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따스한 기후에 감싸인 해변에 행복이라는 물결이 넘실 거리며 구리빛으로 그을린 청춘 남녀들의 미소들이
떠도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호주는 말이다. 별천지로만 여겨졌던 그 곳에서의 스물 여섯의 내 모습.
그 10개월 나에게 무척이나 고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것은 신문에서나 혹은 TV에서나 보며 막연하게나마
동경하던 호주로 갔다는 생소함 이상의 것이다.
내 또래의 젊은 청춘이 그렇듯 나 또한 느즈막한 나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열병들과 번민이라 불러도 좋을
-적어도 나에겐- 고민들은 그 곳으로 내 몰았다. 여행이라고 해도 좋고 도피라 불러도 좋을 호주 Working holiday maker로서의 10개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내게 다가온 것은 그 이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 그 기억을 용기삼아
현재의 불편을 이겨 나가고자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 아름답기만 하던 내 스물 여섯의 호주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기억에 다시 곱게 빛을 내려면 지금 힘을 내야 하지 않을까.
벌써 10여년이 흘렀내요. 저는 1996년 3월 14일 출국하여 그 해 일 년을 못 채우고 IMF구제금융을 받던 12월
그 것도 24일에 입국하였습니다. 당시 호주에서는 한국의 경제상황에 많은 관심을 보였었기에
한국의 IMF는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한국은 호주의 두 번째 무역 상대국이었으니 당연할 지도 모르죠.
첫 째요? 일본이었죠. 전 그 때 공항 면세점에서 part timer로 근무하면서 고생쫑 행복쨍을 누리고 있었는데
고 놈의 IMF가 절 부르더군요. 비장한 마음으로(정말 비장했음) 일찍 들어가 보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인생의 반환점과도 같은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워킹홀리데이와 같은 것 말이죠.
10여개월의 호주생활은 지금까지도 내 삶에 용기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든든한 응원군이며
소중한 자산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약간의 무책임과 치기가 버무러진 자세로 시작된 호주의 첫 도착지인 시드니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긴 기초 회화마저 쑥맥인 실력에 가져간 현금이라곤 86만원이 전부였으니 말이죠.
경제적인 궁핍에서 오는 조급함으로 도착하자마자 파트타임 잡을 찾아나서야 했지만
먼저 온 한국인들이 이미 지나간 자리들뿐이었습니다. 마치 때늦은 늦여름 바닷가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사장을 홀로 걷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시드니에 있었던 9일간, 일본인 마나미를 알게 되었고 일본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설픈 영어에 귀를 기울여 주고 또 격려해 주며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수 많은 생각과 단어를 떠올려야 했던 그 답답함을 오히려 안쓰럽게 지켜봐 주었습니다. 그 건 다분히 편향적이었던 일본인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충분한 이유였으며 이후로 여러 일본의 젊은이들을 만나며 전 그들을 친구로서 충고와 격려를 해줄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둘이 고민하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저 빈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9일간을 긴장과 초조함속에 보내다가 우연히 그리피스에서 온 여행자를 통해 번다버그를 알게 되었고 지체할 것 없던 나는 맥패커씨를 타고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포도 주산지로 알려진 Grifith에서 농장일을 하다가 번다버그로 가는 길에 시드니에 들른 것이었습니다. 18시간을 타고 브리즈베인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탄 후 6시간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터미널에서 알게된 Princess of wales까지 찾아가던 그 길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한 낮 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차량도, 인적마저 드물어 오히려 불안했던 도시. 짊어진 배낭아래로 흘러내리던 땀방울, 업었다가 들쳐 매었다가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하며 황량한 그 곳에 도착했지요. 농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니 편해지더군요. 외국인 친구들과도 함께 놀러 다니며 한 잔의 맥주로 피로를 풀기도 하며 말이죠. 호주에서 다가오는 모든 경험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리라 믿었습니다. 외국인들과 격의없이 만나며 대화하고 친구처럼 즐겁게 지내기도 하며 함께 Bundaberg Aqua Scuba에서 open water 라이센스를 취득하였습니다. 가끔 주말이면 시내의 다른 백팩에서 한국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하기도 하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지요. 