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반가움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그의 한 마디말에 모든 것을 번다버그로 향했던게 아닌가. 일순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이 후 썬과의 생활은 반목의 연속이라 만남의 빛이 바랬지만, 썬 형이 혹시 이 글을 본다면 어쨌든 형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리셉숀에서 만난 닐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유쾌한 인상이었다.하지만 그는 호주에서 처음 만난 인종 차별주의자였었다. 2층 건물의 프린세스는 방이 약 8개 정도 있고 1층에는 부엌. 2층에 샤워실이 한 개. 그리고 바깥 정원? 마당이 더 낳을 듯 싶다. 마당에는 공동 사용의 세탁기와 샤워실. 마당에는 비디오 시설이 되어 있는 전형적인 농장 주변의 백팩이었다. 내가 잡은 방은 1층의 구석에 있는 8명이 생활하는 그 곳에서는 제일 큰 방. 방을 들어서자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는 베낭들과 오래된 듯한 빨래거리들과 도색잡지들이 이 곳의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번다버그에서 약 3개월을 보내게 되는 데 첫 한달은 번다버그의 주 농작물인 토마토가 수확철이 아니어서 그냥 보내야 했다.가끔 일거리가 주어지곤 했는데 그 일거리는 먼저 온사람들 순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난 한 달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일거리가 있는 날은 전 날 밤 9시경에 보드에 일거리가 주어진 농장과 일 할 사람의 명단이 부착되는 데 이 것은 항상 관심거리였다. 이 곳에 있는 사람 전부 또는 대다수가 일을 하러 왔으므로 말이다.
퍼스에서 부터 날아온 manami와 함께.
여행 관련서적을 보면 8,9월경에 바닷 거북이 알을 낳기 위해 번다버그로 찾아 온다고 적혀 있지만 그 것 외에는 딱히 어떤 매력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바다거북 하나로 여행자들을 붙잡기에는 호주에는 너무 매력적인 곳이 많다.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 그 곳에서 여행경비를 마련할 계획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 곳은 퀸즐랜드에서 가장 알려진 토마토 주산지였으므로, 첫 주는 여전히 경제적인 불안감때문에 라면과 쌀같은 걸로 한 끼를 때우기에 바빴다. 얼굴은 말이 아니었고 뭔가 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불안해하던 내가 빠른 시일안에 일거리가 없음을 알고 있는데 음식에 미련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금씩 음식지출을 늘렸다. 여러분에게도 이 말을 하고싶다. 먹는데는 돈을 아끼지 마라.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지 않은가. 그 곳은 고기값이 한국보다는 훨 싸고 돈을 아끼는 것보다 더위에 이겨내기 위해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 현명한 행위이다. 먹는데는 어느정도의 지출을 각오해라. 호주 어디를 가든 농장을 찾아간다면 필연적으로 그 곳은 덥다. (제 철이려면 말이다) 그 곳에서 먹는 단순한 문제로 스스로 자괴감에 빠트리지 말았으면 하는 게 먼저 겪은 이의 초라한 조언이다. 이 곳에 한국사람이 세 명있었지만 먹는 문제같은 것은 서로 관여를 하지 않았다. 가끔 얼마의 돈을 각출해서 영양보충이라는 이름으로 음식을 해 먹는 일이 아주 가끔 있었지만 말이다. 어쩜 조금은 인정머리가 없는 듯하기도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다 안고 있었고 어쩜 그로서 야기되는 문제를 피하기 위한 묵시적인 약속 또는 배려라고나 할까. 나는 틈틈이 닐을 찾아가 일거리가 없냐고 물었고 (오너를 귀찮게 해야 한다) 부족한 영어를 공부하느라 바빴다. 내가 맨투맨으로라도 영어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훗날 귀국이후 나의 호주 생활을 대변 할 수 있는 것은 영어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농장에서 1년을 보낼 지언정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외국을 갖다 왔으면 영어는 잘 하겠군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곳에서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생활 했고 무엇을 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단지 외국을 갖다 왔다는 것에 대한 의아심과 그 사람의 영어실력에만 호기심을 갖을 뿐이다. 호주에서 1년(그 때만 해도 난 1년을 생각하고 있었다)을 보낸 놈이 영어기 황이라면 나의 호주생활에 의심을 품을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난 그 것을 상상하며 최소한 어학원에 다니는 학생 중 제일 못하는 놈하고는 비교는 되어야 한다는 자격지심에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말 쓸쓸하기만 한 번다버그.
깨끗했던 시내와는 달리 쓸쓸하고 황량한 건 내 마음일까.
난 시내의 시티 백패커스와 모 백패커스를 다니며 한국사람을만나며 그 외로움을 달래었다. 그러다 우연히 시드니에서 나보다 먼저 떠난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가끔 일을 하고 있다며 시골의 적적함에 따분해 하고 있었다. 번다버그는 너무나 조용했다. 인구가 5만인가? 10만인가하는 이 도시가 퀸즐랜드에서 규모면에서 10손가락안에 든다는 소리에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한 달간 가끔 풀장을 찾아가 수영을 했고 한국인끼리 돈을 모아 싸구려지만 8~9$하는 포도주를 마시며 하루 해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던 듯싶다. 사람은 어딜 가나 자기가 보내는 시간들을 아무 소득없이 보내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 건 아닐까. 너나 할 것없이 한국인은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쩜 그 한 달이란 시간동안 난 호주에 대한 자신감과 어떤 신념을 얻는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번다버그에 도착했을 때 1000$ 갸량 갖고 있었지만 필연적이었던 불안이 2개월 뒤 번다버그를 떠날때는 주머니엔 약 700$, 하지만 호주 생활에 대한 확신과 함께 하비베이(Harvey bay)로 출발했으니 말이다. 참 난 호주에서 미국인을 만난 경험이 그 곳에서가 처음이었는데 그들은 3명이 늘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일을 하러 이 곳에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일 주일정도 머무르다 떠났으니 말이다. 한 손엔 일렉기타와 한 손엔 서핑보드를 들고 말이다. 밤에 가끔 전자기타를 두드려며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곤 했지만 다른 유럽인과는 어울리지를 않았다. 못한 걸까? 후자인 것 같다.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끼리는 잘 어울렸지만 미국인들을 따돌리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고교때 어느 신문기사에 미국이 발표한 대국민 성명에 "자국 국민이 세계 어느 곳에서 피해를 받거나 위험에 처할 때는 미국은 정부차원에서 강력히 보호 할 것" 이란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었다. 과연 그들은 싱가포르에서 자국 국민이 싱가포르 법규 위반으로 태형에 처했을때 싱가폴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한 적도 있고 (하지만 싱가포르는 그 거만한 미국의 콧대를 꺽어 버렸다) 그 외 대 미국인 테러등엔 강력한 보복을 취하곤 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참 미국이라는 나라는 저렇게 국민을 아끼는구나. 어떤 부러움도 느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딴 섬과도 같은 미국. 유럽과는 또 다른 서양의 한 축이지만 경제적인 이유를 빼고는 그들에게 아쉬울 것 없는, 그래서 벼락부자 보는 듯한 유럽인의 시각이 내가 한 때 부러워했던
미국을 오버 랩 시켰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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