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6"을 기획하며 가장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던 번디를 마쳐보니 실상 보는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번디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제대로 마친 건지 하는 의문, 마치 이빠진 동그라미를 그린 것 같내요. 나의 26의 모든 글들을 쓰면서 항시 나를 붙잡았던 것은 1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과연 그 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지 자칫 혼자만의 과거에 사로잡혀 그 것들을 미화시키는 것은 아닌 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지난 과거의 흔적들은 애틋해서 아름답게 포장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있기 마련 아닌가요. 특히 어떤 것들은 기억의 골짜기에 아직까지 뚜렷하게 남아서 그 아쉬움을 아름답게 다시 재생시켜 보려는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그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과 실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실명을 넣어도 당사자가 개인적인 친분으로 무사할 것 같은 이는 실명을 기입했고 그렇지 않은 이는 가명을, 그리고 기억이 허락하지 않는 이는 부득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현재까지 제 기억에 맑은 가을 하늘 색깔로 남아있는 manami와 지애(天愛)와 관련된 내용은 문맥상 필요하다 싶은 부분에만 간헐적으로 넣었기에 글의 구성에 허점이 될 지도 모릅니다. 빠져서는 안되겠다 싶은 경우에 이 곳 저 곳에 자리를 하다 보니 마치 완성한 그림에 덕지 덕지 덧칠한 것 같게 되더군요. 처음에는 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그래서 마나미와의 내용도 상당량?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번디를 마칠 때쯤 기억의 여기저기에서 부딪치는 지애의 기억을 용게 피해다니다가 문득 번디이후의 생활이 약 2개월이 우려되더라구요. 어떤 오해도 걱정이지만 그 기간동안 같이 여행을 했거든요. 우선은 어떻게든 메꿔 보렵니다. 그러니까, 이 후 독일인 농장의 우핑(Woofing)과 에어리 비치(Airie beach), 그리고 보웬(Bowen)의 어느 정도까지는 내용상 헛점이 보이더라도 양해를 구합니다. 그 때의 기억들 언젠가 "나의 26"을 마치고 하릴없이 일상에서 허우적 댈 때 저의 기억들을 다시 채색해 볼 생각입니다. 고운 빛깔루다가 말이죠. 느낌이 말해주던 그 날들을 말입니다. 혼자만의 애틋함을 그리면서, 어쩜 모르죠. 혼자서 간직하며 잠이 안 오는 까만 밤에 떠 올리며 키득댈지도,
 

낙 서 후휴~ 힘들다. 가끔 실망스럽기도 해요.도대체 무슨 글들을 쓰는 건지 말이죠. 이런 글들을 써야 하나? 어디까지 써야 하며 어디까지 넣어야 하는 건지, 이러다가 손님 떨어지는 건 아닌지, 쩝! 휴~ 며칠간 낮과 밤이 뒤 바뀐 생활을 했더니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군요. 헤구, 전생에 올빼미였는 지 부엉이었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나의 26을 쓰는데 정성?을 쏟다보니 다른 메뉴를 업데이트 하기가 조금 힘드내요. 변명일 수도 있지만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도 중요한지라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 하니 말이죠.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그래도 오시는 분들이 방명록에 글들을 남겨주시면 힘이 되더군요. 아마 홈페쥐 갖고 있는 분들은 그 기분 아실 겁니다. 그쵸?

'또가고싶다 > 호주some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양아래 프레이저 아일랜드  (0) 2009.06.20
석양이 아름다웠던 Harvey bay  (0) 2009.06.13
안 녕 ! 번 디  (0) 2009.06.02
워킹홀리데이-스쿠버 다이빙  (0) 2009.05.14
번디와 사람들(3)  (0) 2009.05.07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번디는 번다버그의 애칭이다. 도시에 애칭을 부치는 자유.

