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날 8시경, 지애의 성화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준비를 하고 나니 밖에서 투어를 가는 다른 여행객들과 투어에 사용되는 짚차들로 웅성거렸다. 각 짚차별로 배정을 받고 여러 도구 -식기류나 기타 잡다한 것들-들과 연료까가지도 할당 받는다. 이런 모든 것들에는 bond라고 하는 보증금이 붙어 있어서 분실하게 되면 bond를 못받게 된다. 운전하는 호주인은 나이가 21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는지, 그 호주인은 무척 활달하고 농담을 잘 해서 투어 내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캐나다에서 뉴질랜드에서 세계 여기 저기에서 온 젊은이들이 Toyota 짚차속에 앉아 있다. 누가 머랄 것도 없이 각자 소개를 하고 보니 나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는 내 나이를 무지 어리게 본다. 정말 무지하게 말이다. 케언즈에서는 미성년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카드를 만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게 아마 18세 이상임을 증명하는 것일게다. 17센가? 큭! 어쨌든 2박 3일간의 프레이저 투어는 시작이 됐다. 거금 90$이 투자된 호주 최초의 투어였으니 그 만큼의 기대는 당연하지 않을까? 운전하는 호주인은 연신 Pasta!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까지도 나의 영어에 반신반의 하던 터라 으레 하는 애기들. 나는 한국에서 왔으며 현재 몇 개월 체류중이고 번다버그에서 올라왔다. 앞으로 어디로 갈 거다. 너 거기 가 봤냐? 어떻냐? 너는 어디서 왔냐? 호주는 얼마동안 있었냐?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등, 이런 애기가 끝나고 보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 때분터는 머리에 열나기 시작한다. 후훗! 지애는 나보다 영어를 잘 했는데 그 건 이미 나 보다 10개월 가까이를 더 호주에서 체류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호주를 돈 것 같았다. 퍼스, 멜버른 등, 멜버른은 참 좋았다고 한다. 그 곳에선 퍼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말이다.

Toyota는 하비베이의 외곽지역을 돌아 선착장에 도착했다. 영화속에서 보는 그런 길이다. 프레이저까지 가기까지의 길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착장에는 프레이저로 가는 정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승선이 시작되어 우리는 선내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 바람이 세차게 지애의 머리를 날린다. 바다가 좋다.
산을 오른뒤의 해방감을 들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다는 언제든지 가슴을 열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좋다.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바다가 좋을 뿐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프레이저로 가는 걸까. 선착장에 도열해 있던 수많은 차가 배 안으로 빨려들어갔고 배는 고동을 울리며 출발을 알렸다.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바다에 끌려가길 30여분. 저 만치 프레이저가 보인다. 울창한 수풀로 우거진 섬이 보인다.길게 쭉 뻗쳐 내린 섬이 곱게도 생겼다. 검푸른 바다위로 파도가 물줄기를 휘감는 곳. 우리는 2층과 아래층을 돌아다녔다. 2층에는 각종 기념품과 간단한 음식류를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갑판에 나와 끊임없이 주절 거리고 있었다. 순간 불어온 강풍이 내 모자를 날린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론가 떠 내려 가고 있을까.

프레이저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신호에 따라 차에 탑승을 하고 배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프레이저의 수풀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우리도 환호성을 질렀다. 열대림을 지나며 보이는 건 어느새 해변으로 나온 Toyota. 호주인은 나에게 운전을 해 보겠냐구 물었다. 닌 해변가를 달리며 소리를 지르며 어떤 열기에 휘감겨 차를 몰았다. 뒤 따르며 앞서가는 Toyota사이로 해변가의 바닷물이 솟구친다. 그렇게 한 참을 달려 우리는 잠시의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작은 공원과도 같이 조성된 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고 프레이저 기념품 가게에서 이 것 저 것을 구경하며 호주에서 처음 갖는 투어를 만끽했다. 다시 출발해서 다다른 어느 호숫가! 에메랄드 빛이 이런 걸 보고 말하는 지도 모른다. 한없이 빠져 들 것만 같은 호수의 맑은 물결이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 되어 우리는 야영지를 찾았고 그 곳에서 텐트를 치고 나무를 모아서 불을 부쳤다.

