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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따스한 기후에 감싸인 해변에 행복이라는 물결이 넘실 거리며 구리빛으로 그을린 청춘 남녀들의 미소들이

떠도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호주는 말이다. 별천지로만 여겨졌던 그 곳에서의 스물 여섯의 내 모습.

10개월 나에게 무척이나 고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것은 신문에서나 혹은 TV에서나 보며 막연하게나마

동경하던 호주로 갔다는 생소함 이상의 것이다.

 

내 또래의 젊은 청춘이 그렇듯 나 또한 느즈막한 나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열병들과 번민이라 불러도 좋을

-적어도 나에겐- 고민들은 그 곳으로 내 몰았다. 여행이라고 해도 좋고 도피라 불러도 좋을 호주

Working holiday maker로서의 10개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내게 다가온 것은 그 이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

그 기억을 용기삼아 현재의 불편을 이겨 나가고자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 아름답기만 하던

내 스물 여섯의 호주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기억에 다시 곱게 빛을 내려면 지금 힘을 내야 하지 않을까.

 

벌써 10여년이 흘렀내요. 저는 1996314일 출국하여 그 해 일 년을 못 채우고

IMF구제금융을 받던 12월 그 것도 24일에 입국하였습니다. 당시 호주에서는 한국의 경제상황에

많은 관심을 보였었기에 한국의 IMF는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당시 한국은 호주의 두 번째 무역 상대국이었으니 당연할 지도 모르죠.

 

첫 째요? 일본이었죠. 전 그 때 공항 면세점에서 part timer로 근무하면서 고생쫑 행복쨍을 누리고 있었는데

고 놈의 IMF가 절 부르더군요. 비장한 마음으로(정말 비장했음) 일찍 들어가 보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인생의 반환점과도 같은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워킹홀리데이와 같은 것 말이죠.

10여개월의 호주생활은 지금까지도 내 삶에 용기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든든한 응원군이며

소중한 자산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약간의 무책임과 치기가 버무러진 자세로 시작된 호주의 첫 도착지인 시드니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긴 기초 회화마저 쑥맥인 실력에 가져간 현금이라곤 86만원이 전부였으니 말이죠.

경제적인 궁핍에서 오는 조급함으로 도착하자마자 파트타임 잡을 찾아나서야 했지만 먼저 온 한국인들이

이미 지나간 자리들뿐이었습니다. 마치 때늦은 늦여름 바닷가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사장을

홀로 걷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시드니에 있었던 9일간, 일본인 마나미를 알게 되었고 일본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설픈 영어에 귀를 기울여 주고 또 격려해 주며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수 많은 생각과 단어를 떠올려야 했던 그 답답함을 오히려 안쓰럽게 지켜봐 주었습니다.

그 건 다분히 편향적이었던 일본인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충분한 이유였으며 이후로 여러 일본의 젊은이들을 만나며

전 그들을 친구로서 충고와 격려를 해줄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둘이 고민하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저 빈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9일간을 긴장과 초조함속에 보내다가 우연히 그리피스에서 온

여행자를 통해 번다버그를 알게 되었고 지체할 것 없던 나는 맥패커씨를 타고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포도 주산지로 알려진 Grifith에서 농장일을 하다가 번다버그로 가는 길에 시드니에 들른 것이었습니다.

18시간을 타고 브리즈베인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탄 후 6시간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터미널에서 알게된 Princess of wales까지 찾아가던 그 길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한 낮 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차량도, 인적마저 드물어 오히려 불안했던 도시. 짊어진 배낭아래로

흘러내리던 땀방울, 업었다가 들쳐 매었다가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하며 황량한 그 곳에 도착했지요.

농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니 편해지더군요. 외국인 친구들과도 함께 놀러 다니며 한 잔의 맥주로

피로를 풀기도 하며 말이죠. 호주에서 다가오는 모든 경험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리라 믿었습니다.

외국인들과 격의없이 만나며 대화하고 친구처럼 즐겁게 지내기도 하며 함께 Bundaberg Aqua Scuba에서

open water 라이센스를 취득하였습니다. 가끔 주말이면 시내의 다른 백팩에서 한국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지요. 번다버그에서 보낸 약 3개월의 시간동안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별 것 아니구나하는 자신감을 얻은 것은 확실 했습니다. 가진 돈이 없어 일을 구해야 한다고 1000$을 들고

번다버그로 들어갔던 제가 다음 행선지인 Fraser island로 갈 때는 700$이 있었으니 말이죠.

번다버그에서 일본인 지애를 만났습니다. 동갑내기인 지애와 함께 한 2개월여의 여행은

호주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중 하나입니다. 함께 히치하이크를 하고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매니저에게 말해 같이 일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전 보물처럼 가지고 있던 된장과 고추장으로

수퍼에서 산 여러 호주 야채를 곁들여 국이나 찌게를 끓이곤 했는데 지애는 그 국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입맛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번다버그를 떠나 프레이저 아일랜드에서

Safari tour를 마치고 전 Gold coast로 갔고 지애는 Rock hamnpton으로 갔습니다. Suffers paradise 라는 이름처럼

왜 그리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지 그 때의 지독한 외로움은 지애와 헤어진 직후라 더했는지 모르죠.

식당을 찾아봤지만 잡을 구한다는게 하늘의 별따기와 같더군요. 번다버그에 있을 무렵 써퍼스 파라다이스에서

올라온 누군가가 극구 말리던 기억이 새삼 떠 오릅니다. 결국 다시 TNT를 뒤적이다 눈웨 띈 보웬.

보웬으로 갈 생각을 하고 거리를 거닐던 중 일전에 지애가 보여주었던 유스호스텔 티켓이 생각났습니다.

롹 햄프턴의 몇 개 유스호스텔 전화번호를 알아내었고 그 중 몇 군데 연락을 하다가 통화가 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감정이 나와 다름이 없음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 녀는 Woof를 위해 Miliam vale

간다더군요. 결국 그녀와 다시 Agnes water의 독일인 가정에서 일주일간 팜스테이를 함께 했습니다.

