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 것이 서비스든 제품이든 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1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독과점의 폐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이 1등하는데 더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1등과 2등의 기술력차이는 사실 내가 체감할 정도로 느낄 수 없기때문이기도
하며 제품의 브랜드를 별로 중시하지 않는 성향에서도 그렇다.

삼성이라는 기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삼성이 보여준 비윤리적인 그 간의 모습들-최근의 태안기름유출은 물론
먼 과거의 사카린 밀수사건, 그리고 노조를 인정치 않는 기업들.
오직 1등만을 추구하는 일류문화 등- 이 거부감을 준다.

뭐 내가 아니어도 살 사람은 많으니 말이다.
어쨌든 위와 같은 연유로 삼성을 멀리했는데 이번 핸드폰의 고장으로
결국 교체를 하면서 그 동안 쓰지 않던 삼성과 SK이동통신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핸드폰 판매점을 하는데 그 문제로 조언을 구하다가
결국 SK의 서비스에 가입하게 되고 삼성의 T옴니아 M490을 소지하게 되었다.
10년 넘게 쓴 LG를 뒤로 하려니 아쉬움이 넘친다.

오늘 다음을 뒤적이다 보니 삼성이 댓글에도 또 까페에서도 삼성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이번 삼성에서 대규모 사장단 인사에 관한 소식인데 그 것이
이재용상무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초석다지기가 아니겠는가만은 그 것의
문제점보다는 잘 된인사라는 식의 뉴스들이었다. 뭐 이런 자료야 또 삼성에서
광고를 매개로 한 언론길들이기에 던져주는 미끼 덥썩 문 것이겠지.

베스트 댓글이 눈길을 뜬다.

【BEST】자국민 등쳐먹는 삼성 죽어야 [9] officepower님 |09.01.17 |신고하기
1년반 전만 해도 삼성 메모리가격이 지금의 10배였습니다... 소위 메모리강국이라는 나라에서 자국민들 등쳐먹는 나라가 이나라입니다... 오죽 보다 못했으면 대만이 다 메모리시장에 뛰어들었겠습니까... 결국 대만덕에 우리가 더이상 돈낭비 안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의 국내 휴대폰 판매량은 전체 판매량의 6%에 불과합니다만, 매출액은 전세계 통틀어 1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 이넘들이 해외 수출용 휴대폰에 비해 스펙다운된 동일한 모델을 국내에서 3배나 비싸게 팔아먹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나온 자료입니다...

이런넘들입니다... 해외엔 헐값에 매출올리고, 자국민은 등쳐먹는 천하에 쓰레기 기업 삼성을 여지껏 국민기업으로 알고 애국심으로 구입하셨던 분들, 생각 바꾸시기 바랍니다... 소위 LCD, 메모리 만든다는 회사가 햅틱폰 3.2인치 LCD를 싸구려 WQVGA(432x240)액정을 쓰고, 국내판 소울폰 내장메모리 300메가를 집어넣는 넘들이 바로 삼성이란 넘들입니다...

혹시 대만의 EeePC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일명 넷북이라고, 원조가 아수스 입니다... 이거 지금 아이폰만큼 히트입니다... 삼성이 이런 히트상품 만든적 있습니까?... 삼성은 그저 남이 만든거 따라하기 바쁜 기업입니다... 돈에 환장해서 벤치마킹해다가 짝퉁이나 만드는 기업이요... 문제는 원조인 아수스제품은 50만원대인데 반해 짝퉁 삼성, LG는 70만원씩에 팔아먹고 있습니다... 절대 여기에 넘어가서 당하는일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삼성이 일류를 지향하며 매번 성공한 것 같지만 이 글 보고 눼이버의 까페를 갔다가
이제는 잊혀져간느 삼성차글을 보게 된다.

삼성차 몰락의 드라마

국내 최고 수준의 명차(名車)를 만들겠다며 자동차산업에 심혈을 기울여왔던 삼성그룹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4조3000억원의 법정관리 신청, 초일류기업을 지향해온 삼성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다. '삼성 불패(不敗)' 신화가 무너진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유영을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

"관리의 실패는 언제라도 회복이 가능하지만 방향을 잘못 선정한 전략의 실패는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그의 저서 ‘이건희에세이’에서 한 말이다.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이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왔던 삼성자동차는 그의 말처럼 전략의 실패로 인해 출범 4년여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삼성그룹이 모든 역량을 결집해 만든 ‘역작’이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사그라들고 만 것이다.

