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카오산 로드다. 뭐 베낭여행자의 천국이네 동남아 여행의 베이스캠프네 하는 카오산 로드.

난 멋도 모르고 간 케이스. ㅠㅠ 가보고 싶기는 미얀마였는데 미얀마가 아직 개방이 덜 되어 여행자들에게

썩 친절하지 않은 이미지가 있어서 일단 태국부터 함 가보자 해서 발 디딘 곳.

 

10일동안 카오산로드에만 있었으니 ㅋ... 엄두가 안 난다.

영어는 통하지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냥 외국인들만 바글대는 카오산로드에서 어슬렁 어슬렁. 

 

그래도 여행의 묘미중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식도락. 먹는것일게다. 살기위해 먹느냐, 먹기위해 사느냐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가끔은 맛난 것도 먹어야 인생이 즐겁다. 이런 독특한 요리도 말이다.


태국이 쌀 수출 No1인데 먹을 거리가 없던 것은 아닐텐데 왜 이리 온갖 곤충까지 다 잡아먹는지 무슨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까? 독실한 불교국가.

살생을 금하라는 금과 옥조가 없나? 하찮은 미생물일지언정 혹시모를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 짚신을 신었다는 스님들 이야기는 태국에 없나보다.


쌀국수. 베트남도 유명하지만 태국도 유명하다.


다양한 쏘쓰. 뭔지 몰라서 그냥 이용하지 않았다. 알아야 좀 더 맛깔스러운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지만 필리핀과 비교했을때 약간 더 비싸지 않나 하는 생각.




이 때가 태국 홍수로 전세계 쌀값이 폭등하고 하드디스크가 귀한 대접 받을때다


먹고 싶지? 먹고 싶지? ㅎㅎ


그런데 이 사람들도 참 고기를 좋아한다. 몇 나라 안 돌아 다녔지만 한국이 과거 정말 못살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음식에서 기름진

음식은 양반부유층이나 먹지 않았나 해서 말이다.




태국 방콕도 온 도시가 박물관이고 유적지이다.


태국까지 왔는데 똠똠똠또ㅁ냥꽁 먹어야지. 그렇게 맛잇다며? 흠... 시큼달큼 뭐 그러네. 



 

태국. 행동반경이 넓지 못해서 큰 반향을 주지 못했던 방콕. 뭐 또 기회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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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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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적이다. 음주가무를 좋아한다. 개방적이다. 친근하다 그래. 그렇다. 아마 필리핀을 좋아하는 사람들중에 이런 이유로 필을 찾는 사람이 많을 것이며 또 오랜 기간 찾지 못하면 친구의 소식을 궁금해 하거나 친구가 보고싶듯이 필을 찾는 경우. 내 경우다.

 

필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어쩔 수 없는 환경이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그들의 방식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는 것은 다른 구미의 선진국들이 대한민국에 하는 그 것과 다를 바 없다.

 

도착한 첫 날. 난 일본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간다. 맛깔나는 음식도 음식이지만 분위기가 조용하고 편안해서 식사를 하는 잠시지만 조용히 혼자만의 사색에 빠질 수가 있어서 좋다. 사실 필에서 바깥에 나가면 혼자만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의외로 쉽지가 않다.


늦은 시간까지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고 퇴근하는 사람들.근 몇 년사이 필시장이 토건족인지 빌딩을 올려대고 있다. 마닐라베이는 쳐박아둔채. 정작 서민들이 원하는 것은 마닐라베이일텐데 말이다. 나같은 여행객에겐 더구나 말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 아이들에게 물이 더러워 병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하거나 아이들을 걱정하는 측은지심이 오히려 책임지지 못할 발언일 거 같다.


점심시간의 어느 식당. 흡사 학생식당과 같은 분위기인데 이 곳에서도 노래를 부른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노래라는 것이 즐거워서만 부르는 것이 아니리라. 노래는 어떤 감정의 표현이든 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사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 필 청춘의 큰 고민이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이들은 아예 꺼리가 없다. 불타는 청춘에게 무엇인가 자신을 태울만한 꺼리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지, 재앙일 것이다. 노천까페에서 일하는 웨나. 아마 아우어리로 300페소좌우로 받는 듯.

 

마닐라베이가 만든 그림.