독일인 부부와의 생활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독일인부부는 vegitarian이었으며 BeatlesImagine처럼

종교에도 국적에도 그리고 피부색에도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빵이나 요쿠르트를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식탁에서는 Korea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보며 BeatlesImagine을 애기하곤 했습니다.

아침이면 꽃이나 수목에 물을 주고 오후엔 히치하이크로 주변에 놀러 다녔지요. 일주일 머무른 이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에어리비치를 향했습니다. 에어리비치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여러 도시중 호주에서

아름다운 곳중 한 곳이라 감히 말씀 드립니다. 아담한 마을과 같은 분위기에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아름 다운 곳이죠. 13Begley에서 3일을 지내며 에어리 비치를 만끽했습니다.

45$하는 Cruze도 괜찮았습니다. 비록 배멀미와 감기가 겹쳐 고생을 했지만 말이죠.

지애와 함게 했기에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릅니다. 마을너머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정경에 취하기도 하고 언덕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유치한 궁금증에 걸어 올라갔다가 털래 털래 걸어

내려오는 무미건조함도 있었지만 말이죠. 이제 돈도 떨어졌으니 다시 보웬으로 가야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간 보웬의 정류장 근처에 있는 Denison hotel에서 몇 일 지내다가 이 곳 저 곳에 정보를 얻어

Trinity backpackers로 옮겼습니다. 보웬의 가장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그 곳에서 다시 일을 하면서

부족한 잠과 싸워가며 회화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어떤 이는 호주에 도착하면 어학원에서 3개월정도의

회화공부를 하고 쉐어나 하숙을 하지만 전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오히려 악이 생기더군요.

처음 방을 얻었을 때 룸메이트로는 스코틀랜드의 귀여운 아가씨 Sarah Rollo였습니다.

호주에 오기전 멜 깁슨 주연의 Brave Heart를 감명깊게 본 지라 영화 애기를 하며 스코틀랜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니 반가워하며 잘 해주더군요. 치마입고 악기 부는 남자들하며 이런 저런 애기를 하자

사라도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고 말이죠. 우린 쉽게 사라와 친해습니다. 같은 방을 쓰는데다 워낙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라였기에 우리 유니트는 사라의 친구들로 차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옆 방에는 23살인 Hieth라는 뉴질랜드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확실치 않지만 전 히쓰라고 불렀습니다.

히쓰의 영어만 그런 건지 뉴질랜드 영어가 그런건지 모르지만 조금 발음이 특이했어요.

히쓰는 사라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있는 곳엔 히쓰의 모습도 보였으니 말이다. 2주일뒤 사라가

케언즈로 갔을 때 외로워 보이던 히쓰. 언젠가 일이 끝나고 와서 보니 씨익 웃는 그의 입에서

이빨 두 개가 없어진 것을 알았고 나는 누가 그랫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뒤에 알고 보니 싸움이 있었는데

히쓰가 상대방에게 더 많이 상처를 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큰 키와는

달리 정말 순진해 보이던 히쓰. 언젠가 술에 취해 쓸쓸한 듯 사라가 보고 싶다며 말하던

히쓰의 푸른 두 눈엔 연민이 가끔 비치곤 했습니다. 사라에게 전화도 못하고 그 저 주소와 전화번호만 갖고 있다던

뉴질랜드에서 온 히쓰와는 같이 일도 하며 훗날 보웬을 떠나기 떠나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습니다.

당시 보웬은 전국에서 Picker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한국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자신의 계획대로 생활을

잘 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또는 그렇지 못한 이도 있습니다. 어학은 호주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의 활동폭을 넓힐 수 있고 다른 여행자들과의 교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요.

영어를 잘 하시는 분은 괜찮겠지만 못하시는 분이라도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한다면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호주까지 가서 어학 하나의 이유로 풍부한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을까요. 지애의 비자가 끝날 무렵 이 되어 귀국편을 타기 위해 케언즈로 출발하게 되는 날 아침입니다.

지애가 떠나는 날 전 지애를 배웅한다고 전날 매니저에게 말하고 하루 쉬었습니다. 모처럼 늦잠을 잤어요.

햇살이 창가로 나 몰래 살짜기 발을 내 딛은 늦은 아침. 눈을 떠 봅니다. 허리가 여전히 묵직합니다.

이리 저리 뒤척여봅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지애가 보입니다. 바보같이 웃내요. 헤하고 말이죠.

방긋 저두 웃습니다... 몇 시 차냐고 묻자 2시차라고 합니다. 밥먹고 가면 되겠구나. 일어나서 이빨을 닦고

샤워를 해 봅니다. 백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다들 일나갔군. 방에 들어와보니 짐을 챙기고 있는 지애.

지애는 내가 일과 후에 다른 곳에 가서 술을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면 따라 오지 않고 혼자서 방에 있었는데

쉽사리 다른이에게 말을 못 거는 성격이라 심심했을 것입니다. 있을 때 잘 할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좋아했던 지애. 지금 생각하면 처음엔 정말 당돌하다 싶던 아이.

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정말 안 어울릴 거 같았는데 말이죠. 둘이서 공연한 일로 신경전을 펴기고 하고,

애써 토라진 너를 달래려고 애쓰기도 하고,.. ~! 너를 안지 어느새 2개월이구나. 이제 가는구나.

점심때 어제 저녁에 Coles에서 사 온 닭다리를 이용해서 야채를 섞어서 닭죽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식사입니다.

지애와 함께하는. 버스안에 지애가 앉아 있습니다. 울지 않습니다. 그래 너는 강하니까,

차가 출발 할 무렵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고 어깨에 교대로 올리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내요.

나도 같이 해 주었는데 어제 같이 본 영화에서 어느 연인이 헤어지면서 나누는 제스춰였습니다.

몇 일뒤 케언즈에서 신라면과 과자, 그리고 고추장이 소포로 배달되었더군요. 이후 1400$이 모이게 되면서

케언즈로 출발했습니다. 워킹홀리데이 기억에 농장에서 과일딴 기억만 있는 거 아냐? 하는 자문에서

비롯된 자답이었습니다. 케언즈에 와서는 다른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는 신념으로

찾아나선 끝에 국제공항내의 면세점에서 파트타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잡을 찾기 위해 비디오가게,

모텔, 백패커스, 주유소등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힐튼 호텔을 찾았을때의 기억이 납니다.