삼성그룹은 지난 6월30일 부산지방법원에 삼성자동차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대우그룹과의 빅딜 협상이 무산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 간판을 내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법정관리 신청은 "삼성 불패(不敗)" 신화를 창조해온 삼성으로서는 대단히 치욕적인 일이다. 일등주의를 강조해온 삼성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실 삼성은 그룹 창립 이래 한번도 법정관리를 신청해본 적이 없다. 기업 이미지에 손상이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삼성이 법정관리 카드를 뽑아든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영 손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성차의 부채는 4조3000억원선으로 그 이자만 해도 엄청나다. 따라서 삼성으로서는 대우와의 빅딜이 무산된 마당에 하루라도 빨리 삼성차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또 부채 청산을 위해 총수의 사재 출연을 요구하는 정부의 ‘압력’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그러나 법정관리 신청과 함께 발표된 부채 청산 방안을 보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같다. 삼성은 이건희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부채 청산과 협력업체에 대한 보상금으로 내놓으면서 정부로부터 삼성생명 상장이라는 ‘보상’을 받으려 했다. 삼성생명이 상장될 경우 이건희회장을 비롯한 삼성가(家)와 삼성그룹이 얻게 되는 자본이득은 수조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빚을 갚으면서 한편으로는 돈을 버는 희귀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삼성다운 발상이라며 그 치밀한 계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총수의 독단이 부른 비극

어쨌든 삼성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동차사업에서 손을 뗐다.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다고 자부하는 삼성그룹이 자동차 사업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복합적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총수의 독단과 과잉투자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90년대 초 삼성이 승용차 사업에 진출하려 할 때 그룹내에서는 신중론이 만만치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자동차시장의 공급 과잉이 예상되며 자동차사업이 삼성의 기업문화와 잘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힘을 얻지 못했다. 자동차사업 진출에 대한 이건희회장의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삼성그룹은 삼성차 실패가 총수의 잘못보다는 경영진의 잘못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삼성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한 다음날인 7월1일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사내방송을 통해 “우리가 자동차 사업에 경험도 없고 장래 수익성도 불투명하다는 이유를 들어 여러번 (자동차사업 진출을) 고민했다. 하지만 전자 기계 화학 등 그룹 인력을 풀가동하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는 최고 경영진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업 진출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할까 말까 망설이는 회장을 경영진들이 부추겨 자동차사업을 하도록 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에 대해 삼성의 한 임원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을 지금 와서 아니라고 한들 사원들이 믿어주겠느냐. 차라리 담담하게 삼성차 실패를 인정하고 심기일전해 노력하자고 당부하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삼성차 실패는 기업 경영에 있어서 오너의 잘못된 판단이 어떤 부작용을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또한 오너의 전횡을 막아낼 아무런 견제장치가 없는 한국 재벌 구조의 문제점을 생생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한다.

삼성차와 비슷한 케이스로 쌍용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쌍용그룹도 그룹의 형편이나 사업성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결국 자동차는 대우그룹으로 넘기고 알짜배기 기업들까지 팔아 간신히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나 쌍용의 김석원회장 모두 자동차 마니아라고 할 정도로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들은 자동차에 관한 지식도 대단하다. 그러다보니 자동차사업 진출을 줄기차게 모색해왔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자동차를 좋아하고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한 언론은 ‘오너의 취미가 빚은 참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사업 모색

삼성이 자동차 사업 진출을 모색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였다. 삼성은 미국의 크라이슬러사를 비롯해 일본의 몇몇 자동차업체들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중복과잉투자를 우려하는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불씨가 살아난 것은 89년 말부터였다. 87년 12월 그룹 경영권을 승계받은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에 승용차사업 진출 방안 수립을 지시했다. 그와 함께 승용차 진출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됐다. 기존 자동차사 임원의 스카우트 작업도 벌였다.

