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쩌다가 이런 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는지,
국민을 아무리 졸로 본다고 한들 이런 뻔뻔함을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행렬을 보면서 국민마음을 몰랐다며 반성한다던
 그 MB가 지금의 MB맞는가?

대한민국 국민들 참 지지리 복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라고 한 자리씩 꿰차고 있다.
써핑을 하다가 본 글인데 역사의 강물이 이렇게 뒤틀리는구나.

출처 : 한겨레 신문 오늘의 논객란

[펌]2004탄핵정국, 80년의 서울역 회군과 86년 명동성당 / 40대이상만관람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광화문에 다녀왔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지하도 입구에서 초를 받고 바로 이어 모르는 초로의 신사분에게서 머리를 맞대고 불꽃을 나눠 받았습니다.

아이들과 저희 부부는 노래를 함께 부르고 구호에 따라 열심히 촛불을 흔들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저희 부부보다 딸아이가 많이 해본 솜씨처럼 능숙하였고 더 열심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엄살 심한 녀석이 몇 시간 동안 다리 아프다는 소리 한번, 아스팔트가 차갑다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무대 위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저 녀석 참, 왜 저렇게 열심이지 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아내가 옆에서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제 기억을 되살리더군요. 뱃속에서 배운 것이니..라면서요.


딸아이는 87년 생입니다. 87년 6월 딸아이는 아내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18년 전 같은 광화문, 종로의 거리에서 저희는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종각역, 광화문 남대문 시장, 시청 앞은 시민 반 최루탄 연기 반이었습니다. 불룩한 배를 한 손으로 받힌 아내와 저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최루탄 안개 속을 헤매고 다니면서 구호를 따라 외쳤습니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고 한치 눈앞도 보이지 않아, 숨이 막혀 괴로워하는 아내 손만 잡고 헤매다가 보니 백골단이 진을 치고 있는 한가운데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넥타이 맨 시민, 택시 기사, 남대문 시장의 상인 전철 안의 아주머니들도 함께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의 사진을 손에 쥐고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오늘은 뱃속의 작은 생명이 아닌 엄마 키만큼 훌쩍 커버린 딸아이와 함께 같은 8 글자인 '탄핵무효, 민주회복'를 외쳤습니다. 딸아이는 아내의 뱃속에서부터 최루탄을 공기와 함께 마시고 구호를 자장가처럼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순간 87년생 딸아이는 저와 함께 차가운 아스팔트위에서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저항의 대오 속에서 같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함께 소리지르면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니 지나간 일들이 흑백영화처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흔히 인생에 누구에게나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합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세 번의 기회에서 한 번이라도 잘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개인에게 삼세번, 세 번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현대사도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있었습니다.


첫번째 기회는 80년 서울의 봄이었습니다. 79년 박정희의 죽음에 이어 박정희의 양자로 자처한 전두환 일당이 12.12 쿠데타를 저지르고 정권찬탈을 손아귀에 쥐기 직전인 80년 5월, 서울역에는 수십만의 대학생과 시민이 군부의 탐욕을 저지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학생들은 서울 각 대학에서 교정을 출발하여 서울역에 집결하였습니다. 서울역 광장은 지금은 주차장과 여러 시설물로 축소 되었지만 당시는 매우 넓었습니다. 광장은 수십만의 학생 시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회현고가도로 위에서도 시민들이 차를 세우고 내려다 보며 박수치는 모습에서 곧 닥칠 군부독재의 종말을 꿈꾸며 가슴 벅찼습니다. 전경과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시청 쪽으로 버스가 불타고 있었고 서대문 쪽 고가 아래에서는 전경과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 2년 생이었습니다. 오전에 캠퍼스를 출발하기 직전 교문 앞 집회에서 어떤 학우가 앞에 나와서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가면 피를 흘러야 할지 모른다, 제2의 4.19를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나가겠는가, 깊이 생각하자고 물었습니다. 그때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나가자, 나가서 피 흘리자 라고 답하였습니다. 모두는 아니라 해도 많은 젊은 우리는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릴 각오를 하였습니다.


서울역 앞에 모인 학생 시민들은 제2의 4.19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갑자기 급전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역 광장에 버스 한대가 있었는데 지도부는 버스 위에서 연설하고 소식을 전하였습니다.그때 지도부 한 사람이 올라섰습니다. 저는 그 버스 바로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의 표정 하나까지 기억합니다. 올라선 그 학우는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누군지 아시죠, 저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입니다 라고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가 집결하였다고 어쩌고 하면서 내 결정을 따라라 하더니 교정으로 돌아감을 선언하였습니다. 바로 서울역 회군의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반발의 목소리가 드세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 회장은 심재철이었습니다. 그는 MBC 기자로 있다가 광주청문회에 불러 나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패장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패장답게 한나라당에 투항하였고 지난 3.12일 국치일에 탄핵가결 한 표를 던졌습니다. 반면에 같은 서울역 앞에 있었던 당시의 유시민, 이해찬은 온몸을 던져 저항하였습니다.