정성스럽게 resume를 작성하고 그 것을 봉투에 넣어 호텔문으로 들어가저 도어맨이 묻더군요.

손님같지는 않아서 그러했겠지요. 전 잡을 구하고자 지원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자신이 매니저에게

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냥 전해주고 말았는데 몇 일뒤에 편지가 왔더군요. 관심에 감사하지만

현재는 채용계획이 없고 계획이 있을때 다시 연락하겠다는 글과 매니저의 싸인이 든 내용이었습니다.

비록 소기의 성과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어디든 두드려보면 그래도 대답은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밤에도 문을 여는 가게는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저녁밥을 먹고 돌아다녔지요. 결국 에스플러네이드의

푸드코트에 있는 중국식당에 디쉬워셔로 취업했지만 곧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던 일을 다른 이가

같이 하게 되면서 말이죠. 한 시간에 6$ 50C였지만 감사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우연찮게 일본인들이

자주 가는 일본의 식료품점의 보드를 보다가 공항의 면세점에서 일본인을 찾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급히 연락을 하고 곧 인터뷰를 한 결과 고용이 되었지요. 면세점에서 하는 일은 일본인이나

한국인에게 보다 비싼 위스키나 꼬냑을 프로모션 하는 일이었습니다. 할인점에 도우미들이 물건 홍보하듯이 말이죠.

유럽인들은 대부분 저렴한 제품, 자신의 기호품을 찾는데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은 선물을 하기 위함에서인지 몰라도

비싼 제품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판매를 위해서 제가 고용되었던 것이죠.

농장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한 근무환경과 높은 급료는 그 동안 고생했던 것에 보답이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대견스럽더군요. 시간당 15$이 넘는 페이를 받았으니 꽤 많은 금액이었지요. 집도 렌트해서

일본인에게 작은방을 임대하고 큰방은 도서관에서 알게 된 한국인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일본인은 물론 이태리인과도 같이 생활을 하며 보다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에 대한 이해가 가장 컸던 거 같내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작은 목소리로 애기를 하며 한국인에 대한 어떤 오해도 없었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라면 충결일까요.

호주는 전 세계 특히 유럽에서 많은 젋은이들이 옵니다. 호주의 드넓은 자연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또 체계적으로 짜여있는 관광 시스템은 그 돈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그 곳처럼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중 3일에서 4일 오전은 공항게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콜스에서 산 싸구려 낛싯대를 들고 케언즈항에서 낛싯대를 드리우곤 했습니다.

제가 렌트한 집이 있던 Sheridan st. 에서 케언즈항까지는 번화가인 esplanage st.를 지나 자전거로

15분정도 걸립니다. 큰 도로 주변으로 있는 도시의 건물들은 시드니나 여타 도시와는 다른 특색을 엿 볼수가 있습니다.

당시 인구는 10만 정도의 작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더욱 커졌겠지요. 변화도 많았을테구요.

작지만 우리나라의 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market도 있고 큰 공원도 있으며 문화적인 환경이

잘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밤에는 Beaches라는 나이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추며 놀기도 했습니다.

케언즈는 그 간의 농장생활과는 또 다른 이국생활의 묘미를 주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이국문화와

호주를 조금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간 적막하기만 했던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생활에

또 다른 파스텔빛 색채를 안겨주었습니다. 10여개월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로서의 생활을 짧게나마

요약을 하려니 불완전한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미숙한 글솜씨로 인해 군데 군데 이 빠진 동그라미처럼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은 귀국이후 제이 블로그를 통해 조심스럽게 올려놨답니다.

그리고 호주의 경험을 기억삼아 다른 나라도 갈 수 있었고 말이죠. 일상에서 그 때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애기할 일도 없고 또 말한 다는 것도 겸연쩍었는데 그 동안의 생활을 이렇게 쓰면서 뒤 돌아보니

그 건 기억뿐이 아니었내요. 가끔 그 때의 앨범을 뒤적이거나 호주 소식을 우연찮게 보거나 접하게 될 때는

그 때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클로즈업되기도 합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의 충실함에 감사하며

내일의 계획을 다지다가도 그 때의 모습들이 미소짓게 하는 걸 보면 말이죠. 길지도 않은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호주에서의 생활은 이후 그 해 IMF로 인하여 일정보다 빨리 돌아와야 했지만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경험은 이후 제 인생의 새로운 변곡점으로 용기와 기회를 가져다 준 무지개와도 같습니다.

누군가 워킹홀리데이로 고민을 한다면 전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젊다는 건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그 기회다.”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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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백팩으로 돌아와 넓은 창으로 바라본 케언즈는 참 아름답기만 하다. 저 화려한 야경속에서도 누군가는 울고 있겠지. 누군가는 웃고 떠들테고 말이야. 백팩을 이리 저리 서성이다가 침대에 누웠다. 삐그덕거리는
녹슨 침대 소리라도 들린다는 게 어딘지, 이곳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기만하다. 농장과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그 곳에서는 많은 대화가 있었는데, 내가 농장생활에서만 익숙해서 그런가 보다. 케언즈에서의 생활이다. 내일부터는 돌아다녀야겠지. 어디부터 가야 하나. 케언즈에도 한국인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는데,...