당시 삼성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부문에서 막대한 이익을 내기 시작해 자동차사업을 벌일 자금 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또 자동차산업은 이건희 회장으로서는 ‘물려받은 황태자’의 이미지를 탈피해 명실상부한 삼성그룹 오너로서의 위상을 굳힐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삼성은 90년 초 일본의 닛산자동차에 기술제휴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닛산 측은 대우자동차와 미니승합차인 밴에 대한 기술제휴를 하고 있어 곤란하다고 답변했다. 삼성은 일본의 도요타를 비롯해 독일의 BMW, 아우디 등 유럽 업체들을 찾아나섰다. 도요타는 2000년 이후에나 한국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라며 기술제휴를 거절했다. BMW와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삼성의 자동차 실무진들이 유럽 회사와의 제휴에 난색을 표명, 협상이 중단됐다.

그러던 차인 93년 봄, 삼성은 닛산이 대우와 기술제휴 관계를 해소할 움직임을 보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또 당시 세계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합종연횡하는 추세였는데, 그 과정에서 닛산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닛산이 한국 중국 등 아시아권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하려 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삼성은 닛산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그리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삼성의 집요한 ‘구애’는 마침내 성공했다. 양사는 94년 4월28일 도쿄 긴자에 있는 닛산 본사에서 기술제휴 계약서에 서명했다.

어렵사리 닛산과의 기술제휴에 성공했으나 정부는 삼성의 자동차시장 진입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당시 상공부는 과잉 중복투자를 막기 위해 업종전문화정책을 내세우며 재벌그룹마다 3∼4개 업종으로 그룹을 재편할 것을 요구했다.

삼성은 정·관계를 대상으로 전방위 로비에 나섰다. 삼성그룹 임원 Q씨의 표현대로 ‘쑤실 데는 다 쑤셨다’.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을 접촉하는 한편 김영삼 대통령의 경남고 3회 동기 모임인 삼수회에도 손길을 뻗쳤다. 부산의 시민단체들도 동원했다. 몇몇 교수들에게 부탁해 삼성차 진입 허용을 촉구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토록 했다.





전방위 로비에 나선 삼성그룹

애당초 삼성은 부산 신호공단에 자동차공장을 세울 계획이 없었다. 땅값이 비싼데다 지반이 약해 자동차 공장 부지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삼성이 공장 부지로 검토한 지역은 경남 진해와 충남 당진의 한보철강 근처였다. 두 곳 모두 신호공단보다는 땅값도 싸고 입지 조건도 좋았다.

그럼에도 삼성이 부산을 택한 것은 삼성차를 허가받기 위한 전략 때문이었다. 당시 부산 경제는 합판과 신발 사업이 모두 무너져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삼성은 이 점에 착안했다. 삼성은 삼성차가 허용돼야 부산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부산 시민들과 각종 단체는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삼성을 위해 맹렬히 뛰어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상공부와 삼성은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업종전문화정책을 밀어붙였던 김철수 상공장관은 정치권, 특히 부산지역 정치인들과 권력 주변 인사들로부터 무언의 ‘압력’을 받았다. 삼성차가 허가될 무렵인 94년 말에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마저 등을 돌려 상공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기도 했다.

94년 4월 말 김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삼성자동차 진출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김장관은 그 보고서에서 삼성차 진출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이유로 ▲ 삼성의 외국기술 도입으로 자동차 기술자립화가 늦어지고 ▲중복과잉투자가 우려되며 ▲한정된 내수시장을 놓고 소모적인 경쟁이 심해진다는 점을 들었다. 김대통령은 이 보고서를 그대로 재가했다. 김장관은 이를 공개하려 했다. 삼성차 문제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삼성의 로비를 받은 YS 주변 인사와 관료들의 만류로 발표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철수 장관은 삼성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이건희 회장과 세 차례 만났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에게 연락하자 자택인 한남동의 승지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김장관이 거기는 곤란하다고 하자 다른 장관들과는 다 승지원에서 만난다며 승지원을 고집했다. 그러나 김장관이 계속 거부하는 바람에 신라호텔에서 회동이 이루어졌다.