카메라에 전혀 기죽지도 않고 오히려 사진을 만들어주는 센스는 가히 세계 최고.


로빈슨 플라자 앞에서 만난 꼬마 아이. 저 해 맑은 미소에 어른이나 할 수 있는 걱정이 담겨 있다면 어른들은 죄를 짓는거다.

 

 

나도 어른인데 참 참 참 참.

흠.

세상 참,

뭐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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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도로 사방비치를 갔습니다.

이 곳은 말라테지구 리메디오스 스트리트의 펜숀입니다. 필리핀에선 유스호스텔이나 여행자숙소등을 펜숀이라고 칭합니다.



민도로에 가기위해 DLTP로 택시타고 가서 바탕가스 피어로 갑니다. 그 곳에서 사방비치 가는 배를 타고 가는거죠.



바캉가스 피어 터미널입니다. 이렇게 찍은 사진을,



어안렌즈로 찍으면 이렇게 보입니다. 렌즈를 닦지 않아 좀 흐릿합니다.



사방비치에서는 수 많은 리조트가 있는데 굳이 예약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면 방은 있습니다. 이런 방이 1000페소 하는군요. 어안렌즈가 있으면 좋은 것이 이런 방을 찍을때 한 큐로 끝낼 수 있다는 것. 다 보이죠.



근처의 식당입니다. 분위기 있죠?















호핑을 갔습니다.프라이데이스 비치라는 곳입니다. 아늑하고 편안합니다.





 

중국에서 글을 올리니 여간 늦은게 아닙니다. 정말 한국은 인터넷 빨라요. 아후...

위 사진들은 필리핀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필리핀의 민도로 사방비치 갔을때 찍은 사진이구요.

 

여행중이라 렌즈표면을 닦지 않아 사진이 흐릿합니다.

아. 렌즈는 링크 참고하세요.전 어안렌즈만 있습니다.

링크에는 광각렌즈도 있는데 광각은 분리가 되어서 접사도 가능합니다.

광각렌즈는 델스트릭을 블랙박스로 이용하는 분에겐 넓은 화각을 줄 수 있어 좋습니다.

블랙박스 어플중엔 오토보이가 공짜입니다. ^^ 괜찮더군요.

아, 전용으로 사용하진 말고 2채널로 사용할때 괜찮습니다. 혹은 비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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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호텔을 지우디엔, 우리이 모텔보다는 약간 더 좋은 수준 혹은 비슷한 수준을 빙관, 이렇게 되더군요.

지난 11월 초 심양에 갔을 무렵 2군데의 빙관에서 묵었습니다.

두 군데 다 심양 기차역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기차역을 마주모았을때 오른쪽 편에 있는 허핑빙관. 그리고 왼쪽편에 맥도날드 건물에 있는 아..이름이 가물가물.

그런데 맥도날드 건물에 있으니 찾기 쉽고 가격도 오히려 허핑빈광 150원과 비슷한 가격인데

허핑은 인터넷이 되지 않고 그 곳은 인터넷도 되더군요.

확장공사를 한 건지 새로 지어진 건지 약간 어수선한 면은 있지만 더 좋습니다.

 

두 번째 호텔에서 바라본 심양역 모습입니다.

 

허핑빙관인데 방이 좀 좁더군요.

 

심양역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참 춥더군요.

 

아쉽게도 그 곳 사진을 찍지 못하였습니다만 역전주변으로 있기에 찾기는 쉽습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6시만 넘으면 도시에 사람이 없어서 더욱 을씨년 스럽더군요.

시내중심가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길에서 본 망아지? ... ^^ 돈 많이 버셨을려나,

 

동북 최대의 도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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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따스한 기후에 감싸인 해변에 행복이라는 물결이 넘실 거리며 구리빛으로 그을린 청춘 남녀들의 미소들이

떠도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호주는 말이다. 별천지로만 여겨졌던 그 곳에서의 스물 여섯의 내 모습.

10개월 나에게 무척이나 고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것은 신문에서나 혹은 TV에서나 보며 막연하게나마

동경하던 호주로 갔다는 생소함 이상의 것이다.