첫번째 기회는 5월의 봄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역 회군으로 기회를 스스로 내던져버렸습니다. 그것으로 끝장 났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각오했던 제2의 4,19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그것을 심재철 비롯한 지도부는 두려웠겠지만, 곧바로 광주 5.17 선량한 시민들의 학살로 대신하였습니다. 내부역량의 부족, 역사와 상황인식의 안이함 그리고 어떤 단어와 변명을 붙여도,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부끄러운 순간이었고 이어서 대한민국은 길고 긴 혹한의 겨울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두 번째 기회는 87년 6월 항쟁이었습니다. 억압과 불의에 저항한 한 대학생 후배가 물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턱하니 억하고 죽었다는 허구조작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들고 일어 났습니다. 그리고 6월 내내 저항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서울역 회군에서 버스 위에서의 5분도 안 되는 심재철의 연설 때처럼 당시에도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의 시작은 명동성당에서의 시국선언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명동성당은 출입이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으나 자연스럽게 6월 항쟁의 중심이 되었고 온 나라의 눈과 귀는 그곳에 집중되었습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전국각지에서 반독재 투쟁이 한참이던 때 어처구니 없는 논쟁이 명동성당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자진해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은 80년 서울역 앞에서와 비슷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남산부근에 공수부대를 위시한 군부대가 집결해 있고 전방에서도 이동 중이니 유혈사태가 나기 전에 자진해산하지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수녀님들은 탱크가 오면 우리 위를 먼저 짓밟고 가라고 저항하였고, 실제 군부 내부에서도 유혈진압에 반대 일부 소장파는 반전두환 전선에 대한 공감대가 넓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민주화의 열망이 불꽃처럼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당시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 논의가 내부에서 음모와 회유와 함께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명동성당 내부에서는 지난 80년의 실패에서의 교훈을 알기에 세 번의 투표가 반복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분은 이래서는 안 된다면서 손목에 칼을 대며 자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명동성당이 지도부였으며 핵이었습니다. 모든 국민의 눈과 귀는 명동성당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적들로부터,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으로부터 회유와 협박과 분열이 진행되었고 일부가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투표를 3번이나 반복하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의 농성이 자진해산되고 우왕좌왕하는 시간에 이어 6.29란 선언이 나왔습니다. 내부역량의 부족이었습니다. 6월 항쟁이 전국을 들불처럼 번져갈지 예상도 못했고 국민적 역량을 올바로 수용하여 민주주의의 참된 승리로 이끌고 나갈 역량도 전망도 부족하였습니다. 6월 항쟁은 6.29 선언이란 잘 짜여진 시나리오의 첫 단추로 막을 내렸고 다시 기만과 굴욕의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한나라당에서 잘 나가며 브레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김문수는 당시 지도부의 핵심이었습니다. 80년의 심재철, 김문수 같은 부류는 그들 자신의 실패에 반성하고 고민하면 한발씩 앞으로 나가기보다는 자신의 삶 자체를 역사의 실패자로 떨구어드렸습니다. 그들은 과거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당장의 이익과 권력욕만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역사를 배신하고 진실에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때 싸워왔던 군부독재의 주역과 부역자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마름과 집사로 살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번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물거품으로, 아니 결정적인 순간을 놓침으로써 쓰디쓴 치욕과 굴종의 시간을 25년 시간을 보내어야 했습니다. 심재철이 버스 위에서 돌아가자고 했던 그 순간, 명동성당에서 자진해산을 결정하던 그 순간에 광주 5.17의 학살이, 87년 대선에서의 양김분열로 인한 치욕적인 패배가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87년 아스팔트에서 함께 싸운 노무현이 이땅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87년 민주항쟁이 정치적 탄생이며 고향인 노무현이 패퇴하여 물러난다면 4번째 기회란 것은 오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시행착오나 실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다시 시작할지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3번의 기회 뿐이듯 우리 현대사에도 3번의 기회 뿐입니다. 현실적으로 노무현과 참여정부가 무너지면 어떤 대안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80년 서울역 앞, 87년의 명동성당 안의 결정적 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적들의 논리가 바이러스처럼 침투해 들어옵니다. 방심은 조금이라도 금물입니다. 약간의 방심은 결국 패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역사의 한 가운데 있던 자신들은 등을 돌리고 후퇴하면서, 역사와 민중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과 소명을 허공에 날리고 전가하고 말았습니다. 80년 87년 모두 자신감과 용기, 역사인식과 전망이 절대 부족하였습니다. 서울역에서 회군을 하면 효창운동장의 군인들이 물러갈줄 알았습니다. 명동성당에서 해산하면 곧바로 민주화가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학살과 패배 뿐이었습니다.