번다버그에서 보낸 약 3개월의 시간동안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별 것 아니구나하는 자신감을 얻은 것은 확실 했습니다. 가진 돈이 없어 일을 구해야 한다고 1000$을 들고 번다버그로 들어갔던 제가 다음 행선지인 Fraser island로 갈 때는 700$이 있었으니 말이죠. 번다버그에서 일본인 지애를 만났습니다. 동갑내기인 지애와 함께 한 2개월여의 여행은 호주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중 하나입니다. 함께 히치하이크를 하고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매니저에게 말해 같이 일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전 보물처럼 가지고 있던 된장과 고추장으로 수퍼에서 산 여러 호주 야채를 곁들여 국이나 찌게를 끓이곤 했는데 지애는 그 국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입맛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번다버그를 떠나 프레이저 아일랜드에서 Safari tour를 마치고 전 Gold coast로 갔고 지애는 Rock hamnpton으로 갔습니다. Suffers paradise 라는 이름처럼 왜 그리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지 그 때의 지독한 외로움은 지애와 헤어진 직후라 더했는지 모르죠. 식당을 찾아봤지만 잡을 구한다는게 하늘의 별따기와 같더군요. 번다버그에 있을 무렵 써퍼스 파라다이스에서 올라온 누군가가 극구 말리던 기억이 새삼 떠 오릅니다. 결국 다시 TNT를 뒤적이다 눈웨 띈 보웬. 보웬으로 갈 생각을 하고 거리를 거닐던 중 일전에 지애가 보여주었던 유스호스텔 티켓이 생각났습니다. 롹 햄프턴의 몇 개 유스호스텔 전화번호를 알아내었고 그 중 몇 군데 연락을 하다가 통화가 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감정이 나와 다름이 없음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 녀는 Woof를 위해 Miliam vale로 간다더군요. 결국 그녀와 다시 Agnes water의 독일인 가정에서 일주일간 팜스테이를 함께 했습니다. 독일인 부부와의 생활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독일인부부는 vegitarian이었으며 Beatles의 Imagine처럼 종교에도 국적에도 그리고 피부색에도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빵이나 요쿠르트를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식탁에서는 Korea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보며 Beatles의 Imagine을 애기하곤 했습니다. 아침이면 꽃이나 수목에 물을 주고 오후엔 히치하이크로 주변에 놀러 다녔지요. 일주일 머무른 이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에어리비치를 향했습니다. 에어리비치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여러 도시중 호주에서 아름다운 곳중 한 곳이라 감히 말씀 드립니다. 아담한 마을과 같은 분위기에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아름 다운 곳이죠. 13Begley에서 3일을 지내며 에어리 비치를 만끽했습니다. 45$하는 Cruze도 괜찮았습니다. 비록 배멀미와 감기가 겹쳐 고생을 했지만 말이죠. 지애와 함게 했기에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릅니다. 마을너머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정경에 취하기도 하고 언덕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유치한 궁금증에 걸어 올라갔다가 털래 털래 걸어 내려오는 무미건조함도 있었지만 말이죠. 이제 돈도 떨어졌으니 다시 보웬으로 가야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간 보웬의 정류장 근처에 있는 Denison hotel에서 몇 일 지내다가 이 곳 저 곳에 정보를 얻어 Trinity backpackers로 옮겼습니다. 보웬의 가장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그 곳에서 다시 일을 하면서 부족한 잠과 싸워가며 회화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어떤 이는 호주에 도착하면 어학원에서 3개월정도의 회화공부를 하고 쉐어나 하숙을 하지만 전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오히려 악이 생기더군요. 처음 방을 얻었을 때 룸메이트로는 스코틀랜드의 귀여운 아가씨 Sarah Rollo였습니다. 호주에 오기전 멜 깁슨 주연의 Brave Heart를 감명깊게 본 지라 영화 애기를 하며 스코틀랜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니 반가워하며 잘 해주더군요. 치마입고 악기 부는 남자들하며 이런 저런 애기를 하자 사라도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고 말이죠. 우린 쉽게 사라와 친해습니다. 같은 방을 쓰는데다 워낙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라였기에 우리 유니트는 사라의 친구들로 차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옆 방에는 23살인 Hieth라는 뉴질랜드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확실치 않지만 전 히쓰라고 불렀습니다. 