바비큐를 하고 한 쪽에선 각자 준비해 온 식사와 술을 꺼내 들었다. 말도 쉬이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렇게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이 주는 매력이 아닌가 싶다. 여행은 마술이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를 잊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를 떠난다는 것. 내 모습을 잊는 것. 어쩜 그 것이 자기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 밤늦게까지 떠들고 놀았다. 바닷가를 걸었고 하늘의 별을 셌으며 야영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 그런데 그 곳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릴 줄이야, 나는 지나온 휴게소에서 놓고 온 것을 알고 호주인에게 다시 가 보자고 했고 그는 흔쾌히 같이 가 주었지만 카메라를 찾진 못했다. 혹시나 여느 책에서 보았던 서양에서의 분실물 습득애기가 떠 올라 가게 곳곳에 물어봤지만 허사였다. 난 여행자 보험을 떠 올리며 아마 분실물 보험도 들지 않았나 싶어 다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프레이저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커다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말이다. 다른 베낭객들에게 들은 대로 하비베이에 돌아와서 경찰서에 가서 분실신고와  함께 신고증을 받는다.그 게 또 가관이었다. 푸~! 이 건 다음 편에 애기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다시 섬을 돌기 시작했다.이른 아침의 기운은 서늘한 바닷바람으로 몸을 움츠리게 했고 점심때는 뜨거운 햇살이 바다에  빠져 들게 했다. 우리는 교대로 차를 몰았고 Toyota에 몸을 맡기며 프레이저를 즐겼다. 섬전체가 거대한 모래섬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고운 모랫살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저만치에 언젠가 낮선 호주에 내려 절망을 간직한 체 사라져 갔을 이름 모를 선원들을 태웠던 난파선이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난파선. 난파선. 가야 할 목적지를 잃은체  낮선 곳에 결국 순응하고 마는 난파선.

우리는  또 다른 호수에 도착했다. 이미 친해진 다른 친구들과 호수에서 물장난을 치며 서로 물을 먹이기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나를 빠트리려 쫓아오는 그들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며 흥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프레이저에서 제일 큰 호수로 관능적인 모래  언덕위로 태양의 뜨거운 입김이 작렬한다. 가는 모래알들처럼 많은 우리의 기억들은 어디에서 반짝이고 있을까.
 
아쉬울 수밖에 없던 그 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우린 하비베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이제 록 햄프턴으로 가는 지애와 아쉬운 헤어짐의 시간. 말없이 얼굴만 본다. 때론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저 안타까움만 더 할 뿐이었다. 지애는 나에게도 북으로 가자고 했지만 난 서퍼스에 가야했다. 서퍼스에서 안 된다면 너에게 가겠다고 했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넓은 곳에서. 그리고 지애는 갔다. 차창너머로 지애의 눈물이 보인다.

프레이저는 유엔에서 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거대한 모래섬. 고운 모래알과 태양이 어울리며 바다를 향해 다가갈 수 없는 연민을 부르듯 한 없이 아름다운 섬.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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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그리 가깝지 않은 터미널까지 밴을 타고 가려면 말이다. 닐은 백팩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이른 새벽에 같이 일어나는 경우, 터미널까지 태워주었는데 짐이 많은 이용자들의 경우는 일찍 일어나서 마지막 밴을 타고 터미널에 내려선다. 그 동안 같이 일했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떠나려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에 내려선 우리는 예약한 버스를 확인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베낭을 확인해 보니 이 곳에 낯 선 이방인으로 세 개의 가방을 들고 올 때가 떠 오른다. 베낭이 줄어든 지금은 그 무게만큼 시원섭섭한 마음이다. 두 달전에 이 곳에 내려섰을 때 지금을 상상했을까? 버스는 번디를 출발하면서 번디의 관통하는 강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나는 틈틈이 저 강에 가서 말보로를 말며 시선을 던지곤 했는데, 후훗! 지애는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있다.