2004년 3월 12일. 한줌도 안 되는 정치 모리배들이 승리하였다고 웃고 있습니다. YS와 DJ 때 총선의 지원 발언을 변호하고 선진정치로 나가는 길목이라고 주장하던 자들이 탄핵안을 무력을 동원하여 통과시키고 이겼다고 박수치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허물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노무현의 목을 쳐내고 노무현 정부가, 아니 우리가 피땀 흘려 이룩하고 쌓아 놓은 모든 것을 강탈하려 합니다. 80년, 87년 두 번이나 그랬듯이 그들은 애써 키워 놓은 민주주의의 꽃봉오리를 짓밟고 성과들을 강탈하고자 합니다.


노무현만 없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고건과 관료들을 회유하며 안정논리로 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고건총리와 관료들을 노예와 종을 부리는 집사자리 하나는 보장할 것이라면서 유혹할 것입니다. 관료들은 국민들의 감시가 조금 흐트려지면 곧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계산할 것입니다. 노욕에 눈먼 조순형은 수구보수들이 자신에게 대권을 줄 것이라는 몽상에 빠져 광주학살의 주역들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자진해서 선봉대 역할을 잘 하고 있으니 궂은 일은 그와 민주당이 맡을 것입니다. 그들은 87년에 그랬듯이 물고문으로 죽인 박종철은 턱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거짓과 허구를 날조할 것입니다.


80년에 그랬듯이 이번에 밀리면 제2의 광주, 5.17의 학살을 다시 요구할지 모릅니다. 패배한 자에게는 대가를 요구한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1973년 칠레 아엔데 정부 전복 직후의 3만 시민 학살 역시 우리에게 교훈입니다.


그들이 권력을 찬탈하면 노무현과 노무현을 지지한 자들의 씨앗부터 뿌리뽑아 놓고 싶을 것입니다. DJ 정부 이래로 축적된 민주주의와 남북평화공조에 대한 자산에서 단물은 쏙 빼먹고 부패와 냉전의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 장애가 되는 민주시민들을 압살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거추장스러운 시민의 민주의식을, 몇백만이 죽고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짓밟아 놓을 것입니다. 80년 광주에서 그랬듯이 한번 본때를 보여야 그들은 안심할 것입니다.


민주의식이 성장한 현시대에 맞지 않은 헛된 기우라고는 마십시오. 극우 조갑제의 논리가 그들에게 정론으로 통하는 때입니다. 짓밟아야, 조져놓아야 장기독재할 수 있다고 작심한다면 그들은 합니다. 엊그제 탄핵을 이성의 판단으로 하였습니까. 탐욕과 변절에 찌든 그들에게 이성을 기대하는 안이한 자세야말로 잘못입니다. 그들 탐욕 앞에서는 어떤 논리와 전망도 무력합니다. 지금의 탄핵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약간이라도 주춤하거나 수그러진다면, 87년 당시의 턱하니 억하고 죽더라는 식의 거짓논리를 재생산하여 내각제와 4,15 총선 연기를 밀어 부칠 것입니다.

 

언젠가 곧, 80년의 서울역 회군과 86년 명동성당처럼 훗날 상징으로 기록될 순간이 닥칠 것입니다. 그때가 닥치면 우리 역사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80년의 서울역 회군과 86년 명동성당에서의 해산이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상징이 될 순간, 세 번째의 기회, 마지막의 기회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아니 지금 이순간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온 시민의 참여를 요구하는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4,15 총선이 우리 현대사의 마지막 기회,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킬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선 4.15 총선을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내각제 개헌과 총선연기의 음모부터 막아야 합니다. 마지막 결전,4.15에서 패한다면 역풍이 강하게 불어 닥칠 것입니다. 한줌도 안 되는 저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배신한, 탐욕과 광기에 쌓인 저들에게 다시는 패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상대는 이미 탄핵이란 시퍼런 칼날을 꺼내어 우리의 코앞에 들이대고 있습니다. 물러날 곳이 없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겨야 합니다.

 

딸아이는 이제 컸다고 아빠 손도 잘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광화문의 거리에서 오랫동안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한손으로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촛불을 흔들며, 딸아이에게는 제가 겪었던 두 번의 기회와 두 번의 실패가 없길 기도하였습니다. 광화문 이 자리와 이 순간이, 그냥 아빠와 함께한 단순한 좋은 추억만으로 되길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MB왈 "반성없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발전이 없나 봅니다. 모처럼 옳은 말씀 하셨내요. 반성하지 않는 MB에게 들려주고 싶군요.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