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김씨 (淸道金氏) 청도김씨 홈으로 이동 | |
1> 시조 : 김지대[金之岱] |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
청도(淸道)는 경북 남쪽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이서소국의 땅이었으나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8세 손이다.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지대의 아들 선장(善莊)이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증손 한귀(漢貴)는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때 형조와 호조판서를 역임한 점(漸 :한귀의손자)과 세조때 단종복위를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때 임란공신에 책록된 몽룡(夢龍)과 희방(希邦)이 이름났고, 한말에 와서 청도김씨를 빛낸 인물인 정호(正浩)는 정밀한 지도 작성에 뜻을 두고 36여년간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청도김씨(淸道金氏)는 남한에 총 15,596가구, | |
3> 집성촌 | |
경북 영주시 가흥동 |
경남 밀양군 청도읍 두곡리, 인산리 |
경북 달성군 옥포면 교항동 |
경남 거창군 마리면 일원 |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동 |
자신의 본관과 유래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www.burimhong.pe.kr/name1/000korean%20name.htm
청도에는 소싸움도 있는데 ^^ 언제 보러 가야쥐. 언제가지?
KBS 역사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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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시 : 2003년 2월 8일 (토) 20:00-21:00 KBS 1TV
■ 담당 P D : 박현민 [781-3557] / 작가 : 정윤정
■ 더빙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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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140여년전. 국토의 깊고 얕은 곳까지 속속들이 알고자 했던 한 사내의 꿈!
그것은 한 장의 지도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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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는 모두 10여본.
그 중에서도 성신여대 소장본이 보물 850호로 지정돼 있다.
상태가 가장 양호할 뿐 아니라,
지도 일부에 색을 칠한 것이 조화를 이뤄서,
예술적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철종 12년인 1861년.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우리가 흔히 봐오던
한 장짜리 지도들과는 달리 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의 종이를 옆으로 길게 이어 붙여 놓았는데,
이같은 책이 스물 두권이 모여서 하나의 지도를 이루게 된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려놓은 전국지도인데,
만약 이것을 한 장으로 만들었다면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때문에 떼어 놓으면 분리도가 되지만 합하면 전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어느 정돌까?
진본과 똑같이 만든 영인본을 가지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바닥에 펼쳐진 지도책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한반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스물 두권의 지도책을 모두 붙이자
엄청난 크기의 전국 지도가 완성되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이 거대한 지도속에는 과연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맥이다.
산봉우리를 각각 떼어서 그리지 않고 줄기와 줄기를 이어서
마치 하나의 구조물처럼 표현하고 있다.
땅을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동일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국토관이 반영된 결과다.
산맥은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이며,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혈맥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백둑대간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인데,
백두산에서 시작된 국토의 큰 흐름이 남북을 관통해
마치 척추처럼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동여지도 속에 나타난 산봉우리는 모두 삼천여개.
전체를 하나로 표현하면서도 각가의 산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백두산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렸다.
'백두'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려는 듯 흰 봉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함경북도 명주군에 위치한 칠보산-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듯이 보인다.
금강산은 무수한 봉우리를 표현해, 일만이천봉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의도적으로 과장한 오대산.
서울의 삼각산 역시 세 개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 계룡산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것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속에 살아있는 산의 이미지를 지도속에 옮겨놓은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도로에 대한 표현이다.
모든 도로가 마치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듯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사실과 달리 도로를 왜곡해서 표현한 까닭은 물길과의 구별을 위해서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나타냄으로써
한가지 색깔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판지도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 것이다.
이전의 지도들과 대동여지도를 구별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은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두 스물 두 개가 기호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은 모든 지도에서 당연하게 사용되는 것들이지만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최초였다.
구체적인 활용의 예를 살펴보면,
영아를 표시하는 이 기호는 병영 등의 군영,
읍치는 오늘날의 시청이나 군청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군사기지를 나타내는 진보다 역참, 봉수 등 다양한 기호가 사용됐는데,
이전과 달리 글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지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140여년전에 만들어졌음에도 현대 지도 못지 않은 아이디어가 활용된 지도-
대동여지도는 크기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당대 최고의 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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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예나 지금이나 지도를 가장 많이 활용하게 되는 경우는 길을 찾을 때다.
고지도를 연구하는 이상태 선생과 함께 대동여지도의 도로망을 확인해보았다.
직선으로 표현된 도로들은 지도상에서는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길이거나 구불구불하게 돌아가는 길이라 훨씬 더 멀 수도 있다.
도로의 길이만 가지고는 실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이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다.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하나씩 찍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방점들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산악지역의 경우엔 주로 조밀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좁은 곳은 1.5센티미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넓은 곳은 얼마나 될까?