그 일 이후로 다시 1주일을 지내다가 나에게 돌아온 일은 `스쿼시'라는 야채를 따는 일이었다. 스쿼시.  농장주는 Dunn, 많은 과일을 따 보았지만 힘은 힘대로 들고 돈 안 되는 일이 바로 이 것을 따는 것이다. 농장에서 사실 힘 드는 것은 없다. 여자도 무난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허리가 무척 아프다는 것! 그래서 혹시 농장에 갈 작정이라면 차라리 신신파스 같은 조그만 걸루 왕창 사갔으면 한다. 물론 그 곳에도 맨소래담 비슷한게 있긴 하지만 조금 비싼 거 같고 무겁지도 않으니 말이다. 상비약이라고나 할 까? 머 한 참 뒤에는 아픈 게 정상인 것처럼 아픈대로 일하지만 처음 보름간은 정말 허리가 내 허리가 아니었다. 이 후 농장에 있는 동안 약 4개월은 신경통을 달고 다니는 것 같다. 글세 허리가 튼튼해 진다면 모를까. 이 건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호소하다시피 말하는 통증이다. Backpain을 연발하며 서로 웃다 보면 잠시 넘기기도 하지만 잠 잘 무렵 좋은 침대도 아닌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음. 청정원 마요네즈 TV CM에 보면 보이는 끝이 안 보이는 그 밭을 배경으로 두 꼬마들이 웃음을 짓는 데 그 뒷모습을 보고 호주의 농장을 상상하면 비슷할 듯하다. 전부 다야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컨트랙인 줄 알고 정말 허리를 피지 않고 따며 작업 후에 주어질 급료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어라! 그 건 시간급이었다. 쩝! 어쨌든 Dunn은 나보러 베스트 워커라며 입에 칩이 말라라 칭찬을 했지만 속쓰림은 어디에 하소연하노. 몇 일 뒤 다시 주어진 일은 번다버그의 하이라이트였던 keities농장의 egg tomato. 정말 달걀같이 생긴 토마토를 색깔 구분해서 갖고 다니는 바켓에 채울 때마다 매니저가 각자에게 나누어진 표식을 꽂아 놓고 일이 끝난 후 그 표식을 계산 하는 일이었다. 내 경험에선 이 게 가장 짭짤한 벌이었던 것 같아. 물론 내가 경함한 과일따기에서 만 말이다. 그 건 컨트랙이었고 그 만큼 뛰어다녀야 했다. 그 곳에서 한 태국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뛰어다니며 밥먹는 시간 마저도 아까운 듯 도마토를 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 는 영국 여자-애인이 아닌 가 싶다-와 함께 다녔는데 둘이 정말 일을 잘 했다. 마치 돈 벌러 호주에 온 사람들 처럼 말이다. 나도 그런 계획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학교 등록금을 호주에서 벌어 온다는 -오래 전에 지워 버렸고 그 저 남은 기간 별 탈없이 잘 있다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열심히 뛰면 100불 이상은 챙길 수 있었다. 다른 이는 나를 부러워 했지만 지금까지 일도 못하며 보내온 시간을 보상한다는 생각에 땀을 흘려야 했다.

 가끔 번다버그 시내를 돌아다니며 근처의 호스텔에 있는 한국인들과 어울리며 지내기도 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 무슨 사연이든 들여다 보면 귀를 기울이면 가슴 저미는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친구들, 친구들이라 부르기엔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이 대부분 인지라 머 하지만 그 곳에서 그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호주까지 오게 된 경유야 필설로 다 하랴만 말이다. 지금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사연을 안고 그 곳에 갔겠지만 말이다. 호주에서 만난 이들은 대학생이 대 분분이었지만 삼성 반도체의 연구원에 다니다 경험을 쌓겠다는 이유로 퇴사하고 나온 사람, 학교 졸업하고 온 사람, 휴학계 내고, 백수 건달로 집에서
부모 돈으로 카페 사장하다가 재미 없다고 놀러 온?, 동생. 참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다. 번다버그에서는 많은 일본인들을 만났는데 이상한 것은 일본 여자들은 부침성이 좋은데 남자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글쎄...... 어느 서양의 인류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지 아마,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중국인 요리사를 두면 그 남자는 행복한 거다"라고, 하지만 프린세스에 있던 한국인들은 거의 다가 성격이 활발해서 같이 일하던 다나까와 쯔꾸미등 일본인 친구들은 우리와 잘 어울렸다. 다나까는 일본에서 우편을 배달하는 차의 운전기사를 하다가 호주로 온 28의 형이었고 쯔꾸미는 노가다며 이 것 저 것을 하다 이 곳으로 온 동생이었다. 그리고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인도에서 3개월 살다가 온 일본 남자 켄지. 대학교 다니다 온 ??등 번다버그에서도 보웬에서도 그리고 케언즈에서도 만난 일본인들은 정말 친절하고 성실했다. 처음 정이 들기 힘들지만 정들면 쉽게 친해 질 것 같은 사람들. 특히 "신"은 보웬에서 만나 케언즈까지 정말 끈끈한 정을 쌓은 일본 친구다. 그의 도움도 받았고, 그렇게 쉬는 날에는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뭘 하려나,

