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보려고 마악 하다가 웬 뚱딴직 같은 궁금증이 잃어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되었다.
그 궁금증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의 두 아들.
영화에서는 첫째아들이 일본군이 준 캐러멜로 인하여 독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금시초문인라 사실 여부나 확인을 위해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런 청천벽력의 날벼락과도 같은 상당히 거시기한 글이 인터넷에 떠 올라 있다. 그 내용은?

안중근 의사 아들 장례식장의 가족들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5.08.01 20:22



1952년 11월 부산 중구 중앙성당에서 치러진 안중근 의사 아들 준생씨의 장례식 모습.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왼쪽에서 네번째)씨의 실존 모습이 나와 있다. 안 여사 왼쪽으로 안 의사 동생인 안정근 선생의 부인 이정서 여사, 안 여사 오른쪽으로는 준생씨 부인 정옥녀씨와 아들 안웅호(미국거주.의사)씨, 안춘생(전 독립기념관장)씨의 모습이 보이고 맨 오른쪽이 안 여사의 외아들 권헌씨이다. /지방부 기사참조 /국제신문 제공 2005.8.1 (부산=연합뉴스)
1874 일본 오이타 현[大分縣]~1955.
일본의 군인·정치가.
미나미 지로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을 지내면서 일본말 사용, 창씨개명 등 조선민족문화말살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관동도독부 참모를 거쳐서 1919년 소장이 되었다. 이어 중국파견군사령관·기병감·육군참모차장 등을 역임했다. 1929년 대장으로 승진해 조선군사령관이 되었다. 1931년 육군대신을 거쳐 1934년 관동군사령관이 되었다. 1936년 2·26사건의 책임을 지고 군에서 제대하고, 8월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국민총력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해 한국민들을 기만적인 황민의식하에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민족의식의 말살과 황민화를 꾀했다. 또한 모든 행사에 앞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제창을 강요했다. 이를 기반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으며, 국민징용법에 따라 많은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다. 한편 '선만일여'(鮮滿一如)란 표어 아래 만주의 관동군과 경제·문화·치안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1945년 종전 후 전범으로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받고 복역중, 1954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죽었다.

 ‘안중근 유해’ 찾아라!

▲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의 안 의사 초상.
지난 1월 4~5일 주간조선 취재팀은 경기도 포천의 천주교 공원묘지 세 곳을 헤맸다.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아들 안준생(安俊生)의 묘지가 포천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첫날 두 곳을 거쳐 이동교리의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도착했지만 관리소장과 전화연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져 현장을 확인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다시 현장을 찾기로 했는데, 박명춘 관리소장은 “오전에 선약이 있다”면서 안준생의 묘소 약도를 그려 관리소장실 현관 문에 붙여놓겠다고 했다. 취재팀은 관리소장이 친필로 그린 1549호(안준생 묘 번호) 약도만을 들고 산을 오르내린 지 1시간30분 만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준생의 묘는 산마루 바로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봉분 왼편에 ‘순흥안공준생지묘(順興安公俊生之墓)’라는 비석이 서 있고, 봉분 오른편에는 ‘동래정씨옥녀지묘(東萊鄭氏玉女之墓)’의 비석이 있었다. 정옥녀는 안준생의 부인, 즉 안중근 의사의 며느리다. 정씨는 1991년 사망해 이곳에 합장되었다.

안준생 선생의 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써 있었다.

‘…부친(안중근)은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주하였다. 1907년 봄에 선생의 태중(胎中) 6개월 때에 부친은 29세의 청년으로 뜻한 바 있어 노령(露領) 해참위(海參威)로 망명의 길을 떠난 후 그해 음력 8월 13일에 선생은 진남포 용정동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10월 26일에 부친은 정의대도(正義大道)에 입각하여 하얼빈 역두에서 침략 원흉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각국 대표들과 만인이 둘러싼 가운데서 연격(連擊)사살하여 당시 세계인들로부터 코리아가 아직 살아 있었다는 찬사를 받았고 천추(千秋)에 빛나는 민족정기의 일대 표상이 되었다. 이는 선생 3세 때의 일로….

6ㆍ25 전쟁 중인 1951년 1월에 부산으로 피란 중 선생은 병을 얻어 정말(丁抹ㆍ덴마크의 음역어) 병원선에 입원 치료타가 1952년 11월 18일 45세를 일기로 병원선에서 별세하였다. 부산시 초량 4동 뒷산에 안장하였다가 1971년 5월 12일 이장하였다.’

