리, 남들은 신뢰 간다고...” 헤럴드생생뉴스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첫 방송 실수로 ‘식은땀’… “뉴스...데...뉴스데스크” 마이스타뉴스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주말 뉴스데스크’ 복귀 첫 방부터 현장출동 뉴스엔 2010년
- ↑ 최일구 앵커 “CNN처럼 자유로운 뉴스 진행하고 싶다” 레이디경향 2011년 7월
- ↑ '무릎팍도사' 최일구, "악플로 자살한 연예인 이해되" 악플에 일침 리뷰스타 2011년 7월
- ↑ 최일구 어록 모음
- ↑ MBC의 ‘최일구 앵커 구하기’ 왕도(王道)있다 TV리포트 2011년 7월
- ↑ 황금어장’-‘무릎팍도사’ 최일구 앵커 ‘어록’ 탄생과정 공개 아츠뉴스 2011년 7월
- ↑ 최일구 “외국만 나가면 과묵, 특파원 못해 봤어” 소탈 매력 발산TV리포트 2011년 7월
- ↑ 최일구 앵커 “싼티나는 내 목소리, 남들은 신뢰 간다고...” 헤럴드생생뉴스 2011년 7월
최일구 앵커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 제목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라"
저 말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모난 돌이 정맞는다" 라는 속담이 반사적으로 생각이 난 건
경험에 근거한 것일까? 그런데 최일구 전 앵커의 강의를 듣다 보니 최일구씨는 어쩜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 같다는 생각. 사실 그의 외모가 신뢰감을 주는 것도 아니고 뉴스 앵커로서 목소리가
특출나게 좋으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대한민국 엘리트들이 모이는 mbc에서 그가 꿈꿔왔던
앵커가 되기 위해 방법을 찾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 오며 인정을 받지 않았을까.
그가 앵커가 되면서 많은이들에게 공감대를 일으키며 회자되었던 최일구 어록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앵커가 일상의 현장에서 소시민들과 대화하는 모습은 참신했다. 비록 김재철이라는
어용사장으로 인하여 그 간 보여주었던 참신함이 상처받고 mbc까지 망가지긴 햇지만 말이다.
이런 최일구씨의 이력이 그의 인생에서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지금의 변화를 만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그가 주고자 하는 메세지는 평범한 사람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강연회였다.
하지만 아쉬움이 크다. 감동이 없었다. 강연이 감동적인 것은 강연자의 말속에서 살아온 인생에
녹아있는 철학을 들을 수 있음으로서 사람들은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체화하는 것이 아닐까.
학이란 것은 그의 인생에서 확립이 될터이니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의 철학을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경험일 것인가. 아무래도 앵커로서 본연의 목적인 사실 전달에 주력해 왔으니 어쩌면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접근하는 강연회에 익숙하지 않아서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청중들과 거리를 좁히려 다양한
유모어를 구사하며 쉬운 예를 들어가는 모습에 진정성이 보였고 저 사람은 표리부동한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보여 준 것에서 긴장감없이 편안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너무 편했다는것이 문제라면 모를까.
서울의 몇 개구에서 살아봤지만 은평구는 은평구 아카데미가 있어 일반교양강좌는 물론
인문학강좌,은평난장등 다양한 강연을 들을 수가 있다는 점이 좋다.
http://edu.eunpyeong.go.kr/college/college01.asp
다른 구, 다른 시에서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많이 제공하여 정서적인 만족도를
높이는 것도 해당구민이나 시민의 자부심과 긍지를 높이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시민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