히쓰의 영어만 그런 건지 뉴질랜드 영어가 그런건지 모르지만 조금 발음이 특이했어요. 히쓰는 사라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있는 곳엔 히쓰의 모습도 보였으니 말이다. 한 2주일뒤 사라가 케언즈로 갔을 때 외로워 보이던 히쓰. 언젠가 일이 끝나고 와서 보니 씨익 웃는 그의 입에서 이빨 두 개가 없어진 것을 알았고 나는 누가 그랫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뒤에 알고 보니 싸움이 있었는데 히쓰가 상대방에게 더 많이 상처를 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큰 키와는 달리 정말 순진해 보이던 히쓰. 언젠가 술에 취해 쓸쓸한 듯 사라가 보고 싶다며 말하던 히쓰의 푸른 두 눈엔 연민이 가끔 비치곤 했습니다. 사라에게 전화도 못하고 그 저 주소와 전화번호만 갖고 있다던 뉴질랜드에서 온 히쓰와는 같이 일도 하며 훗날 보웬을 떠나기 떠나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습니다. 당시 보웬은 전국에서 Picker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한국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자신의 계획대로 생활을 잘 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또는 그렇지 못한 이도 있습니다. 어학은 호주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의 활동폭을 넓힐 수 있고 다른 여행자들과의 교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요. 영어를 잘 하시는 분은 괜찮겠지만 못하시는 분이라도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한다면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호주까지 가서 어학 하나의 이유로 풍부한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을까요. 지애의 비자가 끝날 무렵 이 되어 귀국편을 타기 위해 케언즈로 출발하게 되는 날 아침입니다. 지애가 떠나는 날 전 지애를 배웅한다고 전날 매니저에게 말하고 하루 쉬었습니다. 모처럼 늦잠을 잤어요. 햇살이 창가로 나 몰래 살짜기 발을 내 딛은 늦은 아침. 눈을 떠 봅니다. 허리가 여전히 묵직합니다. 이리 저리 뒤척여봅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지애가 보입니다. 바보같이 웃내요. 헤하고 말이죠. 방긋 저두 웃습니다... 몇 시 차냐고 묻자 2시차라고 합니다. 밥먹고 가면 되겠구나. 일어나서 이빨을 닦고 샤워를 해 봅니다. 백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다들 일나갔군. 방에 들어와보니 짐을 챙기고 있는 지애. 지애는 내가 일과 후에 다른 곳에 가서 술을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면 따라 오지 않고 혼자서 방에 있었는데 쉽사리 다른이에게 말을 못 거는 성격이라 심심했을 것입니다. 있을 때 잘 할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 하기 보다는 듣기를 좋아했던 지애. 지금 생각하면 처음엔 정말 당돌하다 싶던 아이. 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정말 안 어울릴 거 같았는데 말이죠. 둘이서 공연한 일로 신경전을 펴기고 하고, 애써 토라진 너를 달래려고 애쓰기도 하고,.. 훗~! 너를 안지 어느새 2개월이구나. 이제 가는구나. 점심때 어제 저녁에 Coles에서 사 온 닭다리를 이용해서 야채를 섞어서 닭죽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식사입니다. 지애와 함께하는. 버스안에 지애가 앉아 있습니다. 울지 않습니다. 그래 너는 강하니까, 차가 출발 할 무렵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고 어깨에 교대로 올리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내요. 나도 같이 해 주었는데 어제 같이 본 영화에서 어느 연인이 헤어지면서 나누는 제스춰였습니다. 몇 일뒤 케언즈에서 신라면과 과자, 그리고 고추장이 소포로 배달되었더군요. 이후 1400$이 모이게 되면서 케언즈로 출발했습니다. 워킹홀리데이 기억에 농장에서 과일딴 기억만 있는 거 아냐? 하는 자문에서 비롯된 자답이었습니다. 케언즈에 와서는 다른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는 신념으로 찾아나선 끝에 국제공항내의 면세점에서 파트타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잡을 찾기 위해 비디오가게, 모텔, 백패커스, 주유소등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힐튼 호텔을 찾았을때의 기억이 납니다. 정성스럽게 resume를 작성하고 그 것을 봉투에 넣어 호텔문으로 들어가저 도어맨이 묻더군요. 손님같지는 않아서 그러했겠지요. 전 잡을 구하고자 지원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자신이 매니저에게 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냥 전해주고 말았는데 몇 일뒤에 편지가 왔더군요. 관심에 감사하지만 현재는 채용계획이 없고 계획이 있을때 다시 연락하겠다는 글과 매니저의 싸인이 든 내용이었습니다. 비록 소기의 성과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어디든 두드려보면 그래도 대답은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밤에도 문을 여는 가게는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저녁밥을 먹고 돌아다녔지요. 