시간 20분 뒤! 어느새 버스는 하비베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건물들과 도로는 번디와는 다른 깔끔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여서 그런가보다. 우선 숙소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숙소를 잡는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저 편 주차장 앞에서는 1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숙소직원들이 자기 숙소로 오라고 장점들이 적힌 나무판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지애를 세워두고 그들에게 다가가 이 것 저 것을 물어보았다. 우선 하루를 묶고 더 나은 곳이 있다면 그 곳으로 갈 요량으로 괜찮아 보이는 한 곳을 선택했다. Olympus 였다. 밴을 타고 그 곳에 도착한 것은 5분쯤 뒤 유럽의 어느 가정집과 같은 생김새의 근사한 곳에 내려섰다. 리셉션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른 몇 명의 여행객을 상담하고 있었다. 체크 인하기에 앞서 사무실 내에 있는 여러 브료셔들을 챙겼다. 사파리에 관한 내용들. 그리고 이 곳 하비베이의 지도등을 몇 부 집어들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응해줬고 편한 마음으로 방을 잡았다. 번디에선 상상도 못할 정도로 깨끗한 방이 2층에 4개 있었다. 거실에는 보기에도 편한 소파와 티브이가 자리하고 있었고 베란다엔 다 자란 나무가 양 팔을 길케 뻗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빛살에 반짝였고 그 위로 섬들이 보인다. 저 중에 하나가 프레이저일까?

몇몇 외국인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2층에 방이 4개. 그리고 아래층엔 방이 두 개있고 작은 부엌이 잇었다. 탁자가 놓여진 깨끗한 모습. 여행하는 기분이 이런 걸꺼야. 짐을 풀고 지애와 상의한 끝에 3일뒤에 프레이저 사파리 투어 예약을 하기로 했다. 예약과 방요금을 정산한 후 시내로 나가 큰 수퍼로 들어갔다. 울월씨(Wool wolthy)체인은 호주전역에 깔려있는 대규모 수퍼 체인망이다. 그 곳으로 들어가 간단한 몇 가지 야채와 빵과 음료수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를 구경했다. 시내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지애는 음식을 잘 못하는 편이다. 언젠가 지애가 해 준 수시(초밥)외에 할 줄 아는 음식이 없었다. 수시라고 하니까 수시인 줄 알고 먹었지만 말이다. 난 물을 올려놓고 야채를 썰고 번디에서 어느 한국인이 귀국하게 되면서 나에게 건네 준 고추장을 이용해서 국을 끓였다. 딱히 머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엇지만 고추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 든든한 그런 호주 생활들이었다. 참! 고추장도 좀 많이 가져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처음에 호주 음식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해 오지 않았지만 사실 호주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드는 음식을 찾기는 드물다. 물론 하숙이나 쉐어를 들어가서 어느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굳이 가져 갈 필요야 없지만 혼자 이곳 저 곳을 돌아다닐 양이라면 고추장이나 된장을 가져가는 것이 음식문제에 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한 통 사면 정말 두고 두고 먹는다. 머 거기 가서까지 고추장을 챙기냐구 묻는다면 난 할 말 없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 한푼이 아쉬울 때 그 것들이 주는 안정감! 이 말이 무슨 뜻인는 그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


지애는 내가 끓여준 한국식? 국 내지는 찌게를 좋아했다. 어쩜 그 건 경제적인 빈곤?에서 비롯되는 신뢰감인 지도 모른다. 그래.그 것일거야. 이 후 항상 식사는 내가 준비를 했고 정말 별 볼일 없는 식사였지만 풍족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프레이저 가기까지 시내 곳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음 날 브로셔에서 볼 수 있었던 어느 상어 전시관에 들어갔다. 그 곳은 어느 호주인이 아들을 상어에게 잃은 후 상어사냥을 나서 잡아 들인 가지가지 종류의 상어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피같은 거금 7$의 입장료. 혹시 이 곳에 가는 사람있으면 들어갈 일 없다고 말하고 싶다. 호주에도 상어가 있어서 가끔 상어가 인근 바다에 나타난다고 한다. 바다에 접한 도시에서 말이다. 하비베이는 작은 도시지만 번디와는 다른 멋을풍기고 있었다. 저녁 늦게 올림푸스 근처의 퍼브pub에서 맥주 한 잔을 걸치다가 무슨 댄싱타임이 있었든지 전부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춰대는 통에 나도 일어났고 금방 어울린 몇 명과 같이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같은 여행객들이라 마음을 열기가 쉬운지도 모른다. 호주에선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정말 편했다. 아마 내가 만난 사람들이 거개가 여행객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눈만 마주치면 웃음짓고 말을 거는 그 사람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뒤에는 오히려 그 게 더 편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어디 가느냐, 여행은 즐겁냐며 묻는 그런 모습들이 말이다.