 

내 또래의 젊은 청춘이 그렇듯 나 또한 느즈막한 나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열병들과 번민이라 불러도 좋을

-적어도 나에겐- 고민들은 그 곳으로 내 몰았다. 여행이라고 해도 좋고 도피라 불러도 좋을 호주 Working holiday maker로서의 10개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내게 다가온 것은 그 이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 그 기억을 용기삼아

현재의 불편을 이겨 나가고자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 아름답기만 하던 내 스물 여섯의 호주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기억에 다시 곱게 빛을 내려면 지금 힘을 내야 하지 않을까.

 

벌써 10여년이 흘렀내요. 저는 1996314일 출국하여 그 해 일 년을 못 채우고 IMF구제금융을 받던 12

그 것도 24일에 입국하였습니다. 당시 호주에서는 한국의 경제상황에 많은 관심을 보였었기에

한국의 IMF는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한국은 호주의 두 번째 무역 상대국이었으니 당연할 지도 모르죠.

 

첫 째요? 일본이었죠. 전 그 때 공항 면세점에서 part timer로 근무하면서 고생쫑 행복쨍을 누리고 있었는데

고 놈의 IMF가 절 부르더군요. 비장한 마음으로(정말 비장했음) 일찍 들어가 보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인생의 반환점과도 같은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워킹홀리데이와 같은 것 말이죠.

10여개월의 호주생활은 지금까지도 내 삶에 용기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든든한 응원군이며

소중한 자산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약간의 무책임과 치기가 버무러진 자세로 시작된 호주의 첫 도착지인 시드니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긴 기초 회화마저 쑥맥인 실력에 가져간 현금이라곤 86만원이 전부였으니 말이죠.