▲ 뤼순형무소에서 두 동생(정근과 공근·왼쪽 끝)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안중근(오른쪽).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중국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 직후 두 동생(정근, 공근)은 형님의 유해를 요구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거부한 채 시신을 감옥 뒤편의 감옥묘지에 묻었다. 이후 안중근의 동생 정근은 유가족 일가를 이끌고 북만주로 망명한다.<주간조선 1818호 ‘안중근 동생 안정근 스토리’ 참조> 이후 세 살배기 준생은 일제를 피해 삼촌을 따라 러시아, 상하이, 홍콩 등을 거치며 유랑생활을 한다. 안중근은 슬하에 분도, 준생, 현생 2남1녀를 두었으나 장남 분도는 12세에 러시아에서 죽었다. 준생은 상하이서 살다가 1948년 상하이가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홍콩으로 피했다가 6ㆍ25 전쟁 중 가족을 이끌고 부산에 온다. 안준생ㆍ정옥녀 부부는 1남2녀(웅호, 선호, 연호)와 함께 부산에서 잠시 피란살이를 한다.

정옥녀 여사가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오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50년대 후반. 외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정옥녀 여사가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87년. 한국 생활 중 간암 선고를 받고 보훈병원에서 투병하다 1991년에 사망했다. 외아들 웅호씨는 현재도 미국에서 의사로 있다.

1948년 김구 선생도 공동발굴 제안

안중근 의사 유가족이 지금 관심을 끌고 있는 까닭은 정부에서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22일 중국 베이징에서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협력해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면서 “중국도 이 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지난 1월 3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남북한 공동발굴을 ‘광복 60주년 남북공동사업’으로 책정하고 당국간 대화가 재개되는 대로 북한에 제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은 또 “남북이 합의한 뒤 중국에 요청하면 중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장관의 언급처럼 남북한이 공동으로 요청하고 중국이 협력하면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발굴된 유해를 남과 북 어디에 안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 안 의사 장손 안웅호 박사가 1984년8월 미국에서 작성한 '유해 봉환' 동의서(왼쪽).

안중근은 순국 직전 감옥에 면회온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저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동생 안정근이 광복 이후 부인(이정서)을 먼저 한국에 보내놓고 자신은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에 남은 까닭은 형님의 유해를 모시고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안정근은 장개석과 접촉하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뤼순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바람에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안정근은 뇌암이 악화되어 1949년 3월 사망한다. 아들 안준생 선생 역시 상하이에서 부친의 유해를 봉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만다.

안중근 의사 유해 봉환 문제를 놓고 남북간의 접촉도 있었다. 1948년 평양을 방문한 김구 선생은 당시 노동당 부위원장이던 김일성에게 공동발굴을 제안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이룬 뒤 본격 추진해보자”고 밝혀 이를 사실상 거부했다.

동생 정근과 아들 준생의 사망으로 유가족 차원의 노력은 더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부 차원에서도 중국과 국교가 없는 상태여서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김영광씨. 안중근숭모회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김씨는 1979년 10대 국회의원이 되고서부터 안 의사 유해 봉환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김씨는 11대 의원이던 1982년 8월, 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ㆍ여당의 비공식 사절로 방한한 자민당의 미쓰즈카ㆍ모리 의원을 안중근 의사 동상에 참배토록 한 인물.

김씨는 1984년 3월, ‘안중근 의사 유해 환국봉안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이 위원회에는 당시 한국을 움직이는 각계의 핵심적 인물이 대거 참여한다. 그 면면을 보면, 고정훈 신정사회당 총재,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김수환 추기경, 김연준 국제인권한국연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홍렬 숙명여대 총장, 민관식 아세아정책연구소 원장, 박영준 독립유공자협회 부회장,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백두진 전 국회의장, 서영훈 흥사단 이사장, 송지영 KBS 이사장, 안진생 안 의사 조카ㆍ전 미얀마 대사, 윤치영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이병주 작가, 조영식 경희대 이사장, 조향록 목사, 최석채 대구매일신문 명예회장(가나다 순) 등 40여명이었다. 김씨는 또 1984년 7월 안 의사 초상을 화폐도안에 채택하자는 건의문을 국무총리에게 제출하였다.(김씨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정권이 나올 때마다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여사, 아들 준생씨와 딸 현생씨.(1908년 찍은 것으로 추정)
김씨는 국내에 남아 있는 안 의사 유가족을 찾아가 유해발굴 동의서를 받기로 했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진생 전 미얀마 대사로부터 동의서를 받았으나, 5촌 조카로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안춘생 전 국회의원에게서는 동의서를 받지 못했다. 김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안 의사의 장손 안웅호(安雄浩) 박사를 만나기 위해 1984년 8월 미국으로 날아가 유해발굴 동의서에 서명해줄 것을 설득했다. 안 박사는 얼마 뒤 본인이 직접 작성한 영문 동의서(‘Letter of Consent’)와 위임장을 김씨에게 보내왔다. 이후 장손인 안 박사와 김씨의 유해 봉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안 박사와 김영광 위원장은 공동명의로 1984년 9월 중국의 자오쯔양 총리에게 유해발굴에 협조해달라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의 탄원서를 덩샤오핑, 장쩌민 주석에게도 보냈다.