2.5센티미터- 주로 평야지대에서 확인된 수치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방점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두 지점간의 거리를 파악하는데만 머물지 않는다.
전국 어느 지점에서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일정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 네트워크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모든 도로망이 서울만을 중심으로 표기되던
이전 지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획기적인 변화다.
(현장음)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지도들에선 이전보다는 발전된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도는 옆에 따로 표를 만들어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자리에
두 지점간의 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이 표를 활용할 경우 거리는 알 수 있지만 여전히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동여지도의 도로 표기 방법이 왜 탁월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조선시대 물길은 도로 못지 않게 중요한 교통로였다.
때문에 대동여지도 상에도 물줄기들이 매우 상세히 표현돼 있는데,
한가지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물줄기가 어떤 지점에서는 두줄기로,
또 다른 곳에서는 한줄기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쌍선과 단선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마을 옆을 흐르고 있는 강은 낙동강의 본류다.
상류임에도 불구하고 배를 이용하지 않고선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강폭이 넓은 편이다.
그러나 이 지점을 기준으로 상류쪽은 강의 깊이가 급격히 얕아져서
돛단배는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공물을 실어나르던
조운선들의 종착지가 이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
결국 대동여지도에서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돛단배를 운행할 수 있는 구역인 동시에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하는 구간을 나타낸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양으로 가려면 육로를 이용해 문경새재를 넘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나루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유곡동.
도로로 변해버린 이곳은 조선시대 문경새재를 오가던 여행자들에게 말을 제공하거나
숙소를 알선하던 역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공덕비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유곡역의 위치도 정확하게 표시되어있다.
때문에 대동여지도만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물류 운반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공물을 싣고 동래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게된다.
물줄기가 단선으로 바뀌는 문경에 다다르면,
유곡역에서 교통편을 마련하고 육로를 따라 문경새재를 넘는다.
다시 충주에서 배를 갈아타면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곧장 한양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대동여지도에는 당시의 교통, 물류 정보가
완벽하게 담겨있어 매우 실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제작된 지도들과 비교할 때 대동여지도의 정확도는 어느 정도일까?
대동여지도를 현대 지도와 동일한 크기로 축소해서 그 외곽선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남해안과 서해안 지방에서는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북부지역으로 가면서 오차가 발생했는데
주로 산악지형에서 실제보다 조금 더 넓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터뷰)
인공위성에서 찍은 서울의 모습이다.
하천 매립등으로 일부 지형이 벼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은 140여년전에 만들어진 고지도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정확하면서도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이같은 특징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당시 조선의 교통 물류네트워크를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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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오가는 차량들로 붐비는 중림동 로터리.
몇해전 이곳에 김정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에 비석을 세운 까닭은 현재까지 김정호에 대해 밝혀진 유일한 단서가
이 일대에서 거주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인터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김정호 개인에 대해서는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 외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이 때문에 그를 둘러싼 과장된 소문들이 오랜 시간동안 진실처럼 전해져오기도 했다.
당대에 김정호에 대해 적은 유일한 기록은 이향견문록이라는 책이다.
이책에는 김저호가 만든 지도가 매우 훌륭했다는 간단한 내용만 담고 있다.
다만, 중인 이하 사람들의 업적만을 싣고 있는 이 책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터뷰)
김정호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일제 때 간행된 조서어독본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는 김정호가 나라에 정확한 지도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혼자서 백두산을 여덟 차례나 오르고 전국을 수없이 답사하며 조사한 결과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나라를 위해 쓰고자 대원군에게 가져갔지만
지도가 너무 상세해서 국가의 기밀이 다른 나라로 새나갈 것을 염려한
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혔고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호가 평생을 바쳐서 만든 대동여지도 목판은 모두 압수돼 불태워졌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90년대 초반까지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난 90년대 초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여러 매의 목판이 발견되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동여지도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목판을 두고 정밀조사가 실시되었다.
수장고에서 발견된 목판은 모두 열 한 매.
하나의 목판에는 앞과 뒤 각각 두 면씩 총 네 개의 면이 새겨져 있다.
확인 결과 이 목판은 대동여지도 인쇄본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오상학 학예연구사 인터뷰)
목판의 존재는 대동여지도가 압수, 소각된 적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김정호의 옥사설 또한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단서다.
이향견문록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책에서는 김정호의 죽음을 '몰'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약 옥사했다면 '물고'라고 적어야 옳다.
또한 대원군 집정기에 쓴 이 기록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대동여지도를 한 부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김정호가 처벌을 받았다면 결코 적지 않았을 내용이다.
결국 조선어독본의 내용은 대원군을 우매한 지배자로 묘사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했던 일본의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정호의 작품은 대동여지도 하나만이 아니다.