경제적인 궁핍에서 오는 조급함으로 도착하자마자 파트타임 잡을 찾아나서야 했지만

먼저 온 한국인들이 이미 지나간 자리들뿐이었습니다. 마치 때늦은 늦여름 바닷가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사장을 홀로 걷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시드니에 있었던 9일간, 일본인 마나미를 알게 되었고 일본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설픈 영어에 귀를 기울여 주고 또 격려해 주며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수 많은 생각과 단어를 떠올려야 했던 그 답답함을 오히려 안쓰럽게 지켜봐 주었습니다. 그 건 다분히 편향적이었던 일본인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충분한 이유였으며 이후로 여러 일본의 젊은이들을 만나며 전 그들을 친구로서 충고와 격려를 해줄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둘이 고민하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저 빈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9일간을 긴장과 초조함속에 보내다가 우연히 그리피스에서 온 여행자를 통해 번다버그를 알게 되었고 지체할 것 없던 나는 맥패커씨를 타고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포도 주산지로 알려진 Grifith에서 농장일을 하다가 번다버그로 가는 길에 시드니에 들른 것이었습니다. 18시간을 타고 브리즈베인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탄 후 6시간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터미널에서 알게된 Princess of wales까지 찾아가던 그 길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한 낮 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차량도, 인적마저 드물어 오히려 불안했던 도시. 짊어진 배낭아래로 흘러내리던 땀방울, 업었다가 들쳐 매었다가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하며 황량한 그 곳에 도착했지요. 농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니 편해지더군요. 외국인 친구들과도 함께 놀러 다니며 한 잔의 맥주로 피로를 풀기도 하며 말이죠. 호주에서 다가오는 모든 경험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리라 믿었습니다. 외국인들과 격의없이 만나며 대화하고 친구처럼 즐겁게 지내기도 하며 함께 Bundaberg Aqua Scuba에서 open water 라이센스를 취득하였습니다. 가끔 주말이면 시내의 다른 백팩에서 한국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하기도 하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지요. 번다버그에서 보낸 약 3개월의 시간동안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별 것 아니구나하는 자신감을 얻은 것은 확실 했습니다. 가진 돈이 없어 일을 구해야 한다고 1000$을 들고 번다버그로 들어갔던 제가 다음 행선지인 Fraser island로 갈 때는 700$이 있었으니 말이죠. 번다버그에서 일본인 지애를 만났습니다. 동갑내기인 지애와 함께 한 2개월여의 여행은 호주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중 하나입니다. 함께 히치하이크를 하고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매니저에게 말해 같이 일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던 거 같습니다. 전 보물처럼 가지고 있던 된장과 고추장으로 수퍼에서 산 여러 호주 야채를 곁들여 국이나 찌게를 끓이곤 했는데 지애는 그 국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입맛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번다버그를 떠나 프레이저 아일랜드에서 Safari tour를 마치고 전 Gold coast로 갔고 지애는 Rock hamnpton으로 갔습니다. Suffers paradise 라는 이름처럼 왜 그리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지 그 때의 지독한 외로움은 지애와 헤어진 직후라 더했는지 모르죠. 식당을 찾아봤지만 잡을 구한다는게 하늘의 별따기와 같더군요. 번다버그에 있을 무렵 써퍼스 파라다이스에서 올라온 누군가가 극구 말리던 기억이 새삼 떠 오릅니다. 결국 다시 TNT를 뒤적이다 눈웨 띈 보웬. 보웬으로 갈 생각을 하고 거리를 거닐던 중 일전에 지애가 보여주었던 유스호스텔 티켓이 생각났습니다. 롹 햄프턴의 몇 개 유스호스텔 전화번호를 알아내었고 그 중 몇 군데 연락을 하다가 통화가 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감정이 나와 다름이 없음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 녀는 Woof를 위해 Miliam vale로 간다더군요. 결국 그녀와 다시 Agnes water의 독일인 가정에서 일주일간 팜스테이를 함께 했습니다. 독일인 부부와의 생활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독일인부부는 vegitarian이었으며 BeatlesImagine처럼 종교에도 국적에도 그리고 피부색에도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빵이나 요쿠르트를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식탁에서는 Korea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보며 BeatlesImagine을 애기하곤 했습니다. 아침이면 꽃이나 수목에 물을 주고 오후엔 히치하이크로 주변에 놀러 다녔지요. 일주일 머무른 이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에어리비치를 향했습니다. 에어리비치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여러 도시중 호주에서 아름다운 곳중 한 곳이라 감히 말씀 드립니다. 아담한 마을과 같은 분위기에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아름 다운 곳이죠. 13Begley에서 3일을 지내며 에어리 비치를 만끽했습니다. 45$하는 Cruze도 괜찮았습니다. 비록 배멀미와 감기가 겹쳐 고생을 했지만 말이죠. 지애와 함게 했기에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릅니다. 