한편 김씨는 뤼순에서 안 의사 묘지를 확인한 유일한 목격자인 신현만씨를 찾아냈다. 김씨는 신씨로부터 자세한 증언을 들었고 그와 함께 포천 안준생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다. 신현만씨는 1944년 당시 다롄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뤼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뤼순형무소 뒤 야산 공동묘지에서 안 의사의 묘를 발견했다. 그는 이후 6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 각각 한 번씩 안 의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신씨의 증언에 따르면 안 의사의 묘비는 각목으로 되어 있었으며 흰색 페인트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安重’ 두 글자만 희미하게 보였으며 ‘根’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당국도 안중근 의사 유해에 관심

김영광씨는 신현만씨에게 당시 뤼순형무소장의 딸이었던 이마이 후사코 여사(당시 87세로 도쿄 거주)로부터 입수한 뤼순형무소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었다. 신씨는 묘소가 있는 장소로 형무소 뒷산 203고지 등대와 정반대쪽에 있는 능선을 가리켰는데, 이것은 이마이 후사코 여사의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 경기도 포천 이동교리 혜화동천주교 묘지에 있는 안준생·정옥녀 묘.

 

김씨가 동분서주하며 유해 봉환을 위해 뛰고 있는 가운데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안 의사 유해 환국을 추진해 신축 독립기념관에 봉안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보도가 있자 안 의사 유해와 관련된 북한 당국의 공식 입장이 처음으로 나왔다. 로동신문 1984년 9월 4일자는 ‘친일주구의 정체는 감출 수 없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안 의사 유해의 연고권을 주장했다. 로동신문은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태생이며 북반부에는 그의 친척들이 있다. 그가 반일 계몽운동을 한 기본 활동 무대는 황해도와 평안도였으며 의병투쟁을 벌인 곳도 함경도 북부 지방이었다”고 밝혔다. ‘북반부의 친척들’이란 안 의사의 막내동생 안공근과 그의 자손이 중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해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북한 당국도 간헐적으로 안 의사의 유해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안 의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해 중국 인민TV에 방송했고, 2004년 봄에는 김영남이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고위층에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안 의사를 보는 북한 정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하는 쪽도 있다. 북한 공식기관이 편찬한 일제하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은 안 의사에 대해 “봉건지주의 아들로 농민을 천대·멸시하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홀로 싸웠다”고 지적하면서 “탁월한 지도자(김일성)의 영도를 받지 않고는 혁명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일깨운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당국의 이런 시각은 북한이 제작한 영화 ‘안중근 의사’의 끝부분에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수령절대주의를 강조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석한다. 안 의사의 항일운동은 독립운동 세력이 좌우로 갈라지기 전에 벌어진 일이어서 남북한 모두 그를 숭배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1984년부터 본격화된 김영광씨의 유해 봉환 노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는 한·중 국교정상화 이전에 무려 국내외 인사 47명을 중국에 현지 조사를 부탁했을 만큼 정성을 기울였다. 국교정상화 이후 김씨가 유해 봉환 문제로 중국을 방문한 게 30여회에 달하고, 이 중 뤼순과 다롄에 간 것만 일곱 번이나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사재를 1억9000만원이나 썼다고 한다. 그는 성형외과 의사인 부인으로부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렇게 돈과 시간을 쓰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금강산 운운은 말도 안되는 얘기”

김씨가 안 의사 유해 봉환에 정성을 기울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1947년 여름, 당시 수원농고 학생이었던 그는 학교에서 광복 2주년 기념으로 올린 연극 ‘의사 안중근’에서 안중근 역을 맡게 되었다. 주인공 배역 때문에 정인보의 ‘의사 안중근 전기’를 비롯해 안중근 관련 자료를 읽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인생관을 바꿔놓았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거의 배우지 못했던 나에게 안 의사의 일생은 경이롭고 신비스럽기만 했다. 일본 근대역사상 최대의 인물이라고 배웠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논지를 펼쳤던 안 의사의 기개를 읽고서,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나는 투쟁을 했던 선열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역만리에서 오직 신념 하나로 의롭게 죽은, 한 고독한 영웅의 생애는 그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식민주의적 의식의 찌꺼기를 철저히 세척시켜주었다.”

김씨 외에 안중근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는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들 수 있다. 최 원장은 2004년 가을 이세기 전 국회의원, 김영호 전 산자부 장관과 함께 뤼순전시관(옛 뤼순감옥)에 다녀왔고, 이때 알게 된 사실을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것이 정 장관이 지난해 중국에서 안 의사 유해 남북 공동발굴 문제를 언급한 배경이 되었다.