결국 에스플러네이드의 푸드코트에 있는 중국식당에 디쉬워셔로 취업했지만 곧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던 일을 다른 이가 같이 하게 되면서 말이죠. 한 시간에 6$ 50C였지만 감사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우연찮게 일본인들이 자주 가는 일본의 식료품점의 보드를 보다가 공항의 면세점에서 일본인을 찾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급히 연락을 하고 곧 인터뷰를 한 결과 고용이 되었지요. 면세점에서 하는 일은 일본인이나 한국인에게 보다 비싼 위스키나 꼬냑을 프로모션 하는 일이었습니다. 할인점에 도우미들이 물건 홍보하듯이 말이죠. 유럽인들은 대부분 저렴한 제품, 자신의 기호품을 찾는데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은 선물을 하기 위함에서인지 몰라도 비싼 제품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판매를 위해서 제가 고용되었던 것이죠. 농장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한 근무환경과 높은 급료는 그 동안 고생했던 것에 보답이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대견스럽더군요. 시간당 15$이 넘는 페이를 받았으니 꽤 많은 금액이었지요. 집도 렌트해서 일본인에게 작은방을 임대하고 큰방은 도서관에서 알게 된 한국인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일본인은 물론 이태리인과도 같이 생활을 하며 보다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에 대한 이해가 가장 컸던 거 같내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작은 목소리로 애기를 하며 한국인에 대한 어떤 오해도 없었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라면 충결일까요. 호주는 전 세계 특히 유럽에서 많은 젋은이들이 옵니다. 호주의 드넓은 자연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또 체계적으로 짜여있는 관광 시스템은 그 돈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그 곳처럼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중 3일에서 4일 오전은 공항게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콜스에서 산 싸구려 낛싯대를 들고 케언즈항에서 낛싯대를 드리우곤 했습니다. 제가 렌트한 집이 있던 Sheridan st. 에서 케언즈항까지는 번화가인 esplanage st.를 지나 자전거로 15분정도 걸립니다. 큰 도로 주변으로 있는 도시의 건물들은 시드니나 여타 도시와는 다른 특색을 엿 볼수가 있습니다. 당시 인구는 10만 정도의 작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더욱 커졌겠지요. 변화도 많았을테구요. 작지만 우리나라의 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market도 있고 큰 공원도 있으며 문화적인 환경이 잘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밤에는 Beaches라는 나이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추며 놀기도 했습니다. 케언즈는 그 간의 농장생활과는 또 다른 이국생활의 묘미를 주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이국문화와 호주를 조금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간 적막하기만 했던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생활에 또 다른 파스텔빛 색채를 안겨주었습니다. 10여개월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로서의 생활을 짧게나마 요약을 하려니 불완전한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미숙한 글솜씨로 인해 군데 군데 이 빠진 동그라미처럼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은 귀국이후 제 홈페이지인 http://dcity.co.kr 을 통해 조심스럽게 올려놨답니다. 그리고 호주의 경험을 기억삼아 다른 나라도 갈 수 있었고 말이죠. 일상에서 그 때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애기할 일도 없고 또 말한 다는 것도 겸연쩍었는데 그 동안의 생활을 이렇게 쓰면서 뒤 돌아보니 그 건 기억뿐이 아니었내요. 가끔 그 때의 앨범을 뒤적이거나 호주 소식을 우연찮게 보거나 접하게 될 때는 그 때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클로즈업되기도 합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의 충실함에 감사하며 내일의 계획을 다지다가도 그 때의 모습들이 미소짓게 하는 걸 보면 말이죠. 길지도 않은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호주에서의 생활은 이후 그 해 IMF로 인하여 일정보다 빨리 돌아와야 했지만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경험은 이후 제 인생의 새로운 변곡점으로 용기와 기회를 가져다 준 무지개와도 같습니다. 누군가 워킹홀리데이로 고민을 한다면 전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젊다는 건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그 기회다.”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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