마을너머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정경에 취하기도 하고 언덕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유치한 궁금증에 걸어 올라갔다가 털래 털래 걸어 내려오는 무미건조함도 있었지만 말이죠. 이제 돈도 떨어졌으니 다시 보웬으로 가야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간 보웬의 정류장 근처에 있는 Denison hotel에서 몇 일 지내다가 이 곳 저 곳에 정보를 얻어 Trinity backpackers로 옮겼습니다. 보웬의 가장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그 곳에서 다시 일을 하면서 부족한 잠과 싸워가며 회화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어떤 이는 호주에 도착하면 어학원에서 3개월정도의 회화공부를 하고 쉐어나 하숙을 하지만 전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오히려 악이 생기더군요. 처음 방을 얻었을 때 룸메이트로는 스코틀랜드의 귀여운 아가씨 Sarah Rollo였습니다. 호주에 오기전 멜 깁슨 주연의 Brave Heart를 감명깊게 본 지라 영화 애기를 하며 스코틀랜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니 반가워하며 잘 해주더군요. 치마입고 악기 부는 남자들하며 이런 저런 애기를 하자 사라도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고 말이죠. 우린 쉽게 사라와 친해습니다. 같은 방을 쓰는데다 워낙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라였기에 우리 유니트는 사라의 친구들로 차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옆 방에는 23살인 Hieth라는 뉴질랜드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확실치 않지만 전 히쓰라고 불렀습니다. 히쓰의 영어만 그런 건지 뉴질랜드 영어가 그런건지 모르지만 조금 발음이 특이했어요. 히쓰는 사라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있는 곳엔 히쓰의 모습도 보였으니 말이다. 2주일뒤 사라가 케언즈로 갔을 때 외로워 보이던 히쓰. 언젠가 일이 끝나고 와서 보니 씨익 웃는 그의 입에서 이빨 두 개가 없어진 것을 알았고 나는 누가 그랫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뒤에 알고 보니 싸움이 있었는데 히쓰가 상대방에게 더 많이 상처를 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큰 키와는 달리 정말 순진해 보이던 히쓰. 언젠가 술에 취해 쓸쓸한 듯 사라가 보고 싶다며 말하던 히쓰의 푸른 두 눈엔 연민이 가끔 비치곤 했습니다. 사라에게 전화도 못하고 그 저 주소와 전화번호만 갖고 있다던 뉴질랜드에서 온 히쓰와는 같이 일도 하며 훗날 보웬을 떠나기 떠나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습니다. 당시 보웬은 전국에서 Picker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한국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자신의 계획대로 생활을 잘 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또는 그렇지 못한 이도 있습니다. 어학은 호주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의 활동폭을 넓힐 수 있고 다른 여행자들과의 교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요. 영어를 잘 하시는 분은 괜찮겠지만 못하시는 분이라도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한다면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호주까지 가서 어학 하나의 이유로 풍부한 경험을 갖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을까요. 지애의 비자가 끝날 무렵 이 되어 귀국편을 타기 위해 케언즈로 출발하게 되는 날 아침입니다. 지애가 떠나는 날 전 지애를 배웅한다고 전날 매니저에게 말하고 하루 쉬었습니다. 모처럼 늦잠을 잤어요. 햇살이 창가로 나 몰래 살짜기 발을 내 딛은 늦은 아침. 눈을 떠 봅니다. 허리가 여전히 묵직합니다. 이리 저리 뒤척여봅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지애가 보입니다. 바보같이 웃내요. 헤하고 말이죠. 방긋 저두 웃습니다... 몇 시 차냐고 묻자 2시차라고 합니다. 밥먹고 가면 되겠구나. 일어나서 이빨을 닦고 샤워를 해 봅니다. 백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다들 일나갔군. 방에 들어와보니 짐을 챙기고 있는 지애. 지애는 내가 일과 후에 다른 곳에 가서 술을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면 따라 오지 않고 혼자서 방에 있었는데 쉽사리 다른이에게 말을 못 거는 성격이라 심심했을 것입니다. 있을 때 잘 할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 하기 보다는 듣기를 좋아했던 지애. 지금 생각하면 처음엔 정말 당돌하다 싶던 아이. 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정말 안 어울릴 거 같았는데 말이죠. 둘이서 공연한 일로 신경전을 펴기고 하고, 애써 토라진 너를 달래려고 애쓰기도 하고,.. ~! 너를 안지 어느새 2개월이구나. 이제 가는구나. 점심때 어제 저녁에 Coles에서 사 온 닭다리를 이용해서 야채를 섞어서 닭죽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식사입니다. 지애와 함께하는. 버스안에 지애가 앉아 있습니다. 울지 않습니다. 그래 너는 강하니까, 차가 출발 할 무렵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고 어깨에 교대로 올리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내요. 나도 같이 해 주었는데 어제 같이 본 영화에서 어느 연인이 헤어지면서 나누는 제스춰였습니다. 몇 일뒤 케언즈에서 신라면과 과자, 그리고 고추장이 소포로 배달되었더군요. 이후 1400$이 모이게 되면서 케언즈로 출발했습니다. 워킹홀리데이 기억에 농장에서 과일딴 기억만 있는 거 아냐? 하는 자문에서 비롯된 자답이었습니다. 케언즈에 와서는 다른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는 신념으로 찾아나선 끝에 국제공항내의 면세점에서 파트타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잡을 찾기 위해 비디오가게, 모텔, 백패커스, 주유소등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힐튼 호텔을 찾았을때의 기억이 납니다. 