김장관은 정부 정책을 설명하고 이회장의 이해와 협조를 당부했다. 김장관은 삼성이 자동차 대신 항공 사업에 더 투자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회장은 항공사업은 돈이 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오히려 이회장은 전자 화학 자동차 등을 결합함으로써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며 김장관의 재고를 요청했다. 두 사람의 회동은 별 소득없이 끝나고 말았다.





입장 번복한 YS

김영삼 대통령은 처음엔 삼성차 문제에 대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며 완강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결심이 약해져갔다. 당시 삼성의 로비 내막을 잘 아는 한 인사의 말.

“세간에는 삼수회가 큰 역할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YS를 움직이는 데에는 YS의 서울대 2년 선배인 모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세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으로 YS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김대통령이 문병을 올 정도였다. 삼성차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지지부진하자 삼성은 모씨에게 접근했다. 94년 여름 청와대에서 YS를 만나고 온 모씨가 낭보를 전해왔다. 금년 가을께면 뭔가 결정될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YS는 삼성차를 허용해줄 어떤 계기를 찾고 있었던 것같다. 삼성은 그 이야기를 듣고 본격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김대통령은 어디서 삼성차 허가의 명분을 찾았을까. 그것은 바로 ‘세계화’였다. 김대통령은 94년 11월 19일 호주 시드니에서 새로운 국정 지표로 세계화를 제시했다. 그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 한이헌 경제수석에게 “국경 없는 세계화 시대 아니오? 국가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삼성의 승용차사업을 허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같은데 한수석 생각은 어떻소?”라고 물었다. 한수석은 김대통령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그해 10월 초 청와대 경제수석에 취임한 한이헌 수석은 애당초부터 삼성차 허가론자였다. 그는 11월 초 이건희 회장을 만나 삼성차 문제를 긴밀히 협의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이 호주에서 돌아온 후 삼성차 문제는 급류를 탔다. 한이헌 수석은 11월 말경 김철수 장관에게 삼성차 진출 허용이 대통령의 뜻인 것같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김장관은 11월30일 무역의 날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김대통령 차에 동승해 의중을 살펴보았다. 김대통령은 OK 사인을 내주었다.

행사를 마치고 상공부로 돌아온 김장관은 삼성그룹 회장실로 연락, 이건희 회장을 찾았다. 그러나 이회장은 안양CC에서 라운딩을 하고 있었다. 김장관은 이회장에게 급히 연락해 전화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이회장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김장관은 삼성차 진출을 허용하는 대신 ▲ 타사 인력 스카우트 금지 ▲ 타사 협력업체를 빼가지 말 것 ▲ 삼성이 약속한 수출 물량을 반드시 지킬 것 등 3개항의 각서에 이회장이 직접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회장은 곤란하다는 뜻을 표명했다. 김장관은 각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삼성차를 허가해줄 수 없다며 이회장을 압박했다. 결국 이회장은 각서에 서명했고 김장관은 12월2일 삼성차 허용 방침을 발표했다. 사흘 후인 12월5일 삼성은 닛산과의 기술도입 계획을 상공부에 제출했다. 삼성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회창 공장 방문과 소방차 동원

삼성은 갯벌을 메워 만든 부산 신호공단에 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지반이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다. 지반 침하를 막기 위해 1만7000여개의 파일을 박았다. 그 바람에 돈이 엄청나게 들었다. 55만평 공장 부지를 조성하는 데 들어간 돈은 6000억원으로 평당 100만원이 넘었다. 그 얼마전 완공된 현대의 아산공장이 평당 20만원, 대우의 군산공장이 30만원 선인데 비하면 3∼5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경쟁력을 갖추기는 애당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듯 과도한 초기 투자는 삼성이 자동차사업 진출을 위해 부산을 택한 대가였으며 결국 그것은 삼성차를 조기에 부실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삼성은 공장 건설에도 과투자를 했다. 굳이 첨단설비가 필요치 않은 분야에도 최고급 장비를 갖추었고 생산 대수가 많지 않아 자동화 설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부문에도 최첨단 자동화 설비를 깔았다. 공장은 병원 못지 않게 깨끗하고 쾌적하게 지었다. 또 불필요한 인력까지 해외연수를 보냈으며 인력 채용도 방만했다. 당시 삼성차에서 임원으로 일했던 L씨는 “돈 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같아 불안했다”고 회고한다.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 등에서 스카우트돼온 실무진들은 공장 건설에 1조원 이상을 들여서는 경제성이 없다며 과도한 시설투자를 반대했다고 한다. 이들은 자동차사업 초기에는 수익성이 워낙 낮으므로 마른 수건을 짜듯 경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같은 건의는 묵살됐다. 삼성차 경영진은 “삼성은 현대와 다르다. 삼성은 돈 쓸 데는 아끼지 않는다. 비용 문제는 경영진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반박했다. 자동차사업의 경쟁력은 투자액이 좌우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결정권을 갖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고 L씨는 말한다.