햇살이 눈에 부시다. 땀을 흘리고 있다. 침낭을 개고 세수를 하고 부엌에 가서 그릇과 팬을 준비하면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눈다. 정말 한가한 사람들 같다. 잠시 케언즈에 레포츠 목적으로 잠시 머무르다 가는 사람들이 많군. Pub에서,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만 빼고 왜 사람들은 잘 나가는 거 같아 보이는 거 같다. 기분 나쁘게,... 후다닥 점심을 해치우고 지도와 가방을 짊어진채 거리를 나섰다. 깨끗한 거리,현대식 시설을 갖춘 쇼핑센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유명 브랜드를 내 건 상점들, 최신 기종이 가득찬 오락실. 도시의 모든 색깔을 갖고 있는 케언즈에서 돌아다닌다. job을 구하기 위해, 우선 미팅 플레이스로 갔다. 식당에서 디쉬워셔라도 해 볼양으로 말이다. 자신없는 영어로 인해 디쉬워셔가 가장 만만해 보인다. 태국, 중국, 일본, 말레이지아, 한국등 각국 식당이 모여 있는 곳. 한국식당으로 가보자.. 인사를 단정이 하고 사정을 말했지만 얼마전에 다른 이가 채용이 되어 있었다. 아깝다. 그 사람과 간단한 수인사를 하고 혹시라도 난중에 일을 그만 두게 되면 내가 종종 올 테니 알려달라고 했다. 7$을 받는다고 한다. 한 시간에 7$. 농장보다는 작군,옆의 일본 식당에 가 보았다. 우동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밥을 먹고 왔는데, 쩝! 간단한 인사와 함께 혹시 사람을 구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직 구하지 않는 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한다. 아르바이트 구할 만한 테 없냐는 물음에 씨익~ 웃으며 좀 힘들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에스플러네이드에 가면 Food Court가 있다고 그 곳에 한 번 가보라고 알려준다. 씨익~ 나도 웃음을 지었지만 답답해져 왔다. 에스플러네이드라, 어떤 곳일까, 저 멀리 바다가 보이긴 했지만 아직 바다구경할 엄두는 내지도 못한 터였다. 투어 에이전시의 광고가 요란한 거리를 지나치며 50여m를 걸었다. 길 건너 한 아름 은 될 듯한 나무들이 마련한 그늘 아래로 탁자들이 놓여있고 선글라스와 티와 반바지를 입고 웃고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 뒤로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잔디가 깔려 있다. 바다가 보인다. 백팩과 식당, 그리고 상가들이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저 만치에 Pears 라고 쓰여있는 하얀 건물이 보인다. 부둣가를 배경으로 서 있는 컨물 앞으론 여러 수목들이 작은 공원을 만들고 있다. 쇼핑상가인가.
저 곳에도 한 번 가 봐야 겠군. 푸드 코트를 들어섰다. 미팅 플레이스보다 훨씬 깔끔했고 그 곳을 통해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시장으로 들어 설 수 있어 밤이면 더욱 붐비는 곳이다.

여러 식당을 돌던 끝엔 만난 중국식당. 마침 그 곳에는 한국인 여성 두 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사정을 애기 했고 마침 그 중 한 명이 곧 일을 그만 둘텐데 아마 자기 대신에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며 사장한테 애기를 잘 해보란다. 사장은 다음주 월요일에나 다시 한 번 와보라고 한다. 와우 이~ 얼마나 다행 스런 일인가. 마침 아가씨가 한 시간 쯤 뒤에 일이 끝난다고 해서 난 부둣가를 서성이다가 그 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나온 애기들. 그리고 그 녀의 계획.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말이다. pears로 가 보았다. 그 곳은 부둣가에 위치한 쇼핑몰로 꽤나 사진의 배경장소로는 적격인 장소였다. 부둣가에 정박한 유람선들과 갖은 배들이 바다위 갈매기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잠시 부둣가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그래도 일자리를 수월하게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디쉬워셔라고? 쉬는 시간이 없이 바쁘다고 하지만 머 농장에서도 했는데 여기는 쉬울거야. "하~ 난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케언즈 생활도 잘 할 거야. 넌 운이 좋은 놈이니까 말이야." 피어스 안으로 들어가니 일본인으로 보이는 관광객이 무리지어 다니고 있다. 그리고 상가 어느 곳을 보아도 보이는 일본어들. 일본어로 안내 되어 있는 각종 브로셔들. 한글이 여기에 걸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2층으로 올라가면서 어디에 일자리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음, 저기 식당이 있구나. 우선 식당가는 다 돌아다녀 봐야지. 난 그 중 한 식당의 웨이터에게 사정을 애기 했고 그는 곡 점장으로 보이는 듯한 이한테 안내를 해 주었다. 난 그애게서 기회가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을 듣고 이력서를 남겨두고 왔다. 몇 군데를 가 보았지만 마찬가지의 답변과 이력서를 남겨놓고 오는 정도다. 이젠 어디로 가나.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무언가 나올 지 모르겠다. 에스플러네이드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케언즈 시내를 돌아다니며 처음 도착했던 터미널에도 걸어가 본다. 백팩으로 돌아오니 늦은 밤. 여전이 내겐 말보로 말이 담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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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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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티로 옮겼다. 우리가 얻은 방은 이층 침대가 놓여있는 작은 방이다.
지금까지 생활해 본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된 곳이엇다.
이 곳 저 곳을 돌아디녔지만 번디의 프린세스보다 청결하지 못한 곳은 없었다.
 이후에도 말이다. 유리로 환희 트인 문을 열면 보이는 탁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는 거실. 왼쪽편으로는 전기 오븐이 있고 큰 냉장고가 놓여있다.
그리고 방이 두개. 방에는 옷가지와 짐을 넣을 수 거울 달린 농이 서 있었다.
트리니티에는 이러한 구조의 건물이 여러개가 있었다. 쥔은 UNIT 라고
구분을 했다. 백팩을 둘러싸고 있는 호주의 나무들. 정말 호주라는 것이
실감날 정도로 내부가 넓은 곳이다. 백팩을 나와 2,3분 정도 걸으면
바다에 빠질 수 있었고 백사장을 걸을 수 있었다. 보웬에 간다면 트리니티를
추천하고 싶다. 한 가지 흠이라면 시내에서 멀다는 것이 있지만 매일 시내를
왕복하는 백팩소유의 벤이 있어 그리 불편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걸어서 20분 정도 되는 거리에는 울월씨와 호주 슈펴체인의 양 축을 이루고 있는
coles가 있고 거기서 또 20분을 걸어야 시내가 나오는 트리니티.
한 쪽 켠에 포맷볼 데이블이 놓여있고 같은 건물에 비디오 시청실이 있으며
세탁기도 있었다. 전화기가 놓여있는 트리니티 백팩커스.