정성스럽게 resume를 작성하고 그 것을 봉투에 넣어 호텔문으로 들어가저 도어맨이 묻더군요. 손님같지는 않아서 그러했겠지요. 전 잡을 구하고자 지원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자신이 매니저에게 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냥 전해주고 말았는데 몇 일뒤에 편지가 왔더군요. 관심에 감사하지만 현재는 채용계획이 없고 계획이 있을때 다시 연락하겠다는 글과 매니저의 싸인이 든 내용이었습니다. 비록 소기의 성과는 이루지 못하였지만 어디든 두드려보면 그래도 대답은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밤에도 문을 여는 가게는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저녁밥을 먹고 돌아다녔지요. 결국 에스플러네이드의 푸드코트에 있는 중국식당에 디쉬워셔로 취업했지만 곧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던 일을 다른 이가 같이 하게 되면서 말이죠. 한 시간에 6$ 50C였지만 감사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우연찮게 일본인들이 자주 가는 일본의 식료품점의 보드를 보다가 공항의 면세점에서 일본인을 찾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급히 연락을 하고 곧 인터뷰를 한 결과 고용이 되었지요. 면세점에서 하는 일은 일본인이나 한국인에게 보다 비싼 위스키나 꼬냑을 프로모션 하는 일이었습니다. 할인점에 도우미들이 물건 홍보하듯이 말이죠. 유럽인들은 대부분 저렴한 제품, 자신의 기호품을 찾는데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은 선물을 하기 위함에서인지 몰라도 비싼 제품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판매를 위해서 제가 고용되었던 것이죠. 농장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한 근무환경과 높은 급료는 그 동안 고생했던 것에 보답이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대견스럽더군요. 시간당 15$이 넘는 페이를 받았으니 꽤 많은 금액이었지요. 집도 렌트해서 일본인에게 작은방을 임대하고 큰방은 도서관에서 알게 된 한국인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일본인은 물론 이태리인과도 같이 생활을 하며 보다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에 대한 이해가 가장 컸던 거 같내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작은 목소리로 애기를 하며 한국인에 대한 어떤 오해도 없었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라면 충결일까요. 호주는 전 세계 특히 유럽에서 많은 젋은이들이 옵니다. 호주의 드넓은 자연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또 체계적으로 짜여있는 관광 시스템은 그 돈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그 곳처럼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일주일중 3일에서 4일 오전은 공항게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콜스에서 산 싸구려 낛싯대를 들고 케언즈항에서 낛싯대를 드리우곤 했습니다. 제가 렌트한 집이 있던 Sheridan st. 에서 케언즈항까지는 번화가인 esplanage st.를 지나 자전거로 15분정도 걸립니다. 큰 도로 주변으로 있는 도시의 건물들은 시드니나 여타 도시와는 다른 특색을 엿 볼수가 있습니다. 당시 인구는 10만 정도의 작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더욱 커졌겠지요. 변화도 많았을테구요. 작지만 우리나라의 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market도 있고 큰 공원도 있으며 문화적인 환경이 잘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밤에는 Beaches라는 나이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추며 놀기도 했습니다. 케언즈는 그 간의 농장생활과는 또 다른 이국생활의 묘미를 주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이국문화와 호주를 조금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간 적막하기만 했던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생활에 또 다른 파스텔빛 색채를 안겨주었습니다. 10여개월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로서의 생활을 짧게나마 요약을 하려니 불완전한 기억도 기억이거니와 미숙한 글솜씨로 인해 군데 군데 이 빠진 동그라미처럼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은 귀국이후 제 홈페이지인 http://dcity.co.kr 을 통해 조심스럽게 올려놨답니다. 그리고 호주의 경험을 기억삼아 다른 나라도 갈 수 있었고 말이죠. 일상에서 그 때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애기할 일도 없고 또 말한 다는 것도 겸연쩍었는데 그 동안의 생활을 이렇게 쓰면서 뒤 돌아보니 그 건 기억뿐이 아니었내요. 가끔 그 때의 앨범을 뒤적이거나 호주 소식을 우연찮게 보거나 접하게 될 때는 그 때의 기억들이 아스라이 클로즈업되기도 합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의 충실함에 감사하며 내일의 계획을 다지다가도 그 때의 모습들이 미소짓게 하는 걸 보면 말이죠. 길지도 않은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호주에서의 생활은 이후 그 해 IMF로 인하여 일정보다 빨리 돌아와야 했지만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경험은 이후 제 인생의 새로운 변곡점으로 용기와 기회를 가져다 준 무지개와도 같습니다. 누군가 워킹홀리데이로 고민을 한다면 전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젊다는 건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그 기회다.”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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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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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찾아 온 중국 심천,