제작시기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선전도는
역시 목판으로 만들어진 서울지도인데,
현존하는 가장 큰 서울지도일 뿐 아니라 서울을 담은 목판지도들 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대동여지도 못지 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야할 업적이 지리지의 편찬이다.
지리지는 국토의 정보를 집대성해 놓은 일종의 지리 백과사전인데
김정호는 일생동안 여도비지, 동여도지, 대동지지 등 세 종류의 지리지를 만들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살아생전 김정호는 이름을 날리거나 명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지리학적 성과들은
국토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과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인물 김정호를 되살아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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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우리나라 전통 지리와 천문에 관한 유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회장-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들도 대거 선보였는데 대동여지도 이전의 지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여지전도- 대동여지도보다 40여년 앞섰을 뿐인데도
지도의 정확성은 매우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글씨는 지도라기 보다 지리지를 연상시킨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곤여전도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 지도 속에서도 한반도의 모습은 심하게 왜곡돼있다.
그렇다면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현대 지도 제작과정을 통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측량을 위해 먼저 GPS 장비를 설치했다.
인공위성을 통해서 이 지점의 경위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현재 전국에는 측량 기준점들이 정해져있는데.
이것은 측정할 때마다 생길 수 있는 오차를 막기 위한 조치다.
(인터뷰)
각 지점에서 산출된 데이터를 조합하면 지점과 지점간의 거리,
경위도상에서의 정확한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지도 제작의 상당부분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데,
지명이나 경계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지도 제작에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을 활용함으로써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인터뷰)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실측지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토지측량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
실측자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서를 찾던 중 김정호의 지리지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쓴 첫 번째 지리지인 여도비지는 도별로 지역을 나눠놓은
일종의 군현 지리지인데 친구였던 최정환과 함께 저술한 책이다.
이 여도비지 속에 매 지역마다 그 지방의 경위도를 기록한 표가 들어있다.
여기에 적혀있는 경위도는 북극고도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경위도 기준이 있었고,
실제 지도 제작에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김정호가 직접 측정했던 것일까?
(인터뷰)
김정호의 또다른 지리지 속에서도 이와 동일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정조 15년. 8도에 명을 내려 북극고도와 편동서도를 측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때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측량이나 측정을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한 결과 세종 때 이미 측량을 시작했고
전국의 주요도로에 30리마다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거리 측정을 위해 기리고차라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는 스스로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반자동 거리측정기였다.
이 놀라운 거리 측정기에 대해서는
호대용이 쓴 담헌서 속에 그 작동원리를 짐작해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기록에 다라 복원해보면 기리고차의 겉모습은 마차와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상당히 복잡한 형태다.
수레가 반리를 가면 종이 한번 울리고, 1리를 갔을 대는 여러 번 울리도록 했다.
사람은 수레위에 앉아 소리를 듣고 기록하기만 하면 됐는데,
북소리는 5리에서 한번, 10리에서는 여러 번이 울렸다고 한다.
(인터뷰)
조선시대 궁궐의 모습을 그려놓은 동궐도.
당시 궁궐안 곳곳에 설치돼 있던 천문 관측기구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경위도 측정의 전통 또한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겨위도를 측정한 가장 큰 목적은
날씨를 연구해서 농사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측정된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지 활용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이미 측정해 놓은 정확한 데이터가 있다면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기 위해서
매번 새로이 측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김정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동지지 속에 자신이 참고한 도서명을 밝혀놓았는데,
모두 예순 다섯 종으로 고금의 지리학 서적들이 망라돼있다.
이것은 김정호가 전통 지리학의 성과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서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던 김정호.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과 64년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됐는데,
이 두 개의 판본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이 경우는 산맥을 새로 삽입했다
지명이 새로 추가된 경우도 있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도 십 여 군데가 넘는데
대동여지도의 수정이 목판작업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김정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김정호가 눈을 감은 그 순간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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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인천에 위치한 화도진 공원.
1882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맺은 강화조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됐다
강화조약이라고는 하지만 무력을 앞세운 열강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 측 대표로 참석한 이는 전권대사 신헌
대원군 집정기의 대표적 무관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인물이다.
신헌은 자신의 문집에서,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로서는 국가 1급 기밀 서류에 해당하는
비변사나 규장각의 지도들도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호가 당대 최고의 군사 지도들을 볼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당시의 군사지도들은 어떤 특징을 자지고 있을까?
18세기에 만들어진 이 지도는
당시 청나라와 마주하고 있던 국경 지역의 지형을 그려놓은 관방지도다.
이 지역의 지형, 성곽, 도로 등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돼 있다.
정방 산성도.
이 역시 이 지역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군사지도다.