보웬은 참 조용한 도시다. 한 동안 일이 일찍 끝나거나 토요일 같은 날은 병기,영민을 쫒아 처음으로 접한 Tab라고 쓰인 경마장을 찾아 경마에 손을 대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베팅을 하려면 경마장을 가야 하지만 호주는 Tab라는 곳에서 모니터를 앞에 두고 호주의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경마에 베팅을 할 수가 있었다. 병기는 가끔 하루 일당만큼도 벌어서 맥주를 사곤 했다. 잘 생긴 얼굴의 부산 사나이인 병기는 성격이 활달하고 모난데가 없어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강남대를 다녔던 영민은 노래를 참 잘 불렀다. 밤이면 기타를 들고 거실에 나와 기타를 치면 외국인들도 모여들어 박수를 치며 관심을 보였다. 호주는 복권도 많고 추첨도 많고 요즘의 한국을 보는 듯하다. 슈퍼체인에서 승용차를 거는 모습은 그 땐 생소했으니 말이다. 영민에게 김치 만드는 법을 배워서 케언즈에서 반찬은 참 잘 먹은 거 같다. 김치가 있다는 것 하나로 말이다. 트리니티로 옮겼을 때 일주일치 방삯을 내고 모니 남는 건 60$정도.
일주일 방세가 90$가량이었으니 다음 주 방삵은 없는 것이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호기있게 지애와 콜스를 가서 이 것 저 것을 음식꺼리를 샀다. 그런 생각들은 지금까지 보내 온 호주에서의 생활에서 배운 것? 터득한 것? 여유같은 것이 아닐까. 콜스에서 트리니티까지 걸어오면서 군것질 꺼리까지 샀다. 콜스 앞에는 작은 호수가 있어서 그 곳에 앉아 호숫가를 노니는 이런 저런 새들의 날개짓을 보며 말이다. 날씨 좋다. 다음 방삯을 내야 할 날이 다가왔다. 일이 주어 지지 않아 수중에 돈이 없던지라 나는 쥔을 찾아갔다. "나 돈 없다. 일이 주어지면 돈 갚겠다. 나 여기서 한 석달 있다 갈거다." 몇 일뒤에 일이 나왔다.
처음 방을 얻었을 때 룸메이트로는영국인 아니 스코들랜드의 귀여운 아가씨 Sarah Rollo가 쓰고있었다. 호주에 오기전 멜 깁슨 주연의 Brave Heart를 감명깊게 본 지라 그 애기를 하며 스코틀랜드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치마입고 악기 부는 남자들하며 이런 저런 애기를 하자. 사라도 한국에 관심을 가진다. 지애와 난 쉽게 사라와 친해졌다. 같은 방을 쓰는데다 워낙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라. 항상 우리 유니트는 사라의 친구들로 차 있던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어울리고 있었다. 옆 방에는 23살먹은 Hieth라는 뉴질랜드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확실치 않지만 난 히쓰라고 불렀다. 히쓰의 영어만 그런 건지 뉴질랜드 영어가 그런건지 조금 발음이 특이했다. 히쓰는 사라를 좋아했다. 사라가 있는 곳엔 히쓰의 모습도 보였으니 말이다. 한 2주일뒤 사라가 케언즈로 갔을 때 외로워 보이던 히쓰! 언젠가 일이 끝나고 와서 보니 씨익 웃는 그의 입에서 이빨 두 개가 없어진 것을 알았고
나는 누가 그랫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뒤에 알고 보니 히쓰가 더 많이 상처를 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했단다. 하여간 큰 키와는 달리 정말 순진해 보이던 히쓰. 언젠가 술에 취해 쓸쓸한 듯 사라가 보고 싶다며 말하던 히쓰의 푸른 두 눈엔 연민이 가끔 비치곤 했다. 사라에게 전화도 못하고 그 저 주소와 전화번호만 갖고 있다던 뉴질랜드에서 온 히쓰와는 정말 친하게 지냈다. 참, 나에게 사라는 떠나며 다이어리에 글을 남겨 줬는데 스캐너가 없어서 아쉽다. 그 글의 내용을 옮겨본다.

Sarah Rollo
Saint Giles Manse 18 Reidhaven street,
Elgin, Moray Scotland. U.K\
01243 537212

Dear Johnie,
Please feel free to write ant time to practise your English.
I 'll definetely write back - for sure -
maybe I 'll see you in Scotland -
You are welcome to stay at my house.
Love from Sarah
                 XXXX
 
뒤에 찰리라는 영국인에게도 메시지를 받았는데
도저히 알아 볼수가 없었다. 그냥 웃고 말았는데
-그 걸 스캔떠야 하는데-
사라는 정성스럽게 또박 또박 써 주었다. 찰리가 악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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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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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터벅 터벅 걸어온다.
엄습하는 외로움. 호주에 첫 발을 내 디딜을 때만해도 안 그랬는데,
번다버그로 출발하더 그 날, 터미널을 찾으면서 이랬을까.
하비에이 터미널은 무척 넓다.
저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너무나도 한적한 빈 터들.
하지만 난 움직여야 했다. 난 서퍼스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
잡을 구해야 했기에 말이다.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고
내일 이곳을 떠난 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우선 경찰서에 가서 분실 신고를 하고 접수증을 받아야겠지.
이미 해는 저물고 있었다. 깔리는 어둠으로 더욱 혼자임을 느끼던
그 곳에서 경찰서 찾기를 30여분. 다행히 경찰서는 Olympus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 경찰서 간판을 보고
들어섰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경찰서 업무가 끝났나?
경찰서도 문을 닫나 싶었지만 리셉션으로 보이는 곳은 불만 켜 있고
경찰관은 없었다. 유리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설마 경찰서가 문을
닫으랴 해서 문을 흔들기 시작했다.
"excuse me" "Nobody there"를 연발하며 말이다.
내일이면 이 곳을 떠야할 텐데 촉박했다. 얼마를 흔들었는지 모른다. 저 귀퉁이에서 느릿 느릿 경찰관이 걸어 나온다.
반가운 마음이었고 그는 의아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는대로 프레이저에서 카메라를 잃어 버렸고 보험에 들었기
때문에 경찰관의 접수증이 증거로 필요하다고 애기를 했다.
다급하니까 말이 어떻게든 나온다. 물론 문법같은 것을 따지며 하는
그런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 알아 듣고 있다는 것이 어딘가. 영어는 많은 경험을 쌓으며 늘어나는 것 같다. 그는 차분히 들어주고 나의 말을 확인한 후 나의 여권을 보았고 접수증을 써 주었다.
그 곳에는 그의 이름과 소속.그리고 접수번호등이 적혀 있었다
한국의 경찰과는 다른 느낌. 마치 어떤 가게에 손님으로 온 느낌이
들 정도로 친절했다면 억지일까?