wrt xeus 0421

'또가고싶다 > 호주some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번디와 사람들(3)  (0) 2009.05.07
번디와 사람들(2)  (0) 2009.04.01
Information of Prince of wales backpackers  (0) 2009.03.19
번다버그 첫번째 일  (0) 2009.03.16
번다버그의 한 달  (0) 2009.03.13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General Rules

No Alchole in the Hostel, only in the Beer Garden

No smoking in the hostel only in TV area

In the morning, before work

No Vistors on the Premises unless you check them in at office first

No Drinkiing, Eating or Smoking in the vans.

Genaral Information
Bike Hire $2(leave keys as deposit) Video hire $2(leave keys as deposit)
There are Sings around the Hostel Read Them.
Shopping Runs are every Monday and Thursday at 6.15pm
Sheets-You are responsible for the washing of your own sheets.
When checking Out Please Return Fitted sheet-Top Sheet-Pillow
and Pillow Slip or $5 for such item will be charged.

Telephone
Please direct all incoming calls to (071) 511 334
(Phone Messages ONLY taken for flats)
FAX (071) 511 334 After 8am-before 8.30pm ($3.00 to send)

Mail
can be sent to this address and will be available in the pigeon holes
near the back door


Prince of Wales Backpackers
22 Princess Street
Bundaberg 4670
Queensland Australia


We will post your mail as long as you put a stamp on it.

Deposit
pots and pans are in the offise (leave keys as deposit)
If you don't clean your pot $5.00 will be charged to get your deposit back
Plates, Bowls, Cups-$1 each Knife,Fork,Spoon-50c each
(Only 1 of each item refunded when you check out)
Food Crate-10$ Lock-$2
Blankets-$10
All money deposits are refunded when you leave.

Work
Are you colour blind? You can't pick tomatoes if you are
Please ensure you provide each employer with the following:
Employmentdeclaration form (in office)
Bank details for direct credit where applicable

Tax File Number
Tax Number must be applied for
Please make sure your name is on the work roster if you want to work
If you don't get up in the morning you will lose your job.
We don't pick you up if you get the sack
if you get the sack twice
we can't guarantee you work after that
Take Food, Hat and plenty of Water when working

CHECK OUT TIME IS 10am
No Cash Refunds unless by prior arrangement
if you want to work the day you check out you must pay for another night.
Office clloses 9pm every night
The week rate has to be paid in advance
if the rent is not paid on time
the day rate will be charged.

'또가고싶다 > 호주some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번디와 사람들(2)  (0) 2009.04.01
번디와 사람들(1)  (0) 2009.03.28
번다버그 첫번째 일  (0) 2009.03.16
번다버그의 한 달  (0) 2009.03.13
번다버그로 향하는 버스  (0) 2009.03.08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번다버그에는 CNS가 있다. 언젠가 그 곳을 찾아 갔을 때 드문 드문 서서 전산화된 호주 구인망을 이용해서 정보를 입수하고 그 걸 프린트 해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당시 번다버그에 도착한지 일 개월이 다 되가는 상황에서 일이 없어 애만 태우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그 곳까지 갔지만 여러 일거리들을 뒤져 봤지만 거의 장기간 일할 근무자를 찾고 있었고 또 거리가 멀기도 하고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베낭여행자나 워킹메이커가 CNS에서 일을 구하기는 힘들 것 같다. 면담을 심청해 볼 까 했지만 나의 짧은 영어는 아직까지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던 상황인지라 엄두만 내 봤다. 그렇게 실망을 안고 나오다 벽에 붙은 안내글을 보았다. 그 글을 보고 메모를 해 놓았는데,