그 곳에선 하릴없이 거리를 구경하고 사람들과 여러 기념관들을 돌아보며 모처럼의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마침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두 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우연하게도 그들은 Olympus에서 묶게 되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학원강사,그리고 회사원. 그들은 한국에서 베낭여행을 신청해서 일행들과 같이 왔다가 브리스벤에서 헤어졌다고 한다. 계산을 따져보니 여행사를 따라다니는 것보다 경비가 저렴했고 또 으례의 획일적인 관광코스보다는 그들만의 새로움을 추구하기로 해서 이 곳으로 왔다고 한다. 같은 여성이어서 그런지 특히 지애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지애또한 그들과 대화를 즐겼다.
한국여성 두 명이 여행을 하는 모습은 상당히 신선하게 남아있다. 그들의 우정도 그들의 여행에서 얻은 감동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한국에서의 친구와의 여행도 갖기 힘든 기회인데 이국땅에서 그녀들이 갖고 있는 우정은 깊이가 어느 정도일까? 세상에는 변해야 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만 우정은 후자일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어쨌든 섭섭하다. 허전하고 서운하고 머 그런 것아닐까? 변해간다는 것은 말이야.
당시의 일기입니다.

3.June
정말 수많은 시간을 번디에서 보내버렸다.
하지만 그 만큼 얻은 것도 많아서 좋다.
영어를 소홀히 할 수 없던 70여일의 시간들.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젊음을
보여준 것 같아서 흡족하다. 지금 옆에는 지애가 누워 있다.
서퍼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자.
우선 골드코스트로 내려가서 차분히 올라가자.
추우면 추운대로 말이야. 이 곳에서의 6일. 그리고 난 간다.
옆에서 마냥 웃고 있는 지애의 모습을 보니 씁쓸하다.
난 내 갈길이 있는데, 망설이지 말자. 시내를 돌아다녔다.
정말 이 나라가 부럽다. 이 조그만 도시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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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6"을 기획하며 가장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던 번디를 마쳐보니 실상 보는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번디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제대로 마친 건지 하는 의문, 마치 이빠진 동그라미를 그린 것 같내요. 나의 26의 모든 글들을 쓰면서 항시 나를 붙잡았던 것은 1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과연 그 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지 자칫 혼자만의 과거에 사로잡혀 그 것들을 미화시키는 것은 아닌 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지난 과거의 흔적들은 애틋해서 아름답게 포장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있기 마련 아닌가요. 특히 어떤 것들은 기억의 골짜기에 아직까지 뚜렷하게 남아서 그 아쉬움을 아름답게 다시 재생시켜 보려는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그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과 실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실명을 넣어도 당사자가 개인적인 친분으로 무사할 것 같은 이는 실명을 기입했고 그렇지 않은 이는 가명을, 그리고 기억이 허락하지 않는 이는 부득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현재까지 제 기억에 맑은 가을 하늘 색깔로 남아있는 manami와 지애(天愛)와 관련된 내용은 문맥상 필요하다 싶은 부분에만 간헐적으로 넣었기에 글의 구성에 허점이 될 지도 모릅니다. 빠져서는 안되겠다 싶은 경우에 이 곳 저 곳에 자리를 하다 보니 마치 완성한 그림에 덕지 덕지 덧칠한 것 같게 되더군요. 처음에는 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그래서 마나미와의 내용도 상당량?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번디를 마칠 때쯤 기억의 여기저기에서 부딪치는 지애의 기억을 용게 피해다니다가 문득 번디이후의 생활이 약 2개월이 우려되더라구요. 어떤 오해도 걱정이지만 그 기간동안 같이 여행을 했거든요. 우선은 어떻게든 메꿔 보렵니다. 그러니까, 이 후 독일인 농장의 우핑(Woofing)과 에어리 비치(Airie beach), 그리고 보웬(Bowen)의 어느 정도까지는 내용상 헛점이 보이더라도 양해를 구합니다. 그 때의 기억들 언젠가 "나의 26"을 마치고 하릴없이 일상에서 허우적 댈 때 저의 기억들을 다시 채색해 볼 생각입니다. 고운 빛깔루다가 말이죠. 느낌이 말해주던 그 날들을 말입니다. 혼자만의 애틋함을 그리면서, 어쩜 모르죠. 혼자서 간직하며 잠이 안 오는 까만 밤에 떠 올리며 키득댈지도,
 