삼성차가 초기에 과투자를 한 데에는 이건희 회장의 영향도 컸다. 이회장은 평소 “오그라진 발상으로 주저하지 말고 투자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삼성차 임원들에게 가장 좋은 차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회장의 방침에 따라 삼성차 경영진은 무조건 최고급만을 주장했다. 자동차의 헤드램프를 60만원이 넘는 그제논 제품을 사용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것은 최고급 차에나 장착하는 것으로 삼성의 SM5에는 과도한 부품이었다.

물론 좋은 차를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또 후발주자였던 삼성으로서는 좋은 차를 만들어야만 시장 진입에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업의 채산성이 고려돼야 한다. 좋은 차를 만들되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삼성차 경영진은 회장의 뜻을 잘못 받아들여 겉치레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던 것이다. 그런 사례의 하나.

96년 11월 이건희 회장이 처음으로 공장 시찰을 오게 되었다. 공장에서는 1개월 전에 통보를 받고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회장이 방문하기 3일 전에는 비서실에서 선발대가 도착해 준비 상태를 사전 점검했다. 마침 그날 비가 내렸다. 매립토를 운반하는 트럭들이 흘린 흙으로 공장내 도로가 지저분해졌다. 그러자 소방차를 동원해 이틀동안 도로 청소작업을 벌였다. 먼지 한톨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도로를 씻어냈다. 또 멀쩡한 도로표지와 공장동 간판을 모두 떼어내고 새로 만들어 달았다.

삼성차에서 간부사원으로 근무했던 Q씨는 삼성의 기업문화가 삼성차를 망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삼성은 모든 분야에서 초일류를 지향하는데 초일류 상품은 반드시 초일류 설비와 초일류 공장을 가져야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또 삼성차의 과잉투자는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최고경영자의 기업문화에 순종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도요타의 공장들처럼 보기에도 초라할 정도의 기계설비를 갖고서도 최고 품질의 자동차를 생산해내는 게 기술인데, 고급스런 건물과 최신예 자동기계, 설비가 아니면 삼성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최고경영자의 판단은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내실보다는 외형을 중시하는 삼성 특유의 기업문화도 문제였다고 삼성자동차 부사장을 지낸 강명한씨는 말한다. 그는 ‘한국차, 브레이크가 걸렸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삼성자동차는 중장기 발전계획을 위해 막대한 용역비를 주고 일본의 노무라종합연구소로부터 보고서를 받았다. 그들은 기업의 이념과 일하는 정신까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 보고서는 최고경영자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그 보고서를 다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룹회장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필요한 자료일 뿐이었다.

일상 일어나는 트러블이나 결정을 할 때도 나중에 그것을 위에 보고할 때 어떤 모양으로 하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하면서 하게 된다. 삼성에서의 이런 관행을 필자는 ‘프리젠테이션 경영’이라고 불렀다.…

삼성의 의사결정을 보고 있으면 GM을 비판했던 로스 페로의 명언이 떠오른다. ‘우리 회사에서는 뱀을 발견하면 즉시 잡아 죽인다. 그런데 GM에서는 위원회를 만들고 전문가에게 뱀에 관한 자문을 받는다. 그리고는 위원회에서 일년씩이나 협의를 거듭한다’”

그는 또 삼성그룹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기계공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삼성이 무엇이나 최고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원들 전체가 그를 따라 교만해진다.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부품업체의 사장을 부하처럼 다룬다. 잘하고 있는 경쟁자를 연구해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일도 드물다. 자기들이 가장 잘하고 있으며 남들이 하는 일은 별 것 아니라고 굳게 믿는 동안에 회사 경영은 어려워져 갈 것이다.”