"Accomodation and meals in exchange
   for 4 hours week per day (painting, gardening)
to north 1.5hours from Bundaberg
   takalvan st - cyber cafe around worker st. 533-388"

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반가운 마음도 있고 행여나 싶어 전화를 해 보았다. 여자가 받았고  그 여자의 말또한 오전만 일하면 나머지는 자유시간이라는 메모내용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가 있다고 하고 친구와 상의해본다음에 결정을 내리겠다며 수화기를 내렸다. 백팩으로 털레 털레 걸어오며 생각을 해 보았다. 괜찮은 조건이라 할 수도 있다. 흠. 하지만 그 것도 경제적인 뒷받침속에서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건 완전히 우프하고 하등 다를 것 없는 것이었다. 굳이 우프에 가입하지 않고도 우프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하나의 소득이라면 소득일터였다. 백팩의 일상으로 돌아와 언제나 일이 올까 기다리며 영어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는 날들.

외국친구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던 중에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들에게 일본 옆에 있는 나라라고 하면 그제서야 이해 한다. 글쎄 그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떠올리면서 어림잡아 일본 비슷한 나라 하고 생각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88올림픽을 애기해도 모르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자. 당신이 과거에 올림필을 열었던 어느 국가의 도시를 대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될 지 말이다. 10여년전의 올림픽을 열었던 도시라고 말하면 기억 할 수 있겠는가? 외국인들은 한국보다 일본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의 경제력이 문화까지 전파하고 있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호주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언젠가 뉴스에서 호주 모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제 2외국어로 채택해서 가르친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일본어는 필수 외국어에 가까운 형편이다. 들은 애기지만 어떤 집안은 가정의 모든 제품이 일제이고 그 집의 농부는 자기 자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가 제 2외국어로 채택된 경우야 대서특필될 정도지만 그 건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가
호주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 못 할 때 애기지만 호주인의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지만 글쎄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최근에 우리나라 관광산업을 많이 양성화하고 있는 입장이라 개인적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호주에 가면 퀸즐랜드는 여행자들의 힘을 빌어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돈을 다시 관광으로 쓰게 하는 절묘한 시스템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다. 백팩이나 유스호스텔이 투어 에이전시 역할을 하며 시내의 유흥가의 모든 시설들이 거미줄 같이 연결되어 있는 관광산업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같을 정도로 잘 돌아간다.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한국을 가 보았다는 영국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한국을 경유해서 일본에 갔는데 일본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인상에 대해서 그는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은 꺼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롯데월드를 가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끝이란다. 사실 동양을 찾을 정도의 여유있는 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 롯데월드나 동양최대의 워터파크라는 용인 캐러비안 베이에 오기 위해서 한국을 찾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양에는 그 보다 더욱 웅대한 놀이 공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찾는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문화,그리고 한국인의 정서를 알고 싶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충남 부여의 落花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낙화암 그 지명의 유래를 말이다. 그는 무척 놀라운 표정이었다. 3000 궁녀가 떨어졌다는 그 애기를 해 줄 때 마치 그 장면을 상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의 영어가 제대로 어필 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만으로도 그는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다. 서양인들이 들으면 믿기지 않을 그런 아름다운 애기들이 말이다. 백제시대의 "도미와 아랑의 전설", 그리고 "견우와 직녀"의 애기가 그럴 것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이유가 그런 문화적인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서양과는 다른 우리의 정적이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감동적인 이벤트 행사를 연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지금은 전국적으로 많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기에 다행이라 생각한다. 