낙 서 후휴~ 힘들다. 가끔 실망스럽기도 해요.도대체 무슨 글들을 쓰는 건지 말이죠. 이런 글들을 써야 하나? 어디까지 써야 하며 어디까지 넣어야 하는 건지, 이러다가 손님 떨어지는 건 아닌지, 쩝! 휴~ 며칠간 낮과 밤이 뒤 바뀐 생활을 했더니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군요. 헤구, 전생에 올빼미였는 지 부엉이었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나의 26을 쓰는데 정성?을 쏟다보니 다른 메뉴를 업데이트 하기가 조금 힘드내요. 변명일 수도 있지만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도 중요한지라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하니 말이죠.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그래도 오시는 분들이 방명록에 글들을 남겨주시면 힘이 되더군요. 아마 홈페쥐 갖고 있는 분들은 그 기분 아실 겁니다.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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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다버그에서의 생활도 어느 덧 끝이 나간다. 스쿠바 기간중 롤러 블레이드를 타다가 다친 무릎의 생채기로 때때로 일을 하면서도 계속 나오는 고름으로 이렇게 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몇 일 쉬게 되었다. 지쳤나 보다. 따분함에 지친 것 같다. 스쿠바 자격증도 땄고 비록 갖고 있는 돈은 700여$에 불과하지만 5000km pass가 있고 해 보겠다는 의지가 나에겐 밑천이었다. 어딜가야 죽겠냐 라는 자신감. 그렇게 살아왔으니 머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풋! 번디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사실 번디의 주변 경관은 시드니나 케언즈 또는 골드코스트같은 호주의 여느 도시처럼 뚜렷하게 구분되는 매력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곳에서 지낸 3개월 가까운 기간이 나에겐 충분한 기억의 도시가 되기엔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번디의 생활도 끝이 나간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금 뭐 할까?

귀국하고 나서 처음에는 연락을 했는데 일상에 파묻혀 기억속에만 남은 사람들. 번다버그. 이름마저 가물 가물한 국민대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자주 놀러가던 시티 백팩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무척 외국인과 잘 어울리던 활발한 놈이었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마음이 통한다 싶어 더욱 그 놈과 많은 애기를 나누었는데 언젠가 가 보니 자리에 없어 동생들에게 물어보니
칠더스(Childers)로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 칠더스로 향한 것은 순전히 여자 때문이었다. 혹시 그 놈이 보더라도 오해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글을 이어나가겠다.  처음 그 놈을 보았을 때부터 그 곳에는 한국여자가 드물게 한 명이 있었는데 매우 활달한 성격의 아가씨였다.그런데 그 아가씨가 번디에 일이 없자 칠더스로 향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번디에서 한 2~3시간 내륙쪽에 있는 그 곳은 번디가 일이 없을 때에도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눈치가 있어 보이는 경희대 다니던 동생이 아마 그 아가씨 찾아 갔을 거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일뒤 다시 찾아 갔을 때 그 놈 풀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길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것이었다. 번디에서 키워왔던 그의 연정?이 칠더스에서 꽃을 피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얼마 뒤 그는 예전의 모습을 되 찾았지만 친하게 지내던 놈이 잘 안 풀리니 안 되 보였다. 하물려 그 것이 여자와 결부된 일임에야, 한국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데 이국에서야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흡사 광수 일기의 광수씨처럼 생긴 그의 모습이 참 정이 많게 생긴 놈. 훗 날 그 놈은 또 한 번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이 놈이 마리화나에 빠져서 한 참을 헤맨 사건이다. 힘들게 벌어 온 돈을 몽땅 그 것에 써 버린 것이다. 외국 친구들과 잘 어울리다 보니 마리화나가 합법적인 일부 유럽국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버린 것이다.(야, 너 혹시 이거 보더라도 화는 내지 마라 우리의 동생들을 위한 거라 생각하고 웃어 넘겨라. 연락하고 임마!) 하지만 호주는 불법이다. 힘들게 돈 몇 푼 벌어서 그 걸 그대로 연기로 날려 버렸다는 소리에 황당하기도 하고 또 화도 나기도 하고 착잡하던 기분. 내가 찾아 갔을 때 이 놈은 침대에 누워 맥이 풀려 초췌한 모습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야 대화를 나누어 주는 정도여서 아쉬움만 더 했지만 말이다. 번다버그를 떠나서 훗날 보웬(Bowen)에서 그 곳에서 경희대 동생을 만나게 되어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어딘가로 내려갔다고만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시 연락을 했을 때 물었더니 허허 하고 웃더니 대마초 재배하러 내려갔다고 웃는 것이다. 후훗! 다행히 학업에 열중하는 듯해 이런 저런대화를 나누고 후일을 약속하며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하지만 다음에 한 번 만나자는약속만큼 애매한 것도 없는 것처럼 그 걸로, 쩝! 이 글 보거든 화내지 말고 연락이나 해라. 졸업했겠구나. 시절이 하수상한데 좋은 곳에 취업이나 했으면 좋겠다.