올림푸스로 돌아왔다. 잠시 누웠다가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가치를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서퍼스 파라다이스. 지금은 비수기라는데 과연 일자리가 있을까? 지금도 지애는 버스를 타고 있겠지?
락 햄프턴이라,..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 번디의 친구들은
잘 있을까? 머리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상념의 가지들. 나는 한 끼의
식사를 준비했고 그 것들을 먹어야 했다. 때론 먹는 게 얼마나 사람을 구속시키는 건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이 건 물론 그런 적이
있었다는 과거형이다. 대과거형으로 쓰고 싶다). 정말 미워했던
부류중에 한 사람이 취미가 식도락이라는 사람들이었다. 먹는다는 것, 잔다는 것,이런 기본 적인 것들에 회의를 품어본 사람은 알리라.
내 기분을, 침대위에는 짐들이 어수선하게 놓여있었고 지애가 남겨놓은 흔적들이 얄미워 보이는 밤이다. 그 날 덴마크에 입양된 한국인을
만났다. 그리고 재일교포도 보구, 덴마크 여성은 나에게
자기의 이름을 한글로 써 보이며 어떻게 읽는지 물어봤고
 한문으로는 어떻게 쓰는 지도 물어보았다. 나는 한글만으로 정확한
한문을 알 수는 없다고 말하자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자기의이름이 한국에서 어떻게 불리는 줄 알아서 기쁘다고
했다. 그 날 잠을 어찌 잤는 지 모르겠다. 대충 잤겠지.
다음 날 올림푸스 밴을 타고 터미널로 왔고 서퍼스 표를 한 장 끊었다. 내내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돌아다녀야 하는 걸까?
인생이 참 뭐 이따위냐. 젠장.
그래, 여행이라 생각하자. 그냥 서퍼스도 갔다 왔다고 말하면 되지 머,
여행이 별거냐. 푸~! 제길. 도대체 버스를 몇 시간을 타는 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4시간만 버스를 타도 빨리 내리고 싶었는데,
이제 그 정도는 우스울 것 같았다.

서퍼스에 대한 기억이 적다. 서퍼스를 띠엄 띠엄 봐서 그런가 보다.
4일간의 체류기간이 짧다면 짧을 수도 있겠지만 가슴에 와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단 한 시간의 기억가지고도 책 한권을 쓸 수 있다고 행각을 한다. 아마 서퍼스에 대한 강한 인상이 남지 않아서 인가보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도시. 기억에 남는 대로 끄적거려 본다.
터미널엔 써퍼스에 있는 백팩의 직통전화가(무료) 있어서 이 곳 저 곳에 전화를 걸어 가장 싼 곳을 택했다.
너무 멀어도 안 되기에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저렴한 곳을 찾았다. 단 1불의 차이었지만
아직까지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방을 구하고
시내를 돌아다녀 본다. 써퍼스 파라다이스. 써퍼들의 천국.
그래 바닷가가 좋다. 파도가 써핑하기에 알맞게  치고 그 위로 써핑을 즐기는 사람들. 서핑을 즐긴다. 일자리를 찾는다. 하 하 하!
아침 나절부터 일어나서 가장 번화가인 Orchid av.를 거닐며
일거리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비수기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답변만을 들으면서 공치면 바닷가로 나가 미팅에서
바람맞은 사람 심정으로(사실 이 기분은 모르지만 짐작에, 아니
실연당한 기분으로, 이 건 당해봐서 안다.) 바닷바람을 맞곤 했다.
바다에 잠겨서 즐거워 웃고 마냥 떠드는 사람들. 번디에서 떠나기
얼마 전 써퍼스에서 올라 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가 써퍼스로
간다고 하자 극구 말렸었다. 그는 써퍼스에서 같은 백팩을 쓰던
외국인과 친해져서 그 외국인이 일자리도 알아주고 외국인이 떠날 때는 자기가 갖고 있던 써핑보드를 주고 가서 해변에서 써핑보드를 타곤
했다던 부러운 기억의 소지자였다. 그의 우려를 뒤로 하고 이 곳에
왔는데 푸하~! 참. 당시 난 프레이저에서 얻은 발바닥 상처 때문에
바닷물도 아닌 모래사장 근처에서만 맴돌며 그 것들을 보고 있었다.
참. Surfer's paradise라는데, 이 곳까지 와서 모래사장에도
못들어가고 바닷물근처에도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그렇게 이틀간을 보내며 밤에는 일본인이나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들은 저녁이면 나이트에 가서 흠씬 놀다오곤
했는데 나갈 때는 분명 혼자인데 아침에 일어나면 둘이 누워있곤 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런 거 신경쓸 것이 있겠는가. 써퍼스는
부르조아들의 천국이었다. 거리에는 세계 유명 브랜드의 식당과
상품점들. 그리고 24시간 열려있는 편의점들. 일본인만을 위한
편의점이 있다. 쩝! 그런데 이상한 건 그 곳 거리는 무척 좁다는 사실. 그 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그 곳은 남부에서 브리스베인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인데도 불구하고 길은 편도 2차선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 번은 일본의 스모선수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의상으로 서퍼스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가끔 호텔에서 일본 스모선수들을
초대해서 스모를 소개하는 것 같았다. 서퍼스가 일본의 자본에 의해서 발전한 것인만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케언즈가 일본의
자본에 의해서 키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의
좀 이름있는 섬들은 일본인 것이다. 세상에 그게 다 부러울 때도
있던데 사람 마음처럼 오락가락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한국에 있을 때 사업가들이 해외에 땅을 사두면
그렇게 욕을 하고 그랬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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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그리 가깝지 않은 터미널까지 밴을 타고 가려면 말이다. 닐은 백팩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이른 새벽에 같이 일어나는 경우, 터미널까지 태워주었는데 짐이 많은 이용자들의 경우는 일찍 일어나서 마지막 밴을 타고 터미널에 내려선다. 그 동안 같이 일했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떠나려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에 내려선 우리는 예약한 버스를 확인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베낭을 확인해 보니 이 곳에 낯 선 이방인으로 세 개의 가방을 들고 올 때가 떠 오른다. 베낭이 줄어든 지금은 그 무게만큼 시원섭섭한 마음이다. 두 달전에 이 곳에 내려섰을 때 지금을 상상했을까? 버스는 번디를 출발하면서 번디의 관통하는 강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나는 틈틈이 저 강에 가서 말보로를 말며 시선을 던지곤 했는데, 후훗! 지애는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있다.