어쩌면 한 번 가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추진하는 상품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 볼양, oem 오더도 내 볼양으로 왔는데 사실 현재의

재고상황을 볼 때 oem은 시기상조이더군요.  중국에서 상품을 수입하며 적지 않은 상품을 수입했지만

그 중에서 악성재고로 남는 상품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으로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들 때는

한 발 뒤로 물러섭니다. 쉽게 결정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지난 거래처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반가움을 전했습니다만,

사실 거래가 쭈욱 지속되어야 진솔한 반가움이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처럼 거래가 없어도

서로 친구와 같은 동반자가 될 수도 있지만 중국은 서로 안부전하기도 힘든 거리이니 말이죠.

 

무선기기를 판매하는 업체입니다. 이 업체와는 두 번의 거래를 했었고 이번 방문에 신규거래로 인하여 협의중입니다.

 

첫 거래처나 다름 없던 곳에서 일하던 청년인데 다른 곳에서 일하더군요. 그 곳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옮긴 듯 합니다. 밝은 청년입니다.

 

그래도 반가움은 표현이 되지 않을까요. 사람인데, 없는 거래야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말이죠.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

사람만나기가 쉽지가 않지요. 성격이 워낙 쾌활하고 낮 선 분위기에서도 적응을 잘 하는 편이지만 말이죠.

변화에 점점 무뎌지는 나이가 되는 거겠죠.

 

심천도 많이 변했습니다. 더구나 화창베이는 예전의 그 삭막함은 사라지고 공원처럼 포근해졌습니다.

 

큰 길로 버스,택시, 자가영, 오토바이등이 얽히고 지나는 행인들, 물건든 행인들이 섥혀서 정말 불편하고 짜증유발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을 몇 년간 공사를 하더니 전부 밀어버리고 휴식의 공간으로 만들어서 화창베이 전체가

포근해진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전동휠이며 전동보드, 전기오토바이, 전기자전거등 전기를 이용한 비하이클이 다닙니다.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썩 복잡하지 않아서인지 별 탈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내 도처에서 전기택시, 전기버스등 전기를 이용한

교통수단이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좀 더 깨끗해진 느낌이 들기도 하는군요. 친한 동생이 중국에 일이 있어 들어왔는데

심천의 발달상이나 각종 편의시설들을 보면서 탄복을 금치 못하다가 "형, 중국이 정말 대단한 건, 전봇대가 없어요.

전선을 다 땅에 묻었다는 거죠." "어?" 그러고 보니 전봇대가 없습니다. 인도의 한 쪾을 차지하던 전봇대가 없습니다.

전선이 치렁치렁 처지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볼라치면 걸리적 거리던 전선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식당에서나 수퍼에서 물건을 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쳇페이를 이용합니다. 혼자서 지갑을 꺼내 돈을 내고 잔전을

받는 느낌이 순간 미개인? 오바이겠죠? 마치 현금을 쓰지 않고 카드를 쓰는 데 현금을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카드를 안 쓰지? 그게 편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던 본인으로선, 아마도...

 

 

심천 여기저기에 공유자전거 mobike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휴대폰으로 결제하고 모바이크를 타고 아무곳에나 둡니다.

그래서 관리를 안하면 이 거 망한건가? 했는데 여전이 mobike는 여전히 메이퇀뎬핑(美團點評)에 인수되어 운영이 되고는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중국의 변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음식배달업의

천국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인 것 같습니다. 포장음식을 배달하는 전기오토바이들이 분주히 움직입니다. 올 해들어

주춤해졌다고는 하지만 2018년 평균 1일 스타트업이 18.000개가 넘게 생겼다고 하니 중국의 역동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국이 지난 2000년 초반에 벤처거품이 활화산처럼 올랐다가 꺼져갔던 것처럼 그런 과정이 아닐까요.

변화의 바람이 세계 불수록, 그 바람에 대한 반작용도 커질 테니 말이죠. 없던 문화를 만들어내고 바꾼다는 것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화창베이 전경

화창베이에서 VR을 촬영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구매했습니다. 자못 신기합니다. 2018년도에 출시된 제품인데 

너무 앞서간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많이 팔리지를 않아 중국사람들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인터넷에서는

더 싸게 팔아서 속이 쓰리긴 한데 잘 찍고 있으니 만족해야겠지요. 

다음 기회에는 VR영상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방문객중에 VR사진을 보는 VR뷰어를 추천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반 뷰어에서는 2D로뿐이 보이지를 않더군요.

 

그럼 다음에 뵙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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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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