사실은 나도 마리화나에 대한 썩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순전한 호기심에 말이다. 호기심 때문에 인생 쫑한 작자가 많다는데, 언젠가 영국친구가 권해서 몇 모금을 해 봤는데 으~~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저 몸이 붕붕 뜬 것 같은 기분. 지애가 놀라서 무슨 일이냐구 물어보는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지애. 그 건 마치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것을 또 케언즈에서 경험하게 됬으니, 아직 범죄시효가 지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행여나 높으신 분들이 볼 까 무섭다. (에그 무서버-이런 글 썼다고 또 괘씸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쩝!) 번디를 떠나기로 하면서 가지고 있는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애물단지이던 노트북과 옷,책을 보내며 65$이라는 피같은 거금이 들었다. 짐을 정말 줄여가기 바란다. 호주에서 많은 것을 하겠다고 애초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말을 해 본다.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한다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과연 그 목적에 걸맞게 호주를 갖다 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 또한 그러지 못해서 그런 사람이 부럽기는 하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지만 다음에 신혼여행을 간다면 내가 걷지 못한 호주 서부 지방을 그 녀와 함께 걷고 싶은 계획으로 미루고 나니 아쉬움은 덜하다. 그 동안 일하던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스쿠바 라이센스도 딴 후 나는 다음 목적지인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가기 위한 관문인 하비 베이(Harvey bay)를 예약했다. 5000Km 패스를 터미널에서 사 놓았기에 차비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패스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호주를 전국일주 하는 것부터 거리별로,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 구간별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 자신의 경로에 맞추어서 구입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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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는 그 전날밤 나와 함께 가고 싶어하던 눈치가 역력하던
지애는 내가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간다고 하자 자기도 그 곳에 갔었다며 나의 여행경로를 물었다. 나는 프레이저로 가서 사파리 투어를 마친 후
Surfers Paradise로 갈 것이다. 그 곳에는 한국인이 많다고 하니 일자리를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애기했다.

아래층 티브이 룸에선 심슨이 시작됐는지 왁자지껄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선 간간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정말 번디 아니 호주의 밤 하늘은 지겹도록 별이 많다. 저 별들이 다 떨어진다면 난 어디에 숨을까? 지애는 나와 같이 가고 싶다며 전에 갔을 때에도 하비베이 까지만 갔고 사파리 투어를 하지 못했다며 이번에 꼭 가고 싶다고 한다. 나는 서퍼스로 가야 하지만 너는 북쪽으로 올라 갈 거잖아.난 혼 자 가겠다. 그 녀가 눈물을 보인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크다. 그 눈에 맺힌 눈물. 왜 나에게 눈물을 보이는 걸까. 여자가 눈물이 흔해도 안 되지만 남자도 여자의 눈물에 약하면 안 된다. 말이 쉽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눈이 이쁘다. 눈만을 봤을 땐 말이다. 남자들도 하나같이 눈썹이 짙고 풍성하다. 물론 다야 안 그렇겠지만, 내가 표를 물었을 때 자기도 패스가 있다며 당일 가면 표가 있을 거라며 미소를 짓는다.
나도 웃고 만다. 닐에게 내일 check out한다고 말하겠다며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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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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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민박 다정민박을 다녀왔습니다. 알고 보니 다정민박이 꽤나 오래 되었더군요. 주인아줌마 말씀으론  심천에서 처음으로 문 연 곳이라고 합니다. 2001년도에 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군요. 이후 한국에도 가시고 그러면서 다른 분에게 맡겼는데 그 분들이 운영을 잘 못해서 안 종은 인상도 많이 남았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인터넷에 익숙치 않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인터넷 아이디와 암호도 찾아서 다시 접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구하는 저 같은 사람은 3년동안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몰랐던 거죠. 인터넷으로 홍보가 안됨에도 불구하고
29층과 28층엔 손님이 거의 찼더군요. 친절하고 음식도 깔끔하다 보니
단골손님들이 많고 거기에 소개로 알음알음 오게되니 말이죠.