시간 20분 뒤! 어느새 버스는 하비베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건물들과 도로는 번디와는 다른 깔끔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여서 그런가보다. 우선 숙소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숙소를 잡는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저 편 주차장 앞에서는 1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숙소직원들이 자기 숙소로 오라고 장점들이 적힌 나무판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지애를 세워두고 그들에게 다가가 이 것 저 것을 물어보았다. 우선 하루를 묶고 더 나은 곳이 있다면 그 곳으로 갈 요량으로 괜찮아 보이는 한 곳을 선택했다. Olympus 였다. 밴을 타고 그 곳에 도착한 것은 5분쯤 뒤 유럽의 어느 가정집과 같은 생김새의 근사한 곳에 내려섰다. 리셉션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른 몇 명의 여행객을 상담하고 있었다. 체크 인하기에 앞서 사무실 내에 있는 여러 브료셔들을 챙겼다. 사파리에 관한 내용들. 그리고 이 곳 하비베이의 지도등을 몇 부 집어들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응해줬고 편한 마음으로 방을 잡았다. 번디에선 상상도 못할 정도로 깨끗한 방이 2층에 4개 있었다. 거실에는 보기에도 편한 소파와 티브이가 자리하고 있었고 베란다엔 다 자란 나무가 양 팔을 길케 뻗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빛살에 반짝였고 그 위로 섬들이 보인다. 저 중에 하나가 프레이저일까?

몇몇 외국인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2층에 방이 4개. 그리고 아래층엔 방이 두 개있고 작은 부엌이 잇었다. 탁자가 놓여진 깨끗한 모습. 여행하는 기분이 이런 걸꺼야. 짐을 풀고 지애와 상의한 끝에 3일뒤에 프레이저 사파리 투어 예약을 하기로 했다. 예약과 방요금을 정산한 후 시내로 나가 큰 수퍼로 들어갔다. 울월씨(Wool wolthy)체인은 호주전역에 깔려있는 대규모 수퍼 체인망이다. 그 곳으로 들어가 간단한 몇 가지 야채와 빵과 음료수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를 구경했다. 시내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지애는 음식을 잘 못하는 편이다. 언젠가 지애가 해 준 수시(초밥)외에 할 줄 아는 음식이 없었다. 수시라고 하니까 수시인 줄 알고 먹었지만 말이다. 난 물을 올려놓고 야채를 썰고 번디에서 어느 한국인이 귀국하게 되면서 나에게 건네 준 고추장을 이용해서 국을 끓였다. 딱히 머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엇지만 고추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 든든한 그런 호주 생활들이었다. 참! 고추장도 좀 많이 가져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처음에 호주 음식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해 오지 않았지만 사실 호주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드는 음식을 찾기는 드물다. 물론 하숙이나 쉐어를 들어가서 어느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굳이 가져 갈 필요야 없지만 혼자 이곳 저 곳을 돌아다닐 양이라면 고추장이나 된장을 가져가는 것이 음식문제에 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한 통 사면 정말 두고 두고 먹는다. 머 거기 가서까지 고추장을 챙기냐구 묻는다면 난 할 말 없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 한푼이 아쉬울 때 그 것들이 주는 안정감! 이 말이 무슨 뜻인는 그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


지애는 내가 끓여준 한국식? 국 내지는 찌게를 좋아했다. 어쩜 그 건 경제적인 빈곤?에서 비롯되는 신뢰감인 지도 모른다. 그래.그 것일거야. 이 후 항상 식사는 내가 준비를 했고 정말 별 볼일 없는 식사였지만 풍족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프레이저 가기까지 시내 곳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음 날 브로셔에서 볼 수 있었던 어느 상어 전시관에 들어갔다. 그 곳은 어느 호주인이 아들을 상어에게 잃은 후 상어사냥을 나서 잡아 들인 가지가지 종류의 상어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피같은 거금 7$의 입장료. 혹시 이 곳에 가는 사람있으면 들어갈 일 없다고 말하고 싶다. 호주에도 상어가 있어서 가끔 상어가 인근 바다에 나타난다고 한다. 바다에 접한 도시에서 말이다. 하비베이는 작은 도시지만 번디와는 다른 멋을풍기고 있었다. 저녁 늦게 올림푸스 근처의 퍼브pub에서 맥주 한 잔을 걸치다가 무슨 댄싱타임이 있었든지 전부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춰대는 통에 나도 일어났고 금방 어울린 몇 명과 같이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같은 여행객들이라 마음을 열기가 쉬운지도 모른다. 호주에선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정말 편했다. 아마 내가 만난 사람들이 거개가 여행객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눈만 마주치면 웃음짓고 말을 거는 그 사람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뒤에는 오히려 그 게 더 편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어디 가느냐, 여행은 즐겁냐며 묻는 그런 모습들이 말이다.