팔수록 밑지는 차

삼성자동차가 SM5 시리즈 생산을 시작한 것은 98년 3월이었다. SM5는 자동차 전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승차감과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IMF 한파가 절정에 이르러 소비 심리가 극도로 위축돼 있었다. 융단폭격식의 광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판매는 저조했다. 삼성차는 금년 초까지 약 5만대를 팔았다. 하지만 2만대는 사원 판매와 연고 판매였다.

삼성차는 팔수록 밑지는 차였다. 1대를 팔 대마다 약 153만원의 손해가 발생한다. 게다가 생산 대수가 적어 감각상각비까지 감안하면 1대당 수백만원의 적자가 난다. ‘삼성자동차 재무제표 및 98년 손익계산서’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자동차의 적자액은 6771억원으로 매출액(6138억원)보다 많았다. 또 95년 법인 설립 이후 누적 적자액만 6988억원으로 자본금(8054억원)을 거의 잠식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는 회사가 제대로 운영될 리 없다. 생산을 시작할 때까지는 계열사의 자금 지원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새정부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재벌 계열사의 편법 지원행위 등 방만한 경영에 메스를 들이댔다. 정책 담당자들은 재벌 계열사중 수익성이 없는 기업은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스레 삼성자동차가 도마 위에 올랐다.

사실 삼성으로서도 삼성차는 골칫거리였다. 삼성차의 가장 든든한 자금줄이었던 삼성전자가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96년부터 국제 반도체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삼성전자의 순이익은 95년 2조5000억원에서 96년 1600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나마 삼성전자의 96년 이익 규모는 회계처리 기준을 변경, 감각상각 연한을 늘려 만들어낸 것으로 사실상 적자를 기록했을 거라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삼성은 자동차사업 고수를 선언했다. 새정부 실세들이 삼성차 퇴출을 거론했지만 그럴수록 삼성은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차 신차발표회 일주일 후인 98년 2월25일 거행된 김대중대통령 취임식에 평소 타고 다니던 벤츠600 대신 SM525V를 타고 갔다. 배기량 2500CC에 6기통 엔진을 단 SM525V는 삼성차가 선보인 4개 차종 가운데 최고급 차량이었다. 정부로부터 자동차사업 포기 압력을 받고 있던 그가 삼성차를 타고 간 것은 자동차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삼성은 또 김대통령 취임 축하 광고에도 삼성차를 내세웠다. 삼성은 ‘새로운 출발, 새로운 약속’ 이라는 제목의 축하광고에서 삼성차 사진을 큼지막하게 싣고 “수출 주력사업인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통해 우리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도록 새 각오로 힘차게 출발하겠다”고 밝혔다.





기아 인수에 눈독들인 삼성

삼성은 위기 타개책의 하나로 미국 포드와 제휴를 모색했다. 삼성은 98년 2월 신차발표회를 앞두고 포드와의 협상 사실을 언론에 흘렸다. 협상이 진행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하는 관례를 깨고 삼성이 그런 행위를 한 것은 정부의 자동차사업 포기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포드와의 제휴는 삼성차를 신뢰하지 못하는 포드의 소극적 자세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삼성차는 포드와 제휴를 모색하는 한편으로 기아자동차 인수를 신중히 검토했다. 당시 기아는 부도가 나서 법정관리를 받고 있었다.