▲ 1984년8월, 김영광 의원(오른쪽 끝)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정옥녀 여사와 안웅호 박사를 만나고 있다.
김씨는 “안 의사 유해 봉환은 국가대사이고 개인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국가권력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먼저 남북한과 중국 정부, 그리고 개인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공개한 뒤에 이 정보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면서 “분석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발굴해 나온 유골을 DNA 확인작업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후손으로서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이 중요하지, 그 유해가 남과 북, 어디로 가느냐는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정동영 장관 역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해를 찾으면 그것은 민족의 경사이며 어디에 안장할 것인지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북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 1991년, 정옥녀 여사의 장례식에서. 왼쪽부터 김영광씨, 상주 안웅호 박사, 고 이승만 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내외.
중앙일보는 1월 3일자에서 “일각에선 남북 교류협력의 상징 지역인 금강산에 안장하자는 주장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김영광씨는 “금강산 운운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로 통하는 B교수 역시 “어이 없는 얘기”라고 했다.

법적으로 보면 망자의 유해도 소유권의 대상이라는 게 다수의견이다. 그 귀속자는 상속인, 상주, 제사 주재자 또는 호주 승계인 등이다. 법률사무소 나무의 양웅 변호사는 “유해에 대한 소유권이든 관습상의 관리권이든 그 권리가 그 후손에게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고 해석한다. 양 변호사는 “설사 안 의사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정서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정서를 안 의사 후손의 의견보다 우선시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강산 운운’은 유가족의 의사를 무시한 발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안 의사의 질부(姪婦)인 박태정 여사는 현재 서울 창동에 살고 있다. 박태정 여사는 유해를 찾게 되면 어디에 안장할 것이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큰아버님 고향이 황해도 신천이지만 준생 아주버님과 옥녀 형님이 생전에 한국에 살기를 원했고 아버님도 형님의 유해를 한국에 모셔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있는 웅호가 큰아버님의 유해가 한국에 오는 것을 바라고 있지요.”



안중근의사의 저격사건을 히틀러 치하의 본 회퍼 목사님과 견주며 정당방위론에 가까운 신학을 펴며 안중근 의사를 변호하는 교회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러나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의 고위 성직자 가야파가 예수 하나를 로마에 넘겨주면 유대민족의 안전을 보장받으리라는 논리를 펼치며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이토 히로부미도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나의 생명으로 죽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70세의 노인으로 저격 당시 30세인 안중근에게는 아버지의 연배이다. 이토는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을 하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간 집에 받아들여져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가난한 시절, 그에게 밥을 넉넉히 주었던 어느 하녀를 잊지 못하고 끝내 그를 찾아 보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원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지방의 토호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황해도 관찰사는 동학도들이 해주감영을 침탈한 것을 안태훈에게 알려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태훈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도들을 소탕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학도들이 사용하던 정부미를 빼앗아 안태훈의 민병에게 먹인 것뿐인데, 동학란이 가라앉은 후, 대한제국 정부 관료들이 안태훈에게 정부미 일천 포를 내놓으라는 협박을 해왔다. 그러자 그는 천주교의 신부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이때의 만남으로 신자로 거듭나게 된 사람들이다.


마지막 양심의 총탄 한 발


1909년 10월 25일 밤, 하얼빈의 어느 외진 방에서 7개의 총알에 십자 표시를 하던 안중근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다음날 이토와 수행원들에게 6발을 발사하고 한방은 남겨둔 이유가 무언지 헤아려 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죽어 마땅(?)한 벌레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그를 끝내 시베리아 유형지를 자청하게 만들고 거기서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른 생명을 해할 자격이 없음을 자각한다. 어느 산문에선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식인이란 자신의 이마에 총을 겨눈 사람들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여명의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시대만큼의 어둠을 소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안중근 토마의 생애는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늘 외세의 욕망 앞에 벌거숭이로 온갖 고역을 다 맛보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낯선 타지, 도쿄에서 소설가로 일어서보려다 실패하곤 돈이 떨어져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옷을 저당 잡히고 빌려온 돈 중에서 덜어내어 하얀 목련과 꽃병을 샀다고 한다.


나는 안중근 의사가 남겨둔 십자 표시의 총탄 한 발을 하느님 앞에 선 자의 피 같은 양심으로 읽는다. 가당치 않은 순간에 사보는 한 송이 목련처럼 자신의 이마를 겨누는 양심의 총탄 한 발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 아닐까.

그 분이 목숨을 바쳤던 대한민국은 물질만능주의에 나락에 떨어져
과거의 기억을 잊은체 오직 현재만을, 또는 돈만이 모든 악을
구원할 것만 같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 돈 많아져서 행복해?
안중근 의사는 잘 계실까?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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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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