그 곳에선 하릴없이 거리를 구경하고 사람들과 여러 기념관들을 돌아보며 모처럼의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마침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두 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우연하게도 그들은 Olympus에서 묶게 되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학원강사,그리고 회사원. 그들은 한국에서 베낭여행을 신청해서 일행들과 같이 왔다가 브리스벤에서 헤어졌다고 한다. 계산을 따져보니 여행사를 따라다니는 것보다 경비가 저렴했고 또 으례의 획일적인 관광코스보다는 그들만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로 해서 이 곳으로 왔다고 한다. 같은 여성이어서 그런지 특히 지애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지애또한 그들과 대화를 즐겼다.
한국여성 두 명이 여행을 하는 모습은 상당히 신선하게 남아있다. 그들의 우정도 그들의 여행에서 얻은 감동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한국에서의 친구와의 여행도 갖기 힘든 기회인데 이국땅에서 그녀들이 갖고 있는 우정은 깊이가 어느 정도일까? 세상에는 변해야 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만 우정은 후자일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어쨌든 섭섭하다. 허전하고 서운하고 머 그런 것아닐까? 변해간다는 것은 말이야.
당시의 일기입니다.

3.June
정말 수많은 시간을 번디에서 보내버렸다.
하지만 그 만큼 얻은 것도 많아서 좋다.
영어를 소홀히 할 수 없던 70여일의 시간들.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젊음을
보여준 것 같아서 흡족하다. 지금 옆에는 지애가 누워 있다.
서퍼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자.
우선 골드코스트로 내려가서 차분히 올라가자.
추우면 추운대로 말이야. 이 곳에서의 6일. 그리고 난 간다.
옆에서 마냥 웃고 있는 지애의 모습을 보니 씁쓸하다.
난 내 갈길이 있는데, 망설이지 말자. 시내를 돌아다녔다.
정말 이 나라가 부럽다. 이 조그만 도시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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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번다버그 그 곳에 가기까지 몇 가지 방법을 통해 조사했던 걸 참조삼아 말씀드립니다. 머 여러분도 호주에 귀국하게 되면 알게 될 일이지만 그 전에는 뭐든 지 궁금할테니까요. 우선 정보라는 것의 특성이 산재해 있기 마련이어서 잘 종합해서 정리를 하셔야 하는데요. 베낭여행자들은 대부분 호주에서 잘 발달한 관광관련 산업에 우선 놀라실 겁니다. 여행상품이라든가 관련 아이템의 다양함 등에도 그렇지만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망과 광범위한 투어 에이전시의 활동 또는 백패커스같은 숙박시설과 주변 상가 또는 농가의 연계등에서 말입니다.  호주라는 나라가 하나의 거대한 관광상품인만큼 그런 것들의 발전은 필연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여행 정보지 형태의 것들입니다.
우선
"Oz". 타블로이드 판의 여행자들을  위한 무료 배포 신문입니다. 호주 전국의 행사나 이벤트등을 알 수 있고 또 농장안내가 나와있습니다. "Oz"는 웬만한 백팩에는 다 있는데 두리 하우스엔 없더라구요. 저는 이 것을 번다버그에서 처음으로 접합니다. 다음은 "TNT" 4*6배판이라고 하나요? 리더스 다이제스트 크기의 무료 배포되는 격월간지인데 각 주별로 발행이 됩니다.



그래서 퀸즐랜드로 가시려는 분은 퀸즐랜드의 것을 구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 것또한 "Oz"와 같은 성격의 내용이지만 더 자세하고  알차게 꾸며져 있습니다. 으례 여행자들의 베낭에는 하나씩 들어있습니다. 그 만큼 유용하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백패커스 회원에 가입할 때 주는
"yellow book" 백패커스 회원에 가입해야 한다는 말인데요. 호주의 광범위한 백팩에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카드인데 별 그렇게 실효는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없으면 불이익을 받는 수가 있습니다. 투어 에이전시에서 가입이 가능하고 전 버스티켓을 예약하면서 가입을 했습니다. 1박에 2$가량 할인 해준다는 말에 혹해서요.  그 곳에서 "TNT"도 한권 챙겼습니다. 전 이 것들을 이용해서 백팩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주 내용은 일거리가 언제 있는냐이지요. 백팩 오너들은 대부분 일이 곧 있을듯이 말을 합니다. 곧이는 믿지 마세요. 하지만 결정이 되어 예약을 하게 된다면 예약시 언제쯤 일거리가 생기는 지  어느정도 못을 박아놔야 합니다. 그리고 도착해서 방을 얻을 때 한 번 더 주지시키시고요. 그래야 난 중에 일거리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을 때 그 약속을 상기시키며 항의를 할 수 있습니다. 항의의 힘은 큽니다. 한국에선 항의가 불평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아 이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호주에선 당연한 권리로 인식을 하니까요.

백팩에서 오너의 힘은 큽니다. 그들이 일거리를 배분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눈 밖에 나면 일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머 그렇다고 애써 잘 보일필요는 없지요. 그 저 별탈없이 잘 지내면 좋은데 제가 지냈던 프린세스의 오너인 닐은 가벼운 인종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결국 일본인에게 몇 대 맞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여자친구에게 심한 언사를 했던 것이죠. 하기야 그 걸 놔 둬? 흠흠,,  결국 그 일본인은
강제 출국을 당하고 말았지만, 참! 어떤 책자를 보니 CES를 알려주며 잘 이용하라며  값진 정보인양 하는데 워킹 경험자들은 웃고 맙니다. 물론 CES측에서도 여행자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한다고 말은 합니다. 저도 혹시나 해서 몇 번 가봤으니까요. 여러분중에 일국당(One nation party)이나  폴린 헨슨의 이름을 들어 보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폴린헨슨은 일국당의 여성당수입니다. 백호주의의 대표세력으로 호주 최대의 농업지대인 퀸즐랜드의 보수 농가층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국당. 그들의 모토가 "아시아인은 아시아로" 이며 캐치프레이즈중 하나가  "아시아인때문에 호주인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입니다. 선진국이 다 그렇겠지만 호주정부 또한 호주인의 실업에 우려와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CES는 그런 정부의 고육지책인 것입니다. 그런 CES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하는 건 실상을 모르는 책상다리들이 호주 관광청에서 주는 안내책자의 내용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업주측에서도 언제 갈 지모르는 여행자들보다는 꾸준이 일을 하는 호주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인종차별에 대해
걱정하시는 분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군요. 도시에서는 그러한 차별을 전혀? 느끼실수가 없구요. 가끔 농촌에서나,,,하지만 그리 심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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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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