사실 삼성은 오래전부터 기아에 눈독을 들여왔다. 삼성차를 생산하기 이전인 94년 기아차 주식을 매집, 기아와 감정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또 98년 3월 삼성이 내부적으로 작성한 ‘신수종(新樹種)사업 추진 현황 및 향후 계획 보고서’가 유출돼 한차례 파문이 일었다. 기아 인수 시나리오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 보고서에는 “기아자동차는 회생은 물론 독자적인 경영도 힘들다. 따라서 그룹 자동차사업의 조기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전략적 인수를 추진하고…기아자동차 인수 분위기 및 여론을 점차 조성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기아 인수를 위해 정부와의 공고한 공조체제를 구축해나가겠다”고 밝혔다. 98년 6월에는 기아자동차 인수 문제가 담긴 ‘국내 자동차산업의 구조재편 필요성과 지원방안 보고서’라는 문건이 공개돼 말썽이 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일들로 인해 기아의 몰락은 삼성의 각본에 의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98년 여름 기아자동차 공개 입찰이 시작됐다. 이건희 회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지승림 구조조정본부 부사장, 이대원 삼성자동차 회장, 홍종만 삼성자동차 사장 등은 승지원에 모여 대책을 수립했다. 삼성차가 살기 위해서는 기아를 인수해야 하는데 12조8000억원에 이르는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의 과도한 부채가 문제였다. 정부에 얼마만큼 탕감을 요구할 것인지 그 폭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기아자동차는 1, 2차 입찰에서 유찰됐다. 정부가 기대를 걸었던 미국의 포드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현대 대우 삼성 등 국내 3사도 부채 탕감 폭 등에서 정부의 요구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삼성차 빅딜은 대우의 작품인가

10월19일 3차 입찰을 앞두고 삼성그룹 수뇌부는 대책회의를 가졌다. 인수론과 포기론이 팽팽히 맞섰다. 기아차 인수를 검토한 실무진은 기아의 부채중 최소한 5조1000억원을 정부가 탕감해주어야 인수가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정부의 탕감 폭은 그에 훨씬 못미치는 금액이었다. 결국 삼성은 입찰을 포기했다. 1, 2차 입찰 때까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던 삼성이 인수를 포기한 것은 비서실 재무팀의 ‘삼성 위기론’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기아차를 포기한 삼성은 삼성자동차 독자생존을 외쳤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정부내에서는 삼성자동차가 제2의 기아자동차가 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청와대와 금감위를 중심으로 심도 깊은 논의가 진행됐다.

12월2일 강봉균 청와대경제수석이 삼성차 빅딜 발언을 했다. 닷새 뒤인 12월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서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이 합의됐다. 이후 양사는 협상 대표를 구성해 빅딜에 따른 후속절차를 논의했다.

그러나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삼성차의 자산 가치를 놓고 이견이 너무 컸다. 대우는 삼성의 SM5를 계속 생산할 경우 엄청난 적자가 나므로 삼성차의 자산 가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고, 삼성은 대우가 삼성차를 거저 먹으려 한다고 반박했다. 협상이 진행될수록 서로간에 불신의 벽만 두터워졌다.

애초부터 삼성은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이 대우의 작품이라는 의혹을 갖고 있었다. 자금 사정이 다급한 대우가 삼성차를 인수, 정부의 골칫거리를 없애주면서 그 대가로 상당한 운영자금을 얻어내려 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었다. 삼성은 그 근거로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에 공식 추대된 뒤인 9월10일 전경련 출입기자들과 가진 만찬 간담회에서의 발언을 든다. 이날 김회장은 비보도를 전제로 “자동차산업 2사 체제는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5대그룹은 기아차가 유찰되면 구조조정 대상에 넣기로 이미 합의했다. 삼성과 기아자동차를 현대와 대우가 나눠 인수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때는 기아차 입찰이 한창 진행중일 때였다. 그런데 김회장이 삼성차 퇴출을 기정사실화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대우측은 김회장의 발언은 전경련 회장 입장에서의 원론적 발언일 뿐 그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한다.

삼성과 대우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청와대와 정부가 나섰다. 99년 1월 22,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양 그룹 총수를 면담하고 조기 합의를 촉구했으며, 3월22일에는 김우중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힐튼호텔에서 만나 삼성차 잠정 인수에 합의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양사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중재를 맡았다. 그러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대우는 삼성이 비협조적이라고 비난했고, 삼성은 대우가 지나친 요구를 한다고 맞받아쳤다.

중재역을 맡았던 금감위의 서근우 제3심의관은 양사의 빅딜은 애초부터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대우는 대우전자를 삼성에게 팔면 돈을 더 받을 수 있고, 삼성은 대우전자를 살 경우 대우에 부채를 더 많이 떠넘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하다보니 결론이 날 수 없었다는 것.