우선 위치는 로후역에서 민박중에 가장 가깝습니다. 한 5분 거리?
그리고 찾기도 쉽게 되어 있고 말이죠. 아래 건물에 위치해 있습니다.
시설면에선 종로민박과 더불어 이 곳이 가장 좋은 듯 합니다.
 처음 방에 들어가니 아줌마가 에어컨을 틀어주더군요. 호감도 급상승. ^^

 건물은 상당히 좋습니다. 거기에 29층이라는 위치라 전경이 아주 좋지요.
 

 

 제가 묵은 방입니다. 아담하죠? 각 방에 이렇게 컴퓨터가 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게 일인용방인데 하루 150원입니다. 3식 세끼 다 제공하구요.
심천민박 대부분이 2끼 제공합니다. 뭐 저 같은 경우 하루 한 끼 어쩌다 두끼 먹을때가 훨씬 많지만 3끼 주는 곳에서 2끼먹는 것과 3끼 제공하는 곳에서 2끼먹는 것은 다르지요. 그리고 인터넷전화,팩스 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29층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참고로 29층이 가장 높은 층입니다.아래로 보이죠? 

주인아줌마가 비즈공예에 조예가 깊으시더군요. 이모든 것을 혼자서 만드셨답니다.
아줌마는 문옆에 이렇게 나와 계셔서 항상 이 모습으로 만들고 계시더군요. 

 
로후역에 나와서 보면 건물이 바로 보입니다.
꾸오마오역에서도 가깝고 주변에 작은 먹거리들도 있어서 여행객이나
잠시 머무는 비즈니스맨에게는 안성맞춤일 듯 합니다.
지금까지 가 본 민박집중에선 시설면이나 아줌마의 친절도에선 최고인 듯 합니다.
아직 아줌마를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다음에 좀 더 생활해 보고 올려드리죠.

  

로후역 가는 길입니다. 여기가 지름길이죠. ㅎㅎ
총점 10점만점이라면 일단은 9점 주고 싶군요. ^^


전화번호 86-0755-2231-8789/8952, 86-13724269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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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앙 너기(Julian Nergi)는 수더분한 인상의 소탈한 다이빙 마스터였다. 그가 주고 간 책자를 너른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번디의 햇살을 맞으며 공부하기를 일 주일, 난 줄리앙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강의에 합류하게 되었다. 터미널 앞에 있는 Aqua scuba. 번디에 도착할 때 무심코 지나쳤던 이 곳에서 스쿠바를 배우게 될 줄이야, 정말 사람일은 모를 일 같다. 나와는 전연 상관이 없을 듯한 무언가와 관계를 맺게 됐을 때 갖는 감정은 미묘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과의 관계는 어떨까. 줄리앙은 나와 또 다른 일본인에 대해 배려를 해 주었고 전문용어에 대해서는 쉬운 말로 풀어주며 확인을 거듭했고 그 덕에 무사히 이 틀째 마지막 강의후 이론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까운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다음 날 부터 풀장에서 수영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기초체력 테스트가 맞을 듯하다. 수영 100m 왕복과 물 속에서 고개만 내 놓은 채 10분간  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풀장이 극히 협소한 관계로 100여m를 헤엄 치는 것이었지만
나에게 그 것은 42,195km의 마라톤 풀코스에 비견 되는 거리였다. 마라톤 선수가 들으면 화낼 일이니 10km 단축 만라톤이라고 하자. 어쨌든 나는 번번이 실패해서 이 후 1주일간을 수영장에서 살게 되었고 번디의 서늘해지는 날씨덕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것 같아 조바심만 더욱 앞섰다. 다음 목표는 프레이저 아일랜드다(Fraiser island). 베낭자들끼리 흘러다니는 대화중에는 어디 어디가 참 좋더라며 여행지를 추천해주기도 했는데 프레이저 아일랜드의 2박 3일간의 사파리 투어를 추천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번디를 뜬 이후 그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풀장에서 악전고투하기를 여러 날 째, 줄리앙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 지 자유형만을 고집 할 필요는 없다고 해서 나는 자유형과 배영을 병행하며 때론 잠수도 불사하며 100m를 완주(완영?)하게 되었다. 한 주전자의 물을 마시고 완주 했지만 그 기쁨을 어찌 말루 하리. 인간 승리
다음은 물 속에서 10분간 떠 있기. 주위의 외국인은 농담도 하며 여유있게 떠 있었지만 내겐 수영보다 더 힘들 줄이야. 결국 이 것도 줄리앙이 떠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배영자세로 누워 있었지만 여기서는 두 주전자의 물을 마셨다. 이 후 스쿠바 장비의 이용법과 풀장안에서 스쿠바 시연을 했다. 비록 풀장안이었지만 물속에서 숨을 쉰다는 게 이렇게 신기할 줄은 몰랐다. 바다는 어떨까. 이제 바다다. 백팩으로 돌아오면서 몸은 춥고 콧물을 흘러내리며 뱃 속은 풀장에서 마신 물로 연신 요동을 쳤지만 헛 트림을 하면서도 내일 바다에 들어갈 생각을 하며 웃고 말았다. 헤~~! 끅!

