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영화를 보다가...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순종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나라도 왕실을 복원하면 어떨까하는... ^^;;
가끔 말이야.
영화는 푸이가 서태후에 의해 황제로 지명되면서 시작을 하지.
황제라는 자리. 그 것도 중국에서의 자리는 뭐 말 안해도 각별한 자리.
인구가 수억일데 만인지상에 신과도 동격의 자리나 마찬가지.
당시의 중국에서는 말이지. 그런데 모든 권능을 유지할 수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정세로 말미암아 꽤나 불안한 삶을 산거잖아.
뭐 개인적인 동정은 차치하더라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중국인들의 삶도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있었겠지만 뭐 황제나 일반인이나 비슷한 거겠지만
역사적인 위치에서 푸이를 돌아보는 것이 중국의 당시상황을 반추할 수도 있을거야.
푸이의 자서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지만 여러 뉴스기사를 보면
간혹 달라지는 사실들도 있어. 이를테면 영화에서는 푸이의 아이를 일본인이
죽이는 것으로 나오지만 푸이는 훗날 자신이 화로에 던져버렸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지. 언제부터인가 푸이는 황제라는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어보다가
달라지는 세상에서 황제로서의 권위에 집착하는 모습때문에 결국은 일본의
술수에 넘어가 만주국의 황제가 되어 결국은 꼭두각시역할 밖에 못하는거야.
자신의 아내, 그리고 후궁과의 갈등과 헤어짐.
전범으로 감옥에까지 함께 한 시종과도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하늘과 땅차이만큼이나 변화가 큰 푸이라는 사람을 이야기 하며 중국을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몰라. 푸이는 중국 그 자체였을테니 말이야.
당시 중국이란 나라는 서구인에게는 여전히 그리고 지금도 신비스러운 나라이니 말이야.
하지만 그 것을 보면서 나또한 푸이에게 연민을 갖게 되는건 아마도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크나큰 변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라는 거지.
뭐 당싱의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그랬잖아.
그러니 꼭 뭐 남일 같지만은 않다는 것일까? 동병상련?
그 때의 느낌을 어찌 알 수있을까 만은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보는 거잖아.
영화 괜찮다.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신해혁명;
1906년 서거한 광서제의 뒤를 이어 겨우 네 살에 황위에 오른 푸이는 즉위 3년 만에 중국을 뒤흔든 신해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황제 칭호와 사유 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당한다. 황후와 후궁을 맞이 하게 되고, 영국인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신사상에 매료된 그는 서양으로의 유학이라는 꿈을 갖는다. 황실 재산의 좀을 먹는 환관들을 축출하고 새로운 인물을 기용하는 등 나름대로 황궁 내의 개혁을 시도한다.
1924년 군벌 풍옥상의 쿠데타로 그는 결국 자금성에서 쫓겨나 청나라 황제의 칭호를 빼앗긴다. 만주에서의 영향력행사를 위한 일본인들의 획책에 넘어간 나머지는 그는 유학의 꿈을 접고 만주국의 황제로 우뚝 올라선다. 그러나, 만주국의 황제라는 칭호는 허울에 불과하였고 실권은 일본인들이 쥐고 있었고 푸이의 우매함에 격분한 황후는 아편 중독에 빠진다. 이차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자 푸이는 일본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만주국에 이미 들어온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중국으로 넘겨진다.
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의 첫 번째 부인 완룽
1964년 출간된 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자서전 원본 문장이 발견되어 새로 출간된 자서전에는 완룽이 톈진에서 다롄으로 가던 길에 그녀의 오빠가 동생을 동행하던 일본 군관에게 팔았다는 것과 사생아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굴욕감을 느낀 푸이가 일제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까봐 완룽이 아이를 낳자마자 화로에 집어 던졌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義-부의)는 1908년 불과 3세의 나이에 서태후에 의해 황제에 등극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교육을 받고 신처럼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3년 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조는 붕괴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변화는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 중화민국 정부는 푸이에게 황제에 대한 예우 조건으로 일정한 돈을 주면서 황실을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어 푸이는 계속 자금성 안에서는 황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 푸이의 삶은 그리 큰 변화가 없어 푸이는 밖의 정세를 거의 알지 못하고, 계속 중국의 황제인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 푸이는 중국의 국내외 정세에 관심을 갖고 각종 신문의 사설을 읽어가며 사정을 파악하게 됩니다. 푸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가정교사 죤스톤이었으며, 결혼 후에 죤스톤은 그의 보좌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1924년에 당시 군벌이었던 풍옥상의 부대가 자금성을 포위하고 푸이에게 자금성에서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는 명목상 평민으로 돌아가지만 풍옥상 부대의 감시 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죤스톤의 도움으로 천진의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본군에 의해 몰래 끌려나와 1932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집정(執政), 1934년 왕이 되었습니다. 푸이는 1935년과 1940년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일본에서 일본황제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만주국이 허울만 좋은 꼭둑각시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고립된 만주국, 일본군은 푸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비행기로 탈출을 꾀합니다. 하지만 황후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순간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에 억류되었으며,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하였습니다. 1950년 공산정권하의 중국에 송환, 중국 공산당들은 푸이를 전쟁포로로 체포하고 심문하였으며 푸이는 긴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1964년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全國委員)이 되었으며, 저서 《나의 전반생(前半生)》을 출판하였습니다. 바로《나의 전반생》이 감독 B.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67년 10월 16일 사망 후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八寶山)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 베이징 남서쪽 허베이성[河北省] 이현[易縣]에 있는 청나라 황릉(皇陵)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청나라 황제로 복권 됩니다. |
그 이름 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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