결국 양사의 협상은 깨졌다. 그리고 6월30일 삼성은 삼성차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헷갈리는 삼성식 계산법

삼성이 법정관리 카드를 본격 검토한 것은 6월초 부터였다. 이건희 회장에 사재 출연을 통해 삼성차 부실화를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던 무렵이었다. 6월 하순경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이건희 회장을 만나 조기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사재 출연 규모와 방법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삼성은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과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보유 주식 출연이라는 해법을 찾아냈다. 그에 대해 금감위는 삼성생명의 조기 상장 허용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곧바로 특혜 시비가 터져나왔다. 삼성측 주장대로 삼성생명의 한주당 가치를 70만원으로 볼 경우 이건희 회장 일가와 삼성그룹은 가만히 앉아서 수조원대의 이익을 본다는 지적이었다. 말로는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삼성생명을 상장시켜 보다 큰 이익을 얻으려는 술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번에 이건희 회장이 출연한 삼성생명 주식은 전체 주식의 20%인 400만주. 그는 지난해말 10%에 불과하던 지분을 26%로 늘렸다. 그 과정에서 장남 이재용씨가 대주주(보유지분 31.4%)로 있는 삼성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지분을 2.25%에서 20.67%로 끌어올렸다. 매입 가격은 한주당 9000원. 이회장과 에버랜드는 삼성생명 지분을 대폭 늘림으로써 삼성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삼성생명의 지배권을 확실히 다졌다. 이와 함께 이회장은 재용씨에게 상속세를 물지 않고 부를 세습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 상속 때에도 특유의 노하우로 절세(節稅)상속을 하는 수완을 발휘했었다. 삼성의 그같은 노하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생명의 주식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삼성은 이건희 회장 주식을 출연하면서 한주당 가치를 70만원으로 평가했다. 그룹 재무팀은 삼성생명이 상장될 경우 100만원까지도 바라본다고 한다. 최근 삼성이 이회장의 추가 출연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정부 방침을 수용키로 한 것은 그런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4년 전인 95년만 해도 삼성그룹은 삼성생명의 주식 가치를 낮게 평가했었다. 당시 삼성과 제일 제당은 분가를 앞두고 계열 분리에 장애물이 되는 제일제당 보유 삼성생명 지분을 삼성이 매입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제일제당측은 한주당 20만원선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삼성은 삼성생명은 생보사로서 자산이 주주 것이 아니므로 단순하게 계산해서는 안된다며 한주당 5만∼6만원을 적정가로 제시했다. 결국 제일제당은 삼성생명 주식을 넘겨달라는 삼성의 요구를 거부하고 말았다. 물가 상승을 감안한다 해도 5만∼6만원에 불과하던 주식이 불과 4년만에 10여배나 오를 수 있을까. 당시 삼성의 계산법과 지금의 계산법 사이에는 간격이 너무 크다.

삼성은 자동차를 포기함으로써 2000년대의 발전전략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재계 라이벌인 현대와는 상당한 격차가 벌어지게 됐다. 지난 94년 삼성이 자동차사업에 진출할 때 현대는 과잉중복투자 위험성이 높다며 반대론의 선봉에 서기도 했으나 내심으로는 삼성의 시장 진입을 반겼다고 한다. 자동차사업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현대는 삼성의 자동차사업이 실패할 것으로 전망했고, 그럴 경우 삼성은 영원한 2인자로 전락한다는 판단이었다. 그같은 계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제 삼성이 현대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지 모른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건희 회장은 그의 저서 ‘이건희에세이’에서 “나는 기업을 잘못 경영하여 부실하게 만드는 것은 경영상의 범죄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지대한 관심과 뜨거운 애정을 갖고 밀어붙였던 자동차사업을 포기한 이건희 회장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삼성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은 유한하지만 금력은 적어도 그 보다는 길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희가 임영박씨를 보면서 너도 4년이면 끝이야. 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좀 씨니컬 한가? 그래서 그들끼리의 카르텔을 만들기 위해
혼사마저 비즈니스적인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지도 모른다. 뭐 역사가 그런건지.

블로그 이미지

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