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서대문 로타리를 지날때면 이 길이 생각이 난다. 처음 이사왔을때 짐을 날라준 언기도 생각이 나고

어머니도 올라오셔서 도와주셨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이었지만 걱정이 되셨는지 올라오셨다.

하긴 뚝도시장에서 살 때 참 걱정을 많이 하셨었다. 경사가 높은 계단때문에 혹이라도 술에 취해

넘어지지 않을까 올라오실때마다 걱정을 하셨으니 비록 언덕에 위치해 있어도 마음이 놓이셨을 거다.

그렇게 짐을 나르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참을 내려와서 식사를 하고 다시 올라가는 그 길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던지, 그럼에도 어머니께서는 그 길을 오르셨다.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 은혜는

갚을 길이 없는 이유가 가늠하기 어려운 그 깊이때문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들때문에

노심초사하셨을까. 컸다고 이제 말대꾸까지 하는 아들이 섭섭하기도 하실탠데,

북아현동 애기하다가 어머니 생각이 날 줄이야.

 

계실때 조금이라도 해 드려야 겠다. 나의 한 분 뿐인 어머니. 장모님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한 분의

어머니가 계시지만 짱이에게도 한 분의 어머니가 계시다. 같이 잘 해드려야지.

나의 와이프, 솔메이트의 부모님이시니 말이다.

 

뜨란채 아파트가 들어서기전이었고 동부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정겨운 길이었는데 말이다. 아, 뜨란채는 막 들어서서 입주하는 상황이었네. 뜨란채 덕에 뒷 산길로 조성된 산책로를

운동하면서 잘 지냈다. 산중턱쯔음 위치해서 공기도 맑았다. 도심의 시골?

그런데 저 아래로는 꽤나 잘 사는 집들이 많았다. 집평수가 틀렸으니 말이다. 담은 또 얼마나 높던가.

같은 동네인데 천양지차일 수도 있구나 싶더라.

 

근 10년 가까이를 이 곳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회사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나름의 배움을 가질 수가 있었다. 기반을 닦았다고나 할 까.

 

북아현동 시절은 나에게 많은 결과물도 주었지만 과제물도 주었다. 하긴 어느 시절이나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북아현동 시절이 좋았던 건 무언가에 대한 책임감에 목말랐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지금 그 책임감을 가져서 의욕도 생기지만 한 편으로는 좀 무겁기도 하다.

 

뭐 인생이 그렇지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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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dy

아나키스트이기보단코스모폴리탄리영희선생이그러더라추구하는건국가가아니라고진실이라고말이야그울림을가슴깊이가지고있는데그게참참쉽진않아진실을위해넌무엇을할수가있냐진실이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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