다음 날 우리는 아침부터 장비를 서로의 몸에 맞추고 부산했지만 모두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어딘 지 알 수 없는 언덕바지에서 우린 옷을 갈아입었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지애가 따라와 주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무척 고마웠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줄리앙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유를 물었을 때 파도가 세다는 것이다. 파도가 세다구? 잔잔하기만 한데, 이유는 바다 속에 들어가서 알 게 되었다. 바다속에서 스쿠바 장비를 매고 나아갈 때 물결을 타고 가는게 훨씬 수월하지만 물결을 역류한다고 할까?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체력이 많이 소모되면 비상시에 의연하게 대처하기가 힘들고 결국은 사고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깥에서 보는 파도와 바닷속에서 대하는 파도는 그 힘이 다른 것이다. 해보자는 의견에 우리는 스쿠바 장비를 매고 바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 바위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고 지애 또한 그 곳까지 따라와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드디어 줄리앙의 신호에 따라 우리는 하나 둘씩 들어가고, 흐린 날씨로 추위를 느낄 만한 날씨였지만 바닷속으로 들어왔다는 경이감과 신비로움에 도취되어 추위는 느끼지 못했다. 바다는 5m앞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수초들과 바위사이로 헤엄치는 이름모를 고기들. 나를 전혀 겁내지 않는 고기들이 마냥 신비스럽기만 했다. 바다는 지극히 평화롭고 우리는 바다 안에서 줄리앙의 신호에 따라 이 곳 저 곳을 움직이며 번디의 앞바다를 만끽했다. 30분쯤뒤 우리는 다시 뭍으로 올라왔다. 지애는 여전히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애에게 나는 바닷 속 세상을 애기 해 주며 마냥 기뻐했다. 지애 또한 일본에서 스쿠바를 해 봤다고 한다. 일본의 바다는 세계적인 스쿠바 명소중의 하나지만 값이 비싸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바다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뒤에 현상해 보았을 때 흐린 날씨 관계로 잘은 나오지 않아 아쉬움은 남지만 그 때의 감흥을 느끼기에 부족하지는 않다. 다음 날 우린 마지막으로 바다에 들어갔고 마지막 바다에서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치고 바다 안을 유영하며 마지막 강습을 마쳤다. 그 날 줄리앙과 우리일행은 어느 바에서 자축연을 했고 나는 같이 온 지애의 강요아닌 강요에 노래를 불러야 했다. 팝송 하나쯤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중학교때 본 뮤직비디오에 반하고 리듬에 반해 버린 "Wham의 last christmas" 우린 그 날 그렇게 자축연을 마쳤다. 번디의 밤거리는 여전이 외로웠다.


모든 테스트를 마치게 되면 줄리앙 너기는 스쿠버 협회에 명단을 통보하며 그 명단의 주소로 자격증은 우송이 된다. 훗 날 집으로 전화 했을 때 자격증이 왓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흥에 겨웠고 무언가를 해 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제 다른 계획을 세워야겠지. 떠나는 계획. 지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애는 나와 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무작정 그녀를 데리고 다닐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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