'또가고싶다 > 호주some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번디와 사람들(1)  (0) 2009.03.28
Information of Prince of wales backpackers  (0) 2009.03.19
번다버그의 한 달  (0) 2009.03.13
번다버그로 향하는 버스  (0) 2009.03.08
시드니에서 농장 정보를 얻는 방법  (0) 2009.02.10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그 반가움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그의 한 마디말에 모든 것을 번다버그로 향했던게 아닌가. 일순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이 후 썬과의 생활은 반목의 연속이라 만남의 빛이 바랬지만, 썬 형이 혹시 이 글을 본다면 어쨌든 형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리셉숀에서 만난 닐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유쾌한 인상이었다.하지만 그는 호주에서 처음 만난 인종 차별주의자였었다. 2층 건물의 프린세스는 방이 약 8개 정도 있고 1층에는 부엌. 2층에 샤워실이 한 개. 그리고 바깥 정원? 마당이 더 낳을 듯 싶다. 마당에는 공동 사용의 세탁기와 샤워실. 마당에는 비디오 시설이 되어 있는 전형적인 농장 주변의 백팩이었다. 내가 잡은 방은 1층의 구석에 있는 8명이 생활하는 그 곳에서는 제일 큰 방. 방을 들어서자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는 베낭들과 오래된 듯한 빨래거리들과 도색잡지들이 이 곳의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번다버그에서 약 3개월을 보내게 되는 데 첫 한달은 번다버그의 주 농작물인 토마토가 수확철이 아니어서 그냥 보내야 했다.가끔 일거리가 주어지곤 했는데 그 일거리는 먼저 온사람들 순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난 한 달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일거리가 있는 날은 전 날 밤 9시경에 보드에 일거리가 주어진 농장과 일 할 사람의 명단이 부착되는 데 이 것은 항상 관심거리였다. 이 곳에 있는 사람 전부 또는 대다수가 일을 하러 왔으므로 말이다.

퍼스에서 부터 날아온 manami와 함께.

여행 관련서적을 보면 8,9월경에 바닷 거북이 알을 낳기 위해 번다버그로 찾아 온다고 적혀 있지만 그 것 외에는 딱히 어떤 매력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바다거북 하나로 여행자들을 붙잡기에는 호주에는 너무 매력적인 곳이 많다.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 그 곳에서 여행경비를 마련할 계획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 곳은 퀸즐랜드에서 가장 알려진 토마토 주산지였으므로, 첫 주는 여전히 경제적인 불안감때문에 라면과 쌀같은 걸로 한 끼를 때우기에 바빴다. 얼굴은 말이 아니었고 뭔가 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불안해하던 내가 빠른 시일안에 일거리가 없음을 알고 있는데 음식에 미련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금씩 음식지출을 늘렸다. 여러분에게도 이 말을 하고싶다. 먹는데는 돈을 아끼지 마라.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지 않은가. 그 곳은 고기값이 한국보다는 훨 싸고 돈을 아끼는 것보다 더위에 이겨내기 위해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 현명한 행위이다. 먹는데는 어느정도의 지출을 각오해라. 호주 어디를 가든 농장을 찾아간다면 필연적으로 그 곳은 덥다. (제 철이려면 말이다) 그 곳에서 먹는 단순한 문제로 스스로 자괴감에 빠트리지 말았으면 하는 게 먼저 겪은 이의 초라한 조언이다. 이 곳에 한국사람이 세 명있었지만 먹는 문제같은 것은 서로 관여를 하지 않았다. 가끔 얼마의 돈을 각출해서 영양보충이라는 이름으로 음식을 해 먹는 일이 아주 가끔 있었지만 말이다. 어쩜 조금은 인정머리가 없는 듯하기도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다 안고 있었고 어쩜 그로서 야기되는 문제를 피하기 위한 묵시적인 약속 또는 배려라고나 할까. 나는 틈틈이 닐을 찾아가 일거리가 없냐고 물었고 (
오너를 귀찮게 해야 한다) 부족한 영어를 공부하느라 바빴다. 내가 맨투맨으로라도 영어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훗날 귀국이후 나의 호주 생활을 대변 할 수 있는 것은 영어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농장에서 1년을 보낼 지언정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외국을 갖다 왔으면 영어는 잘 하겠군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곳에서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생활 했고 무엇을 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단지 외국을 갖다 왔다는 것에 대한 의아심과 그 사람의 영어실력에만 호기심을 갖을 뿐이다. 호주에서 1년(그 때만 해도 난 1년을 생각하고 있었다)을 보낸 놈이 영어기 황이라면 나의 호주생활에 의심을 품을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난 그 것을 상상하며 최소한 어학원에 다니는 학생 중 제일 못하는 놈하고는 비교는 되어야 한다는 자격지심에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말 쓸쓸하기만 한 번다버그.