성벽과 진보 등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우물과 창고까지도 세밀하게 표현해 전쟁시에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특정 지역에 편중됨이 없이
전국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전국의 봉수 체계를 파악해야 한다면
지도상에 표시된 봉수 기호들을 모두 연결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한 장의 훌륭한 봉수도가 완성되는 셈인데,
역참이나 창고, 진보 등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 지도라도 개별 지역에 대한 정확성 또한 떨어지지 않는다.
서울의 외곽 방어를 담당하는 강화도를 살펴보면,
먼저 성벽의 위치가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강화도 전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봉수나 창고 등 각종 군사 시설들에 대한 파악도 손쉽다.
이것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군사지도로서 활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의 군자시도로서의 활용가치는 이미 입증된 바 있다.
1925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정호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청일전쟁 당시 양국 군대가 모두 대동여지도를 작전 지도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지리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도
대동여지도를 사용해서 군사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일본군은 우리나라에 과한 상세한 지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여지도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지도도 그 중 하나인데 서해안과 한강 주변의 해로를 표시한 것이다.
서울까지, 배를 이용해 들어 올 경우 대비해
한강 전체의 수심까지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근대 측량기법으로 만든 정밀한 지도를 가졌음에도
대동여지도를 활용한 것은 이 지도가 현대 지도 못지 않게
정확하고 편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누가 보아도, 그 어디에서 보아도
똑같은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의도했던 김정호의 생각 속엔,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의 공유라는 현대적인 사고 방식이 녹아있는 것이다.
(강석화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만든 시기는
이양선과 외국함대들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활용 가능성을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저술이었던 대동지지 속에
유독 군사항목이 강조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전고라는 항목인데,
이전의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항목을 통해
국방을 중시했던 김정호의 지리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김정호가 지도를 만든 궁극적인 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대동여지도의 첫머리에 실린 지도유설이다.
그의 뜻은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F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사용하고자 함이었다.
대동여지도는 이전까지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무모하게까지 여겨지는 한 사내의 꿈에서 비롯됐다.
국토 정보를 지도상의 네트워크로 구축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희망했던 그 꿈은
지금 우리 앞에 6.6m 초대형 지도로 남겨졌다.
출처 http://www.kbs.co.kr/history/vod.shtml
보다 더 많은 청도 김씨에 대하여, http://my.dreamwiz.com/dbaseman/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姓)의 출자지(出自地). |
관적(貫籍) ·본적(本籍) ·성관(姓貫) ·본(本) ·관향(貫鄕) ·적관(籍貫)이라고도 한다. 보통 성(姓)과 병칭되어 개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본관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본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인 편차가 있으나 995년(성종 14)경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시 초기의 본관제는 지역사회 내부의 자체적인 질서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다. 즉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민(對民) 지배방식의 일환으로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 전기에 본관을 벗어나는 거주지 이동은 입사(入仕) ·입산(入山) 등을 통한 신분이동이나, 방수(防戍) ·행상(行商) 등 역(役)의 수행이나 직업상의 필요, 또는 사민(徙民) 유배 등 정책적인 경우를 비롯하여 기타 공식적으로 허용받은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유망민으로 간주되어 본관 지역으로 되돌려졌다. 본관은 양인(良人) 이상에게만 주어졌으며, 노비와 양수척(楊水尺) 등의 천인(賤人)들은 본관제 질서에서 배제되어 국가에 대한 국역(國役)의 부담도 지지 않았다.
이와 함께 고려 정부는 지역사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성(土姓) 및 직역(職役)을 분정(分定)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부세(賦稅) 징수 등의 행정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토성은 신라 말, 고려 초 변동기의 자위조직의 기초집단인 성(城)을 중심으로 분정되었는데, 이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읍(封邑)’과 같은 공동체 관계로 파악한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족보에서 각 성관의 시조들이 해당 지역에 식읍(食邑) 또는 채읍(采邑)을 사봉(賜封)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고려 후기 이래 향촌사회에서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고, 유망이 극심하게 일어나면서 본관과 거주지의 분리현상이 확대되어갔다. 이제는 본관 지역을 이탈한 농민들을 원래의 본관으로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현재의 거주지에 적(籍)을 붙여서 수취를 도모하는 방편이 보다 편리해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되고, 본관이 점차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성(同姓)은 처음에는 동본(同本)이었다는 관념에서 성관(姓貫)의 통합이 진행되었다. 즉 군소 성관들이 동성의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改貫)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본관은 이제 성관으로서 ‘동성동본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었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특히 이러한 관념이 강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식 아래에서 조선 후기에는 족보 편찬이 활발해졌다.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 본관의 사회적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지하는 등 법률적인 면에서 그 기능이 남아 있고, 특정 성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분관념의 상징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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