깨끗했던 시내와는 달리 쓸쓸하고 황량한 건 내 마음일까. 
난 시내의 시티 백패커스와 모 백패커스를 다니며 한국사람을만나며 그 외로움을 달래었다. 그러다 우연히 시드니에서 나보다 먼저 떠난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가끔 일을 하고 있다며 시골의 적적함에 따분해 하고 있었다. 번다버그는 너무나 조용했다. 인구가 5만인가? 10만인가하는 이 도시가 퀸즐랜드에서 규모면에서 10손가락안에 든다는 소리에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한 달간 가끔 풀장을 찾아가 수영을 했고 한국인끼리 돈을 모아 싸구려지만 8~9$하는 포도주를 마시며 하루 해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던 듯싶다. 사람은 어딜 가나 자기가 보내는 시간들을 아무 소득없이 보내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 건 아닐까. 너나 할 것없이 한국인은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쩜 그 한 달이란 시간동안 난 호주에 대한 자신감과 어떤 신념을 얻는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번다버그에 도착했을 때 1000$ 갸량 갖고 있었지만 필연적이었던 불안이 2개월 뒤 번다버그를 떠날때는 주머니엔 약 700$, 하지만 호주 생활에 대한 확신과 함께 하비베이(Harvey bay)로 출발했으니 말이다. 참 난 호주에서 미국인을 만난 경험이 그 곳에서가 처음이었는데 그들은 3명이 늘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일을 하러 이 곳에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일 주일정도 머무르다 떠났으니 말이다. 한 손엔 일렉기타와 한 손엔 서핑보드를 들고 말이다. 밤에 가끔 전자기타를 두드려며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곤 했지만 다른 유럽인과는 어울리지를 않았다. 못한 걸까? 후자인 것 같다.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끼리는 잘 어울렸지만 미국인들을 따돌리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고교때 어느 신문기사에 미국이 발표한 대국민 성명에 "자국 국민이 세계 어느 곳에서 피해를 받거나 위험에 처할 때는 미국은 정부차원에서 강력히 보호 할 것" 이란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었다. 과연 그들은 싱가포르에서 자국 국민이 싱가포르 법규 위반으로 태형에 처했을때 싱가폴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한 적도 있고 (하지만 싱가포르는 그 거만한 미국의 콧대를 꺽어 버렸다) 그 외 대 미국인 테러등엔 강력한 보복을 취하곤 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참 미국이라는 나라는 저렇게 국민을 아끼는구나. 어떤 부러움도 느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딴 섬과도 같은 미국. 유럽과는 또 다른 서양의 한 축이지만 경제적인 이유를 빼고는 그들에게 아쉬울 것 없는, 그래서 벼락부자 보는 듯한 유럽인의 시각이 내가 한 때 부러워했던
미국을 오버 랩 시켰던 만남이었다.

'또가고싶다 > 호주some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formation of Prince of wales backpackers  (0) 2009.03.19
번다버그 첫번째 일  (0) 2009.03.16
번다버그로 향하는 버스  (0) 2009.03.08
시드니에서 농장 정보를 얻는 방법  (0) 2009.02.10
dear Manami  (0) 2009.02.10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

참고로 제가 가지고 간 것을 대략 말씀드리지요.
인터넷을 해 볼 양으로 노트북(486임)-두고 두고 후회하다
결국 한국으로 보냄- 과 베낭에 옷가지들 (겨울 옷까지 챙겨와서
이 것또한 보냄-호주에는 재활용이 생활화 되어 있어
우리나라 보다 훨 싼값에 옷을 마련 할 수 있답니다
)이 있었고
호주 관련책자는 자신만만 세계여행',
영어 공부는 영영사전(longman), 한영사전과 영한사전(프라임), interchange 네 권 tape 6개 (권당 두 개씩이나 마지막 권은
못 가져감-cambidge 출판), 맨투맨 기본 상,하권
(제 영어실력이 어느정도였는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죠)과
소형 카세트(AIWA)가 호주에서 보낸 10개월 내내
나의 충실한 영어 지도교사였고 동반자였습니다.
참! 왜 10개월만 보내고 왔냐고 묻는 분이 계시길래
이 기회에 말씀드리지요. 귀국하기 약 4개월 전부터
Cairns 국제 공항내의 면세점인 Down town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귀국 하기 보름전에 한국에 난리가 났다고 동료들이
걱정을 하는투로 말이 많더라구요. 신문에서도 난리가 아니고
TV에서는 뉴스시간마다 한국의 경제 환란에 대해 말이 많구요.
그래서 2개월을 더 채워서 남들에게도 말하기 좋게 1년을
딱 채울까 했지만 사실 한국이 그립기도 했고 (전 그랬답니다.
다른 제 주위 친구들도 그러더군요. 누가 호주오면 귀국할 때
귀국하기 싫다고 그랬냐고) 어짜피 갈 바에야 일찍 적응한다는
심정으로 왔지요. 그 만큼 호주에서는 한국의 사태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였지요. 호주가 한국에 적극적으로
융자 지원해준 거 기억하실 지 모르겠내요.
한국은 호주에서 두 번째 큰 교역국이었으니까요.
첫 번째는 일본이구요. 뒤에 적겠지만 호주는 일본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어느 세월에 10개월의 생활을 더듬을까 싶군요.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한도에서 답변을 할테니
급한 분은 게시판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분이 답변을 해 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출국이 확정된 분은 저에게 메일을 보내 주시면
제가 개인적으로 매일을 보내던 채팅을 하던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드리지요. 그리고 영어에 너무 겁먹지 마세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전 정말 영어엔 깜깜 무식이었답니다. 맨투맨 기본을 가져갈
정도로 말이죠. 물론 지금도 못하지만 외국인 앞에서 주눅이
안 드는 정도랄까요. 내가 말 못하면 지가 답답하지 내가
답답하냐는 여유랄 까요. 참! 그 실력에도 제가 면세점에서
한 일은 일본인을 상대로 일어로 양주나 초콜렛,담배 팔다가
호주인이 일본인을 상대하기 거북할 때(영어문제로) 제가
통역해 주는 일이었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일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면세점에서 아쉬운 대로 쓰는 극히 한정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는데 여러분은 못 할거
있겠습니까? 그럼 다시 그 때로 돌아갑니다

번다버그라고?
그 들중 나이든 사람은 썬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제프였다(주로 애칭을 부르는 게 편하다).
그리피스에서 포도를 타며 돈을 벌고 포도 철이 끝나자 위로
올라와서 시드니에서 몇 일을 보낸다음에 이제 도마토 철이
돌아오는 번다버그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들말로는 과일따기를
잘 만하면 한 달에 천 불은 쉽게 모을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돈이 당시 1100불 정도
(당시 환율은 1불에 800원이 채 안 되었음).
"그래 한 달에 1000불이면 가자. 지금 이 것저 것 가릴
게재가 아니다. 나도 가자. 번다버그. 그 날 내 일기장엔
번다버그가 또박또박 적혀졌고 멜버른에서 올라온 유학생과 나,
지영, 마나미는 그 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킹스크로스를
걷다가 장난끼 많은 썬은 나와 지영을 잠깐 따라와 보라고
해 놓고는 어덜트 샵으로 밀어놓고 나갔다. 으헉!
이상망측하면서도 신기한^.^, 마치 손가락으로 얼굴 가리고
그 틈으로 보고싶은 심리였지만 지영은 의외로 담담하게 보다가
같이 나왔다.(다음에 꼭 혼자 와서 보리라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 체 시드니를 떠나야 했다 쩝!) 우리는 퍼브에 가서
맥주를 마셨고 당구장에서 포켓볼을 쳤다. 이 나라는
사구라는 게 없다. 전부 포켓볼이다. 취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라면으로 때운 몸에다가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 지
그 날밤 꿈을 꾸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꼬대를 했는데,
그 잠꼬대가 영어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자면서도
내가 잠꼬대를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졌고
그 것이 영어였다는 것도 알았을 정도니,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음을 짐작할 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들을 보는 이를 생각하면
좀 더 멋지게 포장하고 싶기도 하고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이 글을 쓰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홈페이지가 나의 한 시대를
말할 수 있으리라는 뜻에서 일기를 써가는 의미도 있기에
기억이 자신하는 한은 사실대로 쓰고 싶다.

다음 날 지영이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 주었고 점심식사 후에
워킹 홀리데이에 협회에다시 한 번 가보자는 약속과
함께 난 두리 하우스로 돌아왔다. 마나미가 어딜 가려는 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또 그 놈의 하이를 하고 물러서려는데
마나미가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지영이는 이사를 잘 했냐고
물었고 나는 떠듬거리며 문법을 떠 올리며 단어를 꽤 맞추고
있었지만 마나미는 상당한 그 긴 시간?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내 답답함에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인터체인지를 펴고
"웨어 러유 프롬" 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면 해야 하는 것들을 외우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점심식사를 하고(항상 saving라면), 자신만만을 펴고
호주에 대해서 머리에 구겨넣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어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 얼마 뒤 지영이가 노크를 했고 그 뒤에는
멜버른 유학생이 있었다. 오다가 만났나 보다.
지영이와 내가 워킹 홀리데이 협회를 간다는 말에
그는 자기가 안내해 주겠다고 했고 나는 길을 모르고
지영은 워킹 홀리데이 협회 위치를 모르는 지라 우리는
그를 따라 전철을 처음으로 타고 시드니 시내에 나갔다.
두 세정거장 거리. "아! 거금 2달라. 드럽게 비싸군.
킹스크로스에서는 1달러면 피자가 세조각인데,
피자 6조각짜리 전철이라..." 어쨌든 그는 우리를 협회까지
안내했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다시 찾아간
워킹 홀리데이 협회. 하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정말 nothing이였다. 한국에서도 협회에서 권유하는 학원과
홈쉐어등을 등록을 안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의 서비스가
불만족 스러웠지만 행여나 공연한 불만을 말하면
시드니 가서 도움받을 때 피곤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오는 길에 지영이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며
직접 일자리를 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쥐길 놈들을 연발하며 협회를 성토했고
번다버그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 날 밤 찾아온 썬과 제프와 함께 포도주를 사서 예의
그 일당들과 자주 찾아오는 한국사람들(그러고 보니
다 남자다)은 자리를 함께 했고 그 곳에서 '영'이 우프
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 후 그는 번다버그에서
다시 만난다). 한국에서 뿐이 아니라
이 곳에서도 우프를 더 저렴한 값에 손쉽게 가입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에게 자신이 우프 갖다와서 잘 애기
해 줄테니 꼭 건강하게 잘 있으라는 우량아 몸집의
인상좋은 사람이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중에는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3개월을 그냥 보낸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그 날 시드니 생활의 비애를 들을 수 있었고
나는 번다버그라는 이름을 각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그 들중 몇 몇 이 마나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일본여자는 쉽다?는
생각! 물론 나도 그들의 성문화에 대해서는 들어봤기에
그 녀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마나미는 내가 호주에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첫 외국인이었고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계속된 일본인과의 만남은
내가 갖고 있던 일본관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런 변화는 이 홈페이지에서도 알 수 있으리라.
몇 몇 한국인들이 그토록 두리하우스에 드나드는 이유중 하나가
마나미였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그 때까지 마나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형편조차 못되었었다. 사실 나도
두리하우스에서 인기가 좋았던 마나미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눈치로 보아 몇 몇 한국인들의 모습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았고 또 내 문장 짜맞추는 그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대화의 불편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드니에서의 3일은 지나갔다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